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779
779화 숨겨진 의도 (2)
태고의 존재인 노스 이디크나 우마왕의 개입 역시 허를 찌르는 영역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약…자.”
엘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과 같으면서 이질적인 마력. 아름다웠던 은발 군데군데가 눈에 띄게 상해 있었다.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거겠지.
이 정도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녀석이 상당히 공을 들여 납치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이 타이밍에 엘리스를 이곳에 오도록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를 노리는 거냐.’
진혁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섞였다.
“고대의 맹세는 우리 쪽에서 가지고 가겠다.”
노스 이디크가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철컥!
“그건 곤란하군.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흉물을 넘겨줄 순 없다.”
사멸자가 총구를 앞으로 향했다.
쇠사슬을 모두 사용해버린 지금이라면, 제 아무리 태고의 존재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현세에 개입할 수 없을 터.
우마왕 한 명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흐음. 너희들이야 그런 의견일지 몰라도. 저 인간의 생각은 조금 다를 텐데?”
노스 이디크가 검은색 단검을 엘리스의 등에 갖다 댔다.
어째서인지 엘리스는 도망치거나 방어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진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꾸욱.
손톱이 손등을 파고든다.
핏방울이 스며나왔지만,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져가.”
“진심이냐!?”
“그냥 넘기겠다고?”
사멸자와 벨토르가 깜짝 놀라 외쳤다.
“지금 싸우면 승산은 저희가 더 높아요.”
서리혼령 역시 반대에 한 표를 던졌다.
그래. 큰 공격을 전부 받아냈으니, 전투를 지속한다면 승리의 여신은 이쪽을 향해 웃어주겠지.
만약, 엘리스를 버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고대의 맹세를 확보할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걸린 게 다른 것도 아니고 엘리스다.
처음 타락한 자들의 회랑에서 만나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공유하고 함께 해 온 소중한 동료다.
“이번 건 절 믿어주세요.”
고대의 맹세가 없더라도 방법은 있다.
무엇보다.
이번 한 수를 통해 놈의 계획과 저쪽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녀석도 49층과 50층에서 일어날 ‘그 이벤트’를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어쩔 수 없군.”
“후우.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생각 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겠지.”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대를 탓하진 않을게요.”
호감도를 엄청나게 올려뒀기에, 등반자들의 반대는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았다.
“현명한 결정이다.”
노스 이디크가 피식 웃으며 엘리스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마치, 처음부터 엘리스를 죽일 생각 따윈 없었다는 것처럼.
타박.
엘리스가 힘없이 앞으로 향했다.
“인간. 듣자하니. 제천대성이 너를 꽤나 마음에 들고 있다고 하던데, 부디 내가 사는 층계에서 그 기대에 부응하는 걸 보여주길 바라마.”
고대의 맹세를 한 허리에 움켜쥔 우마왕이 진혁을 잠시 바라봤다.
먹잇감을 보는 포식자의 눈동자.
하여간, 싸움에 미친 광전사에겐 그저 피튀기는 혈투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 게이트’가 활성화 됩니다!]쩌저저적.
이빨 모양의 게이트가 허공에 나타났다.
노스 이디크와 우마왕이 그 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암스테르담에서의 전투가 모두 끝났다.
***
[암스테르담에서 발생한 기현상이 오늘로서 3일간 지속된 가운데….] [네덜란드 정부와 각국의 각성자 협회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한 상태입니다.] [아직까지 원인은 불명으로 일반인의 통제가 엄격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뉴스에서는 온통 하늘까지 이어져 있는 기괴한 구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노스 이디크가 게이트를 열면서 생긴 마력의 잔향이 아직까지도 현세에 남아 있는 것이다.
“괜찮아?”
진혁이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잔뜩 기가 죽은 듯한 모습.
평소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진조 대신 무력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소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왜… 나를 선택한 것이냐? 만약 다른 이들의 말대로 나만 버렸더라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엘리스가 베개를 꽉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조금 놀려주고 싶은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모든 게 무너져버릴 것만 같아 보였다.
진혁이 엘리스 옆에 앉았다.
“그런 건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어.”
잃어도 되는 것과.
잃어선 안 되는 것.
포기해도 되는 것과.
포기해선 안 되는 것.
고대의 맹세와 엘리스가 가진 각각의 의미다.
“너무 신경쓰지 마. 지금은 너만 회복하고 마음을 추스르는데 집중하면 돼.”
“마음을 추스르라고? 알고 있지 않느냐 계약자. 놈은 일부러 짐을 풀어준 것이다.”
“응. 아마 그랬겠지.”
‘탐식의 눈’에는 이미 엘리스의 몸에 생긴 이변이 파악되어 있는 상태였다.
‘혼란’과 ‘피아식별 불가’ 거기에 마지막으로 ‘폭주’까지 이어지는 최악의 연쇄 작용이다.
전성기.
아니, 어쩌면 전성기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될 지도 몰랐지만, 그 힘이 향하는 곳은 아군이 될 확률이 높겠지.
놈은 그것까지 전부 계산해서 이 판을 설계한 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
함께 하기로 했고. 함께 탑을 올라 그 정상에 도달하기로 했다.
엘리스가 베개를 쥐던 손에 힘을 약간이나마 풀었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몸을 위아래로 튕겼다.
“배고프다.”
“응?”
“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다. 계약자가 해준 맛있는 밥이 먹고 싶다.”
