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27
제5화 문과와 무과
문과와 무과를 통합한 과거를 보게 되었다.
두 통합 성적이 낮은 삼백팔십오 명에게 자작계열의 관직을 수여한다. 따라 통합 성적이 뛰어난 십오 명이 선출 되는데 그중에서도 다섯을 후작 계열의 관직에, 열 명을 백작 계열의 관에 임명 할 것이다.
또한 일인의 문과 성적이 무과 수준보다 높으면 그는 문신이 되고, 반대로 무과 성적이 문과 성적보다 높으면 그는 무신이 된다.
이런 식으로 행해질 과거는 바로 진행되었다.
사백 명의 고수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널찍한 바닥에는 붓과 벼루 그리고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짓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굳히는 자도 있었다.
사파와 정파가 서로 엇갈려 앉게 되었다.
앞뒤로도 엇갈려 사방은 서로 다른 파의 고수들로 둘러싸였다.
주첨기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가만히 먹을 갈고 있던 고수들이 주첨기를 올려다보았다.
“문과는 상상상,상상중,상상하. 이렇게 이십칠 단계로 등급을 나누게 될 것이다. 문제는…….”
모두의 정신이 집중되었다.
낄낄거리며 웃던 사파 고수들도 웃음을 멈췄다.
주첨기가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쳤다.
“금일 신시까지. 제일(第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니이다. 제이(第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제일과 제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라. 제삼(三)! 고(孤), 토(討), 평, 방(肪), 개(凱), 소(笑), 붕(繃), 염(鹽), 전(塡), 천(天)으로 천하 속 인간에 대한 또는 국가에 대한 시를 지어라. 제사(第四)! 자신을 피력하라.”
제일과 제이. 제사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문제다.
단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면 되기에 문제는 없다. 비록 높과 낮음은 문장의 수려함과 그 뜻에 있겠지만, 제삼의 문제보단 낫다.
열 개의 한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라?
평소에 쓰지 않는 희한한 한자도 많을뿐더러, 대부분 서로 연관을 찾을 수 없는 한자들이다.
주첨기는 그 말을 끝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라혈마가 재미있다는 듯 낄낄 거렸다.
“부정한 짓을 하지 말라! 본좌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키키키.”
“노부 또한 마찬가지다!”
진천과 수라혈마가 권고 하였다.
혜공이 힘들게 징을 쳤다.
지이이잉.
징이 울렸다.
이로써 과거는 시작 되었다.
앞쪽엔 수라혈마가 뒤쪽엔 진천이서 고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시작함에 있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만히 감고 있는 자도 있었고, 먹을 갈며 공을 드리는 자도 있는가 하면, 바로 쉴 새 없이 글을 써내려가는 자도 있었다.
고수들은 조금이라도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바로 앞과 뒤에 노기인. 아니 대장군님들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안공이 뛰어난 자도 두 대장군님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 더욱이 어딘가에선 지존이신 황제 폐하도 보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부정행위란 것은 자존심 강한 무인들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바짝 긴장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같은 나이로 비교했을 때.
정파고수들은 사파고수들보다 문에 뛰어나지만 무공의 성취는 약간 낮았다.
속성을 기본으로 하는 사파와 심오함을 기본으로 하는 정파와의 차이점이다.
이것은 대체적인 사파와 정파의 차이점일 뿐. 예외도 있다.
소리장비 한유진과 귀영살검이 그 예이다.
소리장비와 귀영살검은 살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류고수들의 대반수가 그렇지만, 특히 둘은 사파무림에서 머리가 영특하기로 천재들이었다.
다만 성격상 머리를 쓰는 일보다 행동으로 직접 나서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소리장비와 귀영살검은 서로 경쟁하듯 글을 써 내려갔다.
한 번도 멈춤이 없다.
마른 붓을 벼루에 담을 때도 그 동작이 필체의 연장선 같이 자연스러웠다.
시를 지을 때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시를 그대로 써내려가는 듯하였다.
문에 뛰어난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
미친 멧돼지라 불리우는 광태랑 장웅칠이 그러하다.
과거라니.
중원 무림을 활보하며 과거를 볼 줄은 죽어도 몰랐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붓을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은 이미 폭발할 듯 붉어져 있었다.
다른 건 고심 끝에 서술하였지만. 대체 작시만은 하지 못하겠다.
장웅칠은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옆에 앉은 매화일검은 망설임 없이 쭉쭉 써내려가고 있었다.
눈치껏.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차마 대장군들 때문에 그리할 수 없다. 그렇다 걸리면 쪽팔리는 건 둘째 치고 교주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장웅칠은 성질난 듯 붓을 아무렇게나 벼루에 담궜다.
괜히 애꿎은 붓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이윽고 붓이 끊어져 버렸다.
장웅칠은 낯빛을 잃었다.
손을 들었다.
“붓이 끊어졌습니다.”
씩.씩.
비단 장웅칠 만이 붓을 끊어 먹은 게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른 사파 고수들도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수라혈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음흉한 노인네. 진천이 속으로 비웃고 있을 걸 생각하니 화가 치솟았다.
그의 추측대로 진천은 수라혈마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수라혈마가 외쳤다.
“전부 본좌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혜공과 만소자가 새로운 붓을 사파고수들에게 전해 주었다.
막 그때.
