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65
제3화 신명국의 이간계(離間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평동과 달리 신명국의 본토, 드래곤의 평원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다.
평동에서 에드먼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에 백성들이 다소 불안해하는 듯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활력을 되찾았고, 스스로 병사가 되겠다며 찾아오는 자들도 많았다.
“흠…….”
주첨기는 평동 각지에서 날아온 서류들을 읽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특이하다. 평동에서만 벌어지는 전쟁일 뿐 그 이상 확대되길 양국 모두 바라고 있지 않다.
확대되지 않도록 전쟁을 조절하는 일도 제법 어렵다. 너무 많이 이겨서도 안 되고, 너무 많이 패해서도 안 된다.
평동에서의 전쟁은 주첨기의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서류들을 처리하면서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을 발견했다. 평동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에드먼 제국의 공작(工作)이 그것이다.
식량저장고와 병참 그리고 성벽 파괴, 선동 등 종류도 다항하다. 그것들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평동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평민들이 알 수 없는 사실까지 말이다.
일례로 도시 저장고가 있는 엘즈만 봐도 그렇다. 엘즈로 잠입한 첩자는 땅굴의 위치는 물론 교대시간 그리고 일부 간부들만이 알고 있는 기관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었다.
“첩자라…….”
분명히 평동 각지에 첩자가 심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평동은 황성 본토와는 다르게 치안이 어지러워 첩자가 잠입하기에 좋다. 그리고 어쩌면 황성에도 첩자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럼 언제부터 첩자가 잠입했을까?’
주첨기는 골똘히 생각했다.
평동에는 특히나 수많은 첩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평동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만 해도 첩자들의 활동은 없었다. 있었다면 평동에서의 반란은 그때보다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국들과 밀약을 맺은 후부터이겠군.’
에드먼에서도 뭔가 낌새를 채고 첩자들을 적극적으로 심어 놓은 것일 게다.
주첨기는 입꼬리를 올렸다.
‘밀약을 맺은 것이 60일 전이니 그때부터 고위직으로 오른 이들을 조사해야겠군.’
“혜공 공.”
혜공은 주첨기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예, 폐하.”
혜공이 대답했다.
“천지시당주 계주를 들라 이르십시오.”
잠시 후 계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그대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 바로 첩자 건이다. 천지시당주로서 그대도 어느 정도는 알 터.”
계주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최근 평동으로 많은 인물들이 유입되었는데, 그중 신분이 불확실한 자들도 꽤 많이 있었다. 천지시당에서도 그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예, 폐하. 그렇잖아도 평동을 중점으로 그 점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수월해지겠군. 평동은 전시상황인데 한 명의 첩자가 100명의 병사를 죽이고 있다. 한 명 한 명 조사를 하는 것은 좋으나 전시상황이니 만큼 첩자들을 대규모로 파악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계주도 그 생각에 동조했다.
“물론 황성이나 평동에서 그 일이 어렵다는 것을 짐은 알고 있다. 황성 내 인물들에 대해선 철저히 조사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나 평동의 첩자 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작?”
“진즉에 천지시당에서 해야 할 일이기에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현재 평동에는 많은 첩자들이 활동 중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들을 색출해낼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계주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황성 내 인물들에 대해서라면 조사를 철저히 한다면 어느 정도 색출해낼 수 있을 터, 황성 내 첩자가 색출될 때는 즉시 잡아들이지 말고 짐에게 먼저 보고하라. 따로 쓸 일이 있다.”
“예, 폐하.”
“평동에서는 이리 하라. 군의 기강을 다시 잡고, 신원이 확실한 이들만으로 자리에 앉히며, 그들 중에서도 각 고수들이 판단하여 믿을 수 있는 자들을 높이 써 첩자들을 색출은 못해도 그들이 활동을 못하게끔 하라.”
주첨기가 생각해도 평동에서의 첩자색출은 매우 어려운 듯 보였다.
“폐하의 명령을 받들되 각 고수들에게 첩자색출을 재량껏 맡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천지시당에서 고수들을 돕겠습니다.”
“재량껏 맡기는 것은 좋으나 천지시당은 황성 안의 첩자들을 색출하는 데 전력을 다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우선 사람을 시켜 평동의 고수들에게 짐의 명령을 전달하라. 천지시당은 하루 빨리 황성 내 인물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여 첩자를 색출하라. 물론 은밀히 시행해야 할 것이다.”
“예!”
“또한 에드먼의 중요인물들과 그들의 가문에 대해 조사해 와라.”
주첨기는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계주는 크게 절했다.
계주는 황성에서 나와 평동으로 황명을 전달했다. 그리고 천지시당 모두와 함께 황성의 인물과 에드먼 제국의 중요인물에 대해 특별한 조사를 시작했다.
평동고수들은 평동에서 활동 중인 첩자들을 색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본래 등용한 인재들이 대부분 피난민들이기 때문에 신분을 증명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대국도 에드먼 제국에 첩자들을 심어 놓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다만 황명을 이행했다. 군을 개편하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을 높이 썼다.
