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70
제8화 대륙통일
케이트 국왕과 드리안 국왕은 나란히 동쪽으로 군대를 몰아가고 있었다.
급히 병사들을 징병한 터라 총 병사 4만 중 정예병은 만여 명을 넘지 못했다.
농사를 짓다가 끌려온 이들은 무장조차 갖춰지지 않았다. 낡은 장화와 집에서 입고 나온 옷, 그리고 녹슨 파이크 한 자루만이 그들이 갖춘 무장의 전부였다.
“걱정이오.”
케이트 국왕이 군대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매우 조잡한 군대였다.
애초에 신명국의 그늘을 믿고 병력을 키우지 않았다. 그저 일국의 치안을 안정시킬 병사만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이런 군대로 뭘 할 수 있을지…….”
기존의 병사들조차도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아 정예병답지 않았다. 막 징병된 농민들과 구별되는 것은 갖춰진 무장뿐 사기나 전열 등은 비슷했다.
“나도 마찬가지요. 내 군대가 이토록 조잡할 줄은 생각도 못 했소.”
드리안 국왕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도주병들이 얼마 없어 다행이오.”
“생각보다는 그렇소. 하지만 문제는 병사들이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이오.”
“크흑!”
아직 신명국의 군대가 마주오고 있지 않은데 벌써부터 사기는 최저까지 떨어졌다. 신명국의 이왕 중 하나가 군대를 몰고 직접 자신들을 섬멸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
병사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히이잉
세차게 달려온 말이 두 왕 앞에서 멈추어 섰다. 연합군의 정찰병이었다.
“폐하, 신명국 평동왕 수라혈마가 검사 90명과 병사 3만을 이끌고 지금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뭣!”
“헛! 하필이면 평동왕이…….”
마땅히 자신들을 상대하러 신명국의 군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듣고 나니 심장이 철렁였다. 더군다나 그 군대의 대장군은 신명국에서 가장 손속이 잔인하기로 소문난 평동왕 수라혈마였다.
“평동왕이 고수들과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대.”
누군가 말문을 열었다.
“우린 죽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떻게 도망칠 수 없을까?”
“평동왕이라니! 그 무서운…….”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각오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병사들은 진격 도중 틈만 나면 도망치려 했다. 그 중에 붙잡힌 자들을 병사들이 보는 자리에서 사형시켜도 도주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큰일이오. 이대로 가다간 전투 한 번 해 보기도 전에 병사들을 모두 잃을 것이오.”
“조금만 더 버팁시다.”
“마치 우리의 모습이 불나방 같구려. 지금이라도 회군하는 것이 어떻겠소?”
“회군이라…… 너무 늦지 않았소?”
“아니오.”
“잠깐! 회군하면 나라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잊은 것이오?”
“아……!”
두 왕은 멍해졌다. 일반 전쟁이라면 수백만 골드를 전쟁배상금으로 물더라도 휴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전쟁은 성격이 다르다. 둘 중 어느 하나는 없어져야 끝나는 싸움인 것이다.
“그나저나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야 하는데 마땅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소. 무엇이 좋겠소?”
“그것은…… 음!”
“적장을 베면 백작의 작위를 주겠다고 하는 게 어떻겠소?”
“어느 누가 평동왕의 목을 벤단 말이오.”
“그러니 사기를 돋울 목적으로 하는 것이오.”
“에잇, 오히려 없는 사기마저 더 낮출 셈이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도망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평서의 국경지대에 이르렀다.
“휴―!”
두 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평동왕 수라혈마가 전장이 될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두 왕은 서둘러 진을 펴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병사들을 정비해 보니 그간 도망친 병사가 약 3할이 넘었다. 병사의 수가 2만5천을 겨우 넘고 있었다.
“이건…… 보나 마나한 전쟁이오.”
케이트 국왕이 말했다.
“케이트 국왕은 솔직한 심정으로 이곳에서 전사할 마음을 가지고 있소?”
“……!”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지금이라도 회군하여 신명국에 나라를 바치는 게 좋을 것이오.”
“그렇다면 드리안 국왕은 어떻소?”
“모르겠소.”
“나도 마찬가지요. 다만…… 내 손으로 나라를 넘기는 짓은 못할 것 같소.”
“하하, 나 역시 그렇소.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럼 결정이 난 것 아니오. 이곳에서 전사하는 수밖에…….”
“그건 또 아니오.”
