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67
제5화 아비규환의 전장
“낄낄낄.”
괴상한 웃음소리가 맴도는 홀 안. 대여섯 마리의 귀여운 식물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끼, 끼, 끼.]식물들의 머리 위에 조그맣게 올라온 봉오리는 아직 꽃이 피어 있지 않았다.
수라혈마는 그 봉오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끼, 끼.]나날이 자라는 아기설령들을 바라보는 것이 어느덧 낙이 되어 있었다. 이제 수라혈마는 설령을 보고도 군침을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의 어머니를 잡아먹는다면 아이들이 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아직도 잡아먹지 못하는 것과 잡아먹지 않는 것과의 차이점을 모르는 수라혈마였다.
“평동왕 전하, 에드먼의 워엔드 백작이 군사 5천을 이끌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라혈마가 눈초리를 올렸다.
“……!”
“낄낄낄, 제논 그놈이 본좌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데 그깟 애송이 따위가 본좌를 어떻게 할라고? 애꿎은 머리 하나만 전장에 더 늘어나겠군.”
수라혈마는 거드름을 피웠다.
에드먼에서 평동전쟁을 시작한 후 수라혈마와 제논은 세 차례를 싸웠다.
제논 공작이 에드먼에서 제일가는 검사라고는 하나 수라혈마에게는 상대가 못 되었다. 세 번 모두 목숨만 간신히 부지하고 돌아가길 일쑤였다.
“아무래도 도착한 모양이군.”
살짝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수라혈마가 뇌까렸다.
창밖으로 먼 곳에서 먼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5천의 병사와 새로운 영웅 워엔드 백작이 도착한 것이다.
제논 공작이 일찍이 통보를 받고 워엔드 백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흠, 역시…….’
워엔드 백작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위압적이다. 과연 소문대로 신명국 검사들을 무찌를 만하다.
워엔드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제논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논 공작은 워엔드 백작의 어깨 뒤로 도착한 병사들을 한 번 훑어본 후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워엔드 백작이군. 소문대로 기백이 남다르군. 어서 오게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엔드는 절도 있게 답했다.
“매화일검 공작의 실력은 소드마스터를 넘어선 지 오래인데 그런 그를 이겼다고?”
제논 공작이 워엔드의 전신을 훑어보며 물었다.
“예.”
“대단하다. 그렇잖아도 평동왕성에서의 전투가 풀리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영웅이 이렇게 병사들까지 데리고 와 주니 기분이 매우 좋구나.”
“그럼…….”
“피곤한 모양이로군.”
“내일 전투가 있기 때문에…….”
“내일? 내일은 전투를 벌이지 않을 생각이다.”
“예, 하지만 저는 하루 빨리 황제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싶습니다. 적장 평동왕을 제압하고 평성왕성을 점령하라는…….”
제논 공작은 워엔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 안 모양이군. 그대의 역할은 나를 보좌하는 것이다. 평동왕은 이 제논이 직접 벨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병사 5천을 이끌고 평동왕성을 점령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황제폐하의 앞에서 직접 들었습니다. 제 귀는 온전하니 설마 황제폐하의 입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워엔드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제논 공작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는 죽일 듯한 눈으로 워엔드를 노려보았다. 워엔드도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흥!”
제논 공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명성은 부질없는 것이다. 믿을 것은 오로지 검뿐이니 언제든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논 공작은 화가 나서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는 바로 작전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제논 공작은 한바탕 소란에 잠이 깼다.
밖으로 나와 보니 평동왕성 앞에서 전투가 한창이었다. 워엔드 백작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직접 나간 것이다.
제논 공작은 신음을 흘렸다.
“이런 멍청한! 평동왕을 우습게 본 대가는 죽음뿐이란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던가.”
제논 공작은 급히 발 빠른 자들과 함께 전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와 전투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에드먼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다.
신명국 병사들에게서 성문 안으로 퇴각하려는 낌새가 엿보였다.
“저, 저런……!”
제논 공작은 허공에서 워엔드 백작을 발견했다. 반대편의 평동왕 수라혈마와 같이 서로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제논 공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운 인재 한 명만 사라지는구나.’
제논 공작이 끼어들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워엔드 백작과 평동왕의 검이 맞부딪쳤다.
