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46
제8화 수라혈마의 활약
성벽 따위는 한 번의 도약으로 넘는다.
그럼에도 수라혈마는 성벽을 넘지 않았다. 그것은 침입자가 할 일이다. 정당한 권리로 이 도시를 양도 받기로 했으니 성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십니까?”
성벽 위에서 에드먼 병사가 외쳤다.
“신명대국의 자작. 천혈삼괴이니라. 우리는 너희들의 대장 라툴에게 이 도시를 양도 받기로 했으니 어서 성문을 열고 도시를 비워라.”
“대장님이 돌아오시기까지 성문을 열어 드릴 수 없으니 이해하십시오!”
병사가 말했다.
“당장 열지 않으면 그 위로 올라가, 당장 네놈의 목을 그어버릴 줄 알아라! 왜 못 할 것 같으냐? 크크크.”
천혈삼괴가 괴소를 흘렸다.
성벽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무시당한 기분이다. 천혈삼괴를 비롯한 사파고수들은 몸을 솟구치려 하였다.
수라혈마가 이를 막았다.
“클클. 아주 재미있게 나오는구나. 저놈들을 죽이는 건 쉽지만 그렇게 해서는 명분이 없지 않느냐.”
“대장군님. 이미 저희들은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명분은 있지. 그래도 명색이 체면이 있지 성벽을 넘는 건 그렇지 않느냐. 성문을 부셔야지. 낄낄.”
“아. 맞습니다. 역시 대장군님 이십니다.”
천혈삼괴가 손뼉을 쳤다.
“아니다. 원래 저 성문도 우리 것인데 부시면 쓰겠느냐. 흐음 이를 어떡한다. 에잇! 그냥 부셔라. 나중에 다시 고치면 되겠지. 낄낄낄.”
“명을 받들겠습니다.”
천혈삼괴와 다른 세 명의 사파고수가 성벽으로 걸어갔다.
“신명국의 검사들이 성문을 부수려 하고 있습니다.”
“으…….”
성벽위의 병사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두 시위를 당기고 있긴 하지만 놓지 못했다. 신명국 검사들의 위력은 모두 들어서 알고 있다. 한 명 한 명이 소드 마스터. 일당 천의 검사들이다.
단 사백 명으로 로스엔을 무너트렸던 이들이다.
하지만 도시를 지키고 있는 병사는 고작 천명 밖에 되지 않는다.
“쏴……쏴라! 어쨌든 라툴 대장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도시를 지켜야 한다.”
“먼저 공격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성문이 부셔지면 그 다음이 우리 차례다. 죽고 난 다음에 명분을 따질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쏴!”
병사들은 일제히 천혈삼괴 쪽을 향해 활을 쏘았다.
“낄낄. 선전포고더냐!”
수라혈마가 외쳤다.
에드먼 병사들은 신음을 삼키면서도 시위 당기는 걸 늦추지 않았다. 하나의 화살도 천혈삼괴와 세 명의 고수의 몸에 꽂히지 않았다. 세 고수가 화살들을 쳐내며 천혈삼괴를 보호했다. 억수같이 퍼붓는 화살이지만 신명대국의 검사들에겐 통하지 않는 수법이다.
그 사이 천혈삼괴는 검에 내력을 집중하였다.
파핫!
천혈삼괴가 검기를 터트렸다.
검기는 성문으로 날아가 적중했다. 쿵 하고 커다란 굉음이 일었다.
성문은 반절로 쪼개졌다.
성문이 무너졌다.
에드먼 병사들은 급히 성벽에서 뛰어내려왔다. 성문 안쪽으로 집결했다.
천혈삼괴가 그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수라혈마와 고수들이 천혈삼괴에게 다가왔다.
“이제 들어 가 볼까.”
수라혈마가 말했다.
성문 안으로 보이는 에드먼 병사들은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고수들을 향해 직선으로 활을 겨눴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고수들의 뒤를 쫓아왔던 제3기마대가 도착했다. 수라혈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라툴은 주위에 떨어진 화살들을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공작님. 도시에서 병사를 비울 테니 공격하지 마십시오.”
라툴은 다급하게 외쳤다. 한편으론 단 이십여 명이 두려워 꽁무니를 빼야 하는 이 상황이 서글프기도 하였다.
“약조도 이행 하지 않고, 먼저 화살을 쏘고, 이건…… 네놈이 말했던 명백한 도발이 아닌가? 아무래도 본대국과 전쟁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구나.”
수라혈마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모두 시위를 거두고 후문으로 빠져나간다.”
라툴이 도시 안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잠깐.”
“왜 그러십니까. 공작님.”
