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75
제5화 용병왕 해버톤
작은 동물들이 오가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에스와 던칸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잔뜩 긴장한 둘은 걸음걸이도 매우 조심했다.
반면에 주첨기는 매우 느긋했다.
“스워드, 이 산에 도적들이 엄청 득실거린다고 한 사람이 당신이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천하태평이야?”
“에스, 좀 무례하잖아.”
“하루 이틀인가?”
에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일행은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 주첨기는 마치 한 번 왔던 사람처럼 순조롭게 걸어갔다. 주첨기는 귀에 내력을 집중하여 청각을 극대화시켰다.
주변 수 킬로미터 안에 있는 세밀한 소리까지 조절하여 들을 수 있었다. 주첨기는 많은 인기척이 있는 곳을 향해 무작정 이동했다.
“다 왔군.”
갑자기 주첨기가 뇌까리며 멈춰 섰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불쑥 수풀 사이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으하하하! 드디어 한 건 건졌군!”
결국 나타나고야 말았다. 에스가 던칸 옆에 바짝 붙었다.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나무 위에서도 뛰어내려 등장했고 비탈 밑에서도 나타났다. 순식간에 20여 명 정도가 주첨기 일행을 에워쌌다.
“이, 이봐! 어떻게든 해 봐.”
에스가 주첨기의 등을 집게손가락으로 찔렀다. 하지만 주첨기는 요지부동이었다.
에스는 긴장되는 한편 막상 도적들을 보자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떠냐는 식으로 마음이 진정되었다. 오히려 몸집 큰 던칸이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에스가 던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짝!
“가진 것은 다 내놓고, 거기 반반하게 생긴 여자아이는 우리 좀 따라와야겠다. 요즘 우리 사정이 말이 아니거든.”
눈초리가 매섭게 생긴 도적이 말했다. 그 도적은 몸을 건들거리며 일행에게 접근했다.
막 주첨기 앞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도적은 뭔가에 적중당해 뒤로 튕겨 날아갔다.
주첨기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도적 스스로 튕겨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하, 하하하핫! 생각보다 웃기는 사람이잖아?”
에스는 이제 완전히 진정되었다. 나름대로 여유가 생겨 주변을 훑어보았다.
검을 가진 자는 앞에 섰고 활을 가진 자는 뒤에 서서 화살을 겨누었다. 아무렇게나 서 있는 듯하지만 모두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모습이었다.
‘이거…… 도적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이상한데?’
에스가 속으로 생각하며 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몰라!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아직 17세 정도밖에 안 된 소녀가 생각한 것이라고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이놈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눈매가 사나운 도적은 땅을 짚고 일어나며 크게 외쳤다.
주첨기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활을 가진 도적들이 시위를 가슴 쪽으로 깊게 당겼다. 비록 도적이라고는 하나 또한 대륙의 백성이기도 하다. 주첨기는 괜한 소란을 피워 상대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주첨기는 아무 말 없이 청강검을 빼 들었다. 명검의 날카로운 날이 햇빛에 번쩍였다. 누가 보더라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명검이다.
“이봐, 그렇게 좋은 검이 있었으면 진작 보여 줬어야지.”
주첨기 뒤에서 에스가 중얼거렸다. 저 허름한 검집 속에 명검이 감춰져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호오!”
도적들이 감탄사를 뿜었다.
“저거 엄청난걸.”
도적들이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청강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인데 갑자기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도적들의 머리가 심하게 휘날렸다. 에스의 붉은 머리도 너풀거렸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다름 아닌 청강검!
도적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청강검을 주시했다. 갑자기 검 주위로 푸른빛이 발광했다. 푸른빛은 점점 불어나더니 칼끝 위로 솟았다.
“아……!”
도적, 에스, 던칸을 불문하고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푸른빛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자라났다. 푸른빛을 담은 모두의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아…… 아……!”
모두가 저 푸른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 밖으로 그 정체를 말하지 못했다.
이윽고 한 명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오러…… 블레이드!”
“아니야, 일반 오러블레이드가 아냐. 이, 이건 엄청나. 엄청나다고.”
꿈에서조차 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말로만 들어왔던 오러블레이드는 매우 아름다웠다.
에스는 청강검의 푸른 기운에 시선을 빼앗겼다.
주첨기가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도적들이 기겁하며 뒤로 흩어졌다.
주첨기는 검에서 내력을 거둬들였다. 검 주위를 맴돌던 푸른 기운이 검 속으로 사라졌다.
“너희들의 두목을 만나보고 싶다. 안내해라.”
주첨기가 말했다.
“뭐, 뭣?”
“너희들의 두목을 만날 수 없다면 너희들을 다 죽이고 다시 찾는 수밖에…….”
물론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주첨기는 살기를 담아 말했다.
도적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오러블레이드를 쓰는 자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몇몇이 갑자기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주첨기가 손가락을 퉁겨 내력을 발출했다. 내력이 도망자들의 혈에 적중했고 그들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멀리서 보기에 꼭 죽은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이다. 당장 가서 너희들의 두목을 데리고 와라.”
에스가 보기에 주첨기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스, 스워드 저 사람…… 대체 누구야?”
