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52
제6화 황제의 눈물
그린은 초록색 머리를 휘날리며 내달렸다. 무시무시한 돌격이다.
“처음 보는 놈인데? 제법이야!”
광태랑이 이를 악물려 그린에게 달려들었다.
그린은 입술을 씰룩였다.
빠르게 날아온 광태랑은 한 손으로 쳐서 날려 보냈다. 잇따라 고수들이 그린을 공격해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그린은 대지계마법을 써서 고수들의 접근을 막았다. 지금 이 순간 그린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다.
데이모스 청검!
데이모스 청검이 그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수들을 내팽개치고 달려오는 그의 실력에 새삼 놀랐다.
‘드래곤인가. 초록색 머리라…… 그린이라는 자겠군.’
진천은 생각했다.
그린은 순식간에 데이모스 앞까지 도착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데이모스의 얼굴까지 뛰어올랐다.
데이모스 청검은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팡!
청검과 그린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청검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네가 그린 공작이라는 괴수인가?”
청검에서 음성이 울렸다.
“괴수? 재미있는 표현이군.”
그린은 검에 힘을 가했다.
진천도 마찬가지였다. 내력을 끌어올려 그린을 튕겨 냈다. 바닥에 처박힌 그린은 팔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피다!
그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치곤 제법인데?
그린이 뇌까렸다. 솔직히 놀랐다.
‘나를 튕겨 내다니?’
“노부가 상대해 주마. 감히 괴수가 인간의 전쟁에 끼어들다니!”
데이모스 청검은 검으로 그린을 가리키며 멋들어지게 외쳤다.
“와아아!”
고수들이 환호했다.
고수들과 로스엔의 병사들은 혼전을 멈추고 각 진형 쪽으로 이동했다. 고수들은 데이모스 청검 뒤로, 병사들은 그린의 뒤로.
양국의 대표 격인 기사가 마음껏 일기토를 벌일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 아닌 배려였다.
고수들은 의기양양했다.
그린이 흙을 털고 일어나 데이모스 청검 쪽으로 걸어갔다.
청검도 그린을 향해 걸어갔다.
쿵쿵
청검의 발걸음은 대지를 진동시켰다. 거대한 데이모스에 비하면 그린은 한없이 작았다.
진천도 썩 내키는 결투는 아니었다. 데이모스에 탑승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바닥을 나뒹구는 쪽은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파핫!
그린이 뛰어오름과 동시에 청검이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허공에서 검이 맞부딪쳤다.
그린이 손을 빙그르르 돌렸다. 청검이 서 있던 대지가 흔들거렸다.
대지가 갈라진다.
청검은 빠르게 옆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그린의 몸에 주먹을 박았다. 그린은 또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청검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아……!”
로스엔의 병사들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와아아아아!”
반대로 신명국 고수들은 결투가 너무 쉽게 끝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청검의 검은 그린의 몸통만 했다. 그런 검이 그대로 적중하면 몸은 산산조각 날 것이 뻔했다.
청검은 검을 멈추지 않았다. 검이 그린의 몸에 당도했다.
갑자기 녹색 빛이 터졌다. 청검은 알 수 없는 힘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쿵!
자칫 잘못했으면 고수들이 깔릴 뻔했다.
“앗!”
고수들은 물론이고 로스엔의 병사들까지 신음을 삼켰다.
눈부신 녹색 빛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시야가 확보 되면서 들어온 것은…….
“크아아아!”
거대한 그린드래곤의 몸체였다.
비늘색은 온통 녹색이고 활짝 펼쳐진 두 날개는 시야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했다. 두터운 꼬리도 위협적이지만 크게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롭고 큰 송곳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린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폴리모프를 풀도록 만들다니…… 그 대가로 진천 너를 그 속에서 끄집어내 목숨을 거둔 후 육신이 썩을 때까지 내 비늘에 박아두고 다니겠다.”
하늘에서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크윽!”