“본좌는 도시 두 개를 약조 받았다. 이 도시 말고 그 뒤에 있는 도시에서도 철수해라. 낄낄.”
“그……그……그러겠습니다.”
제3기마대와 도시를 지키고 있던 에드먼 병사들은 철수 했다. 수라혈마는 도시에 입성하면서 흥얼거렸다. 도시 안에는 대전에서 살아남은 율리안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부터 이곳은 신명대국령이다. 본좌는 신명대국의 대장군 수라혈마라 하느니라!”
수라혈마는 율리안 백성들에게 외쳤다.
율리안 백성들은 발록을 죽이고 대륙을 구원해낸 이가 바로 신명대국의 황제이라는 것도, 에드먼에선 율리안 피난민들을 받지 않았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율리안 백성들은 신명대국의 검사들을 반기지 않았다.
그나마 에드먼 제국에서 온 군대에는 영웅 판 경이 이끄는 율리안 성기사들이 속해 있었다.
수라혈마는 성벽 위에 걸려 있는 에드먼 국기를 가리켰다. 눈치챈 고수들이 바로 국기를 꺾고, 신명대국의 국기를 꽂았다. 수라혈마는 펄럭이는 국기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천혈삼괴.”
“예. 대장군님.”
“후문으로 내달리다 보면 또 다른 도시가 있을 것이다. 고수 열다섯을 이끌어 그곳으로 향하라. 에드먼 국기를 불태우고, 본 대국의 국기를 꽂아라.”
“예!”
천혈삼괴는 바로 이행했다.
해가 질 무렵.
세피로스가 말을 몰고 달려왔다. 혈흔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율리안 영토 때문에 신명대국과 에드먼 제국은 조그만 일에도 전쟁이 터질 수가 있다. 그 정도로 에드먼 제국은 영토 확장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고, 이에 신명대국의 공작은 매우 불쾌해하고 있었다.
“오. 아이야. 늦게 왔구나. 낄낄. 봐라! 이렇게 손쉽게 다시 되찾아오지 않았느냐.”
수라혈마가 말했다.
“공작님. 전투는 없었습니까?”
“제놈들이 본좌 앞에서 철수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크하하하”
“공작님…… 잘못 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는 황제 폐하께서도 원치 않는 일이옵니다.”
수라혈마가 얼굴을 찡그렸다.
“걱정도 많다. 아이야. 본좌는 약조대로 도시 두개를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먼저 공격한 것도 저놈들 쪽이다.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야 할 거다.”
“하오나. 공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영토 확장은 폐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시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쟁이 촉발하면, 저와 공작님은 폐하의 존안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또 대국의 내실을 다지고 있는 이 때, 전쟁은 더욱 벌어져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그럼 놈들이 율리안 영토를 다 차지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더냐!”
수라혈마의 언성이 높아졌다.
세피로스는 수라혈마가 두려웠지만 용기를 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작님. 하오니 이번 일과 같은 일은…….”
“닥쳐라! 황성에서 참 대견스러워 본좌가 귀여워 해 줬더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더냐!”
“아니옵니다. 공작님. 이는 충언입니다. 지금 에드먼국과 마찰이 빈번하면 아니 됩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더냐. 이대로 가다간 저놈들은 우리보다 수십, 수백배로 영토를 확장할 것이다. 이 율리안 영토는 모두 폐하의 것이 돼야 한다.”
“예. 발록을 죽이시어 대륙을 구원하신 것도, 율리안의 피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였던 것도 황제 폐하이시옵니다. 그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헌데 자꾸만 본좌를 방해하려해? 본좌는 지금처럼 빼앗긴 땅들을 되찾을 것이다. 본좌와 수하 이십 명만 있어도 충분한 일이다.”
공작님의 말을 모두 맞다. 공작님과 검사 이십여 명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은 따 놓은 당상이다.
세피로스는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공작님. 저도 피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에드먼 제국이 이 땅을 차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렇지.”
“공작님과 신명대국 검사님들의 강한 힘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한번이라도 더 일어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답답하다 답답해! 본좌가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가?”
수라혈마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렇다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세피로스가 말했다
“뭐냐?
세피로스는 탁상으로 걸어갔다. 탁상위에 지니고 다니는 율리안 지도를 펼쳤다.
“율리안은 크게 동쪽의 이슬턴 지역과 서쪽의 힐턴 지역. 이렇게 두 지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라혈마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지도를 응시했다.
세피로스는 펜으로 율리안 영토를 수직으로 나눠 그었다. 그러고는 도시와 군사 요충지를 나타내는 부근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
수라혈마가 가만히 보자니 서쪽 힐턴 지역에만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있었다.
세피로스가 펜을 내려놓았다.