열풍이 강하게 불어 주변의 나무가 불타올랐다.
제논 공작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검이 부딪치자마자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선전하고 있었다.
팟!
갑자기 평동왕이 뒤로 몸을 날렸다.
쓰윽
평동왕은 퇴각신호를 보냈다.
워엔드 백작은 마치 이를 노렸다는 듯 전군에 돌격명령을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제논 공작은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평동왕 수라혈마가 스스로 퇴각하다니?
제논 공작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도 이룩하지 못한 일을 워엔드는 한 번에 해냈다.
“공작님, 어서 진영의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해야 합니다.”
“아, 알았다.”
제논 공작과 워엔드 백작은 평동왕성을 점령했다. 평동왕 수라혈마는 병사들과 함께 후방의 도시로 후퇴했다.
처음으로 승리를 맛본 에드먼의 병사들은 몹시 흥분하여 얼굴이 벌게졌다. 눈물까지 흘리며 함성을 질러댔다.
“저는 이만 황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잠깐! 어, 어떻게 평동왕을 이길 수 있었던 거지? 어, 어떻게…….”
“그럼…….”
워엔드는 몸을 돌렸다.
제논 공작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나절 동안 제논 공작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자 전장에서의 일이 기억났다. 제논 공작은 작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수라혈마는 웃고 있었지?”
후퇴하던 수라혈마의 입가에 걸린 이상한 미소…… 분명 그는 웃고 있었다.
신명국 황성에 잠입해 있는 첩자로부터 두 번째 일급정보가 들어왔다.
에드먼 황제는 정보 펼치기를 머뭇거렸다. 첩자로부터 날아온 첫 번째 일급정보 덕분에 세 백작이 처형되었고 내정이 혼란스러워졌다.
과연 두 번째에도 어떠한 큰 정보를 담고 있기에 일급의 꼬리표를 달고 왔을까?
에드먼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우악스럽게 봉인을 뜯었다.
“이이익!”
탁
에드먼 황제는 머리 뒤쪽의 신경이 끊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뒤로 쓰러졌다. 어렵사리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아아……!”
이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동되었다.
“물증만 없고 심증만 있다? 이따위 것을 보고라고 하나?”
에드먼은 정보를 믿고 싶지 않았다. 이제이와 페를리우스, 그 둘이 믿지 못할 자라면 황성 안에서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얼굴 한 번 못 본 첩자에게서 들은, 그것도 물증도 없는 심증만으로 자신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을 의심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정보를 보낸 첩자를 당장이라도 잡아들여 목을 베고 싶었다.
“에잇!”
에드먼 황제는 그 자리에서 정보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후우, 후우!”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쉰 후 침대에 누웠다. 워엔드 백작의 활약 덕분에 사라졌던 악몽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에드먼 황제는 정보를 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악몽 때문일까? 아니면 정보 때문일까?
에드먼 황제는 며칠 만에 수척해졌다. 눈에 띄게 달라지는 황제의 존안을 보며 많은 대신들이 걱정했다.
평동전쟁으로 신경이 곤두섰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에드먼 황제는 말수가 적어졌다. 언제나 페를리우스, 이제이와 함께했지만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폐하,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닙니까? 요즘 매우 수척해지셨습니다. 모든 대신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페를리우스가 말했다.
“단지 잠을 설쳤을 뿐이다, 공작.”
“시녀들에게 일러 잠자리를 편케 하겠습니다.”
“공작.”
“예?”
“그때 왜 임무들을 실패했지? 이터널과 구 율리안의 속국들에서…….”
에드먼 황제의 눈동자가 번질거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의 눈빛이 이상해졌다고 느낀 페를리우스는 매우 당황했다.
“아니다. 짐은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돌아가라.”
“폐하, 어제 신명국에서 돌아온 정보원을 어째서 처형하신 것입니까?”
문득 페를리우스가 물었다.
어제 신명국 황성에서 정보원 하나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에드먼 황제는 그를 보자마자 처형했다.
“거짓정보로 짐을 혼란케 만들었다,”
“아…….”
거짓정보!
그동안 황제폐하께서 이상해지셨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짓을 알아서 뭐 하겠는가? 이만 짐은 혼자 있을 테니 공작은 돌아가도록…….”
