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77
제7화 불사지존(不死至尊)
서해성의 30고수들을 소집하고 병사들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동안 며칠간의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동안 베룸의 소면혈객과 크리트의 혈아가 자경단까지 조직하여 몬스터들에 대항했지만 결과는 참패!
두려움이 없는 몬스터들은 어느덧 베룸과 크리트까지 장악했다.
“크윽, 빨리 백성들을 인근 도시로 피신시켜라!”
소면혈객은 온갖 부상으로 곧 쓰러질 듯 보였다.
“예!”
살아남은 몇몇 기사와 법병들이 백성들을 호위하여 인근 도시로 향했다.
상황은 혈아의 크리트도 마찬가지였다.
“한발 늦어 버렸군!”
남궁혁이 30고수와 병사 만 명을 이끌고 도착했지만 이미 크리트와 베룸은 장악되어 버린 상태였다.
“성주님, 광분한 놈들이 계속 진격하고 있습니다.”
소면혈객이 말했다.
“우선 크리트와 베룸 주위에 진을 펼쳐서 더 이상 몬스터들의 세력이 확장되지 않도록 막아야 하오. 각 고수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진을 펼쳐라!”
서해성의 성주로서 남궁혁이 명령을 내렸다. 고수 30여 명은 각기 데리고 온 병사들과 함께 크리트와 베룸의 경계를 에워쌌다.
“소면혈객은 지금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소.”
“아닙니다. 황제폐하께 위임받은 영지를 저깟 괴물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직접 제 손으로 찾아야 합니다. 혈아, 그렇지 않은가?”
“맞소!”
혈아까지 동조했다.
남궁혁이 말릴 틈도 없이 소면혈객과 혈아는 고수들이 만든 진을 뛰어넘어 몬스터들에게 몸을 날렸다. 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소면혈객! 혈아!”
남궁혁이 내력을 터트렸다.
이미 몬스터들 사이를 파고들어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몬스터들만 보일 뿐이었다.
남궁혁은 신음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소면혈객과 혈아가 베룸으로 들어갔소. 빨리 몬스터들을 몰아내 둘을 구해야 하오.”
남궁혁이 뛰어오는 트롤의 목을 베어 버리며 외쳤다.
그의 명령이 모든 고수들에게 전달되었다. 베룸과 크리트의 경계지역 전체에 넓게 포진한 병사들이 시내를 향해 진격했다.
“이런……!”
남궁혁은 당혹스러웠다. 고수 30명과 병사 만 명이라면 몬스터들의 돌진을 저지하고 두 개의 도시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성주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립니다. 진으로 돌아가 돌진해오는 몬스터들을 막아야 합니다. 자칫 한 곳이라도 무너진다면 다른 도시들까지, 나아가서는 남하성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소면혈객과 혈아는 포기하란 말이오?”
“성 전체의 안위가 달린 문제입니다, 성주님.”
“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오.”
황성의 대소사를 과감히 결정하고 추진했던 남궁혁이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결단이 서지 않았다. 성을 포기하는 것도, 두 고수를 포기하는 것도 모두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성주님, 결단을 내리셔야…… 앗!”
고수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쪽에서 황제폐하와 이왕전하가 도착했다!
“황제폐하!”
남궁혁과 고수들은 목청껏 부르짖었다. 그들은 주첨기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이거 완전히 상황이 안 좋구만? 진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낄낄!”
수라혈마는 진을 뚫으려는 몬스터들과 이를 저지하는 고수, 법병들의 치열한 전투현장을 보았다.
“남궁혁, 결국 베룸과 크리트가 몬스터들에게 함락되었는가?”
진천이 물었다.
“예, 전하.”
주첨기의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확실히 스승의 말대로 검은 밀림 쪽에서 거대한 마기가 일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결코 자신의 기운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폐하, 소면혈객과 혈아가 시를 되찾겠다며 베룸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뭣이라?”
진천이 말꼬리를 올렸다. 이미 장악된 두 도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밀집되어 있을 게 뻔했다. 결코 둘의 실력으로는 눈동자가 없는 몬스터들 무리 사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목숨이 위험하다.
“주군,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낄낄! 아니다, 제자야. 내가 다녀오지.”
