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only genius film director RAW novel - Chapter (61)
나 혼자 천재 영화감독-61화(61/276)
곽연지는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봤다.
흑백 핸드폰 바탕 화면에서 떠 있는 2003년이라는 숫자가 곽연지의 마음을 후벼팠다.
“스물일곱…….”
곽연지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나이를 읊었다.
세상은 참 빠르게만 바뀌어 갔다.
흑백 핸드폰이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슬라이드 폰도 나오고 이젠 컬러 핸드폰도 나왔다던데…….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위치는 그대로지만 세상은 휙휙 변해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옅은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눌렀다.
얼마 저장되어 있지도 않은 번호들을 잠시 살펴보다가 곽연지의 시선이 멈춘 곳은 경찬현의 번호였다.
매니저의 말대로 전화를 할까 하다가 곽연지의 시선은 시계로 향했다.
밤 10시. 전화를 걸기엔 늦은 시간이니까, 전화보단 문자가 더 예의 있는 행동이지 않나……?
이런 생각에 곽연지는 경찬현에게 보낼 문자를 적었다.
[경찬현 선배님. 저 연지예요. 제가 그날은…….]띠링-.
문자 알림음에 곽연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던 문자를 쓰다 말고 수신 문자를 확인했다.
[사과는 문자가 아니라 꼭 전화로 해야 하는 거 알지?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긴 해도 불안해서 그래. 네가 잘돼야 나도 잘 돼! 제발!!!]매니저는 불안했는지 평소에 잘 쓰지도 않던 느낌표까지 썼다.
띠링-.
문자를 확인하던 중 매니저는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꼭! 제발! 맨정신으로 못하겠으면 적당히 술이라도 마시고 전화해!!!]가끔 보면 곽연지보다 곽연지를 더 잘 아는 듯 행동하는 매니저의 모습에 닭살이 돋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곽연지보다 매니저의 행동이 더 빨랐다.
“후우…….”
어차피 내일도 같은 루틴이다. 일이 없던 몇 달간 계속된 반복.
운동하고 연기 연습하고 집에 와서 요가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뻔한 일정.
연기에 더 몰입하며 연습하고 있지만 늘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주위에선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곽연지는 자신이 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아니면 애초에 재능이 없던 건 아니었을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일도 없었다.
최근 찍은 드라마가 망한 후로는 연락이 도통 오질 않는지 매니저도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곽연지는 일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 요즘 더 초조해졌다.
어리고 예쁜 여배우들은 매년 쏟아지는데…….
더 걱정인 건 요즘 데뷔한 배우들은 외모만이 무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서울대를 나왔다고 머리가 좋은 여배우로 이미지 마케팅을 한 덕에 유명세를 얻은 여배우,
외모만으로는 배우라는 직업을 할 수 없는 세상으로 점차 변해갔다.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는 말.
이 말이 이젠 무의미한 희망이라고 느껴진다.
열심히 하는 게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하는 건지.
하루에 몇 시간을 연습하고 뭘 해야 하는지 누군가가 정해주기만 한다면 그대로 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 길에서 성공하기 위해 정해진 방법 따위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를 제외하곤.
쉽게 성공하는 방법.
하지만 그 방법은 절대, 절대로 안 된다. 그런 더러운 방법은…….
곽연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을 지워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전신거울 앞에 서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울상을 지었다가 다양한 표정들을 지어가며 거울 속의 자신과 소통이라도 하듯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너…… 잘 될…… 하…….”
성공한 사람들은 거울을 바라보며 스스로 최면을 건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해왔던 의식이었다.
하지만 요즘 따라 그녀는 확신이 사라졌다.
스스로 거는 최면의 마지막이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로 바뀔까 걱정스러워 차마 끝까지 말할 수도 없는 최면이었다.
“씨…….”
곽연지는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외투를 다시 입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있던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지폐 몇 장을 챙긴 채 밖으로 나갔다.
***
사무실에서도 잡고 있던 시나리오를 퇴근하고 와서도 집에서 계속 써 내려갔다.
재벌은 준식이 형으로 잡고 써서 어떤 대사를 써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썼지만…… 제일 중요한 여기자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게 힘들었다.
어떤 말을 하게 해야 자연스러울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이고야…….”
나는 책상에 있는 스탠드를 끄고, 잠시 침대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늘 할당량은 다 못 채웠지만, 내일의 내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겠지…….
띠리링-.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핸드폰 화면에 떴다.
시간은 밤 11시.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이 없는데…….
그냥 받지 않고 자려다가 혹시나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찬현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 연지예요!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술에 취한 듯한 곽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주 전에 들었던 목소리.
콧소리가 빠진 곽연지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속을 울렸다.
“술 마셨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목소리가 좀 다른가?
“응. 콧소리가 아, 아니다. 근데 갑자기 전화는 왜?”
-아! 그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사과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곽연지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니 여자치고는 낮은 저음에 안정적인 목소리로 꽤 듣기 편했다.
콧소리를 빼는 방법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콧소리만 없었으면 목소리를 조금 다듬어서 성우를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그때 술자리에서 했던 말들이요. 정말 죄송합니다.
“응?”
-제가 그때 너무 취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정말 미안했는지 곽연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는 감정이 온전히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도 괜히 미안하다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낸 이유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미안하다고 했다가 또 뭐가 미안하냐는 질문이 들어올까 두려워 그냥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냐. 괜찮아. 뭐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
-네?
곽연지는 내 반응에 당황했는지 되묻고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다시 전화를 확인하고 말했다.
“괜찮다고.”
-아…… 그런데…….
“더 할 말 없으면 끊어도 될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어서…….”
