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41
제3화 일어선 고수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녹색 머리의 여인이 드래곤의 평원을 걷고 있었다. 지면이 패이고 갈린, 대전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바람이 불때마다 하얀 뼛가루가 나부껴 시야를 가렸다. 여인은 그때마다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정말 엄청 난데?”
여인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실로 처음이었다.
“우와. 잘못하면 사람들 틈에 끼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야.”
여인이 혼자 중얼거렸다.
모두들 환희에 가득 찬 표정들이다.
검은군주 발록과 함께 스켈레톤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들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통솔할 인원이 부족한 덕분에 상당히 무질서 하였다. 곳곳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후드 속으로 살짝 드러난 여인의 외모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누구 하나 여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모두들 각 가족의 천막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임의로 정해놓은 경계선 안에 침입하는 자가 있으면 어설픈 식기구를 집어 들었다.
“도둑질은 용서 하지 않는다! 이는 황명이니 도둑질을 하여 민심을 혼란케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
매화일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엘리나는 그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이를 명심하라!”
매화일검은 피난민들에게 휩싸여 있었다. 그를 겹겹이 에워싼 피난민들은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려 목에 핏줄을 세웠다. 후드의 여성은 그 모습을 보며 질겁했다.
“깔려 죽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겠는걸.”
인간 세상 구경도 좋지만. 이래서야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헤휴.”
엘리나는 사람들 틈을 아슬아슬하게 걸었다.
언제 큰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순간들이 빈번히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흙먼지를 헤치며 매화일검에게 다가갔다. 피난민들 사이에 휩쓸려 넘어지곤 하였다.
간신히 매화일검의 앞까지 도착한 여인은 입을 열었다.
“주첨기님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는데! 황성 까진 너무 멀어요!”
여인의 목소리는 피난민들의 외침 속에 파묻혔다.
“저기요!”
크게 소리 내도 매화일검의 시선은 여인에게로 오지 않았다. 여인은 흥 하고 콧바람을 뿜은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크게 입을 벌렸다.
“저기요!”
그제야 매화일검의 시선이 여인에게 꽂혔다. 여인은 안도의 한숨의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식량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막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면 곧 배급 될 것입니다.”
“식량이 아녜요 당신은 귀족인가요?”
“귀족?……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전 엘리나라고 해요.”
엘리나는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어 젖혔다. 갑자기 그녀의 주위가 조용해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녀의 미모에 놀랐고, 귀가 뾰족한 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아…….”
매화일검도 남성인지라 엘리나의 미모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계에 많은 미녀들이 있지만, 이 여인은 특히나 아름다웠다. “무……무슨 일이십니까.”
“그대들의 왕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찾아왔어요. 많은 수하들이 다쳤다길래.”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습니까?”
매화일검은 정신을 차렸다.
“그런 것 같은데요? 황성이 어디에 있죠?”
엘리나가 말했다.
미색은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매화일검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증표를 주셨을 겁니다.”
“이거 말인가요?”
엘리나가 허리춤에서 검집을 빼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청강검이었다. 황제폐하의 보검!
매화일검은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만세. 만세. 만만세!”
엘리나는 물론이고 피난민까지 당황하였다. 엘리나가 황급히 매화일검을 일으켜 세웠다.
“그대들의 왕은 무척 절박해 보였는데, 당신은 아닌가 보네요?”
엘리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무슨 말이십니까?”
“한시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받았거든요.”
“아!”
그제야 알아차렸다.
매화일검이 엘리나의 허리를 잡아 들었다.
“꺄악!”
엘리나가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매화일검은 무시하고 한번의 도약으로 크게 솟구쳤다.
“무슨 짓이에요?”
“황성까지 빠르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래도 숙녀의 허리를.”
엘리나는 전신에 엄습하는 빠른 바람에 헛숨을 들이켰다. 신기한 사람이다. 마법도 아닌데 이 사람은 말보다도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황성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도착하기까지 보이는 건 순 피난민들 뿐이었다. 평원에 빼곡한 피난민들의 운집은 평원의 지평선이 끝나는 곳까지 이어졌다.
“도착했습니다.”
매화일검이 성벽을 뛰어 넘으며 말했다.
“벌써요? 와…….”
엘리나는 성벽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그것이 동족들에게 듣던 드워프의 솜씨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프?”
성벽을 복구 중이던 드워프들이 은은하게 풍기는 엘프의 냄새를 맡고는 질겁했다. 그것은 엘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드워프들이 이곳에 있는 거죠?”
엘리나는 따지듯 물었다.
“고마운 장인들입니다.”
“그……그런가요?”