갑자기 대화의 맥이 풀렸다. 두 왕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평동왕 수라혈마닷!”
병사들이 외쳤다.
두 왕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탔다.
먼 곳에서 먼지가 일렁였다. 신명국 검사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마들과 같은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로운 병기가 쥐어져 햇빛에 번쩍였다.
“낄낄낄!”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수라혈마의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히이잉
갑자기 말이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두 국왕은 볼썽사납게 낙마했다.
“아이고, 허리야!”
다시 말 위로 올랐다.
“전군 전투태세로!”
두 왕이 진영을 돌며 외쳤다. 벌써부터 서부연합군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두 왕의 통솔대로 움직이지 않고 모두 제멋대로다.
도주하다가 자국병사의 활에 맞아 죽는 이들이 속출했고, 달려오는 신명국의 검사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자들도 있었다.
두 왕은 미칠 지경이었다.
“저들이 서부연합군이다. 저들을 섬멸하여 서쪽 지역을 점령한다, 낄낄!”
수라혈마가 외쳤다.
“옛!”
90명의 고수들이 선두에서 몸을 날렸다. 3만 명의 신명국 병사들을 뒤로하고 고수 90이 서부연합군 진영에 당도했다.
“으악!”
첫 번째 비명 소리가 터지기 무섭게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선혈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제집 안방처럼 검을 휘두르는 신명국 검사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검사들을 막아라. 막아라!”
케이트 국왕은 검을 빼 들었다.
“이놈들, 내 나라를 내줄 수 없다.”
드리안 국왕이 신명국 고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고수는 너무도 쉽게 공격을 피하고선 드리안 국왕의 배에 수장을 적중시켰다.
배를 맞았는데 머릿속이 쾅 하고 울렸다. 드리안 국왕은 먼 곳으로 튕겨 날아갔다.
“드리안 국왕!”
케이트 국왕이 놀라서 외쳤다. 드리안 국왕에게 달려갔다.
드리안 국왕은 헐떡거리며 한 줌의 피를 쏟아냈다. 그는 케이트 국왕의 어깨 뒤에 펼쳐진 전장을 보았다.
고수 90여 명이 진영을 어지럽게 뛰어다니며 일검에 여러 명씩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어느새 달려온 신명국 병사 3만 명까지 합세하여 난전이 펼쳐졌다.
그런데 쓰러지는 이는 모두 서부연합군이다.
“틀렸다.”
드리안 국왕이 중얼거렸다.
“큭!”
케이트 국왕마저도 전의를 상실했다.
왕들이 전쟁을 포기했는데 병사들은 오죽할까? 모두들 신명국 검사들을 피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병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는 자들은 살려 주되 대항하는 자에겐 인정을 베풀지 말라!”
수라혈마가 명을 내렸다. 그 목소리가 매우 커서 모든 병사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병사들의 귀가 움찔거렸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서부연합군 병사들은 일제히 병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몇몇 용기 있는 자들이 대항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검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고수들의 검기 아래 전사했다.
터벅터벅
수라혈마는 케이트 국왕과 드리안 국왕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두 왕은 수라혈마를 노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케이트 국왕, 드리안 국왕…… 너희들은 전쟁에서 패했다. 이제부터 케이트와 드리안은 신명대국에 흡수되어 대륙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어라?’
수라혈마는 말을 너무 잘한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실실 웃었다. 두 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왕은 포박당하는 대신 왕의 예우로써 혈도를 짚었다.
두 왕을 마차에 태웠다.
항복한 병사들은 모두 일렬로 묶었다. 한 줄로 이어진 포로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수라혈마는 드리안과 케이트를 차례로 들렀다. 각국에 남아 있던 소수의 병사들이 투항했다.
“생각보단 너무 싱거웠다. 낄낄낄!”
수라혈마는 서부연합군과의 전쟁을 그렇게 평했다.
“본좌가 진천보다 빨리 점령했겠지?”
“제이너스…….”
진천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가 떠올랐다. 약하게 생긴 아이는 대뜸 무공을 가르쳐 달라며 찾아왔다.
그러나 곧 아이의 동료인 파일로가 도주하는 바람에 그것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했다.
신명국의 대학생이 되어 여러 지식들을 익혔고, 고수들에게 간단한 검술도 전수받았다.
‘이젠 그 아이가 노부의 적이 되었구나.’
진천은 생각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제이너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답은 없다.
일국의 왕에게 나라를 포기하라고 말할 만큼 진천은 낯이 두껍지 않았다.
