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76
제6화 몬스터 토벌작전
“몬스터?”
“예, 시장님.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법병 500을 보내 모조리 토벌하여라.”
몬스터들은 처음 400고수들이 평원에 정착했을 때 신명나게 잡았던 것들이었다. 남주 서해성(西海城) 베룸의 시장으로 있는 소면혈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평원에 집중되어 있던 몬스터들 중 몇몇이 살아남아 대륙의 서쪽까지 도망쳤던 모양이다. 숨어 지내다가 다시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3일이 지난 후에도 소면혈객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시장님!”
집정관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다급하느냐?”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더냐?”
“몬스터를 퇴치하기 위해 갔던 법병 500과 기사들이 거의 전멸을 당했습니다.”
“뭣?”
“살아남은 자가 고작 열 명에 불과합니다. 그 열 명조차 아홉은 정신이 이상합니다.”
베룸에 주둔 중이던 병사가 천 명이라고 볼 때 이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고작 3일 만에 베룸의 법병이 500으로 줄어 버렸다. 더욱 큰일은 사람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하찮은 몬스터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소면혈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살아남은 병사를 불러와라.”
“예!”
집정관은 급히 뛰어나가 정신이 온전한 병사를 데리고 왔다. 미쳐 버린 병사들에 비해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뿐이지 병사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소면혈객 앞에서도 몸을 덜덜 떨며 주위를 쉴 새 없이 두리번거렸다.
“이름이 무엇이냐?”
“카, 카슨입니다.”
“좋다, 카슨. 이곳은 안전하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의 상황을 말해 보아라.”
“그것들은 악마였습니다. 예, 분명 악마였습니다. 그리고 눈동자가 없었습니다. 오크, 코볼트였는데…… 눈동자가 없는 흰 눈으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 보니 우리 편은 다 죽어 있었습니다.”
“죽어 있었다고?”
“그놈들이 동료들의 병기를 취해갔고, 또 어떤 놈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습니다. 전…… 무작정 달렸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전 그렇게 도망쳤습니다. 그 악마들로부터…….”
몇 번을 다시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면혈객은 병사를 돌려보낸 후 치안을 담당할 병사 100을 제외한 나머지 400명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직접 병사들이 몰살당했다는 해안가로 향했다.
해안가에 도착한 소면혈객은 코를 쥐었다.
“우엑!”
따라온 병사들도 구토를 했다.
해안가에는 법병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단순히 죽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병사의 증언대로 시체가 파 먹힌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이게 대체…….”
소면혈객은 잔인한 몬스터들의 행각에 이를 악물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 용서할 수 없다. 하찮은 것들이 병사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시체를 먹다니. 여봐라,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여 놈들을 찾아내라!”
“예!”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면혈객 또한 울분을 터트리며 몬스터를 찾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병사들 외에 일반백성들의 시체도 간간히 보였다.
“으악!”
해안가 북동쪽 숲에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소면혈객은 병사들을 이끌고 그쪽으로 향했다. 채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몬스터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크…….]소면혈객은 나타낸 몬스터들을 기억했다. 바로 오크라 불리는 몬스터들이다.
그런데 평원에서 봤던 때와는 뭔가가 달랐다.
“눈동자!”
그렇다. 검정 눈동자가 없이 온통 흰자위만 있어 섬뜩했다.
숲에서 나오기 시작한 오크들의 수가 점점 불어났다. 끊임없이 나왔다. 잠깐 병사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사이 오크 수가 병사들만큼이나 불어났다.
“법병들은 당장 저 괴물들을 죽여라!”
“예!”
“으아아아압!”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오크들에게 달려갔다. 오크들도 이상한 가래가 끓는 소리를 내며 마주 달려왔다. 오크들과 병사들이 해안가에서 맞부딪쳤다.
“이놈들!”
소면혈객이 접전지의 중심으로 몸을 날렸다. 눈이 마주친 오크를 향해 검을 뻗었다.
소면혈객의 검이 오크의 복부를 깊게 파고들어갔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평원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몬스터들도 고통을 느끼는지라 검에 찔리면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오크는 검에 찔리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크르르르…….]검에 찔린 오크는 도리어 소면혈객을 향해 클럽을 휘둘렀다. 쉬잉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고 힘이 실려 있었다.
소면혈객은 눈을 부릅뜨며 오크의 복부를 찌른 검을 비틀었다. 그래도 클럽은 멈추지 않고 정수리를 향해 내려왔다.
소면혈객은 검을 빼고선 클럽을 피했다. 그러고는 단칼에 오크의 목을 베어 버렸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런데 피 색깔이 검정색이다.
‘이놈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소면혈객은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바닥에 드러누운 법병들이 꽤 보였다. 법병들도 소면혈객처럼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목을 베어 버리지 않는 이상 오크들은 죽지 않았다. 아니, 공격이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기억하고 있는 오크들이 아니다. 더욱 민첩해지고 힘도 강해졌을뿐더러 고통을 느끼지 못해 두려움이 없다.
법병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제길!”
소면혈객은 소리를 지르며 솟구쳤다. 아직도 숲 쪽에서는 오크들이 더 밀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법병들이 오크들에게 겹겹이 포위된 상태가 되었다.
소면혈객은 오크들이 집중되어 있는 쪽으로 검기를 날렸다. 검기는 가볍게 오크들을 절단했지만 어떤 오크도 날아오는 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죽기 위해 달려드는 것 같다.
