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674
674화. 정령왕의 선택
끝이 없는 심연.
의식마저 흐릿해져버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오롯이 수많은 정령들을 위해 살아왔고 또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많은 희생과 노력이 요구되었지만, 그 결정에 단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 믿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수많은 정령들이 평화로운 내일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
정령왕으로서의 긍지와 의무를 행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하지만.
오랜 세월 이어져온 평화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산산이 박살 나 버렸다.
니알라토텝과 귀환자라 불리는 이들.
그들이 정령들의 영역에 침범하면서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원통하다.
너무나 슬프고 비참하다.
처절한 무력감.
아무리 발버둥 쳐도 뒤엎을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전신을 짓눌렀다.
그렇게 악몽 속에서 보낸 시간 속.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저 놈들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르는 인형으로 영원히 살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우우웅!
따스한 빛이 어둠에 물든 두 눈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
수사슴의 몸에 퍼져나가던 검붉은 핏줄이 빠르게 사라졌다.
이성이 돌아오자 비로소 모든 게 예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했네요.”
진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라이볼트의 두 번째 공격을 허용해버렸을 것이다.
“그런 건가. 그대가 나를….”
라이볼트의 눈이 진혁을 향했다.
따스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도 잠시 흉흉한 마력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라이볼트와 진혁을 제거하기 위해 클레망스가 움직였다.
[고유능력 ‘고대 결계’가 발동됩니다!]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전갈자리’가 개방됩니다!]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짜내 펼친 전갈의 가호.
진혁의 머리 위에 나타난 거대한 검은색 전갈이 클레망스의 공격을 등으로 받아냈다.
콰콰콰콰쾅!
천지가 요동치는 충격이 가해졌다.
결계를 펼쳤음에도 전신이 태산에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일단…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혁이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1차 목표를 달성했으니 재정비를 한 뒤, 저 식물 마녀를 처리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이 자리에서 둘 다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도 회복이 필요해 보이지만 나 역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야.”
라이볼트가 그 자리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자기가 간신히 살아났다고 나보고 희생하라고 하는 건가?
정령계의 미래니 뭐니 하는 이유를 붙이면서?
그랬다가는….
당장 저 머리 위에 붙은 녹용을 뜯어다가 비싼 값에 팔아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모두 저 녀석한테서 도망가긴 힘들 터.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싸울 수 있게 내가 도와주겠네.”
진혁이 손에 들어간 힘을 뺐다.
흐음.
괜한 의심을 한 건가.
세상 모두가 까만 양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수사슴의 입에서 새하얀 결정 한 개가 나왔다.
이건?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모를 리가 없겠지.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모든 정령왕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심장. 자신의 존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 나왔는데?
[빛의 정령왕 라이볼트가 ‘정령왕의 징표’를 하사합니다.] [모든 정령들은 이 징표를 가진 이를 신뢰하고 따를 것이며, 5대 원소를 관장하는 정령왕들 역시 라이볼트의 의지와 신념을 기억할 것입니다.]그리고 이게 나왔다는 건….
진혁의 표정이 한층 숙연해졌다.
라이볼트가 지금부터 무얼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둠이 몰려오고 있네. 질서와 균형을 사랑하는 우리 종족도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순 없을 테지.”
그러니.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우리 일족을 구원해주게나.”
자신이 희생할 테니 대신 정령들을 지켜달라는 건가.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일족을 생각하는 게 라이볼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시려 하는데요. 전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조차 당해내지 못한 이들과 싸우면서 겸손하기까지 하군. 부담 갖지 말게. 우리가 만난 건 짧았지만, 그대의 몸에 배어 있는 우리 아이들의 기운을 통해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라이볼트가 진혁에게서 풍기는 정령 특유의 마력을 읽었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속해 있는 다섯 마리의 정령 특전대를 간파한 것이다.
“그 녀석들은….”
“물론, 마냥 나처럼 정령들을 아껴주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그 의도를 짐작하듯 라이볼트가 한 마디 덧붙였다.
“원인과 결과가 어찌 됐든. 저 아이들이 자네를 따르는 건 그대에게 정령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걸세. 비록 자네조차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이야.”
말을 끝낸 라이볼트가 재차 하늘을 바라봤다.
쿠쿠쿠쿠쿠!
하늘에서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전갈자리의 가호마저 사라진 지금 저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라이볼트의 몸을 따라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피어올랐다.
[라이볼트가 특수 스킬 ‘데커레이션 오브 새크리파이스(Declaration of Sacrifice)’를 발동합니다!]정령왕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과 앞으로 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던졌을 때에만 발동되는 희생 선언.
눈부신 섬광이 점멸하며 협곡에 이변이 일어났다.
“키에에에?”
“크르르…!?”
