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57
제3화 역모의 조짐
평서.
사내는 자신을 ‘킬릭스’라고 소개했다.
로스엔 반군 지도자 유이드는 사내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흐음…….”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체를 밝힐 수 없다?”
유이드가 물었다.
“그렇다.”
여전히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유이드는 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좀처럼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시체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우리들을 도와주려는 거지?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이라면 우리를 도우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텐데? 아직도 잘 모르나 보군. 넌 우리를 잘못 알고 온 것이다.”
유이드는 사내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잘못 알고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로스엔의 백성이었던 자들로 신명국에 반기를 들고 로스엔을 수복하자는 의미로 모였다. 그렇다고 왕권을 부활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단언컨대 신명국에 반기를 들고 왕권주의를 환영하지 않는 자신들을 도울 세력은 없다.
“유이드, 로스엔 반군 지도자 유이드가 아닌가?”
“맞다.”
유이드가 말했다.
“그럼 제대로 왔다.”
킬릭스가 말했다.
“수상한 자다. 이자를 돌려보내라.”
유이드는 도저히 킬릭스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등을 돌려 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끼익
유이드의 방문이 열렸다.
유이드는 안으로 들어오는 킬릭스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 했다. 급히 허리의 장검을 빼 들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저, 정체가 뭐냐? 신명국의 검사인가?”
유이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깊이 눌러쓴 후드를 벗겨내면 검은 머리와 함께 검은 눈빛이 쏟아질 것이다.
의외였다. 사내가 스스로 후드를 벗었다.
“죽은 이들은 없다. 내 마스터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돕길 원하신다.”
킬릭스는 당당했다.
“그러니까 네 마스터가 누구란 말인가? 우리는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 이용당할 생각 따윈 없다고!”
유이드가 외쳤다.
“마스터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너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뿐. 더 이상은 없다.”
“그럼 네 마스터는 로스엔의 왕족인가? 왕족은 이미 처형당하거나 유배되었는데…… 그렇군. 유배당한 왕족이 신명국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너를 키운 것이군. 그래서 우리가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면 너로 하여금 나라를 되찾아가겠다는 속셈이란 것인가?”
“단언컨대 마스터는 로스엔의 왕족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반란이다. 단, 반란일정은 마스터께서 정하신다.”
“웃기는군!”
유이드가 자세를 공격형으로 바꾸었다.
이미 문 뒤로 반군들이 모였다. 킬릭스의 퇴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킬릭스는 공격하려고 호흡을 조절하는 유이드 앞에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툭
주머니가 열렸다.
데구르르르
금화 여러 개가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와 바닥에 굴러다녔다.
“금화닷!”
반군들이 외쳤다.
유이드의 눈초리는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가져라. 제1차 지원금이다. 앞으로 마스터께서 계속 지원을 해 주실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반란이 일어나는 날, 나는 사라진다. 그리고 너희들의 차후 행동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도 물론이고 마스터도 마찬가지다.”
유이드는 킬릭스를 노려보았다. 비록 그가 강하다지만 단신으로 뭘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하하하!”
유이드는 웃으며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잠시 킬릭스의 강한 분위기에 휩쓸려 간과하고 있었던 게 있다. 바로 반군의 세력이다. 누구에게 이용당할 정도의 세력은 아니다.
‘누군가 우리를 이용하려 한다 해도 그것을 우리가 역으로 이용해 주겠다. 단지 우리는 지원금만 받으면 그뿐.’
그렇게 생각하자 유이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믿어 보도록 하지. 이건 잘 받겠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아, 2차 지원금은 언제 도착하나? 그리고 네 마스터는 우리가 언제 반란을 일으키길 원하고 있지?”
“마스터의 지시가 다시 내려지실 테니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킬릭스가 말했다.
“오호, 로타드의 금화라……? 천 골드군.”
에드먼제 로타드 금화로 20개였다. 개당 50골드의 시세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 천 골드다.
“천 골드?”
반군들이 웅성거렸다.
유이드는 총무를 불러 금화를 맡기면서 병력증강을 명령했다. 떠돌이 용병도 좋고 농부들도 좋다. 전제주의 신명국에 대해 반감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좋다.
반란군 징병은 매우 은밀히 이루어졌다. 추가적으로 2차 지원금까지 도착하자 5천 명에 해당하는 반란군 모두에게 병기를 지급하기에 이르렀다.
서서히 군대 같은 면모가 갖춰졌다.
“킬릭스.”
유이드와 킬릭스는 정렬한 반란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나란히 섰다.
“왜 그러지?”
그가 킬릭스를 만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킬릭스의 어투는 매우 이상했다. 언제나 일말의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다.
“반군이 이 정도까지 급상승하게 된 것은 모두 자네 마스터의 덕이 크다. 이제 알려 줄 때도 되지 않았나? 다른 것은 묻지 않겠다.”
“마스터는 신명국이 패망하길 원하시는 분이다. 말해 줄 수 있는 그뿐…….”