“스승님, 다 같이 가는 게 좋겠습니다. 빨리 다녀오지요.”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주군.”
“정말 오랜만에 몸 좀 풀겠는 걸? 낄낄!”
남궁혁과 고수들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황제폐하와 이왕전하가 오셨으니 그 무엇이 나타난다 해도 두렵지 않다. 베룸으로 몸을 날린 주첨기와 수라혈마 그리고 진천을 향해 그들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한참 몬스터를 공격하던 수라혈마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뇌까렸다.
“이것들 뭐야! 본좌가 내력을 흘려도 오히려 더 기고만장이네? 감히……!”
“주군, 이 몬스터들은 공포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더욱 강해진 것들입니다.”
진천이 검기를 날렸다. 횡으로 뻗어나간 검기가 몬스터 수십 마리의 목숨을 취했다.
주첨기 또한 청강검을 꺼내 거침없이 몬스터들을 베었다.
수라혈마와 진천 그리고 주첨기, 이 3인은 빠른 속도로 시내까지 들어갔다. 셋이 지나간 자리로 몬스터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였다.
“소면혈객! 혈아! 짐이 왔다.”
내력이 담긴 주첨기의 음성이 시내 곳곳으로 퍼져갔다.
우우웅
몬스터들이 귀를 틀어막았지만 이내 귀, 코, 눈,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수백, 수천이나 되는 몬스터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역시 내 제자야.”
수라혈마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진천과 달리 그는 매우 신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동안 성에 틀어박혀 서류 업무만 보았기 때문이다.
무려 1년 만이다. 이렇게 마음껏 검을 휘두르고 내력을 분출하는 것 말이다. 제자와 함께하는 것도.
시내 좀 더 깊숙한 쪽에서 검기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 소면혈객과 혈아 둘 중 하나가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게 틀림없었다.
주첨기는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가고일 떼가 그에게 날아들었다. 주첨기가 기합을 한 번 내지르자 전신에서 내력이 터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첨기를 에워쌌던 가고일 떼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이미 동료가 그렇게 당했는데도 가고일들은 끝없이 몰려들었다.
끈질기다!
어째서 진천 스승님께서 서해성이 위급하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주첨기 곁으로 접근하는 가고일 떼는 공격 한번 못 해 보고 모두 목숨을 잃었다.
탓!
주첨기는 시내 깊숙한 지점에 착지했다.
“허억, 허억!”
소면혈객은 오우거의 나무 몽둥이를 간신히 피했다. 오우거 다리 사이로 달려온 오크가 그의 목을 공격했다. 소면혈객은 오크의 머리를 자르고서 심하게 비틀거렸다.
오우거 열 마리와 오크 수십 마리가 소면혈객과 혈아를 포위공격하고 있었다. 둘은 간신히 막고 서 있는 것에 불과했다. 마땅한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늦었다!
소면혈객은 눈이 크게 뜨였다. 오우거 세 마리의 집채만 한 나무 몽둥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몸도 말을 듣지 않고 피할 길이 없었다. 내력조차 거의 소진했다.
소면혈객은 죽음이 눈앞에 보였다.
주첨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열 손가락을 퉁겼다. 내력이 열 개의 화살이 되어 오우거의 머리들을 박살 냈다.
“폐하!”
소면혈객은 가물가물한 시야 속에서 주첨기를 발견했다.
―내력으로 귀를 막아라!
주첨기가 소면혈객과 혈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멸(滅)!”
주첨기의 가공할 내력이 실린 음성이 몬스터들의 귀를 파고들어가 머릿속에서 터졌다. 수백 마리의 얼굴이 잔혹할 정도로 터졌다.
주첨기는 소면혈객과 혈아의 혈을 짚었다. 소면혈객과 혈아는 따뜻한 기운이 몸속으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우선 진으로 돌아간다.”
그때 갑자기 검은 밀림 쪽에 웅크려 있던 마기가 사방으로 발산되는 것을 느꼈다.
“크와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괴성과 함께 솟구쳐 오른 존재가 멀리 보였다.
으득!
주첨기는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그 마기가 낯설지만은 않았다.
“마룡!”
세 개의 눈동자에서 발하는 붉은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비늘이 감싸고 있는 몸에 네 개의 날개가 돋아나와 펄럭였다.