페를리우스는 눈을 흘겼다. 황제의 방을 나서면서 그는 가슴 끝부터 올라온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먼 황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턱을 괴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일국의 황제가 거짓에 놀아나다니. 이래선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왜 짐의 마음은 짐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단 말인가?”
에드먼 황제는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거짓보고를 올린 이를 처형하고 잊도록 노력해도 자꾸만 정보의 내용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리고 지난 기억이 조금씩 되짚어지며 페를리우스와 이제이의 모습들이 그 속에서 번뜩 뛰쳐나올 때가 많았다. 이런 날이 지속되면 미치는 것이 아닐까 걱정조차 들었다.
“폐하, 워엔드 백작이 승전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밖에서 대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워엔드 백작!”
에드먼 황제의 눈이 일순간 빛을 뿜었다. 곧 사그라지던 불이 지옥불처럼 타올랐다.
에드먼 황제는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워낙 급하게 나간 터라 옷매무새를 추스를 시간도 없었다.
승전!
그 말은 곧 평동왕 수라혈마까지 이겼다는 뜻이다. 제논 공작이 한 번도 행하지 못한 일을 단번에 해냈다.
에드먼 황제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대신들이 워엔드 백작의 당당한 입성을 두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백작, 정녕 그대가 평동왕성을 점령했단 말인가?”
에드먼 황제가 물었다.
“예.”
워엔드는 말을 계속했다.
“평동왕성을 점령하고 여러 곳의 승전소식이 잇따르면서 구 율리안 영토의 8할이 제국령이 되었습니다.”
“벌써 8할이나 말인가?”
에드먼 황제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워엔드 백작이 두각을 보이면서부터 전세는 확연히 기울었다.
그 결과가 나타났다. 8할을 점령했다.
이제 남은 2할 만 점령하면 구 율리안의 영토에서 신명국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제논 공작도 이기지 못한 평동왕 수라혈마를 어떻게 이겼느냐?”
“일검(一劍)입니다.”
워엔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오, 그대는 영웅이로다.”
에드먼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워엔드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대가 두 공작과 대마법사보다 백배 낫구나!”
페를리우스와 이제이의 얼굴이 굳었다.
에드먼 황제는 개의치 않고 워엔드에게 자신의 망토를 벗어 둘러 주었다.
워엔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짐은 그대같이 믿음직스러운 신하를 기다렸다. 그대를 짐의 곁에 더욱 가까이 두고 싶구나.”
워엔드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에드먼 황제는 그 표정이 더욱 맘에 들었다.
에드먼 황제의 병사에 대한 총애는 극에까지 올랐다. 대신들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페를리우스와 이제이도 마찬가지였다.
“짐은 그대를 후작으로 봉해 짐의 곁에 더욱 가까이 둘 생각이다.”
결국 대신들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대신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졌다.
“폐하!”
페를리우스가 앞으로 나서서 무릎을 꿇었다.
“워엔드 백작의 높은 전공을 많은 대신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개 병사에서 백작이 되기까지 한 달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이제 백작이 된 지도 채 보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작으로 봉하시겠다니요? 수백 년 황실에서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내정의 혼란을 더욱 부추길 것입니다.”
이제이도 맞장구쳤다.
둘의 말에 맞춰 집무실의 모든 대신들이 무릎을 꿇고 한마음으로 주청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에드먼 황제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페를리우스와 이제이를 노려보았다. 독기가 서린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짐은 충신을 더욱 가까이 두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아무 말 말라. 짐이 평동에서의 일로 심신이 쇠약해져 있다는 것을 기회로 페를리우스와 이제이 그대들이 내정을 짐의 뜻과 다르게 움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짐 앞에서 반기를 들 셈인가? 짐은 충신을 원한다. 그대들과 다른 충신 말이다.”
에드먼 황제는 가슴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페를리우스와 이제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대신들의 표정도 가관이다.
에드먼 황제는 헛기침을 했다.
“험험! 평동에서의 전쟁은 이미 승리가 코앞이고 짐은 다시 기력을 되찾았다. 아직도 신명국과 내통하는 귀족들이 있다는 것을 짐은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 그 내통자들을 찾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내통자가 공작이든 백작이든!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컥!’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페를리우스의 양팔이 후들거렸다.
