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56
제2화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
“백작님, 무리입니다.”
“크윽!”
“더 이상은…….”
“알았다. 후퇴! 후퇴!”
키닐 백작은 목이 터지라 외쳤다. 도망가는 병사들 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쿵!
마룡의 발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강물 같은 피가 발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크푸, 크푸!”
마룡의 숨소리는 이제 악마의 노랫소리보다도 듣기 싫은 것이 되어 버렸다.
키닐 백작은 먼발치에서 마룡의 흉포함을 목격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괴수 그 자체였다.
마룡의 행동에서는 이성을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파괴하고 먹고 찢고 밟는다. 단지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있었다.
“이건 악몽이야.”
백작은 스켈레톤이나 발록과의 전쟁을 겪었을 때 생각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마룡을 잡으려고 했다가 2천 명이란 사상자만 속출했다. 키닐 백작은 마룡이 언제 자신이 있는 진영 쪽으로 날아올까 두려웠다. 후퇴를 연거푸 외쳤다.
제국의 도시가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오히려 기존의 병력까지 후퇴시켜 도시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키닐 백작은 남은 병사들과 함께 황성 쪽으로 후퇴했다. 다행히 마룡은 도시를 파괴하는 데 심취해 있어 퇴각하는 병사들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황성에 도착한 키닐 백작은 부랴부랴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
키닐 백작이 말했다.
“키닐 백작, 이미 정찰병을 통해 들었다.”
황제 에드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룡을 상대하기엔 무리입니다, 폐하. 제논 공작을 부르심이 어떠하신지…….”
“신명국이 개국한 후부터 대륙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이 모든 악재의 원흉은 바로 신명국이다. 발록에 이어 마룡이라니…….”
에드먼이 이어서 말했다.
“백작은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예, 폐하.”
키닐 백작이 밖으로 나갔다.
에드먼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그는 머리를 감싸고 생각에 잠겼다.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율리안 영토에 있는 제논 공작을 불러들이기엔 그의 임무가 매우 막중했다.
더욱이 제논 공작을 불러들여 마룡을 퇴치할 수 있다면 그리할 테지만 그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도 마룡을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신명국!
이 모든 원흉은 신명국이다!
에드먼은 힘을 주어 책상을 내리쳤다. 책상이 그대로 부서졌다.
이대로 마룡에 의해 도시들이 파괴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제국이 보유한 전군의 희생을 각오하고 마룡의 퇴치에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황제 에드먼의 부름을 받고 대마법사 이제이가 알현실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이제이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오, 이제이! 잘 왔다. 그대는 짐의 고민을 덜어 줄 묘책을 가지고 있는가?”
“마룡의 일이라면 어쩌면 더욱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폐하.”
“그게 무슨 소린가?”
에드먼이 의아해서 물었다.
“폐하, 재앙에 대항하시기보다는 그 재앙을 피하시는 것이 상책입니다. 더군다나 그 재앙을 적국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는 재앙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짐은 이제이 그대라면 묘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에드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현재 마룡은 북쪽으로 날아오면서 도시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마룡을 남쪽으로 돌려 신명국 쪽으로 행로를 바꾸겠습니다.”
“그리만 한다면 그대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리라.”
이제이는 살짝 웃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아리따운 미녀가 80세가 넘는 노인이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이제이는 즉시 마룡이 나타났다는 지역으로 텔레포트했다.
역시 마룡은 좀 더 북쪽으로 날아와 있었다.
화르르르륵!
주변 도시들이 마룡의 브레스에 의해 녹아내려가고, 비명을 지르는 백성들은 마룡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대단하군.”
이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대의 문헌으로만 본 마룡을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언덕에 서서 파괴되어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고통과 공포에 질린 백성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냉담했다.
이제이는 멀리서 한참 마룡을 주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마룡의 행동방향을 찾았다!
‘역시 마룡은 바람의 방향대로 움직이는군.’
이제 이론이 정립되었으니 이를 실험할 차례가 왔다.
이제이는 마력을 모았다. 바람을 움직이는 것은 마력을 밑바닥까지 고갈시킬 만큼 대단한 일이다. 그것도 시전된 지역에서만 바람의 방향이 바뀔 뿐이다.
