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64
제2화 미션 임파서블
커튼 사이로 한줄기 들어온 햇빛이 우연찮게도 주첨기의 눈 위로 내리쬐었다. 주첨기는 실로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자고 일어났다.
혜공의 성화만 없었다면 더욱 좋은 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매화일검의 결혼으로 성내 분위기가 매우 밝아져 있었다. 아름다운 부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 시녀들과 시종들 또한 표정들이 밝다.
주첨기는 대신들과 함께 친히 매화일검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니?”
주첨기는 매화일검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양 뺨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며 어느새 코피까지 한줄기 흐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공작?”
주첨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옆에서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수라혈마가 이를 드러내고 키득거렸다.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폐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이십니까?”
“지난 3일간 공작이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이리 왔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때 수라혈마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키키킬! 제자야, 걱정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공작이 3일 밤낮 동안 허리를 움직이느라 기가 많이 쇠해 있을 터이다.”
“허리를?”
주첨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드는 생각 있는지 갑작스레 헛기침을 했다.
수라혈마가 뒤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시종들이 거대한 항아리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주첨기와 매화일검의 시선이 항아리에 꽂혔다.
“정력에 좋다는 뱀술이다. 본좌가 직접 영기가 서려 있는 뱀들을 잡아 담아온 것이다. 낄낄낄, 아마 오늘밤에도 무리 없이 허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수라혈마가 허리를 움직이는 시늉을 하자,
“감사합니다, 전하.”
매화일검은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열어 보지 않고.”
주첨기가 말했다.
매화일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후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화끈한 고량주 냄새가 풍겨왔다. 항아리 안을 들여다본 매화일검은 그만 ‘허!’하고 탄식음을 내뱉었다.
당황한 매화일검의 표정을 본 수라혈마와 주첨기가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첨기와 수라혈마도 매화일검과 같은 반응이었다. 항아리 안에서 매우 익숙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우끼!] [끼끼.]설령과 아기설령들이 깊은 항아리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많던 항아리 안의 뱀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끼!]설령이 위로 튀어 올라 주첨기의 어깨 위에 앉았다. 지독한 술 냄새가 설령의 몸에서 풍겨 나왔다. 주첨기가 설령의 몸에 손을 살짝 대니 뱀술로 추정되는 액체들이 몸에서 비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엥? 이놈들이 술도 먹을 줄 아는가?”
수라혈마는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어떻게 들어갔느냐.”
수라혈마는 중얼거리며 항아리 안의 아기설령들을 꺼내 주었다. 아기설령도 설령과 마찬가지였다. 손에 닿자마자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뱀술!
수라혈마는 아기설령 한 마리씩을 항아리 입구로 가져가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끼…….]줄줄줄
아기설령들의 몸에 흡수되었던 뱀술이 항아리에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
주첨기 또한 설령의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레 쥐었다.
어느덧 항아리 안에 절반이나 뱀술로 가득 찼다. 그만한 양을 이 조그만 것들이 어떻게 흡수하고 있었는지 매우 황당한 일이었다.
수라혈마는 설령과 아기설령들의 몸에서 빼낸 뱀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어라?”
최고의 맛이었다. 보주(寶酒)라 일컬어지는 진귀한 술을 많이 마셔 봤다. 그중 단연 으뜸은 지금 마신 이 ‘만년설삼이 빠진 뱀술’이었다.
“제자야, 이것 봐라. 완전히 보주를 뛰어넘어 영주(靈酒)가 되었다.”
수라혈마가 낄낄거렸다.
주첨기도 한 모금 마셔 보니 머리가 상쾌해지고 몸 안에 따뜻한 기운이 도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주첨기는 설령을 바라보았다. 영물들도 술에 취하는지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자신의 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기분 좋은 작은 목소리로 ‘우낏’하는 소리만 들렸다.
아기설령들도 수라혈마의 손 위에서 춤을 추듯 흐느적거렸다.