에스가 던칸에게 속삭였다.
“엄청나.”
던칸도 주첨기에게 넋을 잃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주첨기가 다시 한 발자국 내디뎠다.
“내가 한 발자국 다시 내딛는 순간이면 너희들은 모두 죽음 목숨이다. 당장 두목을 데려오렷다!”
주첨기가 내력을 담아 음성을 터트렸다. 산천이 다 흔들거렸다. 놀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렸고 수백 마리의 산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엄청난 위압감이 몰려왔다. 주첨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놀라서 주저앉았다.
용기일까, 오기였을까?
“내가 다녀오겠어!”
한 도적이 수풀 안으로 몸을 던졌다.
주첨기가 넘어진 에스와 던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둘은 주첨기의 손을 잡길 망설였다. 주첨기가 턱을 한 번 끄덕이고 나서야 에스와 던칸은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 정말…… 엄청난 사람이었군요. 그건 분명 오러블레이드였지요?”
에스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말투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는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오러블레이드는 그야말로 꿈의 경지였다. 그녀는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주첨기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에스와 던칸은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도적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크으…….”
도적들은 주첨기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윽고 수풀로 사라졌던 도적이 키가 2미터가 훌쩍 넘는 거한과 함께 걸어 나왔다. 대머리인 그는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양손검을 등 뒤에 메고 있었다.
“저놈이냐?”
“예, 바로 저놈입니다. 저놈이 분명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했습니다.”
“과연 그렇군.”
대머리 거한의 이름은 해버톤. 수하가 6천여 명이나 되는 도적단의 두목이 바로 그다.
해버톤은 주첨기의 전신을 천천히 훑었다. 과연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할 만한 자답게 온몸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해버톤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당신이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했다고? 헌데 난 왜 당신을 처음 볼까?”
해버톤이 말했다.
“네가 도적단의 두목인가?”
주첨기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던칸은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머리 거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도 꽤나 하는 덩치인데 저 두목이라는 사람은 머리 하나가 더 있다. 그 사실이 신기한 게 아니다. 어딘가 매우 낯이 익었다.
‘아……!’
“용병왕 해버톤!”
대륙이 통일되기 전에 그를 멀찍이서 본 적이 있었다. 던칸은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사람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유심히 보았다. 틀림없이 용병왕 해버톤이다.
“뭐라고?”
에스가 물었다.
“저 사람, 용병왕 해버톤이야.”
“뭐? 용병왕 해버톤? 사람 놀리지 마, 곰탱아.”
“정말이라니까. 언제지? 스파다 시에 놀러갔을 때 내가 용병왕을 보고 왔다고 자랑했잖아. 분명히 저 사람이라니까. 나보다 훨씬 크고 대머리에 거기다 양손검…… 맞잖아.”
그러고 보니 용병왕 해버톤의 용모에 관해 떠도는 소문과 도적단 두목과의 용모가 일치했다.
에스가 ‘히엑!’하며 입을 딱 벌렸다.
“스워드, 저 사람 용병왕 해버톤이야! 소문 들어서 알고 있지? 저 사람도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해.”
에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냥 고개만 끄덕인 주첨기의 반응이 그녀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저 아이들은 나를 알고 있는데 정작 넌 날 모르는 것 같군. 저 아이들의 말이 맞다. 난 1년 전만 해도 용병왕 해버톤이라 불렸지. 내 수하들이 네가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했다더군. 그걸 한번 볼 수 있을까?”
해버톤이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이곳은 대화하기에 알맞지가 않군.”
“그럼 내 집으로 가지.”
해버톤은 흔쾌히 말했다.
“대, 대장님! 낯선 이에게 진지의 위치가 발각되는 것은…….”
“닥쳐라! 어차피 이미 다 들통났다. 곧 대국의 법병들이 들이닥치겠지. 따라와라. 내 작은 나라로 안내해 줄 테니.”
해버톤은 주첨기를 앞에 두고 등을 돌렸다.
‘큰 동굴 속 벽에는 횃불이 꽂혀 있고 바닥에는 술 취한 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다.’
이것은 에스와 던칸이 떠올린 도적단 소굴의 풍경이다. 하지만 이들의 소굴은 갈릭처럼 하나의 작은 마을이었다.
다소 조잡한 나무집들이 즐비하게 지어져 있었고 광장 같은 마을 중심의 공터에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에스와 던칸은 물론이고 주첨기까지 당황했다.
“도적단 소굴이라니 동굴을 생각했나 보지? 바닥에는 술병과 술 취한 자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말이야. 낄낄!”
해버톤이 피식 웃었다.
“해버톤 아저씨!”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해버톤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해버톤은 아이들을 높게 들었다가 내려 주었다.
“저리들 안 가? 지금 손님 온 거 안 보여?”
도적들은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표정이 바뀌었다. 여느 마을 남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멀리서 주첨기 일행을 지켜보고 있던 아낙들이 급히 뛰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여기가 내 집이지.”
해버톤이 나무문을 열었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통째로 뜯어졌다.
“잠깐, 이놈이 맨날 말썽만 부리더니 결국은 오늘 내 체면을 구겨 버리는군.”