“공작님. 바로 제가 표시한 부분들이 힐턴 지역에서 중요한 대도시와 군사 요충지들입니다. 이곳들만 장악한다면 율리안의 힐턴지역은 완벽히 신명대국령이 될 수가 있습니다. 대국은 동쪽 이슬턴 지역보다 국경과 이어진 힐턴 지역을 완벽히 대국령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이득이며, 제가 황성을 나설 때 목표가 바로 힐턴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저희들은 힐턴 지역 안에 있습니다. ”
“말은 좋군. 우리가 한걸음 갈 때 놈들은 열 걸음씩 간다. 그런데 언제 이 방대한 영토를 장악한단 말인가?”
수라혈마가 반문했다.
“그들이 열 걸음씩 갈 때, 공작님과 대국의 검사님들은 백 걸음씩 가지 않습니까?”
“낄낄. 당연한 말 아니더냐.”
수라혈마는 그제야 세피로스가 내놓은 대책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수라혈마는 세피로스가 표시한 부분을 눈으로 셌다. 정확히 21개다. 이는 자신과 이끌고온 고수들의 수를 합친 수와 같았다. 수라혈마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세피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똘똘한 아이야. 그러니까 본좌의 수하들이 달리 움직여 이 도시들을 차지한다?”
“맞습니다.”
세피로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에드먼은 동쪽 이슬턴 지역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3기마대가 우리쪽으로 내려오고, 두 도시도 장악했던 것을 보니, 아마도 공작님을 견제하는 것 같습니다.”
“제까짓 놈들이? 낄낄. 그런데 아이야.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반절은 에드먼 놈들에게 내주는 게 아니더냐.”
“아닙니다. 에드먼도 이슬턴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
수라혈마는 딱히 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율리안의 속국이었던 ‘페국’이 이슬턴 지역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
“예. 시일이 지나면 결국 페국과 에드먼국은 서로 맞닥뜨려지게 될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국은 서로 대치 상황 때문에 대국에 신경을 쓸 수도 없거니와, 이미 그때 힐턴 지역은 완벽히 신명대국령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수라혈마는 세피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에드먼은 대국을 도발할 수 없지만, 율리안의 속국이었던 페국에게는 달리 할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겠지요. 양국이 손을 잡고 대국의 영토를 노리거나.”
“뭐라?”
“노리거나, 에드먼 제국이 페국이 장악했던 도시들을 재장악해 들어가는 것 입니다. 에드먼 제국으로써는 대국을 상대하기보단, 페국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손쉽기에. 그리 할 것입니다. 이때를 봐 대국도 페국이 장악했던 도시들을 재장악하기 시작하면 될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결국엔 율리안 영토의 칠할 이상은 대국령이 될것이고, 삼할 정도만 에드먼이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계획대로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좋다 좋다!”
수라혈마는 세피로스의 작은 등을 쳤다. 세피로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한마디로 본좌와 수하들이 먼저 요충지들을 장악하면 되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공작님과 검사들의 속도는 달리는 말보다 빠르지 않습니까?”
“크하하하. 머뭇거릴 시간도 아깝겠군. 놈들이 내려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차지한다. 비록 남은 부분들도 아깝긴 하지만. 당분간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좋은 방법을 이제야 말하느냐?”
“공작님께서 기마대보다 빠르게 움직이셔, 이 도시를 장악한 것을 보고서야 떠올랐습니다.”
수라혈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 모두 본좌에게 오너라.
바로 고수들을 모았다. 지도를 가리켜 각자 담당할 도시와 군사요충지를 알려주었다.
“이렇게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수라혈마의 입에 미끈한 웃음이 걸렸다.
“너무나 쉽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대장군님.”
고수들의 얼굴에 미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진작에 이 방법을 시행해야 했다.
아니 진작에 이 방법을 알았더라면 이십 명이 아니라 두 배 이상은 더 데리고 왔을 것이다. 물론 제자가 허락할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수라혈마는 기분 좋게 내달렸다. 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을 이끌고 다녀서 그런지, 혼자 달리는 게 이만큼 기분 좋은 일인지 처음 알았다.
“크하하핫!”
산발한 머리가 바람에 너풀거렸다.
“낄낄낄!”
이상한 웃음소리!
수라혈마는 거침없이 산을 넘었고 평원을 달렸다. 다른 이가 본다면 미친 이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수라혈마는 계속 광소를 흘렸다.
수라혈마의 목적지는 힐턴 지역의 최남단인 항구 시프트였다. 시피트는 힐턴 지역뿐만 아니라, 율리안을 통틀어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상당히 먼 거리다. 그러나 자기가 달리는 만큼, 영토가 확장되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수라혈마가 최남단에 도착한 건 이틀이 지난날이었다. 날씨가 유난히 우중충해 곧 비라도 내릴 것 같았다. 수라혈마는 이런 날씨를 가장 좋아했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그저 선선할 뿐이다.
