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69
제7화 연합군 정벌대
주첨기는 혼자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병사들이 죽어가며 흘렸던 피가 바닥에 흐르고 있다.
첨벙
소리가 날 정도로 많이 고였다.
주첨기는 핏물을 밟으며 강한 기운이 꿈틀대는 곳으로 걸어갔다.
주첨기는 한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바로 황제의 집무실 앞이다.
굳게 잠겨 있는 문에는 상당한 피가 튀어 있었다. 주첨기는 지그시 문을 밀었다. 문은 열리는 것 대신 뒤로 밀려 넘어졌다.
핏빛 같은 붉은 융단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끝에는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그는 말없이 왕관을 벗어 옆 탁상에 놓았다.
“나를 이기면 이걸 가져도 좋다, 주첨기.”
그가 말했다.
그는 주첨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빼 들었다.
“에드먼…….”
주첨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다스렸던 황제에게 더 이상의 수치를 안겨 주기 싫었다.
주첨기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검을 쥐었다.
에드먼과 주첨기는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에드먼은 황좌에 있으면서도 검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에드먼의 눈은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
에드먼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을 때 지면을 박찼다.
주첨기는 비스듬하게 검을 올렸다.
에드먼은 일격을 노렸다. 주첨기의 미간 사이를 노린 검이 뱀의 혀처럼 날아들었다.
주첨기는 내력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기운을 일으키지 않았다.
순수한 힘과 비쾌한 속도!
둘의 눈빛은 한순간에 수십 차례 오갔다.
주첨기가 에드먼의 검을 쳐냈다. 에드먼은 손에서 놓칠세라 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의 피부가 터져 피가 주위로 튀었다. 에드먼은 그런 것 따윈 상관하지 않았다. 더욱 거세고 빠르게 위에서 아래로 주첨기를 향해 휘둘렀다.
주첨기는 몸을 비틀었다.
휘익
몸을 절반만 회전하며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에드먼의 목 앞에서 주첨기의 검이 멈추었다.
에드먼은 주첨기를 노려보았다.
“네가 이겼다, 주첨기.”
에드먼은 자결할 생각이었다. 주첨기의 검에 자신의 목을 들이댔다.
주첨기는 빠르게 검을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죽기엔 묻고 싶은 게 많지 않은가?”
주첨기가 물었다.
“크, 크, 크하하핫!”
에드먼은 흡사 미친 사람처럼 이마를 짚고 웃어젖혔다. 그는 문득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워엔드 후작은?”
“나였다.”
주첨기가 얼굴을 살짝 흔들었다. 내력으로 근육과 뼈를 움직여 외모를 바꾸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주첨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워엔드 후작의 얼굴로 바뀌었다.
에드먼은 죽일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에드먼은 두 눈을 감았다.
조용했다. 어두운 앞이 붉게 물들어갔다.
핏!
에드먼은 머릿속 한 핏줄이 끊어짐을 느꼈다. 뒤통수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충격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개자식아!”
에드먼은 검을 번쩍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벌어진 입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눈과 귀, 코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투두둑 투두둑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에드먼은 눈앞이 가물거렸다.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미칠 듯 박동하더니 삐 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에드먼은 선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첨기가 몸을 돌렸다. 그를 가리킨 에드먼의 검도 떨렸다.
땡그랑
에드먼은 검을 놓쳤다. 곧 그의 몸도 검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분노로 가득한 에드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는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힘을 거기에 쏟아 부었다. 이빨과 이빨이 맞물려 깨졌다.
주첨기를 향하던 분노의 눈은 결국 감기고 말았다. 에드먼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고요한 가운데 주첨기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전쟁은 끝났다.
황성의 탑 위에 펄럭이고 있던 에드먼 국기가 떨어졌다. 그곳에 신명기가 대신 자리 잡았다.
떨어진 에드먼 국기는 한 줌의 재로 변해 바람결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에드먼의 수도가 점령당하고 에드먼 황제가 죽었다. 이 일은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던 북방의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들은 투항하는 것 대신 전쟁을 택했다. 북방귀족들이 연합하여 사병 5천을 만들었으나 주첨기의 병력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평동왕 수라혈마가 검사 100명과 함께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그들을 물리쳤다.
북방귀족들은 대부분 이번 전쟁에서 전사했다. 수백 년 전통의 역사란 것은 그런 점에서 무서웠다.
매화일검이 병사들과 함께 남은 잔당들을 처리했다.