‘폐하께서 날 의심하고 계신다!’
페를리우스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까지 황제의 말속에 깃든 독기를 눈치챘다.
황제는 뒷문으로 나갔다.
‘가뜩이나 내정이 혼란스러운데 짐은 어째서 그런 말을…….’
에드먼 황제는 자책하며 사라졌다.
황제가 나간 집무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페를리우스는 다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풀린 두 눈이 황제가 앉아 있던 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어떻게 저를……?”
페를리우스는 울먹였다.
“공작, 황제폐하께선 최근 이상해지셨습니다. 폐하의 말씀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옆에서 이제이가 말했으나 공작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건방진! 아직 대마법사님과 공작님이 나가시지 않으셨거늘…….”
대신들은 워엔드 백작이 집무실에서 나간 것을 알았다.
그의 전공이 대단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에드먼 황제폐하가 이상해진 것과 내정의 혼란까지도 모두 그 때문인 것만 같았다.
대신들은 워엔드를 매우 부러워하면서도 질투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시기심이라고 불린다.
워엔드는 황제가 내린 저택으로 향했다. 페를리우스의 공작 저택만큼이나 큰 이 저택 안에는 시종과 시녀 그리고 집사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워엔드 백작님. 내일 후작 즉위식을 한다고 황성에서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저택의 집사가 말했다.
“알겠다.”
워엔드는 기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란스럽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이들의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후작이라니요! 대체 이것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백방으로 워엔드 백작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엔드 백작의 문제를 떠나 황제폐하께서 최근 이상해지셨습니다. 대마법사님과 공작님을 의심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맞소. 공작님을 노려보던 폐하의 눈빛을 보셨소? 그것은 마치 적을 보는 듯했소.”
대신들은 서로 한마디씩 떠들었다.
“큰일났습니다!”
갑자기 한 귀족이 뛰어들어왔다. 대신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무슨 일이오?”
“황제폐하께서 또다시 친위병들로 하여금 전 귀족들의 저택을 조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뭐요? 내 저택도 말이오?”
“지휘고하를 불문하고 수도의 모든 귀족들 저택입니다.”
“이런……!”
회의를 하던 귀족들은 각각 자신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저택은 소란스러웠다. 갑자기 들이닥친 친위병들이 저택을 어지럽혔고 공포감을 조성했다.
영문을 모르는 가족들이 한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신명국의 물품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금화를 모은 여러 귀족들이 발각되었다. 황제는 그들을 모두 감옥에 처넣었다.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폐하!”
모든 귀족들이 모여 알현실로 향했다. 에드먼 황제는 태연스럽게 귀족들을 맞이했다.
가장 앞장선 페를리우스가 진심으로 호소했다.
“폐하, 신들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저택을 조사한 것입니까?”
페를리우스는 싸늘한 표정의 에드먼 황제를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공작이 많이 섭섭했나 보군. 하지만 내통자들을 뿌리 뽑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해하길 바란다. 보다시피 내통혐의자 열다섯을 잡아들였지 않은가? 이제 내통자가 없으리라고 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폐하, 그들은 비록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긴 했지만 내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공작이 어떻게 알지?”
에드먼 황제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
“그들이 내통을 했든 안 했든 그들은 제국에 있어서는 안 될 더러운 자들이란 건 틀림없다.”
“예, 폐하. 벌을 내려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됐습니다.”
“짐이 잘못했다고?”
에드먼 황제가 눈을 부라렸다. 금방이라도 페를리우스를 때려죽일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잠시 흥분했나 봅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좋다. 그리 청하니 내 들어 주지. 공작은 저택에서 50일 동안 근신하라. 그리고 오늘 짐에게 했던 행동을 반성하고 또 반성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다시 한 번 더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당장 목을 벨 것이야. 잘 알고 있겠지? 페를리우스, 짐이 얼마나 많이 네 목숨을 살려 주었는지.”
“예, 폐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를리우스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모든 대신들을 등에 업고 나선 공작이라 해도 에드먼 황제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격이었다. 에드먼은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몰려 있는 절대군주주의의 나라다.
“공작님, 이번에도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까?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갑자기 젊은 귀족 하나가 일어섰다.