매화일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장웅칠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매화일검을 올려다보았다. 매화일검은 매우 자신감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소리장비와 귀영살검 그리고 방각대사가 일어났다.
그들이 든 종이에서 먹 냄새가 물씬 풍겼다.
신중한 필체가 종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넷은 차례로 앞의 단상에 종이를 올려놓고 빠져나갔다. 그런 고수들은 그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넷은 각각 후문을 빠져나왔다.
“매화일검. 귀영살검. 소리장비. 방각대사”
그들을 황제 주첨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넷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수고했다.”
매화일검이 말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들어가 쉬거라.”
“예!”
넷은 길을 따라 걸었다.
“대사께서는 이번 과거가 어떠셨습니까?”
매화일검의 물음에 방각대사는 그저 웃기만 할뿐 대답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것으로 보아 방각대사도 자신처럼 막힘없이 써내려간 모양이다.
반면에 저들은 어떨까?
매화일검은 귀영살검과 소리장비를 보았다. 살수의 느낌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둘이라 거리감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귀영살검은 옆에만 있어도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장검을 등에 메고, 흑장포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소리장비는 이제 막 십대를 벗어난 듯 보이는 귀엽고 순진한 얼굴을 가졌다. 하지만 사실 사십 세가 넘어 간다. 그녀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은색 비수.
그녀는 목표물의 허리에 그 비수를 깊이 박은 후 빙그레 웃곤 하였다.
“두 분께서는 어떠셨소?”
“…….”
“…….”
두 사람도 아무런 말이 없다.
오직 혈행에 나섰을 때만 두 고수의 말문이 트인다. 매화일검은 그만 머쓱해져 화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성이 완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정원이 만들어졌다. 앞으로 더욱 보완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이렇게 조금이라도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시간이 지났다.
종료 시간인 신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매화일검과 귀염살검, 소리장비 그리고 방각대사가 떠난 과거장은 처음보다 열기가 더 많이 느껴졌다.
이 할이 넘는 백 여명은 종료하고 나갔다.
삼백여 명 정도가 남아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으아…….’
장웅칠과 다른 고수들은 울고 싶었다.
다른 이들의 종이는 빽빽한데 자신들 것은 아직 반절도 채워지지 않았다.
또 이대로 포기해 버리고도 싶지만 후를 생각하니 자존심이 용납이 안 된다.
누구는 대신으로 폼 나게 살고 누구는 졸신으로 고개 숙이며 살아야 하지 않은가.
장웅칠은 이를 악물었다.
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크하하핫!”
장웅칠이 대소를 터트렸다. 과거를 보고 있는 고수들의 시선이 장웅칠에게 꽂혔다.
“낄낄…… 광태랑! 죽고 싶은가? 죽고 싶으면 한 번 더 그 못난 이 드러내봐라. 키키키.”
수라혈마가 경고하였다.
광태랑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곧 그래도 좋다는 듯 히죽 거리며 붓을 들었다.
자신이 놀라웠다.
자신도 안다.
머리가 얼마나 돌인지.
그러나 하늘은 착한하는 자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아무튼 잘 모르겠지만 장웅칠은 중원에 있을 당시 거지에게 은자 한 냥을 적선 했던 것을 무척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머리라고 생각 못 할 번뜩한 생각에 신이 절로 났다.
장웅칠은 콧소리를 내며 써내려갔다.
다 쓴 장웅칠.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피고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단상 위에 종이를 올려놓으며 고개 숙인 고수들을 훑어보았다.
저기 멍청한 천혈삼괴는 아직도 백지다.
“크큭.”
광태랑 장웅칠은 그렇게 문과를 마쳤다.
이제 남은 사람들이 문제다.
하나둘 과거를 마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신시가 되도록 문과를 마치지 못한 자가 일백을 넘었다. 그들은 모두 울상이 되었다.
그들까지 빠져나가자 과거장 안엔 수라혈마와 진천만 남았다.
밖은 소란스럽다.
과거를 마친 고수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데, 갈수록 목소리들이 커져만 갔다.
어쩐 일인지 사파고수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낄낄……이번 과거가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야.”
사파고수들이 고뇌하는 모습을 직접 본 수라혈마가 말했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지.”
진천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진천은 수라혈마보다 여유로웠고, 일부러 보란 듯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눈깔이 있음 제대로 보시지? 위선탱이”
수라혈마가 문제를 가리켰다.
“황실의 대과가 저것이면 매우 간단한 것이다. 하긴…….”
진천은 뒷말을 흐렸다.
“하긴 뭐?”
“아무것도 아니다.”
진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등을 돌렸다.
“뭐? 말 안 해? 위선탱이.”
수라혈마가 진천의 앞으로 다가가 눈을 부라렸다.
“무공비급들을 심도 있게 이해하였다면 괜찮을 것이다. 너희들은 속성으로만 익히려 하니 어려운 것이겠지.”
“크큭.”
수라혈마가 얼굴을 굳혔다.
“좋아. 안 어려운 네가 한번 저 열개의 글자로 시를 지어 보시지. 위선탱이 늙은이. 그럼 본좌가 네놈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겠다. 못하면 네놈이 본좌에게 형님이라 불러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 백을 셀 동안이면 충분하겠지.”
“험험. 싫다.”
남모르게 진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를 수라혈마가 눈치 못 챌 이유가 없다. 수라혈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백. 구십구. 구십팔…….”
“싫다고 하였지 않은가? 이 추한 늙은이!”
