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28
제6화 두 공작의 대결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 제논 공작은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웃고 떠들고 있는 타국 귀족들이 모두 한심해 보였다. 이번에 신명국의 강함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어떻게 나올까. 그렇게 웃고 떠들 시간에 국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제논 공작은 무심한 얼굴로 파티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잘 꾸며진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우두커니 한쪽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신명국의 전력은 대단하다. 사백 검사가 모두 소드 마스터. 그 효율성을 따지자면 백만 대군과 비등하다. 어디서 이토록 많은 소드 마스터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수백 명의 소드 마스터가 에드먼이 아닌 신명대국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우.”
몇 년간 한 번도 쉬지 않았던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신명국은 에드먼 황제 폐하와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이상향의 국가였다.
전 귀족의 소드 마스터화. 거기에 수십만 대군을 양성한다면…… 대륙통일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율리안국의 신성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논 공작은 머리가 복잡하였다.
율리안과 로스엔 모르게 추진되고 있었던 대륙 통일책은 신명국의 등장으로 어렵게 되었다. 다행히 데이모스를 개발이 완료 직전에 달했다.
그러나 신명국도 데이모스를 개발한다면 대 에드먼 제국은 실로 어려운 상황에 치닫게 된다.
로스엔, 율리안, 에드먼.
대륙은 이렇게 삼강국과 십약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상일뿐 에드먼 제국의 국세가 타국들을 모두 제압할 정도다.
“대체 신명국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가장 신경에 쓰이는 것은 신명국의 황제와 그를 보필하는 두 공작이었다.
일반 검사들이 소드 마스터다.
그럼 그들은?
제논 공작은 개국식 내내 주첨기의 실력을 감 잡을 수 없었다. 때때로 보이는 그 강인한 오러는 그랜드 마스터의 것을 초월하였다.
더군다나 수라혈마, 진천. 이 두 공작의 실력.
대륙 제일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자신과…… 비등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신명국은 그야말로 검국이다. 전 귀족이 소드 마스터이며, 황제는 나의 능력으로도 알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초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신명국과 로스엔국과의 전쟁을 보고 받았을 때부터 줄곧 이랬다.
소드 마스터를 능가하는 두 노검사가 있다고!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서 신명국의 개국식에 갔다 오라는 명을 받았을 땐 속으로 매우 흥분했었다.
어쩌면…… 그동안 줄곧 찾던 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엇?
제논 공작은 생각을 멈추고 길 저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오고 있다.
파파팟.
매우 빠른 속도다!
‘뭐지?’
식물이다.
제논 공작은 기회를 포착하여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식물은 손을 훌쩍 뛰어넘었다. 제논 공작의 귓가에 ‘우끼’라는 소리가 들렸다.
‘우끼?’
제논 공작은 황당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식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만드라고라?’
워낙에 빠른지라 그 식물이 무엇인지도 확인하지도 못하였다. 자신이 잡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니. 제논 공작은 내심 감탄하였다.
그때.
“비켜.”
컬컬한 목소리가 울렸다. 제논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적포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이 사람은 신명국의 공작 수라혈마라는 사람이다.
휘익.
수라혈마는 도약하여 제논 공작의 위를 뛰어 넘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식물이 사라진 쪽으로 뛰어갔다. 제국의 공작인 제논은 왠지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수라혈마에게 그 무엇도 안중에 없었다.
‘저자는…… 수라혈마 공작…… 좋은 기회군.’
“공작!”
제논 공작이 말했다.
수라혈마는 멈추지 않았다. 금세 사라져 버렸다. 제논 공작은 눈살을 구겼다. 제논 공작도 수라혈마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제논공작은 수라혈마를 쫓을 수가 없었다.
‘이게 인간의 몸놀림이란 말인가…….’
제논 공작은 공황 상태에 달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간신히 신명국 공작의 뒷모습이 어스름 보였다. 가만히 서 뭔가를 찾는 듯하다. 그러더니 곧 다시 앞으로 몸을 튕겼다. 신명국 공작의 신형은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바람의 대정령도 저렇게는 빠르지 않을 것이다.
‘헛것을 본 게 아니야…….’
제논 공작은 마치 딴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족히 식사 한번을 했을 법한 시간을 달렸다. 제논 공작은 평원위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라혈마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제기랄! 이번에도 놓쳤군. 언젠간 잡고 말테다. 퉤.”
수라혈마가 침을 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진천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따라올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는 그 위선탱이 늙은이 밖에 없다. 그런데 진천의 기운은 아니다.
“내 말이 들리지 않았나.”
제논 공작은 수라혈마에게 다가갔다. 수라혈마는 싸늘한 눈빛으로 제논 공작을 노려보았다.
“너로군.”
그다.
매화일검이 말했던, 대체 실력을 종잡을 수 없다는 에드먼 제국의 공작.
제논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낄낄. 너만 없었으면 설령 그것을 잡았어. 키키키. 본좌의 말을 듣지 못 했던 건 네가 아닌가?”
“…….”
제논 공작과 수라혈마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원수 지간이 아닌데도 둘은 서로를 경계하며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끝마쳤다.