주첨기와 수라혈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술의 명칭을 설삼사영주(雪蔘蛇靈酒)라고 해야겠구나, 낄낄. 매화일검, 이 영주를 마시고 걸출한 네쌍둥이를 낳아라. 낄낄낄!”
“좋아 보여서 다행이군. 짐은 이만 가겠네. 신혼집에 오래 있을 정도로 짐은 넉살이 좋지 못하니…….”
“아니옵니다, 폐하.”
매화일검이 정색했다.
주첨기는 그저 웃으며 저택에서 나와 황성으로 들어갔다. 사실 매화일검을 찾아간 것은 한 가지 명을 내리기 위해서였는데 신혼인 것을 보니 가슴이 뜨끔했다.
주첨기는 천지시당주 계주를 불러들였다. 이미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신 계주 대령했습니다.”
주첨기는 계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때가 왔다. 매화일검이 모든 약소국들에게 ‘반(反) 에드먼 조약’을 이끌어냈으니 이제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가 온 것이다.
에드먼으로 통하는 모든 교역로를 막는다.
비록 식량은 자급자족할 수 있을지 모르나 사치품이나 여가용품 등 보조물품들은 전혀 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보조물품들이 오가지 않는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을까마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에드먼의 대신들과 백성들은 대륙 전체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는 점에 있다.
주첨기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
심리적 압박이다.
에드먼은 혼란에 빠질뿐더러 전 대륙의 적이 되는 것이다.
“각 나라에 전하라. 본국과 언약했던 바를 오늘부터 정확히 50일 후에 이행토록 할 것이며, 이 일은 언약 이행일이 오기 전까지 은밀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 폐하.”
계주가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주첨기는 창가로 다가갔다. 계주가 황급히 말을 몰고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말에 달린 등불이 유유히 멀어졌다.
‘곧 평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겠지. 이제 시작이다. 통일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주첨기는 등불을 보며 생각했다.
찌륵찌륵!
밤새만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는 듯 울음을 토해내며 계주의 말이 사라진 쪽으로 날아갔다.
페를리우스 공작은 근신을 면치 못했다.
“크으…….”
페를리우스 공작에게 매우 작은 징벌을 내려놓고도 에드먼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임무를 실패한 건 페를리우스 공작만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신명대국에서 기거했던 제이너스 왕자가 이터널국의 왕이 되어 반 에드먼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구 로스엔의 속국이었던 세 나라는 신명국과 형제국의 연을 맺었다.
페를리우스 공작의 말에 따르면 구 율리안의 세 속국 또한 신명대국과 밀담을 주고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신명국을 대륙에서 고립시키겠다는 계획이 반대로 에드먼이 먼저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혹시…… 마거크국과 브디스국도?”
에드먼의 속국인 두 나라도 신명국과 관계가 되어 있을까?
그러나 한순간일 뿐, 의심은 곧 사라졌다. 그 두 나라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속국인 곳이다. 만약 신명국과 밀담을 나눴다면 에드먼에게는 그 두 나라를 당장이라도 정벌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 있다.
“흐음…….”
에드먼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에드먼은 대마법사 이제이에게 물었다.
“그대가 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이제이가 대답했다.
“짐답지 않다고?”
“저는 결코 폐하가 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선 과감한 결단력으로 언제나 자신 있게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에드먼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폐하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어 폐하다우신 현명하고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짐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페, 올드, 뉴얼 이 세 나라가 신명대국과 밀약을 맺었을지도 모르고, 이터널은 이미 신명국의 속국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너무나 답답하다.”
“폐하…….”
이제이는 눈을 흘겼다. 에드먼 폐하가 최근 들어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았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쾅!
갑자기 에드먼 황제가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그대의 말이 맞다. 신명국에 더 많은 첩자를 잠입시켜라. 본성보다도 평동성을 중점으로 한다. 우선적으로 평동지역을 점령해야 하니까.”