물론 그 높은 자리에 첩자가 임명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대한 빨리 에드먼을 점령하여 통일하는 수밖에.
주첨기는 계주의 보고를 기다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계주가 첩자로 추측되는 인물들의 명부를 가져왔다.
“황성에도 이토록 많은 첩자들이 있었단 말이더냐.”
주첨기는 명부를 보고 놀랐다. 평동뿐만 아니라 황성 내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첩자들이 있었다. 집정관에서부터 요리사까지 계층별로 다양했다.
“예, 폐하. 그러나 확언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추측은 되오나 물증이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짐에게도 계책이 있으니…… 반간계(反間計)다.”
마지막 남은 방법이지만 오히려 최선의 방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국으로 들어온 첩자를 역이용하는 방법으로, 거짓정보를 흘려 적을 혼란케 만드는 계책이다.
‘반간계!’
계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계주, 짐이 말했던 바와 같이 에드먼의 중요인물들 명부도 같이 가져 왔는가?”
“예, 폐하.”
계주는 서책 하나를 주첨기 앞에 내밀었다.
주첨기는 그것을 받아 들고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대에 이르러 높은 자리에 있는 건국공신 가문들과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가문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주첨기의 시선은 건국공신 가문의 내용들에 맺혔다.
“하스 백작가, 오브골 백작가, 뮤트 백작가.”
주첨기가 세 개의 백작가문을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바로 이 세 가문이 에드먼 제국의 재정을 맡고 있는 건국공신 가문들이군. 재정이 흔들리면 나라도 혼란스러워지고 빈틈이 생길 터! 바로 이 세 가문을 몰락시킨다.”
“적의 첩자들을 이용해서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적의 첩자들에게 세 가문이 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고 거짓정보를 흘려라. 또한 그 가문에 공작을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작, 그대에게 공작금 10만 골드를 주겠다. 그러나 짐은 그 사용처를 묻지 않을 것이다.”
“아……!”
10만 골드라는 거대한 액수에 대해 사용처를 묻지 않는다?
계주는 용기백배되었다.
방자는 이른 아침부터 급히 집무실을 찾았다. 집정관 발리오는 신명국 고수가 오자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봐.”
“예, 자작님.”
방자는 집정관의 전신을 훑었다.
바로 이놈이 첩자렷다?
당장에 한 방 먹여 주고 싶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아따, 어여 대장간으로 가서 그 뭐시냐 드워프 장인들에게 신명검 세 자루를 만들도록 주문혀 봐.”
“신명검이라니요?”
집정관 발리오는 매우 궁금했다. 신명검은 신명국 검사들에게만 주어지는 보검이 아닌가?
갑자기 그것을 만들라니.
“어느 검사님 세 분이 검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발리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제폐하가 직접 내려 주신 보검을 세 분이나 잃어버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거참, 무슨 궁금한 게 그리 많어? 싸게싸게 만들어야 할 일잉게 서두르자고”
“알겠습니다.”
“서둘러야 혀.”
“그런데 400검사님들 말고도 다른 검사님들이 계신 것입니까?”
“거참, 이거 말해 주면 안 되는디…….”
방자는 능청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집정관으로서 대략적인 것을 알고 있어야 일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집정관 발리오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평소 그의 행실을 봐서는 결코 첩자라고 할 수 없었다. 하긴, 첩자가 첩자 같을 순 없으니까.
‘정말 성실한 집정관이라고 생각혔는디 완전히 뒤로 호박씨 까고 있었던 거 아녀. 뭐? 대략적인 것을 알고 있어야 혀? 지랄을 한다, 지랄을 혀.’
방자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속내를 간신히 감췄다.
“그렁가?”
“그렇고말고요.”
“허미,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겄당게. 나도 궁금혀 죽겄어. 어디로 보내려는 것 같은디 그게 어딘지 모르겠단 말여. 우리 개국공신들에게만 준 신명검인디 말이여. 과연 어디로 갈까. 집정관, 그대는 아나?”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아, 이 대갈빡! 네가 나한테 물었지? 거참, 아무튼 나도 이게 어디론가 보내지는 것만 알 뿐이지 더 이상은 모르겄당게. 어서 싸게싸게 다녀와 봐.”
“예.”
집정관 발리오는 신명검 세 자루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드워프들에게 전했다.
신명검 세 자루를 만들어 어디론가 보낸다?
단순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발리오는 은밀히 또 다른 집정관 하우스를 만났다. 하우스는 만보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발리오와 하우스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넘버 32.”
발리오가 하우스를 그렇게 불렀다.
보통 첩자들 사이에도 서로간의 정체를 모르는 게 대부분이지만 에드먼 첩자들은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더욱 정확한 정보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넘버 41, 여긴 무슨 일인가.”
“최근 별다른 일은 없는가? 내가 희한한 정보를 입수해서 말이야.”
“희한한 정보라고?”
“그렇다. 최근 입수한 정보는 없는가?”
“천지시당주 계주에게 3만 골드를 내주라는 황명이 있었다.”
별다르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3만이라는 양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 그럼 그쪽에서 입수한 정보는 무엇인가?”