하지만 천재일우(千載一遇)로 국경 부근부터 남서풍이 불었다. 즉, 국경까지만 마룡을 몰아낸다면 놈은 신명국 쪽으로 방향을 바꿀 것이다.
이제이의 눈이 새파래졌다. 그의 몸을 타고 마력의 소용돌이가 피어올랐다.
이제이는 두 손을 높이 들었다. 북동풍으로 불고 있는바람이 느껴졌다.
이 느낌, 이 기분!
이제이는 룬어를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은 아름다운 음률처럼 들렸다.
이에 바람의 요정이 감동이라도 한 것일까? 바람의 방향이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높게 쳐든 손. 그 손가락 사이로 오가던 바람은 완전히 남서쪽으로 기울었다.
“후우, 후우!”
마법시전이 끝난 후 이제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신명국의 국경까지 하루 동안 남서풍이 불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후우, 후우!”
이제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파괴되어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백성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도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싸늘해졌고, 급기야 하품을 하기도 했다.
“크아아아!”
파괴의 미학. 마룡의 브레스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도시에는 더 이상 부술 수 있는 게 남지 않았다.
“이제 끝났네.”
이제이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실험결과를 기다리는 학자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마룡은 과연 바람이 부는 대로 신명국 쪽으로 이동할까?
이제이는 마음을 졸였다.
드디어 마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솟구쳤다.
이제이는 자신의 마력을 숨긴 것으로도 모자라 나무 뒤에 숨었다.
마룡은 하늘에서 방향을 틀었다.
‘남서쪽이다!’
이제이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룡은 파괴할 것을 찾아 남서쪽으로 날아갈 것이다. 이미 남서쪽 방향의 에드먼 제국의 도시들은 마룡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으니 그대로 신명국까지 날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이는 마룡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황성으로 복귀했다.
황성에서는 에드먼 황제가 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이는 알현실로 들어갔다. 워낙에 무표정인지라 그의 얼굴표정을 보고 임무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이제이, 어떻게 되었나?”
에드먼이 물었다.
“성공했습니다. 마룡은 남서쪽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후면 국경을 넘어 신명국의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역시! 짐은 그대를 믿었다.”
에드먼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마룡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보고가 올라온 도시만 해도 여섯 곳. 그러나 아깝지 않은 희생이었다.
“수고했다, 이제이.”
“아닙니다, 폐하. 그런데 이제 신명국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신명국의 영토는 제국의 크기를 넘어섰습니다. 이대로 신명국을 방치해 뒀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이제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이, 그대의 말대로 신명국을 이대로 방치해둘 생각은 없다. 신명국에 대해서는 페를리우스 공작과 함께 의논하도록 하지.”
“예, 폐하.”
“크하하핫! 마룡이 신명국으로 갔다. 이는 10만 정예군을 보낸 것보다도 더 큰일인지도 모르겠군. 이제이 그대의 공로를 치하해 이것을 내린다.”
에드먼은 이제이에게 자신의 망토를 벗어 주었다.
황제의 문장이 박혀 있는 망토!
망토에는 황제의 권위가 담겨져 있어 망토를 착용한 자는 황제의 검이 아닌 다른 것으로 벨 수 없다. 벤다면 그것은 반역이나 마찬가지다.
이제이는 공손히 망토를 받아 들었다.
“또한 망토에 한 가지 권위를 부여하니, 그것은 무슨 죄든 한 번은 면할 수 기회다.”
“아……!”
이제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제이, 페를리우스 공작을 불러라.”
에드먼이 말했다.
“예, 폐하.”
이제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알현실을 나왔다. 그러곤 걸음을 옮기지 않고 우두커니 섰다. 한참을 손에 들린 망토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루미크 일족에서 드래곤하트를 먼저 황성으로 보냈다. 드래곤의 몸 중 가장 귀한 곳이니 하루라도 빨리 전한 것이다.
주첨기는 그것의 일부 힘을 사용해 설령이 지난번 떼어냈던 왼팔을 새로이 자라게 만들었다.
[우낏, 우낏.]설령은 개구리처럼 주첨기 주위를 뛰어다녔다.
