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37
제7화 지옥의 겁화
둘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주위는 혼란스럽고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둘만 멈추어 있다.
어떤 것도 둘의 시야를 막지 못했고, 둘을 건드리지 못했다. 기운과 기운이 부딪치는 경계에서는 스파크가 일었다. 거기에 끼어든 애꿎은 스켈레톤은 하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첨기는 날카롭게 발록을 노려보았다. 멀찌감치 선 발록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거대했다.
“인간치곤 강하군.”
발록의 음성이 들렸다.
“마물! 네가 모든 재앙의 원인이렷다? 짐이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하찮은 인간…….”
“감히 망자들을 이끌고 와 산 자들을 죽이고, 본국을 침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짐을 속였겠다?”
“크크…….”
발록이 히죽거리는 것은 처음 본다.
발록의 채찍은 허공에서 회전하며 언제든 날아들 것만 같았다.
“무엇을 속였다는 거지? 크크!”
“짐의 병력을 양분시키면 네놈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크크크!”
발록은 괴상하게 웃을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발록이 먼저 발걸음을 뗐다. 그도 평소와 달리 신중을 기하는 동작이었다.
주첨기는 천천히 청강검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발록의 채찍에서 더욱 거센 화염이 피어올랐다. 주첨기의 검강도 더욱 푸르고 길어져갔다.
“용서하지 않겠다. 대흑마괴…… 사형!”
분노가 치솟았다. 정순한 마음보다는 살기가 앞선다.
파핫
주첨기는 공중을 돌다가 멈추었다. 허공에서 거꾸로 서서 대각선으로 검을 세웠다.
구천심검 만검지천!
실로 셀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검기가 주첨기의 검에서 쏟아져 나왔다.
“크르르르!”
발록의 눈과 귀에서 화염이 일었다. 채찍을 머리 위로 풍차처럼 휘돌렸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실드가 생성되었다.
주첨기의 검기가 발록의 실드에 부딪쳤다. 발록 주위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터졌나왔다.
주변의 스켈레톤들은 검기에 휩쓸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초식의 발현이 끝난 후 발록의 주위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혹은 화산의 분화구처럼 움푹 파였다.
시야에 보이지 않는 스켈레톤들까지 넘어지기 일쑤였다.
“후우!”
“크크크!”
그러나 발록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주첨기는 이를 악물며 반대편으로 뛰었다. 발록을 좀 더 먼 곳으로 유인하여 이 큰 싸움에 신명대국의 검사들이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설령…….”
주첨기가 설령을 보았다. 설령은 고개를 저었다.
주첨기는 억지로 설령을 끄집어냈다. 바닥에 떨어뜨린 후 국경과 떨어진 곳으로 전력질주했다.
주첨기는 한적한 곳을 찾았다. 대전투를 벌이기에 적격이다.
“나와라, 대흑마괴!”
주첨기는 냉기를 뿜었다.
슈욱
나무 위에 마기가 응집되었다. 발록의 모습으로 변했다. 발록은 나무꼭대기에 앉았다.
“네 무덤이 될 곳이다.”
“크크크! 과연…….”
발록은 웃으면서 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주첨기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발록은 무방비다.
구천신검의 만검지천은 발록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주첨기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마에 박힌 인이 약점인 것은 흑골이든 대흑마괴든 같을 것이다.
주첨기는 목표를 응시했다. 오른발로 지면을 박차고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거대한 검강보다는 청령진기를 끌어올려 칼끝에 집중했다. 칼끝에 반투명한 기운이 서렸다.
“합!”
바로 발록의 앞이다.
주첨기의 눈에서 안광이 일렁임과 동시에 위로 솟구쳤다.
목표는 이마의 인!
유(有)에서 무(無)로 돌리는 힘을 가진 대천입밀의 초식이 시전되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첨기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검부터 다시 나타났다.
검은 발록의 인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주첨기의 손이 나타나고 전신이 나타났다.
촌각의 촌각의 촌각!
가장 작은 단위의 시간 후 모든 것이 끝난다. 주첨기는 힘을 주었다.
“컥!”
성공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 주첨기는 문득 신음을 터뜨렸다.
괴소를 짓고 있는 발록!
어느새 그의 채찍이 주첨기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크으으윽!”
화염이 주첨기를 휘감았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지옥의 화마가 주첨기를 집어삼켰다. 호신강기도 필요 없었다. 화마는 호신강기까지 증발시켜버렸다.
“크으……!”
주첨기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강한 힘에 압박당해 몸이 빠지지 않는다.
호신강기조차 태워버리는데 금강불괴는 오죽하랴!
살이 타는 냄새가 풍겼다.
“크크크!”
발록이 웃었다. 채찍을 풀며 주첨기를 내던졌다. 쓰레기를 버리는 듯하다.
주첨기는 허공에서 수없이 돌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입을 벌렸다. 하얀 수증기가 입과 코, 귀로 뿜어져 나왔다. 내상을 최소화하여 화기를 감싸고 있다가 이제야 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이 다 틀어진 느낌이다.
발록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놈……!”
주첨기는 숨을 고르고 발록을 노려보았다.
발록은 무방비다. 그러나 화염의 채찍을 쥐고 있는 이상 섣불리 접근할 수 없다.
주첨기는 생각을 마치고 검을 움직였다.