해버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문을 맞췄다. 그는 못을 박는 망치를 주먹으로 대신했다.
집 안에는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옷장과 침대, 탁상 등 최소한의 가구들만 있었다.
“의자가 없으면 침대에 걸터앉으면 될 거다. 잠깐 기다려. 먹을 걸 내올 테니.”
해버톤이 주첨기 일행만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갔다.
주첨기가 에스와 던칸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어떻게 오러블레이드를 쓰면서 그동안 숨길 수가 있었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 봐요. 당신, 대국의 검사님이죠?”
에스가 얼굴을 들이댔다.
“장담하는데 아니다.”
“말이 안 되잖아요. 당신이 검사라야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진다고요. 남하성주의 성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오러블레이드를 쓴 것도 그렇고…….”
“마음대로 생각해라. 난 검사가 아니니까.”
“좋아요! 당신은 검사님이에요. 됐죠? 던칸, 드디어 찾았어. 우리의 스승이 될 분을! 내가 뭐랬어? 이분만 계속 따라다니면 스승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에스는 지금 있는 곳이 도적단 두목의 집이란 것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했다. 그것은 던칸도 마찬가지였다.
“스승님!”
에스가 주첨기의 팔에 달라붙었다.
주첨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에스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스승님이라는 거지?”
“바로 당신이죠.”
“황당하군.”
“황당하셔도 우리의 스승님이 되셔야 해요. 우리의 인연을 생각해 봐요. 참으로 운명적인 만남이었죠? 바로 그거예요. 당신이 우리의 스승님이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니까요. 우리의 인연은 바로 그 크리텔 산맥에서 시작된 거죠. 멋있지 않아요? 그렇지, 곰탱아?”
“으, 응…….”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던칸은 대답부터 하고 봤다.
주첨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때마침 해버톤이 과일을 한 아름 들고 와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너희들, 무시무시한 도적단 두목의 집에 왔는데도 천하태평이군.”
“아……!”
에스와 던칸은 놀라서 탄성을 터트렸다.
“뭐야, 그것조차 잊고 있었던 거야? 크하하! 재밌는 일행이로군. 그래,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
해버톤이 주첨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첨기는 어김없이 스워드라고 대답했다.
해버톤이 고개를 저었다.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자들 중에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어.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 우선 음식들을 먹고 좀 쉬는 게 좋을 거다.”
“다, 당신…… 왜 이렇게 우리한테 잘해 주는 거야? 혹시 여기에 독이라도 탄 거 아냐?”
에스가 과일들을 가리켰다.
“하핫! 걱정 마라. 먹어도 안 죽어. 내가 왜 그 아까운 과일에 독을 탈까? 우리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든데 말이야. 난 단지 이 사람이 최상의 컨디션이 되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결투를 하려면 정정당당히 해야지. 하루 종일 산을 헤맨 사람과 할 순 없지.”
해버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첨기가 입을 열었다.
“난 당신과 결투를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단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온 거니까.”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결투를 해서 날 이긴다면 묻는 말에 뭐든 아는 대로 대답해 주지.”
주첨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 하지.”
“오오, 성격도 급하시군. 지금은 내가 하기 싫어. 아무튼 정정당당해야 하니까. 저녁쯤이면 컨디션이 회복되겠지? 난 그때 다시 오겠어.”
해버톤은 자기가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렸다. 방 안에 주첨기와 에스 그리고 던칸만 덩그러니 남았다.
에스가 잘 익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사부, 용병왕 해버톤과 결투를 할 건가요? 용병들 중에 제일 강자라고 알려졌던 자예요. 통일을 전후로 해서 갑자기 사라졌는데 이런 곳에서 도적질이나 하고 있을 줄이야.”
“사부라고 부르지 마라.”
“예?”
“난 너희들 사부가 아니다.”
“사부, 사부, 사부, 사부, 사부, 사부…….”
정신이 없다. 스멀스멀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천하의 주첨기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혈을 봉해 버릴 수도 없는 일!
주첨기는 에스를 직시했다.
“나를 사부라고 부르지 말아라.”
“맞잖아요.”
“내가 진짜 대국의 검사를 사부로 소개시켜 줄 테니 그만 해라.”
“진짜 대국의 검사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요?”
“누누이 말하지만 난 검사가 아니다.”
“그럼…… 정말 검사님을 사부로 소개시켜 주는 거죠? 저하고 이 곰탱이 둘 다 말이에요.”
에스는 멍하니 앉아 있는 던칸까지 끼워 넣었다.
“알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여라.”
“언제요?”
“여행이 모두 끝나면…….”
“그 말 믿을 수 있죠?”
주첨기는 약간 망설였다.
“그럼 그 검에 대고 맹세를 해 봐요. 그럼 더 이상 사부라고 안 부를게요.”
“알겠다. 내 검에 대고 맹세하지.”
선황이 주신 검에 직접 맹세했으니 주첨기는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주첨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더 이상 사부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황제에게 제자가 있어서는 안 되기도 하지만, 저 아이를 제자로 들인다는 건 너무나 골치 아픈 일 일꺼다.’
주첨기는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대국의 검사님이 아니죠?”
“그렇다.”