킬릭스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말했다
평동.
그가 숨어들어온 것은 3일 전이었다.
그는 은밀하게 활동했다.
제일 첫 번째 한 일은 과거의 율리안, 이젠 평동이 된 지역의 분쟁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평동은 일인의 신명국 검사와 자경단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마물과의 대전으로 인해 대지는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
마물의 피해가 없는 몇몇 도시만이 굶주림 없이 돌아갈 뿐 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식량문제로 허덕이고 있었다.
신명국에서는 평원과 평서의 일로 평동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평서는 여전히 낙후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것은 가난과 분쟁뿐.
자경단과 신명국 검사들은 그것만으로도 버거워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평동왕 수라혈마는 황제 주첨기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평동 지역에 없었다.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이야말로 선동하기 가장 쉬운 법!
그는 평서에서 가장 굶주림이 심하다고 알려진 북마크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뒤로 식량을 한가득 실은 수레의 행렬이 이어졌다.
“멈추시오.”
자경단원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이름과 행선지를 밝히시오.”
자경단원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에 한 끼 정도밖에 먹지 못하니 당연하다. 그것도 다 죽어가는 풀로 죽을 해먹었으니 힘이 날 리가 없었다.
“내 이름은 휴먼즈, 행선지는 바로 이곳 북마크다.”
스스로를 휴먼즈라고 소개한 사내가 답했다.
북마크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신명국 검사들은 대도시에 있으면서 한번씩 작은 마을을 순찰할 때가 있었다.
자경단원들은 휴먼즈가 혹시 신명국의 검사가 아닌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사내의 눈동자는 은색이고 머리색도 검은색이 아니었다.
“그 수레들은 무엇이오?”
“이곳이 가장 굶어죽는 이들이 많다고 해서 이렇게 식량을 가지고 왔다.”
“식량을?”
자경단원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그들에게 식량은 천금보다 귀한 것이다.
자경단원들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는가?”
휴먼즈가 물었다.
“수레를 확인해 봐도 되겠소? 신명국 검사님들께서 외지인을 함부로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소.”
“지금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데 외지인이든 내지인이든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확인해 봐도 좋다.”
휴먼즈는 따끔한 일침을 놓으면서도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자경단원들은 즉시 수레를 확인했다. 과일과 곡식은 물론 육포까지 가득 채운 수레가 20기가 넘었다. 이 많은 수레를 혼자 끌고 온 것이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눈앞의 식량에 눈이 멀고 말았다.
“어서 들어가시오.”
자경단원이 말했다.
마을의 상태는 소문보다 심각했다. 거리에 굶어서 빌빌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잡초 한 뿌리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휴먼즈가 수레와 함께 마을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원조식량이 도착했으니 길을 비켜 주시오.”
자경단원들이 길을 텄다.
“식량!”
“오오오오!”
사람들은 흡사 좀비처럼 수레 곁으로 몰려들었다.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자경단원들이 사람들을 힘없이 밀어냈다. 휴먼즈는 묵묵히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 줄을 세워 주겠는가?”
휴먼즈가 자경단원들에게 말했다.
자경단원들은 몰려든 사람들을 정리하기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아이와 노인들을 앞에 세웠다.
줄이 다 세워지자 자경단원들이 제일 앞에 섰다. 뒤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어서 주시오!”
자경단원들이 말했다.
“내 이름은 휴먼즈, 이 식량을 너희들이 직접 나눠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가 말이오?”
“그럼 나 혼자 배급하란 말인가?”
“아, 아닙니다.”
자경단원은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을 했다.
식량은 마을사람 500여 명에게 잔뜩 나눠 주고도 남았다.
“휴먼즈님!”
“당신께 축복을……!”
사람들은 식량을 가져온 휴먼즈에게 절을 하고 감사를 표했다.
“식량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하라. 내가 식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겠다.”
다소 딱딱한 어투였지만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는 주신의 음성보다도 따뜻하게 들렸다.
휴먼즈는 자신의 말대로 식량을 몇 번이나 더 가져왔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상당히 먼 마을에서도 식량을 타기 위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휴먼즈를 은인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밤, 휴먼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나는 백성들을 위해 재산을 모두 털어 식량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신명국에서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대들을 위해 한 일이라곤 이 척박한 땅에 그대들은 내버려둔 일뿐이다. 신명국이 이토록 영지를 방관하는 것을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한단 말인가. 나는 율리안의 백성이었던 자로, 나의 동포들인 그대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마치 외웠던 것을 말하듯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속엔 휴먼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맞습니다!”
자경단원들이 제일 먼저 외쳤다. 사실 울분이 가장 많이 쌓인 것도 그들이었다.
“신명국은 자국의 번영만 신경 쓸 뿐 그대들의 굶주림 따위엔 관심이 없다. 영토를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휴먼즈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사람들은 신명국 타도를 외쳤다. 그분위기는 마른풀에 불이 붙는 것보다 빠르게 번져나갔다. 모두들 광분하여 ‘타도 신명국!’을 외쳤다.