구천신검 천검개화!
천 개의 꽃이 한자리에 피니 꽃향기가 세상을 물들여 정신이 아늑해진다.
검기는 만개한 꽃의 형상을 띠었다. 발록의 전신을 압도하는가 싶더니 꽃들이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빠르고 쾌속하게 거대한 꽃이 되어 발록의 손목을 노렸다.
발록이 날개를 펄럭여 마기를 일으켰다. 꽃잎들이 우수수 바람에 나부꼈다.
마지막!
채찍으로 꽃 한가운데를 갈랐다.
검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야 말았다.
채찍에서 뿜어진 화염은 그대로 주첨기에게 날아갔다. 주첨기가 위로 솟구쳐 화염을 피했다.
촤라라락
채찍이 주첨기의 발목을 휘감았다. 채찍을 당겼다. 화염이 주첨기를 땅에 내리꽂았다.
반대편에 들린 채찍이 주첨기의 전신을 강타했다.
“크억!”
주첨기는 피를 토했다. 입 밖에서 나오자마자 피는 화염의 열기에 증발되었다.
“크크크!”
한쪽 채찍으론 몸을 못 움직이게 하고, 다른 채찍으론 공격하길 반복했다.
여섯 번째 채찍이 적중되었다. 주첨기의 온몸이 축 늘어졌다.
발록은 채찍을 휘둘러 화염에 휩싸인 주첨기의 몸을 몇 번이나 땅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생각보단 흥미롭지 않군.”
발록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럼 생명을 거두지.”
발록은 주첨기의 복부를 짓밟았다.
주첨기는 꿈틀거렸다.
발록은 미소 지으며 채찍을 일자로 세웠다.
끝이다!
채찍이 주첨기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주첨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청령진기의 힘으로 간신히 발록의 발을 밀어내고 옆으로 몸을 굴렀다. 대국의 황제가 되어 치욕스럽게 바닥을 굴렀다.
주첨기는 죽은피를 퉤 내뱉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내력은 모든 소진되었다. 간신히 일어선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주첨기는 악으로 버텼다.
“감히……!”
주첨기는 발록이 세 개로 보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정신의 끈을 놓칠 위기였다.
다행인 것은 아직 진기가 남아 있다는 것!
주첨기의 눈동자가 빨갛게 변했다. 진기를 재목 삼아 사기(邪氣)를 피어올렸다.
주첨기를 감싸고 있던 지옥의 겁화가 사그라졌다. 대신 사기의 기운이 발끝부터 치밀어 올랐다.
“크르르르…….”
발록은 주첨기를 보며 웃었다.
“살(殺)……!”
문득 수라혈마의 모습이 주첨기에게 연상되었다. 아니, 오히려 수라혈마의 살기보다 더한 것이 주첨기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라혈마가 전해 준 파천마권 중 극의 초식, 귀왕의 힘을 그대로 발현한다는 초식이다.
순간 발록도 심상찮음을 느끼고 움직였다. 채찍 두 개가 주첨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후우!”
주첨기는 살기로 호흡하고 채찍을 잡았다.
“크르……!”
발록의 안광이 번뜩였다.
주첨기는 괴력을 발해 채찍을 끌어당겼다. 발록의 몸이 옆으로 딸려왔다.
발록이 날개를 펄럭여 마기를 뿜어냈지만 주첨기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왕(鬼王)이 강림했다!
발록은 채찍을 잡아당겼다. 주첨기가 손을 놓았다. 발록이 채찍을 거두어들이는 그사이의 절묘한 시점이다.
주첨기의 온몸에서 살기가 뻗쳤다. 얼굴도 손도 다리도, 모든 피부가 붉은빛으로 번쩍였다. 피부 속으로 아련히 보이던 혈관들이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압!”
주첨기가 괴성을 내질렀다.
사자후다!
나무와 거대한 바위들이 뽑혀 허공에서 분해되었다. 권으로 살기가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폭발했다.
귀왕마권(鬼王魔拳)!
발록도 무시 못할 위력의 기운이 권에서 뻗쳐 나갔다. 귀왕의 형상이 발록을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쩌억 벌렸다.
발록은 날개로 몸을 감쌌다.
권은 정확하게 발록의 날개에 적중했다.
세상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주변에 높게 치솟아 있던 산의 정상이 그 여파로 날아갔다.
발록 주위로 지면이 갈라졌다. 융기도 되고 침하도 되었다.
“쿨럭!”
주첨기는 주먹만 한 크기로 응어리진 흑혈을 토해냈다. 시선은 발록에게서 떼지 않았다.
발록의 날개가 서서히 펼쳐졌다.
당연히 큰 상처를 입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록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보였다.
발록은 인상을 구겼다.
“장난이 심하구나, 미천한 인간.”
주첨기는 비틀거렸다. 간신히 청강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힘도 없다. 이번 초식으로 모든 진기를 내뿜었다.
갓난아이 하나 어찌할 힘조차 없는 주첨기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나 눈만은 절대 감지 않은 채 발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발록의 채찍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닿기만 해도 무엇이든 소멸시켜버릴 듯한 지옥의 겁화가 주첨기를 응시했다.
“미천한 인간!”
결국 그것이 주첨기를 향해 날아갔다.
“폐하!”