전쟁은 국가가 하는 일이고 생업은 백성들이 하는 일이다. 백성들은 생업을 떠날 수 없다.
에드먼은 빠르게 안정되어갔다. 백성들에게 바뀐 것은 이제 그들이 섬겨야 할 대상이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라는 것뿐이었다.
“에드먼은 없다. 이제부터 이곳을 평북(平北)이라 명하노라.”
남은 에드먼 세력들의 처리가 끝났을 때 주첨기는 전역에 선포했다.
이제 신명국 황제가 선포한 대로 에드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각 지역에 걸려 있던 에드먼 국기는 내려지고 문장들도 모두 지워졌다.
“감축드립니다요, 폐하. 명실상부한 대륙의 패자가 되셨습니다요. 이제 어떤 나라든 폐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요.”
혜공은 진심으로 기뻤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계로 온 후로 많은 일을 겪었다. 고수들에게 어머니 대접을 받기도 했고, 많은 전쟁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기도 했고, 대마도사에게 납치도 당했다. 그동안 그 파란만장했던 세월들을 이제 모두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1관문은 통과했으니 제2관문이 남았습니다.”
주첨기는 한층 무거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또…… 무엇이 남았습니까요?”
혜공은 주첨기의 눈치를 살폈다.
“우선 에드먼을 완벽한 평북으로 만들어야겠지요.”
“그것이 제2관문입니까요?”
“아닙니다. 통일입니다, 혜공 공.”
주첨기가 말했다.
음성이 바닥에 무겁게 깔렸다. 평북이라고 선포한 후부터 주첨기는 민심을 잡는 데 주력했다. 우선적으로 국가에 소속되어 있던 공노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몬스터를 퇴치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여러 가지 민심정책을 수행했다.
신명국은 이제 다시없을 대륙제일의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주첨기는 매화일검을 불렀다.
“매화일검, 짐은 그대를 평북왕으로 임명하려고 한다.”
주첨기가 말했다.
매화일검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그 명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왜지?”
“신은 결혼을 하면서 뉴얼 국왕과 약조한 바가 있습니다. 대신 신이 한 인물을 천거하면 어떨는지요? 전공을 세운 이가 승관하는 것은 옳은 일이오나 현재의 에드먼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통치를 받아 많이 혼란스럽고 아직도 대국에 반심을 품은 자들이 상당합니다. 왕으로서 인심이 후덕하고 덕망이 높은 방각대사를 천거하고 싶습니다.”
방각대사. 신명국 황성에 만민당주로 있으며 수도 내에서 많은 덕망을 쌓아왔다.
주첨기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방각대사라면 이 평북의 민심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짐은 오늘날이 있기까지 그대의 공을 잊을 수가 없다.”
“폐하, 하오면 후에 대륙을 통일하시면 뉴얼국의 영토를 저에게 위임하여 주십시오. 그것이 뉴얼 국왕과 신과의 약조였습니다.”
매화일검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뉴얼국의 영토를?”
주첨기가 되물었다.
“예, 폐하. 뉴얼 국왕이 이르길, 대륙의 대세는 신명대국에 있으니 언젠가 대륙은 통일될 것이다. 그때 매화일검 그대가 뉴얼국을 영토로 받아 뉴얼국의 전통을 이어 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대륙은 통일될 것이다? 뉴얼 국왕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군. 좋다, 그리하도록 하지. 후에 그대를 평남왕으로 임명하겠다.”
“저는 왕위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약조만 지킬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천은을 갚을 길이 없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갚고 있다, 매화일검.”
주첨기가 미소 지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매화일검은 세 번 절한 후 물러났다.
주첨기는 매화일검이 천거한 방각대사를 평북의 임시영주로 임명했다. 그의 기대대로 방각대사는 그만의 인덕으로 평북의 민심을 빠르게 바로잡아나갔다.
민심이 잡히니 치안도 잡혔다. 들끓던 도적들이 사라지고, 어두운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거리가 만들어졌다.
구 에드먼의 상인들은 더욱 살맛이 났다. 대륙 전체에 걸려 있던 에드먼에 대한 금제가 풀린 것이다. 오히려 주첨기는 농상(農商)을 지지하여 상인들의 교역에 힘을 돋워 줄 정책들을 여럿 펼쳤다. 덕분에 타국을 오가는 상인들의 모습이 부쩍 늘어났다.
다만 토지 부분에선 잠시 방각대사에게 위임했다. 통일이 될 때 전국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즘 민심이 어떤가?”
주첨기가 방각대사에게 물었다.
