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63
제1화 공작의 결혼
모든 임무를 완수했다는 충족감 때문일까?
매화일검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충족감만으로는 이러한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매화일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 레일리아 공주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그녀와 내가 결혼을……?’
매화일검은 실감나지 않았다. 호화스러운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잠이 들지 않는다.
갑자기 성사된 결혼. 그날이 바로 내일이다.
결국 매화일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공작님, 목욕물을 데워 놓았습니다.”
시녀들이 말했다.
매화일검은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향했다. 시녀들이 매화일검의 신명검을 응시했다. 검을 지니고 목욕을 할 수는 없는 법.
“검은 저희들이 맡아두겠습니다, 공작님.”
“아닙니다.”
매화일검은 고개를 저었다. 신명검은 황제폐하가 직접 내려 주신 보검. 어느 순간이라도 지니고 있어야 할 성물인 것이다.
매화일검은 목욕수발을 들겠다는 시녀들의 요청을 마다하고 홀로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었다.
나신이 되었다.
균형 잡힌 매화일검의 몸은 드워프들이 직접 조각해 놓은 듯 완벽했다.
매화일검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온기가 몸을 감쌌다.
그제야 조금이나마 긴장이 누그러지면서 잠시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 중이던 시녀들은 매화일검의 나신을 보고 눈이 커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놀라 소리를 지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헉!’
오히려 매화일검이 놀라서 욕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물기를 닦은 후 속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매화일검은 헛기침을 했다.
어색하게 의자에 앉았다.
매화일검 뒤로 10여 명의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떤 이는 매화일검의 머리를 말렸고, 어떤 이는 매화일검이 입을 예복을 준비했다.
예복은 매화일검의 요청에 따라 붉은색과 검은색이 조합된 것이었다.
오로지 매화일검을 위한 옷이다. 머리정돈을 하고 예복을 입으니 절세미남이 따로 없다.
“아……!”
시녀들은 할 말을 잃었다.
매화일검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여 헛기침만 했다.
시간이 지났다.
몸치장 하는 데만도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뉴얼국 백성들에게 고한 결혼식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화산파의 절세무공을 전수받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끝났습니다, 공작님.”
시녀장이 공손히 말했다.
“수고했네.”
매화일검은 자신의 몸을 천천히 둘러보며 답했다.
뉴얼 국왕이 보내온 여러 예복장식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호화스러운 옷은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공주와의 결혼식에서 입는 예복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입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기다리십니다, 공작님.”
“그런가?”
매화일검은 흡사 절세마인과의 대결을 앞둔 이처럼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매화일검은 시녀들을 따라 식장으로 향했다. 대관식을 비롯해 온갖 왕실예식들이 벌어지는 그곳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있었다.
어깨와 어깨가 맞부딪치고 발 디딜 틈 없이 메워진 백성들은 매화일검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매화일검은 어깨를 폈다. 당당하게 걸었다.
반대편에서 또 다른 환호성이 터졌나왔다.
“아……!”
매화일검은 신음을 흘렸다. 지금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가 될 레일리아 공주였다.
크게 부푼 아름다운 하얀 드레스보다도 레일리아 공주의 미모가 더욱 눈에 띄었다.
“공주.”
“공작님.”
매화일검과 공주는 중간에서 만났다. 서로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매화일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얀 장갑을 낀 공주의 손이 매화일검의 손 위에 올려졌다. 매화일검은 매우 조심스럽게 공주의 손을 잡았다.
두근두근!
백성들의 환호성이 천지를 울릴 만큼 크지만 지금 매화일검과 공주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의 심장소리만 들렸다.
두근두근!
상대방에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스러운 기색들이다.
매화일검과 공주는 나란히 걸었다. 백성들은 매화일검의 남자다운 기백을, 공주의 아름다운 외모를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었다.
매화일검과 공주는 붉은 융단 끝에 도달했다. 앉아 있던 뉴얼 국왕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융단 옆으로 질서 있게 서 있던 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뿌우
나팔소리가 울렸다.
백성들은 입을 다물었다.
뉴얼 국왕은 침묵 속에서 걸어 나왔다.
“신명대국의 공작, 매화일검! 그대는 나의 사랑스러운 딸 레일리아를 아내로 맞아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는가?”
뉴얼 국왕이 엄숙하게 말했다.
매화일검은 공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매화일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예, 국왕전하!”
뉴얼 국왕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딸 레일리아, 신명대국의 공작 매화일검을 남편으로 삼아 영원히 행복할 자신이 있느냐?”