두 기의 데이모스가 갑자기 나타났다. 청색의 데이모스와 적색의 데이모스가 발록의 양팔을 붙잡았다.
“폐하!”
언제나 정순한 내력이 감돌던 진천의 눈에도 살기가 이글거렸다.
발록은 개의치 않고 채찍을 휘둘렀다. 두 기의 데이모스가 온갖 힘으로 어깨의 방향을 비틀었다.
채찍은 빗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주첨기 옆을 덮쳤다. 지면의 일부분이 튀었다.
주첨기까지 그 충격으로 나가떨어졌다.
첨벙
강물 속에 빠졌어도 주첨기는 허우적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물에 둥둥 떠 있었다. 강물은 점점 주첨기를 밑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크르르르.”
발록은 두 기의 데이모스를 떨쳐냈다. 청검과 혈권은 산중턱에 처박혔다.
발록은 주첨기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다.
인상이 와그작 구겨졌다.
―수라혈마, 폐하께선?
폐하는 승하하지 않았다. 기력을 다 소진하고 심한 내상을 입어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어디로 사라져버리신 것일까?
―모르겠다. 피햇!
피할 수 없는 두 자루의 채찍이 그대로 청검과 혈권의 가슴에 적중했다.
혈권과 청검은 비탈을 타고 뒹굴었다.
“폐하!”
100여 명의 고수들이 격전장으로 몰려들었다.
격전장은 지각변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반이 침하되거나 융기된 상태였다. 살아남은 생물 또한 하나도 없었다.
고수들은 뒹구는 청검과 혈권을 중간에서 막았다.
“대장군님들께서는 피하십시오. 대흑마괴는 저희들이 상대하겠습니다!”
매화일검이 앞장서서 말했다.
“크윽, 이놈들! 국경은 어떻게 하고 왔느냐. 황명을 거역할 셈이냐! 빨리 국경을 수비하여 백성들을 안전케 하지 못하겠느냐?”
수라혈마가 노성을 터트렸다.
“수라혈마, 너도 옳은 말을 할 줄 아는군. 껄껄!”
진천이 힘겹게 일어났다.
“당장 돌아가라! 대흑마괴를 막는 것은 우리의 임무, 너희 임무는 국경을 수비하는 것이다.”
“썩 돌아가지 못할까? 본좌를 동정하는 것이더냐?”
두 대장군의 노한 음성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고수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크르르르.”
발록은 주첨기가 사라져서 화가 났다. 감정을 대변하듯 화염이 매섭게 타올랐다.
그는 고수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화염이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갑자기 발록이 멈추어 섰다.
“킹스켈레톤?”
한마디와 함께 발록의 신형이 사라졌다.
“헛!”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00여 명의 고수들과 두 대장군은 국경 쪽을 향해 전력질주했다.
국경은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발록이 사라지고 난 뒤 조심해야 할 존재는 흑골 킹스켈레톤밖에 없었다. 20여 명은 킹스켈레톤을 상대했고 나머지는 일정한 간격으로 지키고서 국경의 틈을 벌리지 않았다.
“흑골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마시오!”
홍염광마는 킹스켈레톤에게 권을 날렸다. 킹스켈레톤이 이를 피하기 무섭게 대여섯 개의 검기가 한 번에 날아들었다.
킹스켈레톤은 간신히 검기들을 쳐냈다.
20명 중 열다섯은 킹스켈레톤을 공격했다. 나머지 다섯은 킹스켈레톤의 포위망을 향해 달려드는 스켈레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인간들, 죽여주마!]분노한 킹스켈레톤의 마검에서 진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마검에서 피가 샘솟았다. 뚝뚝 떨어졌다.
킹스켈레톤이 피를 주위로 뿌렸다.
장소백이 칼날로 핏방울을 막았다.
중원에서도 명검으로 손꼽히는 검인데 핏방울이 닿자마자 부식되었다.
“조심하시오. 극독이오!”
장소백이 놀라서 외쳤다.
고수들이 핏방울을 피하기 위해 검을 놀렸다. 그사이 킹스켈레톤은 장소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검이 장소백의 목을 노렸다.
장소백은 고개를 숙였다. 마검이 휭 하고 허공을 베었다.
장소백이 반격할 틈도 없이 마검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그대로 꺾어 내려왔다.
챙
주위에서 세 개의 검기가 뛰쳐나와 마검을 튕겨 냈다. 장소백은 간담이 서늘해져 외쳤다.
“이놈!”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식은땀까지 흘렀다.
킹스켈레톤은 절제되지 않은 동작으로 고수들을 몰아쳤다. 감정이 앞서고 있다. 바로 뒤에 수백만의 스켈레톤 군단이 있는데도 누구 하나 인간의 진을 뚫고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킹스켈레톤은 다급해졌다. 마검은 더욱 거칠고 힘 있게 휘둘러졌지만 정교함이 떨어졌다. 더욱이 고수들 열 명 이상이 합공을 했다.
검기, 권기, 도기!
한데 어우러져 킹스켈레톤의 전신을 엄습했다. 킹스켈레톤은 마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인이 붉은빛을 터트렸다. 검은 마기가 킹스켈레톤의 몸 주위로 엷게 처졌다.
고수들의 내력이 마기의 막에 부딪쳤다.
호신강기와 비슷하다.