에드먼을 점령한 지 100째가 되는 날이었다.
“관세음보살, 구 에드먼 시대 때보다 더욱 살기가 좋아졌다며 황제폐하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저 짐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닌가?”
“소승은 입이 하나밖에 없어 두 가지 말을 못합니다, 폐하.”
“대신 입에 꿀을 바른 모양이군.”
주첨기가 기분 좋게 뇌까렸다.
‘이제 됐다.’
주첨기는 100일을 기다렸다. 자신이 말한 제2관문을 언제나 고대하고 있었다.
바로 통일이 코앞이다. 전쟁이 없는 이상국(理想國)! 그것이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진 것이다.
평북의 민심이 잡혔으니 한 가지만 빼면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바로 이터널 국왕 제이너스에 대한 생각이었다. 한때 신명대국의 식구로 있었던 그에게 ‘나라를 포기하라’고 권고하기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미 결정은 내려져 있다. 더 이상 고민해 봤자 시간만 낭비될 뿐이다.
이미 결심했으니 속전속결이다.
주첨기는 매화일검을 불렀다. 많은 고수들 중 그가 외교적 능력에서 가장 뛰어나다.
“매화일검.”
“예, 폐하.”
“발 빠른 자들을 시켜 각국에 권고문을 보내라. 그리고 그대가 그들의 대답을 듣고 와라.”
“드디어…….”
“그렇다. 에드먼을 점령한 후 짐은 이날만을 기다렸다. 전쟁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거늘…… 부디 각 국왕들이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예, 폐하.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매화일검은 천지시당에서 발 빠른 자들을 골랐다. 그리고 각국으로 서한을 보냈다.
매화일검은 이틀의 시간을 둔 뒤 평북에서 떠났다.
대륙통일(大陸統一)!
그 마지막 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부디 힘을 써서 손잡이가 부서지는 일은 없길…….
주첨기를 비롯해 고수들은 에드먼을 점령한 지 100여 일이 지난 지금, 황성이나 평동, 평서로 돌아가지 않고 평북에 머무르고 있었다. 또한 에드먼에서 키웠던 정예군도 해산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점들은 속국들의 불안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에드먼까지 점령하고 난 신명국은 이제 남은 나라들이 전부 연합한다 해도 막을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구 로스엔의 속국인 케이트, 이콘, 드리안.
구 율리안의 속국인 올드얼, 뉴얼, 페.
구 에드먼의 속국인 이터널, 마거크, 브디스.
그들의 불안감은 날아온 한 장의 서찰로 인해 현실이 되었다.
드리안 왕국.
“하릴 백작.”
점심을 먹자마자 왕성에서 급한 호출이 왔다. 하릴 백작은 후식을 먹지도 못한 채 왕성으로 향했다.
전령의 다급한 표정을 보니 왕성에선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다.
하릴 백작은 과거 신명대국과의 외교적 공적을 인정받아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느긋하시오, 하릴 백작. 큰일이 났소.”
한 대신이 말했다.
“점심을 먹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소?”
“국왕전하께서는 지금 병상에 누우셨소.”
“병상이라니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셨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 하지만 국왕전하께선 하릴 백작만을 찾고 계시오.”
“알겠소.”
하릴 백작은 서둘러 국왕의 침소로 향했다. 방 안에는 왕비는 물론이고 왕자들까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릴 백작, 어서 오세요.”
왕비가 서둘렀다.
“하릴 백작…….”
국왕이 하릴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폐하,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병상에 누우시다니요.”
국왕은 하릴 백작에게 서찰을 읽으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하릴 백작은 서찰을 받아 들었다.
“신명국에서 온 것이로군요.”
하릴 백작은 신명국이란 단어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이토록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명국 덕이 매우 컸다.
하릴 백작은 서찰을 펴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권…… 고…… 문?”
하릴 백작은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케이트 왕국.
바다에서 우는 갈매기소리가 왕성 안까지 들린다.
밖에서 시끄럽게 우는 갈매기와는 다르게 왕성은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적막하기 그지없다.
왕성의 분위기가 침체된 것은 신명국에서 전달한 한 통의 서찰 때문이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소.”
케이트 국왕은 이마를 짚었다.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온통 헤집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맞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무리 은혜국이자 형제국인 신명국이라 해도 이건 장난이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모두 분노했다.
하지만 그들 어느 누구에게도 신명국을 공격하자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고 장난도 아니다. 신명국의 황제는 지금 진심이시다.”
