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29
제7화 노커와의 담판
검은 오크는 외공을 극성까지 익힌 것 같은 몸을 가졌다. 부풀어 터질 듯한 근육들은 매끈하고, 바위만큼 큼지막한 주먹은 무엇이든 부숴 버릴것만 같다.
검은 오크 하크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언제나 수고하는군.”
진천이 상문의 계단에서 내려왔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괴물이 대견스러웠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보다 이 괴물이 백배 천배 낫다.
하크의 어깨를 한번 투닥거려 준 후 밑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이계 소년은 무릎을 꿇고 있다. 벌써 며칠 동안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적게 잡아도 십일은 넘는다.
이계의 소년은 피곤이 극에 달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제이너스…….”
부드러운 음성.
제이너스가 고개를 들었다. 깊고 고집스러운 눈이 진천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진천이 졌다.
진천은 제이너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 정도 각오면 됐다.”
“진천 공작님…….”
제이너스의 다리는 후들거렸다. 진천이 내력을 불어넣자 제이너스는 똑바로 설수가 있었다.
“제이너스. 노부는 네 스승이 될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 황제 폐하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상 다른 제자를 받을 수가 없다. 황제 폐하의 사제를 만들 수 없는 법이니까.
잠시나마 밝아졌던 제이너스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제이너스는 다시 무릎을 꿇으려 하였다.
“하지만 좋은 스승을 찾아주겠다.”
“진천 공작님…….”
“그렇게 하자. 그것이 노부가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제이너스도 한발자국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신명국의 검사는 모두 소드 마스터이다. 소드 마스터를 뛰어넘는 진천 공작님의 제자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소드 마스터의 제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감……감사합니다.”
제이너스가 해맑게 웃었다.
“따라와라.”
진천은 뒷짐 지었다.
“저. 공작님…….”
공작이라는 칭호는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진천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는가? 제이너스.”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파일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제이너스는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오늘 안으로 밝혀질 일이었다.
진천이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로라면…… 네 친구가 아니던가?”
“맞습니다. 어제 저녁 파일로가 마법서관에서 마법서 몇 권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이너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기적인 생각일까?
행여나 이번 일로 겨우 얻은 희망을 잃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뭐라? 참말이더냐?”
“예…….”
부끄러운 제이너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어째서 말리지 않았더냐.”
“그게…….”
“됐다. 네게 실망이로구나.”
진천은 몸을 튕겼다. 제이너스가 쫓아갈 틈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스승님.”
뒤에서 주첨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천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수라혈마가 주첨기 옆에서 진천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실실 쪼개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아! 폐하. 급한 일이 있습니다. 일전에 본성에 침입하였던 청년, 소녀를 기억 하십니까?”
진천의 표정을 보니 여간 급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기억 합니다. 그중 실리아라는 소녀는 혜공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어제, 파일로란 청년이 마법서관의 책 몇 권을 가지고 도망간 것으로 추측 됩니다. 폐하.”
주첨기의 입 끝이 씰룩 거렸다.
본성이 답답한 것 같아 파티에 들어갈 수 있게 명패까지 내주었는데, 기어이 일을 벌인 모양이다.
분명 그 명패로 하크의 앞을 통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작에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수라혈마가 중얼거렸다.
“수라혈마 스승님. 발 빠른 자로 삼십을 뽑아 당장 그 괘씸한 죄인을 찾도록 명 내리십시오.”
“알겠다. 키키.”
“그리고 진천 스승님은 저와 함께 마법서관에 같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폐하.”
주첨기는 진천과 함께 마법서관에 도착 했다.
실리아는 여전히 마법서에 푹 빠져 있는지라 둘이 온 지도 모르고 있었다.
“감히!”
진천이 불호령을 내렸다.
개국식이 끝나자마자 잡다한 일이 벌어졌다.
본성이 지하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이계 청년이 도망을 쳤다. 더욱이 그가 가지고 있는 마법서는, 이른바 중원의 절정 무공 비급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본성에 침입한 것을 눈감아 주고, 황제 폐하께서 마법서관에 들어 갈수 있도록 허락까지 해 주셨다.
그런데!
그가 마법서를 가지고 도망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진천이 이렇게 노한 표정을 짓는 것을 지금껏 본적이 없었다. 깜짝 놀란 실리아가 입술을 떨었다.
“무……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라니.”
진천이 실리아의 앞까지 걸어갔다.
진천은 평소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노하니 수라혈마 보다 더욱 무서워 보였다.
“정녕 모른단 말이더냐.”
알고 있다.
분명히 파일로 때문에 이렇게 노하신 것이다.
우두커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첨기와 눈이 마주쳤다. 실리아가 흠칫 몸을 들썩였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파일로가 무작정 와서는 가지고 가버렸어요. 죄송해요.”
“분명 너희한테는 말했을 터. 간 곳을 말하라. 폐하께서는 너희들에게 자비로운 은덕을 내리셨는데 어찌 이렇게 배반 할 수 있단 말인가.”
실리아는 주첨기의 눈치를 살폈다.
무덤덤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매정하다. 실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폐하.”