주첨기는 빙그레 웃었다.
“주첨기님, 요즘 매우 바쁘신 것 같아요.”
엘리나가 들어왔다.
주첨기와 엘리나 사이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는데도 주첨기는 엘리나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엘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앗! 그것은…….”
엘리나는 주첨기 손에 들린 드래곤하트를 발견했다. 실버드래곤의 것답게 마치 순 미스릴 덩어리인 듯 보였다.
“드래곤하트가 아닌가요?”
엘리나가 물었다.
주첨기는 빙그레 웃을 뿐 말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지만 이미 익숙해진 탓일까? 엘리나도 주첨기도 이를 즐기는 듯했다.
“드래곤하트를 어디에 사용하실 건가요, 주첨기님.”
엘리나가 물었다.
“스승님의 데이모스를 다시 만들어야 하오.”
무거운 주첨기의 입이 열렸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하트라니 정말 신기하네요. 그 흉포한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생각하니 섬뜩하기도 하고요.”
엘리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시간이 흘러 엘리나가 소파에 앉아 잠을 청하고 있는 사이 주첨기는 마룡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어떤 괴수일까? 드래곤이란 존재는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이 괴수는 자아가 없다고 한다.
그저 파괴만을 일삼는 괴수?
분명한 건 스승님께 부상을 입혔다는 것과 가만히 두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거라는 사실이다. 에드먼에 있든 신명국에 있든 괴수는 반드시 처치되어야 한다.
주첨기는 생각을 마쳤다. 막 주첨기가 수하를 부르려고 할 때 위혁민이 들어왔다.
“폐하, 390구역에 마룡이 나타났습니다.”
위혁민이 다급하게 말했다.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오나 갑자기 내려왔습니다. 각 구역의 고수들과 법병들을 390구역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주첨기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고수들과 법병들을 이동시켰다? 짐은 아직 황명을 내리지 않았거늘!”
주첨기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위혁민은 자세를 낮추지 않고 똑 부러진 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기에 신이 그리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위혁민 그대가?”
“예, 폐하.”
위혁민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마룡을 상대했다간 수하들만 위험해질 터, 짐이 마룡을 상대할 것이다. 그리고 위혁민, 그대는 황명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반성토록 하라.”
“하오나…….”
위혁민음 말꼬리를 흐렸다.
“위혁민!”
주첨기의 마지막 호령에 위혁민은 입을 다물었다.
주첨기는 위혁민을 노려보았다. 위혁민은 잠시간 눈빛을 마주치다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 자리에서 위혁민을 호통칠 시간은 없었다.
“가시는 건가요?”
잠에서 깬 엘리나가 물었다.
“설령을 부탁하오.”
주첨기는 설령을 품에서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설령이 따라가겠다는 듯 양손을 허우적거렸다. 주첨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주첨기님.”
주첨기는 황제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390구역이라면 북동쪽이다. 남서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자연풍에 맞서 새로운 북동쪽 바람이 생겨났다. 주첨기라는 바람…….
그 바람이 한 차례 휘몰아치자 주첨기의 신형은 수십 리씩 옮겨졌다. 주첨기는 390구역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고수들을 발견했다.
―마룡은 짐이 퇴치할 테니 각 구역으로 돌아가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라.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서 전음이 들려왔다.
고수들은 황제를 믿었다. 그리고 황명을 따랐다.
390구역에 가까워질수록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390구역은 국경지역으로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황성에서부터 390구역까지 마차로 10일 이상이 걸리는 거리지만 주첨기는 한 시진 만에 도착했다.
“이런…….”
주첨기가 도착했을 때 390구역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으…….”
주첨기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390구역은 단순히 파괴된 것이 아니라 초토화되었다.
“크푸, 크푸!”
마룡은 길을 걸으며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잡아먹고, 애써 지은 건물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첨기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룡을 죽이자!”
주첨기보다 먼저 도착한 고수 30여 명이 마룡의 주위를 뛰어다니며 공격했다.
마룡은 고수들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람이 생각하는 파리보다도 못하게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룡의 파괴 행각에 휩쓸려 고수들이 위태위태한 순간이 수십 번이었다.