“나는 에드먼 제국의 제논 공작이라 한다. 당신은 신명국의 수라혈마 공작인가?”
“그렇지. 키키.”
수라혈마가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이놈 봐라?’
수라혈마는 제논 공작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데 탄탄한 근육이 티 밖으로 얼핏얼핏 보였다. 그야말로 노장이다.
군부의 대노장 같은 느낌이다. 중원에서도 이러한 백전노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자신과 같은 절정고수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대와 나는 일국의 공작임을 잊었는가?”
제논 공작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이리 대하는 자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의란 게 없는 자!
아주 무례한자다.
수라혈마가 눈을 부릅떴다. 붉으스름한 기운이 어른거리는 그의 눈빛에서 금방이라도 나찰귀가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엄청난 위압감에 주변 공기가 싸늘해졌다.
“지금 본좌를 훈계 하려는 것인가?”
폭갈이 터졌다.
그러나 제논 공작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제논 공작도 무시하지 못할 눈빛으로 수라혈마를 노려볼 뿐이다. 수라혈마로서도 황당스럽다.
이번에도 설령을 잡지 못해 화가 치미는데, 웬 놈이 쫓아와 시비다.
“참는다.”
이전 같으면 차마 생각도 못 할 말을 수라혈마가 뱉어냈다. 상대가 누구던 간에 맘에 안 들면, 공격하고 봤던 수라혈마다. 하지만 이제는 주군이자 제자인 주첨기를 따르고 그를 보필하여 나라를 세웠다.
수라혈마도 나름대로 참는다고 한 것인데, 제논 공작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논 공작이 등 돌린 수라혈마를 향해 말했다.
“뭘 참는다는 것인가?”
빠직.
결국 수라혈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여기서 참으면 수라혈마가 아니다.
수라혈마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동시에 출수하였다.
먹이를 움켜잡는 매의 발톱 같이 움켜진 손이 제논 공작의 얼굴을 향해 뻗어졌다.
제논 공작은 뒤로 피하려 하였다.
하지만 수라혈마에 비하면 너무 늦다.
수라혈마의 손이 제논 공작의 얼굴에서 멈췄다.
섬뜩한 살수.
위험천만 하였음에도 제논 공작은 알 듯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수라혈마는 제논 공작이 그동안 찾던 자다.
자신보다 강한 자!
인간 중에 자신 만큼 강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찾았다. 바로 눈앞에 있다.
그래서 그를 쫓아왔고, 괜히 말을 비꽜는지도 모른다.
“왜 웃지? 참으로 재수 없는 상판이군. 낄낄…….”
“찾았으니까 웃는 것이다.”
“뭘 찾아?”
“나보다 강한 자.”
빛이 번쩍였다.
이번엔 제논 공작의 검이 수라혈마의 얼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좌에게 검을 겨눈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이유를 불문하고. 국가를 떠나서. 한번 겨뤄보자. 누가 더 강한지.”
“크큭.”
수라혈마가 피식 웃었다.
강한 자를 찾아서 겨룬다?
자신도 주첨기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었다.
결국 나중엔 겨룰 자가 진천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주첨기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제자가 순식간에 청출어람 한 후에는 강한 자를 찾아 대결한다는 치기어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론은 제자가 매우 강하거니와, 아직도 젊기에 앞으로 쭉 강해질 것이다.
제자가 지존으로 있는 이상 천하제일을 놓고 겨룬다는 것은 상당히 웃긴 일이다.
한순간 제논공작에게 향하던 살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린아이 같군.”
수라혈마는 제논 공작을 그렇게 평하였다.
“무슨 소린가.”
제논 공작은 차가운 어투로 말하였다.
“키키. 넌 내 발끝도 못 미친다.”
“상관없다.”
“상관있지. 크크 나와 대결하기 전에 겨뤄야 할 상대가 있지. 그자를 쓰러뜨리기 전까진 절대 난 네 대결 신청에 응해 주지 않을 것이다. 제논 공작이라 하였던가? 그를 이기고 오면 응해 주겠어. 본래 계단처럼 약자부터 천천히 밟고 올라와야 하는 것이지.”
“약속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 본좌는 약속은 철저히 지키지. 키키키.”
“누구지?”
“진천이다. 내 옆에 있던 파란 의복 입은 노인네 기억하는가?”
“…….”
“진천 공작 말이로군.”
제논 공작은 진천을 떠올렸다. 자신 만큼 강한 자 라고 여긴 또한 명의 사람이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군. 수라혈마 공작. 그대가 진천 공작을 가볍게 이긴다는 그 말 말이다. 내 보기론 진천 공작은 그대와 실력이 비슷해 보였다.”
“크크. 잘못 봤군. 내가 가볍게 이긴다. 한 손으로도 이기지. 한번 상대해 보면 알 거다. 그럼 후에 보지. 나도 제논 공작. 너와 한번 꼭 겨뤄보고 싶군. 무인으로써 말이야. 키키키.”
수라혈마는 몸을 튕겼다.
