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68
제6화 악몽의 붉은 새
엘즈성 북문에서 함성소리가 터졌다. 그것은 또 다른 곳에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지금인 것 같다.”
매화일검의 목소리다.
“알겠소.”
이번의 목소리 주인공은 평서 기사대장 광태랑이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당연하지 않소.”
매화일검과 광태랑. 신명국 수도에 있어야 할 자와 평서에 있어야 할 자가 평동 엘즈성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뒤로 신명국의 검사 50여 명이 집결해 있었다.
“크크크, 드디어 이 몸이 나설 때인가. 그동안 몸이 상당히 근질거렸어.”
광태랑이 두 주먹을 까딱거리며 성문을 열었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멀리 에드먼의 진영에서 낡은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준비됐는가?”
“예!”
광태랑과 함께 온 병사 만여 명이 할버드를 치켜세웠다.
“드디어 때가 도래했다. 그동안 잘 참아왔다. 신명대국의 용맹한 병사들이여, 오늘은 참지 않아도 좋다. 그대들의 용맹을 맘껏 과시해도 좋은 날이란 말이다. 진격하라!”
매화일검이 먼저 몸을 날렸다. 차례로 광태랑과 50여 명의 고수 그리고 만여 명의 병사들이 제논 공작과 판이 있는 진영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큰일났습니다!”
에드먼 정찰병이 제논 공작에게 외쳤다.
“또 무슨 큰일이란 말인가? 흥, 워엔드 후작이 전공에 눈이 멀어 엘즈성을 공격한 것보다 더 큰일이 있단 말인가?”
제논 공작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이 아닙니다. 엘즈성의 동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이미 북문에서 9만의 병사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를 공격하러 온다고?”
제논 공작이 정찰병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적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제논 공작은 피식 웃었다.
“큭, 역시 9만의 정예를 상대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렷다? 아무리 급했기로서니 설마 우리 진영을 뚫고 퇴각할 생각을 하다니. 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그, 그것이 아닙니다. 직접 보십시오, 공작님.”
정찰병은 다급해 보였다.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란 걸 눈치챈 제논 공작은 급히 뛰쳐나갔다. 간이망루에 올랐다.
두두두두
말발굽소리다. 엘즈성 동문 쪽에서 먼지가 심하게 일고 있었다.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얼핏 만여 명이 넘을 때 저런 먼지돌풍이 분다.
퇴각하는 병력치고는 너무나 많다.
“공작님!”
판이 다가왔다.
“전투다! 판, 퇴각하는 병사들은 포위해서 공격하지 않는 것이 전략의 요충이다. 그들의 살길을 막아 버리면 더욱 사력을 다해 덤벼들 것이다. 진영을 비우고 저들이 통과하게 내버려둔 후 후미를 친다.”
제논 공작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저들은 퇴각병이 아닙니다. 공작님, 저길 보십시오!”
판이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제논 공작은 자세히 바라보았다. 먼지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다. 겨우 그 속에서 톡톡 높이 튀어 오르는 자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헛?’
수가 점점 늘어난다.
“신명국의 검사들이군. 헛!”
제논 공작은 신음을 흘렸다. 높이 튀어 오르는 자들의 수가 얼핏 봐도 30여 명이 넘어 보였다.
“퇴각병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래도 확실한 건 지금 우리 진영 쪽으로 진격하는 저들의 군력은 우리의 군력과 비등하다는 것이다.”
“엘즈성에는 평동왕 수라혈마와 20여 명의 검사 그리고 만여 명의 병사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마도 저들은 제국의 정예병들이 돌입하는 즉시 성을 버린 모양입니다.”
판은 긴박하게 말했다.
“이대로 정면승부를 벌이면 본 진영에 피해가 크다. 우선 진영을 비우고 길을 열어라. 저들이 그냥 지나친다면 정예병들과 합류하여 후미를 치면 되는 것이고…….”
“아……!”
판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소리를 냈다.
“본진을 공격한다 하더라도 이미 신명국 병사들은 포위되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젠 제법 대장군답군. 한시가 급하다, 판. 서두르도록!”