“신명검 세 자루를 만들어 어딘가로 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세 자루와 3만…… 3이라는 공통점이 있군. 좀 더 알아볼 필요성이 있겠군.”
“그렇잖아도 너를 만나고 넘버 19에게도 가 볼 참이었다.”
“천지시당에서 일한다는 자 말인가?”
“그렇다.”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면 내게도 알려 줘라.”
넘버 32라 불린 발리오는 넘버 18을 찾아갔다. 예고도 없이 찾아왔음에도 넘버 18은 발리오를 반기는 눈치였다.
발리오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 들어온 정보는 없는가?”
“있지.”
“뭐지?”
“넘버 32, 너도 무슨 냄새를 맡고 온 것 같은데 묻기 전에 먼저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닌지?”
“신명검 세 자루를 만들어 어디론가 전하라, 3만 골드를 계주에게 내주라. 이것뿐이다.”
“호오!”
넘버 18은 턱을 쓰다듬으며 소리를 냈다. 그렇잖아도 하스, 오브골, 뮤트 백작 건 때문에 넘버 32 발리오를 찾아가려고 했다.
“뭔가 알아낸 눈치군?”
“하스 백작가, 오브골 백작가, 뮤트 백작가에 대해 알아보라는 임무가 내려왔다.”
“백작님들을 무슨 일로?”
“그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나름대로 조사해 보니 결코 악의는 아닌 듯싶었다. 최근 신명국과 에드먼 세 백작 분들과 연락이 오가는 듯싶은데…… 네 말을 들어 보니 대충 맞아떨어지는군. 신명국에선 그 세 가문에 신명검과 만 골드의 금화를 내리려 하고 있다고 추측되는군.”
발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신명국이 어째서 세 백작 분들에게 그런 것을 준단 말인가? 신명검은 군신의 예를 맺은 개국공신들에게만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 여러모로 정보를 조합해 보니 세 자루의 신명검과 3만 골드는 세 백작에게 가는 것이 확실한 듯싶다.”
발리오는 코웃음을 냈다.
“큭, 믿기지가 않아. 지금 세 백작이 제국을 배반한다는 소린가?”
“못 믿을 게 뭐 있나? 우리가 첩자인데…… 어느 누가 우리가 첩자인 것을 알까?”
“아무튼 조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군. 세 백작가와 신명국의 관계 말이야.”
“그렇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 이 사실을 제국에 전할 수가 없다. 현재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세 명의 백작이 신명국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의 내정이 크게 흔들릴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집정관 발리오는 신명검이 완성된 그날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완성된 날 발리오는 더욱 자세한 정보를 알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완성된 신명검이 어디로 전해지는지 보기 위해 다른 첩자와 연락을 취했다. 세 자루의 신명검은 황제 주첨기에게 옮겨졌다.
그런데 그 후로 신명검의 행방이 사라졌다. 아마도 옆에 있던 계주에게 옮겨진 듯싶었다.
그리고 계주가 성 밖으로 나갔다는 것까지 파악되었다.
넘버 18이 말했던 대로 일이 돌아가는 걸까?
그래도 발리오는 제국에 보고하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계주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넘버 32.”
넘버 18이 발리오를 찾아왔다.
“내 말이 맞았다.”
“맞다니?”
“세 백작가문이 제국을 배신하고 신명국 황제와 군신의 예를 맺기로 했다. 이에 신명국 황제는 그 세 백작가에 검과 금화를 내리기로 한 모양이다.”
“이럴 수가…… 어디서 들었지?”
“내가 직접 계주와 황제가 나누는 밀담을 들었지. 이 귀로 똑똑히.”
“밀담을 들을 수 없었을 텐데?”
“우연찮게도 황제에게 직접 세 가문의 조사내력을 가져다주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막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소리가 들려서 엿듣게 되었지.”
“인정하기 싫지만 운이 따랐군.”
“그래, 제국도 어떻게 될는지…… 공신가문이 배신을 하고 말이야.”
“확실한가?”
발리오는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날 뭐로 보는가. 확실하고말고. 어디까지나 나도 네가 가져온 정보로 유추했고, 그리고 황제와 계주의 밀담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지.”
“보고해야겠군.”
발리오는 결국 믿게 되었다.
“한 가지 더 있다.”
“뭐지?”
“배신에 가담한 귀족들은 비단 그 세 백작뿐이 아니다.”
“누군가? 다른 귀족이라면?”
“그것까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귀족들도 신명국 쪽으로 변심한 모양이다.”
집정관 발리오는 가슴이 쓰라렸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백성으로서 개국공신이 배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되니 가슴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은 일, 제국의 내정에 혼란이 올지라도 일찍이 배신자를 처단해야 제국의 앞날에 영광이 있을 것이다.
깊은 밤.
발리오는 수도에 잠입 중인 연락통을 만났다. 발리오가 그에게 서찰을 건넸다.
붉은색 촛농으로 봉합된 서찰.
1급 정보를 담고 있음을 뜻했다.