엘리나는 코를 찡그렸다. 그사이 성벽을 지나 황성 깊숙이 당도하였다. 매화일검은 홀로 통하는 문 앞에 엘리나를 내려놓았다.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로스엔에서 돌아온 고수들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부상당한 고수들에게 내력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효과는 없더라도 조금이나마 고수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다.
엘리나는 흉하게 화상 입은 부상자들을 보며 우두커니 섰다. 그녀의 눈엔 금세 눈물이 글썽였다.
“발록……이 나쁜 놈. 그렇죠? 정말 나쁜 놈이죠?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까지 만들 수가 있죠? 마족 놈들은 다 나쁘고 흉악무도한 놈들이에요.”
엘리나의 얼굴이 벌게졌다.
“부탁합니다.”
부상자들 속에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란 화산파 사제들이 있고, 이계로 와 큰일을 함께 나눈 동도들이 있다. 매화일검은 엘리나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분이시라면 필히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맡겨만 두세요!”
엘리나가 두 팔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일부러 힘차게 걸었다.
“…….”
내력을 불어넣는데 전념하고 있는 고수들은 엘리나가 와도 미동이 없었다. 다행히 아직 죽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죽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은 누가 봐도 뻔했다. 엘리나가 서둘러 외쳤다.
“모두 일어나서 뒤로 비켜주세요!”
고수들은 그제야 엘리나에게 눈길을 줬다.
“황제 폐하께서 모셔 오신 분이시오. 모두 따라주시오.”
매화일검이 말했다.
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폐하의 명이긴 하나 이 미녀를 믿을 수 없는 눈치들이었다. 얼굴이 빼어난 것을 빼면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
황명이다. 고수들은 억지로 뒤로 물러났다.
“설마 엘……프?”
실리아도 간호를 하고 있었다.
뾰족한 귀. 뛰어난 미모.
실리아는 엘리나가 엘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학자들이 말하길 엘프들은 멸족했다고 했는데, 이렇게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
실리아는 두 눈을 비볐다.
드래곤의 서관에서 발견한 책에 따르기론 엘프들은 서쪽 끝의 산맥에 숨어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삼백 년 전의 서적일뿐이다.
삼백 년 전부터 한 번도 대륙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많은 학자들이 엘프는 멸족했다고 단언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황제 폐하가 엘프들을 찾아 나선다고 했을 때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은 그 하나 뿐 이라서 말릴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엘프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다. 실리아는 신기한 물건을 보듯 엘리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엘리나가 물었다.
“아……아뇨.”
실리아는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뒤로 물러났다. 이젠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엘리나는 엘프의 숲에서 있었던 떄와 같이, 두 팔을 크게 폈다.
“아,”
매화일검을 비롯한 고수들이 신음을 흘렸다. 주변의 기운들이 모두 저 미녀쪽으로 흘러갔다.
엘리나의 몸이 점차 떠올랐고 머리칼이 푸른색으로 변하였다. 눈동자까지 푸른색으로 변할 때쯤 손가락 끝에 물방울들이 맺혔다.
손가락 끝에 모인 물방울들.
향긋한 향이 났고 신묘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 광경을 모두 넋을 잃고 바라봤다.
엘리나의 손에서 뻗어 나온 물방울들이 부상당한 고수들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엘리나는 바닥에 착지해 호흡을 크게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화상으로 일그러졌던 피부들에 새살이 돋고, 죽은 눈빛들이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신음을 흘리고 있던 자들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아!”
모두 크게 놀랐다.
황제 폐하의 내력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았던 고수들이, 원기를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수들은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팔과 다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일어난 이들의 수만큼 되었다.
그중엔 수라혈마와 진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어난 이들은 아직 일어나지 못한 이들을 보며 탄식음을 뱉었다.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진기까지 소멸 되 곧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어,?”
반절이나 되는 부상자에게 치료가 먹혀들지 않다니!
엘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록의 화마에 전신이 노출되었던 자들에게는 조금도 치료가 되지 않았다. 발록이 남기고 간 고통은 질겼다.
“일어나지 못한 검사님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설마…….”
실리아가 물었다.
“발록 그 나쁜 놈.”
엘리나가 씩씩 거렸다.
“예?”
“아니에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좀 더 힘을 내봐야겠어요. 모두 밖으로 나가주세요. 자칫 잘못하면 생명력이 빨려 들어갈 수 있어요. 아니…… 빨려 들어 갈 거예요. 생명을 가진 존재는 이방에서 나가주세요.”
엘리나가 실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실리아와 고수들은 밖으로 나갔다.