“아무것도 모르는가?”
주첨기가 싸늘하게 물었다.
“예. 폐하…… 죄송해요.”
“실리아. 실망이군. 서관출입을 금지한다.”
서관출입 금지보다 더욱 가슴 아픈 건 ‘실망’이라는 단어였다. 언제부터 그를 흠모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자신에게 실망할 줄 알았다면 파일로를 진작 말렸을 것인데……
주첨기는 그런 실리아를 뿌리쳤다. 매정하게 몸을 돌렸다.
“정말 죄송해요…….”
“그 입 다물라.”
진천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실리아를 호통 쳤다. 실리아는 제자리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어디로 도망 쳤을 것 같은가?”
“파일로와 만난 건 율리안 신성대국이었는데, 제이너스와 전 파일로의 과거는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이다.
진심어린 말은 가슴으로 와 닿는 법이다. 진천은 흥 하고 콧바람을 뿜었다.
“그만 가죠. 스승님. 실리아. 당장 처소로 돌아가라.”
주첨기는 실리아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진천도 실리아를 노려보다가 주첨기의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실리아는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서는 주첨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설마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흠모하고 있는지 아닌지 자신의 마음이 의심 갔는데 이번에 확실해졌다.
‘실망’이란 단어에 이토록 서러운 자신은…… 그를 흠모하고 있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파일로를 찾기 위해 나갔던 고수들이 속속 돌아왔다. 하나같이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괘씸한 놈. 제자야. 걱정 마라. 이 스승이 그놈을 잡아 사지를 잘라 버리마.”
수라혈마는 양팔을 잡고 뜯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어디로 간줄 모르겠습니까?”
“통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흔적을 찾을 수 없다라. 분명 무엇을 타고 간 모양입니다. 그러니 흔적이 없지요. 스승님께서 다시 한 번만 수고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각국의 마차가 아직 평원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각국의 마차 안에 죄인이 있습니다.”
“그렇겠군요. 폐하. 추적술에 능한 고수를 길잡이로 세운다면 금세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천도 그리 생각하였다.
“내가 다녀오겠어. 낄낄. 놈을 보자마자 사지를 갈라 버릴 테다.”
수라혈마가 말했다.
“예. 스승님께서 다시 한 번만 수고 해 주십시오. 죄인을 잡아들이는 것에 대해 스승님께 전권을 위임하겠습니다.”
“좋았어. 낄낄. 제자야 조금만 기다려라.”
대답함과 동시에 수라혈마는 뛰쳐나갔다.
“폐하. 수라혈마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것은…….”
걱정이 되는지 진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수라혈마 스승님께서 필히 잡아 오실 것입니다. 이제 스승님과 제가 할일은, 개국도 하였으니 백성증진입니다.”
“백성증진 말씀이십니까?”
“예. 그런데 지난 대결에서의 내상은 완치 되셨습니까?”
“폐하의 성은에 완치 될 수 있었습니다.”
“좋습니다. 스승님. 지금 회의실에서 치세당원들이 백성증진의 계책을 준비하고 있으니 가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오나 걱정이 됩니다. 페하.”
“걱정마세요. 수라혈마 스승님께선 헛말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니, 필히 죄인을 잡아오실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폐하.”
사실 주첨기도 마음이 불편하긴 똑같았다. 대국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도망쳤는데,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래도 아직 대국은 해야 할일이 많다.
개국을 알렸으니 이제 백성을 증진해야 할 때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슈슈슉.
퇴괴평온당 고수들이 평원을 가르며 내달렸다. 배은망덕한 죄인이 발생하여 기필코 잡아야 했다. 대장군이 된 수라혈마 교주님의 말에 따르면 그 죄인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이다.
“이제 보이네.”
음마천주가 중얼거렸다.
“잡으면 바로 족치자고.”
진혈귀가 적안광을 번쩍였다.
조그마하게 마차가 보였다. 좀 더 경공에 박차를 가하니, 마차 끝에 달린 국기가 마거크국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부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헉…….”
그러나 마부에게는 뒤에서 내달려오는 것이 사람이 아닌, 마족이나 몬스터로 보였다.
“기사님.”
마부가 급히 기사들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뒤,뒤……뒤를”
마부가 말을 더듬으며 뒤를 가리켰다. 기사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놀란 것은 마부 뿐만이 아니다. 기사는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신명국의 검사들이 비마 같은 속도로 내달리는 것을 처음 본 것이 아니나, 볼 때마다 놀랍다.
“멈춰라. 신명국의 검사다.”
기사가 말했다.
그제야 마부도 질풍처럼 달리던 신명국 검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들이 울음소리를 냈다. 마거크국 대신 콜디스만 백작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신명국의 검사들이 뒤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베시온 경은 당장 가서 알아보고 와라.”
“예.”
벨시온 이라 불린 기사가 반대편으로 말을 몰았다. 흉흉하게 달려오는 신명국 검사들의 모습은 마족과 다름없었다. 짐짓 위압감에 눌린 벨시온은 고개를 떨쳤다.
