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4)
4화 국립중앙박물관 (1)
서걱!
진혁이 과도로 손가락 끝을 살짝 그었다.
금세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루 전이었다면 이건 ‘몸속에 흐르는 붉은색 액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력이 깃들어 있는 피는 다양한 주술과 마법을 현실화하는 매개체였으니까.
‘공간을 왜곡하는 결계는 꽤 오랜만에 해 보네.’
탑 내에서 쓸 수 있는 정식 결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발동하는 게 그리 쉬운 편은 아니었다.
진혁이 한지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스윽!
dētórquĕo.
피로 쓴 라틴어가 은은한 빛을 냈다.
‘좋아. 여긴 됐고.’
다음은 동쪽 입구였다.
진혁은 국립 중앙 박물관의 4개 방위에 결계를 만들기 위한 시동어를 작성했다.
마지막 북쪽 입구까지 끝나자.
우우우웅!
투명한 막이 박물관 전체를 뒤덮었다.
[결계 ‘미숙한 차원 단절’이 발동됩니다!] [시야가 왜곡됩니다.] [소음이 70%만큼 감소합니다.]재료가 더 좋았으면 ‘미숙한’이라는 형용사를 뺄 수 있었을 텐데. 마트에서 구입한 재료와 마력의 농도가 옅은 피로는 이게 한계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뭐, 나쁘진 않아.’
시야를 왜곡한 뒤, 소음까지 줄여 놨으니.
최소한 경찰들이 오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과 발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생각나네.’
처음 박물관에 왔을 땐 결계도 치지 않아서 난리가 났었다.
경찰차 수십 대에 헬기까지 뜨고 삼주 동안 현상금 이벤트까지 걸렸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때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글쎄.
과연 실제로 어떨지는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이벤트 지역에 입장했습니다.]내부로 들어오자마자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역시…….’
예상은 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사람들도 바뀔 거라고.
하지만.
예상과 현실의 격차는 생각했던 그 이상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경비원이 보였다.
흘린 피를 보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네.’
혼자가 아니었다.
시체에 있는 상처는 최소한 3종류 이상의 흉기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건.
중근세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유물일 거다.
정확히는 이곳에 침입한 모든 사람들이 노리는 거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 간행한 지도다.
물론, 침입자들이 대한민국 8도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건 아니다.
마력이 주입된 고지도는 시련의 탑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에, 모두가 이 지도를 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어디에 무슨 미궁과 유적이 있고.
어떤 아이템과 몬스터들이 있는지 낱낱이 적혀 있다면, 그 누가 탐내지 않을까?
비록 10층까지의 정보밖에 나와 있지 않았지만, 눈에 불을 켜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래.
다들 그것만을 탐낼 거다.
‘진짜로 중요한 성유물들은 진흙 속에 감춰져 있다는 걸 모를 테니.’
***
퍽! 퍼억!
우드득!
“끄아아악!”
“이 개놈의 호로자식들!”
“놔! 이건 내 거다. 내 거라고!”
비명과 고함이 뒤섞였다.
깨진 진열장 밖으로, 오랜 세월을 영위한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그때.
“동작 그만. 동작 그마아안!”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30대 초반의, 스포츠머리를 한 근육질의 남자였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놈은 나한테 다 죽는다.”
교과서적인 협박이 이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랄하고 있네.”
“여기 그딴 말에 쫄 놈 하나도 없어.”
“너야말로 발가락 하나라도 꼼지락거렸다간 내가 골통을 부숴 주지.”
주위 사람들이 각자 흉기를 매만졌다.
성유물을 위해서라면 살인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듯이.
“……나. 용두파 오형석이다.”
한국에서 조직폭력배가 거의 사라졌다지만, 용두파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푸하하! 조폭이란다 조폭. 어이구 무서워라. 그랬어요?”
“조폭이면 배때지에 칼 안 들어간다냐?”