“후퇴해라!”
소면혈객이 외쳤다. 하지만 퇴로는 모두 막혀 있다.
소면혈객은 퇴로를 열기 위해 후방의 오크들을 공격했다.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들이라 자칫 방심하다가는 어김없이 뒤에서 클럽이 날아들었다.
소면혈객은 식은땀을 흘렸다. 한 놈을 베면 다른 놈이 그 자리를 채웠다.
“으아아아―!”
소면혈객은 고성을 터트렸다. 집중시킨 내력을 앞으로 터트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소면혈객은 무자비하게 검을 놀렸다.
하지만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사방은 법병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저건 또 뭐야!”
오크들이 연 길 사이로 덩치가 산만 한 놈 세 마리가 소면혈객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오…… 우거!’
어렵사리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오우거들은 오는 도중에 거대한 나무몽둥이를 휘둘러 법병들을 가볍게 날려 버리거나 혹은 걷어찼다.
단 세 마리의 오우거의 등장으로 더욱 아수라장이 되었다. 간혹 용감한 법병이 오우거의 발에 할버드를 꽂았다. 그럴 때면 오우거는 어김없이 자신을 공격한 법병을 걷어차 버렸다.
세 마리의 오우거도 오크들처럼 검정 눈동자가 없다. 흰자위만 보였다.
“이 자식들이……!”
전멸의 위기.
폭발한 소면혈객은 오우거에게 몸을 튕기며 검기를 날렸다. 검기가 한 오우거의 한쪽 팔을 절단하고 지나갔다. 그래도 오우거는 아무렇지 않았다. 조그마한 신음 하나 지르지 않는다.
소면혈객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날아간 가속도를 이용해 한 오우거의 머리를 베었다.
쉬익!
채 땅에 착지하기도 전에 오우거 두 마리가 동시에 소면혈객을 공격했다.
소면혈객은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오우거의 나무몽둥이에 의해 애꿎은 모래사장만 깊게 파였다.
소면혈객은 가장 가까운 놈의 다리를 절단했다.
쿵!
오우거가 균형을 잃고 오른쪽으로 쓰러졌다. 남은 오우거가 소면혈객에게 다시 공격했다.
언뜻 보기에도 엄청난 힘이 실린 나무몽둥이. 아무리 내공의 고수라지만 저런 걸 한 대 맞으면 부상을 피하지 못하리라.
소면혈객은 방심하지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공격을 피했다. 그러곤 바로 오우거의 목을 잘랐다.
그때였다. 뒤에서 섬뜩한 바람이 불어와 소면혈객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좀 전에 다리를 잘렸던 오우거가 쓰러진 상태로 나무몽둥이를 휘두른 것이다. 사람보다 큰 나무몽둥이가 소면혈객의 전신을 강타했다.
미처 내력으로 몸을 보호하기도 전에 당했다. 소면혈객은 뒤로 튕겨 날아갔다.
간신히 착지했지만…….
“쿨럭!”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 이놈!”
소면혈객이 쓰러진 오우거의 전신을 향해 검기를 쉴 새 없이 날렸다.
주변에 있던 애꿎은 오크들까지 검기에 휩쓸려 난자당했다.
“허억, 허억!”
소면혈객이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서 있는 것은 오크고 누워 있는 것은 법병이다.
모두 전멸했다.
“크윽!”
소면혈객은 참담한 신음을 흘렸다.
남주 서해성의 성주 남궁혁은 처음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보고서를 봤을 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베룸의 시장 소면혈객이 두 번째 보고서를 가지고 직접 왔을 때는 왠지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소면혈객은 부상을 입은 듯 보였다.
“소면혈객, 그 부상은 무엇이오?”
“괴상스러운 놈에게 당했습니다.”
소면혈객은 치욕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대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요?”
“그렇습니다, 성주님.”
소면혈객은 대륙의 극서쪽 해안가와 맞닿은 베룸의 시장으로 있었다.
“소면혈객, 그대가 부상을 당하다니…….”
남궁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면혈객이 내민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아니……!”
남궁혁은 놀란 음성을 터트렸다.
몬스터를 퇴치하러 갔던 1차 500명이 단 열 명만 빼고 모두 전사. 소면혈객이 직접 이끌었던 2차 400여 명이 소면혈객만 빼고 모두 전사.
실로 믿기 힘든 보고서였다. 1차는 그렇다 쳐도 고수가 포함된 2차까지 전멸이라니.
서해성주 남궁혁은 침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소면혈객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오. 이는 철저히 조사해 볼일이오.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몬스터들이라니…… 이런 소리는 처음 듣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온데…… 제게 법병 3천을 주시면 모두 말끔히 퇴치하겠습니다. 수치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성주님.”
소면혈객이 포권했다.
남궁혁은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보고서대로라면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회의실 안으로 검사 혈아가 들어왔다. 그 또한 소면혈객처럼 부상을 입은 듯 보여 남궁혁은 짐짓 긴장했다.
“아니, 크리트는 어찌하고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이오?”
남궁혁이 혈아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성주님.”
“설마…… 몬스터 때문이오?”
소면혈객이 맡고 있는 베룸과 혈아가 맡고 있는 크리트는 서로 붙어 있었다. 베룸에서 몬스터가 출몰했다면 크리트에서도 출몰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추측이 눈앞의 결과로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니, 소면혈객! 그대도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였습니까?”