평동에서의 전시상황 때문에 에드먼 본토의 국경도 경비가 삼엄해졌다.
그러나 천지시당주 계주에게는 수월한 일이다.
계주는 사람이 헤엄쳐 건널 수 없다는 큰 강을 건넜다. 물론 그는 헤엄치지 않았다.
단지 물 위를 걸었을 뿐이다. 국경을 넘고서 수도에 잠입했다.
‘이젠 본국이 되돌려 줄 때다.’
계주는 멀리 보이는 에드먼 황성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 자신의 짐에는 3만 골드와 신명검 세 자루가 들어 있다. 일전에 제국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수도로 잠입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세 백작가의 저택 위치를 생각해냈다.
어느새 계주는 농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다.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써 머리칼과 눈동자를 감췄다.
태연스럽게 걸었다.
“멈춰라.”
챙!
파이크 두 자루가 계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너 같은 천한 것이 발걸음을 했느냐?
저택을 지키는 병사였다.
“저, 저…….”
“어서 썩 꺼져라!”
“저, 전 하스 백작님의 소작농으로 하스 백작님의 은덕을 입고 있습니다.”
병사 둘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 이번에 밭을 매다가 뭔가 걸려서 보았더니 이런 게…….”
계주는 짐을 살짝 풀어 보여 주었다.
병사들은 짐 안쪽을 살짝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검날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범상치 않은 검이란 걸 알아보았다.
“그, 그래서 이걸 백작님께 진상코자…….”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문 앞에 서 있는 시종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가서 다시 말하라.”
보물일지도 모르는 검을 가지고 온 농민을 내칠 수가 없다. 병사는 저택의 철문을 열어 주었다.
계주가 발을 내디뎠다. 저택 안에 들어선 그는 씨익 웃었으나 금세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병사들의 말대로 어린 시종 한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이것을 전하러 왔네. 백작님께 전하면 될 것이네.”
계주가 어린 시종의 품 안에 짐꾸러미 세 개중 한 개를 떠밀었다. 얼떨결에 시종은 그것을 받고 말았다.
본래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받으면 안 된다. 그러나 철문을 통과한 것으로 보아 신분이 불확실한 자 같지는 않았다.
시종은 짐꾸러미 한 개를 들다가 그만 놓쳐 버렸다.
“이크!”
짐꾸러미가 땅에 떨어졌을 때 그 앞쪽이 약간 풀렸다. 그 틈으로 예사롭지 않은 검 한 자루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금화들이 보였다.
“이, 이건……? 이봐요!”
종자는 나가려던 계주를 불렀다.
“자, 잘 전해 주게.”
계주는 어린 종자가 짐을 다시 묶는 사이 서둘러 빠져나왔다.
어린 종자는 그것을 백작부인에게 전했다.
조금이라도 세상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검이 무엇인지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백작부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보검이려니 하고 남편을 기다렸다.
계주는 오브골 백작 저택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검과 금화를 전달했다.
하지만 마지막 뮤트 백작 저택은 경비병들이 계주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이 중요한 보물을 백작님께 전해야 합니다, 병사님들…….”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소작농이든 아니든 내 알바 아니니 이만 꺼지지 못해?”
“병사님…….”
계주가 눈물을 글썽였다.
“백작님께서 초대받은 손님이나 왕성에서 나온 귀족 분들이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택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다. 아무리 내게 사정해도 안 되니까 이만 꺼져라.”
“하오나 이것은 보물인데…….”
“보물이든 뇌물이든 난 모르는 일이다. 정 그러면 백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든가.”
“하오나 밭에 나가 봐야 하는데…….”
“그럼 꺼져.”
“내일 오겠습니다.”
계주는 모퉁이로 돌아갔다.
되도록 자신이 검을 백작 가문에 전하는 것을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나 출입부터가 금지되었다. 하는 수 없이 계주는 지면을 박찼다.
쉬익
저택 벽을 단번에 넘어선 그는 쏜살같이 열린 2층 창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주방이군.’
착지하자마자 식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 무리의 시녀들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냄새야?”
“생선 썩은 냄새가 나는데?”
‘이크!’
계주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지독한 냄새는 처음이야. 아우, 코가 멍멍하네.”
“그러게. 내가 나가서 청소도구를 가져올 테니까 넌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좀 찾아 줘.”
“응.”
주방은 백작가문답게 컸다.
시녀가 반대편 구석을 찾아보고 있는 사이 계주는 들어왔던 창문밖으로 나갔다. 창틀을 밟으며 자리를 이동하던 그는 백작의 서재를 발견했다.
창문을 열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옷장을 열었다.
왕성에서 입는 예복들이 질서정연하게 걸려 있었다. 계주는 옷장 안에 검과 금화가 든 짐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좋았어.’
계주는 웃었다.
마지막 해야 할 일이 남았다.
계주는 신명국과 에드먼 제국의 국경으로 이동했다. 국경을 오가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대륙의 모든 나라가 외교적으로 절교를 선언했기에 더 이상 상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계주는 맨 처음 국경 다리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대로 강을 넘어 신명대국으로 건너갈 수가 있다.