깨뜨리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무수히 많은 공격을 시도해 적의 기운을 소진시켜야 한다.
“쓰러뜨리는 데 얼마 남지 않았소!”
고수들의 공격이 본격화되었다. 그들은 내력을 극까지 끌어올렸다. 정파의 정순한 무공과 사파의 패도적인 무공은 한 덩어리를 이루어 킹스켈레톤을 압도해갔다.
“조심해라, 사사혈겸!”
소면혈겸이 사사혈겸에게 날아오는 마검을 보며 외쳤다.
사사혈겸은 대겸으로 마검을 찍었다. 대겸은 마검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날아갔다.
팟
소면혈겸과 동시에 홍염광마가 킹스켈레톤의 허리를 공격했다. 킹스켈레톤은 사사혈겸에게 날렸던 검을 급히 거두어들여 둘을 향해 휘둘렀다.
둘은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그사이 열 개의 검기가 킹스켈레톤에게 날아갔다.
스파크가 일었다. 킹스켈레톤을 보호하던 마기의 막이 깨졌다. 검기 하나가 킹스켈레톤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툭
마검을 든 손이 떨어졌다.
킹스켈레톤은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이닷!”
소리장비, 하상, 위혁민, 청운검, 장웅칠이 킹스켈레톤에게 일격을 날리고 지나갔다.
킹스켈레톤의 몸에 선명한 금이 그어졌다.
투두둑
목, 양팔, 두 다리가 잘렸다. 총 여섯 등분으로 나뉘어 바닥에 떨어졌다.
[너희들은 날…… 죽일 수 없다!]킹스켈레톤이 뇌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떨어진 것들이 스르르 붙어 한 고수를 공격했다.
고수가 킹스켈레톤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면 그 뒤로 어김없이 여러 명이 합공으로 킹스켈레톤을 몰아쳤다.
킹스켈레톤도 끈질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다섯 명의 고수들도 서로의 합공이 몸에 익어갔다. 좀 더 자연스럽고 유연해졌다.
“헛!”
킹스켈레톤을 공격하던 도중 거대한 기운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발록의 기운이 아니다.
바로 황제폐하의 기운이다!
“크으……!”
장웅칠은 얼굴근육을 부르르 떨었다.
현실을 믿기 힘들었다.
황제폐하께서 승하하셨단 말인가?
“네놈들이 감히 황제폐하를……!”
슈슈슈슛
스켈레톤 군단을 막아서고 있던 고수들은 황제폐하의 기운이 사라진 쪽으로 내달렸다.
청운검의 눈에서 쓰디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흑골, 너부터 죽이겠다!”
청운검뿐만이 아니다. 킹스켈레톤을 상대하고 있던 모든 고수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모두들 울부짖음인지 기합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아아!”
흑골은 당황했다. 미친 듯이 날아드는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결국 또다시 목이 베였다.
“힘의 근원은 이곳이렷다!”
장웅칠이 대도를 높게 치켜들었다. 일전에 입었던 상처의 고통 따위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대도가 마신의 인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킹스켈레톤의 눈구덩이가 붉은빛으로 번들거렸다.
화르르륵
장웅칠은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대도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갑자기 나타난 화염이 허리를 물었다.
그것은 채찍이었다.
“대흑마괴!”
킹스켈레톤을 상대하던 고수들은 놀라서 부르짖었다.
“킹스켈레톤, 미천한 인간 따위를 상대하지 못하느냐.”
[죄송합니다.]킹스켈레톤은 자신의 얼굴을 목뼈에 맞추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장웅칠!”
고수들이 발록을 향해 검기를 날렸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장웅칠은 금세 화염에 휩싸여 비명을 질러댔다. 몰려든 고수들은 신음을 흘렸다. 눈앞에서 동료가 뻔히 죽어나가는데도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이토록 자신들이 약한 존재였다니!
발록은 고통스러워하는 장웅칠을 쉽사리 죽이지 않았다. 신명대국 고수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발록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고수들의 얼굴이 분노로 상기되었다. 눈동자도 충혈 되었다. 피눈물을 흘릴 지경에 이르렀다.
고수들은 악이 받치는 대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발록은 날갯짓 한 번으로 그것들을 무마시켰다.
“이노오오옴!”
지면이 울리는 큰소리와 함께 적색의 데이모스가 나타났다.
“대장군님!”
혈권이 발록에게 권풍을 퍼부었다.
발록은 장웅칠을 혈권 쪽으로 내던졌다.
혈권이 장웅칠을 받아 들었다. 장웅칠은 불에 탄 멧돼지처럼 새까맣게 그슬렸다.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수라혈마는 가슴을 졸이며 내력을 불어넣었다. 그제야 장웅칠은 ‘콜록’하며 기침을 토했다. 죽지는 않았으나 겨우 생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죽여버리겠다!”
“크흐흐흐.”
발록은 웃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어김없이 혈권의 가슴에 적중했다.
혈권은 장웅칠을 감싼 채 뒤로 넘어졌다. 혈권의 가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강물은 계속 흐른다.
주첨기는 정신이 들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 따위도 없다.
주첨기는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강물은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외곽을 돌아 대륙의 중심부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주첨기는 참혹하게 패했다.
일방적인 패배!
전투라고 불릴 수도 없는 대결이었다. 대흑마괴 발록의 힘은 실로 막강했다.