“그렇소이다.”
소면혈객이 참담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혈아 또한 마찬가지 표정이 되었다.
“제게 병사 3천을 내주십시오, 성주님.”
“저는 2천이면 됩니다.”
소면혈객에 이어 혈아가 말했다. 동변상련의 아픔으로 서로를 쓰다듬던 눈빛이 적의로 돌변했다.
“천5백.”
“성주님, 저는 천 명이면 됩니다.”
“그만들 하시오. 아무래도 이 일은 신중히 조사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소.”
서해성주 남궁혁은 발 빠른 자들로 조사단 100명을 구성해 베룸과 크리트 주변의 해안가와 숲, 산 등을 중심으로 보냈다.
몬스터의 세력권이 어디까지인지, 또한 그들의 수가 어느 정도로 추정되는지에 대한 조사였다.
사태는 생각보다 매우 심각했다. 서해성의 해안가 일대가 모두 몬스터의 세력권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몬스터의 수는 추정할 수 없었는데 오크, 코볼트, 고블린, 트롤, 드레이크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가 있었다.
그리고 더욱 문제인 것은…….
“뭐라? 세력이 점점 불어나고 있다고?”
“예!”
병사가 대답했다. 남궁혁은 이마를 짚었다.
근래 들어 갑자기 몬스터의 출현보고를 받았고,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성의 병력만으로는 도저히 통제 불능에 이른 것이다.
최대한 자신이 막아 보려고 했으나 손을 쓰려고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일은 이미 남궁혁의 손을 떠났다.
남궁혁은 하는 수 없이 청검왕 진천에게 이를 보고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닌 줄 알았다. 몬스터 정도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평원에서 신명나게 잡은 것들이었다.
청검왕 진천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남주의 서해성에 왔다.
서해성주 남궁혁을 비롯해 관리들이 모든 예를 갖춰 진천을 맞이했다.
“그렇게 심각하단 말이더냐?”
“예, 전하.”
“서해성의 고수와 병사들로는 막을 수가 없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전하. 어떻게 그것들이 나타났고, 또 어떻게 세력이 한순간에 팽창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그 조사한 내용입니다.”
남궁혁이 진천에게 조사서를 내밀었다.
진천은 천천히 조사서를 훑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진천이 탁상에 펼쳐진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몬스터들의 세력, 그 중심은 ‘검은 밀림’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바로 이곳이군.”
“예, 하지만 주변에 많은 몬스터들이 있는지라 그곳에는 접근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경공의 고수를 보내 보았나?”
“예,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수들조차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
남궁혁을 제외한 남주의 나머지 네 성주들에게 병사들을 요청해 서해성으로 모아야만 했다.
하지만 각 성의 병력은 민란과 치안 그리고 도적들을 담당하기에 빠듯해서 타지로 보낼 병사가 얼마나 있을지 걱정부터 들었다.
각 성에서 보내올 병사는 많이 잡아야 2천 명, 총 만여 명의 병력이 모일 것으로 예상된다. 진천은 각 성주에게 병력을 요청한 후 직접 서쪽 해안으로 가 보기로 결정했다.
성주 남궁혁과 소면혈객, 혈아도 진천의 뒤를 따랐다.
이제 해안은 완전히 몬스터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남궁혁은 백성들에게 해안의 접근을 금했다.
“저것들인가?”
진천과 세 고수는 해안을 따라 걸었다. 진천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오크 무리를 발견하고 물었다.
“예, 전하.”
“마기(魔氣)……!”
진천이 부르짖었다.
사악한 기운이 오크 무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숲 너머로 검은 밀림 쪽에서 거대한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검은 밀림의 마기를 다른 고수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검은 밀림에 거대한 마기가 일렁거리고, 몬스터들은 모두 그 마기의 영향 때문인지 사악한 기운에 휩싸여 있다. 알고 있었느냐?”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 고수가 대답했다.
“우선 그 정체를 알아야 하네. 저것들을 지나쳐서 가자.”
“예, 전하!”
오크들이 비록 강해졌다지만 진천과 세 고수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진천과 세 고수는 오크들을 뛰어넘으며 검은 밀림 근처에 도달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수가 파악되지 않는다.
진천이 사방으로 검기를 날렸다.
[꾸엑!]검은 피를 쏟아내며 몬스터들이 죽어나갔다. 그래도 몬스터는 끊임없이 몰려왔다.
“스켈레톤!”
진천과 세 고수는 검은 군주 발록과 함께 대륙을 어지럽혔던 스켈레톤이 떠올랐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던 그때와 너무나 똑같았다.
검은 밀림으로부터 가고일 떼가 날아들어 하늘을 점령했다. 그래서 몬스터들을 뛰어넘으며 밀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오우거나 투헤드 트롤 같은 거대 몬스터들까지 몰려들어 세 고수는 위급한 순간이 많았다.
“검은 밀림 근처부터 이 정도로 몬스터의 세가 강하니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이만 돌아가자.”
“예, 전하.”
하는 수 없이 진천과 세 고수는 서해성으로 돌아왔다.
진천은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세 고수는 적잖은 상처들을 입었다.
그때 황제 주첨기의 칙령이 내려왔다.
“정말 서쪽에서 몬스터가 출몰한다고? 지금 우리가 그곳으로 가고 있는 거 맞지, 곰탱아?”