기사가 다가오자 음마천주와 진혈귀도 속도를 늦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가 물었다.
“본국에서 죄인 한 명이 도망쳤소. 타국의 마차 안에 숨었을 꺼라 생각되는데 협조를 부탁하오.”
음마천주는 포권하였다.
허락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뒤지겠다는 태세다. 적어도 두 고수가 흘리는 눈빛은 그러 하였다.
“따라오십시오.”
기사는 콜디스만 백작 앞까지 퇴괴평온당 고수들을 안내했다.
“백작님. 신명국에서 죄인 한 명이 도망쳐, 마차 수색을 요청 하고 있습니다.”
“수색을?”
콜디스만 백작은 콧수염을 씰룩였다. 수색을 받는 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다. 콜디스만 백작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해야겠지.”
콜디스만 백작은 말을 툭 뱉었다.
창문을 닫고 들어갔다.
“키키. 놈이 숨어 있을 곳이라곤 짐칸 밖에 없을 것이다.”
진혈귀는 마차의 후방부분을 짐짓 가리켰다.
“짐칸들을 수색해도 되겠소?”
음마천주가 포권했다.
기사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타국 검사들에게 짐칸을 검사 받는 것보다 스스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기사는 짐칸들을 하나하나 열었다. 그때마다 진혈귀와 음마천주 그의 옆에서 사기를 피어 올렸다. 그러나 짐들만 있을 뿐 죄인은 없다.
“제길. 이 염병할 놈은 어디로 간 거야. 이 마차가 아닌가.”
신경질이 난 진혈귀가 애꿎은 바위에 화풀이를 하였다. 쾅 하고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말들이 화들짝 놀라 울어댔다.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기사가 물었다.
“가보시오 협조에 응해 준 것 감사하게 생각하오.”
음마천주는 끝까지 예의를 갖췄다.
마거크국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그들이 멀리 떨어지자 진혈귀가 음마천주에게 말했다.
“감사하게 생각하오. 그게 뭐냐. 음마천주. 킬킬.”
“잘 들어. 진혈귀. 풍뎅이가 됐으면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언제까지 멋대로만 살수 없는 거다.”
“그래도 참 낯간지럽고만.”
“하는 수 없지. 우리들의 행동 때문에 폐하에게 폐를 끼쳐서는 아니되니까. 왜 진혈귀 너도 이젠 엄연한 대신이라고. 크크. 진혈귀 만보장군 남작.”
“흠…….”
진혈귀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 잡혔을까?”
음마천주는 먼 쪽을 바라보았다.
음마천주와 진혈귀. 이들처럼 퇴괴평온당의 고수들은 각 마차를 따라 잡았다.
그런데 어느곳에도 죄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단 한곳만이 남았다.
직접 나선 수라혈마가 에드먼의 마차를 따라잡았다. 사기 등등한 수라혈마가 나타나자, 제논 공작은 마차에서 내렸다. 제논 공작과 수라혈마의 눈빛이 부딪쳤다.
언제든 대결이 시작될 듯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흘렀다.
“큭.”
수라혈마는 진천 일이 떠올라 코웃음 쳤다.
“수라혈마 공작. 어째서 제국의 마차를 뒤쫓아 온 것인가?”
“지난번 대결은 잘 하였나? 키키.”
“…….”
“본좌는 진천을 이긴후에야 상대 해 줄 것이다. 키키키.”
수라혈마가 히죽 거렸다.
제논 공작은 담담한 눈으로 수라혈마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죄인 한 명이 마차를 타고 도망쳤으니, 짐칸 좀 뒤져 봐야겠다.”
“무엄하게 제국의 마차를 검사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수라혈마 공작.”
“본좌가 하고 싶으면 그만이지. 키키키.”
“제국의 마차를 검사한다고? 크하하.”
제논 공작은 어이가 없어 이마를 짚고 웃어 젖혔다.
“낄낄. 그 말이지.”
순간 제논 공작의 눈에서 오러가 일렁거렸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어떻게 일국의 공작이자 그랜드 마스터인 사람이 이렇게 안하무인이 될 수 있는지.
제논 공작이 어처구니가 없어 크게 웃는 사이, 수라혈마가 손을 놀렸다.
휙. 빠르게 뻗어나간 내력이 짐칸에 부딛쳤다.
짐칸이 부셔졌다.
제논 공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라혈마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는 제국에 대한 명백한 시비다. 알고 있는가?”
“키키키. 본국의 죄인을 숨긴 죄는 명백한 시비가 아닌가. 키킬. 알고 있는가?”
수라혈마가 제논 공작의 어투를 따라하며 짐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짚풀 밖으로 사람 다리 하나가 삐져나와 있다. 제논 공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감히…….”
신명국의 죄인 때문에 제국의 위신이 깎였다. 제논 공작은 성큼 성큼 짐칸으로 걸어갔다. 삐죽 나온 다리를 잡아 밖으로 내 던졌다.
청년 하나가 쑥 뽑혀 내동댕이쳐졌다.
“백정이 따로 없군. 키킬.”
수라혈마가 혼자 중얼거렸다.