진천이 언성을 높였다.
“구십칠. 구십육. 구십오…….”
수라혈마는 수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들 하고 계십니까?”
주첨기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폐하.”
진천은 내심 한숨을 쉬며 허리를 숙였다. 수라혈마가 진천의 옆구를 쿡 찌르며 ‘다음에 계속 하자고’ 전음을 보냈다. 진천은 고개만 가로 저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수라혈마 스승님.”
“낄낄…….”
주첨기는 고수들에 제출한 종이들을 한 장씩 훑어보았다.
진의 일소 왕희지 못지않은 명필도 있는가 하면 지렁이가 담장 넘어가듯 하는 악필도 있다.
문과는 이제 끝났다.
앞으로 남은 것은 이를 등급별로 나누는 것이다.
첫째. 문장의 수려함.
매끄럽고 심도 있는 뜻이 담긴 문장은 일인의 학식을 보여준다.
둘째. 글의 구성.
정도로써 논리를 이끌어내는 글은 일인의 학식을 보여준다.
셋째. 글자의 미.
자고로 서예는 일인의 모습을 반영하고 그의 현재 생각을 보여준다.
개국식이 끝나고 각국의 사절단원들은 당분간 그들이 머물 방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문과가 끝난 저녁 파티가 시작되었다. 아직 무과가 남았지만 타국의 대신들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모두 수고가 많았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각국의 대신들을 위해 주연…… 험 파티를 열었습니다. 좋은 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파티라는 이계어는 매화일검에게 생소하였다. 매화일검이 말을 하고 돌아갔다.
넓고 화려한 홀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음율.
이렇게 파티를 준비하게 된 것도 드워프들의 도움이 컸다. 황성 안 홀을 아름답게 꾸민 것도 그러하지만, 이계의 음악을 담아 놓은 마법구를 확성시키는 물품을 발명하였다.
성대하게 차려진 음식들이 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음식을 자신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신명국은 아직 인원이 부족하다. 그래서 황성 안에는 시녀도 없고, 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와인도 직접 따라 마셔야 했는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오!”
오히려 탄성이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오백 년이 넘은 프리만 와인이 아닌가?”
이터널국의 넥서스 백작이 말했다.
다른 나라의 귀족들도 넥서스 백작과 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프리만 와인은 대륙의 모든 와인 중 으뜸으로 치는 것이다. 프리만가가 만드는 와인은 출고되는 30년짜리부터 그 가격이 10골드가 넘어가는 아주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 지금 눈앞에 있는 프리만 와인은 오백 년이 넘은 것이었다.
가격을 매기기 힘들지만 굳이 매기라면 만 골드 정도? 웬만한 보석 값은 간단히 넘어버리는 가치를 지닌 와인이다.
와인이라기 보단 보물이다.
그것이 지금 50여개가 배치되어 있다.
귀족들은 와인을 마시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비단 와인뿐만이 아니다.
보물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자들은 이미 경악하고 있었다.
“헤르만디온. 크리샤의 춤. 비디스리온. 걸어가는 제리망, 축복받은 여신의 눈물.”
드리안국의 하일 백작이 보물들의 이름을 열거 했다. 테이블 위에 장식된 여러 조각상들의 이름이다. 그것들은 이미 많게는 수백 년 적게는 수십 년 전에 실종된 보물 중에 보물들이었다. 그 값어치는 프리만 와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신명대국에선 그런 보물들을 단순히 파티용 장식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또한 이것들을 감시할 사병들도 배치시키지 않았다.
“하일 백작. 이 장식품들은…….”
“그렇소. 모두 보물 중에 보물들이오.”
귀족들은 얼이 빠졌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쩌억 벌려졌다. 파티가 시작된 지 꽤 되었는데도 음식에 손을 가져가는 이 없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이 없다.
그때 매화일검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왜 음식들을 드시지 않는 것입니까?”
매화일검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이 와인을 마셔도 되는 것이오?”
마거크 국의 콜디스만 백작이 물었다.
“당연합니다. 마시기 위해 준비한 것이지 보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지요.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매화일검이 프리만 와인을 개봉했다. 곧바로 향긋한 향이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귀족들은 코를 킁킁 거렸다. 이것이 바로 오백 년 된 프리만 와인의 향이다. 감미로운 향기는 정신을 아늑하게 만들었다.
매화일검이 와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거크국 콜디스만 귀족은 얼떨결에 잔을 잡았다. 그 위로 금값은 아니 금보다 가치가 높은 와인이 쪼르르 소리를 내며 따라졌다.
“모두 와인을 개봉해 주십시오.”
그제야 귀족들은 와인을 개봉했다. 홀 안은 프리만 와인의 향기로 가득 찼다.
매화일검은 벽면 한쪽에 섰다. 그리고 황홀한 표정으로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술은 뭐니 뭐니 해도 중원의 고량주가 최고다.
‘그렇게 맛있나?’
매화일검은 한 병을 슬쩍 가져왔다.
한 모금 들이켰다. 한번도 맛보지 못한 향이 입에서부터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뒷맛은 깨끗했고 마실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웃!
중원에도 많은 술이 있지만. 이 와인이란 것은 정말 새로운 맛이다. 단순히 입만 축이려고 마셨던 것이었는데, 매화일검은 이미 한 병을 벌컥 벌컥 마셔댔다.