“그렇다니까.”
“오, 예!”
에스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자고로 수련을 나왔으면 몬스터 퇴치의 수순을 밟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통일 전 신명대국이 드래곤 평원의 몬스터들을 모두 퇴치해 버려 최근 몇 년 동안 몬스터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좋아만 할 일이 아냐. 남하성주께서 대규모 병사들을 서해성으로 보내고 있는데 그것만 봐도 위험한 곳이라구.”
“으그, 또 겁부터 먹었지?”
“그, 그런 게 아니라…….”
던칸은 말꼬리를 흐렸다.
“빨리 타라.”
마차 옆에 서 있던 보콜이 멀리서 손짓했다.
에스는 들뜬 마음으로, 던칸은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언제나처럼 던칸의 자리는 마부 보콜의 옆이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에스.”
주첨기가 말했다.
“즐겁고말고. 당신을 만난 후로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있는걸. 아, 그렇다고 당신에게 고맙지는 않아.”
에스가 혀를 불쑥 내밀었다.
주첨기는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첨기는 그간 남하성에서 매화일검과 같이 용병들을 집결시켰다. 남하성 근처에 있던 광태랑을 급히 부르고 그에게 외병장군의 임무를 맡겼다.
창 너머로 한 떼의 인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외병장군 광태랑과 외병부장 해버톤이 이끄는 외병들이었다.
주첨기 일행이 탄 마차는 외병들 뒤쪽에 따라붙었다.
두두두두
말들이 거친 콧바람을 뿜어내며 힘차게 질주하고 있었다.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해버톤이 광태랑에게 말했다.
“난 너를 모른다, 부장. 이름이 뭐라고 했지?”
광태랑이 이죽거렸다.
“해버톤이라고 하지.”
“듣자 하니 용병들이 너를 꽤 따랐다더군. 하지만 그때의 영광은 잊는 건 좋아. 과거에 네가 오합지졸들을 이끌었다지만 나는 대륙통일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자다. 또한 너의 상관이기도 하지.”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
“끝까지 말을 못 알아듣는군. 네 전적보다 내 전적이 훨씬 뛰어나고 내가 너보다 강하며 상관이니 넌 내게 복종해야 한다는 거다.”
“……!”
“우선 그 눈빛과 말투부터 고쳐!”
도발!
광태랑이 눈을 부라렸다.
해버톤은 ‘훗!’하고 코웃음치며 광태랑의 말을 무시했다.
광태랑에게는 외병장군으로서 외병들에게 복종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외병들이 자신보다 외병부장으로 등용된 해버톤을 더 따랐다.
광태랑은 해버톤의 기를 꺾고 외병들로부터 복종을 받아낼 심산이었다.
“누가 강한지는 붙어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지.”
해버톤이 뇌까렸다.
대국 검사들의 수많은 소문들을 들으며 평소 대결을 한번 해 봤으면 싶었던 해버톤이다.
광태랑은 대결하기 마땅한 장소에 이르자 진군을 멈췄다. 그리고 해버톤에게 말에서 내려오라는 듯 손짓했다.
주첨기는 광태랑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눈치챘으나 굳이 관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둘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너는 아직까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대장 노릇을 하려는 모양이구나? 내가 그토록 우습게 보이나? 이 광태랑이?”
“너야말로 나를 너무 우습게보고 있군.”
“그럼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좋아, 이렇게 하지. 대결을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남자답게 말이다. 불만은 없겠지?”
“그거 좋지!”
일전에 주첨기와의 대결에서 패했던 해버톤은 계속 마음속에 그 일을 담아두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약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대국의 검사를 이겨 강함을 입증하리라!
“무기를 쓰지 않나?”
“이게 내 무기지.”
광태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중에 무기가 없어서 졌다고는 하지 마라.”
“네가 얼마나 헛된 자만심을 품고 있었는지 똑똑히 알려 주지, 킬킬!”
광태랑의 말대로였다. 그는 주첨기처럼 해버톤을 배려하지 않았다.
일합!
단 일격에 해버톤을 잠재웠다.
광태랑이 칠상권의 수법으로 해버톤의 복부에 권을 적중시켰다. 해버톤은 미처 방비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마음속으로 해버톤을 응원했던 용병들은 입을 쩌억 벌렸다. 용병왕 해버톤이 검사의 일격조차 받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사실 마지막에 광태랑이 내력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면 해버톤의 생사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광태랑이 떨어진 해버톤의 검을 주워들었다. 쓰러진 해버톤에게 검을 내밀었다.
“부장, 받아라.”
해버톤은 쓴 침을 삼키며 검을 받아 들었다.
“간혹 지금도 너와 같이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망국의 기사들이 내게 대결을 신청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난 대결을 피하지 않고 대국의 강함을 똑똑히 보여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한없이 잘난 줄 알거든? 개중엔 대국의 통일도 단순히 운이 좋아서 이룬 걸로 아는 자들도 있더군. 물론 그 후로 내게 공격 한 번 못해 보고 진 자들은 부끄러워서 고개조차 못 들고 산속에 숨어 버렸지.”
광태랑이 해버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해버톤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 대국의 강함을 똑똑히 보았는가? 400검사들이 모두 나와 대등한 실력이고 이왕전하는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경지이시다.”
“대국의 검사가 모두 당신처럼 강하단 말이오?”