“옛!”
판은 군사들을 통솔하여 진영을 비우고 길을 텄다. 그는 신명국 검사들과 병사들이 그냥 지나치길 바랐다.
그러나 퇴각병치고는 적군의 기세가 너무 등등했다. 점점 적군이 가까워졌다.
제일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이 보였다.
“매화일검과 광태랑!”
제논 공작이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자신의 기억으로 그 둘은 엘즈성에 있어선 안 된다. 한 명은 비록 평동의 공작이지만 결혼하여 수도에 있어야 하고, 한 명은 평서의 기사대장으로…….
“헛!”
왜 이제야 눈치챈 것일까?
제논 공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적들은 퇴각병이 아니다. 포위하여 공격한다!”
제논 공작이 명령을 내렸다.
“어째서 저들이 이곳에……?”
당황하긴 판도 마찬가지였다.
스르릉
그는 신검을 빼 들고 돌격할 준비를 마쳤다.
‘신명국은 평동에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이런 기습을 준비했다니. 당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군.’
“적들을 베어라!”
매화일검의 호령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에드먼 병사들과 신명국 병사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논 공작은 일신의 무공으로, 판은 신검의 위력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투에 몰입하고 있는지라 신명국 검사들이 50여 명이나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제논 공작과 판은 서로 등이 부딪쳤다.
둘 주위로 신명국 검사 수십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다. 완전히 포위됐다.
“제논 공작, 당신들은 졌소. 이제 에드먼 제국은 몰락하고 신명대국의 황제폐하께서 대륙을 통일할 것이오.”
매화일검이 뇌까렸다.
“기습에 성공했다고 해서 우쭐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매화일검. 저쪽을 봐라.”
제논 공작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서는 엄청난 먼지돌풍이 일고 있었다.
엘즈성 북문 쪽에서 정예병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패한 것은 너희다.”
제논 공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역전을 했다는 통쾌한 기분이 들어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런데 매화일검도 갑자기 웃어젖히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왜 웃는 거지?”
“잠시 뒤면 내 웃음의 진의를 알 것이오, 공작.”
“그대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은 채 전사하길 바란다.”
“공작도 마찬가지요.”
충분히 고수들로 하여금 제논 공작과 판을 공격할 수 있지만 매화일검은 뜸을 들이고 있었다. 마치 에드먼의 9만 정예병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제논 공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도 손해를 볼일은 없다. 오히려 생존할 가능성이 더욱 높기에 이쪽에서 더 시간을 끌고 싶은 상황이다.
그러나 매화일검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불길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봤던 자들 중 제일 멍청하군. 그대의 명성은 허명이었다.”
제논 공작이 뇌까렸다.
매화일검이 시간을 끈 덕분에 북문에서 온 9만의 정예병들이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사이 어느새 해는 산 뒤로 넘어가고 달이 떴다. 어두운 밤하늘에 병사들의 고함소리만 요란했다.
매화일검이 뒤로 손짓했다. 고수는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뒤로 퇴각했다.
“정예병들이 이상합니다, 공작님.”
판이 말했다.
“마치 패잔병들 같은 모습입니다. 도망치던 중 얼떨결에 전투에 참가한 듯한…….”
“그럴 리가!”
제논 공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9만의 정예병들은 더욱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제논 공작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명국 병사들이다!
허나 적은 수에 불과하다. 어째서 9만의 정예병들이 싸우지 않고 도망치고 있단 말인가?
제논 공작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그때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망치고 있는 워엔드 후작을 발견했다.
제논 공작은 급히 워엔드 후작에게 뛰어갔다.
“어째서 대군을 퇴각시키는 것인가? 마음대로 엘즈성을 공격한 것은 아무 말 않겠다. 어서 퇴각명령을 철회하고 신명국 병사들을 공격하라 이르라.”
“엘즈성에 평동왕은 물론 평서왕도 와 있었다.”
워엔드 후작은 하대하듯이 말했다.
제논 공작의 눈초리가 심상찮게 변했다.