억지로 힘을 내어 말했다.
“예, 폐하!”
이제이는 50일에 걸쳐 첩자를 신명대국의 평동을 중점으로 잠입시키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그가 직접 노력을 들였다.
50일째 되던 날, 공작 페를리우스도 근신에서 풀려 조회에 나올 수 있었다. 페를리우스는 살이 많이 빠져 야위어 보였다. 조회는 여느 날처럼 평범했다.
에드먼 자국 내의 경제와 문화 그리고 각지에서 날아온 중요한 사항들을 처리하고, 지금껏 진행되고 있는 구 율리안 지역에서 페국과의 전쟁에 대한 일들을 다루었다.
“대체 페국은 어디에서 그 많은 전쟁물자들을 가져온단 말인가?”
에드먼은 수백일 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끊이지 않는 페국의 전쟁물자들을 확인했다. 그 때문에 구 율리안 지역에서 페국을 완벽히 몰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도시 하나를 가지고 뺏고 뺏기기를 반복했다.
“확인되지 않은 바이오나 신명국이 관계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폐하.”
대신 중 한 명이 말했다.
“확인되지 않은 바이오나? 지금 짐이 그대의 추측을 듣고 싶어 하는 줄 아는가? 짐은 추측이 아닌 사실을 듣고 싶다. 조회는 이것으로 끝났다.”
최근 들어 감정이 격해져 있는 에드먼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후문으로 나가 버렸다.
대마법사 이제이와 공작 페를리우스가 그 뒤를 급히 따라갔다.
“신명국이 너무 조용해. 페국은 전쟁 중이라 치고 뉴얼국과 올드얼국은 어떤가, 이제이?”
에드먼 황제는 불길하다는 듯이 뇌까렸다.
“폐하, 최근 들어 뉴얼국과 올드얼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니?”
“뉴얼국과 올드얼국의 왕성 상인단이 10일 전부터 제국에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왕래가 없다?”
“그렇다고 제국상인들을 막는 것도 아닙니다.”
“흠…….”
에드먼은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주변상황이 너무나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최근 들어 발 뻗고 잔 적이 없는 그였다.
“그렇다면 조공은 어떻게 됐는가?”
잠시 시선을 제국의 속국인 마거크와 브디스로 돌렸다. 에드먼은 제이너스가 왕으로 있는 이터널을 더 이상 속국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사절단을 보냈다는 연락은 왔는가?”
“오지 않았습니다.”
“늦어지고 있는 이유를 가지고 온 사자는 왔는가?”
에드먼 황제가 다급하게 물었다.
“오지 않았습니다.”
냉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 왜 이제야 눈치챈 걸까?
페를리우스와 이제이 그리고 에드먼 황제까지도 눈이 번뜩 떠졌다.
“올드얼국과 뉴얼국이라면 몰라도 브디스와 마거크는 상국인 본국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페를리우스가 말했다.
“지난 수백 년간 브디스와 마거크에서 조공을 늦은 일이 없거니와 당일 도착하더라도 며칠 전부터 사절단을 보냈다. 헌데, 마치 밀약이라도 한 듯 같이 조공을 보내지 아니했으며, 올드얼과 뉴얼도 본국으로 교역을 하러 오지 않고 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공작과 대마법사는 당장 이 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라!”
에드먼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즉시 이제이와 페를리우스는 조사하러 나갔다. 적어도 여러 날이 걸려야 할 조사였으나 둘은 그날 저녁 같은 시각에 들어왔다.
둘은 여러모로 같았다. 표정과 발걸음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도…….
“폐하!”
페를리우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에드먼 황제도 둘의 표정을 보고 결코 좋지 못한 일이란 걸 눈치챘다.
“둘이 이렇게 빨리 온 것은 분명 다급한 일인 터, 돌려서 말하지 말라.”
짧게 말했다.
“폐, 폐하!”
페를리우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 황제폐하의 기분이 얼마나 상할지 잘 아는 그였다.