“캬~ 술은 바로 이 맛이야!”
그제야 매화일검은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 제가 나서보았습니다. 술이란 자고로 마시기 위해 존재하는데 망설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술로써 벗을 사귀고, 술로써 근심을 덜어내며, 술로써 인생을 돌아보니 술이란 좋은 것이 아닙니까? 마십시다. 그리고 호탕하게 취해봅시다 하하하!”
매화일검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문득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드먼 제국의 제논 크리스틴! 대륙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 하나 없다. 매화일검도 일찍이 눈치챈것이지만 홀안의 귀족들은 제논 크리스틴 공작을 무척이나 어렵게 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경외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매화일검입니다.”
매화일검은 포권하였다.
제논 크리스틴 공작은 신기한 자였다. 자신의 실력으론 내력을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대는 정말 술을 잘 이해하고 있군! 사양하지 않고 마시겠다. ”
제논 공작이 한 모금 들이켰다.
오백 년 된 프리만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에드먼 대제국의 제논 크리스틴 공작이 마셨지 않은가?
파티 속 대화는 무르익어 갔다.
비록 율리안 신성대국과 속국들이 빠졌다지만, 이렇게 많은 나라의 대신들이 모인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다.
“신명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요. 사실…… 국가라고 보기엔 너무나 작소. 일급용병단 정도의 규모 같아 보일뿐이오.”
콜디스만 백작이 반색하였다.
“넥서스 백작. 말을 조심히 하시오. 이곳은 신명국의 황성 안이오.”
“하지만 그렇지 않소?”
“무엇이 말이오?”
“규모 말이오.”
“신명국은 사백 기사만으로 로스엔국과의 전쟁에서 완승하고, 로스엔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소. 단 사백 기사만으로 말이오. 비록 백성 몇 백 밖에 되지 않는…… 황성에 하녀조차 하나 없는…… 해괴한 상태이지만. 바로 오늘 개국식을 치르지 않았소?”
“그렇소만.”
“드래곤의 평원은 몬스터들만 아니라면 축복 받은 땅이오. 내가 보기론 신명국은 몬스터 토벌을 문제없이 거행 할 것 같소.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 것이고, 국력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수가 있소.”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입안이 텁텁했다. 콜디스만 백작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내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오. 사실 신명국은 로스엔국의 자리를 대신하여 율리안 신성국과 에드먼 대제국과 같이 삼강국에 들지 않소?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하루아침에 어디서 이렇게 강한 이들이 단체로 나타났냐는 것이오. 사백 명 모두 소드 마스터란 소문은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소? 더욱이 이렇게 웅장한 황성을 짓고, 사라졌던 보물들이 장식품으로 나오고, 수백 년 된 특급 와인을 파티용으로 쓸 수 있는 자금력은…… 무엇이란 말이오. 그러니 마족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지 않소?”
넥서스 백작은 짐짓 심각하였다.
“우리들은 자국의 백성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잘 다스리면 그뿐이오. 나머진 에드먼 황제 폐하와 율리안국에서 해결할 것이오.”
“약국의 설움이라는 것이오?”
넥서스 백작은 서슴없이 말하였다.
“설움이라뇨. 자 마십시다.”
콜디스만 백작이 일부러 들뜬 표정을 지으며 잔을 내밀었다. 넥서스 백작은 후 하고 숨을 뿜었다. 와인을 들이켰다.
역시 오백 년 된 프리만 와인이다.
잠시나마 기분이 격앙됐지만 와인은 기분을 전환시켜주었다.
여기저기서 심각하고 가벼운 대화가 오고 갔다.
간간히 제논 공작에게도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때마다 제논 공작은 고개를 끄덕일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매화일검은 계속 제논 공작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뜻 방각대사에게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에드먼 제국에서 내력을 종잡을 수 없는 노고수를 사신으로 보내왔다고.
단순한 노고수가 아닌……
‘저자는 절정고수다.’
제논 공작의 고개를 돌렸다. 매화일검과 시선이 부딪쳤다. 매 같은 눈빛이 매화일검의 눈동자를 관통하였다. 매화일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리깔았다.
애꿎은 와인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절정고수…….’
매화일검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에드먼 제국의 제논 크리스틴 공작은 자신의 무위를 월등히 뛰어넘는다.
이계에도 이런 절정 고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우월감?
솔직히 이계에 느끼고 있던 감정은 우월감이었다. 중원에는 많은 고수들과 곳곳에 은거하고 있는 기인들이 존재하지만. 이곳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지금 확인하고 있다.
얼마나 더욱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최소한 한 명. 바로 눈앞에 자신을 월등히 뛰어 넘는 절정고수가 존재하고 있다.
탁. 탁.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매화일검이 고개를 들었다.
“매화일검경.”
텁텁한 목소리지만 힘이 담겨 있다.
제논 공작은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덩치가 좋았다. 매화일검보다 더 큰 키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논 공작님.”
“두 공작은 언제 오나?”
“두 공작이라 하면…….”
“대장군이라 하였던가? 진천 공작과 수라혈마 공작 말이다.”
매화일검은 자신의 관자놀이에 맺혀지는 식은땀을 느꼈다.
“두 대장군님들께선 오늘 저녁 오시지 않으실 것 입니다. 아마 무과가 끝나고 등용식이 완료된 후, 만찬에 황제 폐하와 함께 나오실 것이라 들었습니다.”