“후작! 전시라 내 앞에서 예를 갖추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묻겠다. 평서왕도 와 있다니? 그대는 그럼 그 둘과의 대결에서 부상을 입은 것인가?”
“그렇다.”
워엔드는 끝까지 예를 갖추지 않았다.
제논 공작은 눈을 부라리며 워엔드 후작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탁!
워엔드 후작이 한 손으로 제논 공작의 손을 쳐냈다. 작은 충격임에도 불구하고 제논 공작의 몸이 휘청거렸다.
“감히!”
제논 공작은 워엔드 후작을 노려보았다.
‘헉!’
제논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검은 눈동자 속에 맺힌 차가운 검 한 자루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서 공격명령을 내려라, 워엔드 후작!”
“뭔가 착각하나 보군, 공작. 에드먼 황제로부터 임명받은 대장군은 네가 아니라 나다.”
제논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전투만 끝나면 너의 불경죄는 반드시 물을 것이다.”
“불경죄? 무엇이 말인가?”
“후작인 그대가 감히 나에게 불경을 범하고 있는 죄 말이다. 내 지금이라도 당장 그대를 처형하고 싶지만 전시란 점을 감안하여 참겠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빨리 퇴각명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정예병들의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제논 공작은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황성에서 정예병들을 보았을 때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는데 어째서…… 어떻게 정예병들이 한낱 패잔병으로 변했단 말인가? 후작, 통솔능력이 이토록 한심할 줄이야. 어서 퇴각명령을 철회하라!”
“할 수 없다.”
워엔드 후작이 뇌까렸다.
“뭐라?”
“그래야 피해가 늘어나고 사기가 가라앉을 테니까.”
“뭐……?”
제논 공작과 판은 그만 어리둥절해진 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제논 공작은 질타 대신 검을 빼 들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
우선 즉결처형한 후 나중에 황제께 벌을 내려 달라고 청할 것이다.
제논 공작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다. 결심한 그는 검을 휘둘렀다. 바로 옆에 있던 판이 막을 수도 없는 쾌속의 검이었다.
스으읏
탁!
그런데 워엔드 후작은 그것을 엄지와 집게손가락만으로 잡아 버렸다.
“불경죄라고 했던가? 황제가 공작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 불경죄인가? 비록 적국의 황제라 하더라도…….”
워엔드 후작은 손목을 비틀었다.
챙!
제논 공작의 명검이 부러졌다.
“뭐, 뭐라고 했지? 네, 네놈의 정체는 뭐냐? 네놈은…… 네놈은……!”
“닥쳐라, 공작!”
워엔드 후작이 폭갈을 터트리자 그 기세만으로도 제논 공작은 뒤로 넘어졌다.
워엔드 후작은 냉랭한 눈빛으로 제논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넌…… 누구냐?”
“짐은 신명대국의 황제 주첨기다.”
워엔드 후작, 아니 주첨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투구를 벗었다. 칼이 담긴 검은색 눈동자와 윤기가 나는 검은색 긴 머리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렷한 턱선을 타고 올라가는 용미(龍尾)!
분명 주첨기였다.
제논 공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에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군. 이제야……! 하지만 신명국 황제여, 당신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이곳에 제국의 정예 9만 대군이 있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아라, 공작.”
주첨기가 말했다.
파파팟!
횃불. 제논 공작과 판의 눈동자에 수백 개의 횃불이 틀어박혔다.
제논 공작은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럴 수는 없다. 워엔드 후작이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였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으나 그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바로 신명국 검사 수백 명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도와 평서, 평동 각지에서 동원된 고수 300여 명은 한 손에 병기를, 다른 손에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 평서기사단과 병사 3만여 명이 둘러싸 쥐구멍만 한 퇴로도 남겨두지 않았다.
주첨기의 신형이 천천히 떠올랐다. 에드먼의 정예병사들은 경외감이 실린 눈으로 그 신형을 쫓았다.
주첨기는 높은 언덕에 올랐다. 그 옆으로 평동왕 수라혈마와 평서왕 진천이 날아와 고개를 숙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혜공과 만소자의 모습도 보였다.