설사 데이모스를 탄다 해도 승산이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렇다면 신명대국의 앞날은? 두 대장군과 자신을 믿고 따라온 400명의 신하들은?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울부짖고 싶었다.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치 몸뚱이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혹시 지금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패한 것이 원통하다. 대국의 앞날이 걱정되어 죽는다 해도 분명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원귀가 될 것이다.
쏴아
폭포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주위에 폭포는 보이지 않았다. 바로 머리맡 쪽에서 나는 소리다.
주첨기의 몸이 갑자기 기울었다.
떨어진다!
강물은 바다나 호수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강물 끝은 폭포였던 것이다.
주첨기의 몸이 낙하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퉁
주첨기는 충격과 함께 중간에 멈추었다.
희한한 일이다. 강물들은 밑으로 다 떨어지고 있는데 주첨기만 통과되지 않고 있었다.
어망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주첨기는 가만히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야 해. 짐을 애타게 부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첨기는 손가락 끝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부들거리지도 않았다. 정신만 산 시체 같다. 아니면 정말로 죽어서 이대로 육신이 썩길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죽을 수 없다. 설사 죽었더라도 원귀가 되어 나라를 구제하고 말리라! 그런데 나를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따뜻한 막은 강물만 통과시키고 있었다.
떨어지는 폭포수를 맞으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폭포수인지, 폭포수가 나인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주첨기는 눈을 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조그마한 깨달음이 길을 열어주었다. 주첨기는 가로막고 있던 막 속으로 몸이 점점 통과되는 것을 느꼈다.
막은 황금색이었다. 막 속에 들어서자 눈앞에 황금색 안개로 가득 찼다. 몸은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
쑥
결국 막을 통과했다.
평상시 낙하하듯 주첨기는 무서운 속도로 폭포수와 함께 추락하기 시작했다.
끝이 없다.
주첨기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윽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주첨기는 알 수 없는 뭔가에 부딪쳤다. 매우 높은 곳에서 추락해 전신이 부서질 법도 한데 충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온기를 느꼈다.
따뜻하다.
그 속에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건……?’
등에서부터 느껴지던 온기가 몸속으로 빨려 들기 시작했다. 가득하던 내상은 씻은 듯 사라지고 텅 빈 몸속에 내력이 차올랐다.
‘아……!’
손끝 발끝이 움직인다. 몸을 움직일 수가 있다.
주첨기는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온기는 점점 열기로 바뀌었다. 열기가 몸속으로 들어와 혈관에 가득 찼다. 혈도를 타고 몸 전체를 휘도는 열기는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큭!”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고 찢어지는 고통이 일었다. 그러나 내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통을 참으면 잠시나마 찾아오는 상쾌함이 그것이다.
“아…….”
강대한 기운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주첨기는 갑자기 밀려드는 기운들을 억누르고 다스리기 위해 마음의 평정을 찾도록 노력했다.
억지로 구겨지는 인상을 폈다.
몸에 바짝 들어가는 힘을 풀며 운기조식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오는 기운은 족족 단전과 혈도에 녹아들었다.
이번엔 입가에 퍼지려는 미소도 붙잡았다.
주첨기는 석상이 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에서 밀려들어오는 기운이 그에게 흡수되어갔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힘.
마치 규칙이 있는 것 같은 그것들이 주첨기에게 빨려 들어갔다.
주첨기의 몸이 금색, 녹색, 은색, 검정색으로 발광하며 회전했다.
단전은 넓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 또 다른 기운들이 밀려들어 더욱 넓혔다. 한 번씩 단전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다시 빠져나가 혈관을 타고 몸 전체로 녹아들기도 했다.
단전이 비어지기가 무섭게 어김없이 기운들이 다시 가득 차길 반복했다.
무념, 무상!
대자연을 다스리는 거대한 기운 앞에서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미간 사이에 존재한다는 제3의 눈!
광대한 평원이 제3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것은 암석을 부수고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로 변하고, 또다시 산천초목이 우거진 태산으로 변하기도 했다.
주첨기는 거기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눈이 내린다. 비가 내린다. 천둥이 친다. 바람이 분다. 햇빛이 내려온다. 태풍이 몰아친다.
깊은 바다를 헤엄친다. 푸른 하늘을 난다. 높은 산을 뛰어오른다.
폐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상쾌한 산 냄새가 들어왔다.
주첨기는 더 이상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입가와 눈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쳤다.
그리고 천천히 눈이 뜨였다. 주첨기의 눈동자에서 금광이 일렁거렸다.
다시 눈을 깜빡이자 본래의 흑안으로 돌아왔다. 주첨기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가 내뱉었다.
전신에 충만한 내력에 놀라지 않았다. 담담했다. 미소가 지워졌다.
이것들은 모두 바닷물이고, 공기고, 산 냄새다. 대자연의 일부라서 자신이 그 속에 누워 있을 뿐이다.
기연…….
주첨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미처 사람이 있는지 몰랐다. 이들이 바로 자신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준 분들이다.
관공이 부럽지 않는 금색 수염의 노인, 녹색 로브를 입은 청년, 긴 흑발의 청년, 은발의 미녀.
총 네 사람이다.
그들은 주첨기가 서 있는 중앙 쪽을 향해 양손을 내밀고 있었다.