바람이 일었다. 검은 밀림까지는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불쾌한 바람이 베룸까지 전해졌다.
“크푸, 크푸!”
마룡이 숨소리까지 크게 들린다.
아……!
통일 전에 대국의 본토를 침공했던 그 존재다. 황제폐하에게 내상을 입히고 마족 아르메이스와 함께 사라졌던 바로 그 마물!
소면혈객과 혈아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서 저 마룡을 때려눕히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선 진지로 돌아가야만 한다.’
주첨기는 생각했다.
“가자!”
주첨기가 소면혈객과 혈아와 함께 후퇴할 즈음 마룡은 다시 검은 밀림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마룡은 검은 밀림의 깊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입을 벌렸다.
거대한 입!
그곳에서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크아아아!”
통일 전 평서지역에서 처음 나타났다. 다리가 세 쌍, 날개가 두 쌍, 꼬리가 세 개, 눈이 세 개, 거기다 거대한 뿔!
괴상망측하게 생긴 그 괴수는 평서의 남부 테리흘 지역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진천과의 대결에서 브레스 단 한 방으로 그를 침몰시키면서 흉포함과 강인함을 자랑했다.
살아남은 드래곤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집합체라고 주첨기는 추정했다. 드래곤로드가 살아남은 드래곤들을 잡아먹어 마룡이 된 것이니 그 말이 곧 그 말이었다.
마룡은 신명국 본토까지 날아와 본토 390구역을 초토화시키고 주첨기와 대결을 펼쳤다. 서로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안겼고, 갑자기 나타난 아르메이스가 마룡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것이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된 마룡에 대한 기억이다.
“마룡이었습니다.”
진천이 주첨기에게 말했다.
주첨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은 쓰라린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그게 말로만 듣던 마룡…… 진천 널 브레스 한 방으로 날려 버린 놈이란 말이냐?”
다소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수라혈마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렇다.”
진천이 참담하게 답했다.
“그동안 어디 있었나 했더니 이곳에 숨어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첨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통일된 후로 백방으로 마룡을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검은 밀림 또한 조사를 안 해 본 게 아니었다.
“진천, 널 한 방에 보내 버릴 정도라면…….”
“그래, 수라혈마 너 역시 마찬가지다.”
어째서 몬스터들이 이성을 상실하고 사기(邪氣)에 휩쓸려 광폭해져 있는지 모든 게 설명되었다.
마룡이 있다면 그 주위에 아르메이스도 있다는 말이 된다.
주첨기가 말했다.
“스승님, 고수 200명을 소집해야겠습니다. 남주와 북주 어느 곳 하나 비워서는 안 되니 각 주마다 100명씩을 소집해 주시고 황성에 주둔하고 있는 법병 만 명을 증원하여 주십시오.”
통일 이후 최대의 사건이다. 대륙전쟁의 잔재인 마룡이 검은 밀림에 숨어서 힘을 비축하고 있을 줄이야. 더군다나 족히 수만은 되어 보이는 몬스터들까지!
어쩌면 로스엔, 에드먼과 전쟁할 때보다도 힘겨울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안심이 되는 것은 몬스터들이 머리를 쓰지 않는다는 것.
저쪽이 힘을 비축하여 지금이 뻗어 나올 시기라면 이쪽이 그것을 막으면서 힘을 비축하면 된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진격 때 모든 걸 박살 낸다.
“알겠습니다.”
진천이 명을 받들었다.
선택된 200여 명에게 공문을 보내고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매일같이 몬스터들과의 연속된 전투였다.
베룸과 크리트 밖으로 진출하려는 몬스터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대국.
황도의 법병들이 도착하고 검사들도 속속 도착하면서 전력에 보탬이 되었다. 외병장군 광태랑과 부장 해버톤이 이끄는 외병 3만여 명도 도착했다.
남하성에서 출발할 때는 6천여 명이었으나 서해성에 도착하면서 그 수가 불어 3만 명이나 되었다.
“아, 냄새!”
에스는 코를 막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음식 썩는 냄새보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틀어막아도 스멀스멀 파고들었다.
보콜과 던칸도 눈살을 찌푸렸다.
“에스, 저길 봐.”
