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21
제6화 휘날리는 붉은 깃발
몸집이 비대한 귀족은 공포에 물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옷과 열손가락 모두에 끼어져 있는 보석반지를 보고 있으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귀족은 허겁지겁 기어 두 명의 남자 뒤로 몸을 숨겼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남자.
두 남자는 몸집이 비대한 귀족에게 짧게 대답하였다.
“걱정 마십시오. 자작님.”
미디어가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고위급 마법사란 그리 흔치 않다. 대국에 채 백 명이 되지 않는데 그중에 자신이 속한다.
“가자. 미디어.”
기사 체렌이 검을 뽑아 들었다.
두려움을 지우려는 듯 강하게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크크큭.”
소면혈객 위민천, 혈지추객 위민걸, 추룡팔수 위민기. 위민 상형제는 실소를 흘렸다.
귀영살검과 음마천주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로스엔 병사들의 피를 뒤집어쓴 다섯 사파고수는 여유로움 그 자치였다.
“어,어서. 저놈들을 죽여라!”
상업도시 포스로의 캐스빌 자작이 외쳤다.
“예!”
미디어와 체렌이 대답했다.
미디어는 지팡이를 사파고수 쪽으로 가리켰다.
저들은 실수하였다.
마법사인 자신에게, 메모라이즈 해둔 마법의 룬을 떠올리는 시간을 줬던 것이다.
“아이스 필드(Ice Field)!”
지팡이에서 푸른 마나가 쏟아져 나왔다.
흡사 번개 같다.
바닥에 부딪쳤다. 그러자 바닥은 급속도로 사파고수들 쪽을 향해 얼기 시작했다.
아이스 필드에 닿는 모든 것들은 얼려졌다.
장롱도. 탁상도. 의자도. 커텐도.
비로소 캐스빌 자작의 얼굴에 뭉쳤던 근육들이 풀어진다.
소면혈객이 뛰었다.
얼음위를 가뿐히 날았다.
미디어와 체렌은 당황하였다.
이런 경우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전 오십 기사들과의 접전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야 했다. 저들의 몸놀림은 상식을 뛰어 넘는다.
챙!
소멸혈객의 검과 기사 체렌의 검이 부딪쳤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체렌의 경지는 그것이었다. 체렌은 강력한 힘에 이를 악물었다. 이빨 사이로 선혈이 흘러나왔다.
“어섯!”
“꽤 무공을 익힌 것 같다만. 이류에 불과하다.”
소면혈객은 냉정하게 체렌을 평가하였다.
“웃기는 소리!”
체렌이 검을 튕기며 다데스 제 3검술의 수법으로 검을 놀렸다. 세 개의 뱀머리? 아니다. 검이 세 개처럼 보이는 교란 검술중 하나다.
소면혈객은 코웃음 쳤다.
“변초도 매우 치졸하기 짝이 없군.”
소면혈객이 단 한 번 검을 내저었다.
체렌이 검을 놓쳤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체렌의 검이 허공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체렌은 뒤로 몸을 튕겼다.
다급하게 외쳤다.
“미디어!”
미디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체렌이 시간을 끌어준 덕에 고위급 주문을 떠올렸다.
“어딜?”
음마천주가 줄을 튕겼다.
이계의 사술가들이 시전하는 사술들은 귀찮기 짝이 없다.
음마천주의 금에서 높은 고음이 튕겨져 나왔다.
일인을 대상으로 한 음공 음인지광!
음마천주가 수준 높은 음공의 고수가라는 것을 증명 한 것과 같다.
미디어는 귀가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팟!
갑자기 그의 귀에서 피가 솟구쳤다.
“미디어!”
그게 체렌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소면혈객의 검날이 체렌의 등 뒤로 삐쳐 나온 것이 보였다. 검 끝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체렌은 생명을 잃고 쓰러졌다.
탁.
음마천주. 혈지추객. 귀영살검. 추룡팔수.
네 고수는 캐스빌 자작쪽으로 걸어갔다.
“어……어…….”
두려움에 말이 나오지 않는 캐스빌 자작.
‘이들은……악마야. 악마…….’
“제,제발 목숨만은.”
두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기 시작하였다.