“크하하핫!”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위선탱이 늙은이. 한번 애 먹어봐라. 저 제논공작이라는 늙은이도 위선탱이에 고집쟁이처럼 보이던데…… 크크. 아주 잘 만났어. 아주 잘 만났어.’
“크하하하하핫. 엇?”
웃으며 달리던 수라혈마.
설령을 발견했다.
가만히 바위에 앉아서 다리 같은 줄기를 깨작깨작 거리는 것이, 영락없이 수라혈마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수라혈마가 보이자 설령은 씨익 웃었다.
[우낏.]“이……이놈…….”
수라혈마는 바로 몸을 튕겼다.
설령도 입꼬리를 올리며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설령……
분명히 즐기고 있다.
드래곤의 마법서는 마법사에게 있어 세상 제일 보고였다. 실리아는 드래곤의 마법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진귀한 마법서가 많은지라, 무엇을 익히고 연구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이너스 역시 그날 이후 간간히 진천을 따라다녔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제이너스의 간곡한 부탁을 진천은 언제나 거절하였다. 그래도 제이너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못 할 이유가 있다.
“나가자니까.”
무료한 일상.
파일로가 하품을 길게 하며 말했다.
“안 돼.”
“왜?”
파일로는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제이너스를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천 공작님께서 날 받아주시기 전까지 절대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도, 밖으로 나가지도 않을 거야.”
“후우…… 사실 나가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거 아냐?”
“뭐?”
제이너스가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진천님께 내 의지를 보여 드리기 전까진 안 돼…….”
“대체 그 이유나 알자. 어째서 그렇게 집착 하는 거지? 까지것 그만 포기해버려. 언제까지 이렇게 무릎 꿇고 있을 건데? 떠돌이인 우리를 받아주겠냐고.”
“아무튼 못나가.”
제이너스는 단호했다.
“알았다. 나 혼자 나가봤자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먼저 포기다. 아주 무릎이 부셔질 때까지 이러고 있어라. 계획……흣. 하고 있던 대로 난 실리아한테나 가야겠다.”
“계획? 실리아는 마법서관에 있잖아.”
“근데?”
“그곳은 실리아 외엔 금지령이 내려진 곳이야.”
“상관없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사실 드래곤의 마법서중 아무거나 집어서 나가도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레드 드래곤 아르카콘트가 친히 고르고 고른 마법서들.
대륙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마법들이 무궁무진하다. 성하나 정도의 값어치는 우스웠다.
파일로는 괜스레 히죽 거렸다. 성 하나라면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성은 간단히 포기할 수 있다.
“두렵지도 않아?”
“누가?”
“신명국의 검사들…….”
“까짓것 도망치면 어떻게 잡겠어. 알잖아. 나 도둑 못지않게 발 빠른 거.”
히죽거리는 파일로는 정말로 그럴 셈이다. 제이너스가 보아온 파일로는 헛말을 해본 적이 없는 동료다. 처음 레드 드래곤을 잡으러 가자고 한 이도 파일로다. 다른 동료들이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해도 파일로는 기필코 실리아와 제이너스를 끌고 이곳까지 왔다.
“파일로…….”
제이너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파일로를 바라보았다.
“나 무시당하는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차라리 이럴 때는 뒤통수를 쳐줘야 한다니까. 내가 통쾌하게 뒤통수 갈길 테니까 너희 둘은 가만히 있어.”
파일로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간단히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제이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이번엔 파일로가 막았다.
“넌 가만히 있어. 제이너스. 네게는 할일이 있잖아. 제이너스 폰 키리아 전하.”
제이너스의 눈이 토끼 눈보다 더욱 크게 떠졌다. 파일로가 제이너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빙그레 웃었다.
“알……알고 있었어?”
“눈치 하면 나 아니냐. 그 정도는 간단하지. 뭐 사실 눈치챈 지 얼마 안 되지만…… 아무튼 난 꿔다 놓은 보리짝처럼 아주 존재감 없는 취급당하는 게 제일 싫으니까 말야. 보고만 있으라고. 전하는 이런 못 된 일에 끼면 안 돼. 흐흐. 이참에 때 부자가 돼서 여자 수십 명 끼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누가 괴롭히기라도 했어? 파일로.”
“아니. 전혀. 단지 무료해서랄까. 사실 누가 날 괴롭혀 주기라도 하면 이러지도 않겠지. 너하고 난 틀리니까…… 무료하고 존재감 없는 걸 못 참는 날 이해 못하겠지. 아무튼 하려는 일 꼭 성공하길 바란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수고.”
“파……파일로!”
제이너스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선 파일로를 막아섰다. 파일로는 미소 지은 채 제이너스의 발을 걸었다. 제이너스는 뒤로 넘어졌다.
파일로가 제이너스의 어깨를 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여러 권 가지고 나가서 때부자가 될 거야. 나중에 재주껏 연락해. 네가 하려는 일 도와 줄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알잖아. 내가 어떤 놈인지.”
제이너스는 파일로의 성격을 잘 알기에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확실히 몇 일전부터 파일로는 혼자서 배시시 웃곤 했다.