더군다나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된 것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크기 때문이다.
페를리우스는 죄책감에 물든 표정을 지었다. 에드먼 황제의 따끔한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뉴얼과 올드얼에서 제국상인들의 입국을 막고 있습니다. 이에 사자를 보냈으나 바로 국경에서 쫓겨났습니다.”
“뭣이라?”
추측하고 있던 일이라 해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사자들까지 쫓아내다니, 감히! 대제국을 무엇으로 보고 그런단 말이냐.”
에드먼 황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팔은 물론 몸 전체까지 부르르 떨렸다.
“그,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구 로스엔의 속국 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드먼 황제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엔 대마법사 이제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이, 그대는 어떤 소식으로 짐을 놀래려 하는가?”
“폐하…….”
이제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국의 속국인 마거크와 브디스도 상인들을 가로막고 사자들을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에드먼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바로 내일 신명국에서 10국과 반 에드먼 동맹을 체결하고, 제국을 ‘대륙의 적’으로 공표한다는 소식이 첩자로부터 들려왔습니다.”
“뭣이랏!”
삐이
에드먼 황제는 머릿속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눈앞을 지독한 어둠이 가로막고 습습하고 기분 나쁜 것들이 귀와 콧구멍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보였다.
“커커…….”
뒤통수가 당겼다. 지끈거렸다.
에드먼 황제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차분한 사람이라 해도 매우 분개할 일이거늘 다혈질인 에드먼이 오죽하겠는가?
“폐, 폐하! 여봐라, 어의를 들라 하라!”
페를리우스가 방 밖으로 크게 외쳤다.
“……됐다.”
에드먼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자세를 바로잡았다.
“출진준비를 하라.”
에드먼은 다소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
“출진준비라니요? 폐하, 진정하셔야 합니다.”
이제이는 당황했다.
“신명국이 음계를 꾸며 작은 나라들이 대제국을 적으로 돌렸다 하나 제국의 위엄엔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평동점령은 꾸준히 계획하고 있던 바다. 평동을 점령하는 즉시 신명국 본토를 친 후 제국을 적으로 돌린 어리석은 나라들을 징벌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남진 중인 기사 판과 제논 공작을 불러라. 그 둘을 평동정벌군의 대장군으로 재임명하여 짐을 기만한 신명국에 짐의 무서움을 알리라.”
에드먼 병사 10만이 한곳에 운집했다. 한 번씩만 발을 굴러도 대지가 울리는 착각이 들 정도다.
판과 제논 공작은 페국과의 전쟁 중에 황제의 명을 받고 수도로 불려왔다.
“하아!”
판은 자신이 이끌 병사들의 수를 보고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 병사들로 신명국 평동지역을 공격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더욱 숨이 막혔다. 신명국 검사들의 강력함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로스엔 수십만 대군이 바로 신명국 황제 주첨기 1인에 의해서 무너졌다. 황제 주첨기를 따르는 400명의 고수와 2왕의 강함 또한 천지가 다 안다.
“왜 겁이 나는가?”
제논 공작이 물었다.
“겁이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판은 어깨를 으쓱했다.
“신명국이 강한 상대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륙의 패권을 수백 년 동안 움켜쥔 제국의 저력은 만만치 않다, 판.”
“예, 공작님. 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양국의 전면전입니다.”
제논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전쟁은 구 율리안 지역에서 벌어질 것이다. 양국 모두 아직은 전면전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모르더냐?”
“하지만 폐하께서 그렇게 단호한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언제나 폐하의 옆에 있던 나다. 폐하께선 양패구상을 제일 싫어하시지. 신명국의 평원을 점령할 확신이 있을 때만 전면전을 명하실 것이다. 그땐 폐하께서 승리를 확신하신 것이니 신하된 도리로써 명을 받들면 되는 것뿐이다, 판.”
“예, 공작님.”
판과 제논 공작은 군사들을 정비했다.