주첨기는 그들을 향해 포권했다.
“신명대국의 황제 주첨기, 그대들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과분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답변이 들려오지 않았다.
“은인들이여.”
주첨기는 다시 한 번 불렀다. 노인의 손을 잡았다. 체온이 느껴졌다.
주첨기는 조심스럽게 노인의 손을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첨기는 생각을 마쳤다.
벽을 향해 지력을 날렸다.
주첨기는 벽에 글을 쓴 후 네 사람을 향해 각기 한 번씩 허리를 숙였다.
“상황이 급박한 만큼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이렇게 가는 것을 헤아려 주십시오.”
번쩍!
주첨기의 신형이 사라졌다.
힘을 모으는 동안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위험한 상황이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드래곤로드가 친히 결계까지 쳤다.
그런데…….
드래곤로드는 눈을 떴다. 중앙에 모여 있어야 할 드래곤하트의 응집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힘은 빠져나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허탈한 심정을 토로하며 시선을 돌렸다. 문득 그때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헛!”
네 드래곤은 동시에 탄식음을 흘렸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실버드래곤 아미스타드는 화보다 황당함이 앞섰다. 기껏 수일 동안 힘을 모으고 눈을 떴더니 웬 인간의 글씨만 남겨져 있는 것이다.
“로드이시여…….”
그린드래곤 니르시즈는 로드 카르마시온을 보았다. 카르마시온은 해 줄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인간이 들어와 힘을 훔쳐간 것이 틀림없군. 크윽!”
블랙드래곤 익센트리크는 주먹을 쥐었다.
“내 힘의 5할은 쏟아 부었는데!”
아미스타드가 절규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여기 있는 모두가 드래곤하트의 절반에 해당하는 힘을 쏟아 부었다고.”
니르시즈는 허탈하게 일어섰다. 벽면에 다가갔다.
인간의 글이다.
“신명대국의 황제 주첨기?”
“그놈은 반드시 잡아서 힘을 돌려받아야 한다.”
익센트리크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미 도망쳐 버렸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쳐들어가 힘을 되찾아 오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드시여.”
익센트리크는 로드에게 말을 돌렸다.
로드 카르마시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르마시온의 입이 열렸다.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란 인간을 알고 있는가?”
한낱 하루살이 동물에 불과한 인간을 지고의 존재가 알고 있을 이유가 없다.
모두 알 리가 없었다.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 그가 바로 레드드래곤 아르카콘트를 죽인 인간이다.”
“설마…….”
모두 믿기지 않는 눈치다.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레드드래곤 아르카콘트를 죽일 만한 능력을 지닌 자가 네 드래곤이 모은 힘을 흡수하다니. 천만다행인 것은 발록을 퇴치하겠다고 선언하고 나갔다는 것이다.
어차피 발록을 퇴치하기 위해 만든 힘의 집합체다.
“그럼 레드드래곤 아르카콘트의 복수와 도둑맞은 힘은 어떻게 합니까, 로드이시여.”
“크흠……!”
로드 카르마시온은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과분한 힘을 얻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계속 모으고 있던 힘을 모두 흡수한 모양이다.
순수한 실력만으로 레드드래곤 아르카콘트를 죽였는데 이제는 드래곤 두 마리에 달하는 드래곤하트의 기운이 추가되었다.
“으아!”
블랙드래곤 익센트리크가 자신의 머리를 휘저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아까운 드래곤하트를 생각하면 이제 앞으로 잠도 못 잘 판이었다.
“진정해, 익센트리크.”
니르시즈가 말했다.
“진정하게 생겼어? 아까운 기운…… 이런 걸 인간들은 죽 쒀서 남 좋은 일만 시켰다고 하지. 기필코 놈을 죽여 버려야겠어.”
“맞는 소리야.”
아미스타드가 맞장구쳤다.
“그런데 어떻게……?”
답이 없다.
“이미 모두의 기운이 절반 이상 빠져나갔네. 더 이상 힘을 모은다는 건 말도 되지 않지. 이제는 그 인간이 발록을 해치우는지 지켜보면 되네. 모두 레어로 돌아가게.”
“로드이시여!”
익센트리크, 니르시즈, 아미스타드.
세 드래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말했다.
“그 인간을 잡아들여 힘을 다시 되찾을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어차피 사라질 힘이었다. 이제는 지켜보는 일만 남았을 뿐.”
“그래서 더욱 문제인 것입니다. 사라졌어야 할 힘이 불완전한 인간의 통제 하에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발록이 강림한 것보다 더 큰일이 벌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익센트리크가 말했다.
“익센트리크!”
로드는 노한 음성을 흘렸다.
“예, 로드이시여!”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는가? 우리는 더 이상 그 인간을 어찌할 수 없다.”
“로드의 힘으로도 안 된단 말씀이십니까?”
익센트리크의 질문에 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익센트리크는 절망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아닙니다, 로드이시여. 동족의 힘을 모은다면 능히 그 인간을…….”
“익센트리크, 그 인간에 대한 문제는 발록 문제가 해결된 후로 미루겠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인간이 발록을 이길 수 있도록 축복해 주는 일만 남은 것이다.”
카르마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로드이시여.”
드래곤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럼 나중에 보지.”
“그럼 정녕 우리들은 이대로 인간이 하는 일을 지켜보기만 해야 할 뿐입니까?”