공주의 얼굴은 이미 잘 익은 홍시보다도 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푹 숙인 고개.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매화일검이 공주의 손을 잡았다.
“예, 아바마마.”
공주가 쑥스럽게 대답했다.
식은 간단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대신들과 백성들의 축복을 받으며 매화일검과 공주는 왕실마차에 탔다.
왕실마차는 수도를 돌았다. 거리에 꽃잎을 뿌렸다.
백성들은 진심으로 공주의 결혼을 축복했다. 새롭게 떠오른 강대국 신명대국과의 인연은 이로써 이루어졌다. 적어도 신명대국과의 전쟁은 멀어진 것이다.
왕성의 창문에서 언뜻 뉴얼 국왕의 얼굴이 비쳤다. 국왕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일리아…….”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 이제 떠난다. 비록 매화일검 공작이 세상의 어느 남자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자라 해도 아버지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매화일검 공작, 내 딸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라…… 후우!”
농부는 수확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들판 위를 뛰어놀고 있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레일리아는 그런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신명대국은 정말 소문대로 풍요로운 나라인 것 같아요.”
바람이 불어 황금색 들판이 출렁거리니 황금물결이 따로 없었다.
매화일검과 레일리아는 신명대국의 황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신부 쪽 나라에서부터 결혼식을 했다. 신랑 측 나라에서도 결혼식을 하여 지인들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아야 한다.
지인들로부터의 인정. 그것이 결혼식을 하는 목표니까 말이다.
“그렇소, 공주?”
“예, 공작님.”
아직은 여보라고 부르기에 쑥스러움이 많은 부부였다. 레일리아는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뉴얼국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표정이다. 걱정거리가 없어 보였다. 각자 자신들이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그뿐이라는 표정들이다.
“모두 밝아 보여요. 그런데 농부들을 관리하는 가신들이 보이지 않네요.”
레일리아가 말했다.
“본국에선 백성들을 관리하지 않는다오.”
“그럴 수도 있나요?”
“폐하께서는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치세라고 했소. 하지만 자유를 떠나 오만을 부린다면 그에 따른 벌은 가히 엄중하다오.”
“그렇군요.”
수도로 향하면서 매화일검은 레일리아 공주에게 하나씩 신명대국의 문화와 정치 등을 알려 주었다. 이제부터 공주가 살아야 할 곳은 신명대국이기 때문이었다.
수도에 들어서면서 공주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건물들이 지금껏 보아왔던 솜씨와는 차원이 달랐다. 백성들이 사는 가옥, 상인들의 상점까지도 하나하나 규모만 작을 뿐이지 예술적인 측면에서나 실용적인 측면에서 최고급이었다.
“수도의 건물들은 모두 대단해요.”
레일리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장인족의 솜씨요.”
“장인족?”
레일리아는 신명국에서 드워프를 장인족이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레일리아는 단번에 눈치챘다.
이러한 최고급 실력을 발휘할 장인들은 대륙에서고 손에 꼽을 정도다. 이 정도로 대규모 가옥들을 지을 정도의 장인들이라면 인간이 아니라 드워프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수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드워프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레일리아가 가장 놀란 것은 웅장한 황성의 자태였다.
뉴얼국의 왕성은 타국의 왕성들보다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뉴얼국 왕성은 신명국의 황성 앞에서는 일개 외성에 불과했다.
마차가 들어섰다.
착!
법병들이 절도 있게 할버드를 치켜세웠다.
히이잉
말이 멈추어 섰다.
창밖으로 매화일검이 고개를 내밀었다. 법병들은 바로 길을 비켰다. 뉴얼국 왕성의 문장이 박힌 마차는 황성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신명대국의 많은 관리들과 시녀들이 마차를 마중 나왔다.
고수들도 여럿 나와 있어 손수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신명대국 사람들은 매화일검 공작의 아내, 레일리아 공주를 환영했다.
―사형!
화산파 고수들이 매화일검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화산파 고수들이 레일리아 공주 앞으로 다가왔다.
“내 아내 레일리아라고 한다.”
매화일검이 말했다.
레일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화산파 고수를 비롯한 일동이 포권했다.
“이렇게 아리따우신 분을 아내로 맞이하시다니 정말 천운이십니다.”
고수들이 말했다.
“황제폐하께서는?”
매화일검이 집정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집무실에서 공작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평서왕 전하와 평동왕 전하께서도 와 계십니다.”