“아……!”
열흘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강행군한 상태에 패배까지 맛보았다.
사기는 최저!
더욱이 자신들의 대장군이 신명국의 황제였다는 사실에 패닉 상태에 빠져 버렸다.
신명국 병사들과의 전투는 끝났다. 수백 명의 고수들에게 포위된 상태다.
“도, 도망쳐!”
에드먼 정예들이 주위로 흩어졌다. 그때 허공에서 검기와 화살이 뇌락처럼 꽂혔다.
“움직이지 말고 황제폐하의 존언을 받들어라, 낄낄낄!”
수라혈마의 음성이 울렸다.
주첨기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몸에서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와 모두의 어깨를 짓눌렀다. 모두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짐은 신명대국의 황제 주첨기다. 통일이 된 대륙에는 더 이상 전쟁이 없다. 그러기 위해선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 주첨기를 따라 대업을 이루지 않겠는가? 너희 에드먼의 병사들이 한 명 한 명의 대륙인으로서, 그리고 평화를 꿈꾸는 가장으로서 전쟁 없는 대륙을 위해 짐을 따르지 않겠는가? 짐은 약속하겠다. 그리고 머지않았다. 전쟁 없는 그날이 도래하기까지 머지않았다는 것을……!”
주첨기의 한마디 한마디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병사들은 주저했다.
“짐을 따르라!”
주첨기는 내력이 충만한 음성을 터트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병사들 모두가 병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뭣들 하는가? 자랑스러운 에드먼의 정예들이 저런 허황된 말에 현혹되었단 말인가? 어서 일어나라. 그리고 적국의 황제를 베어라!”
제논 공작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크윽!”
황제 주첨기의 위력이 실로 실감되었다. 어떻게 로스엔 수십만 대군을 무릎 꿇렸는지, 검은 군주 발록을 어떻게 무찔렀는지 절실히 체감했다.
에드먼 병사들 중에 판만이 신검으로 몸을 지탱한 채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승복할 수 없다, 주첨기!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나 제논 공작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결투를 받아들여라.”
제논 공작이 외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제논 공작은 눈물을 글썽였다.
“내게 제국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로운 죽음을……!”
자괴감과 치욕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쓰디쓴 눈물이었다.
주첨기는 더 이상 그 눈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를 눈치챈 수라혈마가 낄낄거렸다.
“감히 안 될 말이란 걸 알고 있겠지? 낄낄낄, 본좌가 상대해 주지. 그것으로도 만족해야 될 거다, 제논.”
수라혈마가 나섰다.
“폐하, 신에게 제논 공작의 이름을 지켜줄 수 있는 명예를 주십시오.”
진천이 이마를 땅에 댔다.
주첨기가 억지로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좋습니다, 스승님. 제논 공작과 스승님의 인연이 있으니 그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십시오. 수라혈마 스승님, 괜찮습니까?”
“원래부터 진천에게 맡기려고 했다, 제자야.”
수라혈마는 손쉽게 물러났다. 아마도 진천의 진지한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진천은 신명검을 빼 들고 제논 공작에게 걸어갔다.
주첨기는 사방을 짓누르던 내력을 풀었다.
“그래, 그대라면…….”
제논 공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마지막이 될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누가 됐든 이름만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오.”
“좋을 말이외다.”
파핫!
둘은 서로에게 날아들었다. 흡사 용과 호랑이의 대결처럼 첫 수부터 불꽃이 튀었다.
제논 공작은 이번이 마지막 대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검을 휘둘렀다.
생을 돌이켜 보니 승승장구해온 인생이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검의 한 경지를 보았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수많은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인정한 무인과 최후를 건 결전을 벌이고 있다.
제논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공작의 표정은 진천에게 번져갔다.
둘은 모든 것을 잊었다. 무슨 이유로 서로 싸우고 있는지, 내가 누구고 너는 누구인지.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사력을 다했기 때문일까? 제논 공작은 결투를 비등하게 이끌어가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 튀어나온 검기가 주위의 대지를 베었다. 공기까지 후끈 데워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땀이 비 오듯했다.