고수들은 블랙드래곤이 폴리모프를 푸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 신음만 삼킬 뿐이었지만, 로스엔의 병사들에게는 죽음만큼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동안 믿고 따랐던 그린 공작이 드래곤일 줄이야!
전설에만 존재한다던 드래곤이 실존할 줄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폐하?”
한 신하가 데오도로에게 물었다.
“그린 공작이 드래곤이든 발록이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내 복수를 도와 줄 수하라는 것이다.”
데오도로는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청검에게 날아가는 그린드래곤의 모습을 응시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는 드래곤 앞에 청검이 아주 작게 보이는 판국이었다.
드래곤이 두 앞발로 청검의 몸을 찍어 들어갔다.
청검은 검을 등 뒤의 검집에 꽂아 넣고 드래곤의 발을 잡았다.
드드드드
주변 땅이 울렸다. 작은 돌가루들이 물새우가 튀듯 지면 위로 튀어 올랐다.
청검과 그린드래곤은 한 치도 양보가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그린드래곤은 밀리지 않는 데이모스 청검을 노려보며 경악했다.
그는 진천과 데이모스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데이모스에 탄 자는 다름 아닌, 발록을 해치운 신명대국의 황제 주첨기의 스승이자 무림맹주 진천이다.
그린드래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헛!’
진천은 드래곤의 입속으로 주위의 기운이 밀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린드래곤의 입에서 녹색 브레스가 토해졌다.
순수한 독기로 이루어진 브레스는 청검의 오른팔 부분을 완전히 녹여버렸다.
청검의 몸이 비틀거렸다.
“크아악!”
하지만 비명을 지른 건 다름 아닌 그린드래곤이었다.
어느새 뽑아서 꽂았을까? 청검의 검이 그린드래곤의 허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린드래곤은 청검을 놓고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에서 녹색 피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데이모스에게 가해지는 파괴력은 탑승자에게 실제처럼 느껴진다. 진천은 어깨가 뜯어져나가는 고통으로 눈앞이 가물거렸다.
“죽여 버린다―!”
하늘이 울렸다.
“얼마든지!”
대지가 울렸다.
그린드래곤이 브레스를 쏟았다.
청검은 일부러 로스엔의 병사들 쪽으로 피했다. 그린드래곤의 녹색브레스는 로스엔 진영 쪽으로 쏟아졌다.
“으악!”
그린드래곤의 브레스에 맞은 이들은 스켈레톤처럼 뼈만 남았다. 녹색 브레스의 독기가 육신과 장기들을 순식간에 썩혀 버린 것이다.
청검은 아슬아슬하게 브레스를 피했다. 그럴수록 그린드래곤은 분에 넘쳐 브레스 공격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린 공작! 멈추시오.”
로스엔 쪽 귀족들이 외쳤다.
그린드래곤은 피아의 구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브레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린드래곤에게 외쳤던 귀족들의 위로도 어김없이 브레스가 떨어졌다.
그사이,
팟!
청검이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린드래곤은 브레스의 방향을 청검 쪽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청검의 검에서 뻗은 검기가 그린 드래곤의 꼬리를 자르고 지나갔다.
그린드래곤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이,이……!”
그린드래곤의 얼굴이 고통과 함께 분노로 얼룩졌다.
갑자기 땅에서 다섯 개의 거대한 산이 치솟았다. 그 끝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청검을 향해 빠른 속도로 솟았다.
청검은 피하려고 몸을 이동했지만 거대한 산은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었다. 결국 그중 하나가 청검의 몸을 관통했다.
외부로는 청검의 허리 부분이고, 내부로는 탑승자 진천의 다리쪽이었다.
“으아아악!”
참았던 비명이 진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검을 움켜쥔 손이 풀어졌다.
청검의 검이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죽어랏!”
그린드래곤은 마지막 브레스를 뿜었다. 지금껏 뿜었던 브레스의 세 배 이상 커다란 크기다. 브레스는 공기들을 증발시키며 청검의 얼굴까지 도달했다.
“아웃(Out)…….”
진천이 힘겹게 말했다.