정말로 때부자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닌 줄 잘 알고 있다. 단지 그의 말대로, 무료한 것을 못 참아 일을 저질러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파일로. 같이 파티 갈 테니까 그런 생각 집어치워.”
“파티? 크크크.”
파일로가 코웃음 쳤다.
“기회는 지금 뿐이야.”
파일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응?”
“이놈들…… 우릴 안 놔줄 작정이야. 신명국의 황제가 레드 드래곤을 죽인 후 레어를 본성으로 삼고 보물들을 토대로 나라를 세우는 것…… 이것을 아는 건 우리들뿐이라고. 개국식으로 어지러운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 이 지긋지긋한 레어 안에서 처박혀 있어야 할지도 몰라. 어때. 제이너스. 같이 가자. 까짓것 마법서 가지고 도망치면 네가 하려는 일도 성공할지도 몰라.”
“안 돼…….”
“모르겠다. 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도망칠 테니까 알아서해. 아까 했던 얘기는 빈말 아니니까. 나중에 이곳에서 나오거든 날 찾아.”
파일로는 그 말을 끝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이너스는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파일로의 말은 사실이다.
사실 지금 자신들은 이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 실리아도 자신처럼 파일로를 따라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파일로와 다르게 자신들은 이곳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자…… 파일로.”
제이너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마저 무릎을 꿇고 진천이 오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탁.
파일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법서관에 들어섰다. 어김없이 마법서에 푹 빠져 있는 실리아가 보였다. 파일로가 바로 등뒤에까지 왔는데도 실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실리아.”
“허걱!”
실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마법서를 떨어트렸다.
“뭐야?”
실리아는 신경질 적이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떨어트렸던 마법서를 보물단지처럼―사실 보물 보다 값진 것이다― 주워들어 훅훅 불며 먼지를 털어냈다.
“그게 그렇게 값진 거야?”
파일로는 실리아의 어깨 앞으로 고개를 길게 뺐다. 실리아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파일로를 째려봤다.
“그런데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여기는 나 밖에 못 오는데?”
실리아가 물었다.
마법서관 안에는 듣던 대로 진귀한 마법서가 가득하였다. 수많은 마법서들을 둘러보며 미소 짓는 파일로가 왠지 불안해 보였다. 파일로는 미소 지었다.
실리아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왜 이래? 징그럽게.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걸. 황제 폐하 무섭다고.”
실리아는 주첨기를 떠올렸다. 거대한 빙산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런 그도 자상한 면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넓은 등에 업혔던 것을 생각하니 볼이 붉어졌다.
파일로는 실리아가 들고 있던 책을 낚아챘다.
“이건 뭐야?”
“흥.”
실리아가 다시 낚아채며 콧방귀를 뿜었다.
“대마법사 페르키온의 마법서. 아 어디까지 봤더라. 파일로. 너 때문에 다시 찾아야잖아.”
책은 매우 두꺼웠다. 성인의 손 한 뼘 정도 두께는 파일로를 질리게 만들었다. 실리아가 마법서 페이지를 넘기며 미간을 접었다.
“값어치로 따지자면?”
“성이 딸린 작은 도시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지. 이 마법서가 밖으로 나간다면 아마 부르는 게 값이 될 거야. 그런데 왜?”
“그런 것 많아?”
“뭐 내가 대충 골라두긴 했지만…….”
실리아가 한쪽에 쌓아둔 책 쪽으로 눈을 흘겼다.
가장 유용하고 강력한 마법서들을 한쪽에 모아두었다. 서관에 있는 대반수 마법서들은 진귀한 것이지만, 그중 드래곤의 입장에서 써놓은 것도 상당하였기에 분류가 필요했다. 인간인 자신이 볼 수 있는 책 중 알짜배기들로만 골라놓은 것이 이 열권이었다.
그토록 마법사들이 찾아다녔지만 절대 찾을 수 없었던, 대륙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페르키온, 홀, 루소베르테스의 마법서들이다.
팔리오는 그중 네 권을 집어 들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두 권씩 끼었다.
“뭐하는 거야?”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실리아. 도망치려면 지금 밖에 기회가 없어. 같이 가자.”
“미쳤어?”
“누가?”
“당연히 너지!”
“안 미쳤기에 이러는 거야. 그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같이 가자. 가지고 나가고 싶은 것들 골라서 나가면 되지 않겠어?”
파일로는 책장을 아무렇게나 가리켰다.
“싫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오늘은 가능해.”
“아무튼 그럴 수 없어. 이곳은 모든 마법사들이 그토록 바라는 드래곤의 마법서관이야.”
“맞아……아무튼 다시 볼 기회가 있겠지. 우리는 영원한 동료니까. 다시 보자.”
파일로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었다. 벌써 몇 일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겨드랑이를 움직여 숨긴 책을 편하게 배치하였다.
“가는 건 말리지 않겠어. 너에게도 가야할 길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마법서들은 놓고 가.”
비록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법사로써 진귀한 마법서가 없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실리아. 그냥 넘어가주라. 그간 정이 있잖아.”
말과 다르다.
파일로는 검손잡이를 잡으려는 제스처를 취하였다. 실리아가 당황하여 파일로를 노려보았다.