율리안 마계대전과 페국전쟁을 경험한 판은 어느새 장군으로서 거듭나 있었다. 병사들 사이로 말을 타고 뛰어다니며 큰소리로 외쳤다.
“전군, 열을 갖춰라!”
모든 출병준비가 끝났다.
총 10만!
5만 명씩 나눠 두 개의 단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다시 5천 명씩 나누어 20부대를 만들었다. 제1군단을 제논 공작이, 제2군단을 판이 통솔하여 평동의 주요지점들을 공략한다.
“진군하라!”
판이 신검을 빼 들며 외쳤다. 칼끝에서 한줄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간 빛은 넓게 퍼져 사방을 환하게 했다.
“와아아아―!”
신명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을 모두 알고 있을 텐데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그만큼 에드먼은 병사들의 훈련을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페국과의 전쟁은 후자로 밀려났다. 사실 그쪽은 페국이 패전을 인정하는 일만 남았다. 신명국에서 전쟁물자를 대주는 것으로 추측하건대, 그 전쟁물자로 간간히 페국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 게다.
다다닥 다다닥
기마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선두로 나섰다. 그 뒤를 보병들과 식량을 실은 수레들이 잇따르며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국경 근처에서 판과 제논 공작은 헤어졌다. 판은 10부대를 맡을 부대장들을 임명하고 그중 한 부대는 자신을 따르게 했다. 판의 목적지는 평동의 식량저장고가 있는 ‘엘즈’라는 도시였다.
신명국은 에드먼 10만 대군이 평동지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 주첨기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에드먼 황제가 평동지방을 예전부터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도 벌어질 것이란 것도 추측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주첨기는 대비하고 있었다. 그도 본토 대 본토의 전면전을 원하는 게 아닌지라 평서왕군 3만을 평동지방으로 보냈다.
평동왕 수라혈마는 황도에서 온 병사들을 요충지로 보냈다. 고수들은 이미 각 주요지역을 맡고 있다.
에드먼에서 병사들이 내려오는 사이 신명국에서도 전쟁준비가 끝난 것이다.
“에드먼군이 코앞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모두 준비되었는가?”
사사혈겸은 도시 엘즈를 맡고 있었다.
“예!”
천여 명이 약간 넘는 병사지만 목소리 하나만큼은 우렁찼다.
농성은 사사혈겸의 성격상 맞지 않는다. 성벽에 약간의 보초를 세웠다. 그리고 언제든 돌격할 수 있게끔 성문 뒤로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에드먼 군사들이 보입니다.”
보초가 외쳤다.
사사혈겸, 그는 황도에서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부터 근처에 함정을 파두었다. 무엇보다도 평동 전체에 식량을 공급할 식량저장소 근처에는 병사들을 몇 갑절 더 세웠다.
기관까지 설치해두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사사혈겸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적군은 쉬지 않고 오는 중이라 많이 지쳐 있다. 단숨에 때려눕힌다!”
사사혈겸이 살기를 터트렸다. 동시에 성문이 활짝 열렸다. 도시 엘즈 안에서 사사혈겸이 이끄는 병사 천여 명이 앞으로 내달렸다.
“돌격!”
사사혈겸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진을 꾸리던 에드먼 병사들도 급히 병기를 빼 들고 방어진형을 짰다. 판은 누구보다도 먼저 신검을 빼 들고 사사혈겸을 상대했다.
신검의 위력은 대단하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화염이 쏟아지고 냉기가 나오며 지면이 갈라졌다.
“그대의 이름은?”
판이 물었다.
“사사혈겸! 너는?”
“판!”
짧게 대답을 마친 둘은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맞부딪친 두 자루의 검!
강렬한 열기가 터져 나왔다.
서로를 향한 눈빛은 그 열기만큼 이글거렸다.
뒤룩뒤룩
소리가 날 정도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그의 이름은 칼테란츠.