브레스가 청검의 몸을 완전히 덮쳤다.
“안 돼에`!”
고수들이 소리를 질렀다.
겨우 뼈대만 남은 청검은 지면으로 떨어져 몇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청검의 부품들은 이제 고철에 불과했다.
고수들은 눈을 굴렸다. 진천 공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괴수의 브레스에 그대로 녹아 버렸단 말인가?
그때였다.
“으아아압!”
갑자기 하늘에서 진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천은 그린드래곤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검기가 치솟은 검을 거꾸로 잡고 그대로 찔러 넣었다.
목표는 정확히 드래곤의 목이다!
진천은 진기를 터트려 검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검이 그린 드래곤의 몸을 뚫고 나와 지면으로 떨어져 박혔다.
“끼아아악!”
그린드래곤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이 고수들 앞쪽에 떨어졌다.
“크크…….”
그린드래곤은 힘없이 날개를 퍼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정신을 잃은 진천이 그린드래곤의 몸에서 굴러 떨어졌다.
“공작님!”
고수들이 부르짖으며 뛰어들었다.
“가,감히……!”
그린드래곤은 진천을 바라보았다.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모양이다. 씹어 사며 버리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괴수를 죽여랏!”
노스말드성 안에 있던 고수들도 어느새 나와서 합류했다. 350여명의 고수들이 일제히 신명검을 뽑아 들고 그린드래곤을 덮쳤다.
퍽 퍽 퍽
얼굴,목,등,허리,배,다리…….
350여 자루의 검이 그린드래곤의 몸에 박혔다.
고수들은 검을 뽑아 들며 뒤로 몸을 날렸다. 남궁혁과 계주는 진천을 업고 그린드래곤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그린드래곤의 몸 전체에서 피가 솟구쳤다. 거대한 몸짓만큼이나 뿜어져 나오는 피의 양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드래곤은 콧바람을 거칠게 뿜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눈이 서서히 감겼다.
“저 괴수를 확실히 끝장내자!”
광태랑이 고함쳤다. 다른 고수들이 동의하고 다시 출수하려는 순간이었다.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이었다. 하늘은 뒤덮은 검은 존재는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림자보다도, 밤의 어둠보다도 짙은 검은색으로 블랙드래곤의 비늘색은 하찮을 정도였다.
“크와아아아!”
지금껏 들어 본 드래곤들의 울음소리와는 거친 성량과 실린 기운의 양부터가 달랐다.
하늘에서 드래곤의 브레스가 뿜어졌다.
“후퇴!”
고수들과 로스엔군이 동시에 외쳤다. 죽어가는 그린드래곤에게 접근하던 로스엔군은 전부 브레스의 제물이 되었다.
“뭐,뭐야!”
광태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어둠 속으로 보이는 세 개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광태랑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하늘에서 마룡이 내려왔다!
마룡의 관심은 오로지 그린드래곤 뿐이었다. 마룡은 순식간에 그린드래곤을 낚아채 검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룡이 뿜어낸 브레스의 흔적만이 진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신명국의 고수도, 로스엔의 병사들도 넋을 잃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와아아아!”
성벽 위에 오른 신명국의 검사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어찌 됐든 괴수를 무찌른 것이다.
주첨기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억지로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정녕……!”
그는 백성들의 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발 디딜 틈 없이 쓰러져 있는지라 한 번씩 밟히곤 했다.
“이곳이 짐의 대국이란 말인가.”
주첨기는 고개를 저었다.
328구역의 백성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죽었다. 간혹 목을 매달아 자살한 여성도 보였다. 그들은 대부분 로스엔의 병사들에게 잔인하게 범해진 여성들이었다.
주첨기는 로스엔군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들에게 분노도 치밀지 않았다.
중원의 황성에 있을 때 많은 서적을 탐독한 주첨기다. 그리고 선왕을 따라 여러 전장에도 나갔다. 전쟁에서 눈앞의 광경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주첨기는 눈을 부릅뜨고 죽은 백성의 눈을 감겨 주려고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구나, 짐의 백성들이여.”