“폐하, 신이 직언을 올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최근 신들을 믿지 않으시며 오로지 워엔드 후작만을 총애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내정은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감히……! 짐을 먼저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대들이 아닌가?”
“폐하, 하물며 공작님과 대마법사님까지 의심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신들의 저택을 강압조사하신 일에 대해 대신들에게서 말들이 많습니다. 폐하께서 이상해지셨다면서 말입니다. 폐하, 신은 진심으로 제국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제발 신의 말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신들을 믿으시어 제국에 영광이 있길 비는 바입니다.”
“크하하핫! 짐의 위신이 이토록 떨어져 있었다니. 아랫것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짐의 위신이 떨어져 있었다니! 짐이 침실에 있는 동안 몰랐도다. 몰랐도다.”
에드먼 황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최근에 폐하께서 보여 주셨던 언행은 미친 사람의 그것이었습니다. 예전에 폐하께서 보여 주셨던 위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들은 그때의 황제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젊은 귀족은 죽을 각오를 하고 말했다. 그만큼 귀족들의 불만은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다.
특히 개국공신 세력의 귀족들은 더했다. 세 백작이 처형된 후로 황제는 개국공신 세력에 대해 많은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혼란된 내정은 제자리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내정이 혼란스러워 각 방면이 따로 노는데 평동에서의 전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폐하, 통촉하여 주십시오.”
젊은 귀족은 울음을 터트렸다.
쉬익
그때 뭔가가 젊은 귀족 앞으로 날아들었다. 바람 소리가 한 번 났다.
탁!
젊은 귀족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목이 몸과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거운 육신이 옆으로 쓰러졌다. 잘린 절단면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워엔드 후작!”
워엔드가 갑자기 뛰쳐나와 젊은 귀족의 목을 벤 것이다.
귀족들은 크게 놀랐다.
“그대들은 망발을 하는 이자를 왜 가만히 보고만 계셨소이까?”
워엔드 후작이 음성을 터트렸다.
피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에드먼 황제가 죽은 젊은 귀족을 보며 통쾌한 듯 웃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폐하의 수하를 베는 것이더냐.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기고만장하구나. 친위병들은 뭣들 하는가. 어서 이놈을 잡아들여라!”
페를리우스 공작이 외쳤다.
황제 뒤에 서 있던 친위병들이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할 때,
“크하하핫! 역시 짐을 생각하는 것은 워엔드 후작밖에 없다.”
에드먼 황제가 이를 말렸다.
“워엔드 후작, 그대의 성격은 매우 화통하여 짐의 마음에 무척이나 드는구나.”
한술 더 떠서 에드먼 황제는 워엔드 후작을 격려했다.
“폐, 폐하.”
대신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주인 잃은 목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귀족들은 죽은 젊은 귀족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 어느 누구도 반발하고 나서지 못했다.
그것은 페를리우스와 이제이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로 에드먼 황제는 워엔드 후작을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황제 옆에서 공작 페를리우스와 대마법사 이제이를 볼 수가 없었다.
황제는 워엔드 후작을 언제나 옆에 대동하고 다녔다. 전쟁에서의 일은 워엔드 후작의 말만 들었다.
페를리우스와 이제이가 몇 번이나 뵙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워엔드 후작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 때와 같이 샤워를 하고 집무를 보았다. 그가 평소와 달랐던 것은 밤이었다.
잠에 들 시간, 워엔드는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인기척이 드믄 으슥한 곳에 달했을 때 검은 그림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워엔드 후작은 놀라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은 그림자를 반겼다.
속닥속닥
워엔드 후작이 검은 그림자에게 말했다. 검은 그림자는 깊게 허리를 숙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총 세 번의 절을 한 후 검은 그림자가 몸을 날렸다. 실로 비호 같은 몸놀림이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워엔드 후작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평동점령이 코앞이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오히려 영웅 워엔드 후작이 빠지면서부터 신명국이 영토를 재탈환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었다.
에드먼 황제는 워엔드 후작을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금 군사들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평동을 점령하기 위해선 또다시 그를 내보내야 할 것 같았다.
에드먼 황제가 워엔드 후작과 대신들을 불렀다.