휴먼즈는 우선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이 땅에서 신명국을 몰아내고 그대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잠시 진정할 필요가 있다. 자고로 혁명이란 조용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 그날이 오기까지 그대들에게 준 식량으로 힘을 길러라.”
“와아아아아!”
사람들은 함성을 질렀다.
휴먼즈는 북마크 일대의 작은 마을들을 규합했다. 그 일을 북마크 사람들과 자경단원들이 앞장섰다.
사람들은 휴먼즈를 따랐다. 그리고 과거 율리안 때와 마찬가지로 번영의 나날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세력을 키워나갔다. 규합한 마을사람들은 스스로를 혁명군이라고 칭했다.
먼 지역까지 굶주리는 이들을 통해 혁명군 소식이 퍼졌다. 혁명군에 동참을 하면 식량이 주어진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휴먼즈는 혁명군에 동참하겠다는 마을의 촌장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었다.
그렇게 불길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신명국.
위혁민은 온갖 인상을 찌푸린 채 바위에 걸터앉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의 앞길은 창창 대로였다. 청성의 1대 제자로 강호의 후기지수 십룡에 속할 날이 머지않았었다. 그 포부를 떨치려고 무림맹주를 따라왔지만, 생각했던 만큼 자신의 위치가 커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다. 입지를 확고히 다기기 위해 전투에서도 목숨을 다 바쳤고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황제의 불호령뿐이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난 것이 확실하다.
‘폐하는 자신과 무림동도들을 일개 하수인으로 보고 있다.’
위혁민은 애꿎은 바위에 주먹질을 퍼부었다. 바위가 쪼개졌다.
그는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산의 매화일검만 공작의 직위를 얻었겠다?’
위혁민에게 가장 큰 분노는 바로 그것이었다. 자고로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니 입신양명하여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기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자신은 고작 백작의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매화일검만 공작의 칭호를 얻고 평동왕 수라혈마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 입을 잘 놀려서겠지. 단지 그뿐이야. 나보다 입을 잘 놀려서 폐하의 눈에 든 것일 뿐이야.”
위혁민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폐하께서는 나처럼 충언을 하는 충신을 봐주지 않으실 뿐더러 이 위혁민의 재능을 인정하시질 않으셔. 폐하께서 그리 나오신다면 더 이상은 나도…….’
위혁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결단이 서지 않았다. 모든 무림동도들이 폐하를 따르고 있다. 강호와는 전혀 다른 이계에서 혼자 벗어나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위혁민은 허탈감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으로 길을 거닐었다.
“이크!”
누군가 위혁민과 부딪쳤다. 위혁민은 넘어진 자를 내려다보았다.
은발의 사내다. 자신이 맡은 구역에서 이런 은발을 가진 사내는 보지 못했다.
왠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누군가? 내 구역의 백성인가?”
“러밀입니다.”
은발의 사내 러밀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내 구역의 백성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러밀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강한 분위기의 사내인지라 위혁민은 그를 경계했다.
“위혁민 백작님이십니까?”
러밀이 물었다.
위혁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위혁민 백작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언제나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런가?”
위혁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러밀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사실 저는 백작님을 찾아왔습니다.”
“나를?”
“예, 백작님 만나 뵙기 위해 벌써 15일 동안 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5일이나?”
“언젠가는 이 길을 지나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간절한 듯 보이는군.”
“예.”
러밀은 주위를 살핀 후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 15일이나 기다렸다니.”
위혁민은 러밀과 함께 강변으로 향했다.
멀리서 아이들이 뛰어놀 뿐 둘의 주변에는 오가는 행인이 없었다.
위혁민은 러밀의 모습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한 분위기를 풍기니 왠지 신기한 인물이다.
“그래, 이곳이라면 말할 수 있겠는가?”
“예, 백작님.”
러밀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제가 백작님을 만나 뵈려고 한 것은 백작님의 능력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제 마스터께서는 언제나 백작님의 위대함을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자신과 같았으면 같았지 절대로 그 이하의 인물은 아닐 거라고 하셨죠. 신명국 검사들 중 가장 재능이 특출하며, 기회만 찾아온다면 신명국의 황제보다도 월등히 강해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러밀이 말했다.
“무엄하다! 감히 황제폐하보다 강해질 거라니.”
위혁민은 속마음과 정반대의 말을 내뱉었다. 역모에 해당할 정도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위혁민은 어깨를 쭉 펴고 우쭐거렸다.
“아닙니다. 마스터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예언가이신 마스터께서 사실이 아닌 것을 말씀하신 적은 없지요. 사실…… 아닙니다.”
러밀은 뭔가를 머뭇거렸다.
“말해 봐라.”
“아닙니다.”
“말해 보래도?”
위혁민은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이 말이 황제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우리 둘 다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보는 이는 물론 듣는 이도 없다. 아니지, 지금 듣고 있는 이는…….”