부릅뜬 주첨기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주첨기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는 로스엔의 잘못도 아니고 모두 짐의 잘못이다. 짐이 전쟁을 하고 있기에…… 내 그대들에게 약조하겠다. 최대한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대륙을 통일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없는 이상국을 만들겠다. 짐이 대륙을 통일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전쟁이 있을 테지만 그때까지만 참아 주길 바란다. 대륙을 통일하여 그대들 같은 선량한 백성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하겠으니 이제 그만 눈을 감아라.”
주첨기는 대륙통일은 다짐했다.
대륙통일!
그것을 이룩하여 강력한 황권을 움켜쥘 때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리라.
신기하게도 죽은 이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주첨기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했다.
귀에 내력을 집중하자 전투소리가 들렸다.
주첨기는 죽은 백성들을 위해 잠시 묵념한 후 즉시 몸을 날렸다.
“크헉!”
매화일검 대 실버, 경기병 대 법병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신명국쪽이 열세였다.
실버는 매화일검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면서 뺨을 쳤다. 매화일검은 고스란히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실버의 손에서 빙계마법이 발견되었다. 매화일검은 완전히 얼어 붙었다.
실버가 피식 웃자 매화일검의 몸에 붙은 얼음덩어리가 깨졌다.
매화일검이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도 결국……!’
매화일검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매화이십검법 중 매화만개의 수법으로 실버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실버가 코웃음 쳤다. 손을 쫙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강력한 실드가 생성되어 매화일검이 오히려 튕겨났다.
매화일검은 몸을 꿈틀거렸다. 더 이상 힘이 없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손에 쥔 신명검만은 더욱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폐하……!’
매화일검은 감겨가는 눈을 부릅뜨려 애썼다. 무거운 추라도 매단 듯 서서히 감겨왔다.
이대로 정신을 잃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매화일검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떠라, 매화일검.”
그때 황제폐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
따뜻한 기운이 밀려와 눈이 번쩍 뜨였다.
황제폐하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도 황제폐하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셨다.
매화일검은 황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폐하!”
법병들은 경기병들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소리쳤다.
“법병들은 후작 뒤로 후퇴하라!”
주첨기가 경기병과 법병의 전투에 뛰어들며 말했다.
“네가 주첨기인가? 나는 안 보이나 보지?”
은발의 미녀가 주첨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첨기는 한눈에 그녀가 드래곤임을 눈치챘다. 푸른 내력이 감도는 손으로 실버의 몸을 밀어젖혔다.
실버는 막을 틈도 없었다. 주첨기의 광대한 내력이 순간적으로 그녀를 멀리 밀어냈다.
실버는 허공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허둥댔다.
“모두 전투를 멈추어라!”
주첨기가 내력을 끌어올려 외쳤다.
“으악!”
“내 귀!”
전투 중이던 법병과 경기병들은 몸을 웅크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지금이다. 법병은 후퇴하라!”
법병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빨리 매화일검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주첨기는 경기병들을 노려보았다.
“짐은 신명대국의 황제이니라. 짐은 너희들을 죽이기 싫으니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신명대국 황제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소문대로였다. 에드먼의 수십만 대군도 막아내지 못했다는 발록을 죽여 전설이 된 황제!
경기병들은 우물쭈물하며 멀리서 걸어오는 실버의 눈치를 살폈다.
“너희들을 이끄는 괴수 때문에 항복을 못하는 거라면 짐이 죽여주겠다.”
주첨기가 실버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주첨기.”
실버는 주첨기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말했다.
“짐은 이미 너의 동족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짐의 눈에 띄면 목숨을 거두겠다고.”
“내 목숨을? 인간이?”
실버는 웃었다. 입가의 근육이 어색하게 씰룩였다.
“보면 알 것이다.”
주첨기가 말했다.
실버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레드드래곤 아르카콘트를 죽이고, 후에 발록까지 해치운 자…….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결국은 인간이다.
주첨기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
“뭔가? 항복을 하려는 것인가?”