귀영살검이 검을 치켜들었다.
한번 피를 본 이상 막바지까지 돌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으악!”
검이 휘둘러지지도 않았는데도 캐스빌 자작은 비명을 질렀다. 캐스빌 자작은 정신을 잃었다.
― 안 돼.
추룡팔수의 전음.
― 큭.
귀영살검은 힘겹게 검을 거뒀다.
소면혈객이 고위 마법사 미디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디어는 귀를 움켜 잡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 전하의 명을 잊지 말자. 소면혈객.
또다시 들려오는 추룡팔수의 전음.
― 잊지 않고 있다.
소면혈객이 미디어의 혈도를 짚었다. 미디어는 귀를 움켜잡은 상태로 굳어버렸다.
― 창밖을 봐라.
귀영살검의 전음이 들렸다.
창밖에는 살아남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군집해 있었다.
― 전하의 명을 받들어 기껏 살려주었더니 또 덤비려는 건가?
― 모르지.
귀영살검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성의 오층 높이란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영살검은 매우 가뿐하게 착지 하였다.
“공……공……공격하라!”
몇몇 살아남은 기사들이 병사들을 선동한 모양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되려 귀영살검이 뿜어내는 살기에 제압당했다.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무릎을 꿇었다.
병사들의 선동을 주도한 기사는 총 다섯 명.
― 저들은 처리한다.
― 좋다.
― 방해물은 제거할 뿐.
사파고수들의 전음이 오갔다.
슉!
그들의 손에서 병기가 떠났다.
병사들을 선동한 기사 다섯은 이유도 모른 채 쓰러졌다.
“본국의 황제 폐하께 감사해라! 폐하의 자비로운 명이 없었다면 너희들에겐 목숨이란 없다!”
귀영살검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주첨기의 눈이 번뜩였다.
주첨기에게 달려들던 병사들 수십 명이 단번에 튕겨져 나갔다. 날 잃은 파이크가 어지럽게 허공으로 날려졌다. 튕겨 날아간 병사들이 다른 병사들 위를 덮쳤다. 마치 도미노처럼 병사들이 쓰러졌다.
“으……으…….”
주첨기를 보자마자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명색이 ‘근위’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데!
“공격하라!”
기사들이 앞장서 외쳤다.
주첨기가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해 집게 손가락을 튕겼다.
탄지!
외쳤던 기사들은 혈도를 제압당해 순간 굳어버렸다.
주첨기가 앞으로 걸어갔다.
당당하다.
또한 그 모습은 매우 거대하였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주첨기가 막 성 입구의 계단으로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성의 양 모퉁이에서 병사들이 쏟아져나왔다. 뿌연 먼지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그 수가 삼천이 넘는다!
주첨기가 좌우를 한 번씩 노려보았다.
병사들은 멈춰 섰다.
“돌……돌……돌격!”
기사의 외침.
이미 겁을 지레 먹은 기사의 호령은 소용없었다. 병사들은 머뭇거리며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다. 기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급기야 기사 자신이 먼저 튀어나가기 시작하였다.
팟!
주첨기의 손에서 청강검이 떠났다.
청강검은 기사를 향해 날아갔다.
“으악!”
기사가 놀라 허겁지겁 검을 휘둘렀다.
청강검의 기사의 검을 단번에 잘라 버렸다.
청강검이 기사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기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뎅강!
청강검은 기사의 목을 베어버렸다.
주첨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속전속결.
빠르게 황성을 점령한다.
병사들을 이끄는 몇몇 기사들이 보였다. 은갑으로 전신을 무장한 그들은 모두 머뭇거릴 뿐 전의는 없어보였다.
“흠…….”
주첨기가 중얼거렸다.
청강검이 주첨기에게 돌아와 그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주첨기의머리 위 다섯 뼘 위에 청강검이 떠 있다.
“흡.”
주첨기가 눈을 부릅떴다.
청강검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푸른색의 내력은 거침없이 피어올랐다.
“아……아…….”
로스엔 병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며, 절대 지지 않는 오러블레이드.
그 차원을 넘어섰다.
“막……막아라!”
한 기사가 용기를 내어 말을 몰았다.
“와아아아!”