“뭐야! 난 또 검사인 줄 알았잖아? 아, 존댓말 하느라 혼났네. 이봐! 빨리 과일 먹고 힘 좀 보충해야지. 당신이 결투에서 지면 우리까지 위험해진다고.”
배시시 웃는 얼굴을 향해 화도 낼 수 없는 노릇이다. 주첨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던칸이 조심스레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집 주위를 여러 명이 지키고 있었다.
“명심해. 당신만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는 게 아냐. 알았지? 뭐야, 자는 거야?”
주첨기는 억지로 자는 척했다. 대국의 황제가 여자아이의 수다에 질려서 자는 척까지 해야 한다니, 주첨기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에스, 밖에 도적들이 지키고 있어.”
“그러겠지.”
“어? 알고 있었던 거야?”
“척보면 딱 아냐, 곰탱아. 그래서 네가 곰탱이라는 거야. 그걸 굳이 봐야 알아?”
“그렇구나.”
던칸이 실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끼, 우끼…….]혼자인 설령은 모두가 잠들어서 심심했는지 방 안 곳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에스의 뺨을 밟았다.
“아얏!”
탁상에 얼굴을 대고 자고 있던 에스가 눈을 떴다. 설령은 씨익 웃으며 주첨기의 품속으로 숨은 상태였다.
창밖을 보니 이미 해가 기울고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에스는 주첨기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저녁이야. 정신을 차려놔야 조금 이따가 결투를 하지. 막 닥쳐서 일어나면 제 힘을 발휘 못한다구.”
“음…….”
에스의 수다를 피하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보통사람들이 그렇듯 주첨기도 그렇게 잠들고 말았다.
에스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던칸도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저녁이네요? 스워드님, 정말 해버톤을 상대할 수 있겠어요? 유명한 용병왕인데…….”
던칸이 물었다.
주첨기가 발록과도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을 안다면 절대로 이런 질문은 못할 것이다.
주첨기는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나무문이 쾅 소리와 함께 앞쪽으로 쓰러졌다.
“이놈의 집을 부숴 버리든지 해야지, 원…….”
해버톤이 뜯어진 나무문을 밟아댔다. 곧 주첨기 일행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자, 시간이 됐다. 준비는 됐겠지?”
해버톤이 말했다.
주첨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비장해 보이는군! 암, 그런 자세로 임해야 나도 할 맛이 나지. 오랜만의 결투라 벌써부터 온몸의 힘이 불끈불끈 솟는데? 빨리 나와.”
광장같이 넓은 공터에는 원형으로 로프가 처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오러블레이드를 쓰는 기사 대 용병왕 해버톤!
사람들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와아아아!”
해버톤이 경기장 쪽으로 걸어가자 사람들이 양쪽으로 길을 비키며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우우우우!”
반면에 주첨기의 등장에는 야유를 퍼부었다.
주첨기와 해버톤은 서로를 바라보며 경기장 중앙에 섰다.
“보시다시피 이 로프 안이 경기장이다. 검을 써도 좋고 쓰지 않아도 좋다. 물론 상대를 죽이거나 항복을 받아내면 이기게 된다. 죽거나 항복하면 지는 거지. 단 한 가지 규칙이 더 있다. 로프 밖의 사람들이 다치게 공격하면 안 된다는 거지.”
“그건 나도 마음에 드는군.”
“좋았어. 곧 북소리가 들리면 결투는 시작된다. 알겠는가?”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10보 정도 뒤로 물러나 서로를 직시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각기 병기를 메고 있지만 빼 들지는 않았다.
“흐합!”
해버톤이 주첨기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거친 힘에 빠르기까지 하다.
주첨기는 주먹 끝을 노려보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비꼈다. 해버톤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 역시 주첨기의 주먹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틀렸어! 빈틈이닷!’
방금 전의 공격으로 자신의 허리 쪽에 완벽한 빈틈이 생겼다. 그런데 주첨기는 이곳을 공격하지 않았다. 몸을 띄워 다리로 해버톤의 어깨 쪽을 걷어찼다.
해버톤이 씨익 웃으며 간단하게 발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오른발을 주첨기의 허리 쪽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스슷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서 주첨기가 사라졌다. 해버톤의 발은 이번에도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제길, 또 빈틈이야.’
해버톤은 서둘러 복부를 막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복부 쪽으로 공격이 들어오지 않고 방비가 손쉬운 어깨 쪽을 노리는 것이었다.
‘지금 날 놀리고 있나?’
해버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똑바로 안 해!”
해버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와아아아!”
사람들에겐 해버톤이 우세로 보였다. 해버톤의 마음도 모르고 환호성을 질렀다.
해버톤은 등 뒤의 양손검을 꺼내 들었다. 검날만 무려 190센티미터가 되는 엄청난 크기로 거한인 해버톤이 들자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 커다란 것을 해버톤은 수직으로 치켜세웠다.
다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조, 조심해!”
“조심하세요!”
에스와 던칸이 외쳤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서운 시선이 에스와 던칸을 꿰뚫었다.
주첨기도 청강검을 빼 들었다.
“으아아압!”