―모두 살아남은 백성들을 짐의 곁으로 피신시켜라.
주첨기는 마룡을 공격하고 있는 고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 폐하.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마룡은 한 번의 브레스로 수백, 수천 명을 죽였고 한 번에 수백 명씩 잡아먹었다.
“이노오오옴!”
주첨기가 마룡을 향해 사자후를 터트렸다.
사자후가 마룡의 몸에 부딪쳤다. 마룡이 크르르 소리를 내며 주첨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일 먼저 거대한 뿔이 주첨기의 시선에 들어왔다. 다음으로 보인 것은 마룡의 이빨 틈 사이에 끼어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주첨기는 몸을 날렸다.
“크르…….”
마룡은 주첨기에게만은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마룡의 뿔이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룡은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으로 날아온 주첨기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휘익
주첨기는 가볍게 몸을 피했다.
파괴력과 브레스에 담긴 위력 그리고 흉포성은 비대해졌을지 몰라도 마법능력을 잃은 마룡은 주첨기를 상대하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그래도 한 가지 마법력은 남아 있었다. 벌겋게 빛나는 뿔에서 수십 갈래의 기운이 뻗어 나와 주첨기에게 날아갔다. 하나같이 주첨기의 검기와 비등한 위력들이었다.
주첨기는 몸을 뒤로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기와 마룡의 기운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이럴 수가……!”
주첨기는 신음을 흘렸다. 마룡의 기운이 그의 검기를 꿰뚫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쑥
그중 한 개가 주첨기의 어깨를 관통했다.
“컥!”
주첨기의 신형이 크게 비틀거렸다. 그는 급히 자세를 고치고 더욱 뒤로 물러났다.
마룡은 주첨기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마룡은 느리고 천천히 움직였지만 주첨기에게만은 질풍과도 같이 상대했다.
마룡의 발톱이 주첨기의 머리 위를 덮쳤다. 주첨기는 허리를 비틀어 이를 피했다.
발톱은 지면을 한 움큼 뜯어 버렸다.
“크푸, 크푸!”
마룡의 콧바람이 주첨기의 몸에 닿았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주첨기는 등골이 오싹했다.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마룡은 주첨기를 향해 브레스를 쏟아 부었다.
주첨기는 브레스를 정면으로 상대하기보다는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모두 황성으로 피하라!
주첨기가 전음을 보내기 무섭게 브레스가 그에게 접근했다.
주첨기가 옆으로 피하면 브레스는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지금껏 상대한 다른 드래곤들의 브레스와는 위력이 사뭇 달랐다.
주첨기가 피한 자리에 마룡의 브레스가 쏟아졌다.
쾅
화르르륵
어김없이 그 자리는 깊게 파이고 불타올랐다. 주첨기가 보기에도 마룡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마룡의 뿔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발했고, 주첨기에게 날카로운 기운들이 날아들었다.
브레스를 피하고 날카로운 기운들을 상대하느라 주첨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첨기는 일격을 준비했다. 틈틈이 힘을 모았다.
검기가 검을 타고 조금씩 자라났다.
하지만 그것을 기다려 줄 마룡이 아니었다. 마룡의 발이 주첨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주첨기는 손으로 마룡의 발을 떠받쳤다. 예전에 드래곤이나 발록과의 전투에서는 그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였다.
그런데 마룡은 아니었다. 주첨기는 마룡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완전히 밑에 깔렸다.
주첨기는 숨이 턱턱 막혔다. 마룡의 힘은 더해갔다.
이윽고 주첨기는 피를 뿜어냈다.
‘압사…….’
주첨기는 눈앞이 노래졌다.
‘도박이다.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압박을 받는 와중에도 주첨기는 힘을 모았다. 검기가 눈에 띄게 자라났다.
주첨기는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검을 움직였다. 검이 마룡의 발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사이에 틈이 생겼다.
‘지금이다!’
주첨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옆으로 굴러 나오며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쑤웅
10여 미터에 이르는 검기는 비조와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너무 뜻밖의 공격이었다.
마룡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검기는 마룡의 손 하나를 베어 버리고선 그대로 나아갔다.
“크르르…….”
마룡은 끈적끈적한 침을 흘리며 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주첨기의 검기는 이미 피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해 있었다.