“항복?”
“지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주첨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당당했다.
“나를? 이 아미스타드를?”
실버드래곤 아미스타드는 순간적으로 이성의 끈을 놓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협박이었다. 그것도 오크만큼이나 미천하다고 생각하는 인간한테서!
“네 입을 찢어 버리겠다, 천한 존재여!”
팟!
실버는 주첨기에게 몸을 날리며 빙계마법을 연속으로 발현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아이스 에로우가 주첨기에게 쏟아졌다.
주첨기는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매화일검의 공격이 실버의 실드에 막혔듯 실버의 마법은 주첨기의 호신강기에 통하지 않았다.
실버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의 무한마법 공격은 로드라해도 막으려면 꽤나 힘을 쏟아야 하는 공격이다. 그런데 주첨기는 너무나 쉽게 막아 버렸다.
“그게 전부인가?”
주첨기가 뇌까렸다.
“설마 그럴 리가…….”
실버는 반대편으로 몸을 날려 공중에서 몇 바퀴나 돌았다. 눈부신 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폴리모프가 풀어지면서 실버의 몸이 본체로 변형하기 시작했다.
주첨기는 폴리모프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청강검을 뽑아 검기를 날렸다.
검기는 은빛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실버드래곤은 비명과 함께 폴리모프를 끝냈다. 앞다리 두 개가 모두 잘려 져 있었다. 방금 전에 주첨기의 공격에 의한 것이다.
주첨기는 혀를 찼다.
“치, 치사하다! 크악!”
실버드래곤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주첨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로스엔의 경기병들은 정상적인 세계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커온 자라면 보일 법한 당연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실버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였다. 태풍보다 몇 배나 강한 바람이 주위의 경기병들을 날려 버렸다.
법병들도 날아가고 매화일검은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수준이다.
주첨기를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실버에게 접근했다.
“크엑! 이럴 수가…….”
실버는 놀랐다.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첨기도 계단을 밟듯 하늘로 올라갔다. 실버는 뒤로 물러나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주첨기는 청강검에 내력을 불어넣어 브레스 쪽을 가리켰다. 검기가 자라났다.
실버드래곤의 브레스는 검기를 빗겨 타고 지면으로 쏟아졌다.
일대는 완전히 얼음바다가 되었다.
“대, 대체……!”
실버드래곤은 할 말을 잃고 다시 한 번 브레스를 토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주첨기가 검을 휘둘러 브레스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주첨기의 눈빛이 실버드래곤의 눈동자를 꿰뚫었다.
실버드래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다.
잠시나마 이성의 끈을 놓쳐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실버드래곤은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레드도……발록도……블랙도 모두 당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실버드래곤은 날갯짓을 빨리했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드래곤의 꼴이란, 여느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다.
“도망치는 것인가.”
주첨기가 외쳤다.
실버드래곤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날갯짓에 가속이 붙었을 뿐이다.
실버드래곤은 순식간에 멀리 날아갔다. 그 거대했던 몸이 모두의 눈에 일점으로 보일 만큼 거리가 멀어졌다. 주첨기는 고개를 젓더니 검을 높이 들었다.
휘리리리
푸른색 강기가 검날을 타고 휘돌았다. 강기의 회용도리는 점점 거대해졌다. 주첨기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강기의 회용도리가 검 날을 타고 오르더니 수십 자가 넘는 검기로 변했다.
주첨기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검기가 쾌속하게 날아갔다.
잠시 후 실버드래곤으로 추측되는 일점을 가르고 지나갔다. 일점은 두 개로 나뉘어 땅으로 추락했다.
쿵!
갑자기 지면이 울렸다.
주첨기는 이번 전투의 여차로 흩어진 경기병들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크게 외쳤다.
“너희들을 통솔하던 드래곤은 죽었다. 항복하라!”
“아…….”
경기병들은 실버드래곤이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경기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다.
“적군을 포박하라. 허나, 거칠게 대하지는 마라. 모두 짐의 백성이 될 자들이다.”
주첨기가 말했다.