비아냥거리는 반응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먹히는군.”
오형석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그극!
양팔에 균열이 일어났다.
신체를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고유 능력.
‘암석화’였다.
그때서야 이죽이던 이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버, 벌써 고유 능력을 손에 넣었다고?”
“젠장, 저건 위험한데…….”
다들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특별한 기연을 통해야만 개화할 수 있는 게 바로 고유 능력이다.
당연히 날붙이 따위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터.
분위기가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지도는 내 꺼다.”
오형석이 주위를 훑어봤다.
마치 소유권을 못 박는 것처럼.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허허. 그 말엔 동의하긴 힘들구만.”
뒤쪽에 있던 늙수그레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오형석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어이, 영감. 방금 못 봤어?”
“영감이 아니라 민정우라고 하네. 정과 우애로 살아가라 뭐, 이런 뜻이지.”
“누가 통성명이나 하재? 분위기 파악하고 빠져 있어. 그 말라비틀어진 목, 닭 모가지 비틀듯 꺾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이거, 젊은 친구가 입이 참 험해. 혀에 칼이 달렸어. 쯧쯧.”
민정우가 씁쓸한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어진 말에는 씁쓸함 대신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으니까.
“한데, 자네가 내 목을 꺾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자네를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는 게 빠를까?”
화르륵!
민정우의 손바닥 위로 주먹만 한 불덩이가 이글거렸다.
불의 원소를 다루는 고유능력.
“마……법?”
그렇다. 바로 마법이다.
오형석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피할 새도 없이.
민정우의 손을 떠난 불덩이가 순식간에 오형석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콰콰콰콰콰!
“끄아아아악!”
오형석이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사,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두 팔이 암석으로 뒤덮였다고 한들. 나머지 부분은 연약한 살과 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암석화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끄으으으…….”
비명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 했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검게 탄 숯덩이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야. 화염계열 마법이 진짜 화끈하긴 화끈하네. 역시 손을 잡길 잘했어.”
민정우 옆에 있던 단발머리 여자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유리 양. 그럼, 뒤를 부탁하지.”
“걱정하지 마. 방해하는 놈 있으면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이유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검은색 석상을 바닥에 놓았다.
쿠쿠쿠쿵!
석상이 점점 거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칼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형상.
이집트 특별 전시관에 있던 ‘아누비스의 화신’이었다.
“크르르…….”
아누비스의 화신이 긴 창을 앞으로 뻗었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할게. 알지? 머리통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게 할 거야.”
이유리가 생긋 웃었다.
2m가 훌쩍 넘는 몬스터의 등장에,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조차 못 했다.
게다가 각성자가 하나가 아닌 둘이다.
마법사와 소환사.
까다로운 놈들로만.
“제기럴.”
“무슨 놈의 고인물들이 이렇게 많아. 죄다 각성했네.”
“지도고 나발이고 포기할 테니. 다 가져가라. 가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움직인다는 건 곧 죽여 달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런데.
저벅.
누군가 보란 듯이, 굳어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카득. 카드득.
유리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거기. 겁대가리 상실한 오빠.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
이유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크르르!”
땅을 딛고 있는 자칼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주인이 명령하면 즉시 뛰쳐나갈 수 있도록.
그러나 남자는 이유리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으이그. 완전히 개판을 만들어 놨구만. 이 사람들은 고 미술품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나?”
진혁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림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먼지와 유리조각을 툭툭 털어 냈다.
“그래도 찢어지진 않아서 다행이네.”
손상이 심했다면 사용할 수 없었을 거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움직이면…… 죽인다는 말. 안 들리냐고!”
이유리가 고함을 지른 건 바로 그때였다.
동시에.
부우우웅!
몸을 뒤로 젖힌 아누비스의 화신이 창을 집어 던졌다.
투창(投槍)이다.
바람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포물선이 아닌 직선 궤도.
그렇기에 체감 속도는 몇 배나 더 빠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창이 목표물을 꿰뚫기 바로 직전.