절대적인 공포가 지성을 마비 시켰던 것일까?
넋 잃고 바라보던 병사들은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마냥 주첨기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였다. 성벽위의 궁병들도 활을 쏘았고. 마법사들도 일제히 외쳤다.
“파이어볼!”
수천발의 화살. 그리고 수백 개의 화염 덩어리. 주첨기를 향해 달려드는 수천 병사와 기사들.
화살과 화염 덩어리들이 주첨기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주첨기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았다.
푸른 내력들이 주첨기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호신강기다.
콰콰콰콰콰쾅!
수백발의 마법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주첨기의 주위에서 폭발이 터졌다.
이는 연기가 주첨기의 몸을 뒤덮었다
“끝났다!”
마법사들이 환호하였다.
“우와아아!”
돌격하던 기사들과 병사들도 멈춰 섰다.
황성 마법단 전원이 토해놓은 마법을 맞고 살아난 사람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없다는 게 옳은 말이다.
주첨기의 죽음을 확신하였다.
바람이 불었다.
“헛!”
몇몇 기사가 신음을 토했다.
바람에 실려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람의 인영이 얼핏 보였다.
주첨기였다.
“이럴 수가…….”
마법사들의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꿈에서조차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현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주첨기는 눈곱만큼의 피해도 없었다.
“각오하라!”
주첨기가 양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에 맞춰 청강검이 허공에서 회전하였다.
검기가 토해졌다.
주첨기를 중심으로 팔방을 향해 검기가 몰아쳤다.
내력의 태풍.
그것을 막아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콰과광.
엄청난 폭발음이 일었다.
대지는 뿌연 먼지로 뒤덮였고.
“으악!”
히이이잉.
말울음소리와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혼잡하게 어우러졌다. 주첨기는 바로 몸을 튕겼다.
성곽 위로 착지하였다.
“악!”
궁병들이 활을 버리며 도망쳤다. 심지어 그 높은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자들까지 있었다. 주첨기가 싸늘한 눈빛을 한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주첨기의 손에 들린 청강검에선 엄청난 검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주첨기가 걸을 때마다 주위를 압도하는 그의 기운은 점점 커져만 갔다. 몇몇 용감한 궁병들이 이를 악물며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화살은 주첨기의 몸에 닿기도 전에 불타 없어졌다.
주첨기의 몸 바로 앞에서.
“모두 더 이상 반항 하지 말라!”
주첨기가 외쳤다.
성 전체가 흔들렸다.
주첨기가 앞으로 몸을 튕겼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탁 탁’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수십…… 수백…… 번의 소리.
그 소리는 로스엔 병사들의 혈도를 짚는 소리였다. 주첨기가 지나간 자리 뒤로 마비된 병사들이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흡사 한자리에 병사 밀랍인형들을 모아 놓은 듯하였다.
그때였다.
“화이어 에로우!”
마법사들이 외쳤다.
마법사들의 다채로운 눈동자에 주첨기를 향해 날아가는 수십 발의 불화살이 맺혔다.
화염의 마법.
마법사들은 일전을 떠올리며 속사하였다.
한 마법사당 서너 개의 불화살을 토했다.
수백. 수천에 이른 불화살이 날아갔다.
“흥.”
주첨기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청강검을 휘둘렀다.
수미터 이상 오른 검기가 반원 모양을 이루며 날아갔다. 해일처럼 몰아치는 검기가 수천 개의 불화살들을 집어삼켜 버렸다. 주첨기의 전신을 꿰뚫기 위해 생성된 마법이라기엔 너무나 무색하였다.
검기는 불화살들만 집어삼킨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단 위를 덮쳤다.
“실드!”
마법사들이 급히 외쳤다.
하지만 실드 따윈 주첨기의 검기 앞에선 너무도 무력했다.
검기는 너무나 간단하게 실드를 베어버렸다.
쾅!
폭발음함께 성 외곽이 무너졌다.
마법사들이 무너지는 성과 함께 밑으로 추락하였다. 간혹 비행 주문인 레비테이션을 시전하고 위로 날아오른 마법사들이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날아온 검기가 무참하게 그들 위로 쏟아졌다.
“으악!”