“후작, 그대가 다시 평동에 가 줘야겠다. 그대가 없으니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에드먼 황제가 뇌까렸다.
“이제 평동에서 남은 곳은 식량저장고가 있는 엘즈. 그곳만 점령하면 나머지는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그곳이 신명국에 있어선 최후의 보루입니다.”
워엔드 후작이 말했다.
“그런데 제논 공작과 판이 그곳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 곳곳에서 퇴각한 신명국의 검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엘즈에 집결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전쟁에서 제국군은 병사의 수에서 우세를 점했으나 오랜 전투에서 결국 그 수가 동등해지고 말았다. 때문에 더욱 엘즈를 점령하기 어렵다.”
모처럼 에드먼 황제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곳만 점령하면 평동에서의 전쟁은 끝난다. 수백 년 이어온 에드먼의 저력을 의심한 대가다. 전쟁이 끝나면 제국을 배신했던 속국들 먼저 멸국시킨다.”
“그곳에 대치중인 병사의 수는 어떻게 됩니까?”
대신 중 하나가 물었다.
“약 1만 대 1만. 짐은 황성의 5만 군사에 대한 통솔권을 워엔드 후작에게 내려 엘즈를 점령하도록 명한다. 엘즈에 집결한 평동정벌군 대장 판과 제논 공작에 대한 명령권도 워엔드 후작에게 있다.”
“폐하, 황성에 남은 5만 군사 중 4만을 더 내려 주시어 총 9만의 병력에 대한 통솔권을 주십시오. 엘즈를 점령하는 즉시 신명국 본토로 진격할 것입니다.”
워엔드 후작이 청했다.
에드먼 황제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엘즈를 점령한다면 그 기세를 몰아 신명국을 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욕심이 너무 과하면 화를 일으키는 법.
에드먼 황제는 구 율리안 영토를 모두 점령하는 것으로 이번 전쟁을 매듭짓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워엔드 후작이 청한다 해도.
그런데 이제이가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 그에게 5만의 군사와 더불어 황성의 4만 군사, 평동에 있는 1만 군사에 대한 통솔권까지 내주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에게 모든 군사를 내주고 나면 황성에는 1만 친위병밖에 남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그가 반심을 품는다면 이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또한 엘즈를 점령하고 신명국으로 진격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지금의 제국은 병력이 많이 쇠진되어 후일을 기약해야 합니다.”
그것이 에드먼 황제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황제는 이제이에게 싸늘한 표정을 보여 주었다.
“좋다. 워엔드 그대의 간언을 받아들이겠다. 그대에게 황성의 9만 병사, 그리고 엘즈에 집결한 1만 군사에 대한 통솔권을 내린다. 평동점령군은 해체하고 신명국 점령군의 대장으로 워엔드 후작을 명한다.”
에드먼 황제는 울컥하는 심정으로 명을 내렸다. 이제이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워엔드 후작이 앞으로 나왔다.
“감사합니다.”
워엔드 후작의 어투는 다소 건방졌으나 에드먼 황제에게는 그 어떤 아부보다도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워엔드 후작이라는 일인에게 모든 걸 걸었다. 왠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워엔드 후작은 9만의 군사를 집결시켰다. 발이 빠르고 힘이 강한 자들을 모아서 만든 황성 10만 군대! 이른바 정예군단이었다.
타국의 40만 대군보다도 더욱 강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들이었다.
황성의 9만 병사는 의기가 충천했다. 그 의기만으로도 벌써 엘즈를 점령한 것 같다.
워엔드 후작은 말을 타고 병사들을 둘레를 돌았다.
히이잉
말이 지휘대 앞에 멈추었다. 워엔드 후작이 지휘대에 올라 검을 빼 들었다.
“정예 중에 정예라는 그대들의 검에 녹이 스는 것을 발견했다. 그대들의 검에 피를 뿌려 날이 번쩍거리게 만들어 주겠다. 진군하라!”
진군이 시작되었다.
에드먼의 최정예 군단이 신명국을 정벌하러 간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진 상태였다. 수도의 모든 백성들이 나와 길을 쓸고 꽃가루를 뿌렸다. 함성소리가 고막에 계속 부딪쳤다.
그렇게 워엔드 후작이 이끄는 9만의 병사는 한 몸에 기대를 받으며 수도를 떠났다.