해버톤은 무서운 기세로 주첨기에게 달려들었다. 하늘 높이 치켜들었던 양손검이 주첨기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주첨기는 뒤로 살짝 몸을 날렸다. 절묘하게도 칼날이 바로 그의 코앞을 지나가 바닥을 강타했다.
흙더미가 사방으로 튀었다. 해버톤은 콧바람을 쑥쑥 내뿜으며 기합과 함께 양손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주첨기가 청강검으로 양손검의 날을 막았다.
주첨기의 몸이 뒤로 튕겨졌다. 아니, 해버톤은 그가 일부러 뒤로 몸을 날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다시 함성을 질렀다.
‘이, 이놈! 감히 이 해버톤을 놀려?’
해버톤의 이마의 혈관이 곧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는 기운을 끌어올렸다. 거대한 양손검날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대장님의 오러블레이드닷!”
“와아아아!”
구경꾼들은 대장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러블레이드로 끝장낼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양손검날에 감돌고 있는 푸른 기운!
그 오러블레이드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유명한 소드마스터 셋도 바로 저 검의 희생양이 되었다.
“뭐 해! 스워드!”
에스가 부르짖었다.
주첨기도 내력을 일으켜 검을 감쌌다. 검날 주위로 푸른 기운이 얇게 퍼졌다.
“그, 그게 아니잖아! 전에 보여 줬던 오라는 그것보다 수십 배나 강했잖아!”
에스는 답답했다.
“감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군. 오냐, 그렇게 소원이라면 죽여주겠다.”
답답하긴 해버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실력을 숨긴 상태로 마치 밀리는 듯한 연극을 하고 있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숨긴 상대의 실력을 도저히 감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으아아압!”
해버톤의 오러블레이드와 주첨기의 오러블레이드가 맞부딪쳤다.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다.
그것뿐이랴? 눈조차 뜰 수 없을 정도의 강풍이 휘몰아쳤다. 몸이 날아갈 듯한 강풍 속에서 구경꾼들은 자세를 낮추고 눈을 감았다.
“으아압!”
이대로 질 순 없다. 해버톤이 모든 기운을 양손검에 쏟아 부었다. 좀 더 푸른 기운이 강맹해져 주첨기의 검을 밀어내는 듯했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해버톤은 마치 태산과 상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주첨기는 끝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눈을 질끈 감고 있어 아무도 경기장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주첨기는 한순간 내력을 발출하여 해버톤의 전신을 압박했다.
“커컥!”
해버톤은 숨이 막혔다. 양손검에 일렁거리던 오러조차 상대의 기운에 파묻혀 사그라졌다.
완벽한 패배였다. 해버톤의 눈에서 전의가 사라졌다.
주첨기는 내력을 거두어 뒤로 몸을 날렸다. 몰아치던 강풍이 사라졌다. 구경꾼들은 급히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경기장 양끝에 서서 대치중이었다.
검을 축 늘어뜨린 두 사람…….
모두의 생각대로라면 주첨기가 경기장 바닥에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
“다 됐으니 이제 그만 하지.”
해버톤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중 스스로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한 자가 환호성을 질렀다.
“대장이 적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 그렇군!”
“와아아아아―!”
일제히 터져 나온 환호성이 산을 뒤흔들었다.
에스와 던칸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월감에 찬 눈빛으로 구경꾼들은 에스와 던칸을 바라보았다.
에스와 던칸은 더 화를 입기 전에 서둘러 주첨기를 데리고 해버톤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리 용병왕 해버톤이라 해도 왠지 당신이라면 이길 줄 알았는데…….”
“에스, 그럼 우리 죽는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아. 자비를 베풀었다고 저렇게 떠들어 대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에스와 던칸은 시무룩해졌다.
부서진 문틈으로 주첨기를 흘깃흘깃 바라보는 구경꾼들…….
“뭐 해? 곰탱아, 빨리 저 문 닫아 버려. 흥!”
에스가 불퉁거렸다.
“이런…… 아가씨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군.”
해버톤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밖에서는 아직도 해버톤의 이름을 외쳐대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해버톤이 뒤로 손짓을 하자 밖이 조용해졌다. 그래도 우월감에 찬 사람들의 눈빛이 싫은 에스는 계속 던칸을 독촉했다. 던칸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문짝을 다시 붙였다.
쾅!
문이 굳게 닫혔다.
“당신…… 어째서 그런 연극을 한 것인가? 이 해버톤을 조롱한 것인지, 아니면 수하들 앞이라고 하여 배려를 해 준 것인지 헷갈리는군.”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이봐, 당신이 이긴 거였어?”
에스가 주첨기에게 물었다.
“과일과 잠자리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두지. 그럼 나와 대화를 나눌 마음이 생겼는가?”
“잠깐, 그전에 당신은 누구지?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몰라. 신명대국의 400검사는 아닌 것 같고…… 그럼 누구란 말이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강자가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야. 사실대로 말하면 난 당신의 진짜 실력을 감조차 잡지 못했어. 변명조차 할 수 없는 패배라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군.”
해버톤이 뒷머리를 쑥스럽게 긁적였다.
“그, 그런 거야? 용병왕 해버톤을 변명조차 할 수 없도록 이겨 버린 거였어? 이거 너무 대단하잖아! 당신, 정말 너무 대단해!”