“두 분께서도?”
“예.”
매화일검과 레일리아는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시녀들은 레일리아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작님.”
레일리아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기……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귀여운 식물은 무엇인가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앗, 살아 있어요!”
매화일검이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설령이었다. 설령은 복도의 장식품 위에서 레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령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미인을 향한 경계심?
그것과 비슷했다.
매화일검은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폐하의 애완식물?
아니다. 폐하께선 설령을 마치 친구처럼 대하고 계시다. 수천 년을 살아 생명을 얻은 영물이라고 해야 하나?
“귀여운 질투를 하는 아이랄까?”
매화일검이 중얼거렸다.
“아이……?”
이해 못한 레일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둘은 어느새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집무실 앞에 서 있던 집정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렸다.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 주첨기 그리고 그 양쪽에 서 있는 2왕 진천과 수라혈마의 모습이 보였다. 감히 범인은 범접도 못할 위엄이 세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
레일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폐하, 신 매화일검 도착했습니다.”
매화일검이 무릎을 꿇었다.
레일리아도 남편에게 배운 신명대국의 예법에 따라 절을 했다.
“낄낄낄! 수백 명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하는 것은 바로 너로구나, 매화일검.”
수라혈마가 말했다.
그의 어투엔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주첨기가 이를 눈치채고 말했다.
“스승님의 좋은 혼처를 알아보겠습니다.”
“낄낄, 정말이더냐?”
주첨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매화일검, 짐은 그대에게서 온 전서를 보고 매우 기뻤다. 이제 그대와 아름다운 부인이 왔으니 성대한 환영식을 해야겠다.”
동시에 주첨기는 전음을 보냈다.
―모든 나라들이 에드먼을 고립시키는 일에 약조했다고 했겠다?
―예, 폐하.
매화일검과 주첨기가 전음을 주고받았다. 주첨기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으나 어느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레일리아가 말했다.
“여봐라, 결혼식 준비를 하고 앞으로 사흘간 축제를 명하노라.”
결혼식은 뉴얼국과 같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대외적으로 신명대국의 검사들 중 처음으로 있는 결혼식이었고, 대국의 공작과 뉴얼국의 공주의 결혼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매화일검과 공주간의 일이기도 했으나 신명대국과 뉴얼국과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음을 뜻했다.
앞으로 3일간 모든 백성들은 축제를 즐기고 공작과 공주의 앞날을 축복할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그날 밤.
차차착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 검은 흑포를 둘러싼 괴인 한 명이 이번에 내려진 매화일검의 저택에 침입했다.
괴인은 비호 같은 몸놀림으로 저택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들은 주방으로 이동했다.
특별히 초빙된 유명한 요리사들이 한껏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괴인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요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화르르륵
요리사들이 현란한 솜씨로 요리를 만들었다.
고기에서 맛있는 냄새가, 수프에서는 향긋한 향이 퍼져 나왔다. 요리를 마치고 요리사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괴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스스슥
괴인은 품 안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찰랑 하고 호리병 안에서 액체소리가 들렸다.
괴인은 호리병 뚜껑을 열었다.
무색무향(無色無香)!
색도 없었고 향기도 없어 그저 물인 듯싶었다. 괴인은 그것을 수프 안에 탔다.
요리사들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다.
괴인은 섬뜩한 미소와 함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자, 공작님과 공주님께서 기다리시겠다. 요리가 식기 전에 빨리 옮겨라.”
요리사들의 장이 말했다.
요리사들은 다 만들어진 요리들을 식탁으로 하나둘 옮기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괴인이 이상한 액체를 뿌려 놓은 수프도 있었다.
“공주, 오늘 정말 피곤하지 않았소?”
매화일검이 말했다.
“예, 공작님. 그래도 모든 분들께서 환영해 주셔서 마음만은 피곤하지 않아요.”
레일리아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폐하와 두 전하의 존안을 뵌 느낌이 어떠시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해 보질 못했어요. 그래도 그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오. 자, 우선 음식을 드십시다.”
매화일검은 요리사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요리사들이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떠났다.
매화일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둘만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오늘 하루 수많은 고수들에게 축하인사를 받으며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제야 공주와 조용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비록 결혼한 사이라 해도 인연을 쌓은 지 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매화일검과 레일리아 공주 둘 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고 있어 뉴얼국에서도 첫날밤을 못 치른 상태였다.
“이것을 드세요.”