그러나 계주는 밀짚모자를 벗고 애써 돌을 강에 던졌다.
첨벙
물소리가 났다.
“저쪽이다!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계주가 있는 곳으로 쏠렸다.
“수상한 자다. 잡아랏!”
“제기랄!”
계주는 크게 외쳤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는 몹시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탓!
계주가 강 쪽으로 몸을 날렸다.
“강! 강을…… 강을 밟고 뛴다.”
“머리칼이 검은색이다.”
“신명국 검사닷!”
병사들은 넋을 잃고 계주를 바라보았다.
계주는 벌써 강을 밟고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계주가 완전히 사라지자 정신이 들었다.
“어서 황성으로 이 소식을 전하라. 신명국 고수가 제국에 잠입했다고!”
에드먼 황제는 꿈을 꾸었다.
어디선가 떨어진 알에서 붉은 새 한 마리가 나오더니 한순간에 산만큼 커져 자신을 삼켜 버리는 꿈.
그것은 악몽이었다.
애써 떨쳐 버리며 다시 자도 꿈은 처음부터 반복되었다. 그렇게 네다섯 번 반복하자 날이 밝았다.
침대보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잠을 설쳐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모든 일에 신경이 곤두섰다. 아침 입맛도 없고 해서 아침도 걸렀다.
이날의 아침집회는 취소되었다. 어차피 집회에 나가 봤자 듣기 좋은 소리가 없다. 양국 모두 국력을 소비하고 있어 어느 쪽에도 이득이 없다는 소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에드먼은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더 자고 싶어도 잠이 들지 않아 신경은 더욱 곤두서고 있었다.
행여나 잠깐 잠에 들기라도 하면 또다시 악몽의 반복이다.
“폐하, 페를리우스입니다.”
침실 밖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먼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지금껏 에드먼과는 다르게 이날만큼은 중요한 일일지라도 다른 이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모든 일에 대한 신경을 끄고 싶었다.
“짐은 오늘 아무도 만나기 싫다.”
에드먼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폐하께서 꼭 들으시고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짐의 명령이다, 공작. 이만 돌아가라.”
“폐하, 내정이 흔들리지도 모르는 큰일입니다.”
“크으…… 들어오라.”
에드먼 황제는 가운을 걸쳤다.
페를리우스 공작은 침실로 들어오더니 황제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랐다. 하루 만에 폐하의 얼굴이 야위어 보였다.
“폐하, 편찮으십니까?”
“단지 잠을 설쳤을 뿐이다. 그래, 그 큰일이란 게 무엇인지 들어 보자.”
“신명국 황성에 잠입한 첩자가 보내온 정보입니다.”
에드먼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첩자의 정보에 의하면 제국을 배신하고 신명국 황제와 군신의 예를 맺은 제국의 귀족들이 있다고 합니다.”
“뭐라?”
에드먼은 뒤통수에 손을 댔다. 최근 안정을 되찾았는가 싶더니 다시 뒷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인지도 알아냈는가?”
“그중 셋이 발각됐습니다, 폐하. 하스 백작, 오브골 백작, 뮤트 백작입니다.”
모두 개국공신 가문들이다.
“그들은 모두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개국공신 가문의 귀족들이 아닌가? 믿기 어렵다.”
“하오나 믿을 만한 정보입니다.”
“조사를 해 보았다?”
“예, 폐하. 어젯밤 국경으로부터 한 가지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신명국 검사 한 명이 제국에 잠입해 있다가 신명국으로 다시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이를 국경수비병들이 발견하여 바로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첩자의 정보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폐하, 정말 괜찮으십니까?”
페를리우스는 에드먼 황제가 불안해 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는 황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거기다 한숨도 못 자 퀭한 눈에선 일말의 힘도 엿볼 수 없었다.
“짐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
“……첩자의 정보에 의하면 신명국 검사 계주 백작이 이번에 제국을 배신한 세 백작에게 신명검 한 자루씩과 금화 만 골드씩을 전하러 향했다고 합니다. 국경수비대의 보고와 맞추어 보니 국경을 넘었다는 그 검사가 계주 백작으로 추정되어 밤새 세 백작가문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결국 그들이 배신을 했다?”
“예, 폐하. 어제 그 백작가문들을 찾은 농민이 있다고 하는데 바로 그자가 계주로 추정이 됩니다.”
“짐을 배신했다?”
“송구스럽습니다. 바로 그들의 저택에 신명검과 금화가 있을 것입니다. 폐하, 세 백작을 갑자기 잡아들이시면 내정에 큰 혼란이 올 테니 폐하께서 그들의 처벌을 결단 내려 주십시오.”
“짐은…….”
에드먼 황제는 페를리우스의 말을 믿기가 싫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황제인 자신에게 충성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배신이라니?
그것도 신명국 황제와 군신의 예를 맺어?
당장 그들을 불러 심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첩자의 정보일 뿐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일이 아니다.
“그들을 믿고 싶다.”
어쩌면 신명국의 계략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폐하, 저 역시 일국의 공작으로 그들을 믿고 싶습니다. 하오나 여러 정황들을 간과할 수 없기에…….”