쑤액
주첨기의 검기가 뭔가를 자르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마룡은 고통으로 발버둥쳤다. 손 하나와 이마에 굳건히 박혀 있던 뿔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주첨기는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마룡이 곧 뜨거운 숨결을 뱉으며 돌진하자 종전보다 더욱 정신이 없어졌다.
마룡의 잘린 뿔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마룡이 공격할 때마다 핏줄기가 사방으로로 튀었다.
피비가 내렸다. 피는 주첨기의 얼굴로도 튀었다.
마룡의 피 한 방울이 주첨기의 눈으로 들어갔다. 주첨기가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엄습했다. 마룡의 손이 주첨기의 전신을 강타했다.
“컥!”
주첨기는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겼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룡은 주첨기를 움켜쥐고 입 안에 넣었다.
마룡의 입이 닫혔다. 마치 거대하고도 습습한 동굴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발밑의 습습하고 물컹한 것은 바로 혀였다. 꿈틀거리는 혀는 피 냄새와 악취가 뒤범벅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살려…… 주세요.”
마룡의 이빨 틈 사이에 끼고도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 주첨기에게 애원했다.
주첨기를 삼키거나, 혹은 어금니 쪽으로 옮기려는 혀가 큰 힘으로 움직였다.
주첨기는 움직이는 혀 위에서 몸을 놀렸다. 검으로 혀를 찔러도 마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혀가 찍히고 베여도 마룡은 주첨기를 삼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주첨기는 앞니 부분까지 몸을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을 잇몸에 박았다.
핏!
뜨거운 피가 튀었다. 검등을 발판으로 삼아 균형을 유지하고 양손으로 앞니와 아랫니를 잡았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벌렸다.
주첨기는 이를 악물었다. 마룡의 입이 조금 벌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닫혔다. 놈의 입심도 대단했다.
주첨기는 계획을 바꿨다. 잇몸에 박은 검을 빼 들기가 무섭게 검강을 일으켰다. 그대로 아랫니에 내력을 터트렸다.
콰앙!
이빨이 부서졌다. 주첨기는 이빨 틈 사이에 낀 백성을 들쳐 메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마룡을 피해 북쪽으로 달렸다.
마룡은 주첨기를 추격하며 브레스를 쏘았다.
중간에 합류한 고수 한 명이 주첨기가 구한 백성을 건네받았다.
탓!
주첨기는 방향을 반대로 바꿔 마룡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마룡이 그를 다시 삼키려고 입을 벌렸다. 허공에서 이빨이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마룡을 퇴치하는 일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웠다. 전에 싸웠던 드래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와중에 뿔이 잘린 후부터 마룡의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첨기는 주변을 돌며 시간을 벌었다. 확실히 마룡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브레스를 퍼붓는 수도 눈에 띄게 줄어갔다.
주첨기는 기회를 엿봤다. 마룡의 뿔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었다.
마룡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주첨기는 아직도 압박을 받은 내상으로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절호의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주첨기는 마룡을 향해 힘차게 몸을 날렸다.
팟!
그때 갑자기 뭔가가 날아와 주첨기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아르메이스?”
주첨기가 뇌까렸다.
멀리서 마족 아르메이스가 주첨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주첨기는 잠시 당황했다. 아르메이스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사라지기가 무섭게 마룡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아르메이스는 마룡의 뿔에 손을 댔다.
“크아아아!”
마룡이 고개를 심하게 비틀어 댔다.
아르메이스는 용케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룡은 미친 듯이 온몸을 휘저어댔다. 그럴수록 아르메이스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반쯤 남은 뿔을 뒤덮어갔다.
“무슨 짓인가!”
주첨기가 외쳤다.
아르메이시는 그를 향해 왼쪽 눈을 찡긋했다.
아르메이스와 마룡의 신형이 희미하게 변하며 흔들거렸다.
“이놈!”
주첨기가 놀라 외쳤다. 저것은 마족 아르메이스가 사라질 때와 비슷한 현상이다.
아르메이스는 주첨기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아르메이스와 마룡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분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는 주첨기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마룡과의 결전에서 입은 내상이 뒤늦게 터진 것이다.