제논 공작이 검을 빼 들었다. 죽여 버릴 심산으로 검을 휘둘렀다. 수라혈마가 다급하게 내력을 토했다. 제논 공작의 검이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죽여 버리면 곤란하지. 그놈은 본좌가 죽여야 하니까.”
“흥!”
제논 공작은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수라혈마가 쓰러진 파일로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혼절한 것이 틀림없다. 수라혈마는 파일로의 안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거야.’
갑자기 파일로가 눈을 번쩍 떴다.
“깜……깜짝이야!”
수라혈마가 파일로의 복부를 향해 권을 뻗었다.
그런데 파일로의 신형은 빙판 위 마냥, 스르르 미끄러져 수라혈마의 권을 피했다.
수라혈마와 제논 공작은 황당했다.
“너는 누구냐!”
파일로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웅웅 거렸다.
“이 죄인이! 그런 너는 누구냐!”
수라혈마가 히죽거렸다.
“나는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
“잘도 노는군. 이봐. 어서 가게. 본좌가 친히 천만가지 고문을 내려줄 테니까.”
수라혈마는 괴음조의 수법으로 파일로의 목을 향해 뻗었다. 그런데 파일로이 몸에서 푸른 빛이 뿜어 나왔다. 수라혈마의 손이 파일로의 목을 그대로 관통했다.
잔상이다.
팟!
수라혈마가 손목을 비틀자 파일로의 모습이 사라졌다.
“텔레포트…… 마법진도 없이 가능하다니.”
뒤에서 제논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당한 수라혈마.
“이놈 어디간 것이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있는 힘껏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파일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세. 만세. 만만세.”
주첨기와 진천이 들어서자 열띤 회의 중이던 고수들이 일어났다. 무당, 곤륜, 화산, 공동, 점창의 고수들로 치세당의 일원들이다.
모두 관직이 내려졌으니 그 높과 낮음이 있는 법.
치세당에서 관직이 가장 높은 사람은 매화일검이고 그 뒤로 장소백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치세당주는 매화일검이 되었다.
“폐하. 신들은 좋지 못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화일검은 파일로 건을 꺼냈다.
“수라혈마 공작이 전권 위임 받았으니 모두 걱정 말라. 죄인을 잡아 엄히 처벌 할 것이다. 그대들은 계책을 마련해 놓았는가?”
“예. 폐하.”
매화일검이 대표로 대답했다.
“천지시당에서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대륙의 백성들은 높은 세금과 탐관오리들의 횡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폐하께서 희망을 제시해 주면, 그들은 본국의 백성들이 될것이 분명합니다. 폐하.”
“좋은 말이군. 희망.”
주첨기가 진천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 폐하. 평균적으로 백성들은 오할 이상의 세금에 겨우 끼니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허나 식량이 없어 굶어가는 자들도 허다하다고 들었습니다.”
“본국은 개국 오 년 동안 세를 받지 않는다. 또한 전시를 제외하고선 총세를 삼할 이상으로 받지 않을 것이다. 단. 위민민본이 기본 정책이나 곧 제정될 법을 어긴 자는 엄히 다스려 질 것이니라.”
고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백성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폐하. 그저 끼니를 때울 수만 있다면 황제 폐하를 칭송 하는 순박한 백성들입니다. 페하께서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셨으니, 그들은 본국으로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매화일검이 장황히 말을 이었다.
“몇 일 후면 대륙 곳곳에 본대국의 개국이 알려질 것입니다. 그에 맞춰 천지시당의 고수들이 황제 폐하의 뜻을 널리 알릴 것입니다. 폐하.”
백성들이 몰려들면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옥부터, 사치품까지……
“가옥은 어느 정도나 필요할 것 같은가?”
“사인을 기준으로 일호로 잡고 최소 십만호에서 최대 이백만호 입니다.”
드래곤의 평원은 삼강국 영토 크기의 이 할이 조금 넘는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
삼강국에 비하면 무척 작은 영토에 불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백성을 받아들이고 도시를 만드는 일은 몹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첨기는 자신 있었다.
자신은 ‘강력한 법을 기본으로 위민민본의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가옥과 식량이군. 가옥은 드워프 장인족들과 담판을 지을 것이다. 헌데 식량이 문제다. 지금과 같이 적은 수의 백성이라면 자급자족 할 수 있지만, 지금보다 수백 수천 배가 넘는 백성이 이주해 온다면 어떡해야 할 것인가?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보는가?”
주첨기는 모두에게 물었다.
“신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장소백이 포권하였다.
“상업으로 부강해진 나라는 로스엔 이옵니다. 로스엔에선 국가에서 대상단을 조직하여 큰 나라를 운영하고 있사옵니다. 로스엔이 비록 패전국이라 하나 이는 분명히 본받아야 할 점이옵니다. 본국도 대규모의 상단을 조직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과 동시에 대륙 곳곳의 식량을 본국으로 가져 오는 것이 제일 상책으로 생각되옵니다. 폐하.”
“맞사옵니다. 폐하.”
다른 고수들도 이에 동참하고 나섰다.