“전하, 적이 먼저 전장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광태랑이 말했다.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북 국경 근처에 큰 진영이 들어서 있었다. 그 중간중간에 이터널과 마거크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저곳에 그 아이가 있다.”
진천이 중얼거렸다.
“예?”
“아니다. 우선 이곳에 진영을 펴서 모두를 쉬게 하고 오늘밤에 있을 적의 기습에 대비하라.”
“적이 기습을 합니까?”
“먼저 도착한 군대는 미리 지형을 파악하고 피로를 회복한다. 그렇듯 기습 또한 먼저 도착한 군대의 특권이다.”
“예, 전하. 하지만 기습에 대비할 것 없이 지금이라도 당장 공격하면 될 것 같습니다. 비록 병사들은 지쳤으나 고수들은 저를 비롯해 모두 쌩쌩합니다. 저희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리시면 승전소식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광태랑은 매우 자신 있었다.
북부연합군의 병사는 대략 3만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 이곳엔 일당천의 역할을 하는 고수가 열도 아닌 90여 명이나 있다.
“적국 왕들의 머리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전하.”
“광태랑.”
“예, 전하.”
“이터널 국왕이 누군지 아느냐?”
“모릅니다.”
광태랑은 머리를 긁적였다. 대륙에 몇 개의 나라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그였다.
광태랑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걸리는 한 생각이 있었다.
“제이너스가 어느 나라의 왕입니까?”
“바로 이터널의 왕이다. 그리고 노부와 네 눈앞에 보이는 국기는 이터널의 것이고.”
“젠장! 앗, 죄송합니다.”
광태랑은 저도 모르게 거친 입을 놀렸다.
제이너스라면 신명국 황성에서 적지 않은 정을 쌓았다. 3년은 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하?”
“노부가 직접 제이너스를 만나고 오겠다.”
진천이 말했다.
그날 밤 북부연합군은 기습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들도 서부연합군과 사정이 비슷했다. 사기는 최저고 도주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통솔되지 않았다.
이런데 어찌 기습을 할까?
“으…… 멍청한 놈들! 저깟 놈들을 보고 겁먹어서 병기조차 들지 못하다니.”
마거크 국왕이 말할 때마다 세 겹의 턱살이 흔들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바로 시야에 신명국의 검사들과 평서왕 진천이 보이는데 당연한 일 아니겠소?”
제이너스가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이런 멍청한 놈들을 데리고 나라를 지키려고 했다니.”
“내일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마거크 국왕께서 병사들을 잘 다독여 주시오.”
제이너스는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마거크 국왕이란 인물이 맘에 들지 않아 그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몸과 마음 모두 피곤한 제이너스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쉬익
차가운 바람이 부는가 싶었다. 탁상 위의 촛불이 꺼졌다.
“제이너스…….”
제이너스는 자신을 부르는 음성 때문에 잠에서 깼다.
“헉, 진천님!”
제이너스는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옷매무새를 정갈히 한 다음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진천님께서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제이너스, 너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다. 노부가 오지 못할 곳에 온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진천님.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죄송합니다. 우선 이곳에 앉으시지요.”
제이너스는 의자를 뒤로 뺐다.
진천은 말없이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제이너스, 너무 갑자기 받은 소식 때문에 상심이 컸겠구나.”
“아닙니다. 그렇잖아도 진천님을 뵈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말해 보아라.”
“저는 이곳에 신명대국의 대학생 제이너스가 아니라 이터널의 국왕으로 왔습니다. 아바마마로부터 이어받은 왕위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터널 국왕인 것처럼 죽을 때도 이터널 국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내일 전장에서 저를 보시면 거리낌 없이 검을 쓰십시오. 그것이 저의 마지막 바람입니다.”
“제이너스, 노부는 널 회유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허나, 네가 이토록 굳은 결심을 보이니 네 결정을 존중해 줘야겠지.”
“감사합니다, 진천님.”
“제이너스, 신명대국은 널 죽이길 싫어한다.”
“절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대항한 이터널 국왕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부디 거리낌 없이 검을 쓰십시오.”
제이너스는 확고했다.
날이 밝자 진천은 병사들을 정비했다. 고수 90명과 3만의 병사는 그의 호령을 들을 때마다 ‘합!’하고 기합을 질렀다.
진천은 말에 올라탔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그대들에게 노부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겨라. 그것뿐이다. 자, 진격하라!”