레일리아가 수프를 매화일검의 앞으로 내밀었다.
매화일검이 수프를 한 입 먹었다.
과연 황제폐하 옆에 있던 요리사들이라 그런지 맛이 일품이다.
자신만 먹기가 쑥스럽고 아쉬웠다.
매화일검은 한 수저 떠서 레일리아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레일리아가 부끄럽게 수프를 입 안에 넣었다.
“정말 맛있어요.”
“정말 그렇소. 헛?”
매화일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매화일검은 스프를 한 수저 더 뜨는 레일리아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리고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몸 안의 내력을 운기했다. 하반부에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독이다!’
매화일검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먹지 마시오!”
“무, 무슨 일이에요?”
레일리아가 말을 더듬었다.
“그 수프에 독이 들었소이다.”
“독이라니요. 아무런 이상도 없는걸요. 어? 그러고 보니…….”
레일리아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매화일검은 고개를 저었다.
레일리아의 입술이 붉디붉어 당장이라도 자신의 입술로 감싸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매화일검이 해독하고자 운기를 해도 몸 안의 열기는 더욱 거세져만 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공작님, 몸이 이상해요.”
레일리아가 매화일검에게 다가왔다.
매화일검은 공주란 한마디와 함께 레일리아를 안아 버렸다. 레일리아도 매화일검을 안고 눈을 감았다.
‘이건 독이 아냐.’
매화일검은 생각했다.
그때였다.
스르르
커튼 뒤에서 수라혈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젊음이 좋아. 공작, 공주, 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한가? 낄낄, 본좌는 둘의 행복한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이만 가겠다.”
“저, 전하!”
매화일검은 레일리아를 껴안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매화일검과 레일리아의 얼굴, 특히 입술이 붉어졌다.
―둘이 숫기가 너무 없어서 첫날밤을 치를 수나 있을까 가히 걱정되어 본좌가 영약을 넣었다. 낄낄, 하루빨리 2세를 낳아 공작의 후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앞으로 축제가 끝나는 이틀 동안 공작이 방에서 나오지 않아도 내 폐하께 걱정하시지 말도록 잘 말해 놓을 테니, 본좌 생각은 말고 2세 만드는 작업에 열중하여라. 부럽다, 부러워. 아, 너무 부럽구나. 낄낄낄!
수라혈마는 전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매화일검은 레일리아를 번쩍 들었다.
“공작님.”
“공주!”
둘의 시선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매화일검은 몸을 튕겨 방 안의 침실에 레일리아를 눕혔다.
“부끄러워요.”
레일리아가 말했다.
매화일검은 손가락을 튕겼다. 급한 대로 방 안을 밝히고 있던 전등을 깨트렸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레일리아도 눈을 차분히 감았다. 붉은 두 입술이 포개져 홍화(紅花)의 모습을 띠었다.
스르르
드디어 매화일검이 손으로 레일리아의 부드러운 피부를 훑기 시작했다. 홍화의 꽃잎이 하나둘씩 벗겨져 어느새 침대 밑에는 벗어젖힌 매화일검의 의복과 벗겨진 레일리아의 옷이 어지럽게 널렸다.
“이리 오시오, 공주.”
높은 톤의 음성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폐하, 매화일검 공작도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까요. 폐하께서도 이제 후일을 생각하시어 황비를 들이셔야 합니다요.”
혜공은 몇 시간 동안 주첨기 옆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있었다.
주첨기는 완전히 질렸다. 공작과 공주와의 결혼식이 끝난 후부터 혜공은 계속 저렇게 간언하고 있었다.
주첨기는 손을 내저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습니까, 혜공 공.”
“폐하,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아, 내일이라도 당장 황비를 맞아들인다는 방을 방방곡곡에 붙여 미(美)와 지(智) 그리고 인덕을 지닌 수많은 여인들을 모으는 것이 어떻습니까요? 그 중에 폐하께서 마음에 드시는 여인을 간택하시어 후대를 이으셔야 합니다요.”
“그래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첨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십니까요?”
“그렇습니다, 혜공 공.”
주첨기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두운 밤이었다. 따라온다는 수많은 시녀들과 대신 그리고 고수들을 뿌리치고 홀로 산책로를 따라 거닐었다.
그도 후대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다. 사람의 생이란 것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매우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내일 아침에 갑자기 괴병으로 숨질 수도 있고, 한평생 괴병에 시달려 오늘내일하고 있던 이가 80이 넘게 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통일이란 대업을 앞두고, 무엇보다 에드먼 제국을 앞에 두고 황비를 맞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폐하, 황비를 맞아들이셔야 합니다!’