위혁민이 집게손가락으로 내력을 튕겼다. 러밀 앞에 숨죽이고 있던 쥐 한 마리가 찍 소리를 내며 죽었다.
“이젠 없다. 말해도 좋다.”
“장차 백작께서는 황제가 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황제?”
“예, 황제폐하가 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위혁민 황제폐하!”
러밀은 그 자리에서 위혁민에게 절을 올렸다.
당황한 것일까? 위혁민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듯했다.
“남들이 보면 역모죄로 몰리기 십상이다. 어서 일어나라.”
뒤늦게 위혁민이 말했다.
“예, 폐하.”
러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혁민의 눈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네 마스터가 그렇게 말했다고?”
“예.”
“마스터가 누군지 알 수 있겠나?”
위혁민이 물었다.
“그렇잖아도 마스터께서도 백작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나를?”
“예, 폐하.”
위혁민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보고 싶군.”
“감사합니다.”
위혁민은 러밀을 따라갔다.
러밀이 안내한 곳은 위혁민의 구역 안에 있는 한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온갖 마법진이 펼쳐진 그곳은 보기에도 휘황찬란한 금빛이 어우러져 있었다.
‘내 구역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위혁민은 감탄했다.
“모셔 왔느냐, 러밀.”
지하실 끝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는지라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뱀처럼 꼬인 지팡이를 짚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은 고대의 예언자 같았다.
“그대가 나를 만나고 싶다 했소?”
위혁민이 러밀의 마스터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몸을 감싼 흑로브 때문일까? 마스터는 위험한 인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위혁민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예언했다는 황제에 대해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위혁민은 마스터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고, 러밀은 마스터 옆에 가서 섰다.
“내 구역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소이다. 보아하니 그대들은 율리안에서 온 피난민들이 아닌 것 같은데…… 맞소?”
“맞습니다. 저희는 어느 누구의 백성도 아닌 황제폐하의 백성입니다.”
노인은 공손히 말했다.
“나 말이오?”
“예, 폐하.”
위혁민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왜 자꾸 나를 폐하라고 부르는 것이오?”
“머지않아 황제가 되실 분을 폐하라고 부르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말조심하시오. 황제폐하는 지금 황성에 계시오.”
“그분은 충신을 모르는 거짓황제입니다. 제가 한 예언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정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다면 제가 지난밤에 점친 예언을 폐하께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흠, 어디 한번 보기나 합시다.”
위혁민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잡아두기 위해 무난히 애썼다.
황제라니?
꿈도 꿔 보지 못한 지위다.
하지만 자고로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큰 뜻을 품어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황제라는 자리 역시 사내대장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봤을 야망이기도 했다.
“앞의 수정구슬을 봐 주십시오, 폐하.”
위혁민은 탁상 위에 놓인 수정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위혁민은 수정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곳에 늠름한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아…….”
금룡포를 어깨에 걸치고 만인을 호령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대인(大人)이었다.
“이것이 정녕 나의 미래란 말이오?”
“예, 폐하. 본래 그것이 폐하의 자리입니다. 하오나 어찌 된 일인지 현 황제는 천리(天理)를 거스른 채 황제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현 황제의 수명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을 뜻합니다.”
“뭐라?”
위혁민은 깜짝 놀랐다.
“날더러 그 말을 믿으란 말이오?”
“믿든 안 믿든 이것이 폐하께 천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눈앞의 사실을 거부하시면 폐하께서는 천리를 거부하시는 것이 됩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소. 그럼 하나 물어보겠소. 왜 현 황제의 수명이 다했음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오?”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죽을 자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뿐. 그래서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날이 자꾸만 미뤄져 천리가 역순하고 있습니다.”
“보위라…….”
위혁민이 중얼거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올랐다.
‘보위!’
바로 이것이다. 그동안 가슴을 답답하게 얽매이고 있었던 문제점이 비로소 풀렸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 예언자가 말해 준 보위일지도 몰랐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재능과 천리를 믿으십시오, 폐하. 신이 이렇게 간청하나이다.”
러밀에 이어 마스터까지 위혁민에게 절을 올렸다.
위혁민은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현 황제가 천리를 역순하고 있다는데,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없소?”
위혁민은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이 한 말은 분명 반심이 실린 역모가 분명하다.
“그 누구도 현 황제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천리를 지키고자 행동하신다면…….”
“한다면?”
위혁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천리를 지키려는 자를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좋소, 내가 황제를 친다고 합시다. 그럼 주위에 있는 수많은 고수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 두겠소?”
“천리의 주인임을 밝히십시오. 하늘에서 폐하를 황제가 되도록 명하셨거늘 무엇을 망설이신단 말씀입니까? 무릇 우민들이란 황제를 알아보는 법. 현 황제가 죽는다면 우민들은 황제폐하를 알아볼 것입니다. 누가 이 시대의 진정한 황제인지…….”
“믿기 어렵소.”