엘리나는 구석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식물을 발견했다. 눈을 깜빡 깜빡 거리고 있는 식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살아 있는 식물로써 생명력을 가진 존재였다.
엘리나가 설령에게 다가갔다.
설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신기하게 생겼구나.”
신기?
설령의 얼굴이 벌게졌다.
엘리나가 설령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연의 동물들은 엘프를 좋아한다. 그런데 눈앞의 식물은 달랐다. 설령은 고개를 훽 돌린 후 밖으로 나갔다.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벙찐 엘리나가 헛기침을 하였다.
“으…….”
아직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부상자들이 많았다. 엘리나는 정신을 차리고 심호흡을 했다.
발록에게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선 모든 힘을 다해야 할 듯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는 위험 천만한 상황이다.
엘리나는 주첨기를 떠올렸다. 그가 동족을 구하고, 지켜주고 있는 이상 자신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숨을 크게 고르고 나자 조금이나마 가슴이 가라앉았다.
엘리나는 천천히 두 팔을 펼쳤다.
그녀의 머리칼은 진한 파랑색으로 변했다. 깊은 눈동자 끝에서 푸른 밀물이 밀려왔다.
엘리나의 몸이 허공으로 떴다. 바람은 불지도 않는데 엘리나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샘솟는 땀들이 비오 듯 흘러내렸다.
웅……
푸른색의 오라가 그녀의 몸을 감싸 돌았다. 그것은 곧 물방울들로 변했다.
물방울들은 하나로 합쳐졌다. 손목만한 두께의 물줄기가 되어 엘리나의 몸을 휘어 감았다.
빠르게 회전했다.
엘리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이 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것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미간을 접었다.
흡!
눈을 떴다. 눈에서 푸른빛이 뿜어졌다.
푸른빛이 실내를 물들였다.
흡사 깊은 바다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엘리나의 몸을 감싸 돌고 있던 물줄기들이 회전을 멈췄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고수들에게로 향했다.
고수들의 코와 입, 눈과 귀로 물줄기가 빨려 들어갔다.
엘리나와 고수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줄기로 인해 고수들이 입었던 화마의 고통들이 엘리나에게 전해졌다. 엘리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죽을힘으로 참았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면 모든 게 끝이다. 물줄기의 색이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엘리나의 감긴 눈꺼풀이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쳤다.
어느새 엘리나가 깨물고 있는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엘리나의 숨이 가빠지고 심장은 터지들 쿵쾅 거렸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지옥의 겁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고통은 배로 늘어났다.
순전한 고통만으로 죽음에 이를 판이었다.
그럴수록 고수들의 안색은 바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물줄기는 소멸되었던 진기를 채워주었다.
“크…….”
수라혈마는 정신이 되돌아왔다. 진천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떴다. 수라혈마에겐 진천이, 진천에겐 수라혈마가 보였다.
그리고 이 신묘한 치료를 행하고 있는 이가 보였다.
여인이다.
고수들의 고통을 가져가고 있다. 여인은 그만큼 힘겨워 보였다. 여인이 생성하고 있던 물줄기의 끝이 드러났다. 마지막 물줄기까지 고수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엘리나의 목이 뒤로 크게 꺾였다.
그대로 쓰러졌다.
“엘……프!”
실리아가 놀라서 외쳤다.
그때였다.
진천과 수라혈마를 포함한 고수들의 코에서 일제히 검은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양이 많았다.
죽음곁으로 이끌어 갔던 마기가 신묘한 물에 녹아 나온 것이다.
진천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러진 엘리나의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소?”
엘리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진천은 놀라 엘리나의 맥을 짚었다. 아직 맥이 뛰고 있는 걸 보니 죽지 않았다.
“그분은 괜찮습니까?”
되살아난 고수들이 엘리나 곁으로 모였다. 일어나지 못한 이는 없었다. 모두 치료 되었다.
눈앞의 이 신녀(神女) 덕분이다.
죽은 엘프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죽은 이들을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의식을 여섯 장로와 여왕이 집행했다.
때는 밤이었다.
달빛을 횃불 대신으로 삼았다. 유난히 밝은 달은 숲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장례식 치고는 너무나 평화로운 밤이었다.
“숲의 정령들아…….”
여왕이 동족들에게 뿐만 아니라 숲의 여러 정령들과 나무, 돌, 흙, 꽃, 동물들에게 죽은 이에 대한 애도를 표한 것으로 장례식은 끝났다.
그것으로 더 이상 엘프들은 슬퍼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죽은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거름이 되어 나무를 자라게 할 수도 있고, 흙이 되어 만물을 껴안을 수고 있고, 정령이 되어 자연을 보살필 수 있다.