주첨기는 빙그레 웃었다.
작은 웃음은 크게 번져나갔다.
“하하하. 그대들의 생각과 짐의 생각은 매우 같다. 이미 상단 조직은 재정을 임명 받은 만보당에 명해놓았다. 그대들의 생각과 짐의 생각이 일치하니 매우 흡족하도다. 하하하.”
“황공하옵니다. 폐하.”
“다음으로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물이옵니다. 물은 수백 리 떨어진 곳에 큰 강이 있으니, 그곳에서부터 수로를 틀면 될 것 같사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느 곳에 마을이 들어설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로를 틀수 없는 것이었다.
주첨기도 생각해둔바 있었다.
“퇴괴평온당에게 몬스터를 토벌하며 지도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지도가 완성되면, 계획은 보다 확실해 질 것이다. 개국한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할 때다. 하루라도 빨리 백성을 증진하고, 병사를 양성하여 부국강병을 이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대들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예. 폐하.”
“매화일검.”
“예. 폐하.”
“천지시당의 당주 계주와 함께 백성 증진에 박차를 가하라. 본국은 흥망성쇠는 그대들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 하라.”
“예!”
매화일검을 비롯한 치세당의 고수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진천과 주첨기는 흐뭇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보고하도록.”
“예!”
주첨기와 진천은 회의실에서 나왔다.
“참 자랑스러운 신하들입니다. 폐하.”
“그렇습니다. 저들이 없었다면 어찌, 대국을 세울 마음을 확고히 할 수 있겠습니까.”
고수들의 자랑을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한 명 한 명이 수천명의 병사와 비등하며, 머리 또한 뛰어난 인재들이라 못하는 일이 없었다.
맡은바 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절대적인 충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첨기는 만보당의 종남 고수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에 도착하였다.
만보당은 한창 상단 조직 계책에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만보당의 당주는 이번에 백작의 작위를 받은 종남무검 하상이다. 하상은 종남파 기재 답게 상단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만보당은 신명국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상단 조직을 하는데 가장 적합한 곳이기도 하였다.
모두 주첨기에게 예를 다했다.
“짐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마저 하던 회의를 계속 진행 하라.”
“예. 폐하. 그럼 계속 하겠습니다.”
하상은 다시 종남 고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상은 이계로 넘어온 종남 고수들 중 가장 배분이 높은 고수였다.
“처음 만골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상책인 것 같다. 사제. 만골드의 값어치를 가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상과 같은 배분으로는 남궁혁이 있는데, 남궁혁은 하상의 사제였다.
남궁혁은 잘 정리된 서필들을 뒤적였다.
만골드 짜리 내역을 발견하였다.
남궁혁은 거침 없이 말했다.
“리얼벌스탄드 엘레바도란 검입니다. 비록 검날이 사라졌지만, 역사적 골동품으로써 가치가 뛰어납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 가문에서 만들어진 검으로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사대신검중 하나로 대륙에 명성을 떨쳤던 검입니다. 리어벌스탄드 외 이십여 개 보물들이 정확히 만골드의 가치로 매겨지고 있습니다.”
리얼벌스탄드 엘레바도는 한때 전설적인 기사 칼렉시온의 손에서 쓰였던 검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다,
사대 신검 모두가 검날이 사라진 채로 대륙 곳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검날이 사라졌다 해도, 수집가들 사이에선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이 바로 엘레바도 가문의 신검이었다.
“폐하. 저 검날이 없는 검을 초기 상단의 재정에 포함 시켜도 되겠습니까?”
하상이 물었다.
주첨기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흔쾌히 허락하였다.
“리어벌스탄드 엘레바도를 경매로 내놓아 그 자금을 초기 상단의 재정으로 포함한다. 적게는 구만 골드 많게는 십오만 골드까지 예상된다. 이 재정으로 반년 동안 상단을 운영하고, 효과에 따라 최대 백만 골드까지 재정을 늘릴 계획이다.”
하상은 그들끼리 합의한 계획들을 다시 한 번 나열했다.
문득 주첨기가 입을 열었다.
“좋은 계획이다. 하상. 거기에 삼십만 골드를 추가하여, 식량과 생필수품을 구입을 우선적으로 하라.”
“예. 폐하.”
남궁혁은 만 골드의 가치인 보물 ‘그레이의 팔, 십이 다이아몬드, 빈센트의 초상화’를 부가 설명 하였다.
“사제.”
“네. 사형.”
“사제가 반년 동안만 종남오검과 함께 대륙을 유랑하며, 상단을 맡아줄 수 없는가?”
“당연히 하고 말고요.”
이계의 풍물을 가까이 접해볼 기회를 마다할 남궁혁이 아니다. 남궁혁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상단의 운영는 전적으로 사제에게 달렸다. 사제의 책임이 태산 같이 큰데 괜찮은가?”
다시 한 번 확인 차 물었다.
“걱정 마세요. 사형. 형이야말로 본대국의 재정을 탄탄하게 해 주십시오.”
“어떤 방법으로 상단을 운영할 생각인가?”