지금껏 정예군이 진격한 적이 없었다. 정예군은 직업군인들로서 농번기에도 농사일을 하지 않고 군사훈련을 받는다. 에드먼은 그런 정예군을 아꼈다.
정예군 한 명 한 명도 정예군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날이 잘 선 롱소드가, 왼손에는 신명국 병사의 할버드를 막아 줄 사각방패가 들려 있다. 햇볕이 내리쬘 때마다 병사들의 가슴어림을 감싸고 있는 브래스터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완벽한 무장과 극에 오른 사기!
그들은 벌써 승전국 병사였다.
“흠, 사기가 매우 높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예군을 바라보는 워엔드 후작의 눈빛은 좋지 못했다.
그는 병사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멀리 에드먼 황성이 멀어지고 있다.
워엔드 후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투구를 깊게 눌러썼다. 그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눈동자 색이 금색에서 검정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끼…….]워엔드 후작의 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우끼…….]워엔드 후작은 집게손가락으로 가슴갑옷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이상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후작님.”
“무슨 일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이상한 소리?”
워엔드 후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 작은 짐승이 우는 소리가 매우 가까운 곳에서 났습니다.”
“이상하군. 내겐 들리지 않았다.”
다시 병사가 말했다.
“그런데 지금의 방향은 약간 틀어져 있습니다.”
“그걸 내가 모를까? 이대로 엘즈로 진격한다.”
“제논 공작님과 판님의 군대와 합류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지금의 이 기세라면 충분히 엘즈를 점령할 수가 있다.”
워엔드 후작은 그의 말대로 제논과 판이 진을 짠 동문이 아니라 북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정예 중에 정예라 하더라도 열흘 밤낮 동안 계속된 진군에 지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워엔드 후작에게는 피곤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엘즈의 북문에 도착했다. 멀리 동문 쪽에 진을 짜고 황성의 9만 병사를 기다리는 제논과 판의 진영이 보였다. 펄럭이고 있는 깃발에는 그간 수많은 전투의 흔적이 담겨져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깃발이 워엔드 후작군을 제일 먼저 반겼다.
“바로 저곳이군요.”
“그렇다. 이대로 진격한다.”
“예?”
“성문을 부수거나 성벽으로 올라가서 엘즈를 점령한다. 지금의 기세를 늦출 순 없다.”
“하지만 오랜 진군으로 병사들은 피곤해하고 있습니다. 후작님, 신중을 기하심이…….”
“그대가 군대장인지 내가 군대장인지 모르겠군.”
워엔드 후작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아, 죄송합니다!”
“비록 오랜 진군으로 피곤하다지만 기세는 드높다. 이 기세를 몰아 적군을 친다.”
“후작님……!”
“적군은 본군이 공격할 거란 걸 전혀 생각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이제 막 도착한 군대가 공격을 시작한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 본군은 바로 그 점을 노린다.”
“예!”
“가장 앞선 부대는 진을 꾸리는 척하며 적을 방심시킨다. 그리고 후발대까지 도착하는 즉시 내 신호에 맞춰 일제히 돌격을 감행한다.”
“예!”
병사는 힘차게 대답했다.
“다소 피해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본군이 엘즈를 오늘밤 점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에게 필사의 힘을 다하라고 전하라.”
씨익!
워엔드 후작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돌격이라뇨?”
돌격명령을 미리 하달받은 병사들은 그만 질려 버렸다.
열흘 밤낮을 달려온 그들이다. 이제야 하룻밤이라도 쉴 줄 알았는데 돌격이라니?
이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후작님의 계책이시다. 적군은 본군이 공격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방비하지 못하고 있을 터. 후작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노리시는 것이다.”
병사는 마치 외운 듯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저와 동료들은 잠이 필요합니다. 이 상태론 검조차 들 수 없습니다. 제가 본래 무지한 놈이지만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돌격하는 것은 금기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정예군이라 하더라도 필시 도주하는 자가 생겨날 것입니다. 후작님께 잘 말씀드려 이번 전략을 철회하심이 어떠십니까?”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후작님은 영웅 중에 영웅이시다. 우리같이 미천한 것들이 감히 그분의 생각을 어찌 따라가겠느냐. 후작님의 명이시다. 오늘밤만 버텨라. 그럼 내일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명령이다!”