“나설 자는 나서도 된다. 헛되이 죽음을 맞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는 나서도 좋다. 뭐라고 하지 않겠다.”
드래곤로드의 몸이 사라졌다.
쾅
“으아아악!”
익센트리크가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이전만한 힘이 나오지 않는다.
드래곤하트 힘. 정확히 반절이 빠져나갔다.
“니르시즈,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미스타드가 물었다.
“우선은 로드의 말씀을 따를 생각이야.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크윽!”
참으로 황당하고 애석하며 화가 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발록의 채찍은 고수들이 어렵게 짠 진들을 파훼시켰다. 채찍이 떨어졌다. 여러 곳에서 불기둥이 치솟아올랐다.
“정녕 폐하께서는 승하하셨단 말인가?”
고수들은 흔들렸다.
주첨기는 고수들의 정신적인 지주다.
“헛소리 마라! 폐하께선 살아 계신다!”
전신에 금이 가 위태위태한 혈권에게서 소리가 들렸다.
“이제 더 이상 너희들이 흥미롭지 않다.”
혈권의 허리 쪽으로 발록의 채찍이 휘둘러졌다.
청검이 혈권 앞을 가로막았다.
“큭!”
진천은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진천!”
수라혈마는 이를 악물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이 팔이 덜렁거렸다. 수라혈마는 그것을 움직여 발록에게 내뻗었다.
발록의 채찍은 잔인하게 움직였다. 수직으로 그어졌다. 수라혈마가 놀라서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채찍은 혈권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뎅강!
오른팔이 그대로 떨어졌다. 수라혈마는 자신의 팔이 직접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 채찍이 다리를 베고 지나갔다.
혈권의 신형이 크게 기울어 땅에 박혔다. 두 다리가 완전히 절단된 것이다.
수라혈마는 식은땀이 가득한 모습으로 혈권에서 나왔다.
“대장군님!”
천파편살이 급히 뛰어와 수라혈마를 부축하려 했다. 수라혈마는 이를 거절하고 고개를 들었다.
“허억, 허억!”
숨이 가쁘게 쉬어졌다.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은 너무나 선명하다.
지금 붙어 있는 신체가 어색할 정도다.
쿵
수라혈마의 눈에 넘어지는 청검의 모습이 보였다.
“진천!”
수라혈마가 다급하게 외쳤다.
혈권이 쓰러지고 난 뒤 발록은 청검을 공격하고 있었다. 청검은 단 일초도 방어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무방비가 되었다. 발록의 큰 발이 청검의 가슴을 짓밟았다.
움푹 패여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진천은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장군님 후퇴해야 합니다.”
천파편살이 달려드는 스켈레톤들을 부수며 말했다.
발록은 너무나 강했다. 그리고 스켈레톤들은 끊임없이 밀려온다.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백성들이 위험하지 않느냐.”
“이곳에선 안 됩니다. 황성 안으로 후퇴해 농성전을 벌여야 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친 소리! 400만이나 되는 백성들이 살육되는 것을 지켜보란 말인가? 차라리 본좌가 죽고 만다.”
“죄송합니다.”
중원에 있을 당시 방해되는 것이라면 양민, 노인,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베어버렸던 수라혈마였다. 요 몇 년 사이 주첨기를 만나면서 많이 변했다.
“흡!”
진천이 눈을 부릅떴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채찍을 피하지 못했다. 고스란히 적중당하는 것보단 대항하기를 택했다.
진천은 화염채찍을 양손으로 받았다. 화염이 손을 녹일 듯했다. 진천은 고통인지 분노인지 모를 신음을 터트렸다.
한 가지 망각했다. 발록의 채찍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남은 채찍 하나가 날아왔다.
팟
수라혈마는 급히 지면을 박찼다. 진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또 하나의 채찍을 두 손으로 잡았다.
“크흐흐흐!”
고통스럽다. 채찍을 놓고 몸을 날려야 하지만 채찍에서 밀려오는 힘이 강해 놓으면 즉사다!
화마의 기운이 손을 타고 몸 전체를 뒤덮었다. 수라혈마와 진천은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화마는 호신강기를 녹이고 수라혈마와 진천을 집어삼켰다.
불덩이가 되었음에도 둘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수라혈마와 진천.
화염 속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다.
죽기 일보직전, 일그러진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안쓰럽다. 둘은 같은 생각이었다.
서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천과 수라혈마는 쓰러졌다.
발록의 채찍이 둘의 전신을 한 번씩 강타했다.
“컥!”
죽음에 매우 근접했다. 그 끝이 보였다.
“대장군님!”
주위에서 발록을 향해 수십 개의 검기가 날아갔다. 발록은 코웃음쳤다.
날갯짓 한 번으로 검기는 소멸되었다. 발록은 수라혈마와 진천을 큰 발로 한 번씩 짓밟은 후 위로 날아올랐다.
“크……!”
“커……!”
수라혈마와 진천은 간신히 손끝을 움직였다. 수라혈마와 진천 주변의 땅이 가열되었다. 둘이 토해낸 열기가 주변 땅에 뿜어진 까닭이었다.
“가소로운 것들…….”
발록은 스켈레톤을 부수고 있는 고수들에게 날개를 펄럭였다.
