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714
714화. 제약회귀(制約回歸)의 굴레 (1)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떨어진 검강이 장보경의 정수리로 향했다.
“넌….”
장보경이 목침을 위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검과 목침이 격돌하는 순간, 천유성의 검이 그대로 튕겨나갔다.
냉병기에 대한 제약이 걸려 있는 상태였기에, 제아무리 검성이라 하더라도 페널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천유성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겨우 목침 따위로 막은 것치곤 예상보다 훨씬 더 센 반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멍청하긴! 그깟 검으로는 아무 소용 없어!”
장보경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백야일원록(白夜一元錄) – ‘하얀 서리’가 발동됩니다!]파치치칙….
거세진 눈보라가 칼날 위로 몰아쳤다.
검이되 검이 아닌 영역.
눈으로 물든 백색의 세계가 펼쳐졌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검이 움직였다. 호선을 그린 섬광이 장보경의 정면을 강타했다.
“큭!”
이번에는 장보경이 뒷걸음질 쳤다.
냉병기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힘은 제약의 범주를 초월하는 종류였다.
오오!
진혁이 활짝 웃었다.
“에구 이뻐라. 우리 검성. 날 도와주러 온 거야?”
“궁지에 몰려 쩔쩔매는 꼴 좀 보려고 했을 뿐이다.”
“하여간 말을 예쁘게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까칠한 게 완전히 고슴도치라니까. 그것도 인성 파탄 난 고슴도치.”
“됐고. 저 여자가 원흉이냐?”
“응. 아주 못돼먹은 애야. 어찌나 득달같은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니까?”
진혁이 앓는 소리를 했다.
“네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고?”
“조금 빡세긴 하더라고.”
“훗. 하긴, 보아하니 도검류를 쓰지 못하는 제약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아무리 너라도 힘들 수밖에 없긴 하겠지.”
천유성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0.1cm 정도이긴 했지만, 진혁의 눈엔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은 천유성의 기분이 정확하게 감지된 상태였다.
“후우. 그러게 말이야. 이대로 계속 싸우면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게 될 거야. 검을 초월한 강자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배하고 말겠지.”
“훗. 그래도 현실 파악은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좋다. 너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그 역할. 내가 맡아주도록 하마.”
“크읍. 다행이다. 너라는 존재가 있어서.”
진혁이 눈물을 훔쳤다.
부려먹기 쉬운 장기말.
조금만 추켜세워 주면 하늘까지 승천해버리는 팔랑귀 검성!
예전엔 스토커 짓만 하느라 골치가 아파 죽을뻔했는데,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된 뒤로는 꽤나 귀여워졌다.
“그럼, 부탁할게!”
진혁이 재빨리 자리를 박찼다.
“멈춰!”
장보경이 물방울들을 끌어모았다.
촤촤촤촤촤촤…!
카가가가각!
날아가던 물방울들이 허공에서 흩날리는 눈발에 막혀 그대로 얼어붙었다.
완벽한 형태의 결정들이 시야를 아름답게 어지럽혔다.
천유성이 태산과 같은 기세로 막아섰다.
“네 상대는 나다. 저 녀석과 달리 도발 따윈 통하지 않을 테니 하찮은 말장난은 그만두고 실력으로….”
“하? 뭐라는 거야. 2인자 주제에.”
“……죽여 버린다.”
여유롭게 웃던 모습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엔 분노로 이성을 잃은 2인자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성흔에게 갈 수 있는 최단 거리가 확보되었다.
[성흔이 소멸합니다.]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성흔.
이제는 정말로 1초 남짓밖에 시간이 없다.
진혁이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콰아앙!
‘신속의 왕관’까지 착용한 질주.
한 줄기 섬광이 문자가 적혀 있는 곳까지 가로질렀다.
파치칙!
0.5초.
성흔의 글자들이 모조리 증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진혁이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칼날과 칼날들이 늘어나며 사복검의 형태가 되었다.
0.2초.
늘어난 칼날들이 글자에 적힌 표면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하하하! 걸렸어!”
장보경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바로 예상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성흔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오브의 불안정 주사위’ – ‘잔념의 씨앗’이 발동됩니다!]쩌저적!
성흔을 중심으로 거대한 입이 나타났다.