마법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들이 이끄는 병사들에게 처음 토해냈던 검기 자국.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면은 깊게 갈라져 있었다. 주위로 수백 명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저기닷!”
성의 모퉁이에서 또 다른 병사들이 튀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적게 잡아도 일만!
그들은 주변 상황을 보고선 입을 쩌억 벌렸다.
단 일인에게 오천이 넘는 병력이 깨졌다. 더군다나 마법사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가.
“어떻게 된 건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폴슨 백작이 말했다.
“보……다……시피”
근위대장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군! 나를 따르라.”
폴슨 백작이 망토를 벗어젖히며 외쳤다.
와아아아!
다시 사기는 증진 되었다.
황성 근위병들은 폴슨 백작과 합류 하였다.
성의 외곽에서 홀로 서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 용의 눈을 한 매서운 눈빛의 청년. 검은 장포를 펄럭이며 무섭게 솟아올랐다.
주첨기가 폴슨 백작을 향해 뛰었다.
“잡아라!”
폴슨 백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수십 개의 파이크들이 하늘을 향해 뻗쳤다.
주첨기가 검을 한번 휘둘렀다.
뻘건 피가 파파파팟 하고 곳곳에서 튀겼다.
폴슨 백작을 낚아챘다.
주첨기의 눈과 마주친 폴슨 백작은 입만 뻐금 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주첨기가 단칼에 폴슨 백작을 베었다.
적장을 베고 사기를 꺾어, 한순간에 제압한다.
이른바 속전속결(速戰速決)!
“……백작님!”
병사들이 부르짖었다.
주첨기가 병사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병사들도 주첨기를 공격하였다. 주첨기가 가볍게 파이크들을 피했다. 여러 개의 파이크가 겨드랑이, 다리 사이, 어깨 위, 허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은 경악스러웠다.
주첨기는 내력을 응집하고 있었다.
주첨기가 손을 크게 휘둘렀다.
“흐어어어업!”
팟!
모았던 내력을 한번에 터트렸다.
강력한 기풍이 불어 나왔다. 매우 뜨뜻한 그 바람은 병사들의 전신을 와락 덮쳤다.
“으악!”
주위 병사 일천여명을 가볍게 날려버렸다.
주첨기가 좌우를 향해 장을 내뻗었다.
인간 길을 터주듯 수백 수천 명의 병사들이 일렬로 쓰러 졌다. 주첨기가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회전시켰다.
태극의 모양대로 손이 움직였다.
“으아악!”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땅에서 역천한 바람이 병사들을 수십 명씩 날려 버리고 있었다.
주첨기는 가만히 섰다.
늘어트린 검에서 검기가 타오르고 있었고 주위는 신음 소리로 가득하였다.
일만여 명에 육박하는 병사들은 모두 겁먹은 생쥐 꼴로 변해 버린 상태였다.
주첨기 반경 수십 미터 안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자살이다.
“모두 항복하라! 계속 반항한다면 짐은 더 이상 용서치 않겠다.”
주첨기가 외쳤다.
용서라니?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뭐였단 말인가?
지금도 이 모양인데 이 이후로는?
병사들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기사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주첨기가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푸른 내력이 일렁거리며 밝게 빛났다.
“모두 짐의 청강검 아래 무릎을 꿇어라!”
와락!
주첨기의 음성이 터졌다.
몇몇의 병사가 놀라 무릎을 꿇었다.
이미 전의는 사라졌고 사기는 무참히 짓밟혔다.
신명국의 왕.
단 한 명에 의해서!
모든 로스엔 병사들은 무릎을 꿇었다.
부르르……
무릎 꿇은 기사들은 몸을 떨었다.
자신들이 몸을 떨고 있는지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주첨기가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미 끝났다.
“로스엔의 수도는 짐의 대국인 신명대국이 점령 하였다.”
주첨기가 말했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단 일인에 의해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무릎 꿇은 모두는 침통스러운 얼굴이었다.
신명국의 왕 그의 무위는 신에 범접한다.
팟!
갑자기 주첨기가 지면을 박찼다.
머리 위 하늘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높게 오른 웅장한 로스엔의 황성. 그 벽을 향해 주첨기가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움직였다. 검기는 예리하면서도 굵게 성벽을 깎았다.