수라혈마는 항구도시 시프트에 입성했다. 시프트는 율리안의 다른 도시들과 분위기가 달랐다. 활발하다. 율리안의 다른 속국들에서 돌아온 피난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단지 피난민들 사이의 분쟁으로 곳곳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리 큰 다툼이 아니다.
도시에는 스켈레톤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건물들은 부셔져 있었고, 그나마 튼튼하다는 성도 곳곳이 파괴 되어 있다. 수라혈마가 거리를 거닐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누가보더라도 특이한 복장과 외모다. 더군다나 손에는 신명대국의 국기가 들려 있었다.
“자…… 국기만 꽂으면 이곳은 신명대국령이다. 얼마든지 쳐 들어 와 봐라. 본좌가 떡하니 지키고 있는데 수만 대군을 몰고 와도 어려울 것이다. 낄낄낄…….”
수라혈마는 성벽으로 올라갔다. 벌써 피난민들 사이에는 자치적으로 자경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한 청년이 성벽을 오르려는 수라혈마를 불렀다.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성벽에는 자경단만 오를 수가 있습니다.”
수라혈마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헉…….”
청년은 그대로 굳었다. 수라혈마는 청년을 무시한 채 성벽 위를 성큼성큼 올랐다.
너덜너덜 해진 율리안의 국기를 뽑았다.
“누구십니까. 어째서 자국의 국기를 뽑는 것입니까?”
자경단 청년들이 몰려왔다.
“본좌 말인가?”
“그렇습니다.”
자경단을 대표하는 청년은 조심스레 물었다. 언뜻 보기에도 수라혈마는 대하기 어려운 사람 같았다. 어투나 풍기는 분위기로 상당히 강한 자 혹은 타국의 높은 귀족이다. 그러던 중 수라혈마의 손에 들린 신명대국의 국기를 보았다.
“신명대국의 검사님이십니까?”
시프트 항구의 피난민들은 지하에 숨어 있다 나온 이들과는 달랐다.
모두 타국에 피난 중이면서 대전의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는 감히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라 단정할 수 있는 일을 듣게 되었다.
신명대국의 황제가 발록을 죽였고, 그 결과 스켈레톤들도 전부 무너졌다. 율리안을 가득 메웠던 스켈레톤들이 한줌의 뼛가루로 변한 것이다.
검은 군주 발록을 죽인 황제!
그것은 전설이었다.
“본좌는 신명대국의 대장군이다.”
수라혈마는 신명대국의 국기를 율리안의 국기가 꽂혀 있던 자리에 꽂아 넣었다.
팔짱을 끼고 흡족한 표정으로 국기를 바라보았다.
자경단 청년은 조심스레 수라혈마에게 접근해 고개를 조아렸다.
“저……저는 임시로 자경단을 맡고 있는 턴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눈앞에 신명대국의 대공작 두 분 중 한 명이 있다. 신명대국의 대공작도 그랜드 마스터급의 초검사라는 소문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턴이라 했나. 이곳이 신명대국령이 되는 것이 불만인가? 낄낄. 설마 벌써 에드먼 놈들이 온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어찌 저희같이 미천한 평민들이 대공작님께 불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턴은 황급히 말했다.
수라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이 아니오라 시프트, 율리안 백성들을 대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무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감사?”
“예. 신명대국의 황제 폐하와 검사님들께서 발록과 스켈레톤들을 해치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발록은 대국의 황제 폐하께서 일검에 해치우셨다. 알고 있는 겐가?”
수라혈마는 나름대로 놀랐다.
이 먼 곳까지 퍼지다니.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한 달이 흘렀다. 한 달이라면 소문에 소문을 타고 대륙 전체에 퍼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예. 어찌 모르겠습니까. 실로 전설과 같은…… 죄송합니다. 이 미천한 것이 흥분한 나머지 말을 많이 하는군요.”
“아니다 아니야. 계속 해 보아라! 낄낄.”
“대륙의 모든 백성들은 신명대국의 황제 폐하와 검사님들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전부 황제 폐하와 검사님들께서 마물들을 해치웠기 때문인지라…… 정말 감사합니다.”
턴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수라혈마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음…… 잘 알고 있구나. 기특하다. 그래. 율리안국이 완전히 붕괴된 건 알고 있는가? 낄낄.”
“예…….”