해버톤도 타격 직전에 광태랑이 기운을 거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 물론 나보다 강한 자도 많고 나보다 약한 자도 있지만, 그 차이는 거의 없다.”
“400명 모두가……!”
해버톤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 번도 대국의 검사들과 맞부딪쳐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황제폐하의 무위는 어떻게 되오?”
해버톤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어느 누구도 황제폐하의 무위를 입에 담지 않는다.”
“왜 그러오?”
“그분은 무신(武神)이다. 발록이라고 했던가? 마신이라 불렸던 그 마물도 황제폐하께 꼼짝을 못 했지.”
“스켈레톤을 본 적이 있소. 하지만 발록이 정말 존재했단 말이오?”
“발록은 물론이고 지고의 존재라 자부하던 드래곤들도 모두 황제폐하의 검 아래 무너졌다. 그런데 어찌 황제폐하의 무위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소문이 모두 사실이었군요.”
물론 대국의 황제가 대륙에서 제일 강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자들은 직접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해버톤도 그랬다. 모두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황제폐하와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소. 그 사람의 경지는 감히 어느 누구도 추측하지 못할 것이오. 난 아직도 그자와의 대결이 꿈만 같으니까.”
“그게 누군가?”
“장군도 아는 자요. 어제 장군과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오. 이름이 스워드라고 했소. 저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 말이오.”
“하, 하하…….”
스워드?
바로 황제폐하이시다.
광태랑은 허탈하게 웃었다.
“부장.”
“예, 장군.”
“흐흐, 이제 나를 장군이라 부르는군. 좋아, 그럼 내가 한 가지 충고를 하지. 혹여 다시 그분과 검을 겨루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거든 당장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내 말했지 않소. 감히 추측도 못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에게 지고 난 뒤 나는 지금과 같이 다시 겨루고 싶다는 호승심 같은 게 일지 않았소.”
“엉? 지금은 호승심이 일고 있다는 말이군.”
“검을 든 자로서 당연한 것 아니겠소.”
“흐흐, 그렇지. 다음에 더 강해졌다고 생각된다면 다시 대결을 신청해도 좋다. 언제든 받아 주지. 하지만 그분께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품지 말아라. 그분은 널 용서하실지 몰라도 내가 용서 못하니까.”
광태랑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럴 생각 없소. 그런데 자꾸 그분 그분 하는데, 도대체 그 스워드란 사람의 정체가 뭐요?”
“정체?”
“그렇소. 내 평생 그토록 강한 사람은 처음 보오. 또 장군뿐만 아니라 남하성주까지도 그 사람을 극진하게 대하는 것 같았소.”
‘거참, 암행을 나오신 황제폐하라고 말해 줄 수도 없고…….’
광태랑은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검왕 진천은 남하성에서 증원군이 출발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거리가 꽤 먼지라 아무리 빨리 온다 해도 한 달!
그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검은 밀림에서 느껴지는 마기가 계속 불안한 진천은 밤새 고민했다.
‘우선 주군께 말씀드리고 남주의 검사들만이라도 소집해야겠다.’
진천은 결정을 내렸다.
서해성주 남궁혁에게 몬스터들이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서해성의 고수들을 소집하여 몬스터를 막으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즉시 황성 쪽으로 이동했다.
내리 이틀 동안 경공을 극성으로 운용한 끝에 황성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혜공이 그를 맞이했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요. 그런데 여기까지 직접 오시다니, 무슨 일입니까요?”
“주군을 뵈러 왔네. 주군은 어디 계신가?”
진천이 말했다.
“전하께선…….”
진천이 너무 갑자기 온지라 혜공은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청검왕 전하라면 한눈에 장우생의 역용술을 파악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디 계시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내가 직접 찾아보겠네.”
진천은 다급한 마음에 혜공 옆을 스쳐 지나갔다.
혜공이 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멀리서 오셨는데 식사부터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주군께 인사를 드리는 게 우선이네, 혜공 공.”
“그럼 목욕재개라도 하셔서 깨끗한 몸으로 폐하를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혜공 공, 지금 난 매우 급하네. 또한 신하 된 자로서 황성에 왔으면 마땅히 주군께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옳네. 식사와 목욕은 그 후에 하겠네.”
진천은 황제의 집무실 쪽으로 이동했다.
혜공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뒤따라갔다.
과연 주군은 집무실에 있었다.
“주군, 소신 진천이 왔습니다.”
막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려는 순간 진천은 동작을 멈췄다.
“어떻게 된 일이더냐?”
진천이 황제에게 물었다.
“그, 그게……!”
집무실에 앉아 있는 황제는 자신의 주군이 아니다!
역시 진천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뒤에서 혜공이 ‘이크!’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전하!”
황제의 모습을 한 장우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천에게 절을 했다.
비록 다른 사람이지만 그래도 주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자신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진천은 눈을 감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당장 역용술을 풀지 못할까?”
장우생이 혜공의 눈치를 살폈다.
혜공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장우생은 곧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노한 진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조아렸다.
“장우생, 주군께서 잠시 그림자 역할을 해 달라고 명하셨느냐?”
“예, 전하.”
장우생이 대답했다.
“혜공 공.”
진천이 혜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혜공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괜스레 헛웃음을 지으며 진천에게 다가갔다.
“지금 황상께서는 암행 중이십니다요.”
“헌데 왜 주군의 스승이자 신하인 내가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야 하는가?”