둘의 눈빛이 교차했다. 승부수를 띄울 때가 왔다.
“나 진천!”
“나 제논!”
“여기서…….”
“여기서…….”
“일검을 나누오!”
“일검을 나누오!”
서로의 검이 상대방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뎅강!
핏줄기가 분수처럼 터져 올랐다. 목이 온전히 붙어 있는 자는 진천이었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제논 공작이었다.
진천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검을 거두어들였다.
데구르르르
진천의 발 앞으로 제논 공작의 얼굴이 굴러왔다. 제논 공작은 눈을 감은 채 매우 평온한 표정이었다.
진천은 자신의 망토를 벗었다. 그것으로 제논 공작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감쌌다.
진지한 진천의 의식은 정적을 이끌어냈다.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가운데 진천은 제논 공작의 주검을 수습했다.
진천이 발을 한 번 굴렀다. 땅이 움푹 파여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곳에 제논 공작의 시신을 안치했다.
진천은 즉석에서 바위를 베었다.
비석을 만들었다.
진천은 주첨기에게 돌아갔다.
적국의 공작이 죽었는데 기분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무인이었기에…….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주첨기는 허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판에게 걸어갔다.
“경도 결투를 원하는가?”
주첨기가 물었다.
“저는…… 방랑하고 싶습니다.”
판은 힘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다.”
주첨기가 흔쾌히 허락했다.
판은 주첨기에게 짧은 목례를 취한 후 전장에서 떠났다. 에드먼이 있는 북쪽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인 남쪽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비록 생과 사가 오갔지만 엄연히 전투에서 승리했다. 신명국 병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낏!]설령이 오랜만에 주첨기의 품에서 나왔다. 설령은 에드먼의 황성이 있는 북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진군하라!”
주첨기의 호령이 터졌다.
평동왕과 평서왕, 300명의 고수, 3만의 신명국 병사 그리고 그들의 진영에 속하게 된 10만여 명의 에드먼 병사들이 황성이 있는 에드먼 수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엄한 분위기가 짙게 깔린 모두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항상 실없이 웃던 수라혈마도 이날만큼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굳은 표정이었다.
거대한 적 에드먼. 그 제국을 지켜 주고 있던 이빨과 발톱이 빠진 이때, 신명국의 이름 위로 대륙통일이란 대업의 광양(光陽)이 떠오르고 있었다.
“허억, 허억!”
에드먼 황제는 갑자기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워엔드 후작이 평동으로 향한 그날부터 악몽이 다시 찾아왔다.
매번 같은 꿈…….
꿈에서 자신은 언제나 붉은 새에게 잡아먹혔다. 잡아먹히고 칠흑 같은 어둠이 휩싸였을 때 잠에서 깼다. 다시 자도 똑같은 꿈이 반복되니 에드먼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짐은 신경과민이다.”
에드먼은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워엔드 후작이 평동을 점령하고 이어 신명국 황성까지 점령할 텐데 짐은 무엇이 그리 불안하단 말인가. 짐의 간이 이렇게나 작았다니 몰랐도다. 하늘에서 선황들께서 이 모습을 보고 얼마나 웃으실까.”
악몽 때문에 잠도 잘 수 없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먼 황제는 커튼을 젖혔다. 날씨를 확인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날씨가…… 정말 싫군.”
에드먼 황제는 커튼을 다시 쳐 버렸다.
호우처럼 쏟아지진 않더라도 최소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면 괜찮다. 그러나 안 내리는 것처럼 내리는 부슬비는 싫었다. 당장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듯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었지만 계속 기다려도 부슬비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마도 잠을 잘 못 잔 탓일 것이다.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도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게 뭔가?”
에드먼 황제는 당장 황실요리사를 불렀다. 기존의 요리사가 늙어죽어 새로운 요리사가 뽑혔다. 그런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모양이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치우겠습니다. 제, 제가 깜빡 잊고……!”
