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588)
588화. 최악의 아포칼립스 (3)
벌써 1시간 가까이 이어진 혈투.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다.
유혈이 낭자한 지면은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는지를 보여주었다.
“키에에…. 컥. 쿨럭!”
카트란의 입에서 검은 핏물이 울컥 흘러내렸다.
방금 전 공격으로 인해 왼팔을 잃었다.
잘린 단면을 따라 참기 힘든 격통이 뇌수를 태웠다.
“괴물 같은…. 그 정도 상처를 입고도 표정 하나 안 변하다니. 네년.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이냐?”
카트란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그곳엔 마찬가지로 전신이 핏물에 찌든 금발의 성녀가 서 있었다.
정확히는 신성한 힘을 잃고 타락해버린 타락 성녀였지만.
“흐응. 아리따운 숙녀에게 괴물이라니 입이 너무 거치네. 겉은 이래 보여도 속은 여리다고. 봐 봐. 아주 선홍빛으로 빨갛잖아?”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훤히 드러난 중상.
말 그대로 속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테레사는 느긋하게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새살이 돋고 부러진 갈비뼈가 붙는다.
언제 당했냐고 말하는 것처럼 상처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자, 이번엔 팔 하나보다는 더 큰 걸 가져갈 거야. 죽기 전까지 날 조금 더 짜릿하게 해줘야 돼?”
툭.
테레사가 핏빛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 검을 어깨에 걸쳤다.
검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성검은 더 이상 성검이라 부를 수조차 없어 보였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네년의 그 역겨운 얼굴만은 베어버리고 말겠다.”
카트란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하나 남은 팔로 거대한 낫을 치켜들었다.
쿠쿠쿠쿠쿠!
[고문실체화 ‘라스트 기요틴’이 발동됩니다!]낫이 예리하게 빛을 내뿜었다.
동시에.
“이야. 역시 강한 놈은 활어처럼 팔팔해서 좋다니까? 아무리 썰어도 계속해서 날뛰니까. 으으음, 고민되네. 아깝지만 이번엔 죽여야겠지? 아니 참을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즐기고 싶긴 한데…. 어떤 게 정답이려나.”
자문자답을 반복하던 테레사가 이내 마음을 굳혔다.
“결정했어. 어차피 벨 놈이야 또 있겠지 뭐.”
테레사가 검을 횡으로 그을 준비를 끝마쳤다.
검은 마력이 한 곳을 향해 응축되었다.
광기에 가득 찬 미소와 정말로 즐기는 듯한 미소.
그 모든 걸 마주하는 카트란은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오싹하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몇 도가량 뒤로 젖혔다.
니알라토텝을 마주할 때보다 더한 거부감이 본능을 자극했다.
그러나 물러설 순 없다.
으득!
이를 악 물고 기요틴의 발동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는다.
“죽어라!”
[기요틴 ‘해방’ – ‘신체 절단’이 발동됩니다!]위에서….
아래로.
중력의 힘을 머금은 일격이 내리꽂혔다.
이에 맞서 테레사의 검 역시 극한까지 모았던 마력을 한꺼번에 방출시켰다.
[테레사가 검은발도 ‘신성훼손’을 사용합니다!]종과 횡의 선이 일점에서 마주쳤다.
힘과 속도가 실린 최후의 일격이 핏빛 궤적으로 이어졌다.
허나, 날카로운 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는 울려 퍼지진 않았다.
대신 살을 파고드는 섬뜩한 파육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서걱!
소리 없는 아우성.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카트란은 아직까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신 머리를 잃은 몸만이 그 자리에서 몇 걸음인가 움직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이 정도 상처를 입은 이상 살아남을 순 없었다.
푸슈슈슉!
폭포수처럼 뿜어지는 피 분수와 함께 한 세력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쓰러졌다.
[은둔자 마을의 거대 세력 ‘고문술사’들이 전의를 상실합니다.]이걸로 세 개의 다리 중 하나가 무너졌다.
“아깝지만 1시간 정도가 한계인가. 어쩔 수 없지. 이제 슬슬 순딩이한테 몸을 넘겨줘야겠네.”
전력을 발휘하고도 1시간.
확실히 처음에 비해 인격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테레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대로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간 주 인격이 바뀌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럼 다음에 또 봐. 멋진 오빠. 기왕이면 다음엔 그 능글맞게 잘생긴 오빠도 함께 데려오고. 두 명 다 내가 찍어둔 남자니까.”
[‘타락’이 해제됩니다.]짧은 메시지와 함께 테레사의 몸이 휘청였다.
곧이어 활기찼던 목소리와 반대로 힘없고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싸움은… 끝난 건가요?”
“그래. 또 다른 인격이 와서 마무리 지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안개가 낀 것처럼 드문드문… 그리고 흐릿하게 이어져 있어요.”
“그렇겠지. 워낙에 강한 힘을 사용했으니까.”
등가교환.
분에 넘치는 힘엔 그에 걸맞은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가능하면 인격을 교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어쩌면 최악의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르니까요.”
자책하던 테레사가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그보다 어서 진혁 씨에게 가요. 저희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서 싸우고 있을 텐데, 빨리 가서 도와야 해요.”
아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움직이려 한다.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 거머리 같은 놈이 그렇게까지 소중한 건가? 대체 어떤 점이 그리 마음에 드는 거지?”
아무리 바보라도 테레사가 진혁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고.
지옥 같은 층계에 가자고 해도 언제나 군말 없이 따라오는 게 테레사였으니까.
심지어 자기보다 진혁의 안위를 더욱더 걱정하는 모습엔 단순히 성녀의 이타심 그 이상의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
속마음을 들킨 테레사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름대로 조심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정곡을 찔러버린 탓이다.
테레사가 조심스레 그 질문을 곱씹었다.