“그, 그건 황상께서…….”
“됐다.”
진천은 몹시 섭섭한 표정이었다.
“주군께서 암행에 나서신 게 언젠가?”
“약 두 달 정도 되었습니다요.”
“어디로 향하셨는지는 아는가?”
“바로 3일 전 황상의 칙령이 남하성에서 발표된 것으로 보아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요.”
“알았네.”
경공을 극성으로 운용할 때 남하성까지의 거리는 이틀이었다.
진천은 서둘러 집무실을 나왔다. 문득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이게 누구야, 낄낄낄!”
북주주 수라왕 수라혈마가 어느새 나타나 진천을 보며 웃음을 쪼갰다.
“수라혈마, 오랜만이군.”
“낄낄, 그래! 1년 만이지? 내 제자는 안에 계신가?”
수라혈마가 진천의 어깨 너머로 집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황제의 용포를 덮어쓴 장우생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혜공도 보였다.
“오, 늙은 마누라! 낄낄.”
수라혈마가 진천을 스쳐 지나 혜공에게 말했다. 그간 북주의 일에 전념하느라 1년 동안 황성에 못 온 수라혈마는 모든 사람들이 반가웠다.
“저, 전하께서는 황성에 무슨 일이십니까요?”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갑자기 이왕전하 모두 황성을 찾아왔다.
혜공은 식은땀이 났다.
“늙은 마누라,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시나? 낄낄, 본좌가 그동안 제자의 얼굴도 못 본 지 오래됐고 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지. 그런데 저놈은 뭐야? 왜 제자의 용포를 입고 엎드려 있는 거야? 무례한 놈! 장우생, 당장 용포를 벗지 못하겠느냐?”
수라혈마는 장우생이 입은 용포를 대번에 벗길 기세였다.
“황제폐하의 명이시라…….”
“무슨 말이더냐?”
수라혈마가 죽일듯한 눈으로 장우생을 노려보았다.
애꿎은 장우생만 몸을 떨었다.
“주군은 지금 암행을 나가셨네.”
뒤에서 다가온 진천이 말했다.
“뭐? 본좌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암행을 나갔다고? 암행을 나갈 거면 본좌도 좀 데리고 나가 주지. 지난 1년 동안 성에 갇혀 집무만 봤는데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암행을 나갈 수 있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서해성이 혼란에 빠졌다. 남주의 모든 고수들을 소집해야 할 상황이거늘…….”
“낄낄낄! 본좌보다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군, 진천.”
“그게 아니다, 수라혈마.”
“뭐가 아냐. 가끔 일어나던 민란도 이제 다 진압되었고 최근에는 태평성대라고. 그런데 네가 맡은 남주는 200명의 고수들을 모두 소집해야 할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고? 낄낄, 이게 바로 본좌와 너의 차이지.”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추한 늙은이.”
수라혈마는 연신 낄낄거렸다.
“흥!”
“재미있는 늙은일세, 낄낄.”
진천이 수라혈마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왜들 그러십니까요, 이왕전하.”
“난 지금 전하를 찾으러 가겠네. 전하께서 혜공 공을 믿고 황성을 맡겼으니 나 역시 혜공 공을 믿고 가 보겠네.”
“본좌도 이 노인네랑 같이 가야겠다, 늙은 마누라.”
“예, 예!”
혜공이 허리를 숙였다.
“누가 같이 간다고 했는가?”
“본좌가, 낄낄!”
“흥!”
진천은 문밖으로 몸을 날렸다.
“늙은 마누라, 다음에 또 보지.”
수라혈마도 급히 진천의 뒤를 따랐다. 진천이 계속 따라오지 말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으나 수라혈마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며 더 가깝게 따라붙었다.
진천은 그만 포기했다. 어차피 일이 크게 확대될 시에는 북주주 수라혈마에게도 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속 뒤에서 낄낄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 웃지 못하겠는가? 원……!”
“화내지 말라고, 진천.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법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낄낄낄!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다급한가?”
“됐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친네가 토라진 것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낄낄낄!”
“흥! 북주는 어떻게 하고 계속 따라오는가?”
“북주야 본좌의 뛰어난 통솔력으로 안정시켰으니 이제 수하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누구하고는 다르게, 낄낄!”
“뭣?”
수라혈마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프다. 진천은 마치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라는 식으로 경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팟!
때론 나뭇잎을 밟으며 튀어 올랐고,
스스슷!
때론 호수 위를 스치듯 질주했다.
둘은 예정대로 이틀 후 남하성에 도착했다. 성 근방은 속속 모여드는 용병들로 어수선했다.
진천과 수라혈마는 달리던 속도를 멈추지 않고 곧장 성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스치고 지나간 후 바람이 일었고 용병들과 관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하성주에게 청검왕 진천과 수라왕 수라혈마가 왔다고 일러라.”
진천과 수라혈마가 매화일검의 집무실 앞에 멈췄다. 마치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집무실을 지키고 서 있던 법병 둘이 ‘헉!’하고 신음을 흘렸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법병 둘은 놀라서 눈만 껌뻑거렸다.
“뭣들 하느냐!”
수라혈마가 호통쳤다.
“저, 전하!”
그제야 법병 둘은 정신이 들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정신이 혼미했다. 전설적인 인물 두 사람이 자신들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수라혈마가 말했다.