번쩍이는 검기.
한참을 휘두르던 주첨기가 바닥으로 착지하였다.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거대한 문자가 황성의 정면에 박혀 있었다.
신(新)!
명(明)!
대(大)!
국(國)!
웅장한 필체다.
주첨기는 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호들갑을 떨고 있던 시녀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일전에 한번 와 본 곳이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었다.
주첨기가 걸어갔다.
황성 안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부다 파악한터.
그렇지 않더라도 주첨기의 기도에 병기를 잡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애꿎게 목숨을 버릴 이유 따윈 없었다.
병사들은 벽에 붙으며 무릎을 꿇었다.
“이곳이군.”
주첨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문을 열었다.
커다란 문이 활짝 열리며 붉은 카펫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게 이어진 붉은 카펫의 끝자락엔 계단이 있었다.
열층 정도로 이루어진 계단 위로 황제의 자리.
용좌가 있다.
주첨기는 붉은 카펫을 밟았다.
“당신은 절대 그곳에 앉을 수 없다!”
소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제 갓 사춘기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소년이 뒤에서 뛰어왔다.
한 자루의 검을 쥔 소년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화려한 금색 예복을 입은 소년.
“로스엔의 황자군.”
주첨기가 말했다.
“당신은 절대 황제 폐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왜지?”
“왜라니!”
“난 황제다.”
소년은 말이 막혔다.
적국의 왕은 자신이 꿈꿔오던 황제의 모습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도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눈빛 그리고 강력한 힘이 담긴 목소리.
“그……그래도. 안 돼. 그곳은 황제 폐하께서 내게 물려주실 자리! 당신 따위는 앉을 수 없어.”
주첨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훗. 형제가 있나?”
엉뚱한 물음.
“있다!”
“네가 제일형왕이군.”
주첨기가 추측해서 말했다.
주첨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년의 모습에서 제일 보건형왕이 떠올랐다. 황제에 대한 욕심과 패기 넘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보건형왕이다.
“날 막지마라. 널 죽이기 싫으니…….”
주첨기는 소년은 무시한 채 걸었다.
“안 돼!”
소년이 뒤에서 달려왔다.
주첨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쪽으로 세 손가락을 튕겼다.
양 무릎과 미간!
소년은 무릎이 꿇려졌다.
혈도도 제압당해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주첨기는 로스엔의 용좌에 앉았다.
“남아 있는 모든 대신과 황족을 모셔라.”
문밖의 청년 귀족을 향해 말했다.
황자를 막기 위해 달려왔던 청년 귀족은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더군다나 전장으로 떠나지 않은 모든 대신과 황족을 소집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결국 모든 황족과 대신들이 소집되었다.
그들은 용좌에 앉아 있는 주첨기를 발견하였다. 모두의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어찌…….”
한 황족이 나서려 하였다.
“패국은 말이 없다!”
주첨기가 단번에 그의 말문을 막았다.
황족과 귀족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주첨기가 내력을 일으켜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모두 주첨기를 향해 무릎 꿇었다.
“너희들은 모두 신명대국의 포로다. 알겠는가?”
주첨기가 뇌까렸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 흘러넘쳤다.
“예…….”
그들은 힘없이 대답하였다.
“포로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신명국의 왕이여. 당신의 말이 맞다. 패국은 말이 없는 법! 차라리 나를 죽여라. 더 이상 본국이 수치 당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혈도를 풀어준 후 잠자코 있던 황자가 외쳤다.
주첨기는 황자를 노려보았다.
“타인의 손아래 죽는 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법!”
주첨기가 황자를 쏘아 붙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내 말리지 않겠다!”
주첨기는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자는 일어났다.
입구 옆의 병사에게 다가가 그의 장검을 빼앗아 들었다.
“황자 전하!”
황족과 귀족들이 놀라 외쳤다.
챙!
“말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짐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
“크윽.”
황자는 자신의 목에 칼을 댔다.
칼끝이 부르르 떨렸다.
목 끝이 살짝 베였다.
한 방울의 피가 칼날을 타고 흘렀다.
황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큭.”
뎅그랑.
장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황자는 차마 자신의 목을 베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수치스러움과 자신에 대한 분노로 울상이 되었다.