던칸이 저 먼 곳을 가리켰다. 하늘과 땅을 오가는 검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많이 잡혔다. 그 아래로 수천 명의 법병들이 몬스터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보콜은 연신 침만 삼켰다. 이곳은 생사가 오가는 전장이다. 오면서 소문을 들어 보니 황도의 법병들도 증원되었다고 들었다.
보콜은 아들이 걱정되었다.
“아저씨의 아드님도 저 속에 있겠죠?”
눈치 없는 에스가 멀리 접전지역을 가리키며 물었다.
보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스!”
던칸이 따끔하게 말했다.
에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음유시인이나 참전용사들로부터 전해 들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두 번, 용병왕 해버톤과 황제폐하에게서만 보았던 오러블레이드의 푸른빛이 저 멀리 접전지역에서 난무하고 있었다.
“와아―!”
어느새 악취도 잊었다. 에스의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문득 황제폐하에 대한 일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초롱초롱했던 눈빛이 한순간에 꺼졌다.
에스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던칸을 돌아보았다.
“곰탱아, 나 이제 어떻게 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헤헤거리더니 왜 또 그래? 황제폐하께서 용서하실 거야.”
“그럴 거다.”
보콜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가자.”
던칸이 에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어.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에스는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했다.
“됐어.”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한 눈빛이다.
세 사람은 황제의 작전 천막으로 향했다. 그곳까지 가는 데 세 번의 검열이 있었다. 법병, 기사 그리고 천막 입구에 대국의 검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일전에 주첨기가 한 번 말해 놓았던지라 셋은 순탄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오라 명하셨다.”
검사가 보콜 일행에게 말했다.
막상 천막까지 다다르니 에스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나와 어느새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었다.
던칸과 보콜은 긴장해서 그녀가 울고 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폐하!”
셋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크게 절했다.
“고개를 들라.”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 그리고 멋들어지게 올라간 눈썹.
에스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황제의 외모가 예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울고 있느냐, 에스?”
“아, 아녜요.”
에스는 양팔로 눈물을 훔쳤다.
“어서 모두 일어나라. 너희 모두 짐의 친구들이거늘, 계속 무릎을 꿇고 있을 것이더냐?”
“감히 어찌 저희들이……!”
보콜이 목소리를 떨었다. 오기 전에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오면서 별일은 없었느냐?”
“예, 폐하.”
“그만 울어라, 에스. 짐이 너를 어떻게 하기라도 한단 말이더냐?”
“저를 사, 사형시키지 않으실 건가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황제폐하. 흐윽!”
“짐이 왜 널 처형한단 말이더냐.”
주첨기는 에스에게 다가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에스는 훌쩍이면서 눈물을 그쳤다.
“정말이죠?”
에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던칸과 보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콜.”
“예.”
“아들이 황도의 법병대장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렇습니다.”
“지금 전장에 황도의 모든 법병대장들이 와 있다. 아마 자네의 아들도 있겠군.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가?”
“에스톨이라고 합니다, 폐하.”
주첨기가 뒤쪽으로 눈빛을 보냈다. 대기 중이던 남궁혁이 밖으로 나갔다.
“그래, 던칸. 오면서 수련은 계속했느냐?”
“예, 폐하.”
“보다시피 이곳은 몬스터들과의 치열한 접전장이다. 그리고 검은 밀림 안에는 마룡이 숨어 있지. 어떤가, 에스? 네가 바라던 영웅담 속의 한 장면 같지 않느냐?”
주첨기가 물었다.
“아, 아녜요, 폐하.”
주첨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간 여러 날 동안 몬스터들과 밀고 당기는 접전을 벌이는 날만 계속되다가 잠깐의 여행이지만 그사이 정이 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천방지축 날뛰었던 에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들 너무 긴장한 것 같군. 짐이 꼭 저승사자라도 된 듯하구나. 너희들을 잡아먹지 않을 테니 모두 긴장을 풀어라. 에스도 말을 편안히 하고.”
“예, 폐하.”
셋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에스, 스워드를 잠 못 자게 괴롭히면서 전쟁영웅담을 들려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더냐?”
“그, 그건…… 스워드에게 한 거예요.”
에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 성격이 어디 가랴?
