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689
689화. 미궁 ‘지평선의 경계’ (2)
침입자들이 들어온 지 얼마나 흘렀을까?
잔혹한 시나리오를 기대하던 정원사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뭐, 뭐야. 이것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준비한 함정들이 속수무책으로 박살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아니, 단순히 그뿐이랴?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략을 한다면 그나마 억울하지나 않지.
편법으로 얼룩진 과정들은 정원사로서의 장인 정신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살다살다 식물을 고문해보긴 처음이네요. 아무리 나쁜 애들이라고 해도 괴로워하는 걸 보니 조금 죄책감이 드는 것 같아요….”
테레사가 신성력을 이용해 만든 성수를 뿌렸다.
진혁이 ‘태초의 불꽃’으로 주변의 공기를 매우 건조하게 해둔 터라, 식물들로서는 한 방울의 수분이 간절한 상황.
결국 염산을 먹는 심정으로 신성력이 듬뿍 담긴 물을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죄책감이라는 게 하다보면 금방 사라져요. 봐요. 이젠 능숙하게 성수의 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됐잖아요.”
“헤헤. 그러게요. 이것도 하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지나봐요.”
진혁의 칭찬에 테레사가 얼굴을 붉혔다.
고구마와 정령수들 역시 이파리를 뜯어먹으며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었다.
정원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래.
저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다른 이들로부터 ‘진혁’이라 불리고 있는 새파랗게 어린 놈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화르륵.
불타는 미궁.
완벽함을 자랑하던 정원이 시시각각 잿더미로 변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태고의 존재들을 기리는 석상을 부수고 그 위에 자신과 꼭 닮은 동상을 짓고 기념 사진을 찍거나, 공을 잔뜩 들여 만든 호수에 노상방뇨를 하는 등.
그야말로 심혈관 질환을 일으킬 만한 행동들을 연거푸 이어나갔다.
당연히 그 행패에 맞서 치밀하게 준비해둔 함정들 역시 발동되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통하질 않았다.
쿠콰콰콰쾅!
퍼어엉!
패턴이 완벽하게 읽히고 있다.
아직 미궁의 초입부라는 점을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국 참다 못한 정원사가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소환했다.
“다, 당장 전부… 저, 전부 모여라!”
[세 명의 설계자들이 정원사의 부름에 응답합니다.]우우웅!
공간이 갈라지며 서로 다른 외형을 가진 미궁설계자들.
탑 전역에 존재하는 각종 미궁의 함정을 고안한 천재들 중에서 선별하고 선별한 정예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운데 있는 작은 체구의 존재는 남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위대한 정원의 주인이시여.”
발세테르.
정신병동을 담당하던 고문의 마술사.
시련의 탑 저층부에 속해 있지만, 창의적이고 정교한 함정들을 설계해 상층부로 스카웃된 인물이었다.
실제로 이쪽 업계에서는 그가 하층부가 아닌 상층부에서 태어났다면 훨씬 더 강력한 미궁을 설계했을 거란 말까지 나돌았다.
“그, 그래. 겁 없는 놈들이 감히 내 정원에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고 있다. 너, 너희들이 자신하던 함정들을 전부 다 박살내고 있단 마, 말이다!”
“그럴 리가요.”
“주신들이나 대영웅들도 못 버티고 뼈를 묻은 곳인데… 흐음. 아직 초입부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군요.”
미궁 설계자들은 침입자들이 미궁에 들어온 이후의 행적을 빠르게 훑었다. 어떤 식으로 함정을 돌파해왔는지 그 기록을 보기 위함이었다.
빠르게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딱 한 명.
시니어 디자이너인 발세테르만은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덜덜덜!
오들오들 떨리는 몸.
시그니처인 볼에 그려진 붉은색 회오리 문양이 땀에 얼룩져 서서히 흘러내렸다.
“발세테르. 왜 그러는가?”
“너무 시시한 놈들이 와서 흥미가 떨어졌나보군요. 하긴, 인원도 조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놈들이 운으로 밀고들어온 셈이니까요.”