여왕의 애도사를 들은 주첨기는 황성의 수하들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어떻게든 되어 있을 것이다.
“괜찮으시나요?”
여왕이 물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말 같소.”
“전 괜찮답니다. 그런데 주첨기님의 절박한 심정은 아직도 느껴지고 있어요. 그렇겠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 딸은 치료의 샘을 껴안고 있어요.”
주첨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 봐야겠소.”
주첨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요?”
“마족을 찾으러 말이오.”
“어디에 있는지는 아시나요?”
“모르오.”.
“워낙 신출귀몰 한 자라 찾기가 어려울거예요. 그럼 이렇게…….”
“다녀오겠소.”
여왕이 말을 잇기도 전에 주첨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참 빠른 사람이네요. 그대는.”
여왕은 살포시 웃었다.
주첨기는 엘프의 마을에서 나왔다. 이질적인 기운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덴칸 도적 일당이 혈을 짚여 쓰러져 있는 부분까지 도착했다.
도적들은 주첨기가 덴칸과 함께 간 이후로 줄곧 땅에 쓰러져 있었다.
주첨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도적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가락을 튕겨 그들의 혈을 풀었다.
“으아아악.”
도적들은 사방으로 도망 가려했다. 하지만 주첨기가 한번 기합을 지르자,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주첨기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국법으로 처벌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다. 짐이 너희들의 혈을 짚어 놓았다. 지금은 움직일지 모르나 짐이 혈을 풀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삼일 후 죽게 될 것이다. 혈이 풀리고 싶은 자는 밑 마을로 가, 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중하고 있거라. 내 곧 그리로 가겠다. 죽고 싶은 자는 마을에 가지 않아도 좋다. 병기는 한곳에 모아라”
주첨기가 삼매진화로 병기를 태웠다.
“독…… 같은 겁니까?”
모두 삼매진화로 놀라 있는 가운데, 한 도적이 물었다.
“독?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주첨기는 그 말을 끝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도적들은 갈피를 못 잡았다. 그자의 말을 믿고 마을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믿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느냐. 도적들은 각각 무리를 지어 서로가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도망친 자와 마을로 간자!
이제 두 집단의 운명은 나눠졌다.
주첨기는 비호같은 속도로 산 주위를 내달렸다.
“나와라! 아르메이스!”
목소리가 메아리로 울렸다.
주첨기는 답답했다. 마족 아르메이스는 어디론가 멀리 도망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샅샅이 찾았는데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의 말 따라,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에 올 것이다. 물론 자신이 엘프의 마을에 없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큭.
주첨기는 주먹으로 바위를 강타했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을로 돌아오자 여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없지요?”
“그렇소.”
주첨기는 분을 삭이며 대답했다.
“그는 다른 마족과는 다르게 매우 영악하거든요. 아마 주첨기님이 나라로 돌아가신 후에야 올거예요. 제가 보기엔 주첨기님이 이 숲에 있는 이상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 같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난…… 시간이 급하오.”
“지금 그 마족은 다른 봉인물을 찾아 갔을 거예요.”
“봉인물이 정확히 무엇이오?”
“마계의 문을 봉인한 열쇠라고 할 수 있어요. 네 개의 봉인물이 마계의 문을 막고 있는데, 아르메이스는 그걸 파괴하려 하는 거죠. 그중 한 개는 저희들이 지키고 있고요.”
여왕은 말을 잠시 멈추고 주첨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첨기가 말을 받았다.
“마계의 문이 열리면?”
“마왕이 강림하고 대륙은 지옥으로 변할 거예요.”
“이곳은 참 신기한 곳 이오”
대흑마괴. 흑골. 드래곤. 마법.
이계에는 온갖 것이 존재하고 있다.
“예?”
“아무것도 아니오.”
주첨기가 말했다.
“신기한 건 주첨기님이세요.”
여왕이 말을 이었다.
“아르메이스를 찾기엔 오랜 시일이 걸릴 거예요. 주첨기님이 절박해 보이시는데 좋은 방법이 있어요.”
주첨기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말해 보시오.”
“방법이라기 보단 우리 엘프들의 은인인 주첨기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 같네요.”
“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리다.”
“힘을 나눠주세요.”
“힘을?”
주첨기가 되물었다.
“네. 아르메이스가 꾸준히 결계를 무너트리고, 결국 지금의 결계는 단순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주첨기님께서 힘을 나눠 주시어 결계를 단단하게 만든다면. 아르메이스는 저희 숲에 침입할 수 없을 거예요. 주첨기님의 힘으로 만들어진 결계는 본래의 결계보다 갑절이나 단단해질 거예요. 봉인물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마족은 물론 드래곤의 침입에도 견딜 수 있는…… 그런 결계 말이에요.”