주첨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생각보다 깊은 내상은 아니었다. 가늘게 뿜어져 나온 입김이 몸 주위로 퍼져 나가며 애틋한 향이 풍겼다.
‘아르메이스…….’
주첨기는 입술을 질끈질끈 깨물었다.
에드먼 황제는 팔꿈치를 탁상 위에 올리고 양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듯 그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조바심과 걱정 등이 한데 뒤섞인 마음은 자신마저 그 정체를 모를 정도였다.
“신명국…….”
에드먼은 차가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들 때문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대륙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폐하.”
대마법사 이제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이, 마룡이 신명국으로 갔다지만 신명국의 황제는 발록도 해치운 자다. 마룡이 신명국으로 갔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제국은 제국 나름대로 신명국을 견제해야 하고, 제국령이 되었어야 마땅한 땅들을 되찾아 와야 한다. 헌데…….”
에드먼은 본래 약한 면을 절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황제다. 그러나 최근 그의 언행은 누가 보기에도 심약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폐하, 그렇다면 제가 한 사람을 천거해도 되겠습니까? 폐하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대가 인재를 천거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군.”
에드먼은 흥미가 동했다.
“대마법사 이제이, 그대가 천거하는 인재라면 기대가 되는군.”
“지금 즉시 들라고 이르겠습니다, 폐하.”
에드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이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소리가 났다.
에드먼은 이제이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이제이가 기사들을 시켜 문을 열었다.
꽤 몸집이 좋은 청년 하나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호남형의 이목구비를 가진 짧은 머리의 청년은 황제 에드먼 앞에서도 당당했다.
청년은 이제이 옆에 서서 에드먼을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에드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폐하, 루소라는 청년으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마법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에드먼은 다소 실망했다는 투로 말했다.
“루소입니다.”
자신을 루소라고 소개한 청년의 눈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에드먼의 전신을 훑는 그 눈빛은 이제 갓 20대가 된 청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그윽했다.
“이미 이제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군. 그대라면 짐의 고민을 덜어 줄 수 있겠는가, 루소?”
“예, 폐하. 어렵지 않습니다.”
“오만인지 능력인지는 자네의 말을 들어 본 후 결정을 내리겠다. 말해 보도록 하라.”
“신명국은 단시간에 걸쳐 일약 거국으로 발전했지만, 이는 갈대 위에 바위를 올려놓은 형상입니다. 병사는 영지에 비해 턱없이 적고, 병사와 백성들을 다스릴 귀족들도 적습니다. 또한 매우 빠른 시일 안에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신명국을 받아들이지 못한 로스엔과 율리안의 백성들을 아직도 회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명국 검사들 내에서도 반발의 기미가 엿보이고 있습니다. 신명국은 외형만 튼튼할 뿐 내실은 부실한 소국보다도 못한 나라입니다.”
“흠, 잘 알고 있군.”
이런 얘기는 속사정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에드먼의 기대감은 조금도 충족되지 않았다.
“포용력을 넘어선 영토…… 이에 신명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용이라?”
그제야 에드먼은 귀가 솔깃해졌다.
“예, 폐하. 신명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입니다. 이런 시국에 가장 성공적인 공작이라 함은 바로 반란선동입니다.”
“재미있군. 계속해 보라.”
에드먼은 흥미가 동했다.
“저는 그 공작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명예, 여자, 금, 영토, 작위…… 모든 걸 주지. 단 성공했을 때다.”
“너무 많으니 그중 한 가지만 얻으면 족합니다.”
루소의 입가에 얄팍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를 모를 에드먼이 아니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더군다나 대마법사 이제이가 허튼 인물을 천거하지는 않았을 터, 에드먼은 그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성공한 후에 듣도록 하지. 그전에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신명국에게 본국이 이번 공작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에게 대전의 명분을 줄 수는 없다.”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본국의 병사들을 공작병으로 사용치 못하게 할 것이다. 대신 그대에게 공작금으로 만 골드를 내릴 것이다. 공작을 수행할 수하들은 알아봤는가?”
“예, 폐하.”
“다행이군. 어제쯤 공작을 수행할 것인가?”