국왕은 낮게 중얼거렸다.
“폐하, 로스엔에 수탈당하면서도 600년을 꿋꿋하게 지켜낸 본국입니다. 이런 서찰 한 통에 나라를 넘긴다는 것은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대신에게는 좋은 계책이라도 있나?”
“……!”
다시 적막해졌다.
케이트 국왕은 침묵 속에 파묻혔다.
이콘 왕국.
“없습니다.”
시리무스 백작은 짧게 대답했다.
국왕은 여러 대신들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역시 대답은 같았다.
국왕은 회의를 마치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고민을 너무 한 때문일까?
그 이튿날부터 국왕의 머리칼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했다. 국왕은 머리가 복잡하면 자신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휘저었다. 그때마다 한 손 가득히 머리가 뽑혀 나왔다.
“정말이십니까?”
시리무스 백작이 되물었다.
국왕은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 짐은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작은 나라들이 힘을 합친다 한들 신명국을 이길 수는 없다. 이래도저래도 결과가 똑같다면 죽는 이가 나오지 않는 것이 내가 백성들을 위해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 같군.”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다.
국왕은 바로 항복서를 자필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항복서를 보는 국왕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국왕의 고개도 시리무스와 대신들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다.
마거크 왕국.
백성들은 마거크 국왕을 현명하고 인자하며 백성들을 위할 수 있는 군주라고 했다.
백성들이 느끼는 것처럼 마거크 국왕은 제일 먼저 백성들을 위했다.
신명국으로부터 권고문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백성들이었다.
수백 년 이어온 나라를 편지 한 통에 넘겨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쟁을?
그동안 에드먼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독립전쟁을 하지 않은 이유는 병력의 약화보다도 역대 마거크 국왕들의 변함없는 신조 덕분이 컸다. 이 땅에 전쟁은 없다.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명국에선 곧장 전쟁을 일으킬 게 뻔하다. 그들의 강함은 그간 그들이 치러왔던 전쟁들에서 증명된 바다.”
신명국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할 것이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 전쟁은 없다.’
“전쟁이 없는 통일대륙…….”
신명국의 이상은 역대 마거크 왕조와의 이상과 일치했다. 뜻이 같은 이상 약한 쪽이 접고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거크 국왕은 눈물을 흘리며 항복서를 써내려갔다.
브디스 왕국.
왕성 중앙에 우뚝 선 황금석상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브디스 국왕은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자신의 석상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명국에서 에드먼과의 외교적 관계를 끊는 대가로 준 선물 아닌 선물이다.
“이번에 에드먼을 점령하고 많은 재물들을 얻었겠다? 이번엔 더 큰 석상을 달라고 운을 띄워 볼까? 히힛!”
브디스 국왕은 생각만 해도 좋았다.
“정말 그래야겠다. 에드먼을 점령한 것에 내 공도 있을 터, 설마하니 황금 몇 조각 떼어 주지 않겠어? 적어도 이 석상보다 두 배 이상은 커야겠지?”
브디스 국왕은 체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한 대신이 뛰어왔다.
“폐하, 이것을 보십시오!”
“그렇잖아도 잘 왔다. 내 신명국에 서찰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대가 좀 작성해야겠다.”
“폐하, 우선 이것을……!”
“뭐길래 그리 호들갑인가?”
서찰을 읽는 브디스 국왕의 손이 떨렸다. 해맑은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불독처럼 변했다.
“가, 감히 내 나라를 넘봐? 황금석상을 안겨 줘도 모자랄 판에…….”
이터널 왕국.
이터널 국왕 제이너스는 신명국이 에드먼 제국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일인 듯 정말로 기분 좋았다. 특별히 이날 축제까지 벌였다.
그런데 귀족들은 그다지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제 신명국이 대륙제일의 패권을 쥐게 되었으니 그들이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국…….”
국왕 제이너스는 신명국에서 온 서찰을 곱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내심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황성 먼 곳에서 지켜본 황제 주첨기. 그는 에드먼을 점령하는 것으로 마칠 인물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대륙통일을 꿈꾸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터널을 되찾기 위해 신명국에서 수년 동안 자신을 갈고닦았다. 지금이 이터널 최고의 위기다.
제이너스는 이터널의 왕으로서 전쟁을 각오했다.
“죄송합니다, 주첨기님.”
페 왕국.
구 율리안 영토에서 갑자기 에드먼 군사들이 철수했다. 페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진했다.