“그것뿐이오?”
“예?”
“결계란 무엇인지 잘 모르오. 허나 보아하니 진법과 같은 것 같소. 내 내력을 나눠줌으로써 그 결계란 것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오?”
“네. 그래요. 그럼 저희 엘프들은 평온한 안식처를 얻게 되는 거예요. 무리한 부탁이에요…… 힘을 나눠주라니.”
여왕이 말꼬리를 흐렸다. 염치가 없었다. 멸족의 위기에서 구해 줬는데 이제 힘을 나눠주라고 하다니. 여왕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소.”
“정말요?”
여왕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소.”
나라는 혼란하고, 수하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지금이다. 내력을 조금 나눠주는 것으로 끝난 다면 고민거리조차 못 된다. 주첨기가 대답했다.
“고마워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여왕이었지만 이번의 미소는 달랐다. 달보다 환하게 활짝 웃었다. 만개한 꽃 같은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여섯 엘프 장로들과 여왕이 모인가운데 ‘결계 강화’ 시작 되었다.
주첨기는 장로들이 만든 진 가운데 섰다. 많은 엘프들이 몰려 주첨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을 잡고 엘프의 축복을 기원했다.
“제 손을 잡으세요.”
여왕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첨기가 서슴없이 여왕의 손을 잡았다.
“숲의 정령이여.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요.”
여왕이 시작을 알렸다.
진의 가운데 선 여왕과 주첨기.
진의 오묘한 문양이 빛을 발했다.
나뭇가지들이 자연스럽게 흔들거렸고, 꽃향기가 어디선가 풍겨져 나왔다.
“주첨기님. 긴장을 푸시고 제게 힘을 맡기세요.”
주첨기는 두눈을 감았다.
숲의 시원스러운 냄새가 주첨기를 아득한 세계로 이끌었다. 온몸에 퍼져 있던 광대한 기운이 마주잡은 여왕의 부드러운 손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주첨기는 내력의 제어를 모두 여왕에게 맡겼다. 이는 목숨을 맡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주첨기에게 남겨진 선택인 이것뿐이었다.
주첨기는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싫은 느낌이 아니다. 따뜻하여 잠이 온다. 잠을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주첨기와 여왕의 주위로 밝은 빛이 휘감아 돌았다.
결계를 완성하는데 하루가 걸렸다. 한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았는데, 어느새 하루가 지났다. 결계로 인해 소진된 힘은 전체 힘 중 삼 할에 해당하는, 웜급 드래곤 한 마리가 지니고 있는 힘 정도의 것이었다.
엘프들은 모두 주첨기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놀랐다.
웜 드래곤 급의 힘을 결계에 쏟아 부었는데도, 아직도 광대한 힘이 남아 있었다.
“정말 신기하신 분이시군요. 주첨기님은…….”
여왕이 말했다.
“이로써 끝난 것이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결계이지만, 숲을 둘러싼 은은한 기운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주첨기님.”
“아니오. 수하들을 살리는데, 삼 할의 힘이라. 오히려 부족한 것 같소.”
“천만에요. 마지막 남은 저희 엘프 일족이 멸족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주첨기님 덕분이에요.”
주첨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가보겠소. 인연이 닿는다면 또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네. 축복이 함께하시길…….”
여왕이 말했다.
“축복이 함께하시길,”
모든 엘프들의 목소리가 숲에 울렸다. 주첨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날렸다. 절박한 와중에도 산 밑 마을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외쳤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단신으로 도적들을 소탕하였다. 아니 도적들이 제발로 마을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마을 장로가 나왔다.
장로는 주첨기가 다가오자 무릎부터 꿇었다. 마을사람들은 각자 달걀이며 채소며, 작고 볼품없지만 준비할 수 있는 선물들을 주첨기 앞으로 내밀었다.
“도적들이 왔는가?”
“예. 그런데…… 귀족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눈앞의 귀족은 신비의 비밀에 쌓인 사람이었다. 머리며 눈동자까지 온통 흑색이었고, 단신으로 덴칸 일당을 소탕했다.
주첨기는 장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장로가 화제를 바꿔 말했다.
“도적들을 소탕 해 준 것에 대한 저희들의 작은 선물입니다. 받아주십시오.”
“내 그것을 받았다. 다시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주겠다. 그대들은 그것들은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써라.”
“허나…….”
“그렇게 하라. 도적들은 어디에 있는가?”
주첨기는 서둘러 물었다. 이 마을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는 주첨기였다.
“따라오십시오.”