“본좌가 왔다고 전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법병들은 혼미한 가운데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일어섰다. 그리고 막 집무실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안쪽에서 매화일검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왕전하!”
매화일검이 놀라면서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서 있던 법병들도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매화일검, 그동안 잘 있었는가?”
진천이 물었다.
“예, 전하께서도 별고 없으셨는지요. 헌데 이 먼 곳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서해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듣지 못했는가?”
“그렇잖아도 외병들이 모집되는 족족 서해성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주의 모든 고수들을 소집해야 할 것 같구나. 주군이 이곳에 계신다고 들었다.”
“서해성의 문제가 그렇게 시급한 것입니까? 황상께선 3일 전에 서해성으로 떠나셨습니다.”
“3일 전에?”
“예, 하오나 마차를 타고 가셨습니다.”
매화일검이 대답했다.
“낄낄, 마차를 타고 갔다면 몇 시진이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구나. 진천, 어서 가자고!”
“매화일검, 내 곧 서해성의 문제로 전서를 보낼 테니 기다리고 있게.”
“알겠습니다, 전하.”
진천과 수라혈마는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매화일검은 멍하니 서 있다가 절을 한 채로 굳어 버린 법병 둘을 내려다보았다.
“가셨다. 일어나라.”
두 법병은 얼떨떨한 자세로 일어났다. 마치 나사 하나가 풀려 버린 듯 멍해져 있는 모습을 본 매화일검은 혀를 차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 이봐! 방금 전에 정말 청검왕 전하와 수라왕 전하가 맞나?”
“그런 것 같네만…….”
“난 심장이 조막만 해져 숨이 막혔네.”
“나도 그러네.”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법병에겐 잊지 못할 하루가 되었다.
6천이나 되는 대군이 진군하는 말발굽소리는 요란스러웠다. 마차 창문을 굳게 닫아도 에스는 시끄러워서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창에 기대어 자고 있는 주첨기를 지그시 응시했다.
“잘생겼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자고 있을까?”
자기는 잘 못 자고 있는데 옆 사람은 곤한 잠에 빠져 있으니 심통이 났다.
에스가 주첨기의 귓가에 바람을 후 불었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한 번 더 불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주첨기가 천천히 눈을 떠 에스를 바라보았다.
꿀꺽!
에스는 그 상태로 숨을 넘겼다.
“이봐, 혼자만 그렇게 자는 게 어딨어?”
“심념에 빠지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래? 그거 어떻게 할 수 있는 건데?”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만 계속 생각해 보아라. 어느 순간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될 수 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광대들의 시끄러운 노랫소리인데, 그럼 더 잠을 못 이루잖아. 에이,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히 뻥쟁이네.”
“흠…….”
주첨기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에스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주첨기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키득거리길 반복했다.
“이봐, 아까도 많이 잤잖아.”
“누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
“그게 누굴까? 아무튼 더 못 자. 나 너무 심심한데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계속 마차만 타고 가니까 너무 무료하단 말이야. 당신은 심심하지도 않은가 봐.”
주첨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볼 때는 당신, 엄청 흥미진진한 모험을 많이 했을 것 같아. 그중 하나만 얘기 좀 해 줘라. 그럼 자는 거 방해 안 할게. 이왕이면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해 줘. 나 전쟁영웅담이면 아주 환장하거든, 헤헷! 아니다. 설령, 설령 좀 깨워 줘라. 어?”
설령은 언제나 그렇듯 주첨기의 품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에스가 설령을 꺼내고자 주첨기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주첨기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으차!”
에스는 주첨기의 목 아래 옷 속으로 손을 우악스럽게 집어넣었다. 설령의 머리 부분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막 에스가 설령의 얼굴을 움켜쥐려고 할 때 주첨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위로 끌었다.
“좀 가만있을 수 없겠나?”
주첨기는 이런 소녀를 처음 보았다. 천방지축도 이런 천방지축이 없을 것이다. 외간남자의 옷자락에 손을 집어넣다니. 벌써부터 후에 낳게 될 딸이 에스와 같은 성격을 지니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쉬이익
갑자기 창이 흔들거렸다. 창틈으로 강렬한 바람이 불어와 에스의 붉은 머리칼을 휘날렸다.
“뭐지?”
에스가 중얼거렸다.
마차가 빠른 속도로 멈추었다. 진군소리로 요란스러웠던 밖이 매우 조용해졌다.
에스는 오른편에 있는 창을 열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뭐, 뭐야?”
그녀는 당혹스러워졌다.
6천이나 되는 병사들이 멀리 보이는 두 사람을 향해 바짝 엎드려 있었다. 시끄러운 외병들이 숨소리까지 죽이고 있었다. 심지어 마부석에서 보콜 아저씨와 던칸까지 급히 내려와 그 두 사람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의아한 상황이라 에스는 좀 더 잘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우뚝 서 있는 두 사람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소유자였는데 한 사람은 붉은색 장포를, 다른 한 사람은 푸른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던칸, 뭐야?”
에스가 조용히 말했다.
던칸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에스에게 얼른 마차에서 내리라는 듯 손짓했다.
“던칸……?”
“이, 이왕전하께서 납시셨어. 빨리 마차에서 내려!”
이왕전하!
저 두 분이 황제폐하 바로 옆에서 대륙을 통일한 청검왕과 수라왕이라니. 과연 들리는 말처럼 태산 같은 기운이 먼 곳에서도 느껴졌다.