“로스엔국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터.”
주첨기가 황자를 향해 말했다.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겼다.
주위는 피로 강을 이루고 있었고 시체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피에 젖은 머리칼을 휘날렸다.
어디에서도 본래의 백발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키키키.
노인은 권을 뻗었다.
파천마권중 제 일초식 적광뇌락!
벼락처럼 떨어지는 권기.
암석만하게 보이는 권의 형상이 로스엔 병사들을 덮쳤다. 수십 명씩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노인이 다음 사냥감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부분 도망쳐 몇 남지 않았다.
아쉽게도 끝났다.
노인은 내력을 거둬들이며 괴상하게 웃었다.
“키키키.”
수라혈마였다.
수라혈마가 제 이의 수도라 불리는 프린트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저곳이다.
뇌락같이 권기를 날렸다.
쾅하고 성벽이 무너졌다. 성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수라혈마가 몸을 솟구쳤다.
피에 젖은 괴상한 노인이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프린트의 영주 아카밀 백작은 크게 놀랐다.
가족들을 부둥켜안았다.
“오……오지마!”
아카밀 백작이 말했다.
“낄낄.”
너무 무서운지라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공포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백작의 어린 자식들은 숨을 헐떡였다.
“감히 본좌에게 검을 겨누면 안 되지.”
수라혈마가 몸을 훽 돌렸다.
쏜 살같이 입구의 기사단 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악.”
아카밀 부인과 자식들이 비명을 질렀다.
수라혈마는 그것을 즐기는 눈치였다.
자신들의 수호 기사들을 처리하고 돌아온 피에 젖은 노인. 악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라혈마가 아카밀 백작의 가족에게 다가갔다.
“오지마!”
아카밀 백작이 검을 빼 들었다.
“본좌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낄낄.”
수라혈마는 아카밀 백작의 검을 잡아 옆으로 꺾었다. 검은 드워프제 스워드로 명검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간단하게 두 동강 나버렸다.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만…….”
제자의 명령이 있었다.
수라혈마가 아카밀 백작과 가족들의 혈도를 짚었다.
그러고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성탑 꼭대기로 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성문 밖으로 도망치는 병사들의 수가 매우 많았다.
수라혈마는 낄낄 거렸다.
탑 꼭대기엔 로스엔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수라혈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던 로스엔 병사들의 피가 손끝으로 튕겨져 나갔다.
피가 로스엔 국기를 물들였다.
국기가 펄럭였다.
신명(新明).
피로 적은 글자가 국기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귀영살검과 음마천주 그리고 소면혈객은 급히 몸을 날렸다. 그들의 손에는 하얀 천 한 개씩이 들려 있었다.
병사를 처단하고 영주를 사로잡았다.
남은 일은 하나였다.
귀영살검이 먼저 성벽을 타고 올랐다.
― 내가 하지.
― 그렇겐 안 돼.
― 제기랄!
귀영살검의 경공이 우월했다.
펄럭이고 있는 로스엔의 국기를 발견하였다.
― 저것만이라도!
음마천주가 금줄을 튕겼다. 진동하는 음파가 국기가 걸린 게양대 윗부분을 꺾어 버렸다.
로스엔의 국기가 밑으로 떨어졌다.
고인 피위 떨어진 국기는 빨갛게 물들어갔다.
귀영살검이 천을 날렸다.
천의 옆 부분이 계양대에 휘감아졌다.
하얀 천이 게양대에 걸려 펄럭인다.
― 내거다!
소면혈객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검은 이미 휘둘러졌다.
“안 돼!”
귀영살검과 음마천주가 동시에 외쳤다. 반면에 소면혈객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날아간 검기가 신명(新明)의 글자 모양대로 천을 꿰뚫었다.
크르르.
흡사 멧돼지처럼 웃는 사내가 게양대 쪽으로 걸어갔다. 주위엔 피와 시체만 있을 뿐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도망쳤다.
사내의 이름은 장응칠. 별호는 광태랑으로 혈마교 내에 미친 멧돼지라고 잘 알려진 자였다.
광태랑은 로스엔의 국기를 올려다보았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딴 것은.”