“괜찮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다만 용좌의 주인이신 황제폐하께서 아직도 일개 구역의 장으로 계신 것이 안타까워서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현 황제에 대한 충심으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신다면 머지않아 역순한 천리가 새로이 개정되어 영영 보위에 오르지 못하실 겁니다.”
“재밌소이다. 너무나 재미있어 배꼽이 빠질 지경이외다. 우하하하!”
위혁민은 지하실이 터져 나갈 정도로 웃어젖혔다.
“잘 생각하십시오. 천리가 새로이 개정될 날을 기다릴 것이신지, 아니면 천리를 바로잡으실지…….”
마스터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모습이 흐려졌다.
팟!
러밀과 함께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금빛으로 빛나던 주위의 벽들도 평범하게 돌아왔다.
위혁민은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다.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으으…….”
위혁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문득 발 옆에 떨어져 있는 단검 한 자루를 발견했다. 검은색 칼날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위혁민은 손잡이를 쥐었다.
“이, 이건……!”
자칫 잘못하면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분명 검날에서 영상이 보였다. 수정구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똑같은 영상!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 단검을 쥔 자신이 황제의 등을 찌른 후 웃고 있다는 점이다.
그 뒤 만인이 무릎을 꿇고, 금룡포를 입은 자신은 그들을 향해 황명을 내리고 있었다.
“요검(妖劍)인가? 천검(天劍)인가?”
위혁민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위혁민이 마스터를 만나기 며칠 전.
“뭣! 제자가 내상을 입었다고?”
수라혈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는 벽으로 날아가 쾅 하고 부서져 내렸다.
세피로스가 깜짝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예, 예! 평동왕 전하.”
매화일검이 대답했다.
“마룡…… 이럴 시간이 없다. 당장 가 봐야겠다.”
수라혈마는 의자에 걸려 있던 붉은 비단장포를 걸쳤다.
“전하께서 평동을 비우시면…….”
세피로스가 울상으로 말했다.
“지금 내 제자가 내상을 입어 이 스승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제자가 있고 평서가 있는 것이지, 평서가 있고 그 다음에 제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수라혈마는 세피로스와 매화일검을 지나쳤다.
둘은 수라혈마의 기세가 너무도 큰지라 차마 말릴 수 없어 안절부절못했다.
세피로스와 매화일검.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너무나 똑같았다. 형제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수라혈마는 경공술에 전력을 다했다. 강을 밟고 산을 넘었다. 평원을 내질렀다.
물 한 모금, 밥 한 수저 들지도 않은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렸다.
그러길 이틀이 지났을 때 평원의 국경이 보였다. 수라혈마는 국경을 지키고 선 법병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멈……!”
법병은 심장이 덜컥거렸다. 먼 곳에서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뛰어와서는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 버렸다.
“검사님 중 한 분일 거야. 머리가 검은색이었어.”
또 다른 법병이 중얼거렸다.
“아니, 약간 희끄무레했던 거 같기도 한데…….”
목수들과 드워프들이 여러 건물을 증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라혈마는 지름길로 들어섰다.
인적이 드문 울창한 숲까지 들어왔다. 이제 황성까지 그리 머지않았다.
수라혈마는 몸의 피로를 느꼈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몸에 부딪쳐 부러진 가지와 떨어진 나뭇잎들이 허공에 나부꼈다.
“잠깐.”
수라혈마는 문득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상하군. 낄낄.”
뒤로 100보 정도 되돌아갔다. 그리고 수풀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쯤? 아니 더 안이군.”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다가가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 본좌랑 장난을 치자는 건가?”
수라혈마가 느끼고 있는 것은 영험한 기운이었다. 평원의 영기가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수라혈마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어쩌면 설령과 같은 영물이 이계에도 존재할지 모른다. 낄낄, 지금 제자는 보양할 영약이 필요하지.’
“이곳이군!”
수라혈마는 영기가 집약된 곳에 도착했다.
“엥?”
주변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면은 야간 습기가 차 있어 지나간 누군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발에 실린 힘과 방향은 매우 익숙했다.
“제자가 이미 왔다갔나?”
수라혈마는 뇌까리며 허리를 굽혔다. 영기가 집약된 땅에서도 그것이 최고조에 이르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이곳이다.
수라혈마는 수풀을 젖혔다. 한 번 헤쳐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이 안에 있단 말이지? 낄낄!”
대충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정도면 제자의 내상을 치료하고도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설령을 생각하니 수라혈마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조심스레 땅을 파냈다.
얼마나 파내려갔을까?
팔꿈치 깊이 정도 팠을 때 영물의 형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뭐가 나올까?’
금은보화를 눈앞에 둔 것처럼 가슴이 들떴다. 아니,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끼끼…….]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수라혈마는 설령이 왔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령은 없었다. 소리는 땅 밑에 있을 영물에게서 났다.
“낄낄낄.”
수라혈마는 괴소를 지으며 더 빨리 땅을 파헤쳤다.
이윽고 영물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
“아기 설령?”
수라혈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락없이 설령을 3분의 1로 축소시켜 놓은 모습이었다.