“우선 초기 자금의 이할 정도를 떼어내, 로스엔에서 부흥하고 있는 중소 상단을 매입할 것입니다. 그 후론 상단의 여러 참모들과 상의하여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과감한 상업을 행할 것입니다. 사형.”
“좋아. 사제만 믿네. 폐하.”
하상은 주첨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첨기는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남궁혁은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 이와 계산에 밝아, 임시 만보당 당주격을 수행하였다.
그 당시 그 많던 보물 창고의 보물들을 이계의 가치를 따져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남궁혁의 훌륭한 머리 덕분이었다.
“폐하께서 상단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짐이 말인가?”
“예. 폐하.”
무엇이 좋을까. 그리 깊지 않은 고민 끝에 한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황하.
바다 같이 넓은 황하강은 어릴 적 주첨기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비록 바다는 아니나, 황하강이 없었던들 중원이 존재 할 수가 있었을까.
또한 언제나 황하강은 흐렸다. 도통 다른 강과는 다르게 그 속을 알 수 없는지라 신비스러워 보였다.
남궁혁이 운영할 상단도 그런 곳이 되었으면 한다. 바다 같이 넓은 지역에 두루 퍼지며, 꼭 있어야 하는 곳. 획기적인 계책과 방법으로 신비스러운 곳.
“황하가 좋겠다.”
“좋은 이름입니다. 폐하.”
“황하강 같은 상단이 되도록 노력하라. 짐은 손을 걷어붙여, 그대들을 후원 하겠다.”
황하상단이 조직 되었다.
총 사십만 골드로 추정되는 자금을 가지고, 대륙을 누빌 이 상단에 신명대국의 운명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만보당의 고수들이 일제히 절을 하였다.
다음으로 주첨기가 찾아간 곳은 드워프들의 대장간이었다. 뜨거운 풀무, 옆 물통에서 솟아나온 수증기가 대장간 안을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땅! 땅!
작품세계에 빠진 드워프들도 보였다. 몰입한 그들은 오로지 작품 밖에 보지 못하고 있었다. 송골송골 맺힌 땀들은 해머질 한 번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뒤늦게 주첨기가 온 것을 발견한 드워프들이 작업을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첨기에게 허리를 숙였다.
“모두 계속하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머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장간 안에 있는 드워프는 전체의 삼할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대반수 드워프들은 대장간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곳에 모여 있었다.
데이모스의 제작이 한창이다.
수라혈마와 진천.
두 대장군을 위한 데이모스로 해과 달을 본 따 만들어질 예정이다.
“주첨기님. 오셨습니까. 만세. 만세. 만만세.”
노커 젠달리프가 신명대국의 인사법을 어색하게 따라하였다.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주첨기님.”
데이모스는 신기한 병기다.
마차처럼 사람이 타서 조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탄 사람 따라 공격력을 최대 드래곤의 칠 할까지 높여 준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간신히 죽일 수 있었던 그 드래곤 말이다.
한마디로 바다를 가르고, 산을 무너트리는 전설의 절대신검이 현신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데이모스가 대륙을 새로운 판도로 만들어 갈지도 모른다. 대륙의 데이모스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 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에드먼 제국과 율리안 신성 대국에 대한 다방면의 정보가 필요 하다.
‘보다 집요적인 첩보가 수행되어야 한다.’
주첨기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주첨기님. 무슨 일로 오신 것 입니까?”
젠달리프의 음성.
주첨기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젠달리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대와 한가지 의논 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다.”
“저와 의논 할일이란 게 무엇입니까? 주첨기님.”
마침 젠달리프는 이제 이곳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 레어는 싫다.
원수 아르카콘트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다.
피부터 뼈 그리고 심장까지…… 처절한 복수를 가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곳은 이제 인간들의 황성이 되어 버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본대국은 그대들을 기용 하고 싶다.”
“기용…….”
젠달리프가 난처하게 눈살을 구겼다.
‘인간과 동족이 공존하며 살수 있을까…….’
젠달리프의 표정에 그의 마음이 확연히 드러났다.
“마침 평원 북서부 쪽에 큰 산맥이 있더군…….”
주첨기가 한마디 내뱉었다.
큰 산맥이라면 골드 산맥? 골드 산맥은 수많은 금광과 미스릴 광산이 존재하는 곳. 하지만 골드 산맥에 기거하는 강력한 몬스터 드레이크 들이 존재하는 한 꿈도 못 꾸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골드 산맥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짐을 도와준다면 그곳을 그대들의 터전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 보겠다.”
젠달리프의 눈이 커졌다.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골드 산맥을 터전으로 만들어 준다니.
“기용……이란 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주첨기님.”
젠달리프의 어투가 좀 더 나긋나긋 해졌다.
“젠달리프. 짐의 신하가 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것이 기용입니까?”
돌려서 말한 것은 거절을 뜻한 것이다.
주첨기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본대국은 개국 하였다. 이제 백성들이 늘어날수록 가옥은 필요한데, 그대들의 솜씨가 필요하다. 십 년간 늘어나는 인구에 맞춰 가옥을 지어준다면, 본대국은 골드산맥에 터전을 꾸릴 그대들을 삼백 년 동안 보호할 것이다.”