새카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 진혁을 마주했다.
“뭐…?”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홀린 듯한 감각이 대뇌를 말랑말랑하게 녹여버렸다.
그것도 잠시.
콰직!
거대한 입이 진혁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
어둡다.
보통 시간이 지나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이곳에는 단 한 줌의 빛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화르륵!
[‘태초의 불꽃’이 발동됩니다!]여러 개의 불들이 주위를 밝혔다.
가장 밝은 빛으로도 어둠을 채 거둬낼 순 없었다.
고작해야 몇 미터 앞이 보이는 게 전부다.
‘오만한 집합소와 같은 다른 차원의 틈인 건가.’
장보경이 어떤 장난질을 해뒀는진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는 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저벅.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때? 나름 제법 아늑하지 않아?”
장보경이 생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
시련의 탑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상급 관리자. 막연히 죽은 줄로만 알고 있는 하스팅이 서 있었다.
“살아 있었나….”
진혁이 허를 찔렸다는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설마, 이곳에서 하스팅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스팅과는 구면이지? 대단하네. 이런 거물하고도 알고 지내고. 나야 뭐… 그분들과 계약하기 전까지는 상급 관리자하고 만나는 건 꿈도 못 꾸긴 했지만 말이야.”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당신은 외부에서 방해하는 자가 오지 못하도록 하시죠.”
“도미닉이나 다른 랭커들도 있어. 입구를 지키는 것쯤이야 그 녀석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 안일한 대처 때문에 팔 하나를 내어준 제 꼴이 보이진 않는 겁니까? 당신이 데리고 온 전력 따위는 저 남자의 동료들에게 시간벌이조차 되지 못합니다.”
“야! 너무 우리 쪽 애들을 무시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들에게 심어둔 걸 알고 있는데도?”
“당신이야말로 천유성이나 성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게다가 시간이 지체된다면 아타락시아의 가주나 호문쿨루스가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응응. 얼마든지 오라고 해.”
“하아.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됐습니다. 어쨌든 이 공간에 대한 지배권은 그분들로부터 제가 위임받은 것이니. 적어도 여기서는 제 말을 들어주시죠.”
“그렇게 나오시겠다?”
장보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약간 짜증이 난 것 같긴 했지만, 하스팅이 역할의 선을 분명하게 긋자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알겠어. 위대하신 전 상급 관리자께서 그리 명령하겠다면야 따라야지. 별수 있겠어?”
장보경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왔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심연의 한가운데 있는 건 진혁과 하스팅뿐이었다.
“내 거처에 찾아갔더군요.”
먼저 입을 뗀 건 하스팅이었다.
그저 담담히 있었던 사실을 물어왔다.
“그랬었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서 제 안경을 찾았고요.”
“맞아. 당신이 항상 쓰고 있던 안경도 발견했어.”
지금까지 시련의 탑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지만, 크게 놀랐던 적은 손에 꼽았다.
새영언환을 처음 만났을 때라던가.
벨루스가 적대 편의 운영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라던가.
…등등.
그리고. 이번에 하스팅의 안경을 통해 본 그의 기억 역시 이전 것들에 못지않았다.
진혁이 오만한 집합소에서 있던 일을 회상했다.
고풍스러운 하스팅의 서재.
그곳엔 기괴하게 웃고 있는 석상과 수많은 촉수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쿠쿠쿠쿵!
서재가 격하게 흔들렸다.
석상의 위압감이나 마력의 짙은 농도 때문이 아니다.
그저 발을 딛고 있는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고 있는 탓이지.
-이번에도 멸망을 막지 못했구나. 하스팅.
-이번 회차에선 상급 관리자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단지 그뿐.
-…네 노력과.
-네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석상의 여러 얼굴들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의 책’을 찾았을 당시 석상 중 하나가 내뱉었던 음성과 완전히 똑같은 음성이었다.
세 개의 보라색 눈동자가 뚫어져라 하스팅을 내려다봤다.
그렇다.
하스팅은 이번이 처음 회차가 아니었다.
제약회귀(制約回歸).
몇 번이고 시련의 탑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며 이 세계의 운명의 굴레 속에 갇혀 있는 존재가 바로 하스팅이었다.