설령과 다른 것은 머리 위로 꽃이 자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올망졸망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설령의 장난스러운 눈과는 차이가 있었다.
수라혈마는 다섯 마리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만년설삼이 되려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듯 보였다. 아쉽게도 다 자라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낄낄, 그래도 설령 그 귀여운 것이 본좌를 위해 이렇게 많이도 준비해두었구나. 아가들아, 이런 위험한 곳에 있다간 들짐승들이 먹어 버릴지도 모르겠구나. 낄낄낄! 본좌의 품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거라.”
수라혈마는 아기설령들을 품 안에 넣었다.
수라혈마의 가슴 쪽 옷자락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끼끼끼.] [끼…….]아기설령들은 저마다 수라혈마의 품 안에서 울어댔다.
수라혈마는 한 마리씩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기설령들은 곧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잠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수라혈마는 얼마 남지 않은 황성 쪽으로 몸을 날렸다.
머지않아 훌륭한 영물이 될 아기설령들이 날카로운 바람에 맞을까 양팔로 가슴을 감쌌다.
그리고 한참 후 수도에 도착했다.
“호오…….”
그동안 못 본 사이에 수도엔 드워프들의 훌륭한 건물들이 즐비했다.
번화한 거리. 생기발랄한 사람들의 표정. 뛰어노는 아이들과 오가는 마차.
수라혈마는 황성의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문을 지켜선 법병들이 그를 알아보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평동왕 전하.”
“오냐.”
수라혈마는 지면을 박찼다. 탑 안으로 들어간 후 지하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마치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듯 그동안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리움 때문이었다.
“천혈삼괴!”
수라혈마가 맞은편에서 올라오던 천혈삼괴를 발견했다. 천혈삼괴의 눈이 크게 뜨였다.
“평동왕 전하, 어인 일로 납시셨습니까?”
“제자가 아프다는데 본좌가 어찌 안 와 볼 수 있겠는가? 제자는 어디 있지?”
“폐하께서는 지금…….”
“됐다!”
수라혈마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부리나케 뛰어 내려갔다.
지하본성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황제가 내상을 입은 채 누워 있거늘, 이 천하태평한 분위기는 또 무엇이더냐!
수라혈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막 계단을 다 내려섰을 때 본성 밖으로 나가려던 주첨기가 그를 발견했다.
“스승님!”
“제, 제자야?”
[우낏!]갑자기 주첨기의 품에서 설령이 뛰어내렸다.
설령은 수라혈마에게 달려들었다. 설령은 몸 전체가 빨개진 채 수라혈마를 향해 뭐라고 외쳐 댔다.
[우끼! 우끼! 우끼!]“설령, 스승님께 무례를 저지르는구나.”
주첨기는 설령을 쥐었다가 들었다.
[끼끼……!]그때 수라혈마의 품 안에서 아기설령들이 울어 댔다.
그제야 주첨기는 상황이 판단되었다.
“스승님, 설령의 자식들을 데리고 오셨군요.”
아기설령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었다.
[우낏! 우낏!]설령이 주첨기의 손에서 발버둥쳤다.
주첨기는 설령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정시켰다.
“오면서 들짐승에게 잡혀먹을까 봐 가지고 왔다. 제자야, 네가 내상을 입었다기에…….”
수라혈마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 봐, 설령. 스승님께서는 네 자식들이 걱정돼서 데리고 오신 것뿐이야. 그러니 안심해도 돼. 스승님은 그 누구보다도 네 자식들을 걱정하는 분이셔. 그렇지 않습니까, 스승님?”
“그, 그거야 당연하지.”
수라혈마는 더듬거렸다.
“먼 길을 오셨습니다, 스승님.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따뜻한 물과 음식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주첨기는 실리아에게 전음을 날렸다. 수라혈마 스승을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스승은 자신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리에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쉼 없이 달려온 듯했다.
‘스승님이시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수라혈마는 주첨기가 쾌유된 것을 보고 안심했다. 연신 우낏거리는 설령의 눈치를 살피다 못해 품 안에 있던 아기설령 다섯 마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첨기도 설령을 놓았다. 아기설령들이 설령의 주위를 맴돌았다.
[우낏! 우낏!] [끼끼…….]설령의 뒤로 아기설령 다섯 마리가 따라다녔다. 설령은 아기설령들과 함께 주변을 걸어 다녔다. 아기설령들은 걸음마를 하듯 종종걸음으로 다녔다.
“하하!”
“낄낄낄.”
주첨기와 수라혈마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랏?”
주첨기 곁으로 다가온 실리아가 설령과 아기설령들을 보았다.
“폐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실리아는 수라혈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스승님, 우선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알았다. 쩝!”
수라혈마는 아기설령들을 보고 입맛을 다시며 실리아를 따라갔다.
수라혈마는 목욕을 마치고 주첨기와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마룡이 어떤 괴수이기에 감히 제자에게까지 내상을 입혔더냐. 낄낄낄.”
수라혈마가 말했다.