“맘대로 해!”
빼악 소리를 질렀다.
“실리아는 앙탈 부릴 때가 예쁘다니까. 나중에 보자고.”
다다닥.
내달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파일로는 한번에 서너 계단씩 뛰어올랐다.
“정말 가야겠어?”
제이너스는 여전히 무릎 꿇고 있었다.
“걱정마. 나중에 보자.”
파일로가 한쪽 눈을 찡긋하였다.
계단은 회오리 같은 모양세다. 보통 고수들은 단번에 계단 정상까지 오르지만 파일로는 달랐다. 달리고 또 달렸다. 계단의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더럽게 높잖아.”
불만은 소용이 없었다. 한참을 오른 후에야 상문(上門)을 지키고 서 있는 검은 오크가 보였다.
헛.
파일로는 움찔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바로 저 검은 오크에게 가볍게 당했다. 오크 주제에 어찌나 강한지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은 저항 한번 못 해 봤었다.
하크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허리에 차고 있던 두자루의 핸드액스를 빼 들어 파일로를 가리켰다.
“어디를 가는 것인가?”
한마디를 툭 내뱉은 후, 하크의 입은 고집스럽게 다물어 졌다. 파일로는 주먹을 움켜쥐어 부르르 떨었다.
“파티에 가는 중이다. 바로 이것이 폐하께서 주신 명패다.”
파일로가 호주머니 속에서 꺼낸 것은 분명 신명대국의 명패였다.
주첨기가 이번 경우에 한해서 임시로 내린 것이었다.
“가도 좋다.”
감정이 실리지 않는 음성이다. 바닥 깊숙이 깔린 음성은 파일로의 신발에 닿았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문이 열렸다. 지상의 탑으로 통하는 유일한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파일로는 하크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씨익 한번 웃었다.
그러면서도 하크의 옆을 지나칠 땐 곁눈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파일로는 지상으로 나왔다. 그동안 본성 안에서 마법빛만 보았지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온 때는 밤이라 달빛만 존재할 뿐이었다.
은연히 사선으로 내려오는 달빛은 아름다웠다. 황성의 홀에서 들려오는 희한한 악기소리가 달빛과 어울려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 바로 이맛이야.”
파일로는 코를 킁킁 거렸다. 신선한 밤 내음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지.”
상당한 거리에 있는 황성의 파티장에서 불빛이 새나오고 있다. 파일로는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이 아닌 성문이 있는 쪽으로, 그곳엔 타국의 마차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말들도 때아닌 호강으로 특급의 먹이를 먹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파일로는 여러 나라들의 문장을 훑어보았다.
당연히 로스엔과, 속국이었던 케이트, 드리안, 이콘 국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다.
그럼 답은 하나다.
율리안 신성대국의 마차가 없는 이상, 고민 할 것도 없이 에드먼 제국을 마차를 찍었다.
마부들은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 있었다.
파일로는 고양이 걸음으로 돌아갔다. 조심스레 짐칸 안으로 올라 편안히 자세를 잡았다. 짚풀 속에 몸을 숨겼다.
‘어디 한번 뭔지나 볼까.’
겨드랑이 사이로 숨긴 네 권의 마법서를 꺼냈다.
제목까지 룬어로 써 있어 읽어 볼 수는 없다. 보존 마법까지 걸려 있어 방금 만든 듯하다. 단 하나 마법서답게 가장 낡아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보존 마법도 안 걸려 있어?’
파일로는 의아해하며 그 마법서의 첫 장을 펼쳤다.
헉!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었다. 마법서에서 뛰쳐나온 한줄기의 금빛이 파일로의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파일로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쓰러졌다.
용암이 피 대신 혈관을 가득 메워 온몸을 휘젓는 듯한 고통!
뜨거웠고 고통스러웠다.
희한하게도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눈, 코, 입, 귀, 손, 발……
모든 신체가 통제에서 벗어났다. 몸이 허공에 떠 빠른 속도로 수천 번 회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한순간 귀가 확 뚫리면서 눈앞이 새하얘졌다.
‘여긴 어디야……혹시 그 마법서가 천계로 통하는 문이 아니었을까?’
언제 고통스러웠냐는 듯 몸은 날아갈 듯 상쾌하다.
모든 것이 새하얀 세계.
한 절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겨우 세상에 나갈 수 있겠군……
“누구냐?”
파일로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새하얀 허공 중앙에어 섬은 반점이 생성되었다. 이윽고 검은 반점은 회오리치며 커져가더니 검은 로브를 입은 노인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노인은 매우 노쇠해 보였다. 수년 동안 손톱을 자르지 않은 듯, 한 뼘 이상이나 날카롭게 자라 있었다. 파일로는 뒷걸음질 쳤다.
“누,구,냐!”
“나는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 네 덕에 이제 빛을 볼 수 있겠구나. 크르르.”
자신을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라 알린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냈다.
씨익 웃었다.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라니!
말도 안 된다. 파일로는 검을 뽑아 들었다.