-지금 목소리가 별로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저 정말 그때 일 반성하고 있어요.
목소리가 별로 안 좋다는 말에 나는 수화기에서 잠시 얼굴을 뗀 후 목을 한번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시나리오에만 집중하느라 말을 거의 하질 않아서 그런지 목이 잠긴 것 같았다.
“아냐. 진짜 괜찮으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끊는다? 잘 자고.”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곽연지는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응. 진짜 괜찮아.”
-네…….
“끊을게.”
곽연지와의 전화를 끊고 나는 좋은 생각이 난 김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머릿속에 있는 캐릭터의 이미지가 흐릿해서 그런지 어떤 말을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지만, 곽연지와 통화를 한 이후 더 자연스러운 대사들이 생각났다.
당돌한 건지 미친 건지 모를 애매한 캐릭터.
예쁜 얼굴을 한 덕에 평범한 사람이 하면 인상을 구길 행동을 오히려 호감으로 바꾸는 건 어지간한 연기력으론 쉽진 않다.
빌런들이 모여 세상을 구하는 영화, <자살 특공대>에 나온 정신 나간 여자 빌런.
<자살 특공대>라는 영화는 잘되지 않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여자 빌런은 개인 영화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여배우의 연기가 워낙 뛰어났기에 어떤 정신 나간 짓을 해도 사람들은 불쾌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거 같은데…….
그런 배우를…… 찾을 수 있을까?
***
며칠 뒤.
푸름 엔터테인먼트 배우 연습실 앞에서 만난 곽연지의 매니저는 곽연지를 보자마자 인사가 아닌 질문부터 던졌다.
“경찬현 감독한테 전화했지?”
“네, 네. 했어요.”
곽연지의 대답에 매니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곽연지의 얼굴을 보고 다시 물었다.
“근데 왜 그래? 설마 또 싸운 건 아니지?”
“왜요?”
“표정이 별로라서 그렇지.”
“원래 이렇거든요? 아직도 제 표정을 몰라요?”
그녀는 툴툴대며 배포된 오디션용 대본을 훑어봤다.
그리고 짧지만 임팩트 있는 느낌의 장면에 곽연지는 감탄하며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했다.
이렇게 짧은 대본인데도 재밌을 것 같다는 게 느껴졌다.
“오디션용이긴 한데…… 그것만 봐도 이번 작품도 대박일 거 같은 느낌 들지 않아? 그 사람 진짜 천재야. 영화 찍는 기간도 짧은데 생각부터가 남다르다니까?”
“……해봐야 알죠. 이번 영화가 성공할지 망할지 어떻게 알아요?”
곽연지는 짧은 대본에 속으로는 감탄했지만, 기대하지 않기로 했는지 별 감정이 없다는 듯 말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건 이미 맛볼 만큼 맛봤으니까.
차라리 기대가 하지 않았던 척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누가 들으면 망하길 바라는 사람 같겠다?”
“그건 아니죠…….”
매니저는 조그맣게 말하는 곽연지를 향해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의자에 걸터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곽연지를 바라봤다.
“왜요?”
“어제부터 공고 기간이었으니까…… 유명한 배우들 누가 지원했는지 슬슬 기사가 풀릴 때도 됐어. 경찬현 감독이니까 엄청 많이 지원했을 거야.”
“그걸 누가 모르나?”
“이번엔 진짜 실력 싸움이야. 경찬현 감독이나 이준성 프로듀서. 둘 다 더러운 사람들은 아닐 테니까. 전처럼…….”
매니저는 말을 흐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연습실에 물병을 여러 병 갖다 놨다.
“전화하면서 뭐 그런 거 없었어?”
“뭐요?”
“뭐 감독으로서 연기 지도라든지…….”
매니저는 뭔가 기대하는 게 있다는 듯 곽연지에게 물었다.
“오빠 생각처럼 경찬현 감독 그런 휴머니즘 넘치는 사람 아니거든요? 뭐 전화했다고 거기서 그런 말을 해주겠어요? 사과하려고 한 전화인데?”
“지금은 뭐라도 바라야지. 기적이라는 게 있잖아.”
“기적은 무슨…….”
매니저는 불만이 가득한 곽연지의 미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사장님한테 좀 다녀올게. 연습 열심히 하고 있어!”
곽연지는 툴툴거리며 연기 연습에 몰입했다.
오디션용 대본만 봐도…… 그렇게 쉬운 역할은 아니었다.
이 짧은 대본에서 잡아낼 수 있는 건…… 당돌함인가? 약간 미친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문화신문 이소희 기자입니다. 지금 하신 말씀 녹음됐는데, 신문 1면에 한번 까발려볼까요? 어떻게 될지 저는 엄청 궁금한데? 혹시 대표님은 안 궁금하세요?”
곽연지는 작은 펜을 까딱까딱 흔들며 마치 녹음기를 들고 있다는 듯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뭔가 어색했다. 표정인가? 아니면 움직임인가?
곽연지는 캐릭터 해석을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상상을 하며 그 캐릭터에 자신을 몰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대사를 읽었다.
“뒤에서 당신 모가지 노리고 있는 사람들 줄 세우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 세울 수 있을걸? 날 도와주든가, 아님 모가지 날아갈 때 후회나 하든가. 골라.”
이런 역할은 처음이었다.
대사를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에 곽연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하고 싶다.
주인공 옆에서 백치미를 풍기며 멍청한 표정이나 짓는 꽃병 노릇이 아니라 진짜 연기를 하고 싶다.
기대를 정말 하기 싫었지만, 대사를 연습할 때마다 올라오는 희열에 곽연지는 점차 걱정이 됐다.
“아…… 진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