“마치 드래곤들을 한데 뒤섞어 놓은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내상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스승님.”
“얼마만큼 강한지 모르겠구나.”
“대흑마괴보다도 강했습니다.”
“컥!”
먹던 것이 목에 걸렸다. 수라혈마는 얼른 물을 들이켜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대흑마괴 발록보다?”
수라혈마는 질려 버렸다. 데이모스 혈권에 타고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대흑마괴 발록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하다니. 그것으로 이미 할 말 다했다.
“예, 스승님.”
“이계에 온 지 꽤 지나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로구나. 낄낄.”
세상으로 나와서 처음 본 사람이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아기설령들은 수라혈마를 잘 따랐다.
설령은 아기설령들이 수라혈마 뒤를 졸졸 따라다는 것을 보며 연신 우낏거렸다.
수라혈마가 난감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스승님.”
“어?”
수라혈마가 아기설령들을 어깨 위로 올렸다.
“평동지방은 지금 어떻습니까?”
주첨기도 얼굴이 벌게진 설령을 어깨 위로 올리고 물었다.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모든 대지가 황폐화되었으니…….”
“어느 정도로 심각합니까?”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줄 식량이 없다. 나와 수하들은 치안유지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다.”
수라혈마는 솔직하게 답했다.
“에드먼 그놈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 시시탐탐 평동지방을 노리고 있어.”
“본토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평동을 먼저 복구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첨기가 말했다.
“알았다. 내 체질이 정치에는 전혀 맞지 않아. 본좌는 그냥 부수고 날뛰는 일만 잘할 뿐이지. 그나마 매화일검과 세피로스가 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수라혈마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이가 연로한 노인답지 않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평동지방의 기아해소와 발전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얼마 전에 또 다른 드래곤 레어의 보물창고를 발견했습니다. 보물을 양분해 이미 절반은 진천 스승님께 전해 드렸습니다. 황성의 보고에 나머지 보물이 있으니 스승님께서는 평서로 돌아가시는 길에 가지고 가십시오.”
“호오, 엄청나겠구나. 이제 굶어죽겠다는 소리를 안 들어서 살 만하겠어. 낄낄길!”
“스승님, 죄송합니다만…….”
“응?”
수라혈마는 주첨기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눈길을 피했다.
“제가 누워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셨으니 이만 평동성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어제 왔지 않느냐, 제자야.”
수라혈마는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스승님의 말대로 에드먼은 지금 평서지방을 노리고 있을뿐더러 백성들은 온갖 기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국에 평동왕이신 스승님이 자리를 오래 비우신다면…… 백성들이 자칫 화를 자초할까 걱정됩니다.”
“흠흠, 아쉽지만 그리 말하니 이만 가 봐야겠구나.”
“스승님…….”
사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것은 주첨기였다.
이계에 온 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함께한 스승님 두 분이 계셨다.
물론 수백 명의 수하들도 있지만 두 스승의 존재감만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두 스승마저 먼 지방으로 떠나 있다.
내상을 입고 누워 있을 때 흡사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주첨기는 수라혈마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자, 이만 가 볼까? 낄낄…….”
수라혈마가 말했다.
잠시 후 주첨기의 지시 아래 황성 안의 고수들이 보물들을 수레에 옮겨 실었다. 수레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가옥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라혈마는 어마어마한 보물의 양에 놀라서 입을 쩌억 벌렸다.
“낄낄낄.”
수라혈마는 자신을 환영해 줄 백성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법병을 호위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까지 것 나 혼자 가도 된다. 언제나 본좌는 일인무적 인생이 아니었느냐.”
“그래도 그게 아닙니다.”
“아니다, 제자야.”
수라혈마가 고집을 피우며 수레를 몰았다.
황성의 모든 관리와 고수들이 밖으로 나와 수라혈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끼…….]아기설령들이 자꾸만 수라혈마의 뒤를 따랐다.
[우낏!]아기설령들을 부르는 설령의 외침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설령, 아무래도 아기설령들은 스승님을 좋아하나 보다. 차라리 잘되지 않았어? 스승님도 적적하실 테고, 그리고 스승님의 품이라면 어느 곳보다 안전할 테니까. 아기설령들이 너처럼 다 클 때까지만 스승님께 맡기자.”
주첨기가 말했다.
설령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우끼…….]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은 아기설령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기설령들은 수라혈마의 다리를 타고 올라 품 안으로 들어갔다.
“제자야?”
수라혈마가 고개를 돌렸다.
“괜찮습니다. 설령이 걱정하지 않도록 잘 보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거참…….”
수라혈마는 방실방실 웃고 있는 아기설령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보면 볼수록 군침이 돈다.
하지만 방실방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식욕이 가셨다.
[끼…….]“내가 너희들을 안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
[끼…….]“에그그! 됐다, 됐어.”
수라혈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수라혈마는 거대한 수레들을 이끌고 다시 평동으로 향했다.
평동왕 수라혈마가 떠나고 나자 황성은 여느 날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고수들은 저마다 자신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돌아갔다.