콰아앙!
진혁이 주먹으로 날아오는 창의 측면을 쳐냈다.
창이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다가 바닥에 꽂혔다.
“미친!”
“바, 방금 저 사람 뭐 한 거냐?”
“창을 쳐냈어. 아니, 저게 말이 돼? 피하는 것도 아니고?”
“강철로 만든 쇳덩이를 던진 건데……. 주먹이 다 으스러져야 정상 아니냐?”
구경하던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내 스탯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저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맹그로브의 나무 열매를 먹은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고작해야 3스탯을 올린 게 전부였다.
반면 이쪽은 무려 12개의 스탯을 분배해 뒀다.
“어떻게 하냐? 네 강아지, 하나뿐인 무기가 사라져 버렸네?”
진혁이 이유리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그래……? 내가 갖고 있는 석상이 하나였다고?”
이유리가 손가방에서 석상 4개를 더 꺼냈다.
이 녀석. 대체 이집트 전시관에서 얼마나 훔쳐 온 거냐?
남의 나라에서 잠시 전시하라고 빌려준 유물들을 제 것인 마냥 쓰고 있네.
“너, 파라오한테 혼난다. 그러다가.”
“이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나 할 때야?”
농담 아닌데.
진짜로 이집트 신화 쪽 유물 막 쓰고 그러면 나중에 저주 비슷한 거 받는다.
푸는 데 지독하게 고생해야 되는, 그런 종류의.
[성유물 ‘아누비스의 화신(레플리카)’이 일어납니다!]쿠쿠쿠쿠쿠!
“크르르…….”
“크아아!”
“크릉!”
“컹! 컹! 컹! 컹!”
‘아누비스의 화신’ 4마리가 더 나타났다.
칼과 방패, 창, 헬버드와 철퇴 등으로 무장한 채 굵은 이빨을 드러냈다.
“어때? 이래도 웃을 수 있겠어?”
이유리가 좌우로 도열한 소환수들을 기세등등하게 바라봤다.
“제법이야. 솔직히 약간 놀랐어.”
적은 마력으로도 다섯 마리를 동시에 유지시킬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저 그런 수준은 아니다.
아까 전에 마법을 다루는 노인도 그렇고.
의외로 병아리 티를 벗어난 고인물들이 많구나.
“……약간 놀랐다고?”
이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응. 정확히는 ‘약간’과 ‘아주 약간’ 사이 정도?”
“허세부리지 마. 도망칠 궁리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그래 보여?”
하긴, 말만 해서야 그렇게 보이겠지.
그렇다면.
보여주면 된다.
허세인지 아닌지.
진혁이 종이를 펼쳤다.
[성유물 ‘소나무와 호랑이(레플리카)’에 마력이 주입됩니다.] [산(山)의 지배자가 현현합니다!]시대: 조선
신원: 미상
알려진 거라곤, 그저 한 시대의 가장 두려웠던 존재를 그려 넣었다는 것뿐.
“크오오오오오!”
종이에서 나타난 호랑이가 거칠게 포효했다.
대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쿠웅!
3m에 이르는 체구와 꿈틀거리는 근육.
샛노랗게 빛나는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유리가 입을 뻐끔거렸다.
단순히 실체화시키는 게 아니라 원류(源流)를 현현(顯顯)시킬 수 있다니.
지금까지 성유물에 관한 다양한 사용법이 공개되었지만, 이런 식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건 들어본 적 없었다.
게다가 이 마력.
저릿저릿!
따갑게 피부를 찌를 정도로 농도가 짙었다.
그저 거대화시켰을 뿐인 석상과는 다르다.
저 그림에는 과거 태산을 지배했던 영물의 힘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숫자는 5대 1이지만.
‘승산이…… 없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사막의 자칼 따위가 산군(山君)에게 덤비면 안 되지.”
진혁이 호랑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