하나 둘 정신을 되찾은 법병들은 경기병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저항하지 않았다.
“폐하, 부끄럽습니다.”
매화일검은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벌써 두 번이나 듣는 말이군.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도록.”
“하오나…….”
“그런 말을 하지 않게끔 정진하란 말이다, 매화일검.”
매화일검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 로스엔의 노스말드 평원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다. 매화일검, 법병들과 함께 328구역을 정리하고 죽은 자들을 잘 묻어 주기 바란다. 할 수 있겠는가?”
“예, 폐하.”
매화일검은 고개를 들었다. 황제 주첨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매화일검은 황제폐하가 가셨을 로스엔 쪽을 향해 절을 한 후 일어났다.
“모두 포박했습니다.”
법병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매화일검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본 황제폐하와 드래곤의 전투는……꿈이 아니지요?”
매화일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매화일검과 법병들은 실버드래곤이 낙하한 지점에 도착했다.
“아……!”
모두 입을 쩌억 벌렸다.
실버드래곤은 정확히 오른쪽과 왼쪽으로 양분되어 죽어 있었다.
법병들은 한순간의 착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인지 두 눈을 비볐다. 드래곤을 처음 보았고, 드래곤이 양분된 채 죽은 모습도 처음 본다.
“어, 얼굴이 없는데?”
실버드래곤의 목 부분이 깔끔하게 잘려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누군가 외쳤다.
“……!”
그린드래곤이 죽고 나자 로스엔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데오도로가 ‘신명국 악마들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공작의 작위와 영토를 내리겠다! 고 발표했지만 사기는 여전히 바닥이었다.
사기가 밑바닥인데다 신명국의 고수들은 한 시진 간격으로 꾸준히 공격해 왔다.
신명국 고수들은 자신들이 불리할 때가 되면 즉각 후퇴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쾅
“크으…….”
데오도로는 주먹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대체 블랙 공작과 골드 공작은 어디 있는 것인가? 둘 중 하나라도 있다면 승기는 본국으로 완전히 기울 것이다.”
“폐하.”
임시 작전참모장이 된 베슬 백작이 말했다.
“군사들이 모두 피로에 젖어 있으며 사기가 매우 낮습니다. 잠시 대군을 인근 성으로 돌려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옳은 일이라 사료됩니다.”
“주첨기도 없다. 진천 공작도 정신을 잃었다.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디 있단 말이야!”
“폐하, 아군의 사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린 공작이 드래곤이란 사실이 알려진 후 병사들은 매우 당혹해하고 있고, 그린 공작이 진천 공작에게 죽자 사기는 몹시 떨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망병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도망병?”
“그렇습니다, 폐하. 식량 또한 9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습니다. 폐하, 기회는 다시 오는 법입니다. 현명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현명한 결단이라…….”
데오도로는 베슬 백작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폐,폐하!”
베슬 백작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현명한 결단을 내려 주지. 독설로 짐을 혼란케 하려는 너를 죽여주마. 여봐라, 적국의 첩자인 이놈을 잡아다가 당장 목을 베어라!”
“폐하!”
베슬 백작이 놀라서 외쳤다.
작전천막 안으로 기사 넷이 뛰어들어왔다. 그들은 베슬 백작을 제압했다.
“놔라! 폐하, 제가 첩자라니요. 억울합니다.”
“듣기 싫다. 당장 목을 베라!”
기사들은 울부짖는 베슬 백작을 끌고 나갔다.
데오도로는 이마를 감싸며 의자에 앉았다. 밖에서 베슬 백작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데오도로는 또 다른 임시 작전참모장을 지정했다. 헌데, 그 역시도 군의 사기를 걱정하며 인근 성으로 회군하자고 고하는 바람에 목이 잘려나갔다.
한 시간 사이 다섯 명의 백작이 첩자라는 오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모두 다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데오도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이거늘, 신명국의 첩자가 아닌 이상 후퇴를 언급할 수는 없다. 오늘밤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 준 축복받은 날이다.”