그런데 유독 한 고수만이 남아서 주첨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첨기는 그에게 다가갔다.
“위혁민.”
위혁민은 날카로운 시선을 풀지 않은 채 주첨기를 직시했다.
“위혁민, 지금 짐을 노려보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위혁민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주첨기는 분노한 눈으로 위혁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폐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위혁민은 마치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당당했다.
“말해 보라.”
주첨기는 한 번은 참아 주기로 했다.
“저 많은 수레에 모두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 우리 신하들에게는 조금의 상의도 없이 보물을 사용하셨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인가?”
“아닙니다. 어째서 저렇게 많은 보물들이 있었는데도 그동안 전공을 쌓은 많은 신하들의 공을 치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인가, 위혁민? 그대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예, 폐하.”
고개를 숙인 위혁민의 입꼬리가 얄팍하게 올라갔다. 한 손은 품 안으로 들어가 얼마 전에 길에서 주운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금 평동에는 굶어죽어 가는 백성이 하루에 수천이라고 했다. 그리고 논공은 이미 끝났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본토를 지킨 공로를 높이 생각해 매화일검을 공작의 작위에 봉했다. 위혁민, 네 눈은 지금 욕심으로 번질거리고 있다. 앞으로 보름간 아무 일 하지 않아도 좋다. 네 처소에서 근신하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반성하라.”
주첨기가 일침을 놓았다.
주첨기는 그대로 등을 돌려 황성 안으로 걸어갔다.
“폐하께서는 이 위혁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혁민이 주첨기의 등에 대고 외쳤다.
“위혁민, 네가 정녕……! 됐다. 자고로 사람이란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 네가 짐에게 했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라.”
“폐하!”
위혁민이 몇 번이나 외쳤다.
주첨기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위혁민은 황성 안으로 들어간 주첨기를 향해 뇌까렸다.
“나 위혁민은 후회 따위 하지 않는다!”
위혁민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처소로 갔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품 안의 단검을 꺼내 보았다. 또다시 ‘황제 위혁민’의 영상이 펼쳐졌다.
“정말일까?”
위혁민은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날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저렇게만 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언자가 한 말이 하나씩 떠올랐다. 천리를 거스르고 있는 자…….
“주첨기.”
위혁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미 자신은 황제의 눈 밖에 난 지 오래였다.
“죽어 있어야 할 자가 내게 반성을 하라고 해?”
위혁민은 짜증이 치밀었다. 예언자의 말대로라면 주첨기는 이미 죽어 있어야 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분명 천리다!
“그리고 충신인 내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지 않은가? 충신의 말을 듣지 않는 황제는 패망하게 되어 있다.”
위혁민은 상체를 일으켰다. 마음이 답답하고 화가 날 때는 그냥 자 버리는 것이 상책이지만 잠도 오지 않는다.
위혁민은 다시 한 번 예언자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밤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갔다.
위혁민은 예언자를 찾기 위해 구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위혁민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였다.
“저를 찾고 계셨습니까, 폐하?”
위혁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예언자는 담장 위에 걸터앉은 채 위혁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혁민은 예언자 밑으로 다가갔다.
“이 단검이 당신 것이오?”
그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내밀었다.
“제 것이 아니라 폐하의 것입니다.”
“자꾸만 요사스러운 영상이 나를 현혹하려고 하오. 그만 가져가시오.”
“폐하의 본심은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이제 날이 다가왔습니다. 천리가 새로이 개정되는 날은 바로 내일. 내일이 아니면 영영 천리를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내일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고민이 많으신 듯 보입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십시오.”
“내 마음은…….”
“폐하는 이 나라의 황제폐하이시옵니다.”
마스터의 한마디!
위혁민은 마침내 결심이 섰다.
“천리를 바로잡아야겠소이다.”
위혁민의 눈이 사심으로 번질거렸다.
“바로 내일…….”
위혁민은 단검을 움켜쥐었다.
주첨기의 등 뒤에서 심장을 찌르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 그리고 자신에게 절을 올리는 수백 명의 고수들과 수백만의 백성들.
새 황제 위혁민!
“내 천리를 바로잡아 황제로 등극할 때 그대를 군사로 중히 쓰고 싶소. 거사가 끝난 후 그대의 지혜를 빌려도 되겠소?”
“예, 폐하. 저는 폐하를 따르기 위해 200여 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드 안 마스터의 눈빛 또한 위혁민의 눈빛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스터는 단검의 영상에 빠진 위혁민을 향해 다시 한 번 절을 올렸다.
“바로 내일이 황제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마스터는 속으로 웃었다.
“좋소이다. 내 그대의 말에 따라 현 황제를 시해했다 칩시다. 그 후엔? 그 후에 내게 돌아오는 것은 고수들의 검이지 보위가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저는 수백 일 전부터 내일을 봐왔습니다. 폐하의 신황군 1만을 곳곳에 잠입시켜 두었으니 차후의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마스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