턴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땅의 마물들을 몰아낸 것도 대국의 황제 폐하이거늘, 무엄한 타국들이 이 땅을 노리고 군사를 일으켰다. 엄연히 이 땅은 황제 폐하의 땅이거늘! 그래서 본좌가 이를 참다못해 단신으로 온 것이다.”
턴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자경단원들은 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턴은 입을 열었다.
“저를 비롯한 자경단원들은 마땅히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황제 폐하의 치세가 이 땅까지 미치길 바랍니다.”
턴과 자경단원들은 무릎을 꿇었다.
“낄낄. 모두 은원을 바로 아는구나. 크하하핫!”
수라혈마는 크게 웃었다.
자경단원들은 시프트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반기지 않은 이보다 반기는 이가 갑절을 넘었다.
이제 수라혈마는 이곳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됐다. 그가 할 일은 깃발을 꽂음으로써 끝났다. 신명대국의 깃발을 보고도 들어오려는 군대에겐 사정을 두지 않는다.
마치 짜놓기라도 하듯.
그날 저녁 페국의 군대가 시프트에 다가왔다.
“저 깃발은!”
페국의 기사단장은 성벽에 걸린 신명대국의 국기를 보았다. 정보에 의하면 신명대국이 이곳까지 내려올 리가 없었다.
시프트는 페국에서 가깝고, 신명대국에서는 매우 멀다.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가? 부단장.”
“저도 모르겠습니다.”
성문은 활짝 열렸지만 페국의 군대는 들어오지 않았다. 성문에서 천보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기사 삼십 명과 보병 오백여 명 정도였다.
“신명대국이 벌써 왔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부단장.”
“그렇습니다.”
“저 깃발은 대체 머란 말인가?”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다녀 와보겠습니다.”
페국의 부단장은 말을 몰고 천천히 접근했다.
“멈추십시오!”
성벽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페국의 붉은사자 기사 부단장이다.”
부단장은 말을 멈췄다.
“이 도시는 신명대국령입니다.”
부단장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 도시가 신명대국령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율리안의 피난민들이여. 페국은 그대들을 받아주었다. 이제 와서 배신을 하려는 것인가? 신명대국령이 아니라는 것은 곧 확인될 것이다. 그제 와서 용서를 구하긴 늦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고하라!”
“정말입니다.”
“흥! 마지막 말한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고하라. 곧 본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진격하리라.”
“기사님. 정말입니다. 이곳은 신명대국령입니다. 그리고 이곳엔…….”
부단장은 자경단 청년의 말을 끊었다.
“마지막 기회를 줬거늘!”
부단장은 손짓 하였다.
뒤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과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열린 성문에서 붉은 장포를 입은 노인이 걸어 나왔다. 사기 등등한 노인은 청년들보다 기골이 장대했다. 불 같은 붉은 안광이 노인의 눈에서 발광했다.
“본좌는 신명대국의 대장군 수라혈마다. 본좌의 손에 죽고 싶으면 얼마든 환영한다. 낄낄낄…….”
천지시당의 당주 계주는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를 보고 받았다.
즉시 알현실로 향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요오.”
혜공이 계주의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오? 혜공공.”
“전하께서 한 시진 동안 아무도 들이지 마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요.”
“한 시진 동안 말이오? 흠. 그럼 한 시진 후에 다시 오리다.”
계주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매만지며 다시 되돌아갔다. 알현실 안. 주첨기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주첨기는 창 바로 앞에서 한 시진 동안 창밖을 보았다.
목수와 일꾼들. 모두 열심이다.
주첨기는 미소 지으며 탁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주첨기의 탁상 위에는 황하상단의 수입 보고서와 각종 기관에서 올라온 보고서들로 가득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명나라에 있을 때 황상의 탁상 위는 자신의 탁상 위처럼 신하들이 올린 보고서로 가득했다. 어쩔 때는 어렸을 적 자신의 키보다 높게 쌓여 있던 적이 있었다.
‘황제의 일이지…….’
지겹기도 하겠지만 주첨기는 태연스럽게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천지시당주 계주 자작입니다요.”
혜공의 목소리였다.
“들어오라.”
계주는 알현실로 들어왔다. 그는 예를 갖춘후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탁상위에 가득한 보고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주는 자신이 들고 온 보고서를 선뜻 내밀지 못했다.
“율리안 영토의 상황을 가지고 왔는가?”
주첨기가 먼저 말했다.
“예. 폐하.”
계주는 얼굴을 붉히며 보고서를 내밀었다.
“그래. 상황은 어떠한가?”
“율리안 영토의 5할이 대국령이 되었습니다.”
“호…… 그래?”
그다지 기대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지만 그쪽에 주첨기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대국의 내실을 다지는데 만 집중하여도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예. 폐하. 수라혈마 공작님과 이십 명의 고수들이 각각 도시와 군사 요충지 하나씩을 점령하였다 하옵니다”
주첨기는 웃음이 나왔다.