제논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공작의 숙소는 어디에 있는가?”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아직까지 고수들이 머무는 곳은 바깥으로 보여지는 외성이 아니라 지하의 본성이다. 그곳은 처절히 비밀에 붙여진 곳이다.
“두 분께 용무가 있으시다면 제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제논 공작이 눈인사를 하였다. 매화일검은 제논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제논 공작이 진천, 수라혈마 대장군님들을 찾는 것일까?
무과가 시작된 아침. 그러니까 문과가 끝난 이튿날은 날씨가 흐렸다. 곧 비라도 올 것처럼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간간히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당연히 황성을 만들 당시 한곳에는 비무장을 만들었다. 비무장 앞에 모인 고수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비무장이 한눈에 훤히 보이는 높은 자리에 주첨기가 앉았고 그 옆에 수라혈마와 진천, 혜공과 만소자가 섰다.
비무장 뒤로 각국에서 모인 사절단원들과 백성들이 운집하였다.’ 신명대국의 검사들은 모두 소드 마스터’ 라는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할 절호의 기회다.
“그대들의 무위를 만천하에 알리라!”
주첨기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것은 무과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았다. 고수들은 주첨기를 향해 포권하였다. 모두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로간의 무공을 겨룬다.
천성이 무림인인 그들에게는 어떠한 사항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무과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낄낄…….”
수라혈마가 진천을 보며 웃었다.
진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눈빛을 흘겼다. 비록 일국의 신하가 되었지만 정,사파의 경쟁의식은 여전하다.
두 개의 비무장에서 무과가 진행된다. 방식은 토너먼트 방식으로 승자가 결승을 향해 진출 하는 방법이 채택 되었다. 혜공과 만소자가 주첨기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혜공과 만소자는 계단을 내려가 비무장으로 다가갔다.
혜공은 오른쪽 비무장에, 만소자는 왼쪽 비무장에 섰다.
운집한 고수들을 향해 혜공이 외쳤다.
“매화일검과 청광사신은 앞으로 나오십시요오.”
첫 번째 차례로 매화일검과 청광사신의 대결이 거행되었다. 두 인영이 고수들 속에서 뛰쳐나왔다. 허공에서 뱅그르르 몇 바퀴나 돈 두 고수가 비무장 앞에 착지하였다.
매화일검과 청광사신이다.
매화무늬 자수가 새겨진 청색 도복을 입은 매화일검.
무명답게 눈에서 푸른 안광을 일렁거리고 있는 청광 사신.
둘은 주첨기가 앉아 있는 쪽을 향해 포권 하였다.
“천파편살과 현량은 앞으로 나오세요.”
만소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또다시 고수들 속에서 천파편살과 현량이 몸을 솟구치어 비무장 앞으로 착지하였다.
신속하고 화려한 그들의 등장!
와아!
백성들이 함성을 질렀다.
호오……
각국의 귀족들도 감탄음을 흘리며 비무장 앞에선 고수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고수들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여 백성들의 함성소리도 곧 사그라 들었다.
주첨기가 위에서 아래로 간단히 손을 저었다.
지이이잉!
커다란 징소리가 울렸다.
하크다.
귀족들과 백성들은 그제야 징을 울린 사람이 오크라는 것을 알았다. 고수들의 자태에 시선을 빼앗겨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덩치가 좋은 검은 오크가 울린 징소리는 주위로 퍼져 나갔다.
매화일검과 청광사신, 천파편살과 현량이 앞으로 비무장 위로 올라왔다.
양 끝 쪽에선 고수들은 눈앞의 고수를 노려보았다. 벌써부터 심상치 않는 기대결이 시작되었다. 평원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도 거센 바람이 고수들 몸에서 뿜어 나왔다.
서로 부딪친 바람은 비무장 가운데에 작은 회오리를 몰았다. 어느새 비무장에 내려앉았던 흙먼지가 회오리에 휩쓸려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무과는 어느 한쪽이 항복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몹시 위험하다 생각될 때, 두 대장군이 무과를 막을 것이고, 두 대장군의 합의 하에 승자가 결정된다.”
주첨기가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럼…… 시작하라!”
터져 나온 강맹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비무장엔 정적이 흘렀다. 백성들과 사절단원들도 숨소리를 죽였다.
고수들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파핫!”
한 기합소리가 터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기합을 지른 청광사신에게 꽂혔다. 청광사신은 몸을 날리면서 발검하였다.
챙!
매화일검도 발검하여 청광사신의 검을 막았다.
서로의 검이 서너 차례 부딪쳤다.
사람들의 안력으로는 쾌속한 검을 따라갈수가 없었다. 단지 화려하고 대단하다 라고만 생각 될 뿐이다. 각국에서 온 호위기사단장들도 어렴풋이 고수들의 공격에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 있지만, 완벽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수들의 대결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주첨기와 두 대장군. 사백의 고수들. 그리고 제논 공작 뿐이다.
매화일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매화꽃 향기가 짙게 풍겨 나왔다.
그뿐이랴?
강맹한 바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매화일검의 몸에서 자색 빛이 한 번씩 번쩍였다. 화산파 독문심공 ‘자하신공’이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색 빛이 번쩍이는 검이 매화꽃 무늬를 허공에 수놓으며 청광사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매화일검은 현란한 다섯 번의 변화가 있는 검법, 오행매화검법을 시전하였다.