마침 에스는 주첨기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너무 기분 좋은 나머지 주첨기의 뒤통수를 때렸다.
주첨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우끼!]성을 낸 것은 설령이었다. 설령이 시뻘게진 표정으로 불쑥 튀어나와 ‘우끼! 우끼!’하며 울음소리를 냈다.
‘스워드님이 용병왕 해버톤을 이겼다니!’
던칸은 계속 멍해 있었다.
“그만, 설령. 자, 해버톤. 나는 궁금한 것이 꽤 있다. 대답해 줄 수 있겠지?”
해버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용병왕 해버톤인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럼 통일되기 전의 온갖 전쟁에 많이 참여했겠군.”
“당연하지. 나와 내가 이끌던 용병단은 주로 뉴얼국에 등용되어 있어 뉴얼국 기사들을 대신해 올드얼국 병사들과 전투를 했고 거기서 명성을 떨쳤지.”
“그렇군. 그럼 어떻게 도적단이 된 건가?”
“신명대국이 대륙을 통일하고 나자 할 일이 완전히 없어졌다. 간혹 운송 같은 걸 부탁하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운송했다. 신명대국의 법병들이 도적을 퇴치했고 대륙엔 더 이상 몬스터도 없으며, 어느 곳이든 왕래가 가능하기에 그렇게 된 거지. 뭐, 또 그렇게 돼서 우리 용병들이 할 일을 아주 없어져 버리게 된 것이다.”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해버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럼 이곳에 모인 그대의 수하는 모두 용병들인가?”
“대체 무엇이 궁금한지 모르겠군. 이런 것들을 물어봐서 그쪽이 무슨 이득을 얻을지 모르겠어.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은 내 수하들이다. 하지만 망국의 기사나 병사였던 자들이 합류하기도 했지.”
주첨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질밖에 먹고살 길이 없었나?”
“이봐! 아무리 나를 이겼다지만 적당히 하라고. 계속 아픈 곳만 쿡쿡 찌르는군. 검을 쓰던 사람이 검을 잡고 살아야 하는데…… 결국 그래서 택한 것이 도적질이지. 누군 좋아서 도적질을 하고 있는 줄 알아?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지역의 도적단들도 그러한 연유 때문인가?”
“그거야 각기 사정이 있겠지만 우리와 별다를 바 없을 거다. 왜 그렇게 도적단에 관심이 많지? 도적단이라도 꾸려 볼 생각인가?”
해버톤이 이죽거렸다.
‘그렇다면 왜 대국의 병사로 지원하지 않았나?’라는 수순은 밟지 않았다. 주첨기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통일이 된 대륙. 간단한 민란을 제압할 정도와 치안만 유지할 정도의 병사만 있었으면 됐다. 그래서 통일된 직후 각 성에 만 명 이상씩의 병사를 두지 말도록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마지막 질문이다. 용병들은 총 몇 명이나 됐지?”
“대략 3만 명 정도가 됐을 텐데 지금은 나처럼 도적질을 하고 있겠지. 아마 대국에서 병사로만 받아 준다면 도적질 같은 건 때려치우고 당장 달려갈 자들이 태반일 것이다. 이제 질문은 끝났겠지?”
통일이 돼서 불이익을 당한 직업군도 있었다. 바로 전장을 주 무대로 삼았던 용병들이었다.
“대장, 큰일났습니다!”
한 도적이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인데?”
“대국의 법병들이 산 밑에 진을 펼치고 있습니다.”
“결국 걸렸군.”
해버톤이 어깨를 으쓱했다. 언젠가는 법병들에게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다.
해버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병사의 수는?”
“5천 명 정도? 그 정도로 보입니다.”
“그럼 걱정할 게 뭐 있어? 우리의 수가 천 명이 더 많다. 전장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던 몸, 설마 법병과의 전투가 두려운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면전을 벌이면 우리도 만만치 않은 피해가 입을 겁니다.”
“우린 피해가 많을 뿐이지만 적군은 전멸할 것이다. 누가 대장으로 나왔지?”
“남하성주 매화일검이 직접 나왔습니다.”
“제길!”
해버톤은 계속 욕설을 내뱉었다. 하필이면 남하성주 매화일검이 직접 나설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뛰어난 무위는 대륙인들 모두가 알고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집결시켜라. 어쩌면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전투에 임해야 할 것이다.”
“예, 대장님!”
도적은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남하성주 매화일검이 법병들을 끌고 온 것 같군.”
주첨기가 뇌까렸다.
“그래, 이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혹시 남하성주의 무위를 본 적이 있는가?”
“난 보았다. 부하들 앞이라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런 엄청난 자와 전쟁을 벌어야 한다니 미칠 노릇이군.”
“넌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나?”
“제기랄! 이번에는 나만 죽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아.”
해버톤은 억울한지 주먹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처음부터 조잡했던 나무탁상이 힘없이 부서졌다.
“잘 들었다. 우린 이만 내려가겠다. 이곳에 있다간 전투에 휘말리겠군.”
“훗, 마음대로…….”
주첨기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 처음 본 이방인에 불과하다.
