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only genius film director RAW novel - Chapter (57)
나 혼자 천재 영화감독-57화(57/276)
몇 잔 들어가지도 않고 곽연지는 얼굴이 금세 시뻘게졌다.
그리고 눈도 차츰 풀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분위기를 주도하려는 듯 술병을 손에서 떼어놓질 않았다.
“자! 더 마셔! 선배님도 한잔! 오빠들도 한잔!”
우리는 불안한 듯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곽연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커진 목소리로 계속해서 빈 잔을 채웠다.
주량이 우리보다 한참은 부족해 보이는 그녀는 이제 콧소리도 내기 힘들었는지 정상적인 목소리로 돌아왔다.
귀를 거슬리게 하던 콧소리가 빠지니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보다 훨씬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드러났다.
안정적이면서도 적당한 높이. 콧소리보다는 훨씬 매력적이었다.
“연지야…… 그만 마셔.”
“왜요! 선배님! 저 괜찮아요!”
왜 뒤풀이 때마다 술을 안 마셨는지 알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곤란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김승훈은 미안한 듯 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정우는 김승훈에게 말했다.
“담배나 피우고 오자.”
“응? 아냐, 나는…….”
김승훈은 내 눈치를 보며 말했고,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하하…….”
“그…… 하…… 알겠어.”
김승훈과 이정우는 나가고, 나와 곽연지가 덩그러니 남아있는 방은 어색한 기류가 흐르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목을 조여오는 듯한 어색함에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봤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2G폰이라는 게 아쉬워졌다.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핸드폰을 부여잡은 채 옆을 슬쩍 바라보니 곽연지는 슬픈 표정으로 내 옆에서 말없이 홀로 빈 잔을 채웠다.
그녀의 표정은 유난히 슬퍼 보였다.
졸업작품을 했을 때 곽연지는 자존심이 엄청 강한 배우였다.
그래서 남에게 자신의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취해서 그런 건지 진솔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을 처음…….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따라 드릴까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슬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냐. 그만 마실게. 너도 그만 마셔.”
“저 잘 마시거든요? 선배 그것만 마시면 저도 그만 마실게요!”
내 말에 곽연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얼굴이 벌게졌는데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붙잡았다.
아직 취하기엔 마신 술은 한참 부족했지만, 자칫 잘못하다 취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곽연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물잔을 둔 채 마시는 척하며 그곳에 술을 쏟았다.
술 같은 거 때문에 두 번째 인생을 망칠 수 없으니까.
“마셨으니까, 진짜 그만…….”
“저 서운했어요.”
“응?”
곽연지는 술에 취해 풀렸는데도 커다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내가 아니라 김효선이었어요? 졸업작품…….”
까딱 잘못했다간 곽연지의 커다란 짙은 갈색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 나는 다시 눈을 한번 부릅떴다.
“어…… 오디션을 보고 나온 정당한 절차였잖아. 하하, 벌써 2년 전 일이라 기억도 잘 안 난다.”
“칫, 거짓말.”
곽연지는 앞에 있던 술잔을 단번에 비운 후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어느새 미소는 사라지고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그때 자존심 엄청 상했거든요? 진짜! 그게 말이 되냐고요! 아무도 모르는 얘랑 저랑 경쟁하는데 거기서 지는 게 말이 되냐고! 응!? 김효선인가 뭔가 걔는 아직 장편 데뷔도 못 했잖아요! 선배 눈이 항상 맞는 건 아닌 거죠?”
졸업작품 <밀실 속 여인>의 주연 김효선은 명감독 중 한 명의 영화로 뜨는 배우다.
물론 그 감독 역시 사라지긴 했다만 그녀의 연기력이면 다른 감독들의 영화로도 충분히 뜰 수 있다.
지금은 연기력을 다듬어 가는 단계에 있지만, 이것만 넘긴다면 그녀의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져 있을 거고, 그건 김효선에겐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될 거다.
“걔 잘 될 거야. 연기 잘하거든. 아직 데뷔 못 했어도 조만간 확 뜰걸?”
“저는요……?”
곽연지는 마치 점쟁이를 보듯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뭐 무당이냐?”