드디어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천이 제일 선두에 서서 말을 몰았다.
북부연합군도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나왔다.
마거크 국왕은 전투 전 용맹을 과시하던 입을 덜덜 떨고 있었다. 반면 제이너스는 너무나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그러다 병기를 떨어뜨리겠소, 마거크 국왕.”
“내, 내가 언제……!”
마거크 국왕은 여전히 말을 더듬었다.
양군이 서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진격하라!”
“진격하라!”
양쪽에서 동일한 명령이 터져 나왔다. 신명국의 고수들은 지면에서 미끄러지듯 쾌속한 속도로 내달려와 북부연합군의 진영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아, 안 돼!”
마거크 국왕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몸을 크게 뒤로 회전한 후 내달리기 시작했다.
“국왕전하가 도망친다!”
북부연합군들도 마거크 국왕처럼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북부연합군은 신명국의 상대가 안 되는 허약한 군대였던 것이다.
“후퇴하지 말라! 돌격하라!”
제이너스의 목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그는 자신의 친위대를 이끌고 더욱 앞으로 돌진했다.
“진천, 내가 왔다!”
제이너스는 진천을 발견했다.
진천도 그를 보았다. 제이너스의 전신에서는 어느새 위엄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터널 국왕, 당신을 벨 수밖에 없을 것 같소.”
탓!
진천이 오른발로 지면을 굴렀다. 순식간에 제이너스의 말 앞에 나타나자 말이 놀라 넘어졌다.
낙마한 제이너스는 재빨리 일어나 진천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진천도 그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어젯밤 제이너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거리낌 없이 검을 쓰십시오.’
진천은 이를 악물었다.
“큭!”
쉬이이익
신명검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휘둘러졌다. 제이너스의 목 앞까지 검이 당도했다. 제이너스는 순간적으로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노부는…… 신명대국은 널 죽일 수 없다.”
진천이 칼끝으로 제이너스의 태양혈을 타혈했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았건만 제이너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호흡이 고른 것으로 보아 잠시 혼절한 것에 불과했다.
“으음……!”
얼마나 잔 걸까?
“앗!”
제이너스는 불현듯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죽은 이들이 말없이 피로 물든 대지를 껴안고 있었다. 부러진 깃대와 찢어진 이터널의 국기, 주인을 잃은 병기들이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제이너스는 시체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걸었다.
“아아……!”
모든 게 끝났다.
그는 목적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하늘의 노을은 피로 물든 전장과 같이 붉었다.
점점 멀어지고 있는 제이너스의 모습은 마치 노을 속으로 파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하!”
페 국왕의 자신만만한 웃음이다.
남부연합군은 다른 연합군과 달리 병력이 탄탄했다. 기존의 병사 4만과 용병 4만!
페 국왕은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팔아치웠다. 심지어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생필품을 빼앗아 팔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모두 한 달간의 용병등용비로 썼다. 대륙남부에 있던 용병들 전부가 몰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페 국왕은 용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막대한 임금을 지불키로 했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승산이 있소.”
“그렇소. 8만의 병사들 중 정예병이 5만이 넘소. 이 정도라면…….”
“좋소. 매우 좋소! 신명국 본토까지는 진격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양국을 지킬 병력은 되지 않소.”
“문제는 한 달 후요. 그때는 더 이상 용병들에게 돈을 주지 못할 테니…….”
“그건 그때 생각해 볼 문제요.”
페 국왕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대륙의 용병들 중에서도 남부의 용병이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들 전부를 끌어들인 것이다. 다만 문제는 용병들에게 상대할 나라를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관없다. 용병이야 어차피 금을 보고 모이는 족속들이 아닌가. 고용된 입장에서 따질 것 다 따지면 안 되지.’
페 국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병사들에게 이르길 ‘페국과 올드얼이 동맹을 맺어 뉴얼을 공격한다’고 공표했다. 병사들과 용병들 모두 그 사실을 믿고 있었다. 전쟁 상대가 신명국이란 걸 알고 있는 고위급 귀족들에게는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
“자, 적을 마중하러 가자!”
드디어 진격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국경 부근에서 상대한다.
그러다 상황이 좋지 못하면 인근 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여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병사들과 용병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이거 완전히 뉴얼국 망하게 생겼구만?”
용병이 뇌까렸다.
“후후, 이번 전쟁은 몸 좀 놀릴 만하겠어. 왜 지난번 던전에서 말이야. 소문과는 다르게 슬라임 같은 잔챙이들만 있어서 얼마나 섭섭했는데?”