삼백 년!
레드드래곤 아르카콘트를 죽인 존재가 삼백 년 동안 보호를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 하였다. 더욱이 그에게는 강한 검사들이 즐비하다.
그런 존재가 보호를 해 준다면. 삼백 년 동안 걱정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다. 또 그때쯤이라면 동족 자체적으로도 드래곤을 방어할 힘이 길러질지도 모른다.
길어야 십 년이다.
십 년만 고생하여 신명대국의 개국과 함께한다면 삼백 년, 아니 그 이상의 터전이 생기는 것이다.
꿈의 터전……
젠달리프는 고민되었다.
“그럼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주첨기님. 그 청만 들어주신다면 십 년간 바실룬족은 어떠한 부당한 요구라도 주첨기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청이 무엇인가?”
“실버 드래곤에게 붙잡혀 있는 동족 로쿤족을 구해 주십시오.”
바실룬족과 친족의 맹세를 한 로쿤족. 바실룬 족이 레드 드래곤 아르카콘트에게 잡혀갈 무렵, 그들도 실버드래곤에게 잡혀간 것이다.
분명 로쿤족도, 자신들이 당했던 것과 같이 매일 핍박당하고 있을 것이다.
차마 생각도 하기 싫다.
젠달리프는 그간 고민 해 왔던 부탁을 결국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국가의 기반이 잡히기 전까진 그리 할 수가 없다. 알겠는가?”
“감사합니다. 주첨기님.”
젠달리프가 기쁨이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약국중 일국 드리안.
본래 로스엔의 속국이었던 드리안국은 수백 년 만에 독립을 맞았다.
신명국에서 돌아온 하릴 백작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발가벗고 대로를 뛰어 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하릴 백작의 마음은 이로 말할 수가 없었다.
마차가 몹시 느린 것 만 같았다.
“빨리좀 가게.”
하릴 백작은 마부를 독촉 했다.
“예.예. 백작님.”
마부도 같은 심정이다.
그래도 이날따라 왜 이렇게 마차가 느린지…… 가슴이 답답하였다.
결국 황성에 도착했다.
마차가 황문을 지나자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릴 백작은 마차에서 내렸다. 많은 귀족들이 정문 앞까지 나와 하릴 백작을 맞이하였다.
“하릴 백작님! 하릴 백작님.”
귀족들이 하릴 백작을 불렀다. 지금의 하릴 백작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칼렌 전하에게 들려 드리고 싶었다.
“조금 후 그대들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를 걸세.”
“예?”
“조금 후 ,”
하릴 백작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발걸음을 재촉 하여 뛰다시피 성안으로 들어갔다.
귀족과 시녀들이 하릴 백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마음이 급한지라 황실 예법을 따질 틈이 없었다. 서둘러 움직이는 하릴 백작을 보며 귀족과 시녀들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드리안왕 칼렌의 방 앞에 도착했다.
호위 기사가 하릴 백작을 알아보고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하릴 백작은 힘 있게 문을 두들겼다.
똑.똑.똑.
평소보다 수배 빠른 템포의 노크.
드리안왕 칼렌은 누군지 의아했다.
“칼렌입니다. 전하.”
신명대국의 사신으로 갔었던 하릴 백작이 돌아왔다. 상당히 급한 모양이다. 이제 이십대 중반에 접어든 젊은 왕 칼렌이 기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기사가 문을 열었다.
“전하!”
하릴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어서 오게. 하릴 백작.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인가?”
칼렌왕은 줄곧 걱정하고 있었다. 신명국이 로스엔 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국으로 일약 돋움 하였다. 그 후 자연스레 로스엔의 속국이었던 자국의 문제로 밤잠을 설쳤다.
신명국이 로스엔보다 더한 요구를 해올시, 들어줄 수밖에 없다. 백성들의 피와 눈물을 고스란히 바치는 꼴이 된다. 하지만 힘이 없는 약국은 어쩔 수 없으니 비통한 왕의 눈에서 눈물만 흐를 뿐이다.
“폐하. 듣고 놀라시지 마시옵소서.”
하릴 백작의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다.
“짐은 걱정 말고 말해 보게. 하릴 백작. 도대체 무슨 일인가? 빨리 말해 보게.”
칼렌왕은 손끝이 떨렸다.
“신명국이…….”
“신명국이.”
“본국의 협약을 거절 했습니다.”
헉!
이럴줄 알았다. 로스엔 보다 더한 협약을 재요구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드리안 칼렌왕은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찔하여 등에 땀이 맺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릴 백작.”
드리안 칼렌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독립. 드리안이 독립 하였습니다. 신명대국의 황제께서 협약을 거절하시고, 친우국으로써의 동맹을 제의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동맹서약서 이옵니다. 전하.”
하릴이 서약서를 꺼내 책상위에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하릴 백작. 짐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것인가.”
“그 서약서를 보시옵소서.”
칼렌왕은 믿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서약서를 집어 들어 길게 폈다. 그리고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갔다.