어렸을 적부터 눈치가 빠르고 운동신경이 좋아 군대에서도 ‘특수병사’로 차출되었다.
에드먼 제국의 특수병사 중에서도 그 능력이 출중하기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이번에 명받은 임무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평동의 식량저장고를 파괴하라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평동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평동의 식량저장고를 파괴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과거 이터널에서 어쌔신으로 활동했던 그는 은신도 자신이 있었다.
언제나 그가 내세워서 말하길 누구도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임무는 신명국에서 이루어진다. 신명국의 검사들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소문만으로도 위압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흠……!”
칼테란츠는 턱을 쓰다듬었다. 턱수염의 까칠한 감촉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비록 신명국의 검사들 때문에 걱정은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게 아니다. 다름 아닌 신명국에 잠입해 있는 첩자들이 보내온 정보들 때문이다.
평동의 식량저장고를 지키는 고수의 신상명세와 행동거지. 예를 들면 언제 밥을 먹고 언제 저장고 주위를 도는지까지 담겨져 있었다.
고수의 신상명세와 행동거지는 첩자들이 넘겨온 정보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흠…….”
칼테란츠는 버릇인 듯 턱을 쓰다듬으며 정보를 훑었다.
“신명국 평동의 치안은 엉망이라더니 제법 정교하잖아. 그동안 좀 개선된 건가?”
칼테란츠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중요한 정보들을 빠짐없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는 것이 무수히 많은 임무에서 살아남은 비결 중 하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게 번뜩였다. 칼테란츠는 페를리우스 공작을 접견했다.
“이번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 것이다. 제국에 영광을 가져오도록.”
칼테란츠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다른 특수병사들이 검은색 은신복을 좋아하는 것과 달리 평범한 농민복을 선호했다. 검은색 은신복이 은신을 하기에 더 좋을지 모르나 만에 하나 퇴각까지 생각한다면 평범한 것이 최고다.
농민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진흙까지 묻히니 영락없는 농부였다.
잘 갈린 단검 한 자루를 부츠 뒤쪽에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평동에 관한 정보를 훑은 후 불태웠다.
칼테란츠는 평동의 국경으로 향하면서 전쟁에 대한 많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이 이번에 제국군이 어디를 공격했네, 신명국이 또다시 방어했네, 신명국의 북진 낌새가 보인다네 하는 정도였다.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칼테란츠는 신명국 군사들과 대치중인 진영으로 들어갔다.
“넘버 103, 칼테란츠입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판이 말했다.
평동 정벌군의 대장군으로 임명된 그는 최근 1년 사이 몰라볼 정도로 눈빛이 단단해져 있었다.
“임무는 알고 있습니까?”
“예, 판 경.”
판은 지도를 펼쳤다.
칼테란츠가 지도를 훑어보니 자신이 기억해둔 임무지형과 일치했다.
“그대의 능력을 간과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도를 다시 한 번 봐 주십시오. 그만큼 중요한 임무니까 말입니다. 함정 등에 대한 정보를 들으셨습니까?”
“예.”
칼테란츠는 짧고 절도 있게 대답했다.
“오늘밤입니다.”
“예.”
칼테란츠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사이 판은 군사를 이끌고 신명국 군사들과 한 차례 전투를 벌였다.
평동 각지에서 하루에만도 수차례 벌어지는 게릴라성 전투인지라 이곳에만 신명국 검사들이 집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에드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판은 신검의 위력으로 신명국 검사 한두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신검!
신명국 검사가 이끄는 병사들에게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판은 오후 늦게야 피와 땀에 젖어 돌아왔다.
이번 전투도 지금까지의 전투와 같았다. 어느 쪽도 승리하지 않았다. 애꿎은 병사들만 희생되었다.
아직 씻지도 않은 판을 칼테란츠가 찾아왔다.
“이번 전투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대의 임무가 성공해야만 이 지역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예, 기필코 성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칼테란츠는 믿음직스러웠다. 어투와 눈빛에서 불안감을 읽을 수 없었다.