“이상합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에드먼에 큰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지금과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페국의 병사들은 과거 자신들이 점령했던 영토까지 수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먼 제국이 멸망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페국은 가슴을 졸였다.
기회를 잡아 영토를 늘렸는데 신명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빌미로 이를 돌려 달라고 한다면…….
페의 국왕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역시 왔군.”
신명국에서 서찰이 도착했다.
국왕은 지금껏 늘린 영토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물며 나라를 전부 포기하라는 전문을 보았을 때는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포기할 수 없다. 신명국은 이제 막 덩치만 커진 어린아이일 뿐이다. 주변나라들과 규합하면 신명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더 많은 땅을 얻을 수도 있다.”
국왕은 진심이었다. 그는 신명대국에서 들어왔던 원조금을 전부 징병금으로 돌렸다.
가능한 한 많이,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다.
뉴얼 왕국.
“딸아이는 잘 있는지…….”
뉴얼 국왕은 딸 생각이 들었다.
든든한 남편을 얻어 출가한 지 반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딸아이에게서 온 연락은 두 번밖에 없었다.
딸자식 키워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에 안도하기도 했다.
“서찰이 왔습니다.”
“오, 그래?”
뉴얼 국왕은 혹시나 딸아이의 서찰일까 기대했다. 그러나 서찰에는 신명국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뉴얼 국왕은 서찰을 개봉했다.
‘이건?’
“하, 하, 하하하!”
뉴얼 국왕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국왕은 왠지 모르게 대소가 터져 나왔다.
“대륙이 최초로 통일되겠군.”
뉴얼 국왕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신명국이 에드먼을 점령한 후 이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오히려 권고문이 날아드니 시원한 기분마저 들었다.
뉴얼 국왕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회신을 쓰기 시작했다.
올드얼 왕국.
국왕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신명국이 에드먼까지 점령함에 따라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대륙제일의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올드얼 국왕은 뉴얼의 눈치를 더욱 보게 생겼다.
뉴얼의 셋째공주와 신명국의 매화일검 공작이 혼인을 한 것은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신명국의 황제는 매화일검 공작을 매우 총애한다고 하니 이미 신명국과 뉴얼은 깊은 관계가 되었다.
만에 하나 뉴얼과의 마찰이 있을시 신명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컸다.
“크…… 에드먼을 고립시키는 게 아니었다. 이건 완전히 대륙의 균형이 신명국 쪽으로 쏠려 버렸어.”
국왕은 신음을 흘렸다.
“폐하, 큰일났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갑자기 대신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항복권고문을 펼쳐 들었다.
“하―!”
국왕은 기가 막혔다.
“통일을 하여 전쟁이 없는 대륙을 만들겠다고? 그럴 거라면 차라리 내게 신명국을 바치라 하라.”
국왕은 항복권고문을 찢었다.
“여봐라! 급히 각국에 내 뜻을 전하라. 올드얼 국왕이 대륙의 모든 국왕들을 뵙고 싶다고.”
올드얼 국왕은 각국의 왕을 긴급 초청했다.
다그닥다그닥
야심한 밤에 빠르게 달리는 마차들이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에서부터 마부까지 모두 낯익은 자들이다.
다름 아닌 일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변장하여 왕을 올드얼까지 호위했다.
소국들의 왕들은 은밀히 올드얼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쓰여 있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신명국의 권고문!
바로 그것 때문이다.
“흥!”
올드얼 국왕은 뉴얼 국왕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 늙어서는…… 쯧쯧!”
뉴얼 국왕이 혀를 찼다.
“뭐야?”
올드얼 국왕은 주먹다짐이라도 할 법한 기세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다른 왕들이 둘을 말렸다. 올드얼과 뉴얼의 신경전은 예전부터 유명하다.
둥그런 원탁에 둘러앉은 왕들.
소국들의 왕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왜 모든 분들을 초청했는지는 아실 것이오.”
“권고문 때문이지 않소. 본국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 권고문이 날아들었다고 들었소이다.”
“맞소. 지금 이곳에는 과거에 앙숙이었던 나라도 있고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힌 나라들도 있소. 이제 그 모든 것을 잊고 뜻을 하나로 모을 때가 왔소.”
올드얼 국왕이 말했다.
“하하…….”
뉴얼 국왕은 가소롭다는 듯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올드얼 국왕이 그를 노려보았다. 둘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올드얼 국왕부터 말씀을 이행하셔야겠소.”
마거크 국왕이 사람 좋게 웃었다.