청광사신도 이에지지 않았다.
청색의 안광이 더욱 진해졌다. 허공을 밟는 듯 경공을 운용하며 매화일검의 오행매화검을 피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매화일검의 오행매화검은 더욱 가까이 좁아 들어오고 있었다.
“키핫!”
어디선가 괴상한 기합소리가 터졌다.
천파편살과 무당파 속가 제자인 현량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비무장에서 나는 소리다.
천파편살과 현량의 대결도 한창이었다.
천파편살의 철편은 흡사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살모사의 그것처럼 움직였다.
그의 철편과 현량의 검이 어지럽게 교차하였다. 두 고수는 비무장과 허공을 제집 안방 마냥 누비며 공격을 주고받았다.
천파편살의 출수는 점점 더 빨라졌다.
철편이 현량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꺾어 허리를 노렸다.
“오옷!”
귀족들이 탄성을 토했다.
현량은 아찔했다. 막 제운공의 수법으로 철편을 회피하였어도, 철편은 끈질기게 오른쪽 허리만을 노렸다.
챙챙!
철편과 장검이 부딪쳤다. 불꽃을 튀기며 공방을 주고받는 둘은 사방을 종횡무진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해지고 있었다.
꿀꺽.
구경꾼 귀족들은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한눈을 파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라고 생각 될 만큼 천파편살과 현량 그리고 매화일검과 청광사신의 대결은 흔희 볼 수 없는 진귀한 대결이었다.
“큭.”
천파편살이 비릿하게 웃었다. 현량은 무위의 상하에 있어서 자신이 낮은 쪽에 있다는 것을 진작에 깨닫고 있었다.
천파편살의 철편!
때로는 너무나 정직하고, 때로는 대체 감 잡을 수 없게 변화무쌍하였다.
그래도 현량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고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하였다. 현량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실력을 뿜어내기로 마음먹었다.
매같이 두 눈을 번쩍인 현량이 철편을 피하여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오오오!”
귀족들은 눈을 부릅뜨며 탄성을 질렀다.
“오러다!”
나풀거리는 청색 의복을 입은 검사의 검에서 어른거리는 것. 그것은 분명히 오러였다.
현량뿐만이 아니었다.
천파편살도 내력을 일으켜 철편을 강기로 둘러싸다.
둘의 병기가 뻘겋고 퍼런색의 기운으로 일렁거리니 사람들은 흥분하였다.
“오오.”
소문은 사실이다.
“각오하십시오!”
현량이 부르짖었다.
“와라.”
나이로 보나 명성으로보나 현량은 천파편살의 후배다. 천파편살은 나름대로 후배에게 한수 양보해 주기로 하였다. 천파편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거칠게 철편을 어깨 뒤쪽으로 거둬들였다.
현량은 비상하는 매처럼 천파편살을 향해 달라 들었다. 제운공의 보법을 밟으며 움직이자 현량의 모습이 대여섯 개로 흔들려 보였다.
“저건 대체…….”
귀족들은 자신들의 눈을 비볐다. 자신의 눈이 잘못 됐는지, 정말로 검사가 다섯 명으로 늘어났는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검사 현량은 검을 내뻗고 있었다.
대여섯 개의 신형이 하나로 합쳐졌다.
검에서 뻗어진 검기가 이빨을 드러냈다.
섬뜩할 정도록 매서운 공격이었지만 천파편살은 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현량은 천파편살의 손안에 있었다.
천파편살이 손목을 움찔하였다.
그러자 철편이 벼락같이 어깨 뒤에서 솟구쳐 나왔다. 적색의 강기로 둘러싸인 철편은 흡사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름끼치게도 철편은 뱀이 먹이를 감싸듯, 현량의 검을 감싸 버렸다.
서로간의 강기가 부딪치자 큰 굉음이 울렸다.
그때 귀족들은 심장이 철렁였다.
파편살과 현량의 눈빛이 오고 갔다. 여유로운 천파편살의 눈과 부릅뜬 현량의 눈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눈싸움은 잠시뿐.
검은 그대로 천파편살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슉.
천파편살이 몸을 반쯤 돌려 회피하였다. 천파편살의 앞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현량이 당황하여 급히 공격은 연결 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을 천파편살이 아니다. 철편을 하늘 쪽으로 올렸다. 철편은 검까지 돌돌 말아버린 채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크윽.”
현량은 병기를 놓쳤다.
승부는 난 것이다.
“내가 졌소.”
현량은 고개를 숙였다.
천파편살은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물고 있던 검을 뱉어내, 현량에게 던졌다. 현량이 허공에서 검을 낚아채 자신의 검집에 꽂아 넣었다.
“후배의 실력은 참으로 좋군. 앞으로 정진하게.”
천파편살은 한뜻 누그러진 어투로 승리를 확고히 하였다.
와아아아!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과 귀족들은 함성부터 지르고 보았다.
현량과 천파편살이 황제 주첨기를 향해 포권한 후 비무장에서 내려왔다
후우.
만소자가 비무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전란이라도 벌어졌던 냥, 비무장의 곳곳이 쩍쩍 갈라지고 움푹 패였다. 검자국과 채찍 자국이 선명히 비무장 바닥에 남겨져 있다.
한쪽의 비무장에서 벌어졌던 승부는 났다. 그러나 매화일검과 청광사신의 대결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쪽으로 모아졌다.