우선 점령부터 하고 보자는 것인가?
과연 스승님답다.
주첨기는 턱을 쓰다듬으며 계주의 보고서를 훑어 내려갔다. 보고서에는 각 일인당 한도시를 먼저 점령하여, 타국의 군대를 되돌려 보내고 있다는 상황들이 적혀져 있었다.
“폐하. 다른 정보도 접수 되었습니다.”
“뭔가?”
“로스엔 아실리안 왕이 태자 데오도로에게 왕위를 물려졌다 하옵니다.”
“그런데 소식이 없군.”
주첨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로스엔은 신명대국의 속국으로써, 왕위를 물려줄 때도 마땅히 군주국인 신명대국에 먼저 허락을 받아야 했다.
“태자 데오도로는 반(反) 대국파로 대신들을 전부 물갈이 하였다 하옵니다. 하온데…… 세금을 낮추고 위민의 정책을 펴 로스엔의 백성들이 즉위한 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반 대국파? 괘씸하군.”
그동안 일이 많았다. 발록과의 대전도 있었고, 내실을 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따라 로스엔에 보내기로 한 감찰관은 자꾸 미뤄져 왔다.
그러던 사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
“로스엔국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아오라. 자작.”
“예. 폐하.”
“곧 로스엔에서 조공을 바쳐야 할 날이 돌아온다. 그때가 되면 로스엔 왕의 흑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첨기가 말했다.
“로스엔의 대소사를 모두 알아오겠습니다. 폐하”
주첨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주가 나가고 나자 주첨기는 주먹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다. 로스엔은 군주국인 신명대국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본대국에 보내기로 했던 태자를 왕으로 등극 시켰다? 그리고 반 대국파로 내정을 교체했다? 로스엔의 흑심이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로스엔에 대한 일은 천지시당에서 좀 더 자세한 보고가 들어오기까지 미루기로 했다.
주첨기는 지하 본성으로 노커 젠달리프를 찾아갔다. 다른 드워프들은 모두 황성 주위에 건물들을 짓느라 가고 없었다. 노커 젠달리프와 대여섯명 정도의 드워프만 남아 데이모스 두기를 고치고 있었다.
그들은 작업에 열중해 있는 터라 주첨기가 찾아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발록의 공격을 당했던 데이모스를 다시 고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이를 고쳐냈다.
젠달리프는 제어기관을 다듬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젠달리프.”
“주첨기님. 오셨습니까?”
“다 고친 모양이군.”
“보다시피 막바지 작업입니다. 하온데 주첨기님. 실버드래곤을 해치우시겠다는 약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도 많은 동족이 실버드래곤에게 고통 받고 있습니다.”
“간악한 무리라면 내 실버드래곤을 해치울 터이니, 그대들은 맡은 바에 전력을 가하라.”
목수 아그젝은 어제 목수장 그레글로부터 작업할 곳을 연락 받았다.
목수 아그젝이 만들어야 할 것은 사인 가족이 살 가옥이었다.
230구역의 수로 옆에 지어야 할 가옥.
그 가옥을 짓기 위해선 당연히 재목과 못 그리고 공사기구들이 필요하다.
글을 배운 아들을 불러 필요한 재료들을 서류에 작성했다. 아그젝은 아들이 기특했지만 한편으로 못 마땅하기도 했다. 이번에 신명대국에서 소학(小學)이라는 교육기관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그곳에 들어가 크게는 대학까지 노리겠다 했다.
한마디로 목수가 아니라 학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학자는 귀족집 자제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들은 신명대국의 검사들에게 듣기론 그렇지 않다고 우겼다.
아들은 말했다. 소학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학비도 신명대국에서 지원한다.
목수 아그젝은 아들을 이번 작업에 끌어들이는 걸 포기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공사다.
“아그젝!”
목수 쿠마드가 불렀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이 흥이나는 모양이었다.
“너도 그레글 님께 가는겐가?”
“그렇지.”
“아 맞다. 뭘 지어야 되나?”
“대장간. 하하. 일전에 한번 만들어 본적이 있어서 쉽지. 그동안 손을 놓았는데, 솜씨가 녹슬지 말아야 하는데.”
“걱정도 팔자지.”
“너는?”
“나는 그냥 집이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니 최선을 다해봐야지. 어쩌면 내가 살지도 모르고.”
“맞아 내가 살지도 모르지.”
“네가 살 거라는 걸 확실하게 한다면, 난 창도 지붕도 문도 없는 최신식의 집을 짓겠어.”
그동안 여유를 찾은 아그젝은 농을 하였다.