“자, 이런 내용은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 올드얼은 신명국에 대항할 것이오. 수백 년 이어온 나라를 신명국 황제의 한마디에 넘겨줄 수 없단 말이오.”
올드얼 국왕이 말했다.
“맞소,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오.”
“맞소이다.”
브디스 국왕과 페 국왕도 동조했다.
“역시 일국의 국왕들답소이다.”
올드얼 국왕은 입을 열며 다른 국왕들의 눈치를 살폈다.
드리안 국왕과 케이트 국왕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하고, 젊은 이터널 국왕은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뉴얼 국왕.”
올드얼 국왕이 입꼬리를 기분 나쁘게 올렸다.
“왜 그런가?”
“그대는 용기가 없어 신명국에 대항하지 못하겠군. 그렇지 않은가?”
“맞다.”
“뭣?”
“내 백성들을 죽일 용기가 없다. 뉴얼은 신명국의 권고를 받아들일 것이다. 대세는 신명국으로 완벽하게 기울었다. 이를 거역하면 피의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뉴얼 국왕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고 선조들이 일궈온 나라를 포기한단 말이냐? 그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 뉴얼 국왕,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뉴얼은 본래 우리 올드얼의 영토였다.”
“훗!”
뉴얼 국왕은 이런 자리에서까지 논쟁을 벌이기가 싫어 가볍게 무시했다.
오히려 올드얼 국왕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도 마찬가지요. 뉴얼 국왕의 생각에 동조하오이다. 이콘도 신명국의 권고를 받아들일 것이오.”
“마거크도 그렇소.”
이콘 국왕과 마거크 국왕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올드얼 국왕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두 분은 뉴얼 국왕에게 속고 있소. 뉴얼과 신명국의 관계를 모르고 이자의 생각에 동조한단 말이오?”
“이자? 올드얼 국왕, 한 번만 더 함부로 말한다면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뉴얼 국왕이 살기를 흘렸다.
“험험!”
올드얼 국왕은 헛기침을 했다.
뉴얼 국왕은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올드얼 국왕이었다. 쓸데없이 도발해서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내 스스로 생각한 것이니 올드얼 국왕께서는 내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되오.”
마거크 국왕은 부드럽게 말했다.
“올드얼 국왕은 귀국만을 생각하지 마시오. 귀국이 신명국에 대항하겠다고 해서 분위기를 억지로 이끌어내려 하지 마시오. 이미 모두 여러 날을 고민해서 결정을 내리고 이곳에 왔소. 올드얼 국왕은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고 들어 주시오. 마치 신명국에 대항하지 않는 나라는 겁쟁이 나라라는 듯 말하지 말란 말이오.”
이콘 국왕이 덧붙였다.
“그럼 뭐란 말이오? 귀국의 말에 따르면 권고를 받아들여 나라를 포기하는 게 현명한 일이란 말이오? 참으로 웃기는 일이지 않소?”
“적어도 내 백성들에게는 현명한 일이오. 그리고 뭐가 웃긴 일이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소만? 올드얼 국왕, 귀국도 율리안의 속국이 아니었소?”
“그것과 이것이 같소?”
“같소.”
이콘 국왕은 툭 내뱉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드얼 국왕, 그대가 아무리 나를 설득하려 한다 해도 나는 이미 결심했소. 권고를 받아들일 것이오. 모두에게 내 뜻을 전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겠소.”
이콘 국왕은 회의실에서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마거크 국왕과 뉴얼 국왕까지 일어섰다. 둘은 차례로 회의실에서 나갔다.
이콘 국왕과 뉴얼 그리고 마거크 국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발견했다. 서로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는 것을…….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당사자들이었다.
“흥!”
올드얼 국왕은 셋이 사라지자마자 기분 나쁜 내색을 했다.
“귀국들은 어떻게 하겠소? 브디스와 페는 나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소.”
올드얼 국왕이 드리안, 케이트, 이터널 국왕에게 말했다.
드리안 국왕과 케이트 국왕은 사실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국왕회의에 참석하여 대세에 따르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패가 두 갈래로 나뉜 것이다.
“잠시 기다리시오. 내 한 번만 더 생각해 봐야겠소이다.”
드리안 국왕이 말했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좋소. 이대로 나라를 포기할 수 없소. 비록 전쟁 중에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말이오.”
“역시 드리안 국왕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소. 케이트 국왕께선 어떻게 하실 것이오?”