혜공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낏!]풀숲에서 갑자기 설령이 튀어나왔다. 설령은 주첨기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설령…….”
아무런 근심걱정 없는 설령이 이 순간만큼은 부러웠다. 주첨기는 무작정 화원을 거닐었다.
화원 한구석에서 꽃을 매만지고 있던 실리아를 발견했다. 실리아가 급히 쭈그려 앉아 있던 자세를 일으켰다.
“모두 자고 있는 깊은 밤, 실리아 그대는 아직도 왜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가?”
“폐하!”
실리아는 결혼식을 본 후로 줄곧 화원에 나와 있었다. 같이 왔던 동료들은 모두 떠났다. 이제 홀로 남아 외로웠는데 결혼식을 본 후로 그런 마음이 더욱 커졌다.
연모하는 황제폐하가 있지만, 그분은 자신에게 조금의 눈빛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계시기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실리아는 그렇게 꽃을 바라보며 신명대국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주첨기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분께서 눈빛을 주시지 않기에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눈앞에 바로 그분이 계시다.
언제나 강인하신 그분!
“그저 잠이 들지 않아 꽃을 보고 있었습니다, 폐하.”
레일리아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짐과 같구나.”
“폐하.”
실리아는 주첨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위엄이 서린 황제폐하라기보다는 연모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첨기는 실리아 옆에 섰다.
“마법서관에서 별다른 일은 없느냐?”
“진귀한 마법서들이 많습니다만 모두 저에겐 부질없는 짓입니다.”
“부질없다?”
“예.”
“짐이 그대에게 특별히 권한을 내려준 것이거늘, 부질이 없다니.”
주첨기가 약간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황은은 언제나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 하오나 저 실리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결혼식을 보면서 말입니다.”
“생각?”
“예, 폐하. 제가 아무리 서관에서 진귀한 마법서들을 익혀 대마법사가 된다고 한들 저는 한낱 여자입니다. 저는 여자……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연모하는 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여자입니다. 여자…… 저는…….”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실리아는 마음을 놓고 입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다 말하고 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실리아는 그제야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후회되었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자입니다라니. 황제폐하 앞에서…….’
주첨기에게서 아무런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실리아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미소 짓고 있는 주첨기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미소…….’
실리아는 가슴이 녹아내렸다.
“주첨기님!”
멀리서 엘리나가 뛰어왔다.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뛰어와 코앞에서 헉헉거렸다.
“오늘따라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군.”
주첨기가 중얼거렸다.
실리아와 설령이 동시에 엘리나를 째려보았다. 엘리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주첨기 옆으로 다가왔다.
“주첨기님도 잠이 오지 않으시나 보네요. 저와 단둘이서 화원을 거닐어요. 모처럼 시원한 밤이에요.”
엘리나는 주첨기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엘리나, 폐하께서는 지금 피곤하셔서 침실로 가셔야 해요. 그리고 근래 들어 밤은 언제나 시원해요.”
실리아가 여우 같은 눈을 부릅떴다. 모처럼 황제폐하와의 독대였는데 엘리나가 끼어든 것이다.
[우낏!]설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혜공까지 뛰어왔다. 엘리나와 실리아가 혜공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주첨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혜공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조용히 화원을 거닐려고 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 여인들끼리의 왠지 모를 따가운 분위기와 잔소리 대장 혜공 공까지 왔으니…….
“정말 황비간택은 생각하시고 계신 겁니까요?”
혜공이 물었다.
‘황비간택?’
실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황비간택?’
엘리나가 밝게 웃었고,
‘황비간택?’
설령은 ‘우낏’하고 놀랐다.
실리아, 엘리나, 설령 누구랄 것 없이 흥분된 기색이 역력했다.
주첨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냥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혜공이 엘리나와 실리아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혜공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퍼졌다.
“고민할 것 없이 이 두 분 중에 한 분으로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요, 폐하.”
다급한 대로 혜공이 말했다.
실리아와 엘리나는 ‘헉!’하고 신음을 흘렸다.
잠시나마 흘렀던 정적을 깬 건 설령이었다. 설령이 주첨기의 볼에 자신의 몸을 자꾸만 비비며 ‘우낏, 우낏!’하고 거세게 울어댔다.
주첨기는 피식 웃었다.