주첨기는 에스, 던칸과 함께 도적단의 소굴, 아니 용병마을에서 나왔다. 확실히 산 아래쪽으로 수백 개의 횃불들이 아른 거렸다.
“저 사람들, 저렇게 끝나는 거야? 아까 아이들도 여자들도 있었는데…….”
에스가 말했다.
“맞아요. 그런 건가요, 스워드님?”
마음 약한 던칸은 눈물을 글썽였다. 참담해하던 용병왕 해버톤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용병왕 해버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들이 왜 도적이 됐는지 이해가 갈 만도 해. 일자리는 없고 대국에서 병사로 받아 주지도 않으니…… 그런데 당신,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아? 검사들과 안면이 있잖아.”
“가셔서 전투를 말려 주세요.”
“그렇게 할까?”
주첨기가 물었다.
“할 수 있으면 해야지!”
“그래요!”
에스와 던칸의 눈동자가 빛났다. 주첨기는 피식 웃으며 둘과 함께 횃불이 어른 거리는 쪽으로 향했다. 늦은 저녁이라 법병들의 진에서 밥을 짓는 냄새가 풍겨왔다.
진의 주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법병들이 주첨기 일행을 발견했다.
“멈춰라!”
법병이 할버드를 겨누었다. 산에서 내려온 이들을 우선 포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법병이 집게와 엄지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자 뒤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개중에 파티에 참석했던 주첨기 일행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저분들은 도적이 아냐! 성주님께 보고드릴 테니 극진히 모셔두고 있어.”
법병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 매화일검에게 보고했다.
매화일검은 바로 주첨기 일행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뭣들 하느냐. 내 손님이시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예!”
법병들이 허리를 숙였다.
‘역시!’
에스가 싱긋 웃으며 주첨기를 올려다보았다. 주첨기가 가자는 식으로 고갯짓을 했다.
매화일검의 막사 안으로 들어온 주첨기는 잠시 에스와 던칸을 밖으로 내보냈다.
“스워드는 지금 성주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설득하고 있겠지?”
“그런데 정말 검사들과 관계가 깊은걸? 남하성주님까지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손님이라고 하실 정도니…….”
“응, 대단한 분 같아.”
“됐다, 야. 얼굴 좀 생기고 몸매도 좋은 편이고, 검술도 상당하지만…… 성격이 너무 야박하다랄까?”
“아냐, 말투가 조금 차갑다고 그 사람 자체가 차갑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럼 에스 넌 투박해?”
“곰탱이! 무슨 소리야?”
“아, 아니…….”
던칸이 에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뻑!
에스가 던칸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컥! 눈깔 빠지는 줄 알았잖아!”
둘은 막사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엿듣고 싶어도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저 나뭇가지로 땅바닥을 끼적거릴 뿐이었다.
“폐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황제 주첨기가 누군데!
매화일검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무안한지 얼굴을 붉혔다.
“도적들은 대부분 용병들이었다. 저 산의 도적단은 용병왕 해버톤이라는 자가 작은 마을을 꾸리고 있더군.”
“용병이라니요?”
주첨기는 매화일검에게 짧게 설명했다.
매화일검은 ‘아!’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렇군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폐하.”
“물론 도적질을 한 저들의 죄가 씻기는 것은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대국의 책임도 크다. 우선 다시 회군부터 한 후 논의하는 것이 좋겠군.”
“예, 폐하.”
병사들의 저녁식사가 끝날 때쯤 회군을 시작했다.
산 아래까지 와서 진까지 펼쳤다가 다시 돌아간다니?
용병왕 해버톤은 그 속에 담긴 사정을 모르고 의아해했다.
도적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다만 용병왕 해버톤만이 혀를 차며 나무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병력을 더 보충해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남하성의 손님대접을 받고 있는 에스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성에서도 높은 귀족들이나 묵는 방이 배속되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방.
에스는 푹신하고 넓은 침대 위에서 몸을 굴렸다.
“곰탱아!”
“어?”
“그런데 스워드의 여행은 언제 끝날까? 빨리 끝나야 우리한테 스승님을 소개시켜 줄 텐데…….”
“난 아직도 스워드님이 어떤 분인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겠어. 스워드님의 말대로 검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무엇을 하시는 분일까?”
“골치 아프게 생각해 봤자 너만 손해야. 나처럼 마음 느긋하게 가져.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닌데, 뭘.”
에스가 마음대로 규정하며 말했다.
한편 주첨기는 매화일검과 지도를 보며 대화중이었다.
매화일검이 대륙의 서쪽 끝 부분을 가리켰다.
“청검왕께서 남하성에도 응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응원군?”
“갑자기 등장한 몬스터들은 꼭 과거의 스켈레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을뿐더러, 모두 광폭하고 몇 배는 더 강해져 있다고 합니다.”
“의아한 일이군. 몬스터라…… 그래, 병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하더냐?”
“예,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각 성의 병사는 치안과 민란을 다스릴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자들을 그곳으로 보내면 되겠군.”
주첨기가 용병들을 지칭해서 말했다.
“과연 순순히 말을 따를까요?”