칼렌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녕 이 서약서는 거짓이 아니렷다?”
“예. 전하!”
하릴 백작이 눈물을 흘렸고.
“오…….”
한줄기 쓴 눈물이 칼렌왕의 뺨을 타고 흘렀다.
“오…….”
방안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수백 년만의 독립이다. 칼렌왕은 그동안 강대국의 설움에 백성들을 핍박하는 지독한 왕이 되어야 했다.
현명하고 자비로운 왕이 되고 싶은 칼렌왕이라 그 일들은 여전히 깊은 상처로 자리 남아 있었다.
“오……오…… 수고했네. 수고했네. 하릴 백작. 그대뿐이 없는 게야.”
칼렌왕이 하릴 백작의 두 손을 잡았다.
“아니옵니다. 폐하. 신이 특출해서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옵니다.”
“그……럼?”
“신명대국의 황제 폐하께서 케이트, 이콘국의 협약을 거절 하고 똑같이 동맹을 권하였습니다.”
“오…… 오…….”
수백 년 만에 독립이 되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이날 드리안국의 백성들 중 눈물을 아니 흘린 사람이 없었다.
케이트국과 이콘국도 같았다. 신명국에 대한 칭송의 소리는 적어도 이 삼약국에선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삼강국중 일국 에드먼.
신명대국에서 돌아온 제논 공작은 평소보다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에드먼으로 오는 도중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앞으로 대륙의 정세, 안하무인인 수라혈마 공작, 진천 공작과의 대결. 그리고 몸 안으로 들어왔던 신명국 황제의 오러.
그리 좋지 만은 아닌 기억이다. 자타가 공인했던 ‘대륙 제일’이 단 하루만에 무참히 짓밟혔으니 말이다,
“왔는가? 제논 공작. 신명국은 어떤가?”
황제 에드먼이 검 수련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소문대로 였습니다,.폐하.”
“그런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신명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 일도 아닙니다. 폐하.”
“졌군.”
“예?”
제논 공작이 놀라 말꼬리를 올렸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개를 숙였다.
“그대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지. 그대가 누군가에게 진다면 지금의 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누구인가?”
“…….”
“하하하!”
황제 에드먼이 대소를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무엇이 죄송한가. 승패는 병가지상사. 지금보다 더욱 정진해야겠군. 제논.”
제논 공작은 부끄러워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예…….”
“이제 말해 보라. 그대가 보고 온 것.”
에드먼의 검날이 허공을 베었다. 깨끗한 동작과 함께 금발이 출렁 걸렸다.
슈욱.
에드먼은 검날로 제논 공작의 목을 가리켰다. 조금만 힘을 주면 목을 찌를 참이었다.
“짐의 말을 못 들었는가? 말해 보라고 하였다.”
“예. 폐하. 소문대로 신명국의 검사들은 모두 소드 마스터. 수라혈마와 진천 두 공작은 그랜드 마스터 급입니다. 헌데 신명국의 황제는 제 능력으로 그 능력을 감 잡을 수 없습니다. 다만 두 공작의 말에 따르면, 갓소드(God Sword)가 아닌지 추측 됩니다.”
“갓소드라고?”
에드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등 뒤의 나무기둥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에드먼의 검이 떠난 제논 공작의 목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나왔다.
가슴팍으로 미끄러 내려가는데 제논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렇게 추측 될 뿐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갓소드는 지금껏 본 사람이 없기에, 그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지. 갓소드는 나만이 될 수가 있으니까.”
쉬익.
에드먼은 거칠게 나무기둥들을 베었다. 일검에 하나씩. 나무기둥들이 옆으로 쓰러졌다. 에드먼은 도약하여 몇 바퀴나 허공에서 돌았다.
제논 공작의 눈앞에 섰다. 황제 에드먼의 매서운 눈빛이 제논 공작의 눈을 찔렀다.
제논 공작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어. 그렇게 많은 제일 검사들이 어디서 솟아나왔는지 말이야. 제논. 당분간 신명국과 마찰이 없도록 병사들에게 주의를 가하라. 적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까진 쉽사리 움직여선 안 돼. 속까지 훤히 볼 수 있을 때, 그때…….”
에드먼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한 손에 움켜쥔다.”
강하게 움켜진 주먹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예. 폐하.”
에드먼이 손짓하였다.
아리따운 후궁들이 다가와 에드먼의 어깨에 금색 망토를 걸쳐주었다.
에드먼은 망토를 펄럭이며 제논 공작을 스쳐 지나갔다.
“부족한 점을 알았을 터. 제논. 앞으로 더욱 정진하라. 그대는 본국의 제일 기사임을 잊지 마라.”
“예!”
제논 공작은 황제 에드먼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문득 황제가 벤 나무토막이 보였다. 그중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미끄러운 단면이다.
그것도 잠시.
팟!
제논 공작의 손 위에서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황제 폐하의 검술에 대한 재능은 가히 신의 축복이 내린 듯하다. 제논 공작은 황제가 사라진 문 쪽으로 응시했다.
“또 한 단계 진보 하셨군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