게양대를 뿌리 채 뽑아버렸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옆으로 내던졌다.
“저것이 좋겠어.”
휘두르면서 가지고 놀았던 암석이 보였다. 광태랑의 육중한 몸보다 더욱 거대한 암석이었다. 암석은 옆면으로 튀긴 병사들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광태랑은 암석에 다가가 한번에 들었다.
게양대가 있던 자리에 암석을 내려놓았다.
암석의 윗부분에 집게손가락을 박았다.
푹.
그리고 그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신명대국(新明大國)”
군사 요충지 젤 요새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다.
신명국의 다섯 고수에 의해 점령당했다.
“국기는 어디 있지?”
청광사신의 섬뜩한 푸른 눈이 발광하였다.
“크윽.”
요새의 수장 헤터밀 남작이 신음을 흘렸다. 사파 고수들의 의도를 꿰뚫었다. 비참하게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가리켰다.
청광사신과 사파고수들이 미소를 지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다.
청광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장비가 쥐고 있던 단검을 내던졌다.
쨍그랑!
창문이 깨졌다.
단검은 로스엔의 국기를 무참히 찢고 지나갔다. 소리장비가 품안에서 붓 하나를 꺼냈다.
먹은 필요 없다.
깔린 것이 먹 아닌가?
기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고인 피에 붓을 적셨다. 그리고 커텐 한 자락을 찢었다.
소리장비가 멋지게 붓을 놀렸다.
신명대국(新明大國)이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만들어졌다.
그것에서 혈향이 짙게 풍겼다.
“멋지군.”
“당연하지. 크크.”
소리장비가 웃으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커텐 자락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매 같았다.
로스엔 국기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커텐 자락이 걸렸다. 금방이라도 붉은 글자에서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붉은 글자.
그것을 본 병사들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신명대국의 국기로 변모한 커텐 자락이 멋들어지게 펄럭였다.
로스엔의 전역에 붉은 깃발이 펄럭인다. 깃발의 색은 본디 붉은색이 아니다. 피에 젖은 것으로 그 위에 신명대국이란 글자가 선명히 박혀 있다.
신명대국!
로스엔의 경제,상업,군사 중요 도시들이 전부 점령당했다.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극소수의 인원으로 말이다. 극소수가 대군을 무찌르고 점령 하였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멀리서 펄럭이고 있는 신명대국의 붉은 국기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는가?
황제 아실리안은 몰랐다.
신명대국의 붉은 국기가 자신의 나라를 뒤덮고 있는지……
“몬스터는 다 어디로 간 것이지?”
황제 아실리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군을 시작한지 삼일이 지났다.
진군할 당시 몬스터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계책까지 짜놨었다.
그러나 그동안 몬스터들의 침입이 없었다.
이곳은 명색이 드래곤의 평원이다.
수많은 대형급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 그 탓에 대륙민들이 이곳을 두려워한다.
“폐하,”
아스틴 공작이 황제 아실리안 곁으로 말을 몰았다.
“무슨 일이느냐.”
“진군을 시작한지 삼일이 지나도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코볼트라도 보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스틴 공작도 황제 아슬리안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상하군. 어쨌든 좋은 일이 아니더냐.”
“예. 폐하.”
아스틴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다다닥. 다다닥.
투석기 수십 대가 굴러가는 소리는 요란하였다.
이십만 대군!
황제 아실리안과 아스틴 공작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대군의 행렬에 몬스터들이 기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상은 그들의 추측과 정 반대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이미 사파고수들이 서부 근방의 몬스터들을 토벌했다.
“얼마나 남았는가?”
“지금의 속도라면 이틀정도 걸릴 것 입니다. 폐하.”
“늦군. 진군 속도를 조금 높인다. 본국을 능멸한 사악한 무리들을 하루빨리 처단한다!”
“예!”
아스틴 공작이 뒤로 손짓하였다.
부우!
나팔 소리가 울렸다.
병사들은 긴 깃대를 좌우로 흔들었다.
병사들의 진군 속도가 좀 더 빨라졌다.
황제 아실리안이 미소 지었다.
평원을 온통 뒤덮은 자신의 병사들! 이대로 신명국이란 무리들을 처단하고 드래곤의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율리안과 에드먼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절호의 기회!