“그래그래. 좋아하는 걸로 잔뜩 만들어서 가져올게.”
그렇게 먹을 걸 좋아하는 애가 쫄쫄 굶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더 짠해진다.
간만에 ‘이세계 식당’을 통해서 솜씨 좀 부려봐야겠다.
뭐, 분위기 봐서 흡혈도 좀 하게 해주던가 하고.
‘그나저나 놈이 유성이를 저렇게 키우려는 이유가 뭐지?’
엘리스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천유성을 계속해서 데리고 다니며 하위 엘더갓과 그레이트 올드 원들을 사냥하고 있다고 했다.
실전경험을 쌓게 하는 것과 동시에 검마의 심득을 파악하게 하고 있었다.
‘날 상대하는 게 그 이유라면 말이 안 되는데.’
분명, 남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힘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터.
탑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것은 물론, 최상위 세력들마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의 영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천유성이나 엘리스 테레사 등을 원하는 이유가 뭔지. 그 숨은 의도는 무엇인지.
그걸 파악해야만 했다.
이제 머지 않아.
최후의 싸움이 시작될 테니까.
*
그날 밤.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엘리스의 침실에 누군가 찾아왔다.
진혁은 아니다.
발걸음 소리가 훨씬 더 가볍고 부드러웠기 때문.
“안 주무시고 계세요?”
파자마를 입은 테레사였다.
토끼모양이 잔뜩 그려져 있는 파랑색 파자마는 의외로 테레사와 잘 어울렸다. 한쪽 손에 큼지막한 베개를 든 건 덤이었다.
“왜 여기를…?”
“그냥요. 혼자 자기엔 좀 외로울까봐 놀러왔어요.”
테레사가 자연스레 엘리스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억지로 위로해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바보 성녀가 날 싫어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제가요?”
테레사가 싱긋 웃었다.
“짐은 알고 있느니라. 바보 성녀가 계약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아마, 오래 전부터 그랬겠지.”
“그래서. 당연히 진혁 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엘리스 씨를 싫어했을 거라는 뜻인가요?”
“맞지 않느냐?”
엘리스가 되물었다.
“아니에요. 물론, 진혁 씨에 한정하면 엘리스 씨는 라이벌인 건 맞지만, 그걸 넘어서. 절대 아프지 말고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중한 동료이기도 해요.”
함께 있기만 해도 든든하고 지켜주고 싶은 존재.
거기에 이유 따윈 필요없다.
“……그래도 계약자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후후. 그럼, 오늘만 휴전하는 걸로 할까요?”
“마, 마음대로 하거라!”
엘리스가 등을 돌려 누웠다.
그런 고양이 같은 엘리스의 등에 테레사가 꼭 달라붙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고르게 되기까지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엘리스가 테레사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계속된 악몽과 끔찍한 절망 속에서 고통받던 기억들. 단 하루도 푹 쉴 수 없었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리고 잠시 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엘리스와 테레사를 찾던 진혁이 둘이 있는 침실을 발견했다.
때마침, 침실 앞에선 벨토르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지나가던 길이었다.
현대의 달콤하고도 쌉쌀한 카라멜 마끼아또가 고대의 결계사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 버린 것이다.
진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시내에서 커피에 어울리는 과자도 사뒀으니, 곁들여 드세요.”
“하하하. 사양하지 않지. 군것질을 즐기는 편은 아니네만, 자네 세계의 음식들은 아주 각별한 게 많더군. 업무 효율이 2배는 더 올라가는 기분이야. ”
“해서 말인데, 실마리는 좀 잡혔나요?”
“으음. 서리혼령의 마력을 빌려서 내 나름대로 결계를 재구성하는 중이야. 고대의 맹세에서 나오는 마력을 완벽하게 중화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긴 하다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또 아니거든.”
“그건 다행이네요.”
나머지 등반자들도 문제였지만, 서리혼령이나 벨토르 그리고 사멸자가 놈들의 편에 선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대놓고 적대관계를 표명한 우마왕이나 태고의 존재들만으로도 벅찬데.
리스크가 몇 배는 더 커질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나저나. 잘들 자고 있군.”
“많이 피곤했을 겁니다.”
“아,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아까 결계 사이로 살짝 엿들을 때 자네 이야기를 좀 하더군. 둘이서 라이벌 관계인 듯 한데, 자네는 어느 쪽을 더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마음에 두고 자시고. 두 명 다 제 등을 맡길 수 있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흐음.”
벨토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쁜 눈빛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자네는 확실히 결계사로서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그 누구도 가지 못한 영역까지 갈 거라는 확신이 들어.”
“칭찬은 감사하긴 한데… 갑자기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네. 오롯이 결계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쳤지. 하지만.”
벨토르가 진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 나조차도 자네의 무지함에는 혀를 내두룰 수밖에 없네. 진정한 결계사가 있다면 바로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하하하!”
혼잣말을 중얼거린 벨토르가 커피를 든 채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진 기분이다.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6시간 정도 남은 건가.’
동료들과 합류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유연화와 이태민을 비롯해 믿음직한 이들을 보내뒀으니, 초입부의 귀찮은 일들에 휘말릴 일은 없을 것이다.
진혁이 서서히 밝아지는 보름달을 바라봤다.
50층까지 남은 마지막 관문.
내일 동이 틀 무렵이면, 49층의 세계가 펼쳐질 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