“흠, 신명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은 안 되겠소? 과거 대국들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오. 그러면 권고문을 거둘지도 모르잖소? 이대로 전쟁을 하겠다, 안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는 이 일을 피해갈 수 있는 방책을 생각해야 할 것 같소.”
케이트 국왕은 신중한 표정이었다.
한 번도 말하지 않고 있던 이터널 국왕 제이너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오. 신명국의 황제는 한 번 뜻을 품으면 기필코 이루어내는 사람이오.”
“아……!”
다른 왕들이 신음을 흘렸다.
“이터널 국왕, 귀국과 신명국과의 관계는 잘 알고 있소. 그런데 귀국에도 신명국이 권고문을 보냈단 말이오?”
“신명국은 대륙을 통일하기로 뜻을 품었소. 이건 나 제이너스와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님과의 일이 아니오. 이건 국가 대 국가의 일이오. 이터널도 신명국에 대항할 것이오. 신명국으로서도 왕좌를 대가 없이 가져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오.”
제이너스는 힘차게 말했다.
“아, 역시 젊은 패기가 넘치오. 케이트도 전쟁에 가담할 것이오.”
“좋소이다. 이제 우리 연합군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소. 모두 각국으로 돌아가 병력을 키우는 것이오.”
“좋소!”
아홉 개의 약소국 중 세 나라가 빠지고 여섯 나라가 신명국에 대항하기로 결론이 났다.
드리안과 케이트는 서부연합군.
마거크와 이터널은 북부연합군.
페와 올드얼은 남부연합군.
이 세 연합군을 통틀어 반명(反明)연합군이라 칭하기로 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신명국의 공작 매화일검이었다.
“매화일검 공작……!”
제이너스가 놀라서 부르짖었다.
앉아서 열띤 의견을 주고받던 왕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은 적의가 어린 눈빛으로 매화일검을 노려보았다.
“마침 각국의 전하께서 이곳에 모였다 하여 권고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이리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매화일검이 말했다.
“오냐, 그렇잖아도 사자를 보내기가 번거로웠는데 잘 왔다.”
올드얼 국왕은 냉랭한 어조였다.
“지금 공작의 눈앞에 보이는 이들이 전부 신명국에 대항할 반명연합군의 국왕들이다. 드리안, 케이트, 마거크, 이터널, 페 그리고 올드얼. 역사가 깊고 용맹한 여섯 나라는 결코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 오히려 신명국에서 이 연합군을 조심해야 한다고 황제께 전하라, 공작.”
“아쉽게 되었습니다. 황제폐하께선 전쟁을 원치 않으십니다.”
매화일검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흥, 헌데 지금 도발하고 계시지 않느냐?”
올드얼 국왕이 콧방귀를 뀌었다.
“전쟁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통일된 대륙의 미래를 위해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떠하십니까?”
“흥, 남의 일이라고 번지르르 말만 잘하는구나. 썩 돌아가서 전하거라. 우리 여섯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매화일검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제이너스와 눈이 마주쳤다.
매화일검은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제이너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입만 뻐금거리다 이내 닫히고 말았다. 탁자 위에 놓인 차를 술 삼아 단숨에 들이켰다.
“제이너스 전하.”
매화일검이 말했다.
“…….”
제이너스는 대답 대신 매화일검에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이콘과 브디스 그리고 뉴얼에서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폐하. 다른 국가들은 반명연합군으로 세력을 모으고 병사들을 징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매화일검의 보고를 받은 주첨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나라가 권고를 받아들였군.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주첨기는 모든 나라가 연합하여 대항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세 나라나 권고를 받아들여 전쟁 없이 나라를 취하게 되었다.
“권고를 받아들인 이들이야말로 더욱 용맹하고 나라를 아끼는 자들일지도…….”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고 수많은 백성들과 병사들이 죽어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 분명하다. 권고를 받아들인 그들의 용기를 진심으로 인정했다.
“흠, 결국 이터널의 제이너스 왕과도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인가.”
“예, 폐하.”
“절실히 이해하는 바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본국이 원망스럽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행했어야 할 일이다. 결심한 것은 빠르게 진행한다. 언제라도 출진할 수 있도록 전군을 대기시켜 놓도록.”
“예!”
브디스와 이콘 그리고 뉴얼에서 사신이 도착했다. 세 왕이 친필로 작성한 항복서에는 눈물자국으로 추정되는 얼룩들이 있었다.
항복서에는 반명연합군과의 전쟁이 끝난 후 옥쇄와 왕국의 지도를 직접 바치겠다고 적혀 있었다. 옥쇄까지 찍힌 확실한 왕의 서약이었다.