“과연 명불허전이오.”
매화일검이 청광사신의 검을 받으며 말했다.
“후배야말로.”
휘두르고 있는 검 마냥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청광사신이 전력으로 매화일검을 공격해 들어갔다.
챙!
벼락같이 울리는 마찰음 소리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정신없이 공격이 오고 갔다. 마치 방어를 하지 않은 채 무조건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광사신의 귓가를 검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귓불이 살짝 베여져 피가 흘러나왔다. 피 냄새보다 진한 매화꽃 향기가 코점막을 자극하였다.
지금이다.
매화일검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매화십이수가 시전되었다.
어느새 샘솟아 나온 검기가 허공에서 수없이 부딪쳤고 매화꽃 향기는 멀리 퍼져 나갔다.
“아…….”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아니 감히 이렇다 저렇다 평할 수 없는 굉장한 대결의 연속이다.
이해가 간다.
어째서 단 사백 검사뿐인 신명국이 이십만군이 넘는 로스엔국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는지!
화산파의 검술은 쾌속과 변초로 유명하였는데, 그것은 어김없이 매화일검의 검에 나타나고 있었다.
어느덧 청광사신이 움직일 때마다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떨쳐져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청광사신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매화일검의 검이 번쩍였다.
아슬아슬하게 잘려나간 머리칼이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날아갔다.
매화일검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슈욱!
폭포수를 역류해 올라오는 이무기마냥. 매화일검의 검이 청광사신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청광사신은 눈을 부릅떴다.
보이지만 막을 수 없다.
매화일검의 검이 청광사신의 미간 앞에 멈췄다. 그래도 청광사신은 푸른빛을 번쩍이는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박빙의 승부 끝에 대결은 끝이 났고. 푸른빛이 일렁거리는 검만이 눈에 들어왔다.
청광사신이 입을 열었다.
“졌다.”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매화일검이 검을 거두며 포권하였다. 청광사신은 한번 포권한 후 몸을 돌렸다.
“와아아아!”
두 번째 함성이 터졌다. 정말 대단한 대결이다. 앞으로 이런 대결이 수없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되어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귀족들은 체면 불구하고 고래고래 함성을 질렀다. 귀족들조차 이러한데 신명국의 백성들은 오죽할까.
바로 이 대단한 검사들이 자신들을 지켜주시는 검사들이다!
신명국 백성들은 자부심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주첨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것이 무과의 목적이다. 임관을 위한 무과이기도 하나, 신명국의 위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무과이기도 하다. 신명국의 강함을 만국에 알린다.
천파편살이 이겼을 땐 수라혈마가 코를 높케 치켜들고 있었고, 매화일검이 이겼을 땐 진천이 수라혈마를 향해 지그시 웃어주었다.
밑에서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혜공과 만소자가 각각 비무장 위로 올라갔다.
둘은 걸음걸이를 조심히 해야 했다.
지진이라도 난 듯한 비무장은 곳곳이 움푹움푹 들어가고 깨져 있어 발 한번 잘못 디디면 꼴사납게 엎어질게 뻔하다.
혜공과 만소자가 올라오자 함성소리가 잦아졌다.
혜공이 먼저 외쳤다.
“천파편살 승(勝)! 청운검과 혈지파탄은 나오십시요오.”
가늘한 혜공은 목청껏 외쳤다. 높은 톤의 목소리이라 꽤 웃길 법도 한데, 사람들의 관심은 하늘에서 내려와 착지하는 두 고수 청운검과 혈지파탄에게 쏠려 있었다.
“매화일검 승(勝)! 장웅칠과 이진귀검은 나오세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고수들의 대결에 흥분한 만소자였다.
쿵!
이진귀검은 다른 고수들처럼 한껏 경공술을 뽐내며 착지하였고, 장웅칠이 거칠게 걸어 나왔다.
광태랑 장웅칠은 벌써부터 씩씩거렸다.
“잘 부탁하네.”
이진귀검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야말로. 조심하라구!”
장웅칠이 어깨를 풀며 말했다. 문과에서 뒤떨어졌던 것을 무과에서 채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공이라면 자신있다. 장웅칠이 등 뒤에서 대부를 꺼내 들었다. 드워프들의 배틀엑스 보다 더욱 큰 듯하였다.
“그것이 광태대부인가? 과연 험상궂게도 생겼군.”
이진귀검이 뇌까렸다.
“내 대부는 생긴 거답게 노니까 알아서 잘해.”
장웅칠이 도낏자루를 움켜잡았다.
만소자가 슬슬 두 고수의 눈치를 살폈다. 장웅칠이 어서 시작하라는 듯 만소자를 향해 눈치를 보냈다. 소심한 만소자가 고개를 푹 숙인 후 도망치듯 비무장에서 내려왔다.
혜공도 내려왔다.
하크가 큼지막한 동작으로 징을 울렸다.
지이이잉.
그리고 좌,우 비무장의 네 고수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잠시나마 기쁨과 한탄이 교차하였지만. 본래 무림인들이라 구차하게 변명 따위를 하지 않았다. 무공이 낮아서 졌으면 수련해서 다음에 이기면 그만인 것이다. 진것에 승복해야 다음에 이길 수 있는 법.
늦은 밤.
무과는 끝이 났다.
무과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것은 매화일검이었다. 마지막까지 올라온 귀영살검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매화일검이 한수 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칠신의 진전을 이어 받은 제자였기 때문이다.