“혜공 공,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황비간택은 당분간 생각이 없습니다. 대업을 이루기 전까지 황비간택 건은 말하지 마십시오.”
“아…….”
실리아와 엘리나는 그만 맥이 풀려 버렸다. 감정이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지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온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다.
설령도 더 이상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주첨기의 품 안으로 사라졌다. 실리아와 엘리나 그리고 혜공은 멀어져가는 주첨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전하!”
혜공이 황급히 주첨기의 뒤를 따라갔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뛰어가는 폼이 영락없이 여인 같다.
햇빛이 강렬하다. 달구어진 모래바닥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마차를 모는 네 마리의 말들도 힘겨운지 평소보다 거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마차에는 에드먼 제국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페국의 수비대는 곧바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멈춰라!”
수비대 병사가 외쳤다. 비록 에드먼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지만 엄연히 에드먼과 전쟁 중이다.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에드먼 제국에서 사자로 임명받고 오신 페를리우스 공작님께서 타신 마차다.”
마부가 말했다.
“사자?”
“그렇다. 페국의 왕성으로 가는 중이다.”
수비대는 마부에게 신분을 증명할 것을 보여 달라고 했다. 마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잠시 마차 안의 공작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차 창문으로 손이 하나 나왔다. 에드먼 제국의 공작임을 증명하는 명패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수비대는 길을 열어 주었다. 모두 그리 곱지 않은 시선들이다.
“에드먼에선 왜 온 거지?”
“보나 마나 뻔하지. 전쟁을 종결하고 싶은 게지. 이미 본국의 군대는 구 율리안 영토에서 철수했으니까. 이제 제국은 신명대국을 노릴걸세.”
“빌어먹을 에드먼 놈들, 아주 욕심만 가득 찼어. 하긴, 신명대국이 이제 에드먼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커 버렸으니.”
“말 잘못했네. 내가 보기엔 지금의 신명대국은 에드먼 제국보다 세력이 월등히 커. 에드먼으로서는 다급할 뿐이겠지.”
병사들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페를리우스 공작은 왕성에 도착하여 접견실로 향했다. 페의 국왕은 페를리우스 공작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적국의 사자는 무슨 일로 왔는가?”
“이것은 폐하께서 보내신 화친 선물입니다, 전하.”
페를리우스가 뒤쪽으로 눈치를 보냈다.
에드먼에서 따라온 시종이 작은 상자 하나를 앞으로 가져왔다. 그 속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값진 예술품 하나가 들어 있었다. 페를리우스는 상자 속의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페를리우스가 상자를 받아 열려고 할 때 페국의 왕이 이를 저지했다.
“됐다. 보기도 싫다. 그만 가져가라. 공작, 무슨 일로 왔는지만 말하라.”
페의 국왕이 뇌까렸다.
페를리우스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입을 열었다.
“현재 페국과 제국은 전쟁 중입니다. 승패가 확실히 갈라진 이 시점에서 더 이상의 전쟁을 지속한다는 건 양국에 피해만 올 뿐입니다. 그래서 이만 전쟁을 끝내고 화친조약을 맺고 싶어 이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크큭!”
국왕이 코웃음을 쳤다. 페를리우스의 말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제국이 구 율리안 영토에서의 전쟁에서 완벽히 승리했으니 이만 접고 물러나라, 이 뜻이렷다?
“화친조약이라고 했는가? 본국은 아직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곧 본국의 전력을 보여 줄 테니 공작은 자국으로 돌아가 이에 대비하도록 간언하는 게 충신으로서 해야 할 일이다.”
“전하, 이미 승패가 나지 않았습니까? 이번 조약에 응해 주신다면 한 가지는 확실히 약조해 드릴 수 있습니다.”
“뭐지?”
“신명국은 구 율리안 영토의 서쪽 지역을 평동이라 명하고 자국령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신명대국에서는 구 율리안 영토를 차지할 명분이 없습니다. 단순히 점령할 뿐이지요. 제국은 다릅니다. 제국의 기사 판 경은 율리안 백성들의 영웅으로서 율리안 백성들은 모두 그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땠다는 것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게.”
“전하의 나라와 화친조약을 맺어 평동을 같이 점령할 경우 그 반절을 페국의 영토로 인정하겠습니다. 병사는 모두 제국에서 증원하겠습니다. 대신 페국에서는 간단한 원조식량과 병기들을 보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쯤이면 페국에게도 결코 손해가 되는 조약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전하.”