장로가 앞장섰다.
“이쪽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길을 내주었다. 장로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걸었고, 주첨기는 그 뒤를 따랐다. 주첨기와 눈이 마주친 소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주첨기는 흔히 볼 수 없는 쾌남형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도적들은 한 창고에 갇혀 있었다.
“이곳입니다.”
장로가 창고의 문을 열었다.
마을에 온 자는 고작 칠십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주첨기가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고 안에 죽을상을 짓고 있던 도적들이 주첨기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기어왔다. 모두 포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당신의 말을 따랐습니다. 이제 해독해 주십시오.”
도적이 말했다.
“너희들이 다인가?”
“예. 다른 이들은 모두 산 너머로 도망쳤습니다.”
“살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군. 너희들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는가?”
도적들의 얼굴엔 황당함이 일었다. 독에 걸렸으니 마을로 가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해놓고선, 이제 와서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냐니.
“자고로 살려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 당신의 말에 따랐습니다.”
“당신?”
“그,그게. 그럼 뭐라고 해야 합니까?”
도적이 말을 떨었다.
“쓸데없군, 장로.”
“예.”
장로가 대답했다.
“왕성에 사람은 보냈는가?”
“어제 보냈습니다.”
“잘하였다”
주첨기는 도적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그들을 제압했던 때와 같이 손가락을 튕겼다. 도적들은 아 하는 신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주첨기는 죄인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 죄인은 국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 여기에 있는 자들은 많게는 이십 년까지 징역을 살겠지만, 도망친 자들은 이제 이틀 안에 죽게 될 것이다.
“장로.”
“예.”
“그대들이 맡고 있는바 충실히 지켜라. 땅은 귀족과 병사들이 지켜주는 것이고, 그대들은 땅을 가꾸는 것이 그대 백성들의 사명이다. 맡은 바를 충실히 하지 않은 이는, 귀족이든 백성이든 관계없이 엄중한 벌을 받는 게 당연지사. 이를 명심하고 마을이 번성킬 기원하겠다.”
“나으리…… 나으리께선 정녕 누구 십니까? 나으리의 이름만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주첨기가 몸을 날리면서 일으켜진 바람이다. 마을사람들은 주첨기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 신기한 분이시다.
갑자기 나타나셔 모든 걸 해결하시고, 갑자기 사라지셨다.
“축복이 함께 하시길…….”
마을사람들이 정체 모를 그분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했다.
하얀 세상.
바닥에 쌓인 스켈레톤의 하얀 뼛가루. 세상이 온통 하얬다. 마치 눈이 온 것 같았다. 밟으면 그다지 좋지 않은 촉감이 발에서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뼛가루를 밟으며 놀았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야단쳤다.
판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제 겨우…… 평화가 온 건가.”
대륙이 온통 피로 물들 뻔한 대전은 너무나 갑자기 끝났다. 무슨 이유 때문이지는 모르지만, 수백만 스켈레톤들이 뼛가루로 변했다.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어.”
대전이 어떻게 끝났는지 간에, 중요한 건 평화가 찾아 왔다는 것이다. 판은 어깨와 머리에 가라앉은 뼛가루를 털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다닥.다다닥. 히이잉
판을 향해 육두 마차 하나가 달려와 멈췄다.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사람들은 판을 걱정했다.
판이 평민이나 입는 평상복을 입고 있기에, 사람들은 판이 평민인 것으로 착각했다.
주변엔 바로 이 젊은 사내가 율리안에서 신성처럼 떠오른 대 영웅임을 알만큼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없었다.
“어서 허리를 숙이세요.”
참다못한 어린아이가 속삭였다.
“나는 괜찮아.”
판이 웃으며 말했다.
마차에는 황제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더군다나 육두마차다. 백작급 이상만이 탈수 있는 마차! 마차의 문이 열리고 콧수염을 길게 기른 귀족이 걸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백작님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판은 예를 갖췄다.
“황명이다. 내게 직접 널 데리고 오라고 명하신걸 보니, 매우 중요하고 급한 일인가 보군. 어서 가지.”
백작 크리옹이 마차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판은 동그란 눈을 귀엽게 뜨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찡긋 윙크를 한 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도시 내를 질주하였다. 중간에 대기 중이던 기사들까지 합류했다. 기사들의 합류로 질주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물럿거라!”
기사들이 외쳤다.
도로를 걷던 사람들은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몇 번이나 사고가 날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이 지나간 후 마차는 황성에 도착했다.
판은 직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판은 크리옹 백작과 함께 황제 에드먼을 알현했다.