워엔드 후작은 전략대로 돌격을 감행했다.
“돌격!”
워엔드 후작이 외쳤다.
진을 꾸리던 선발대도 일제히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으아아압!”
저마다 기합을 질렀다. 엘즈의 성문 앞까지 도달했다.
그때였다.
쑤앗!
성벽 위에서 신명국 병사들이 갑자기 나타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으악!”
에드먼 병사들은 하나둘 쓰러졌다. 그래도 워엔드 후작은 돌격을 외쳐댔다.
“이상합니다. 적군은 본군의 계책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그럴 리 없다. 적군이 알아채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상관없다. 이미 본군은 돌격을 시작했고, 우리가 성벽을 넘어 적장을 베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워엔드 후작의 표정이 이상하다. 적군에게 계략을 들켰는데도 그의 표정은 기분 좋은 자의 것이었다.
“돌격! 돌격하라!”
워엔드 후작이 크게 외쳤다.
갑자기 성벽에서 뻘건 기운이 일렁이더니 돌격병들에게 날아왔다.
쿵!
한 번에 수십 명의 병사가 즉사했다.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 밤중에 기어오느냐. 오냐, 목을 잘 닦고는 왔겠지? 본좌가 친히 한 놈씩 목을 베어 주마.”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한 목소리!
“평동왕이닷!”
돌격병들이 외쳤다. 워엔드 후작과의 대결에서 부상을 입었을 거라는 추측과 달리 평동왕의 모습은 매우 건재했다.
수라혈마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두 주먹에서 핏빛 같은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그가 일권을 내뻗었다.
쾅!
병사들이 주위로 튕겨 날아갔다. 수백 마리의 말이 한 번에 울음을 터트리며 앞다리를 들었다. 기사들이 낙마하여 부상을 입는 자들이 속출했다.
“나 진천도 왔다.”
“펴, 평서왕이닷!”
평서왕이라니?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즈에 평서왕 진천까지 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큰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워엔드 후작은 천하태평이었다. 멀리서 팔짱을 낀 채 이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후작님, 평동왕과 평서왕 이 두 명이 성문을 막고 있어 병사들의 성내 진입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알았다.”
워엔드 후작이 나섰다. 지면을 박찼다.
탓!
단번에 진천과 수라혈마 앞으로 착지하자 병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와아아아!”
이미 워엔드 후작은 평동왕 수라혈마도 간단히 제압한 전적이 있다. 병사들은 이번에도 워엔드 후작이 놀라운 검술로 이왕(二王)을 제압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난 제국의 9만 정예병을 이끌고 온 군대장이다!”
워엔드 후작이 호령했다. 그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열기를 일으켰다.
“우아아아!”
병사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워엔드 후작은 멋진 동작으로 검을 빼 들었다. 진천도 수라혈마도 전투태세를 취했다.
말이 필요 없다.
팟!
스스스슷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성벽이 부서지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 울리더니 거친 바람이 불었다.
병사들은 간신히 눈을 떴다.
“헛!”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뒤로 튕겨 날아가고 있는 워엔드 후작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워엔드 후작은 쿵 소리와 함께 지면에 처박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워엔드 후작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뒤늦게 달려온 병사들이 워엔드 후작을 부축했다.
“그때는 본좌가 일부러 져 준 것이다! 낄낄낄, 이게 바로 본좌의 실력이니라.”
평동왕 수라혈마가 괴소를 터트렸다. 성벽 위의 신명국 병사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졌다.
일순간 분위기는 역전되었다. 엘즈의 성문의 열리고 신명국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휙휙
신명국 병사들 속에서 경쾌하게 날아오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신명국 검사들이었다!
“퇴, 퇴각하라! 어섯! 저들은 악마다. 우리는 저들을 이길 수 없다.”
설마하니 에드먼 제국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워엔드 후작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후작님!”
“퇴, 퇴각!”
워엔드 후작이 퇴각을 명하기 전부터 이미 도주하고 있는 자들이 상당했다.
“추격하라!”
진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 나타난 신명국의 검사들과 병사들이 에드먼 병사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 번 휘둘러진 검에 쓰러지는 육신.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