“2, 3일 안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알았다. 이만 나가 보거라. 이제이는 잠깐 남아라.”
에드먼은 이제이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제이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저 루소라는 청년이 누구인가?’라는 황제의 질문에 답했다.
“그를 만난 곳은 수도의 도서관으로 남다른 마력에 이끌려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난 지는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그동안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가 지켜보았습니다. 인물 됨됨이가 비록 영악하기는 하지만 신뢰가 있어 공작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최적자라고 판단되어 폐하께 천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자신감에 차 있다.”
“예, 폐하.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의 마법실력은 저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결코 제 밑이 아닙니다.”
“그대보다 뛰어난 마법사라…….”
농담을 하지 않는 대마법사 이제이의 말이니 만큼 확실할 것이다. 에드먼은 내심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제이는 에드먼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후 밖으로 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루소는 탁상 위에 뭔가를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문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왔느냐”
루소가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이 방법이 제국에 최우선이라고 생각하여 행동한 것이다. 내가 당신의 말대로 따랐다고 오해하지는 않겠지, 루소베르테스.”
“크하핫! 조상을 따르는 건 당연한 것이니 그렇게 토라져 있지 않아도 된다.”
루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제이에게 쏠린 시선을 다시 탁상으로 돌렸다.
이제이가 루소를 만난 것은 에드먼 황제에게 말한 것과 달리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또한 도서관에서 만난 것도 아니라 루소베르테스라는 숨기고 싶은 조상이 자신의 집으로 직접 찾아온 것이다.
분명 젊은 육체도 누군가에게서 빼앗아온 것일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200년이 지난 사람이 이렇게 젊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것이 비록 대마도사일지라도.
“자…….”
루소는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부스럭
주먹만 한 이빨이었다.
이제이는 황급히 다가와 루소가 쥔 거대한 이빨을 살폈다.
“이것은 드래곤의 이빨이 아닙니까?”
이제이가 물었다.
“설마 드래곤을……?”
“이 루소베르테스님이 아무리 대마도사의 칭호를 얻었다 해도 드래곤을 간단히 죽일 정도는 아니다.”
“그럼 이건……?”
“신명국의 황제가 실버드래곤을 죽인 후 얼굴만 떼어 가길래 그 순간을 노려 이빨을 뽑아냈지.”
지글지글 끓고 있는 용매에서 뿌연 김이 솟구쳤다.
“잠깐!”
루소가 뭔가를 물으려는 이제이를 막았다. 그러곤 드래곤의 이빨을 용매 속에 집어넣었다.
“설마 용아병을?”
이제이가 놀라서 물었다.
“크큭!”
“안 됩니다. 용아병은 200년 전부터 금기시된 마법이 아닙니까?”
이제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호기심 어린 눈빛이 번뜩였다.
“내가 살았을 땐 괜찮았다.”
루소는 룬어를 중얼거렸다. 때로는 음률처럼, 때로는 휘두르는 칼 같은 리듬과 악센트가 들어갔다.
루소는 짧은 머리 위로 두 손을 번쩍 들고 마력을 뿜어냈다. 룬어와 같이 마력이 융합되어 용매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용매 속의 이빨이 푸르스름한 빛에 감싸였다.
즈즈즈
결국 이빨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빨이 시퍼런 색으로 변했다.
루소의 강렬한 마지막 룬어가 종결어를 토하자 이빨은 용매 속으로 녹아내렸다.
루소는 용매가 가득 든 항아리를 이미 준비해둔 모래 위에 뿌렸다. 그러자 모래에서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모래의 표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일어나라, 용맹한 병사들이여!”
루소가 말했다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은 더 이상 이제이가 루소를 말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하얀 물체가 모래 틈 사이로 어스름거렸다.
루소가 이제이에게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파팟!
모래 중앙에서 해골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이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해골이되 일반적인 해골이 아니었다. 용의 이빨로 만든 용아병. 일반 스켈레톤과는 만들어진 기원부터가 천지차이였다.
“흐음…….”
이제이는 팔짱을 낀 채 모래 속에서 허리까지 빼낸 용아병을 바라보았다.