이미 많은 대신들이 소집된 상태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판은 무릎을 꿇었다. 수련 기사였던 그에게 이번 대전은 많은 변화를 주었다. 율리안의 성기사단을 자신의 기사들로 삼게 되었고, 이렇게 황제를 알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오…… 판 경. 어서오라.”
황제 에드먼은 판을 환영했다. 판은 황제께 대한 예를 갖춘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은 분위기를 파악했다. 대신들은 회의를 마친 상황 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황제와 대신들의 회의에서 내린 결정 즉 큰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들어라 판 경. 발록의 죽음이 정찰병에 의해 전해졌다. 이제 그대의 역할은 중요시 되었다.”
황제 에드먼이 말했다. 그의 음성엔 왠지 모를 분함이 뒤섞여 있었다.
“아…….”
발록이 죽었다? 절대 죽지 않을 것만 같던 검은 군주가?
판은 그제야 스켈레톤들이 왜 갑자기 뼛가루로 변했는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찾았다.
“율리안 정권은 완전히 붕괴 되었다. 그대는 율리안에서 모은 그대의 기사단을 앞세워 율리안으로 가라. 짐이 일천 기사단과 오만 병사들에 대한 통솔권을 그대에게 내린다. 그대는 진격하여 비어버린 율리안을 타국 보다 한시라도 빨리 장악하라.”
황제 에드먼은 명령을 내렸다.
“황……황공하옵니다.”
전공을 인정받아 엄청난 임무가 주어졌다. 판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제논 공작이 그대를 도울 것이다. 짐은 그대를 믿는다, 판 경. 율리안에서 보여줬던 전공처럼 이번에도 그대의 능력을 널리 펼쳐라.”
황제 에드먼이 말했다.
판은 제논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저분처럼 될 수 있다…….’
판은 제논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논도 눈빛으로 이에 답했다.
“서둘러 군단을 재정비하고 율리안으로 진격하라.”
황제 에드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판을 가리켰다. 그의 명령은 중엄했다.
“예! 폐하!”
판은 제논 공작과 함께 알현실에서 나왔다. 복도에는 제논 공작과 판의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시녀들이 제논 공작과 판의 모습을 발견하고 멀찌감치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제논 공작은 시녀를 지나치며 말했다.
“매우 중요한 임무네. 판 크라우프.”
“예. 그런데 발록은 누구에게?”
“신명대국의 황제.”
“예?”
“단신으로 발록을 죽였네.”
판은 믿기지 않았다.
제국을 멸망의 위기까지 치닫게 만들었던 발록이 한 사람에게 의해 죽었다니……
무수히 많은 전설도 이보다는 허황되지 않으리라. 판의 벙 찐 얼굴을 본 제논 공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많은 목격자 들이 있지. 신명대국의 황제는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네.”
“어떻게 그런 일이…….”
둘은 걸음을 서두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정신 차리게. 판 크라우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네. 지금 율리안은 비어 있고, 황제 폐하께선 빈 율리안을 장악하라는 황명을 내리셨네. 율리안이 제국에 흡수된다면, 발록을 죽인 신명대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대제국의 대륙 통일을 막지 못할 것이네. 얼마큼 막중한 임무인지 알겠는가? 이 임무의 성공 여부로 인해, 제국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야.”
제논 공작은 신중한 표정이었다. 판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 하였다.
“얼마나 막중한 임무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러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판 크라우프!”
제논 공작이 호통쳤다.
“예. 공작님.”
“자네는 율리안의 백성들에게 영웅이 되었고, 율리안 성기사단을 모두 흡수하였어. 지금 우리는 율리안을 장악 하려 가는 것이네. 율리안의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추앙 받는 자네가, 그 어떠한 이들보다 네가 가장 제격이 아닌가? 자네가 율리안의 백성이라 생각해 보게. 그들을 지켰던 성기사단과 영웅이 되돌아온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렇군요…….”
판은 씁쓸한 마음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율리안에는 백성이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공작님.”
“인간의 생명력은 끈질기지. 스켈레톤들이 장악했다고는 하나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연명해 왔을 것이다. 이제 그들을 주축으로 율리안은 에드먼 제국령이 만들어 지는 것이네. 알겠는가?”
황성 밖으로 나왔다.
“예…… 그럼 저는 저택으로 돌아가 성기사단을 소집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서두르게.”
제논 공작과 판은 각자의 길을 서둘러 갔다. 판은 말을 몰고 저택으로 돌아 왔다. 그의 아버지 크라우프 백작이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
시녀들이 인사했다.
크라우프 백작은 자랑스러운 아들을 향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너라.”
“왜 이곳까지 나와 계십니까. 어서 들어가서 몸 조리 하셔야죠.”