목수 아그젝과 쿠마드는 목수관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임시로 만들어진 그곳에는 목수장 그레글이 대공사의 설계를 짜고 있었다.
아그젝과 쿠마드는 필요한 재료들을 적은 서류를 목수관에 접수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렸다. 아그젝과 쿠마드 외 많은 목수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신명대국에선 목수관만 만든 게 아니다. 대장장이관, 요리사관 등 다소 직설적인 이름의 기관들을 임시로 만들었다. 그리고 당분간 할일이 없는 황성의 시종과 시녀들을 장인들의 기관에 사무관으로 배치 시켰다.
“자. 언제 재료가 올까?”
아그젝이 목수관에서 나오며 말했다.
“적어도 십일은 걸리지 않을까? 이거 몸이 근질근질 해서 참을 수 있나.”
“그런데 신명대국은 금화가 땅에서 샘솟는 모양이야. 우리들을 대규모로 등원하고 엄청난 대공사를 시작하다니. 더군다나 보수도 섭섭지 않고.”
“정말 감사할 따름이지. 율리안에선 신관들의 눈치를 보고 사느라 엄청 힘들었어.”
“뭐 이곳도 아니 될지 모르지.”
“검사님들은 사백 분이시지 않은가. 우리 같은 평민에게 경어를 쓰시는 분도 상당해. 그분들이 변한다 할지라도 사백 명 정도 밖에 안 되시지. 율리안에선 만 명이 넘는 신관의 눈초리에 등골이 휘었지 않나. 더군다나 황제 폐하께서 엄하신 듯하시니 신명대국은 매우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걸세.”
“그러면 더 바랄 것도 없지.”
“그렇게 될 거라 확신하네.”
쿠마드는 씨익 웃었다.
아그젝은 쿠마드와 같이 자신의 천막이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
백성들은 곧 벌어질 공사에 모두 들떠 있었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입은 쉴 새 없이 공사에 대한 이야기로 움직이고 있다.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될 것인지, 신명대국의 황제 폐하가 얼마나 강하신지, 가옥은 언제 받고 땅은 언제 받을지, 따뜻한 빵을 먹고 싶다든지, 자신의 아들을 대학에 보내 훌륭한 학자로 만들 것이라든지, 검사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든지.
가지각색의 대화다.
아그젝은 너무 시끄럽다면서 중얼거리며 천막으로 들어왔다.
천막은 저녁엔 춥고 낮엔 덥다.
당장에라도 공사를 시작해서 이 천막을 근사한 가옥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아그젝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그 역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언제 도착할까…….”
십일이 지났을 때쯤 로스엔과 에드먼쪽에서 수레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황하상단들이었다. 새로이 등용되어 황하상단에 투입된 상인 오천여명이 이를 돕고 있었다. 그들은 할당받은 보석을 비싼 값에 처분하도록 노력하였고, 사들이라 명 받은 품목들을 최대한 긁어모았다.
8000여명의 목수들이 신청하였던 목재와 온갖 재료들이 들어왔다.
목재로 이루어진 산이 움직인다.
거대한 행렬이다.
이 대단한 행렬도 목수들이 요청한 재료의 삼분의 일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황하상단의 상인들은 재료들을 내려놓기 무섭게, 다시 구입하러 국외로 떠났다.
이튿날 목수 아그젝에게 일꾼과 재료들이 주어졌다.
“이봐! 거기가 아니야! 어이! 못질을 똑바로 해야지. 어? 서둘러. 크…… 더럽게 바쁘군.”
목수 아그젝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팔등으로 훔쳤다. 자신에게 할당된 일꾼이 12명이다. 12명을 모두 통솔하느라 목수는 정신이 없었다.
신명대국의 목수 8000명에게 모두 열두 명의 일꾼이 할당되었다. 즉, 신명대국에선 일꾼 십만여 명을 등용한 것이다.
신명대국은 공사 열풍이 불었다.
천막을 걷어치우기 무섭게 일꾼들이 달려들어 나무를 대고 못질을 하였다.
톱밥이 바람에 나부꼈다.
모두 상관없는 눈치였다.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이 살 곳을 만든다. 더 크게 나아가서는 대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어이! 조심하라고. 잘못하면 기둥이 무너지는 수가 있어. 거기. 못질을 탄탄히 해.”
아그젝은 톱질을 하면서도 일꾼들의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으악!”
일꾼의 비명 소리다.
아그젝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세워뒀던 목재들이 한 일꾼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늦었다!
목재들은 무서운 속도로 무너졌다.
“안 돼!”
아그젝이 외쳤다.