“평소 그들의 행동을 볼 때 결코 배신할 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나 공작이 그리 말하니 그들이 짐을 배신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할 좋은 계책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폐하?”
페를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백작을 제국의 사자로서 신명국에 보내라. 신명국에서 적국의 사자인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한 번 보리라.”
“현명하신 계책입니다, 폐하.”
“그렇게 하도록.”
“하오나 사자로서 그들의 명분은 무엇입니까?”
“권고다. 패배를 인정하고 평동지방을 내놓는다면 휴전을 하겠다는…… 이만 나가 보라, 공작.”
에드먼 황제는 페를리우스를 돌려보내고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곰곰이 귀족들의 배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몇 대 전부터 모든 귀족들은 에드먼 황실에 충성을 다했다. 그 오래전부터 결코 배신의 기미가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쟁에서 패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대륙의 제일패권국으로 모든 나라가 제국의 한마디에 벌벌 떨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윽, 머리야.”
에드먼 황제는 뒤로 누웠다.
살아오면서 불 같은 성격을 다스렸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불은 겁화로 변해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한 번씩 뒤통수에서 통증이 일고 눈앞이 핑 돌았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유명한 공신가문.
하스, 오브골, 뮤트 백작은 서로 만났다.
셋이 모두 사자가 되어 신명국으로 간다고 들었다. 일국에 귀족 셋이 사신으로 갔던 일은 지금껏 없었다.
모두 의아해 했지만 황제의 명이니 할 수 없었다. 그만큼 항복권고를 확실히 하고 싶은 황제폐하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만났을 때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면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으로 보아 서로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였다.
신명검과 만 골드가 자신의 저택에 있다는 말을 셋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금은 그렇다 쳐도 신명검은 단순한 뇌물로 치부하기엔 그것이 가진 뜻이 너무나 컸다. 얼핏 잘못되면 반대세력에 의해 모함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저택에 신명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반대세력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 게다.
하스, 오브골, 뮤트 등 세 백작은 모두 개국공신 가문으로 같은 세력이지만, 그래도 신명검에 대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말을 꺼낼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분위기가 냉랭하다. 결국 신명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신명검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이것은?”
세 백작은 놀랐다.
국경까지 신명국 고수들이 자신들을 마중 나온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열 명이 넘는 고수다.
“어서 오시오. 그대들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소이다.”
모용휘가 말했다.
세 백작은 모용휘를 따라 수도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는 몰라도 수도만큼은 제국보다 월등히 발전되어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드워프들의 건축물들은 아름다웠다.
세 백작은 적국으로 들어오면서 가지고 있던 경계심을 한층 누그러트렸다.
그들 주위에서 눈빛들이 번쩍거렸다. 바로 황성에 잠입한 제국의 첩자들이었다. 그들이 세 백작의 언행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를 크게 맞아 주니 항복을 권고하는 것이 무안하구려.”
“그렇소. 헌데 너무 뜻밖이오. 적국의 사신인 우리들을 이토록 크게 맞아 주다니 말이오.”
“그래도 이곳은 적국인 것만은 분명하오.”
세 백작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 주첨기가 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식탁에 놓인 음식 수만 해도 수십 개, 한 병에 만 골드나 하는 최고급 와인은 물론 진귀한 것들뿐이었다.
세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폐하, 저는 에드먼 제국에서 온 하스 백작입니다.”
“오브골 백작입니다.”
“뮤트 백작입니다.”
세 백작은 저마다 자기소개를 했다.
주첨기가 크게 두 팔을 벌렸다.
“오, 서찰로만 그대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직접 실물로 보니 더욱 늠름하다.”
서찰이 아닌 실물?
무슨 말인지 몰라서 세 백작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무슨 연유로 짐을 찾아왔는가?”
“다름이 아니라 에드먼 제국의 사자로서…….”
하스 백작이 대표로 나섰다.
챙!
갑자기 주첨기가 젓가락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에드먼 제국의 사자?”
주첨기는 노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그대들이 각 백작가문의 가장으로서 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헌데, 제국의 사자로 왔다? 적국의 사자로 왔다? 에잇, 여봐라! 이 상을 썩 물려라. 그리고 적국의 사자로 온 이들에게 알맞은 상을 다시 내오너라.”
‘아니,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세 백작은 어리둥절했다.
어느새 상이 교체되었다. 수많던 음식들이 사라지고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음식과 고기는 한 점 없이 전부 풀로만 조리된 것뿐이었다.
세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국의 황제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음식냄새가 고약하나 그들은 전부 남김없이 먹었다.
“식사를 다했는가?”
“예, 폐하.”
“그럼 이만 돌아가라. 짐은 적국의 사자와 나눌 이야기가 없다. 에드먼 제국이 대국에 항복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해도 돌아가라. 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륙의 적인 에드먼 제국을 정벌할 것이다.”
주첨기는 일어나 후문으로 나갔다.
“폐하……!”