주첨기는 눈물로 잉크가 번진 항복서들을 담담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이건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주첨기는 평소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항복서를 차례로 봉투에 집어넣었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제자야. 낄낄! 엇? 그것들은 항복서들이 아니냐? 몇 나라나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냐? 낄낄낄.”
“세 나라입니다.”
주첨기가 말했다.
“세 나라밖에? 멍청한 자들, 뻔히 승산 없는 전쟁이란 걸 알면서도 버티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라도, 스승님이라도 저들처럼 했을 것입니다.”
“하긴…… 하지만 대업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인정사정 다 봐주다가는 안 하니만 못하지. 그렇지 않느냐?”
“수라혈마, 요즘 들어서 바른말을 잘 하는군.”
진천이 옆에서 뇌까렸다.
수라혈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두 주먹을 치켜 올렸다. 그는 두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휙휙 소리가 나며 공기를 갈랐다.
“더 기다려서 뭐 하느냐. 이미 대항세력들이 규합했는데 당장 가서 때려눕혀야 하지 않겠느냐, 제자야?”
“예, 수라혈마 스승님은 서부연합군을, 진천 스승님은 북부연합군을, 그리고 저는 남부연합군을 맡겠습니다. 이 평북을 지킬 병력 3만과 고수 30명을 제외하고 각각 고수 90명과 병사 3만씩을 맡아 주십시오.”
“낄낄, 고수 90명과 3만이라…… 그냥 잔챙이들뿐이니 고수 열 명만 내려 준다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능히 적군을 섬멸할 수 있다.”
수라혈마가 웃음을 쪼갰다.
“수라혈마, 그것은 사력을 다해 나라를 지키려는 자들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들이 사력을 다하는 만큼 본국에서도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진천이 말했다.
수라혈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리자 주첨기가 나섰다.
“진천 스승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연합군이 전력을 다하면 본국도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투항할 시엔 예로써 그를 받아들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다, 제자야. 걱정하지 말래두, 낄낄낄!”
“전하께서는 지금 네가 가장 걱정스러우셔서 하시는 말씀이시다.”
“뭐? 이 위선 늙은이가…….”
“두 스승님께선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시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주첨기가 미소 지었다. 다소 씁쓸했던 마음이 수라혈마와 진천 덕분에 많이 풀렸다.
고수 90명과 군사 3만씩 세 부대로 나뉘어 연병장에 집결했다.
그들은 수라혈마와 진천 그리고 주첨기의 모습을 보고 함성을 내질렀다.
기세가 충만하다.
당장이라도 출진이 가능하다.
“황제폐하 만세!”
“통일대업!”
“연합군을 정벌하자!”
저마다 외친 그들은 병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주첨기가 단상에 오르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여섯 나라가 규합하여 반명연합군이라고 칭했다. 이제부터 본국은 전쟁이 없는 대륙통일을 위해 그들을 정벌하러 진군을 시작한다. 남부연합군을 상대할 제1부대를 짐이 직접 통솔한다. 알겠는가?”
“예!”
“황제폐하 만세!”
1부대의 고수와 병사들이 병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주첨기가 멈추라는 듯한 손짓을 하자 즉시 조용해졌다.
“제2부대는 평동왕 수라혈마가 통솔하여 서부연합군을, 제3부대는 평서왕 진천이 통솔하여 북부연합군을 섬멸한다!”
“와아아아!”
함성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
생업에 열중하던 백성들이 깜짝 놀라 연무장이 있는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아가던 새들이 잠시 비틀거리고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려 나뭇잎들이 떨어졌다.
“각 부대는 진군한다!”
주첨기가 외쳤다.
수라혈마와 진천, 주첨기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수도는 시끄러웠다. 통일대업을 이룩할 병사들이 북문과 서문 그리고 남문 쪽으로 이동했다. 평북의 백성은 물론이고 소문을 들은 신명국의 모든 백성들은 진심으로 통일을 기원했다.
통일의 의미는 크다.
적국민과 자국민의 개념이 없어진다. 모든 대륙이 하나의 나라로 묶여 다 같은 일국(一國)의 백성이 된다. 같은 민족끼리 칼부림하는 일도 없어지고 언제 전쟁이 터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신명국 백성들의 염원을 담은 병사들이 연합군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해갔다.
“낄낄낄! 대국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본좌가 친히 알려 주지.”
수라혈마가 혼자 중얼거렸고,
‘제이너스…….’
진천은 한 아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