“맞아. 그런데 이번엔 왕국의 공격이라니. 듣자 하니 모두 왕성을 약탈할 생각 때문에 들뜬 모양인데? 자네도 그런 것 같군.”
“하하, 들켜 버렸군. 뉴얼국 왕성에 ‘여신의 눈물’이란 보물이 있는데 가장 값진 거라고 하더군. 그건 내가 점찍어 놨어. 어디 있는지 벌써 도둑길드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놨지. 대신 입수하면 반반씩 나누기로 했지만…….”
“어랏? 여신의 눈물이라면…… 저기 보이지? 이번에 왕성점령에 성공하면 저들이 여신의 눈물을 가져갈 거라고 호언장담하던데?”
“뭣? 도둑길드 이놈들, 나에게만 내준 극비정보라면서…….”
“얼마나 줬는데?”
“1골드.”
“당했군.”
“상관없어. 어차피 그것은 내 거니까.”
용병들에 한해서는 약탈이 허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때문에 꽤 긴 거리를 행군하고 있어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슬슬 보이는군. 뉴얼의 군대가 맞은편에서 오고 있다.”
용병이 말했다.
“가소로운 놈들, 이 몸의 별명이 전장의 철퇴야.”
“잠깐!”
용병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왜 그래?”
“깃발의 색깔이 달라. 붉은색인데?”
“하하하! 원 농담도 재미있게 하는군. 대륙에서 붉은색 깃발은 한 곳뿐이야. 어랏?”
“신, 신명기닷!”
용병들이 술렁였다.
당연히 뉴얼국 병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편의 군대에서 신명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자들은 말을 타지 않고도 엄청난 속도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간 자라도 저들을 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염병! 말도 안 돼!”
“설마 신명국과 전쟁을 벌이겠어? 걱정하지 마라. 어쩌면 원군일지도 몰라.”
“신명국의 공작과 뉴얼의 공주가 혼인한 걸 모르고 하는 소린가?”
“맞다.”
용병들은 페 국왕과 올드얼 국왕에게 몰려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째서 신명국의 군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까?”
“무엄하다!”
기사들이 용병들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기사들도 상당히 당황한 듯한 얼굴들이었다. 용병들의 거친 힘에 기사들이 밀리고 있었다.
“일개 적들일 뿐이다. 동요하지 말라.”
페 국왕이 근엄한 척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이라니요. 이런 말씀은 없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뉴얼을 상대하러 온 거지 신명국과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미쳤습니까? 자살행위를 하게.”
“그대들은 짐에게 고용된 용병들일 뿐이다. 벌써 오늘의 일급을 받았으니 고용주인 짐의 명령에 따르라. 자, 적군이 온다.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페 국왕은 기사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기사들이 몰려드는 용병들을 뒤로 밀어냈다.
신명국의 군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부연합군 전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명국의 황제다!”
모두 경악했다.
신명국의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마를 타고 달려오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을 뒤엎을 만한 파도를 보는 것 같다.
“제기랄! 이대로라면 모두 죽고 말겠어.”
용병은 매우 불안해 보였다.
용병의 말을 들은 동료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곧 검사들이 들이닥칠 거다.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페 국왕과 올드얼 국왕이 크게 외쳤다. 그래도 군대의 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뭐요? 지금 우리를 죽음에 몰아넣고선 전투태세를 갖추라니. 당신부터나 제대로 하쇼! 우리는 빠지겠소. 신명국 검사들과 싸울 수 없소. 그건 자살행위란 걸 모른단 말이오? 정말 이런 작자가 왕이라니…….”
용병들이 두 왕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두 왕은 용병들의 거센 반발에 당황했다.
페 국왕은 용병의 목을 검으로 가리켰다. 용병은 페 국왕의 분노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더 분노한 것은 용병들 쪽이다.
“죽고 싶은가? 적들에게 돌격하라.”
“지랄하지 마쇼! 염병할!”
용병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신명국의 황제와 검사들이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그때 용병들 사이에서 누군가 외쳤다.
“왕의 목을 신명국에 바치자. 그리고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다는 우리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왕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친위병들과 용병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친위병들은 실전으로 단련된 용병들을 막을 수 없었다.
용병들이 두 왕을 겹겹이 포위했다. 페 국왕과 올드얼 국왕은 두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 이건 반역이다.”