“선배, 소문 그렇게 났어요. 배우 보는 눈이 무당이라고.”
“…….”
곽연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법하다.
애초에 준식이 형 같은 캐스팅을 완벽하게 해낸 케이스가 거의 없다.
20대도 아니고,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은 배우를 오히려 평범한 게 매력인 배우를 그렇게 활용하는 건 처음 봤을 테니까.
그리고 그게 제대로 먹혀서 <무욕>이 성공한 거고.
“저는 어떻냐니까요?”
“넌…… 어…….”
저 모습을 계속 보다간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있을 거 같았다.
나는 그녀의 눈이 아닌 미간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미안. 모르겠어.”
“하…… 저 연기 못하죠……?”
“어……?”
곽연지는 앞에 있는 탁자에 머리를 박으며 말했다.
“알아요. 나 연기 못하는 거. 근데…… 그래서 엄청 노력하는 중이라고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푸른달>을 만들 땐 쌍욕을 날릴 정도로 다퉜었던 기억 때문인지…… 내가 도리어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주눅 들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차라리 눈을 감았다.
아직 영화는 기획 단계에도 있지 않지만 마치 머릿속으로 곽연지를 위한 영화가 그려지는 듯 것 같은 기분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너 지금 취해서 그래!
<푸른달> 찍었을 때 생각해봐!
얼마나 개고생이었는지! 그때 스트레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잖아!
그걸 또 경험하고 싶어? 20년이 지난 일이라도 네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을 생각해보라고!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냥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못 박힌 거 같더라고요. 물론 제가 망친 잘못도 있죠, 근데…… 그래도…… 오디션을 보면 그 감독들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곽연지는 잔뜩 주눅 든 목소리인 상태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를 보지 않고 시선을 벽에 고정한 채 말했다.
“뭐라는데?”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사람을 봐야지…… 에이, 됐다.”
곽연지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앞에 술잔을 한 번 더 비웠다.
그녀의 미간에 잔뜩 짜증이 묻어있는 것 같아 차마 마시지 말라고 말할 순 없었다.
“대사 별로 없을 텐데 괜찮냐는 거예요. 전 그때 알았죠. 아! 이번에도 그냥 꽃병 노릇만 하고 집에 가겠구나! 나한테 기대하는 게 없구나! 대사 많고 비중 있는 배역인 줄 알고 오디션 보러 간 건데! 일단 캐스팅은 하고 싶은데 비중을 줄이겠다는 거잖아요! 적어도 연기할 기회는 줘야죠! 근데 정신 나간 감독들이…… 아, 이건 아니다.”
곽연지는 많이 취한 듯 혀도 살짝 꼬인 채 말하다가도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드라마든 영화든. 곽연지를 캐스팅했다면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사용하면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용으로 역할로 사용했을 거다.
주연으로 쓰기엔 연기가 아쉽고, 조연보다 비중이 없기엔 얼굴이 너무 아쉬웠을 테니.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곽연지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래?”
영혼 없는 되물음에 곽연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봤다.
“뭐라고요?”
“아니. 아니야. 응. 아니다. 그냥…….”
나는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딴 식으로 성의 없게 공감하는 척하지 마요.”
“응?”
쾅!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요!”
곽연지는 갑자기 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예측하지 못한 곽연지의 반응에 나는 눈만 깜빡거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야! 곽연지! 뭐하자는 거야! 지금!”
알맞은 타이밍에 들어온 김승훈이 곽연지를 말렸다.
이정우도 곽연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 감독. 미안…… 조만간 내가 자리 따로 잡을게. 얘가 많이 취했네. 다음에 보자.”
“나 안 취했거든! 나도 매니저 오빠만 아니었으면 여기 안 왔어! 감독이란 새끼들. 다 똑같아!”
“형들. 다음에 봬요.”
내가 신발을 신는 동안 김승훈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곽연지를 챙기는 걸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내가 나온 방으로 급히 달려 들어갔다.
가게 밖을 나서자 쌀쌀한 날씨에 옷을 여몄다.
잔뜩 나오는 입김에서 옅은 술 냄새가 코를 살짝 찌르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좀 부족한데…….”