요리사는 새우요리가 든 접시를 들었다.
에드먼 황제는 새우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새우만 먹으면 두 눈이 충혈되어 잘 떠지지 않는 알레르기가 돋았다.
그런데 이날 황제의 화를 돋운 것은 새우가 아니었다. 바로 ‘작은 피닉스’라고도 불리는 라르크 요리였다. 에드먼 황제는 붉은 새가 든 요리를 내팽개쳤다.
쨍그랑!
마치 두 눈이 살아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다. 에드먼 황제는 지난밤의 악몽이 떠올랐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요리사는 몸을 떨었다.
에드먼 황제는 나가라고 손짓했다. 시녀와 시종들이 들어와 요리들을 치웠다.
에드먼 황제는 이마를 짚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침부터 붉은 새 요리라니…… 큭!’
그는 성이 나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가 떨어져 깨졌다.
에드먼 황제는 다른 액자로 바꾸라고 명했다. 잠시 후 집정관이 명화가 든 다른 그림을 가져왔다.
“썩 꺼지지 못할까!”
에드먼 황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액자 안의 그림에는 빨간 새 한 마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명한 화가가 그린 값진 예술품임에도 불구하고 에드먼 황제에게는 한없이 재수 없는 그림이었다.
“폐, 폐하! 그림이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됐다. 썩 꺼져라!”
에드먼 황제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후우, 후우!”
황제는 뒤통수가 질끈 아려옴을 느꼈다. 아침부터 화를 내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에 통증이 왔다. 몇 달 전부터 이러한 몸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체 악몽에서 나오는 그 요망한 붉은 새는 무엇이란 말인가?’
에드먼 황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새어 나왔다. 팔등으로 아무렇게나 훔친 그는 의자에 앉아 마음을 추슬렀다.
아직 집회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밖은 소란스러웠다. 복도가 시끄럽다. 갑자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냐?”
“폐하! 폐하!”
페를리우스 공작의 목소리였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폐하, 정예병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벌써? 벌써 말인가? 엘즈성을 점령한 후 잠시 돌아와서 전열을 가다듬을 생각인가? 대단하다. 엘즈성을 이렇게 빨리 점령하다니. 과연 짐의 워엔드 후작답다.”
에드먼 황제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여전히 날씨가 흐렸다.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
페를리우스 공작이 말했다.
에드먼 황제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발이 후들후들 떨렸다.
창밖에서는 붉은 새 수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건……!”
“정예병들이 오히려 신명국 검사들과 함께 수도로 쳐들어왔습니다.”
수천 마리의 붉은 새.
자세히 보니 그것은 새가 아니라 붉은 깃발이었다. 신명국의 상징인 붉은 신명기!
“붉은 새는 이것이었나…….”
에드먼 황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국경수비대가 선두의 정예병들을 보고 다리를 내려 주었다. 의기양양하게 달려온 정예병들의 모습을 보고 승전소식을 가져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워엔드 후작님과 판님, 제논 공작님이 보이지 않군. 저 뒤에 오고 계신가?”
국경수비대장이 물었다.
“없다.”
“응?”
쑤악!
정예병의 칼이 국경수비대장을 목을 베었다.
“무슨 짓이냐!”
국경수비병들이 놀라서 물었다. 안의 처소에서도 500여 명가량의 국경수비병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칼을 빼 든 정예병들의 위세에 놀랐다. 그대로 병기를 버렸다.
“이자들을 포박하고 처소에 가둬라.”
검은 눈동자의 사내가 뇌까렸다.
“당신은……?”
국경수비병들은 신명국 검사들을 알아봤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소유한 자들이니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어째서 정예병들이 신명국 검사들과……?”
국경수비병들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곧 눈앞에서 어스름거리는 칼날 때문에 사색이 되었다.
정예병들이 국경수비병들을 포박하여 처소에 가두었다.
군대는 진군을 계속했다.