“그딴 것 몰라!”
한 용병이 페 국왕에게 창을 던졌다.
슉
창은 페 국왕의 갑옷을 뚫고 복부를 관통했다.
“컥!”
그것을 시점으로 용병들은 두 왕에게 뛰어들었다.
두 왕의 최후는 비참했다. 용병들은 두 왕의 목을 단칼에 베어냈다. 그러고는 황급히 머리칼을 휘어잡고 신명국 황제를 향해 달려갔다.
용병이 두 왕의 머리를 내려놓으며 무릎 꿇었다.
“저희 남부용병들은 신명국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뜻입니다.”
주첨기가 손짓했다.
달리던 고수들과 3만의 병사들이 일제히 멈추어 섰다.
“뜻을 받아들이겠다. 당장 해산하라.”
주첨기가 말했다.
용병들은 이때다 싶어 사방으로 도망쳤다. 주첨기는 병사들과 함께 올드얼 왕성과 페국의 왕성을 점령했다. 그곳에 고수 몇을 둔 후 신명국의 수도로 돌아왔다.
“연합군을 정벌하고 두 왕을 잡아 왔다. 낄낄낄! 원래부터 상대가 안 되는 족속들이었다.”
“폐하, 마거크 국왕은 전쟁 중에 전사했고 이터널 국왕은…….”
진천이 뜸을 들였다.
“잘하셨습니다.”
주첨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두 분께서 대륙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셨습니다.”
각국들을 점령했다. 평동왕 수라혈마와 평서왕 진천도 황성으로 돌아왔다. 고수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모두 환희에 찬 표정들이었다.
이제 신명국의 적은 없다. 사실상 대륙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이콘, 뉴얼, 브디스로부터 옥쇄와 지도를 넘겨받는 것뿐이었다.
반명연합군과 신명국과의 전쟁은 예상대로 순식간에 끝났다.
세 왕국의 왕들이 신명국에 도착했다.
쿠구궁
커다란 성문이 열렸다. 왕족의 문장이 크게 박힌 마차들이 황성으로 들어왔다. 마차가 멈추었다.
“오셨습니까?”
매화일검이 고개를 숙였다.
뉴얼 국왕은 매화일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내 말했지 않았는가? 그래, 공주는 어디 있는가?”
“저택에서 아버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녁쯤에나 들를 수 있겠군.”
뉴얼 국왕은 담담한 어조였다. 그 뒤로 이콘 국왕과 브디스 국왕이 걸어왔다. 둘의 눈에서는 적대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 왕은 대륙의 정세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황제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세 왕은 매화일검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신명국에 처음 온 여느 사람들처럼 성의 규모에 놀랐다.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명국 검사들의 기도였다.
착!
황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200층의 계단이 있다. 양쪽에 신명국 검사들의 모습을 딴 큰 석상들이 놓여 있고, 그 앞에 신명국 검사들이 위치해 있었다.
“아……!”
세 왕은 입을 딱 벌렸다.
신명국 검사들이 일제히 세 왕에게 허리를 숙였다.
과연 대단한 자들이다. 한 명 한 명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계단 위 성문이 열렸다.
“어서 오시오. 진천이오.”
“수라혈마요.”
이 두 노장군이 바로 평동왕 수라혈마와 평서왕 진천이다. 진천과 수라혈마는 세 왕을 향해 포권했다. 소문대로 평동왕과 평서왕은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세 왕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매화일검이 세 왕의 후미를 따르고 평동왕과 평서왕이 세 왕을 안내했다. 평동왕과 평서왕의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큰 대양(大洋)으로 빠져들 것만 같다.
과연 이런 엄청난 자들이 있기에 신명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코 자국이 약하고 내 인덕이 낮아 신명국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신명국은 바다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세 왕들은 비슷한 생각들을 했다.
“이 안이오.”
진천이 말했다.
“폐하, 각국의 왕들이 폐하를 뵙고자 합니다.”
“들라 이르라.”
대기하고 있던 법병이 방문을 열었다.
‘아……!’
마치 찬란한 빛이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황제 주첨기의 전신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다가설 수 없는 위엄의 빛이었다.
저자야말로 진정한 황제다!
세 왕은 방 안으로 들어가길 머뭇거렸다. 주첨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 왕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세 왕은 천천히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일국의 왕으로서 과감한 결단을 내린 세 분을 진심으로 존경하오.”
주첨기가 말했다.