“하긴, 저기 저 봐. 보아하니 고대종과 정령수들을 몸으로 욱여넣어서 어떻게든 돌파하는 꼴이라니. 쯧쯧.”
두 명의 설계자들이 마구잡이식 돌파를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개개인의 스팩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에 국한된 것일 뿐.
잘 설계된 미궁을 십분 활용할 수만 있다면 저런 놈들을 짓밟아주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그래. 더, 더 이상 내 정원이 망가지는 건 보고 싶지 않다. 너희들이 직접 가서 마, 막아라. 그, 그리고 저 검은 머리 남자놈은 바, 반드시 생포해서 내 앞에 데리고 오도록. 내, 내가 지, 직접 손 봐줄 거다.”
정원사가 진혁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산채로 식물들에게 줘서 적어도 100년 간은 천천히 녹여죽여야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걱정 마십시오. 정원사님.”
“금방 원하시는 바를 이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이곳에서 편안히 즐기시길.”
단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난공불락의 미궁들.
자신만의 성에 갇힌 이들은 결코 알지 못 했다.
진짜 괴물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농락당하고 자존심이 짓밟히고 자신의 존재 의의마저 부정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저들은 절대 모른다는 말이다.
“으으으…!”
발세테르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두 명의 설계자들은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있는 곳을 향해 공간이동을 한 뒤였다.
***
우우웅!
공간이 갈라지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카멜레온과 요염한 여우의 형상을 한 거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왔네.”
진혁이 둘을 발견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낯선 존재의 접근에 하던 일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온 게 아니라는 걸 느낀 것이다.
“바글바글하게도 모여있군.”
“후후. 자기 소개라도 해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곧 죽을 놈들이니까.”
설계자들이 뭐가 좋다고 지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았다.
통상적으로 자존감이 매우 높은 친구들이 저런 행동패턴을 보이곤 한다. 찍어먹기 전까진 똥인지 된장인지 도저히 구분을 못하기 때문에.
진혁은 그런 재롱잔치를 엎지 않고 끝날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줬다.
애초에 이쪽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단서가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을 끌어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둘의 시답잖은 자기자랑이 절정에 이른 후에야 두 설계자가 본격적인 능력을 사용했다.
“너희가 우리를 보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거다.”
“너무 걱정마라. 고통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 아, 물론. 너는 산채로 잡아오라는 지시가 있었으니 편하게 죽진 못하겠지만.”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미궁 변화가 시작됩니다!]쿠쿠쿠쿠쿵!
지형과 지물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설계자가 원하는 대로 미궁 전체에 재배치가 이뤄지려하는 것이다.
식물들로 만들어진 벽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였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형형색색의 잎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미궁의 중반 이후에나 등장하는 강력하고 위협적인 것들을 끌어왔다. 함정들의 난이도 역시 이전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리라.
확실히.
미궁변화는 꽤나 위험한 능력이다.
무수히 많은 불규칙 속에서 가해오는 한 방 한 방은 침입자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테니까.
하지만.
’33층의 헤르멘과 27층의 이트미샤였지. 저 녀석들.’
둘이 좋아하는 패턴과 이 미궁의 특성. 그리고 정원사의 분노를 빠르게 잠재우기 위해 가장 위협적인 선택지를 고를 거라는 걸 계산한다면….
어떤 식의 배치를 선호할지 예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툭.
진혁이 완벽하게 바뀐 미로 한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새로운 식물들이 반응했다.
“키에에에!”
“크오오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녹색 액체들이 비산했다.
마정석마저 단숨에 소화시켜버리는 산성액이다.
넝쿨들과 각종 소형 벌레들 역시 무자비하게 달려들었다.
[빙하조형 ‘서리 칼바람’이 발동됩니다!]얇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가지들이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두께는 얇지만, 어지간한 강철보다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는 방어 스킬이었다.
그런데.
서걱! 서걱!
집게벌레의 집게가 빙하조형으로 만든 얼음들을 무 자르듯 잘라버렸다.
취취취취췻!