아니, 그럼 처음에 크게 맞아 주고 했던 것은 무슨 생각이었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세 백작은 항복권고문을 혜공에게 전하려 했다. 그러나 혜공이 빼악 성질을 냈고, 설령이 그것을 가로채러 중간에서 찢어 버렸다.
세 백작은 화도 나도 크게 낙담한 나머지 이만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본래부터 우리는 제국의 사자로 오지 않았소? 그런데 그 소리에 갑자기 태도가 바뀌다니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소.”
“맞소, 참으로 이상하오. 이거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왠지 불길하오.”
“아무래도 내 탓인 듯싶소.”
갑자기 오브골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저택에 한 농민이 찾아와 짐꾸러미를 건네주고 갔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시종이 받았는데, 짐꾸러미 안에는 신명검과 만 골드가 있었소. 내 진즉에 그대들에게 말하려고 했으나 신명검이라니? 너무나 큰일인지라, 또한 음모일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소. 신명국의 태도와 저택으로 온 그 짐꾸러미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소.”
오브골 백작은 말을 마쳤다.
“아!”
“헉!”
하스 백작과 뮤트 백작은 신음을 흘렸다. 자신들도 그와 똑같은 생각으로 말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저택에도 왔소.”
“내 경우엔 내 옷장 안에 아무도 모르게 감춰져 있었소. 신명검이라니. 그래서 나도 말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소.”
“아무래도 이건 반대세력의 음모가 아니오? 이건 바로 신명국의 음모요!”
“아……!”
“빨리 갑시다. 더 늦기 전에 신명검에 대해 황제폐하께 보고해야만 하오.”
세 백작은 마차를 빨리 몰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택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식솔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문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을 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친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내 가족들은 어디 있는가?”
“백작의 구족(九族)은 모두 지하감옥에 갔소. 백작, 당신을 잡아들이라는 황명이 있었소. 무력을 쓰기 싫소. 순순히 황성으로 가서 심문을 받으시오.”
“이럴 수가……!”
백작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했던 일이 결국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 괘씸한……!”
에드먼 황제는 세 백작이 신명국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는지 첩자로부터 알았다. 세 백작을 대하는 신명국의 태도가 변심한 것을 보고 에드먼 황제는 확신을 가졌다.
놈들이 날 배신했다!
이전의 에드먼이라면 신중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에드먼은 신명국 때문에 감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세 백작이 에드먼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이 에드먼 황제는 회의를 열었다.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다.
“이것은 신명국의 음모입니다. 세 백작은 결코 제국을 배신할 인물들이 아닙니다.”
개국공신 가문의 귀족들은 소리 높여 외쳤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은 곱지 않았다. 개국공신 가문의 귀족들은 분노한 황제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모습에 용기백배한 신진세력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명백하지 않습니까? 재정을 담당하는 세 백작이기에 더욱 큰일입니다.”
“무슨 말이오? 마치 세 백작이 배신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말하지 않소?”
“기정사실화된 것이지요. 이 상황을 보고도 아니라고 반박하는 대신들도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첩자의 말에 따르면 세 백작 말고도 다른 자들도 배신에 가담했다고 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망발이오. 의심스……!”
개국공신 가문의 귀족들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황제폐하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 매우 잘 별러진 단두대가 보였다. 에드먼 황제는 의심이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눈으로 개국공신 귀족들을 훑었다.
에드먼 내정은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바로 개국공신 가문과 최근 100여 년 사이에 급성장한 신진세력이다.
배신했다고 거의 확정된 세 백작이 바로 개국공신 귀족의 세력이기에 에드먼 황제는 그들을 의심했다. 이들 중에 또 다른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신들은 입을 다물라!”
에드먼 황제가 호통쳤다.
“더 이상의 논쟁은 필요 없다. 그들의 저택을 조사한다. 그들이 짐을 배신했다면 저택에 신명검이 있을 것이다. 공작!”
“예, 폐하.”
페를리우스 공작이 대답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회의실에서 나갈 수 없다. 공작은 짐의 친위병을 이끌고 저택들을 조사하여 신명검을 찾아라.”
페를리우스는 친위병과 함께 뮤트 백작의 저택부터 찾았다.
“꺄악!”
황제의 친위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안주인인 백작부인이 나와서 무슨 일이냐며 호통쳤다. 그러나 공작의 모습을 발견한 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공작의 입에서 ‘배신’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백작의 구족과 일하는 자들을 모두 한곳에 감금하고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집 안은 엉망이 되었다.
“찾았습니다!”
‘결국…….’
페를리우스는 쓴 침을 삼켰다.
친위병이 가져온 검은 소문의 검이 맞았다. 신명국의 문장이 박혀 있고 검신은 드래곤본을 사용했다.
결국 뮤트 백작은 배신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페를리우스는 막막했다. 모든 것을 다 떠나 제국은 혼란스러워질 게 뻔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우선 황제폐하부터 의심을 풀어야 한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우선 뮤트 백작의 구족을 잡아들이고 지하감옥에 수감하라.”
“예!”
다음 행선지는 하스 백작의 저택이었다.