“아닙니다. 어찌 강이 바다에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비로소 오늘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이콘 국왕이 말했다.
“언젠가는 이루어졌어야 할 대륙통일이었습니다. 폐하 같은 황제 아래 대륙이 통일된다는 사실에 대륙의 백성으로서 한없이 기쁠 뿐입니다. 황제폐하시라면 백성들을 차별하지 않고 만인을 신명대국의 백성으로서 선정을 베푸실 것입니다.”
브디스 국왕은 진심이었다.
“대륙통일을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어느새 세 왕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첨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이 간직하고 있던 옥새와 왕국지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비로소 대륙의 모든 영토가 신명대국령이 되었다. 대륙은 통일이 된 것이다.
“어서 일어나시오.”
주첨기는 그것을 받아들인 후 세 왕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세 왕은 무엇 때문인지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그날 저녁은 성찬이었다.
주첨기, 수라혈마, 진천, 400명의 고수, 혜공, 만소자, 실리아, 엘리나, 설령과 아기설령들 그리고 세 왕이 참석한 저녁이었다.
세 왕은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신명국에 온 후로 검사들, 이왕과 황제 주첨기를 직접 만나 본 후 자국 백성들에 대한 근심이 덜어졌다.
왕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한 대륙의 백성으로서 평화로운 대륙의 미래를 향한 미소.
바로 그것이었다.
주첨기는 세 왕을 배려했다. 대륙통일이 선포되고 체제가 정비되기 전까지 그들은 여전히 일국의 왕이다. 모든 이들에게 일국의 왕에 대한 예를 다하라 명을 내렸고, 모두 거기에 따랐다.
“혜공 공, 지금 우시는 것입니까?”
만소자가 말했다.
“아니다.”
“에이, 혜공 공…… 지금 울고 계시는걸요. 이 만소자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아니래도 그러네.”
“저도 왠지 폐하의 존안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나는걸요. 폐하께서 저리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만소자는 세 왕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주첨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혜공이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폐하께선 그동안 많은 짐을 지고 계셨다. 오늘만큼은 그 짐을 내려놓으셨다.”
“아, 혜공 공께서도 그간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하셨습니까. 저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오금이 저립니다.”
“그때…… 대마도사에게 잡혀갔을 때 말이냐? 왠지 무척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는구나. 언제나 폐하께서 저리 웃으시면 얼마나 좋을까.”
주첨기를 대하는 혜공의 마음은 흡사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어릴 적부터 주첨기를 옆에서 보좌했고, 어디를 가든 그를 따라다녔으며 많은 일을 함께했다.
이렇게 주첨기가 밝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눈물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모두 짐을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짐은 언제나 그대들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대륙통일은 짐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업적이다. 자, 모두 술잔을 들라. 오늘만큼은 마음껏 취하자.”
“황성에 있는 술이 바닥날 때까지 말씀이십니까?”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라고들 하지.”
“하하핫!”
모두 대소를 터트렸다.
황제와 신하를 떠나 모두 같은 술잔을 들고 같은 술을 마시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주점주인은 이날을 ‘대박’이라 칭했다. 자리가 모자라 바닥에 주저앉아 마시는 이들도 상당했다.
모두들 한껏 들떴다. 벌써 얼큰히 취해 코가 벌게진 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아무 손이나 잡고 춤을 추었다.
“정말 믿기지가 않아. 대륙통일이라니. 누가 감히 대륙통일을 상상이나 했겠나?”
“여기 있잖아. 내가 말했지. 황제폐하시라면 대륙을 통일하실 거라고. 신명대국으로 피난 왔을 때부터 몇 번이나 말했단 말이야. 좀 알아주지?”
“맞아, 맞아. 자네가 그랬지. 모든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니 더 이상 전쟁은 없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해?”
사내는 술을 입 안에 들이부었다. 그런 사내를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량대결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술을 넘기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럼 각국의 왕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듣자 하니 몇몇 왕은 죽었고 몇몇 왕은 지하감옥에 갇혔다더군. 대세를 따른 왕들은 아마도 지금쯤 황성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걸?”
“엥? 저쪽 좀 보게나.”
사내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을 가리켰다. 모두가 들떠 있는데 그는 매우 침울해 보였다
“왜 저러지?”
“이렇게 기쁜 날에 재수 없게 왜 저러고 있대? 어디 한 번 말이나 걸어 볼까? 으쌰!”
사내는 청년에게 걸어갔다.