별안간 아그젝의 눈앞을 신명대국의 고수가 스치고 지나갔다. 고수는 일꾼 위를 덮쳤다. 팔을 교차해 떨어지는 목재들을 막았다.
“검사님!”
사람들이 놀라 외쳤다.
고수는 이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일꾼은 정신을 차리고 고수에게 꾸벅 거렸다.
“모두 열심히 하는 것도 좋소. 하지만 사고가 벌어져선 아니 될 것이오.”
고수는 이 한마디만 한 후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일꾼들의 일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그젝은 열심히 일했다.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했고 일꾼들을 격려 하였다. 목수 아그젝은 일꾼들과 합심해 작업을 진행 시켰다.
아그젝처럼 다른 목수들도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 시켰다. 건물들은 뼈대를 갖췄다.
하루가 지났다.
이틀이 지났다.
시간이 자나도 목수들과 일꾼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럴수록 건물은 완성도 높은 모습으로 지어져갔다.
하루의 작업이 끝난 저녁이면 어김없이 작은 술과 고기가 내려졌다.
목수와 일꾼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술과 고기를 함께 했다.
아그젝은 행복하다고 느꼈다.
흐르는 땀도, 작업 후의 술과 고기도. 수고했다며 안마하는 자식들도.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이날 밤에는 쿠마드가 술을 가지고 아그젝을 찾아왔다.
“어이.”
“아주 얼굴이 새까맣게 탔군. 세수는 하고 사나?”
목수 쿠마드가 아그젝 옆에 앉았다.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횃불은 둘의 그림자를 일렁거리게 만들었다. 바람이 살며시 불면 횃불은 흔들거렸고 그림자는 춤을 췄다.
아그젝은 말없이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온몸이 따뜻해진다.
“작업은 어때?”
쿠마드가 물었다.
“30%정도.”
“남았다는 거야. 했다는 거야?”
“농담도……했다는 거지.”
“오 그래도 꽤 작업 속도가 빠른데? 난 오늘 어땠는지 아나. 작업도중 대장장이들이 찾아왔지. 찾아와서 구경하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와서는 땍땍 거리는 거야. 못질을 하려면 여기에 풀무를 놓아야 한다나?”
“대장간이니까 대장장이들이 원하는 데로 해줘야지. 그들이 뭐라고 하는 건 네가 잘못 했기 때문이지.”
“아. 그렇긴 한데…… 마셔!”
쿠마드와 아그젝의 술잔이 부딪쳤다. 쿠마드의 입은 불평을 하고 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다. 그는 하루를 회상하며 아그젝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술은 딱 기분 좋을 정도만 마셨다. 사실 그 정도만 할당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튿날일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활력을 불어넣었다.
“자 모두들 열심히 하자고!”
아그젝은 일꾼들에게 외쳤다. 일꾼들이 팔을 걷어 부치며 아자! 하고 기합을 질렀다.
노력을 가한 십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
아그젝과 일꾼들은 말이 없었다.
한 달의 결과물. 자신들이 살 곳. 그동안 많은 집을 지어 왔지만 이번과 같은 감격은 없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아그젝은 일꾼들에게 허리 숙여 말했다. 그의 어투는 처음으로 명령조에서 존댓말로 바뀌었다.
“아그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열두 명의 일꾼들도 아그젝에게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와아아아아아!”
함성을 질렀다.
아그젝과 일꾼들을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남자의 진한 땀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그들이 만든 가옥의 뒤와 옆으로, 이미 완성된 가옥들도 있었고 완성 막바지에 이른 가옥들도 있었다.
아그젝과 일꾼들은 그늘에 앉아 자신들이 만든 가옥을 넋 잃고 바라보았다.
아그젝과 열두 명의 일꾼들에게 이날 밤은 유난히 떠들썩한 밤이 될 것이다.
일만 여개의 가옥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광활한 평원이라 창밖을 보면 지평선이 보였는데, 이제는 빼곡히 들어찬 가옥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가옥들은 모두 완성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일만 개의 가옥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백성들이 모두 집을 갖게 하려면 최소 사십만 개의 가옥이 만들어져야 한다.
얼추 지금의 속도를 계산해 보면 일 년이면 가옥 사십만 개가 만들어질 것이다.
가옥 만 완성될까?
법과 정책, 상단 등 비로소 대국이 갖춰야 할 틀이 완성된다.
일 년……
최선을 다한 자에게는 빨리가기 마련이었다.
주첨기의 일 년.
신명대국의 일 년.
그리고 백성들의 일 년.
일 년이라는 시간은 참 신기하다. 일 년은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는 시간이며, 한가지 일 그것이 크고 작은 것이든지 간에 얼마큼의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 이룩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모두의 일 년은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흘러갔다.
― 일 년이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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