중간중간에 지방귀족들의 적은 사병들이 있었다. 소수에 불과했다. 워낙 왕권중심의 나라인지라 큰 귀족이라 할지라도 가장 많은 사병을 보유한 것이 5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대항조차 해 보지 못했다. 평동에서 에드먼의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 사로잡히거나 전사했다.
“신명기를 더욱 높이 들어라, 낄낄낄!”
수라혈마는 기분이 좋았다. 진천도 기분이 썩 괜찮아져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쪽은 수백 명의 고수와 13만의 병사가 있다. 하지만 적국의 황성에는 만 명의 친위병뿐.
“통일이 코앞이다.”
[우낏!]설령도 수라혈마에게 동조했다.
[끼끼…….]설령의 울음소리에 수라혈마의 품 안에 있는 아기설령도 회답했다.
수라혈마와 진천만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을 뿐 나머지는 진중함 그 자체였다.
10만이 넘는 군대가 이동한다. 먼지돌풍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병사들의 얼굴에서는 진지함이 묻어나왔다.
“멈춰라!”
수도로 통하는 문에서 수비병 천여 명이 가로막았다.
“펄럭이는 그 깃발은 신명기가 아닌가? 어째서 신명기를 들고 있는 것인가?”
대답은 필요 없다. 정예병들은 수비병 1천을 돌파했다. 순식간에 수비병들은 사로잡혔다.
주첨기가 서두로 나왔다.
“시, 신명국의 황제!”
그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도 주첨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수십만 명 중에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평동왕과 평서왕!”
붉은 수라혈마, 푸른 진천! 둘의 명성도 모르는 자가 없다. 수비병들은 사로잡힌 채 부르짖었다.
“꺄악!”
전투를 본 수도의 백성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주첨기는 절대적으로 약탈을 금지시켰다. 비록 에드먼의 정예병들이 자신의 수도를 약탈할까 싶었지만 과거 중원의 역사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일단 군대는 개인을 묵살한다. 그리고 군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해진다. 살인, 방화, 약탈. 이것이 바로 군대의 역할이다.
곧장 황성으로 향했다. 수도를 순찰 중이던 병사들은 주첨기의 군대를 보고 도망쳤다.
갑자기 신명국 검사들과 병사들이 수도로 들이닥쳤다!
수도의 백성들은 모두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창문도 열지 않았다.
식탁이나 침대 밑에 숨고, 혹은 지하실로 들어가 자물쇠를 채웠다.
우는 아이의 입을 막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수도 안에는 주첨기의 군대를 막을 병사가 없었다. 주첨기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촤차차착
과연 훈련을 잘 받은 병사들인지라 순식간에 황성을 포위했다.
페를리우스가 급히 성벽 위로 올라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엄청난 수의 대군이 몰려와 있었다.
워엔드 후작과 함께 진군했던 정예병들이었고, 그 속에 신명국 검사들도 보였다.
“대, 대……!”
페를리우스는 말을 더듬었다. 이제이가 그에게 ‘차분의 마법’을 걸었다. 그제야 페를리우스의 안색이 바르게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 신명국을 점령하러 간 정예병들이 오히려 신명국 검사들과 함께 수도로 들이닥치다니 말이오. 헛? 저자는 신명국의 황제가 아니오. 그리고 그 옆에는 평서왕과 평동왕까지 있소. 정예병뿐만이 아니오. 수백 명의 검사와 3만여 명의 병사들까지 왔소. 크크,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소. 대마법사 이제이, 그대에게 무슨 현명한 계책이 없소?”
거의 울상이 된 페를리우스가 물었다.
“워엔드 후작이 9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나갈 때부터 이럴 것 같았습니다.”
이제이는 평상시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제국이 몰락할지도 모르는 큰일이오. 왜 이렇게 담담하시오, 이제이?”
페를리우스는 눈물을 흘렸다. 콧물까지 흘려 그 모습이 상당히 추했다.
“남은 병사라곤 만 명밖에 없습니다. 이미 적은 코앞까지 닥쳤습니다. 그것도 일당만이라는 평동왕과 평서왕이 왔고 수백 명의 검사, 거기에 전신(戰神)이라 불리는 신명국의 황제까지……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제국은 아쉽게도 끝났습니다.”