칼테란츠는 에드먼 진영에서 나왔다. 그리고 기억해둔 정보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신명국 진영 안으로 잠입하는 게 우선이다. 진영은 철저하게 경비를 서고 있어 들어갈 틈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
바로 첩자의 정보다. 첩자가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신명국에서 제국의 진영을 암습하기 위해 파 놓은 땅굴이 있다고 했지? 그 암습일이 내일…… 이미 땅굴은 완성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땅굴을 지키는 이가 셋이 있으나 셋 모두 밤이 되면 잠에 곯아떨어진다고? 바로 그곳이다.’
칼테란츠는 고양이처럼 땅굴 입구로 잠입했다. 에드먼 진영 쪽으로 가깝게 파여 있는 땅굴은 정보대로 수풀로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칼테란츠는 수풀을 조심스레 치웠다.
‘헉!’
칼테란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땅굴 안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 한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칼테란츠는 그가 잘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되지 않아 병사는 졸기 시작했다.
‘정보는 확실하군.’
칼테란츠는 씨익 웃으며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칼테란츠가 옆을 지나치고 있어도 신명국 병사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혹 모를 일을 대비해 칼테란츠는 언제든 단검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사가 우연히 잠에서 깨어나 칼테란츠를 발견하면 그 즉시 단검은 그의 목에 박힐 것이다.
신명국 진영 안으로 통하는 입구에 달했다.
‘역시 자고 있군.’
두 명의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칼테란츠는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옆을 지나쳤다.
그때였다.
“으음…….”
한 병사가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칼테란츠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손목을 움직였다.
슈아아악
팍!
단검이 작렬했다. 어떤 곳을 맞혀야 소리 없이 죽이는지 칼테란츠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직접 실행하기에도 문제가 없었다.
단검은 병사가 정신이 들기도 전에 병사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선 은신하고 때를 기다린다.’
정보대로라면 새벽 1시가 넘을 무렵이 경비병들이 교대하는 시간이다.
칼테란츠는 땅굴 밖으로 나왔다. 처음부터 어디서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해두었다.
칼테란츠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바로 앞 천막 뒤.
수풀이 가려져 있어 매우 주의 깊게 보지 않는 이상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곳이다.
‘이번 첩자는 정보를 매우 잘 가져왔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일하기가 무척 수월해.’
칼테란츠는 호흡 또한 변환했다. 신명국 검사들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소 숨이 가쁘더라도 죽은 것과 가까운 호흡을 하는 게 좋다.
칼테란츠는 그렇게 때를 기다렸다. 수풀 사이로 언뜻 잡히는 시야에 교대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병사들의 모습이 잡혔다.
‘지금이다!’
스스슷
칼테란츠가 물 찬 제비처럼 내달렸다.
그러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림자 안에만 위치해 있어 어둠이 그를 가려 주었다.
식량저장고가 보인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평동 각지로 보낼 식량들이 저장된 곳. 가히 경비가 삼엄했다.
병사들의 교대시간이 되어도 식량저장고에 대한 경비는 철저하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보에 의하면 저장고를 지키는 병사의 수는 20명. 다섯 명씩 짝을 이뤄 사방을 지키고 있다. 사방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서쪽. 그쪽을 공략한다.’
칼테란츠는 행동으로 옮겼다.
서쪽까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그 후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조그마한 벌레 한 마리가 갇혀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조그마한 벌레지만 지니고 있는 독의 위력은 대단하여 물린 후 30분 만에 즉사에 이른다.
칼테란츠는 그것을 서쪽 경비병들을 향해 풀었다.
드드드
벌레는 서쪽 경비병들을 향해 기어갔다.
벌레가 경비병 다섯 명을 한 명씩 물었다.
이 벌레의 위력은 물려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벌레의 단점은 단 하나, 두 번 다시 쓰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이 죽여야 열 명?