데오도로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옆에서 경호 중인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도망병을 모두 처형하고 본보기로 삼아 목을 곳곳에 걸어 두어라.”
데오도로는 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기가 더욱 떨어……아닙니다. 시행하겠습니다!”
기사는 바로 명령을 받들었다.
탈영하려다가 붙잡힌 병사의 수만 천여 명이 되는데 데오도로는 모두를 공개처형하길 명령했다.
“탈영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데오도로가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영병은 점점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신명국의 검사들과 힘겨운 전투가 끝날 때마다 두 배, 세 배로 늘어났다.
데오도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노스말드성을 함락하여 악마 주첨기의 손발 격이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라. 여봐라!”
“예, 폐하.”
“전군의 전열을 한 시간 안에 가다듬어 성을 함락할 준비를 마쳐라!”
“폐하, 상대는 신명국의 검사들입니다. 신명국 검사들이 작정하고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피해가…….”
“이놈의 목을 베라!”
데오도로는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인물을 즉각 처형시켰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그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데오도로는 집결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39만이었던 병력이 그 간의 전투와 도망병들로 인해 35만까지 줄었다.
“성을 함락시킬 준비가 되었는가! 악마들의 목을 벨 준비가 되었는가!”
데오도로가 외쳤다.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예!’하고 소리 질렀다.
데오도로는 무장하고 직접 선두로 나섰다.
그가 말을 몰로 앞으로 나가자 35만 정병들이 성의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필사의 각오로 성을 함락시켜라! 잊지 마라! 성의 함락보다 중요한 것은 악마들의 목을 베는 것이다.”
“예!”
데오도로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신명국 검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데오도로는 성벽 위를 검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신명국의 악마들아 들어라! 항복 따윈 받아 주지 않겠다. 목숨을 구걸해도 소용없다. 내 오늘밤 너희들을 목을 모조리 벤 후 악마 주첨기를 벌하고 악마국인 신명국을 파괴할 것이다.”
“어느 누가 목숨을 구걸할까! 마음대로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 왕아!”
성벽 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인가?”
“광태랑이다.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지?”
“내 친히 네놈의 목을 베어 주마. 전군!”
착
기병대는 고삐를 움켜잡았고, 보병들은 달릴 준비를 하였으며, 궁수들은 시위를 당겼다.
“신명국의 악마들을 모두 죽…….”
데오도로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커다란 물체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떨어진 물체를 확인한 데오도로와 로스엔의 병사들은 아! 하고 탄성을 토했다.
“드래곤의 머리!”
별안간 실버드래곤의 머리 위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였다.
“폐하!”
성벽 위의 고수들이 외쳤다.
주첨기는 데오도로를 응시했다.
“로스엔의 왕이여.”
주첨기가 말했다.
“으으, 주첨기……!”
데오도로는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눈빛을 띠었다. 그러나 주첨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기운이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악마 주첨기를 사로잡아 오는 자를 공작으로 봉하고 영토를 내리겠다. 용맹한 자들이여, 당장 저 악마를 사로잡아라!”
데오도로는 피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선뜻 움직이는 자가 없다.
“뭣들 하느냐!”
주첨기의 명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공격할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문제는 대륙에서 거의 명성과 그가 이룬 업적들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당장 사로잡아라!”
데오도로는 옆에 선 기사를 다그쳤다.
“폐,폐하!”
기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황명을 거역하려느냐!”
“폐, 폐……!”
호위기사는 말을 더듬다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데오도로는 너무도 황당하고 화가 나 잡으라는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데오도로는 주첨기를 노려보았다.
“주첨기, 오늘만을 기다렸다. 바로 너를 위해 준비해놓은 40만 대군이다.”
“…….”
주첨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데오도로는 그를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멈춰라!”
쾅!
주첨기의 목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로스엔군은 몸을 움찔거렸다. 40만 대군의 열기보다 주첨기 일인이 뿜어내는 위압감이 더 컸다.