‘어이가 없긴 했었지.’
진혁이 그 장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계속해서 품었던 의문 중 하나.
대부분 특수한 종족의 핏줄을 타고났거나. 혹은 모두를 압도하는 마력을 보유한 이들이 상급관리자에 오르곤 한다.
하지만 하스팅은 두 가지 경우 모두에 해당되지 않았다.
시련의 탑 최하위에 속한 종족이 바로 고블린들 아니었던가?
대부분 1~2층의 던전에 서식하거나 잘 풀려봤자 하급 관리자에 오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7개의 정점 중 하나가 될 수 있던 이유는. 그가 무수히 많은 회차를 반복하며 살아왔던 덕분이었다.
진혁이 오만한 집합소에서 봤던 영상을 되새김질했다.
-탑은 무너지고….
-……태고의 종족이 온 차원을 지배하리라.
-거부하는 것들에게 미래란 없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포칼립스 ‘언약’이 연이어 일어났다.
한 번이 아니라 온 시야를 전부 물들일 정도로 상태창은 범람하고 있었다.
거기엔 희망도 미래도 없다.
오롯이 끝없는 심연과 공포만이 가득 넘칠 뿐이다.
상층부의 거대세력들은 물론 각 세력의 주신들과 상급 관리자들마저도 멍하니 다가오는 종말을 바라만 보고 있던 상황.
그 와중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시 한 번 하스팅에게 제안을 건넸다.
-너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겠다. 하스팅.
-그 ‘남자’가 나타남에 따라 탑의 마지막 회차가 시작되었다.
-태고의 존재들과 결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그리고.
-강진혁이란 인간을 지켜봐라. 그자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될 수 있는 열쇠가 될 테니.
안경 속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그래서 태고의 존재들에게 붙을 수밖에 없던 건가.’
사실상 마지막 기회.
언제나 배드엔딩을 향해 달려가던 지옥 열차의 레일을 끊어낼 수 있는 동아줄을 하스팅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수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났으니 여러 의문들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녀석이 나와 독대를 하려고 하는 이유 또한 알 수 있겠지.
하스팅이 묘한 눈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미 봤다면 굳이 다시 한 번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제 기억 속에서 나왔던 그대로 전 제약회귀의 굴레 속에서 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최하층의 미궁에서 버텨도 봤고.
다른 고위 몬스터의 지배인으로 들어가 빌붙어도 봤으며.
여러 회차를 거듭한 후엔 유적의 보스가 되어 상위 세력의 일원으로 들어도 가봤었다.
최후에는 상급 관리자의 자리에까지 올라 탑의 대소사를 관장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었지.
이번에야말로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어떠한 노력을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 수백 번을 더 시도했어도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 저는 최후의 기회를 통보받았죠.”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다.
그런 압박감이 하스팅의 전신을 짓눌렀다.
“처음부터 당신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꼭 짚어서 강진혁이라는 인물이 모든 것의 핵심이 될 거라니 주의를 할 수밖에 없었죠.”
밤의 무도회에서 접근해 친분을 쌓고 도와주기도 하며 진혁이 앞으로 탑의 운명을 어떻게 이끌지 지켜봤다.
“당신은 대단했습니다. 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거든요. 골치도 많이 아팠고. 이해하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결국에 저만 손해인 하루하루가 이어졌죠.”
일개 개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보.
그러나.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던가?
지나치게 화려한 업적이 오히려 태고의 존재들을 너무나 빨리 자극시켜버렸다.
하스팅의 계획을 송두리째 박살 내 버릴 만큼.
“만약 당신이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면서 성장했다면 당신과 손을 잡고 탑을 구원할 길을 선택했을 겁니다. 여러 세력들 간에 줄다리기를 하면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면서요.”
“내가 좀 많이 날뛰긴 했지.”
“하하. 맞습니다. 결국에 저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더군요.”
‘성가신 등반자를 제거해 태고의 존재를 진정시킨다.’
그게 하스팅이 생각한 탑의 종말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목소리의 주인 역시 태고의 존재들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말했었으니까.
“그래서. 탑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날 제거하러 온 건가?”
진혁이 하스팅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대답 대신, 하스팅의 손 끝에 붉은 스파크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