에스는 화들짝 놀라 주첨기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봐, 이왕전하께서 왕림하셨어. 빨리 내려야겠어!”
“뭣?”
주첨기가 물었다.
“이왕전하께서 왕림하셨다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빨리 내려.”
에스가 문을 열고 주첨기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에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이봐! 안 엎드리고 뭐 해?”
에스가 엎드린 채로 말했다.
주첨기가 보니 정말 두 스승님이 온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암행 중이라 해도 근 1년 만에 뵙는 두 스승님의 모습이라 그의 표정도 밝아졌다.
“주, 죽고 싶어서 그래? 미쳤어? 응?”
에스는 멍하니 서 있는 주첨기를 향해 자꾸만 재촉했다.
수라혈마와 진천이 주첨기 쪽으로 걸어왔다.
에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땅에 댔다.
―스승님, 저는 지금 암행 중입니다.
주첨기가 진천과 수라혈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수라혈마와 진천은 주첨기 앞까지 걸어왔다.
에스가 실눈을 살짝 떴다. 이왕전하의 발이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
‘이크!’
에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주군, 비록 암행 중이시라곤 하나 상황이 급박하여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낄낄낄! 제자야, 암행을 나설 거라면 나도 데리고 가지 그랬냐?”
진천과 수라혈마가 말했다.
진천이 급박하다고 말할 정도니 주첨기는 더 이상 암행 사실을 감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스승님?”
주첨기가 수라혈마와 진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주군…… 제자…… 스승님?’
에스는 물론이고 근방의 보콜과 던칸 그리고 외병들까지 두 눈을 껌벅였다.
이왕전하의 제자가 곧 황제폐하이고, 황제폐하의 스승님이 이왕전하임을 모르는 사람이 대륙에 어디 있을까? 모두들 똑똑히 들었지만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에스의 심장박동이 질주하는 말보다 빨려졌다.
딱딱
그녀의 이빨이 부딪쳤다.
“주군, 암행을 그만 멈추시고 서해성에 가 보셔야겠습니다.”
“서해성에서 병력을 요청한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만, 스승님께서 이렇게 달려오실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낄낄! 다 진천 이 늙은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제자야. 이 스승이 총괄한 북주는 태평성대니 그곳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암, 누가 총괄하는 곳인데…….”
수라혈마의 말에 진천은 미간을 구겼다.
“주군, 지금 저희와 함께 서해성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야지요, 스승님.”
주첨기가 대답했다.
주첨기는 에스를 내려다보았다. 추위에 떠는 강아지처럼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가여울 정도였다. 언제나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주첨기가 무릎을 굽혀 에스의 턱을 살며시 올렸다.
“폐, 폐하! 제가 너무 무식해서 몰라 뵈었어요.”
에스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윽고 참지 못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에스의 얼굴은 금세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되었다.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에스는 목이 멨다. 그동안 자신이 대국의 황제폐하에게 했던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시하고 장난치고!
에스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곤히 자는 황제폐하를 못 자게 괴롭히지 않았는가. 폐하의 옷 속에 손까지 넣고!
주첨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짐이 숨겼던 것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 짐은 지금 스승님들과 함께 서해성으로 가야겠다. 법병들과 함께 서해성으로 오거든 짐을 찾아와라.”
“……!”
“알겠느냐?”
“예, 황제폐하!”
에스는 간신히 대답했다.
주첨기는 엎드려 있는 외병들을 가로질러 광태랑에게 향했다.
“서해성이 급박하니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한다. 또한 짐과 함께 해온 저 세 사람의 신변에 대한 책임을 맡길 것이다. 그럼 짐은 그대만 믿고 서해성으로 먼저 가겠다.”
“예!”
광태랑이 대답했다.
주첨기는 수라혈마, 진천과 눈빛을 교환했다.
탓!
지면을 박찼다. 모두의 앞에서 황제폐하와 이왕전하의 모습이 사라졌다. 모두들 엎드린 채로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동안 마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 해버톤 대장과 대결을 펼쳤던 사람이 황제폐하일 줄이야!
“속히 서해성으로 가야 한다는 황제폐하의 황명이시다! 모두 일어나 진군하라.”
광태랑의 외침이 있고 나서야 사람들은 주섬주섬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버톤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힘없이 말에 올라탔다.
“어, 어떡해…….”
에스가 던칸에게 울면서 안겼다.
“나 그동안 황제폐하인지도 모르고…… 아마 서해성에 도착하면 난…… 난 사형당할까? 아냐, 평생 감옥에 갇힌 채 죽는 게 더 좋다고 중얼거릴지도 몰라. 던칸, 나 어떡하지?”
던칸은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옆에서 에스가 황제폐하께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 누구보다 똑똑히 지켜보았던 두 사람 중 한 명이니까.
다른 한 사람 보콜이 에스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분이 아니시다. 너무 걱정 말아라, 에스.”
보콜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에스가 그의 표정을 보았다.
“으앙!”
그치려 했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아닐 거야, 에스…….”
던칸이 자신 없게 말꼬리를 흐렸다. 멀리서 대국의 검사이자 외병장군인 광태랑이 다가왔다.
세 사람은 광태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황제폐하께서 너희들의 신변을 책임지라 하셨다.”
신변!
에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안색이 새하얘졌다.
“으앙!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어떡하면 좋아? 난 사형당할 거야.”
너무나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하는 에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