“뭐, 뭣들 하느냐! 너희들의 주군은 바로 나다. 당장 진군하라! 진군하라! 진군하라! 진군하라아아아―!”
데오도로는 처절했다. 병사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모두 들어라.”
주첨기가 데오도로를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짐은 신명대국의 황제 주첨기다. 보다시피 지금 밟고 선 머리는 너희들이 따랐던 실버 공작이란 괴수의 머리다. 드래곤이 이곳에서 전설이라 불리지만 짐이 보기엔 한낱 괴수에 불과하다. 인간에 세계에 끼어들어 간악한 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가 바로 너희들이다.”
로스엔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악마의 말을 믿지 말라. 용맹스러운 나의 병사들이여!”
데오도로의 목소리는 병사들의 웅성거림에 파묻혔다.
“너희들이 쥐어야 할 것은 사람을 죽이는 그런 병기들이 아니라 밭을 일굴 농기구와 학문을 탐구할 펜이다. 짐과 너희들의 왕을 보라. 만군을 호령하거늘, 피 묻은 검을 쥔 짐과 너희들의 왕이 행복해 보이는가? 짐은 너희들에게 병기가 아닌 농기구와 펜을 쥐게 만들 것이다. 너희들이 땀 흘려 일궈낸 밭에서 나온 식량을 너희들의 아들과 부인 그리고 부모에게 바치도록 만들 것이다. 너희들이 쥘 병기를 짐이 대신 쥘 터이니 너희들은 이만 병기를 내려놓아라.”
“믿지 마라! 주첨기! 그 악랄한 입을 그만 다물라.”
주첨기는 데오도로를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짐은 전쟁이 싫다. 선량한 너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짐의 고통이다. 내 너희들의 왕에게 죽어서 이 전쟁을 끝내고 앞으로도 영원히 전쟁이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면 기꺼이 죽으리라. 허나, 너희들의 왕은 그런 세상을 만들 재목이 아니다. 짐을 믿고 따르면 너희들에게 그런 세상을 보여주겠다. 전쟁이 없는 세상, 선량한 백성이 병기를 쥐지 않는 세상, 피땀 흘려 일군 곡식을 가족끼리 나누어 먹는 세상! 짐을 믿어라. 짐은 너희들의 왕이 되기 위해 바로 이 자리에 섰다.”
로스엔의 진영이 조용해졌다.
“믿지 마라! 모두 악마의 속삭임이다! 전군, 돌격하여 저 악마를 죽여라!”
데오도로가 연신 외쳐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주첨기에게 꽂혀 있었다.
“단, 이것을 알아라. 짐은 전쟁을 매우 싫어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반드시 승리한다. 짐과 전쟁을 할 자는 당장 짐을 향해 돌격하고, 짐을 믿고 따를 자는 병기를 버려라!”
로스엔 진영이 조용해졌다.
“병기를 버리는 순간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저놈은 악마임을 기억해야 한다!”
데오도로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었다.
주첨기는 로스엔의 진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데오도로도 몸을 부르르 떨다가 주첨기를 향해 달려갔다.
주첨기의 신형이 사라졌다. 데오도로의 뒤를 지나쳐 다시 나타났다.
주첨기는 로스엔군의 진영에 도달했다. 로스엔군은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라!”
주첨기가 음공을 터트렸다.
“너희들의 황제가 명하노니 모두들 병기를 버려라!”
로스엔군은 입술을 떨었다. 주첨기가 로스엔 진영 안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은 길을 내 주었다. 주첨기가 지나간 자리의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텡그랑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병기를 버렸다. 그들은 주첨기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눈을 감았다.
“안 돼에에에―!”
데오도로가 소리를 지르며 주첨기를 향해 달려왔다.
주첨기는 손가락을 퉁겼다. 데오도로는 혈을 제압당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주첨기는 데오도로에게 다가갔다.
“네가 복수해야 할 상태는 짐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의 욕심과 왕좌에 대한 집착이다.”
주첨기가 말했다.
성벽 위의 고수들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주첨기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천지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외침소리가 노스말드 평원에 가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