가만 듣고 보니 쏠쏠한 제안이기도 하다. 곧 신명국에서 들어올 원조물품들을 에드먼 제국 쪽으로 돌리면 페국으로서는 손톱만큼의 손해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신뢰였다. 이미 신명대국과 나라와 나라간의 약속을 했고 에드먼 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였다.
국왕은 생각을 마쳤다.
“그건 제국의 일방적인 제안이고, 짐의 제안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무엇입니까, 전하?”
“에드먼에서 평동을 공격할 때 짐이 원조를 하겠다. 허나, 그전에 현재 에드먼에서 점령하고 있는, 본국이 진출했던 영토들을 돌려주고 군사를 철수한다는 조건에서다.”
“하하, 전하.”
페를리우스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로 먹으려는 국왕의 심보가 보였기 때문이다.
“전하, 결코 에드먼 폐하께서는 응하지 않을 제안이시란 걸 아시잖습니까? 제국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페국의 앞날에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해가 될 제안은 아닙니다.”
페를리우스는 자신만만했다. 페국에서 하는 수 없이 제안에 승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신명대국이다.
페를리우스는 신명대국과 페국 간에 서로 조약이 맺어진 것을 조금도 몰랐다.
페를리우스 공작은 국왕의 표정을 살폈다. 그제야 일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공작이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국왕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 말은 곧! 본국에서 빼앗아간 영토를 돌려주지 못하겠다는 말이로군. 그렇지 않은가, 공작?”
‘아……!’
완전히 알았다. 자신만만한 국왕의 집게손가락이 페를리우스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페를리우스는 이번 화친제약 건이 성사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전하. 제국에서 제안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페를리우스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렇다면 됐다. 이만 돌아가라, 공작. 짐은 제국과 화친을 맺을 생각이 없다. 이 전쟁은 계속될 것이며, 비록 과거엔 제국에 연패했을지 모르나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 연패할 곳은 본국이 아니라 제국이니 공작은 짐의 말을 에드먼 황제에게 전하라.”
상황이 달라졌다?
페를리우스의 가슴에는 더 큰 의문이 자리 잡았다.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차차 시간이 지나가면 알게 될 것이니 공작은 썩 돌아가라 했다! 여봐라, 공작이 이만 돌아간다고 하니 국경까지 배웅토록 하라.”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안으로 달려들었다. 페를리우스의 팔을 붙잡고 어깨를 들어 올렸다.
페를리우스는 고개 돌려 국왕을 곁눈으로 보았다. 국왕의 입꼬리에 걸린 자신만만한 미소가 그의 망막에 맺혔다.
“이거 놔라! 감히……! 내 발로 나갈 것이니라.”
페를리우스가 거칠게 팔을 휘저으며 병사들을 떨쳐냈다. 그는 기분이 무척 상해 앞으로 휙휙 걸어갔다.
“대체 무엇이 저 소심한 왕을 대담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구나. 감히 본국의 화친제약을 거절하고 나를 내쫓다니.”
페를리우스는 페국을 빠져나와 올드얼로 향했다. 올드얼에서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에드먼 제국의 사자 페를리우스를 맞이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올드얼의 국왕이 병상에 누워 사자인 페를리우스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페를리우스는 몇 번이나 접견을 요청했지만 접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병상에서 일어날 그날까지 왕성에 머물며 기다리기로 했다.
대신들의 눈빛이 뭔가 다르다.
제국의 공작!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경외심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들이었으나 이제는 눈과 눈을 직시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페를리우스의 눈에 핏발이 서기에 이르렀다.
기다린 지 열흘째가 되던 날 페를리우스는 참지 못하고 본성으로 향했다.
“어서 썩 문을 열어라!”
페를리우스의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행패이십니까, 공작님.”
대집정관이 페를리우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당장 국왕전하를 뵈어야 할 일이 있으니 당장 문을 열어라.”
“지금 전하께서는 매우 편찮으시어 누구를 만나실 수 없으실 정도입니다.”
“헌데 오늘 아침에 조회를 열지 않으셨더냐.”
“매우 긴급한 일이 있어 조회를 여신 것뿐입니다. 다시 병상에 누워 계십니다.”
“지금 대제국의 사신이 긴급한 일로 전하를 뵙고자 하는데 이 일보다 더 긴급한 일이 있단 말인가? 대 에드먼 제국과의 관계를 전혀 생각지도 않는단 말인가? 집정관, 공작인 내가 외성에서 10일을 기다렸다.”