감염되었던 요정들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이 크게 괴로워합니다!] [태고의 권능이 30%만큼 약화됩니다!] [다른 층계에 있는 이들이 현 상황을 인지합니다!] [시스템의 부름에 의해 네 정령왕이 응답합니다!]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
본래 50층의 식물들은 다른 층계에서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다. 아자토스의 양분을 흡수해야지만 비로소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상황은 예외 중에 예외.
대마도사가 변칙을 창출해낸 장난질에 불과하다.
숭고하고 강력한 대마법에 의해 구멍이 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바로 지금처럼.
[다른 층계에 있는 이들이 현 상황을 인지합니다!] [시스템의 부름에 의해 네 정령왕이 응답합니다!]쩌저저적!
하늘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과거 고구마의 본신을 불러왔을 때처럼.
그리고 그 이변은 클레망스 역시 바로 인지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무슨…!?”
허공에 나타난 균열을 확인한 클레망스가 기함했다.
라이볼트와 요정들을 잃은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펼쳐둔 대결계가 파훼될 줄이야.
육체를 이 저주받은 묘목에게 바치면서까지 얻은 힘이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허무함과 그로 인한 분노로 인해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휘리릭!
넝쿨들의 끝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일제히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나무의 중심에 자라난 기괴한 꽃들에서는 보라색 광선들이 미친 듯이 뿜어졌다.
그야말로 융단폭격.
균열 자체를 지워버리겠노라고 말하듯 터무니없는 공격이 연이어 이어졌다.
바로 그 순간.
뽀그르…!
물방울로 만든 장벽 위로 푸른 바람이 덧씌워졌다.
물의 정령와 이그리트.
바람의 정령왕 윈그라시아.
방어와 치유에 특화된 두 정령왕이 현현했다.
콰콰콰콰콰콰쾅!
보라색 빛들이 방패에 가로막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흙의 정령왕 ‘마드문타’가 ‘대지의 장벽’을 발동합니다!]쿠쿠쿠쿠쿠쿠!
지면이 솟구치며 높이 100M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요틀레암의 협곡이 정령왕들과 소통합니다!] [이 일대가 ‘특수 성역’으로 탈바꿈합니다!]쿠쿠쿠쿵!
식물들이 저항하고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층계 전체가 태고의 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라이볼트….”
“홀로 싸워왔던 건가.”
네 정령왕이 라이볼트의 시체를 바라봤다.
그리고 진혁의 손에 있는 라이볼트의 유품을 바라봤다.
라이볼트가 소멸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사람. 그런 인간이라면 자신들도 반드시 그 의지를 이어가야만 한다.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중에 하도록 해야겠어요.”
윈그라시아가 황폐화된 협곡과 거대한 묘목을 응시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일단은 저 인간의 지휘에 따르도록 한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우선은 상처투성이의 진혁을 치유하는 게 급선무. 부드러운 물과 바람이 진혁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정령왕들의 가호로 인해 소모되었던 마력이 회복됩니다.]‘호오.’
진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의 가호’나 ‘만다라’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다. 하긴, 정령왕들이 직접 마력을 흘려보내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철컥!
빌리 더 키드의 격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파치칙!
퍼스트 블레이드의 예기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워졌다.
이런 조건들이 갖춰진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진혁의 입 꼬리가 씰룩였다.
예상 외의 행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된 셈이다.
그러다가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고귀한 정령왕이 희생한 상황인데 초상집에서 평소처럼 환호성을 내지를 순 없었다.
‘아무렴 이미지 관리를 잘해야지.’
최대한 비통하고 애절하게.
개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라이볼트와 정령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자세를 취하는 게 베스트다.
“저는 보잘것없는 개인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종족의 운명을 건 큰 싸움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탑의 질서와 균형을 중요시하는 분의 마지막 부탁까지 거절할 생각은 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꽉 다문 입술.
눈가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진혁이 정령왕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
덜덜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이든이 손발을 가늘게 떨었다.
압도적인 공포에 지금까지 쌓아온 혹독한 경험과 훈련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근원적인 두려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절대자의 앞에 선 미물은 그저 살아남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남자가 이든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그리 겁먹지 말라고. 네가 얼마나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까.”
“예?”
“난감할 거야. 그저 의뢰 하나를 받았을 뿐인데, 모든 상황이 꼬이고 꼬여 여기까지 왔다는 게 어이가 없기도 할 테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거대한 운명의 실타래에 잠깐 등장한 조연은 구르고 이용당하다가 버려지게 되어 있었다.
불가항력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사실 그 모든 상황을 만든 건 그 녀석이잖아?”
동료들이 전부 죽은 것도.
이든이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 갇혀 벌벌 떠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진혁이라는 인물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할게.”
남자가 몇 가지 아이템을 이든에게 건넸다.
“이건… 뭡니까?”
“이 싸움을 좀 더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조미료.”
보아하니 정령왕들까지 소환된 모양인데, 이래서야 클레망스 쪽이 조금 더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승부가 결정된 싸움은 관전하는 재미가 없는 법.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변수 몇 가지를 추가할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