술을 얼마 마시지도 않았기에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취하려고 먹는 술인데…… 너무 멀쩡한 정신이 아쉬웠다. 알딸딸한 수준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은 가야겠다는 생각에 택시를 타자, 타이밍 좋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이구, 갑자기 눈이 많이 오네.”
택시 기사도 밖을 바라보며 말했고, 라디오에서는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햐. 노래 좋다. 그죠? 광석이 형은 너무 빨리 갔어. 내가 그 광석이 형 라이브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말이야.”
“네. 하하…….”
우울한 노래를 신나게 흥얼거리는 기사의 음정도 맞지 않는 기사의 콧노래 소리.
그 콧노래를 곁들이며 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에 곽연지를 왜 그렇게 미워했나 싶기도 하고…….
나한테는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고…… 곽연지는 경험해보지도 못한 일이다.
나 혼자에게만 있던 그 미움이 새로운 인생에까지 이어질 필요가 있나?
이런 의문을 시작으로 2년 전 그녀를 처음 봤을 때를 돌이켜봤다.
“흠…….”
곽연지는 어차피 외모만 믿고 연기에는 신경도 안 쓰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는 내가 아는 곽연지와 똑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탓에 남에게 지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모습.
졸업 전시회에서 상을 받을 때 홀로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본 그 눈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본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있는 곽연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사람일 테니까.
***
다음 날.
성현 제작사에 출근하자마자 준성이는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신문부터 보여줬다.
[태산 그룹. 영화계에 이바지하겠다! 퓨처 필름 스튜디오 인수! 태산 영화사 출범! 대한민국 영화계에 돌풍! <우리 두목님> 김수린 감독과 기획 중!]“속이 빤히 보이는 더러운 놈들이야. 이야…… 진짜 너무 더럽지 않냐? 이건 뭐…… 안톤 오노도 한 수 접고 갈 더티 플레이야.”
준성이는 그 기사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진짜 너무 더럽지 않냐? 태산 그룹 새끼들. 이게 제대로 된 기업인이 할 짓이냐? 영화제로 밑밥 깔고 한 자리 먹겠다는 심산인 거 같은데…….”
“응.”
준성이는 바닥을 차서 단번에 바퀴 달린 의자로 날아오며 말했다.
“야. 이거 때문에 회장님께서 나 호출하셨어. 인마. 근데 그렇게 무미건조한 반응 보일 거냐?”
준성이는 내 얼굴을 한 번 본 후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그렇게 볼만한 면상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더 최악이네. 뭔 일이냐?”
준성이는 장난을 먼저 던진 후에 걱정스럽다는 듯 다시 말했다.
“어제 술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을 놨냐? 왜 아무 말도 없어? 혹시 형들이 술로 고문을 하기라도 한 거 아냐?”
“별로 안 마셨어.”
“그럼 왜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시끄러워. 좀만 이따 얘기하자.”
어젯밤부터 끊이질 않는 생각에 나는 엎드린 채 준성이의 시선을 피했다.
“얼씨구? 야, 말을 해. 좀. 또 꽁하게 혼자 그러지 말고.”
“생각할 게 좀 있어.”
“어제 주당 형들 만났는데 술을 별로 안 마실 수가 있나?”
준성이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턱을 괴며 내 앞에서 혼잣말인지 나보고 들으라는 건지 셜록 홈즈라도 된 것처럼 추리를 시작했다.
“뭐…… 승훈이 형이랑 정우 형이 캡틴Q 먹여서 네 기억을 삭제한 거 아냐? 사실 너는 술을 많이 먹었던 거지. 아니면…….”
준성이의 추리가 연달아 10분간 스탠딩 코미디처럼 이어지자, 그 헛소리를 더는 들을 수가 없어 말했다.
“어제 곽연지 만났어.”
“응? 곽연지? 걔가 그 자리에 왜 껴?”
준성이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엎드려 있는 내게 얼굴을 부담스럽게 들이밀며 물었다.
“몰라. 매니저가 승훈이 형한테 부탁했대.”
“매니저가? 그 매니저 더럽게 열심히 하네. 무슨 감독이랑 따로 자리까지 잡으려고…….”
준성이는 바닥을 한번 차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아니겠지. 야, 일단 나 회장님 뵙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