그 이상은 과다섭취로 벌레 스스로 배가 터져 죽고 만다.
경비병들은 벌레에 물리고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여느 날과 같이 우뚝 서 있다 30분 후 절명했다.
‘이젠 시간의 승부다’
죽은 경비병들이 다른 병사들 눈에 띄기 전에 식량저장고를 파괴해야 한다.
칼테란츠는 서쪽 문으로 다가갔다. 막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첩자의 정보가 떠올랐다.
함정!
신명국 고수들은 그것을 기관이라고 불렀다. 일종의 트랩으로, 트랩보다 더욱 정교하다고 알고 있다.
칼테란츠는 기관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지면의 진동을 이용한 기관이다. 즉, 지면에 접촉이 없다면 기관이 발동될 일도 없다는 것이다.
칼테란츠는 천장 쪽으로 갈고리가 달린 로프를 날렸다.
쉭
갈고리가 천장의 지목대에 걸렸다.
칼테란츠는 로프를 타고 지목대 위로 올라갔다. 역시 기관은 발동되지 않았다.
식량들은 중앙에 모여 있으니 이제 그곳에 불을 지르는 일만 남았다.
대마법사 이제이가 직접 조제한 불의 시약을 꺼냈다.
‘성공 직전이다.’
칼테란츠는 시약 뚜껑을 열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아직 시약은 건제하다. 시약 뚜껑을 닫고 중앙 쪽으로 로프 하나를 이었다.
자폭할 생각이 아니니 시약이 터지기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로프에 시약을 매달고 식량 쪽으로 밀었다. 시약은 로프를 타고 식량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끝났다.’
예상 외로 쉬운 임무였다. 모두 첩자의 정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칼테란츠는 빠르게 움직였다. 자칫 조금만 늦으면 시약의 폭발 속에 휩쓸려 버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탁!
칼테란츠도 로프를 타고 다시 서쪽 문으로 내려왔다. 죽은 경비병 다섯은 여전히 땅에 쓰러져 있었다.
땅굴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왜 아직도 폭발하지 않는 거지?’
칼테란츠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쯤이면 시약이 식량에 닿아 폭발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너무나 조용하기만 하다.
‘실패?’
칼테란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시약은 대마법사 이제이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라 불발할 일이 없다. 어떻게 된 것이지? 큭, 설마 실패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순 없다. 다음을 노리는 수밖에.’
칼테란츠가 땅굴 입구를 가린 수풀을 치워냈다.
그때였다.
탓!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고개 숙인 칼테란츠의 머리 위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칼테란츠는 눈을 위로 올렸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머리 위에서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터졌다. 한 남자가 칼테란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길.”
들켰다!
칼테란츠는 반사적으로 단검을 날렸다. 그러나 남자는 집게와 엄지로 단검을 잡았다.
‘신명국의 검사! 이곳을 맡고 있는 사사혈겸?’
칼테란츠는 흑색 구를 바닥으로 던졌다. 흑색 구가 터지며 붉은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그사이 칼테란츠는 땅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어딜!”
사사혈겸이 뛰어내리려는 칼테란츠의 목덜미를 잡고 위로 던졌다.
칼테란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병사들을 죽이고 저장고를 파괴하려고 해? 네놈을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문으로 모든 걸 불게 만들어 주마.”
사사혈겸이 칼테란츠의 목에 대겸을 댔다.
칼테란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많은 임무를 완수했던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그래도 특수병사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해야겠지. 잡히면 자결한다.’
칼테란츠는 스스로 대겸의 날 위에서 목을 비틀었다. 핏줄기 하나가 터져 나왔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런 미친놈!”
사사혈겸이 칼테란츠의 맥을 짚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크으…….”
사사혈겸은 죽어 버린 칼테란츠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사사혈겸이 식량저장고 파괴를 막은 것은 천운과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배가 아프지 않았다면? 뒷간을 찾아 저장고 서문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사사혈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잠입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