일찍이 친위병들이 하스 백작의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스 백작의 가족들은 모두들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공작님!”
우아하기로 소문난 하스 백작부인이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황제폐하의 친위병들이 저의 집을 포위하고 아무도 못 나가게 하는 것입니까? 백작님이 무슨 죄라도 지으셨습니까?”
“그렇소. 구족이 멸족되는 대죄를 지으셨다는 혐의가 있소.”
“설마…… 내통은 아니겠지요?”
“맞소. 그래서 지금부터 저택을 수색하고 내통한 증거물을 찾아야겠소.”
“그렇게 해서 무죄가 입증된다면 얼마든지 저택을 수색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도 제 남편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대대로 황제폐하께 충성해온 가문입니다. 제 남편도 역시 그렇고요. 누구보다도 공작님이라면 제 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자, 집을 조사하세요.”
“양해를 구하겠소. 여봐라, 시작하라.”
친위병들이 저택으로 난입했다. 시녀와 시종들은 한쪽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백작의 어린 아들들은 어머니 품 안에서 울어댔다.
“여기…….”
결국 찾았다. 친위병이 페를리우스에게 신명검을 가져왔다.
“그, 그것은 내일 아침이 되면 황성으로 가져갈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오?”
“모, 모릅니다.”
백작부인은 말을 더듬었다.
“신명검이라고 들어 봤소?”
“예? 설, 설마!”
백작부인은 이마를 짚고 쓰러졌다.
‘어머니!’하는 소리와 함께 아들들이 백작부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반은 남아서 시종과 시녀들까지 모두 잡아들여라. 나머지는 나와 함께 오브골 백작의 저택으로 간다.”
오브골가에서도 신명검과 만 골드가 발견되었다.
페를리우스는 눈물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을 잘 알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자들이다. 그래서 재정을 담당하는 높은 직책에까지 오른 게 아닌가?
이것은 음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저지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페를리우스 공작은 모든 조사를 마치고 황성으로 돌아갔다.
“공작…….”
에드먼 황제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예, 폐하.”
“세 백작을 처형하면 제국의 내정은 상당히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신명국과 내통했다는 증거까지 나왔는데 어찌 그들의 죄를 모른 체할 수 있겠는가.”
“하오나 폐하,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수상한 점?”
에드먼 황제가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분노로 충혈되어 있었다.
페를리우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신명검을 전달했다는 농민에 대해서입니다. 국경수비병들이 봤다는 신명국 고수 계주와 그 농민의 모습은 일치하고, 첩자의 정보도 그자는 계주라고 했습니다.”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계주는 들키지 않고 신명국으로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일부러 모습을 드러낸 듯 보였습니다. 또한 계주는 신명검을 일방적으로 저택 사람들에게 떠넘겼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녀와 시종들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공작의 말은 이 모든 게 신명국의 음모란 말인가?”
에드먼 황제가 바싹 굳은 입꼬리를 올렸다.
“예, 폐하. 좀 더 조사해 보심이…….”
“그만둬라, 공작. 신명국에서 그들을 대했던 태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짐은 이미 결단을 내렸다. 다소 제국에 혼란이 빚어져도 그들을 엄히 다스려 처형하기로 말이다. 확실히 본보기로 삼아 구족까지 멸해 어느 누구도 내통은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내통이라니, 내통이라닛!”
“폐하,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바라보셔야 합니다.”
“공작의 충언은 간직하겠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내통자들을 두둔한다면 공작 그대도…… 됐다, 돌아가라.”
페를리우스는 낙담한 채 돌아가려고 했다. 문에 다가갔을 때 문이 저절로 열렸다. 친위병 대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황제폐하, 내통자 세 명을 잡아들였습니다.”
“좋다. 짐이 내일 그 죄인들을 직접 심문할 테니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도록.”
이튿날, 에드먼 황제는 직접 세 백작을 심문했다.
세 백작은 한결같이 억울하다며 모든 것은 신명국의 음모라고 말했다.
하지만 에드먼 황제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검과 금화를 받았을 때 즉시 보고하지 않았는가? 짐도 애통하다. 충신이라고 생각했던 너희들이 짐을 배신하다니.”
“폐하, 그것은…….”
“닥쳐라! 듣기 싫다.”
에드먼 황제가 크게 호통쳤다.
“여봐라, 이들을 광장에서 처형할 것이고 남은 구족들에게 모두 사약을 내려라.”
“폐하,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에드먼 황제는 세 백작의 억울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첨기, 감히 짐의 충신들에게까지 손을 뻗쳐? 네놈의 목을 베어 생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짐은 사람이 아니다.”
에드먼 황제는 신명국이 있는 남서쪽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황명대로 처형은 이튿날 이루어졌다.
내통자 처형!
그것도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세 백작이었다. 백성들과 관리들은 경악했다.
신진세력들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으나 개국공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세 백작은 억울한 면이 많았다.
세 백작이 처형된 후 그들의 자리는 신진세력들로 채워졌다. 개국공신들은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그 후부터 내정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신진세력과 개국공신들 간의 권력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만큼 에드먼 황제의 심정은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