이번 무과로 대부분의 고수들의 무공이 조금씩 증진하였다. 그 예가 장웅칠로, 평소 그가 낼 수 있는 실력보다 두 배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수많은 고수들이 이렇게 한대 어울려 무공의 높과 낮음을 가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원에서 사파,정파 고수간에 비무형식의 대결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정파무림대회, 사파무림대회를 거행하자는 말도 많이 나왔지만 소리만 높았을 뿐 직접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행하였다.
수많은 일류고수들이 대결을 벌이는 것을 보고선 각각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상당하였다.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정신없고, 대단하였던 이 무과는 이로써 끝이 났다.
매화일검을 필두로 무공순위 이십 위 안에 들었던 고수들은 제자리에 쓰러졌다.
수많은 대결 덕분에 모든 내력이 고갈 되었다.
하루정도 푹 자고 나야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각국에서 왔던 사절단원들도 숙소로 돌아갔다. 사절단원들은 연신 신명국 검사들에 대한 참사를 그치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온 그들은 자꾸만 고수들의 대결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튿날이 밝았다.
점심이 지난 후 임관식은 예정대로 거행되었다.
마찬가지로 고수들은 계단 위 자신들의 조각상 앞에 섰다.
휘이잉.
신명대국의 빨간 깃발이 바람에 휘날릴 때, 주첨기가 수라혈마와 진천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사백고수와 백성들이 주첨기를 향해 절을 하였다.
“모두 수고가 많았다. 그대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대륙을 울렸다. 강한 그대들의 모습에 짐은 무척 기쁘다. 이에 임관식을 거행한다.”
문과와 무과에 대한 두 가지 성적을 모두 고려하여, 서열 순으로 작위가 내려질 것이다.
매화일검은 문과의 무과 두 가지 모두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주첨기가 입을 다물고 손을 저었다.
수라혈마와 진천이 동시에 음성을 터트렸다.
“식집행(式執行)!”
두두두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났다. 북은 고수들의 심장처럼 강렬하게 울려댔다.
이번엔 노커 젠달리프가 더욱 커다란 수레를 끌고 왔다. 주첨기가 제일 위 칸을 열었다. 저번에 이어서 수많은 인과 명패가 진열되어 있었다.
“매화일검은 앞으로 나오라.”
매화일검은 당당히 걸어 올라갔다. 주첨기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를 표기장군 후작에 임명한다.”
주첨기는 친히 인과 명패를 매화일검에게 건넸다. 매화일검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황제의 앞에서 예를 갖춘채 매화일검은 뒤로 물러났다.
매화일검을 비롯하여, 천파편살, 방각대사, 귀영살검, 와룡진이 후작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홍영광마, 소리장비, 장웅칠, 사사혈겸, 소면혈격, 남궁혁, 하상, 장소백, 위혁민, 청운검이 백작으로 임명되었고, 자연스레 나머지에게는 남작의 작위가 내려졌다.
불만은 없었다.
엄연히 문과 무로써 서열이 내려졌다. 무엇보다도 정당하고 공평한 과거였다.
타국의 귀족들은 새로이 후작과 백작에 임명된 고수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른 검사들도 그렇지만 이들에게선 더욱더 빛이 나고 있었다. 각기 서로 분위기가 달랐으나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운은 비슷하였다.
이번 무과로 확실히 알았다.
정말로……
신명국의 검사들은 모두 소드 마스터이다. 보다 확실해진 이 소문은 이제 타국 귀족들의 입을 타고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타국 귀족들은 계단위에 즐비한 고수들을 보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이곳은…… 검국(劍國)이다.”
혹은 그다지 좋지 않은 말로.
“이곳은…… 마국(魔國)이다.”
이라 하였다.
“젠달리프”
주첨기가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젠달리프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수레 밑 칸을 열었다.
시야에 검들이 가득 찼다.
그곳엔 수백자루의 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주첨기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승천하는 듯. 천룡이 검집을 휘감고 있었다. 예술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검집을 보며 타국 귀족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명검이다.
검날을 보지도 않은 채 귀족들은 명검이라고 확신하였다. 확실히 주첨기가 치켜 올린 검은 드워프들의 솜씨 전부가 녹아 있었다. 중원에서도 보기 힘든 명검이라고 고수들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검은 신명검(新明劍)이다. 본대국을 나타내고, 짐을 나타내며, 그대들을 나타낸다. 이 검은 그대들이 강한 신명국의 검사임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주첨기가 검을 위로 던졌다.
“흡.”
허공섭물!
주첨기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수백자루의 검을 모두 끄집어냈다.
검들은 수백 고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검을 받아 든 고수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이검은 자신이자, 국가이자, 폐하다.
챙!
주첨기가 검을 뽑았다. 드래곤본으로 만들어진 천하명검이 한껏 그 위용을 뽐냈다.
수라혈마가 앞으로 한발자국 걸어 나왔다.
“키키키. 검을 뽑아라. 그리고 만천하에 신명의 이름을 알려라.”
명검 수백자루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두둥.
점점 커지고 이던 북소리가 강렬히 극에 달했다.
“아…….”
귀족들과 백성들이 전율하여 몸을 떨었다.
주첨기가 벼락같은 음성을 토해냈다.
“개(開)!
열다!
검을 뽑다!
나라를 열다!
대국! 신명이 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