“소용없는 짓. 새파란 육체가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노인은 후드를 걷었다. 파일로는 경악 할 수밖에 없었다.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가 흉측하기 그지없다.
“크크,”
노인이 입을 쫘악 벌렸다.
“뭐……뭐야.”
노인의 입이 점점 커져 그야말로 ‘산’만해졌다. 그리고 사방으로 노인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흉측한 입은 파일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저리가!”
파일로는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해 도망쳐도 소용없다.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나는 거 하면, 땅 밑에서 솟아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눈 한번 깜짝할 사이.
그 거대한 입은 파일로를 삼켜버렸다. 애꿎은 그의 영혼은 노인의 입에서 몇 번 저항하다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가 잠든 밤.
“진천 공작. 대결을 청하오.”
밤하늘의 별이 무수히 빛날 때.
한 무장이 진천을 찾아왔다. 진천은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의 강대한 기운을 느꼈다.
“허허…… 제논 공작, 아니 될 말씀이오. 노부는 그대와 대결하고 싶지 않소이다.”
“어째서 말이오. 검을 든 자로써 강한 자와 승부를 겨뤄보고 싶은 것은 나이를 떠나 당연한 것이 아니오?”
“허허허…….”
진천은 그저 웃었다.
제논 공작은 답답하였다. 수십 년 만에 간신히 찾은 호적수다. 그런데 수라혈마 공작도 그렇고 진천 공작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진천 공작. 검을 든 자로써 이렇게 청하오. 나와 승부를 겨룹시다.”
“나이가 올해 어떻게 되시오? 노부는 올해 칠십칠 세가 되오.”
진천이 뜬금없이 물었다.
“나 역시 칠십칠세요.”
“그런데 아직까지 검의 높과 낮음에 집착하는 것이오? 우리는 이빨을 가진 맹수가 아니 건데 검의 높과 낮음은 무슨 상관이오리까?”
신선 같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멋들어진 수염이었다. 비단 결보다 부드러워보였고 신선도 흠모할 것만 같았다.
제논 공작은 수염을 베어버릴 생각까지 하였다. 그렇게 한다면 화가나 대결에 응해 줄지도 모른다.
제논 공작의 살기를 느꼈을까. 문득 진천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제국의 공작은 검의 높과 낮음을 가르려 하시오?”
“대륙 제일이 되기 위해서 이제껏 살아왔소. 이제 호적수를 만났으니 내 반드시 겨뤄야겠소.”
챙!
제논 공작이 검을 빼 들었다.
검날이 달빛에 번쩍여 아름답게 빛났다. 시퍼런 칼날이 진천의 미간을 가리켰다.
진천의 눈썹이 움찔 거렸다.
진천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청장포가 제논 공작의 검을 감싸고 지나갔다. 진천의 반대편 손가락이 제논 공작의 검날을 잡았다. 제논 공작은 진천을 노려보았다.
“무장은…… 전장에서만 검을 뺀다고 들었소만?”
“내가 딛는 땅은 언제나 전장이오.”
팟!
제논 공작은 검을 거두며 뒤로 몸을 날렸다.
“먼저 공격하겠소.”
제논 공작은 진천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공격을 시도 하였다. 제논 공작의 검이 진천의 허리를 공략 했다. 하지만 진천은 이미 예측 하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회피 하였다.
과연 빠르다!
“노부 앞에서 검을 뽑았소?”
진천은 하사받은 신명검 대신 자신의 애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제논 공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아아압”
제논 공작이 토해낸 기합 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검이 움직였다.
실전 검술?
중원에서 보지 못한 색다른 검술이다.
단지 호기심이 일뿐.
진천은 간단하게 검을 막으며 위로 몸을 솟구쳤다.
“제논 공작. 그대는 아직 멀었소. 더군다나 이 대결은 의미가 없소.”
제논 공작은 공격을 멈췄다.
자신도 안다.
동귀어진의 계책으로 승부 하려 한다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진천이 제논 공작의 앞에 착지하였다.
“어째서 의미가 없다는 것이오?”
제논 공작이 불쾌한 어투로 물었다.
“그대는 노부를 이길 수 없거니와, 이 승부론 천하 제일을 가릴 수가 없소.”
“무슨 말이오?”
“천하 제일은 황제 폐하시오. 황제폐하는 수라혈마와 노부가 힘을 합친다 하여도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한 분이시오.”
“설……마…….”
제논 공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대로는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때로는 검술을 익히지 않은 듯 보이는 신명국의 황제가 그토록 강할 줄이야.
수라혈마, 진천 두 공작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가 없다고?
제논 공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은 신명국의 두 공작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데, 두 공작은 합심해도 황제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분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소. 그러니 설사 그대가 나와 수라혈마를 이긴다 하여도 의미가 없는 것이오.”
“그대를 이기고, 신명국의 황제를 이긴다면?”
“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대는 나를 이길 수가 없소이다. 제논 공작.”
“훗.”
제논 공작이 코웃음 쳤다.
“어디 한번 그대를 꺾어보리다.”
제논 공작의 롱스워드는 순식간에 진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진천이 검을 쳐냈다.
“지존이신 황제 폐하와 대결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이참에 버리시오!”