평원의 여러 요새를 중점으로 주둔하여 시간을 끈다면 불리한 건 그들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몬스터들의 침입이 없다는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저 멀리서 급보의 깃을 단 필마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병사는 로스엔의 본토에서부터 달려왔다.
“멈춰라.”
친위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폐하. 사이폰에서 왔습니다.”
전령은 다급한 와중 예를 갖췄다.
본국에서 급히 전령을 보낼 일은 없다.
황제 아실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더냐?”
아스틴 공작이 물었다.
“사이폰이 적군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전령이 말했다.
쿵!
뒤통수가 맞은 듯한 충격이다.
“뭣?”
황제 아실리안이 말꼬리를 올렸다.
“머티온 자작님께선 포로로 잡히셨으며 이것은 머티온 자작님께서 보내신 친필 서안이옵니다.”
전령은 아스틴 공작에게 서안을 내밀었다.
아스틴 공작은 서안을 받아 황제 아실리안에게 전해 주었다. 황제 아실리안이 서안을 펼쳤다.
[폐하. 신이 능력이 부족하여 도시를 적군에게 빼앗겼사옵니다. 신과 가솔, 그리고 이천여 명의 병사는 적군의 포로가 되었사옵니다. 신의 불찰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인 자신에게 올리는 서안이다.
그러나 형식도 갖춰지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이는 둘 중에 하나다.
매우 급했거나!
혹은 적군의 계략이다.
얼굴이 벌게진 황제 아실리안은 서안을 땅으로 내동댕이쳤다.
“넌 누구냐!”
아실리안이 검을 빼 들었다.
전령의 목을 향해 겨눴다.
“폐,폐하.”
“이것을.”
전령은 머티온 자작의 명패를 내밀었다. 귀족으로 작위를 세습 받거나 임명 받을 때 황제가 친히 내려주는 명패였다.
“크큭.”
아실리안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검을 휘둘렀다.
명패를 쥔 전령의 팔이 잘려져 나갔다.
“으아악.”
전령이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따위 계략에 넘어갈 듯 싶으더냐. 짐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던가.”
눈에 뻔히 보이는 계략에 넘어가 병력을 우회 할일은 없다.
아실리안이 전령을 가리켰다.
“적군의 첩자다. 이놈을 당장 끌고나가 사형 시켜라!”
“예!”
기사들이 눈빛을 보냈다.
병사 네 명이 뒤에서 튀어나와 전령을 끌고 나갔다.
“으악!”
잠시 뒤 전령의 비명이 들렸다.
그러고는 조용하였다.
잠시 소동이 있었지만 진군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갔을까.
뒤에서 또 다른 필마가 전속력으로 내달려 왔다.
급보의 깃발이 달려 있다.
황제 아실리안과 아스틴 공작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티네에서 왔습니다. 폐하!”
전령은 말에서 내려 뛰어왔다.
황제 아실리안이 아스틴 공작에게 눈빛을 보냈다.
귀찮다는 듯한 눈치였다.
아스틴 공작이 외쳤다.
“당장 이놈을 사형 시켜라!”
“옛?”
전령은 황당하였다.
뒤에서 네명의 병사가 전령의 어깨와 팔을 잡았다. 전령이 당황하며 외쳤다.
“폐하! 폐하!”
“듣기 싫다.”
황제 아실리안이 손을 내저었다.
빨리 끌고 나가라는 신호다.
“폐하!”
병사들은 무참히 전령을 뒤로 잡아당겼다. 전령의 다리가 땅에 질질 끌렸다.
그때였다.
“곤드에서 왔습니다.”
또 다른 전령이 뛰어와 고개를 숙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스로에서 왔습니다.”
“젤 요새에서 왔습니다.”
“프린트에서 왔습니다.”
전령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크…….”
황제 아실리안의 얼굴이 벌게져 그들을 모두 가리켰다.
막 ‘모두 사형 시켜라!’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질풍처럼 달려온 소년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폐하! 황성이 점령당했사옵니다.”
“황……황자!”
황제 아실리안이 눈이 휘동 그래졌다.
이번에 도착한 전령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인 황태자 클레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