문헌으로만 본 용아병을 실제로 보았다. 용아병은 문헌대로 자신을 만들어낸 아버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이어 제2의 용아병, 제3의 용아병도 나와 총 세 마리의 용아병이 루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드래곤의 이빨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용아병의 수는 모두 세 마리였다.
용아병들은 철저히 루소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루소가 일어나라고 명하면 일어났고, 앉으라고 하면 앉았다.
이제이가 마력으로 그들을 홀리려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당신이 아무리 저의 선조라지만 제국에 반하는 행동을 하시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이제이가 뇌까렸다.
“네가 섬기는 군주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루소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 같은 인물이 도움이라니…… 어색한 표현이군요.”
“너무 오랜만에 세상이 나온 거라 좀 더 재미있는 일이 없는가 해서 말이다. 크큭!”
“신명국을 당신의 유흥으로 삼기엔 당신의 주제를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과거엔 대마도사로 명성을 날렸다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신명국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까? 조용히 해라, 후손 이제이여.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이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님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흥!”
이제이는 몸을 돌렸다.
골치가 아팠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던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가 이렇게 살아서 용아병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황제 에드먼의 총애도 끝장일 것이다.
“도대체 그 용아병으로 무엇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이제이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네 군주를 도울 거라고. 바로 이 용아병들이 공작병이 될 것이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도우려는 것입니까?”
“넌 아직도 모르는군. 정말 내가 너를 도우려고 그러는 줄 아느냐? 갖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무엇입니까, 그게?”
“신명국이 무너지면 다른 건 모두 필요 없다. 단 한 가지!”
“……?”
“큭, 바로 내 그리운 드래곤의 서관이다. 특히 레드드래곤은 다른 드래곤과는 다르게 마법서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 지금의 신명국인들은 마법서관의 가치를 모르고 있지만 레드드래곤의 마법서관이야말로 대륙의 역사이자 산증인이다. 대륙의 창세기는 물론이고 마법의 극의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는 곳이지.”
이제이는 ‘마법의 극의’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
루소는 낄낄 웃었다.
이제이는 어색한 동작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루소는 용아병들의 이마에 문장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둥근 원 속에 혼잡한 문장 서너 개가 혼합되었다.
루소는 마력으로 문장을 시동시켰다.
우우웅
용아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투두둑
이제이는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대마법사의 칭호를 얻고, 그 누구보다 아는 것이 많으리라 자부했지만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 줄이야.
용아병들의 몸에 살점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뼈 위로 신경이 생겼고 근육이 올라왔으며 피부가 덮였다.
“아…….”
이제이는 입을 쩌억 벌렸다.
용아병은 완전히 사람의 외형을 띠었다. 아니, 사람이 되었다. 환상계 마법으로 용아병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근육과 신경들을 만든 것이다.
어째서 과거 대륙인들이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의 이름 앞에 벌벌 떨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도대체 그의 마법력은 어디까지일까?
이제이는 루소를 바라보았다. 전체적인 외모는 탄력적인 청년의 것이지만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잘 갈아 놓은 칼처럼 느껴졌다.
루소는 나머지 세 마리의 용아병들도 사람처럼 만들어 놓았다. 모두들 외모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뚜렷한 호남형인 것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실버드래곤의 이빨로 만들어져인지 머리칼이 모두 은발이었다.
이제이는 놀라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제이.”
루소가 나지막하게 이제이를 불렀다.
이제이는 깜짝 놀랐다.
“뭘 멍하니 서 있는 겐가. 이들이 입을 옷을 가져다 줘야지.”
“아……!”
이제이는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사람으로 변한 용아병들의 나신이 떠올랐다.
모두 남자였다.
이제이의 얼굴이 뒤늦게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가져온 옷을 차려입자 이제 용아병을 사람이 아니라고 할 자는 없어 보였다.
루소는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 스…… 터.”
갓난아기가 옹알이를 하듯 용아병들이 루소를 향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우선 너희들은 지식부터 습득해야겠구나. 물론 임무에 맞는 성격도…….”
루소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전에 이름부터 지어 주지. 킬릭스, 휴먼즈, 러밀이다.”
루소는 용아병을 한 명씩 가리키며 말했다.
“용아병이라니…….”
이제이는 뒤늦게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