검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칼날같이 변한 마기는 고수들의 어깨며 허리며 다리들을 베고 지나갔다.
한 번에 열 명 이상이 바닥을 뒹굴었다.
팡
킹스켈레톤이 어깨로 고수를 들이받았다. 고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손가락으로 고수를 가리키자 스켈레톤 수천 마리가 한 고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킹스켈레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빈틈이 있다.
킹스켈레톤은 버티고 서 있는 고수에게 달려들었다. 마검을 휘둘렀다.
두 고수의 병기와 마검이 부딪쳤다. 킹스켈레톤은 패도적인 힘으로 두 고수의 병기를 부숴 버렸다. 그리고 주먹으로 안면을 가격했다.
[따르라.]킹스켈레톤이 스켈레톤들을 불러들였다. 수십만 마리가 이에 반응했다.
무너진 방어선 쪽으로 스켈레톤들이 몰려들었다. 킹스켈레톤은 수십만을 이끌고 안으로 진격했다.
“멈춰라!”
하늘에서 20여 명의 고수가 내려왔다. 이미 그들과의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킹스켈레톤은 손을 쓰윽 올렸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수들을 가리켰다.
“이런 야비한……!”
당진진은 신음을 삼켰다. 스켈레톤들이 밀려들어 시야를 가렸다. 부셔도 부셔도 다시 채워졌다.
킹스켈레톤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흑골을 막아야 하오.
―알고 있소만 어떻게 막는단 말이오.
―이렇게 흑골을 보내게 되면…….
―300만이 몰살되오.
―막아야 하오. 막아야 하오.
“막아야 한단 말이외다!”
당진진이 답답한 마음을 터트려 외쳤다.
드드득 드드득
수십만 마리가 파도처럼 밀려나갔다. 킹스켈레톤은 팔짱을 끼고 지켜볼 뿐이었다.
고수들이 스켈레톤들 사이로 파묻혔다. 그제야 킹스켈레톤은 진군을 계속했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국경 또한 완전히 무너졌다.
매화일검은 수라혈마와 진천을 양어깨에 걸쳐 메고 큰소리로 외쳤다.
“후퇴하시오! 흑골들이 백성들을 향해 진격하고 있소!”
매화일검은 후퇴하는 고수들의 무리와 함께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후퇴도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김없이 날아드는 발록의 채찍과 칼날 같은 마기는 고수들을 땅에 눕게 만들었다.
한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 그 옆에 있던 자가 들쳐 멨다. 그렇게 한 명이 두 명까지 들쳐 메고 뛰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스켈레톤 군단의 진격을 뚫으며 깊숙이 안으로 들어갔다.
“꺄아아아악!”
여자의 비명 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매화일검은 스켈레톤의 머리를 밟고 높게 치솟았다. 허공에서 뱅그르르 돌며 천막촌 앞에 내려섰다.
피난민들은 황성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온갖 식기구가 내동댕이쳐졌다. 쓰러진 자보다 도망치고 있는 자가 우선이다.
다 끝났다.
스켈레톤들이 율리안에 이어 신명국까지 몰락시켜버린 것이다. 절망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들이었다.
슈슈슛
피난민들의 입구로 고수들이 날아들었다. 국경은 무너졌고 이제 이곳이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다.
전쟁에 임할 수 있는 자는 4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각자 들쳐 메고 있던 부상자들을 뒤로 내려놓았다.
정말 마지막이다.
뚫리면 모든 게 끝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바로 뒤에 놓인 동도들과 수백만의 백성들도 죽는다.
하지만 수는 고작 40밖에 남지 않았다. 생사를 오가는 부상자가 130여 명에 달한다는 소리다.
고수들은 필살의 각오를 했다.
“기필코……!”
“반드시……!”
“절대로……!”
목숨 따위는 아끼지 않겠다!
망자들은 절대 천막촌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단 말이다!
킹스켈레톤이 정면에서 돌진해 왔다. 하늘에서 날아오는 발록의 모습도 보였다.
새하얀 백골들과 번쩍거리는 시미타들!
매화일검과 고수들은 이를 악물었다.
스켈레톤 군단이 먼저 달려들었다. 고수들은 스켈레톤을 부수는 데 이골이 났다.
“다 죽어라.”
발록이 뇌까렸다.
발록은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 모양대로 긴 화염덩어리가 정파고수들의 대열 위로 떨어졌다.
발록은 연거푸 휘둘렀다. 화염덩어리가 고수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수들이 검을 휘둘러 화염을 가르려 했지만 소용없다. 오히려 화염이 닿는 즉시 휩싸이게 되었다.
발록과 킹스켈레톤은 가득 차 있는 스켈레톤들을 개의치 않고 공격했다.
‘죽어서도 이 자리에서 죽는다.’
매화일검이 죽을 각오를 했다.
고수의 수도 40에서 20여 명으로 줄었다.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 고수들은 공격을 하기는커녕 발록과 스켈레톤의 공격에서 부상자들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벌써 좌우 끝이 뚫렸다. 스켈레톤들이 천막촌 안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매화일검은 이 모든 게 악몽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눈부신 금빛이 번쩍였다.
환한 금빛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바스러지는 스켈레톤의 모습이 보였다.
매화일검의 시선이 금빛을 쫓았다.
“폐, 폐하!”
매화일검의 음성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