머리가 두 개 달린 벌레들이 흉측한 소음을 만들어내며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그런 얼음 막대기로는 어림도 없다!”
“이제와서 도망가는 것도 무리에요. 너무 깊이 들어왔거든요.”
진혁이 회피를 위해 발을 디딘 순간, 격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연거푸 울려퍼졌다.
새로운 종류의 함정이 발동된 것이다.
꿈틀하고.
지면이 일렁이며 보라색 촉수들이 솟구쳐올랐다.
콰콰콰쾅!
콰아앙!
조금 전까지 진혁이 있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당연히 그 폭풍 같은 공격을 맨 몸으로 받아야 했던 진혁의 몸은 잘 다져진 고깃조각이 되어버렸다.
피웅덩이 만이 조금 전까지 이곳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있었다는 걸 말해주었다.
“시시하군.”
“그러게 말이에요.”
두 미궁 설계자가 움푹 파인 지면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나름대로 기대하고 왔건만, 몸도 제대로 풀기 전에 끝나버렸다.
시시하다 못해 따분함에 짜증까지 솟구쳐 오를 지경이다.
분명 전신에 퍼져 있는 건 그런 감정이었다.
바로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이야. 함정이 아니라 고기 분쇄기를 만들어놨네. 아주.”
“……!?”
“무, 무슨?”
“쉿 돌아보면 험한 꼴 당할 거야.”
차가운 감촉이 두 미궁 설계자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시리도록 한기가 맺힌 칼날이었다.
“어…떻게?”
“아, 저기서 곤죽이 되어 있어야 할 내가 멀쩡히 여기에 있느냐고?”
그거야 간단하다.
“저기 있는 건 나랑 똑같은 분신이거든.”
잔류월광으로 만들어둔 가짜.
본체는 유유히 새로운 미궁을 돌고돌아 뒤에서 음침하게 버튼이나 눌러대고 있는 설계자를 노렸다.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분신이 있을 리가 없어.”
수천 년간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오는 게 주요 업무였다.
상대를 속이고 기만하는데 특화된 게 바로 미궁설계자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햇병아리 인간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 수 없었다.
하지만 분노와 치욕스러운 감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주륵.
목을 따로 흐르는 피가 유독 차갑다.
머리가 식혀지자 비로소 안 보이던 현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어떻게… 이 단시간에 자신들이 있는 위치가 발각된 거지?
분신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새로 바뀐 미궁에서 미궁 설계자들은 가장 은밀하고 안전한 곳에 거점을 만든다.
설령 닳고닳은 주신들조차도 이토록 빠르게 최심부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는 건….
……레벨이 다르다는 건가?
까마득한 저 위.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하늘 위에서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걸 보고 있어야지만 이 모든 상황이 설명 가능했다.
다시 말해.
함정들을 설계해서 쥐새끼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게 미궁 설계자라면.
이 남자는 미궁 그 자체의 본질을 파악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냥하는 사냥꾼이다.
“뭐, 뭘 원하는 거냐? 바로 죽이지 않는 걸 보면 바라는 게 있다는 걸 텐데?”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진혁이 싱긋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을 통해 정원사를 공략할 실마리를 만들어둘 계획이었다.
잔혹한 성품과 달리 자신들이 고통받는 건 끔찍하게 싫어하는 두 녀석의 특성상, 적당히 겁만 줘도 순한 양이 되어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우우웅!
두 설계자의 몸에 보라색 파장이 떠올랐다.
“…어?”
“응?”
이게 무엇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콰쾅!
“끄아아악!”
“아아악!”
산 채로 타들어가는 몸.
배신을 눈치 챈 정원사가 움직였다.
“큭… 진짜 인간미라곤 조금도 없네. 아무리 그래도 동료였던 애들을 이용만 하다가 죽이는 게 말이 되냐?”
진혁이 불의를 견디다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나였으면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도 절대 못했을 일이다.
어찌됐든. 이걸로 손쉽게 정원사에게 도달할 수 있는 카드가 사라졌다.
그러나 불행만 계속되지는 않는 법.
띠링!
진혁의 씁쓸함을 단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상태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