폭갈을 터트리며 비상하였다.
단전에서부터 내력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다. 검기가 수자 이상으로 치켜 올라왔다.
제논 공작이 뒤늦게 진천의 뒤를 따라붙었다.
하지만 늦었다.
진천은 구천신검중 제 사초식 천검천파를 시전하였다.
부드럽게 움직였던 검이 강맹한 힘을 끌어들였다.
천검천파!
천개의 검이 천 곳을 가른다.
초식명과 어울릴 수백 개의 검기가 하늘에서 쏟아져 나았다.
“흐읍.”
제논 공작의 눈동자가 쏟아 내리는 검기로 인해 푸른색으로 변했다.
쿠구궁.
검기는 사방으로 뻗쳤다.
검기가 부딪치자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면이 울려 댔다. 진천은 마지막 공격에 내력을 살며시 거둬들였다. 마지막 검기가 제논 공작의 복부에 부딪쳤다.
“컥!”
제논 공작은 비명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진천이 마지막 내력을 거둔 탓에 큰 내상을 입지 않았다.
제논 공작은 몸을 일으켰다.
“오러 블레이드를 이토록 운용할 수 있다니. 진천 공작. 그대는 그랜드 마스터였단 말이오. 이번엔 한번 내 공격을 받아 보는 게 어떻겠소?”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논 공작은 제국 검술을 완벽하게 마스터 하였다.
쾌속을 위주로한 제국 검술!
한줄기의 빛이 번쩍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터져 나온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제논 공작이다.
챙!
과연 빠른 속도다. 진천이 제논 공작을 얕잡아 보고 방심하였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공격이었다.
진천이 각을 휘둘렀다.
제논 공작이 이를 피하기 위해 거리를 띄었다.
구천신검 제구초식 일검경천!
진천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는 태산만큼 웅장하다.
보는 것만으로 아찔한 검기!
제논 공작은 감탄하며 오러를 더욱 끌어올렸다.
제논 공작과 진천의 뿜어낸 기운이 주위에서 회동 쳤다. 바위가 부셔졌고 나무가 꺾여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바닥에서부터 위로 솟구친 흙먼지가 두 사람을 감쌌다.
팟!
진천과 같이 몸을 날렸다.
제국검술에는 초식이란 없다.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린 실전 검술이다.
경험이 초식이고, 초식이 경험이다.
두사람은 비호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 하였다. 폭풍이 휘몰아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부셔진 바위, 부러진 나뭇가지가 가루로 변하며 두 사람의 모습을 감춰버렸다.
툭.
제논 공작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
반면에 진천은 유유히 착지했다.
“정말이란 말이오? 그랜드 마스터인 그대 보다 더욱 강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제논 공작이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댔다.
“그렇소. 다시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마시오.”
진천이 힘겹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도 정말이오?”
“무엇 말이오?”
“수라혈마 공작이 그대보다 강하다 것 말이오…….”
검을 겨뤄 보니 더욱 믿을 수가 없다.
진천 공작은 그랜드 마스터로 자신보다 강하다. 그런데 수라혈마 공작이 진천 공작보다 강하다니? 대체 신명국의 검사들은 어디까지 강하단 말인가.
대륙 제일이라 자부하였던 제논 공작보다 강한 자가 셋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제논 공작은 진지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수라혈마 공작이오.”
순간 진천은 뒤통수가 질끈 거렸다.
‘이 추한 노인네가…….’
수라혈마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 진천이 숨을 고르며 시선을 돌렸다.
먼 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폐하…….”
주첨기가 둘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제논 공작과 진천은 매우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 일국의 공작들끼리 혈전을 벌인 일은 매우 큰일이었다.
그러나 주첨기는 아무 말 없이 제논 공작의 상체를 일으켰다. 제논 공작 등에 양손을 댔다.
천천히 내력을 불어 넣기 시작하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처럼. 내력은 한없이 밀려 들어와 내상 감쌌다.
제논 공작은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웅장하다.
감히 자신의 오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첨기의 내력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때는 이미 주첨기는 없었다.
“폐하께서…… 이번 일을 넘어가주실 모양이오.”
진천은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내가 경솔했소. 다음에 전장에서 봅시다.”
제논 공작은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황제에서 왕으로 전락해 버린 아실리안 왕이 개국식이 있기 삼 일 전 국민을 상대로 이번 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사죄 하였다. 아실리안 왕은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자국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불찰이라는 말을 했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였는지 흰머리가 듬성듬성 하였다.
더욱이 그 일로 세자 페를리우스가 가출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자존심이 강하여 굽힐줄 모르는 페를리우스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의 대전쟁에서 패배!
로스엔 사신들의 높은 콧대가 꺾였다.
파티가 있던 날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로스엔의 귀족들은 줄곧 침울한 표정을 지었었다.
하루빨리 이 비참한 곳에서 떠나고 싶은 게 로스엔 귀족들의 마음이었다.
개국식과 파티가 끝난 이튿날.
귀족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떠난 건 어김없이 로스엔의 귀족들이었다.
“결국 율리안 신성국은 오지 않았군.”