“무슨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수?”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서 술을 마시고 있을 뿐입니다.”
청년이 대꾸했다.
사내는 자신의 술까지 가져와 청년 앞에 놓았다.
“보아하니 여자문제네? 여자가 바람나서 도망가면 당연히 기뻐해야지. 여자가 어디 그 여자뿐인가? 사람은 자고로 신뢰가 있어야 해. 그렇게 신뢰가 없고 지조가 없는 여자가 속마음을 숨기고 옆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퍼해야 할 일이지. 자, 기운 내게. 오늘은 황제폐하께서 대업을 이룩하신 기적적이고 역사적인 날이 아닌가? 마시세.”
“감사합니다.”
둘은 술잔을 부딪쳤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청년의 얼굴은 금세 벌게졌다.
“술이 약하군. 그래, 자네의 이름은 뭔가?”
“제이너스입니다.”
“제이너스? 아……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가 했더니 폐하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은 이터널 국왕의 이름과 비슷하군. 폐하께서 상심이 크실 거야.”
“예?”
“폐하께서 상심이 크실 거라고 했네. 백성들과 수하들을 아끼시는 분이 바로 황제폐하시네. 이터널 국왕은 대학을 다니면서 황성에 기거했다고 했는데 그런 가족 같은 사람을 직접 공격해야 했으니…….”
“그렇군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잔을 비웠다.
“천천히 마셔. 아무튼 운명의 장난이지. 뭐 세상사라는 게 워낙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황제폐하께서는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을 걸세. 이터널 국왕의 일은 매우 안됐지만 바로 시대의 흐름이란 이런 거지. 암, 그렇고말고. 시대의 흐름이라…….”
사내는 자신이 말한 단어가 매우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청년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 자네 술이 약한 줄 알았더니 꽤나 잘 마시는군.”
사내는 취해서 흥얼거렸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하세요? 법병이시면 나라를 지키셔야죠. 아무리 이제 적국이 없다고 하더라도 대륙 끝에는 몬스터들이 있다고요.”
누군가 다가와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오, 케이! 케이야말로 대학생이면서 잘도 술을 마시고 있군.”
“케이?”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제이너스?”
두 청년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네가 여길……?”
“……!”
제이너스는 대답 대신 밝게 웃었다.
케이는 그의 옆에 앉으며 어깨를 감쌌다. 같이 대학공부를 하던 절친한 친구인데 어찌 친구의 얼굴에 담긴 씁쓸함을 눈치채지 못할까.
더욱이 이번 전쟁소식을 듣고 가슴을 조아리고 있었던 와중이었다.
케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왕국을 잃은 슬픔이 무엇일지 감히 추측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마…….”
케이가 제이너스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제이너스는 건배한 후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냐? 왜 왔겠어?”
“다행이야.”
“응?”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케이가 제이너스를 보며 웃었다.
“둘이 아는 사이군? 그래, 술은 친구끼리 마셔야 더욱 맛있는 법이지. 이제 이 늙은 아저씨는 빠져 주겠어. 아주 곤드레만드레 취하도록 마시는 밤이 되라. 케이, 친구니까 이 아저씨가 인생의 깊은 참맛을 알려 주는데…… 바람난 여자는 찾지 마. 앞으로도 바람날 여자는 만나지 말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낄낄, 그래.”
사내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제이너스와 케이는 아무 말 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둘 사이에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열 잔이 되어 실실 웃음을 만들었다.
“왜 내가 여기에 왔냐고? 당연하잖아. 공부하러 왔지.”
제이너스가 취했는지 케이의 뒤통수를 때렸다.
“와아아아!”
그때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터졌다. 주점 안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폐하께서 납시셨다.”
취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밖으로 몰려나갔다. 제이너스와 케이도 나머지 술잔을 급히 비운 후 황성 앞까지 달려갔다.
술로 데워진 몸을 차가운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제이너스는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던 뭔가가 바람과 함께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황성 앞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도의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높이 들어 탑 위에 오른 신명대국의 황제 주첨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백성들은 고래고래 함성을 질렀다.
주첨기 옆에 서 있던 진천과 수라혈마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백성들은 조용해졌다.
“이제 대륙은 통일되어 전쟁이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 오늘은 통일력 원년으로 선포하여 만천하에 대륙의 통일을 알리리라!”
신명대국 황제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통일력 원년!
대륙통일이 선포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하게 대륙의 유일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신명대국이다.
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