판은 크라우프 백작을 부축했다.
판의 아버지인 크라우프 백작은 대전에서 스켈레톤의 시미타에 어깨를 베여 중상을 입고 요양중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황제 폐하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인과 하녀들의 만류에도 정문 앞까지 나왔다.
판은 크라우프 백작을 당신의 방까지 모신 후 말을 꺼냈다.
“기사단을 이끌고 제논 공작과 함께 율리안 지역을 장악하라는 황명이 내려졌습니다. 아버지.”
“장하구나. 어느새 다 컸어.”
크라우프 백작은 침대에 누우며 미소 지었다.
“아버지.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뭐지?”
“율리안의 성기사들이 비록 저를 따른다고는 하나, 그것은 율리안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판…… 내 아들아. 나는 산전수전 겪어 이 자리에 올랐다. 아들아. 이런 내 말을 잘들어라.”
“예. 아버지.”
“너의 위치를 되돌아 보너라. 너는 성기사단 오천여명과 일만여 명의 보병을 가졌어. 사병은 용납되지 않지만 전시 상황이었는지라…… 어쨌든 아들아. 너는 대군을 이끄는 대장군이 된 것이다.”
대장군! 그 단어가 유독 판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장군은 부하를 통솔할 수 있어야 하지. 율리안에서 데리고 온 성기사단과 자경단이 반심을 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너의 역할이다. 본래 대장군이란 막중한 책임을 가져오지.”
“전…… 자신이 없습니다.”
판은 솔직히 말했다.
“막중한 책임에서 도망친다면 권력은 쥘 수 없지. 다른 귀족들에게 굽실거리며 눈치를 보며 살고 싶느냐. 아들아.”
“아닙니다.”
“그럼. 가라. 그리고 대장군이 된 네 이름을 대륙에 떨쳐라.”
“예.”
결국 크라우프 백작의 말은 해답이 될 수 없었다. 판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단순히 아들이 입신양명하길 원하고 있었다. 판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이 데리고 온 율리안 성기사단과 자경단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이제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지 간에, 에드먼을 위해서 일하게 되었다.
판은 씁쓸했다.
그렇다고 황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애써 일생에 한번 오기도 힘든 기회라 자위하고 성기사단과 자경단을 소집했다.
“제군들!”
판은 연무장에 뺴곡히 모인 자신의 병사들에게 외쳤다.
“예!”
“내가 제군들을 소집한 이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율리안을 장악하러 가기 위해서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율리안의 교황과 대신관들은 모두 죽어 내정은 붕괴되었다. 현재 율리안 영토에는, 소수 백성들이 겨우 목숨을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에드먼 제국의 백작가 크라우프가의 장손 판 크라우프다. 황명에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하는 에드먼 제국의 기사다. 그대들이 따르는 것은 누구인가? 에드먼 제국의 기사인 판 크라우프 인가. 율리안의 백성들을 위해 싸웠던 판 크라우프인가? 자 대답하라.”
판의 얼굴은 짐짓 심각했다. 백성들의 웅성거림이 사그라 들더니 그들의 대표격인 한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판이 눈을 크게 떴다.
“저희들이 따르는 분은 에드먼 제국의 기사인 판 크라우프 님도 아니고, 율리안의 백성들을 위해 싸웠던 판 크라우프 님도 아닙니다. 저희들은 저희들의 앞에 선 정의로운 기사 판 크라우프 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기사와 병사들이 외쳤다.
“제군들. 고맙다. 율리안 영토로 가자! 비록 정권이 붕괴 되었던들, 나와 그대들로 인해 에드먼 제국령이 된들, 그곳은 그대들의 고향이다.”
성기사들과 병사들은 율리안이라는 이름에 치를 간다. 율리안이란 이름에 속아 맹목적으로 추종했고, 그 결과 발록을 강림시켜 율리안 영지를 피로 물들이게 되었다.
성기사들과 자경단 병사들이 본 에드먼 제국은 신분간의 차별이 커도, 먹고 살기엔 부족한곳이 없는 곳이었다. 에드먼 제국이 율리안 영지를 자국의 도시처럼 먹고 살기에 부족한곳이 없는 곳으로 만들어 준다면, 율리안 영지가 에드먼 제국령이 되어도 좋다.
거짓 신을 섬긴 나라. 마물을 불러 가족들을 죽인 나라. 그런 나라의 부활은 꿈도 꾸지 않는다.
자신들을 위해 싸워주었던 판 크라우프님을 섬긴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병기를 움켜잡고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판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제군들! 내 그대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리라 하늘 앞에 맹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