개국식은 성대하게 끝이 났다. 그런데 율리안과 그 속국들의 모습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첨기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걸린 마차들은 먼 지평선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설령이 우낏 거리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주첨기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던 탓이리라.
혜공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폐하. 이콘국과 케이트국에서 폐하를 뵙길 청하옵니다요.”
“알았습니다. 혜공공.”
“폐하. 이제 폐하께선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이시옵니다. 제게 하대를 해 주십시요오.”
혜공은 진심으로 말했다.
주첨기는 문득 품안에서 알약을 꺼냈다. 혜공이 의안한 눈으로 알약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알약에서 풍기는 향은 꽃 냄새보다 향긋하였다.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이건 약속했던 것이다.”
혜공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알약을 받았다. 향긋한 냄새가 혜공의 후각을 자극했을 때, 혜공은 지금껏 보지 못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이것이옵니까요?”
피부가 젊음을 되찾는 신비로운 마법약.
모든 여성들이 선망하는 그 마법약은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을 역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만들기 어렵다. 그 재료가 드래곤의 눈물이고 만드는 법은 드래곤밖에 모른다. 드래곤만 알지만 만드는 드래곤은 없다.
이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런데 딱 하나 우연히 마법창고 안에서 마법약을 찾았다. 그간 고이 가직하고 있다가 이제 생각이 난 것이다.
혜공은 눈물을 글썽였다.
“듣는 바로는 피부만 젊어진다고 하였다. 피부만…….”
“괜찮습니다요.”
결국 눈물을 흘렸다. 만소자 같이 탱탱한 피부를 다시 가질 수 있다.
혜공은 감격의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마법수련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요.”
주첨기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지.”
발걸음이 절로 가볍다. 혜공은 신이 났는지 좁은 보폭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설령이 주첨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우낏?]괜스레 주첨기의 가슴에 얼굴을 비빈다. 설령이 찬 ‘화염의 팔찌’가 닿아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주첨기는 집게손가락으로 설령의 이마를 쿡 찍었다.
“설령. 넌 이미 받았잖아.”
설령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하였다. 고개를 푹 숙이며 품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린 복도를 걸었다. 타국귀족들로 떠들썩하던 황성은 이제 조용하였다. 드리안, 이콘, 케이트 삼약국의 귀족들만이 남아 황제 주첨기를 접견하길 청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삼약국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요.”
혜공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삼약국의 대신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주첨기가 용좌에 앉으며 말했다.
“모두 앉으라”
드리안국의 하릴 백작. 케이트국의 비잔틴 백작. 이콘국의 시리무스 백작.
총 세 사람이었다.
드리안국은 이미 신명대국과 동맹 협약을 맺었으나, 케이트국과 이콘국은 개국식 일정으로 협약이 지금까지 미뤄져 왔다.
“폐하. 저는 케이트국에서 온 백작 비잔틴이라고 하옵니다. 로스엔국과 맺었던 협약들을 모두 신명국과 재협약 맺으려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폐하. 이콘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콘국의 클리프 전하께서도 그분을 대신하여 저 시리무스를 보내셨습니다.”
주첨기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하릴 백작에게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다.”
하릴 백작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신명국은 조공과 함께 특산물들을 바친다는 협약을 거절하고, 단지 동맹국으로써 만족했다.
“비잔틴 백작. 시리무스 백작. 짐은 친우국인 드리안국과 마찬가지로, 케이트국과 이콘국에게 친우국의 예를 다해, 동맹 협약을 맺고 싶다.”
“폐……하.”
비잔틴 백작과 시리무스 백작.
두 백작은 가슴이 확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릴 백작이 살짝 미소 지으며 두 백작을 바라보았다. 하릴 백작은 기뻐하는 두 백작에게서 몇 일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폐하의 넓으신 가슴에 탄복하였습니다.”
두 백작은 이제 의기양양하게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독립…….’
독립이다.
수백 년간 로스엔과 지속되었던 군신의 관계는 깨졌고, 이제 독립국이 되었다.
독……립……
그 말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야생적인 사나이의 외모를 한 시리무스 백작이 눈물을 글썽였다.
“혜공.”
주첨기가 눈치를 보냈다.
혜공이 동맹협약서를 가져왔다. 인을 찍을 때 시리무스 백작은 결국 눈물 한 방울을 뚝 흘리고야 말았다. 독립은 우연히 수백 년 만에 찾아왔다.
세 백작은 엄청난 수확을 가지고 각 나라로 돌아갔다.
당요석, 남아일검, 진성목 세 남작이 그들의 호위를 맡았다. 마차는 지평선 끝으로 사라졌다.
‘나라가 열렸다…… 이제 시작이다.’
주첨기의 눈에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과 그 밑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가 들어왔다.
그리고 평야위에는……
가득 가옥들, 넓은 대로를 오고 가는 수많은 마차,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논을 베는 농부들, 식사준비를 위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병기를 움켜잡은 용맹스러운 군사들. 그치지 않는 악기소리와 웃음소리.
앞날의 모든 것이 겹쳐져 눈앞에 어른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