“아쉽게도?”
“공작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군요. 어떻게 저들이 이곳에 왔든지 간에 제국은 끝났습니다. 끝났다고요. 끝입니다! 끝장입니다!”
이제이는 미친 듯이 외치며 자신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담담하게 보였지만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페를리우스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페를리우스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대체 이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엔드 후작!”
성벽 위에서 페를리우스가 외쳤다.
대답이 들릴 리가 없다. 그는 이미 죽었거나 배신했을 테니까.
“공작님, 전 이만 가겠습니다.”
“어딜 가신단 말이오, 이제이?”
“그럼…….”
휘리리릭
훼이스트를 시전한 이제이는 빠른 속도로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페를리우스는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이 원활하지 않았다.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이는 이미 황성 안의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텔레포트!”
이제이가 짧게 말했다. 그가 사라지자 마법진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공작님!”
병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공작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페를리우스는 성안에 군집한 만여 명의 병사들을 보았다.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직시했다.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가 하얀 말을 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주첨기가 페를리우스를 검으로 가리켰다.
“패국 에드먼은 투항하라! 황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를리우스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투항이라니! 수백 년을 이어온 제국이 무너질 것 같은가? 투항해야 할 것은 그쪽이다.”
페를리우스가 외쳤다.
“짐은 한 번만 말한다.”
“기, 기다려!”
페를리우스는 황급히 황제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제일 상석에 홀로 앉아 있는 에드먼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신명국 황제가 항복을 권고했습니다.”
“항복은 없다. 나가라! 이곳은 짐의 공간이다. 짐은 이곳에서 주첨기 그놈과 결판을 낼 것이다.”
“폐, 폐하!”
“나갓!”
에드먼 황제는 별안간 뇌성을 터트렸다.
페를리우스는 이를 악물며 뛰쳐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황성 안에 있던 귀족들이 그에게 몰려와 대책을 물었다.
페를리우스는 바로 외쳤다.
“전군 농성한다.”
별다른 계책이 없다. 적들을 막을 병력도 없다. 시간을 끈다고 해도 응원군이 와 줄 리 없다. 이미 에드먼은 대륙의 적으로 선포된 지 반년이 지났다.
“어쩔 수 없습니다. 투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귀족들의 의견은 대체로 투항하자는 쪽으로 몰렸다.
그러나 페를리우스는 달랐다. 그는 결사의 의지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제 주첨기는 반란의 씨앗을 남겨두지 않을 자다. 투항한다 해도 목숨을 보장받긴 힘들다. 나는 모든 걸 떠나서 수백 년 전통의 제국이 쉽게 타국에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다. 나는 싸우겠다.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운다.”
“공작님……!”
귀족들은 검을 쥐었다.
농성은 시작되었다.
평동왕과 평서왕이 수백 명의 고수들을 이끌고 성벽을 단숨에 넘어 버렸다. 그들은 넘자마자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벤 후 성문을 파괴했다.
황성 안으로 주첨기의 병사들이 진입했다. 어지러운 칼부림소리와 피가 난무했다.
위엄으로 가득하던 황성의 외벽이 핏물로 뻘겋게 물들었다. 전투가 끝난 것은 얼마 후였다.
“결국 전사했군.”
주첨기는 전투 도중에 죽은 페를리우스의 시신을 보며 혀를 찼다.
아까운 인물이다. 재능이 뛰어나고 나라에 충성을 다 바쳤다. 그는 제논 공작과 마찬가지로 투항 대신 죽음을 택했다.
“이들은 모두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충신들이다. 시신을 훼손하지 말고 한쪽에 잘 안치해 두어라. 모든 상황이 끝났을 때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를 것이니라.”
주첨기가 명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드먼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간 그의 정책이나 여러 언행으로 봤을 때 그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홀로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에드먼 황제, 그는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다.
‘에드먼 황제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마라. 양 대국의 황제끼리 끝낼 일이 있다.”
주첨기의 어조가 너무 무거운지라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