좋아하는 이유라….
“언제나 함께해줬거든요.”
처음 타락한 자의 회랑에서부터 은둔자의 마을에 온 지금까지.
그리고 자신이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등지고 다른 세력과 함께했을 때나. 유럽에서 목숨이 위험했을 때에도.
진혁은 언제나 자신을 이해해주고 또 구해주러 왔다.
그렇게 동고동락을 함께 해 왔는데 어찌 좋아하는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시밭길을 걸으려 하는군. 놈에겐 엘리스가 있다. 그녀의 감정을 모르진 않을 테지?”
“물론, 알고 있어요.”
엘리스 역시 진혁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쯤은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순 없어요.”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윈 필요 없다.
아무리 강력한 라이벌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정을 속이는 것만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회사도 앞으로 다사다난하겠군. 어차피 말해봐야 마음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 정 그렇다면 나는 당신 편에서 응원해주도록 하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유성 씨….”
“너무 의미 부여는 하지 마라. 2인자라는 포지션이 공감된 것뿐이니까.”
틱하고 내뱉은 천유성이 품에서 물 한 병을 던졌다.
“감사해요.”
테레사가 천유성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엘프의 샘물’은 약간 마시는 것만으로도 체력과 활기가 보충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약간의 휴식 후에는 진혁과 나머지 멤버들을 지원해야 할 터.
두 사람이 마력을 갈무리하며 또 다른 싸움을 대비했다.
* * *
같은 시각.
미로의 끝부분에 도착한 진혁은 정령수들을 소환해 경계를 서게 한 뒤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망 잘 보고 있어. 누가 오면 바로 말하고.”
“응 주인. 걱정하지 마라.”
“우리만 꽉 믿고 있으면 된다.”
운디네와 노움이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임시 거점이긴 하지만, 흙으로 만든 집과 그 주위를 둘러싼 해자는 제법 훌륭한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정령수들 역시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역시나 평소에 교육을 잘 시켜둔 보람이 있다.
그 순간.
“에잇취! 애치!”
엘리스가 재채기를 내뱉었다.
“왜 그래? 감기라도 걸렸어?”
“아니, 갑자기 기분 나쁜 게 짐의 목구멍을 간질여서 말이다. 보통 이럴 땐 바보 성녀나 바보 여우나 기타 바보들이 심기를 거스를 때인데….”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마력이나 잘 관리해. 아포칼립스가 완전히 시작되기 전에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거 기억하지?”
“시답잖다니! 짐의 감은 정확하단 말이다!”
엘리스가 화를 내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반면. 같은 말을 들은 페시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저… 강진혁 플레이어님?”
“예?”
“제가 너무 열심히 길을 찾느라 지쳐 환청이라도 들은 것 같은데, 혹시 방금 ‘아포칼립스’가 시작된다고 말씀하신 건 아니겠죠?”
“아… 그거요?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아니겠죠! 암요! 하하하.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아무리 강진혁 플레이어님이라도 탑 최악의 재앙 중 하나인 아포칼립스 속으로 절 끌어들였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페시스가 광인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흐음.
맞다고 하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네.
어찌 저 꽃사슴 같은 눈망울에 대고 사실을 말한단 말인가?
“맞아. 그거. 아포칼립스 아주 제대로 일어나려고 하고 있고. 아까 계약자 말 들어보면 아슬아슬하든가 늦을 것 같아. 개인적인 의견으론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어.”
엘리스가 단칼에 현실을 못박았다.
가만 보면 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차 없이 짓밟는단 말이지.
섬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거참.
엘리스의 말에 페시스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팔등을 눈가에 대고 어깨를 들썩이는 건 덤이다.
그런 페시스를 향해 운디네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주인. 저 사람 운다.”
“내버려 둬. 길잡이도 울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야.”
이미 한배를 탔으니 도망갈 구멍은 없다.
다 같이 침몰하거나 앞으로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결국, 페시스는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길을 안내하기로 했다.
테레사와 천유성 쪽에서 느껴지던 마력의 파장도 안정되었고. 오룬과 안드리아 쪽 역시 눈에 띄게 마력이 일정해졌다.
다들 한고비를 넘기고 숨 고르는 타이밍에 돌입한 것이다.
‘이제 절반 정도는 온 건가.’
진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 헤쳐 왔다. 엘리스야 저렇게 말했다지만, 아직 아포칼립스를 저지하거나 반감시킬 만한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울려퍼지기 전까진.
“……!”
소리와 함께 진혁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카앙!
정확히 미간을 노린 탄환이 반으로 잘렸다.
아주 약간이라도 반응이 느렸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결계를 무력화시키고 공격을 했다고?’
어이가 없네.
만약을 대비해 펼쳐둔 3중 결계가 고작 탄환 하나에 모조리 파훼될 줄이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온 신경이 비명을 지르며 최고조의 경고음을 보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아포칼립스의 조건이 모두 갖춰졌습니다!] [‘천재’의 아포칼립스가 시작됩니다!]붉게 물든 상태창과 함께 녹색 운무가 한 곳으로 빨려들어갔다.
“주인! 괜찮아?”
“계약자! 이 마력은….”
“으아아아! 어쩐지 촉이 영 쎄하다 했더니. 그냥 아포칼립스도 아니고 탑 몇 계층을 날려먹을 수 있는 천재란 말입니까?”
여기저기서 다양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자기 의견을 열심히 어필하는 게 진취적이긴 한데, 지금은 말 한 마디도 아껴야 할 시기다.
저벅.
총성이 들린 곳에서 발걸음이 이어졌다.
시체 썩는 듯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검은색 두건과 양손에 쥔 서로 다른 색의 리볼버.
틀림없다.
눈앞에 있는 자가 과거의 ‘탑건(Top Gun)’.
‘사멸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