“본래 용병인 자들이다. 좋아서 도적질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몬스터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다고? 진천 스승님께서 그러셨느냐?”
“예, 폐하.”
“그들을 서부지역의 몬스터를 토벌할 외병(外兵)으로 등용할 것이다. 그리고 각 지역에 널리 알리길, 과거 용병들에 한해 군사직 등용을 확충하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군사로 등용된 자들에 한해 지금까지 저지른 죄는 한 번만 눈감아 주겠다고 하여라.”
칙령을 받든 법병들이 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 용병이었다가 도적들이 된 자들에게는 황금과 같은 칙령이다.
용병들은 곧장 관군이 되기 위해 인근 성으로 향해 이제 빈번한 도적단의 습격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남은 도적들은 순전히 도적질이 좋아서 하는 것이니 그들을 토벌하는 것은 당연지사!
칙령이 발표된 지 한 달 후부턴 도적토벌이 강화되고 타협은 없다는 점을 엄중히 밝혔다.
“어떻게 됐어요?”
던칸이 벌떡 일어섰다.
“등용하기로 했다.”
“거봐, 난 당신을 믿었다니까!”
에스와 던칸이 뛸 듯이 기뻐했다.
도적이지만 도적들이 아닌 자, 바로 스타드 산맥에 있는 그들이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주첨기는 경공을 이용해 순식간에 도적마을에 도착했다.
마침 해버톤은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언제 법병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해버톤은 주변의 지도를 펼쳐들고 법병들을 막을 계책을 준비 중이었다.
탁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해버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히엑! 언제 온 거냐?”
해버톤은 질겁했다.
“법병을 상대할 수 있겠나?”
“뜬금없이…… 할 수야 있지. 다만 우리가 매일같이 전쟁판에서 나뒹군 전사들이라지만, 한 사람 아래 체계가 잡힌 병사를 상대한다면 제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희생이 매우 크다. 적은 5천, 우리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그런데 왜 다시 온 거지?”
해버톤이 물었다.
“살길을 제시해 주러 왔다.”
주첨기는 소매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해버톤 앞에 내밀었다.
해버톤이 그것을 받아 들고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게 뭐지?”
“보다시피 황제폐하께서 너희들을 모두 등용하고자 내리신 문서다.”
“큭!”
해버톤은 고개를 저었다. 눈썹을 치켜 올리며 주첨기를 노려보았다.
“이걸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한마디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황제폐하가 우리 모두를 등용하겠다고?”
“외병으로 등용되어 서부의 몬스터들을 퇴치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군.”
“그게 아니다. 이 문서는 단순히 남하성주가 우리를 산 밑으로 끌어내기 위한 술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술책?”
“그래, 이따위 위조문서는 믿을 수 없다.”
해버톤이 말했다.
“하하하!”
갑자기 주첨기가 대소를 터트렸다.
“왜 웃지?”
“감히 어느 누가 황제폐하를 사칭할 수 있단 말이더냐. 감히 어느 누가?”
“흐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다. 충성심 강한 남하성주가 일개 도적들을 끌어내기 위해 황제를 사칭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다른 이가 위조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스워드라는 사내의 말처럼 대륙에 황제폐하를 사칭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해버톤은 다시 문서를 훑어 내려갔다.
“외병이 정확히 뭐지?”
“대륙의 해안가에 주둔하여 몬스터 같은 괴수들을 퇴치하는 병사들을 일컫는다. 황제폐하께서는 바로 어제 너희들뿐만 아니라 용병이었던 모든 자들을 외병으로 등용하겠다는 칙령을 각지로 내리셨다.”
“그 말이 사실인가?”
주첨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뿐만 아니라 3만의 용병들에게 인정받았던 너를 외병부장(外兵副長)으로 임관하여 옆에서 외병장군을 보필하여 외병들을 지휘토록 하게 하셨다.”
“뭣?”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오죽 좋을까?
해버톤은 눈앞에 있는 자의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도 않던 일이라 섣불리 믿기가 힘들었다.
해버톤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주첨기가 뒤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쉬익
누군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다, 당신은?”
해버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네가 용병왕이라고 불리던 해버톤인가?”
“다, 당신은 남하성주?”
해버톤은 급히 매화일검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법병들이 몰려왔다든지 수하들이 쓰러져 있다든지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은 조용했다. 아무도 지금 자신의 집 안에 남하성주 매화일검이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소. 내가 해버톤이오. 그런데 정말 이 문서가 사실이란 말이오?”
“황제폐하의 칙령이다. 의심하지 말라.”
“이 문서대로라면 내 수하들은 물론이고 용병이었던 자들 모두들 외병이란 병사로 등용하겠다는데, 이것이 사실이오?”
“그렇다.”
“지금까지 저지른 도둑질도 모두 봐주겠다는 말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무 믿기가 힘들어서 그렇소. 정말 이 문서가 사실이라면…… 난 지금 기뻐서 홀딱 벗고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오.”
“그럼 홀딱 벗어야겠군.”
주첨기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
“오오……!”
남하성주 매화일검까지 직접 와서 문서의 사실을 증명해 주었는데 더 이상 안 믿을 수가 없었다.
“황제폐하……!”
해버톤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