페를리우스는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분출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올드얼의 국왕은 분명 자신을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병상이라는 이유로.
“국왕전하의 병이 더욱 깊어지시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더욱 깊어지셨는데 오늘 아침에 조회를 여셨단 말이더냐? 믿을 수 없다. 지금 나를 피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토록 대제국의 공작이자 사자로 파견된 나를 기만하고도 올드얼과 제국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페를리우스는 강하게 나왔다. 그러자 대집정관이 말을 떨었다.
“고 공작님!”
페를리우스는 올드얼에서 빠져나오며 일이 잘못 돌아가도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페국과 올드얼이 제국에 이렇게 나올 수는 없다.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한다.
다음 행선지는 뉴얼국이었다.
뉴얼국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백성들은 축제로 들떠 있었는데, 그 이유인즉 공주와 신명대국 공작과의 결혼 때문이었다.
페를리우스는 그 소식을 듣고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결혼이라니? 신명국의 공작 매화일검과 뉴얼국의 레일리아 공주가 결혼을 했다고?’
“당했다.”
페를리우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즉시 뉴얼 국왕을 만났다.
“전하, 공주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오나 제국에 알리지 않은 점 무척 섭섭합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제국에까지 알린단 말인가. 헌데, 무슨 일로 왔는가?”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앞날을 대제국과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돌려서 말하는군.”
뉴얼 국왕은 냉소적으로 답했다.
“……!”
“신명국과의 관계를 끊고 그 세를 약화시키자는 담합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너무 늦게 왔다, 공작. 이미 본국의 3공주가 신명국의 공작과 결혼을 했다. 짐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공주가 지금 신명국에 가 있다는 말이다. 날로 번창하는 신명국의 세가 걱정되기는 하나 공주가 신명국에 있는 이상 본국으로서는 에드먼과 어떠한 협약도 맺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공작은 익히 알 것이다.”
뉴얼 국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를 위해 대를 버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작!”
뉴얼 국왕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짐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공주를 작은 거라고 말했는가?”
“그것이 아니오라, 저는 대륙의 앞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짐에게 있어 대륙의 앞날보다도 소중한 건 공주다. 이쯤하면 짐의 입장을 알 것이다.”
“구 율리안 지역의 반절을 뉴얼국에 드릴 수도 있습니다.”
페를리우스가 말했다.
“공주가 결혼하기 전이라면 흔쾌히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너무 늦었다고 다시 말해야 하겠는가?”
“아닙니다. 잘 알겠습니다.”
페를리우스의 말에는 독심(毒心)이 깃들어 있었다. 페국, 올드얼, 뉴얼 등 속국이었던 조그마한 세 나라가 이제는 제국을 무시하고 있다. 그 뒤에는 분명 신명국이 있을 터!
페를리우스는 이를 갈았다.
“어쩌면 뉴얼국은 대제국과 적국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공작,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는가. 공작의 기분을 이해하니 본성에 머물면서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스리는 게 어떻겠는가?”
“크큭!”
페를리우스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신명국과 담합을 마친 상태이면서 말은 잘도 하는구나. 좋다, 신명국을 없애기 전에 우선 속국이었던 이 작은 세 나라부터 벌해 제국의 위엄을 만천하에 다시 알려야겠다.’
“뉴얼 국왕전하의 대답을 에드먼 폐하께 잘 전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페를리우스는 말을 톡 쏘고선 몸을 돌렸다. 제국의 공작이 감정이 매우 상해 성에서 나가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페를리우스는 바로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세 속국들에 잠입해 있던 첩자들을 한 명씩 불러들였다.
첩자들에게 물었다. 최근 신명국의 사람이 온 적이 있느냐고.
첩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하길 ‘신명국의 공작 매화일검이 다녀왔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지는 왕과 독대를 했기에 그 두 사람만이 알 뿐입니다’라고 했다.
페를리우스는 조용한 곳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대신 걱정이 가슴을 채웠다.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신명국이 이미 율리안의 세 속국에 손을 써 놓은 듯하다. 과연 에드먼의 미래는…….
“내 임무는 실패했다. 무슨 낯으로 황제폐하를 뵐 수 있을지…… 후우!”
담배연기처럼 길게 뿜어져 나온 한숨이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매우 무거웠다.
투두둑
갑자기 페를리우스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검은 먹구름으로 덮여 하늘은 온통 어두웠다.
‘하늘이 꼭 내 마음 같구나.’
페를리우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