주첨기는 ‘큭’하고 웃었다.
“그렇지. 스워드에게 한 거지. 자, 스워드가 들려주는 영웅담은 창밖에 있다. 창밖을 보면 이미 수많은 영웅들이 역사를 만들고 있고, 너희는 지금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느냐?”
“예!”
에스가 눈물을 닦아내며 다소 크게 말했다.
보콜과 던칸은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기분전환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웃고 울고 화내다가 짜증 내고…… 순식간에 이런 것들이 이뤄지는데, 그게 바로 에스의 매력 아닌 매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야 에스답군.”
주첨기가 말했다.
좀 전에 나갔던 남궁혁이 한 사내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몬스터의 검은 피를 잔뜩 뒤집어쓴 용강함 법병, 보콜의 자랑스러운 아들 에스톨이었다.
‘황제폐하께서 왜 나를……?’
에스톨은 얼어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폐하! 법병대장 에스톨입니다.”
에스톨은 절하며 외쳤다.
“에스톨?”
보콜이 놀란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아버지?”
놀란 건 에스톨도 마찬가지였다.
“법병대장, 짐이 암행 중에 네 아버지의 신세를 많이 졌다. 오늘 하루만큼은 전장에서 물러나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라.”
보콜은 자신의 아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서부의 몬스터들은 검은 피를 흘린다는데 정말 아들은 검은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세 달 전쯤 봤을 때보다 더욱 늠름해진 아들을 발견한 보콜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폐, 폐, 폐하!”
던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던칸.”
“저…… 법병으로 지원할 수 있습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17세입니다.”
“지원 가능한 나이다. 하지만 밖을 보다시피 지금 이곳은 전장이다. 지금 지원하면 당장 저 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곳이다. 물론 네가 나이에 비해 강하긴 하다만…….”
던칸은 에스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와 저는 법병으로 지원하고 싶습니다, 폐하.”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내일 200고수와 1만의 법병, 3만의 외병이 몬스터와 마룡을 퇴치하기 위해 필사의 결전을 벌인다. 바로 내일이다, 던칸! 에스!”
“꼭 법병이 돼서 검사의 경지까지 이르고 싶습니다. 그게 저희의 꿈입니다.”
던칸은 평소와 다르게 또박또박 말했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생겨났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폐하, 지난번에 하신 약조는 유효한 것이지요?”
에스는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약간 장난스러운 끼가 얼굴에 어른 거렸다.
“짐이 스승을 구해 주겠다는 약조 말이더냐?”
“예.”
“짐은 약조한 것을 꼭 지킨다. 내일 몬스터들을 퇴치한 후 황성에 가서 약조를 지키도록 하지. 하지만 너희들이 이 전장에서 전사하면 약조를 지킬 수가 없다. 그래도 법병에 지원하겠느냐?”
“그럼요.”
에스는 던칸을 돌아보았다. 둘은 서로를 향해 씨익 웃었다.
주첨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둘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주첨기는 백마에 올라타 청강검을 빼 들었다. 푸르스름한 검기가 높이 치솟아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주첨기 옆으로 수라왕 수라혈마와 청검왕 진천도 보란 듯이 검기를 끌어올려 사기를 높였다.
“대열을 정비하라!”
200고수들이 법병 1만과 외병 3만을 통솔하여 진을 정비했다.
아침에는 비교적 몬스터들의 돌진이 덜했다.
주첨기는 베룸을 향해 청강검을 휘둘렀다. 수 미터는 족히 넘는 검기가 검에서 쏟아져 베룸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돌격하라!”
드디어 기다리던 진격이 시작되었다.
두두두두!
수만의 인마가 일으킨 먼지가 하늘을 뿌옇게 뒤덮었다.
황제 주첨기가 이끄는 군대는 사기가 드높았다. 주첨기는 누구보다 앞에서 돌진했다.
황제!
그분의 뒤에만 서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것은 검사도, 법병도, 그리고 새로 등용된 외병들도 매한가지였다.
“이 괴물들아, 오늘이 바로 너희들 제삿날이다!”
“대국을 위하여!”
내력을 담은 고수들의 외침소리가 병사들의 함성을 이끌어냈다.
병사들은 지금 힘을 다 소진해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고함을 내지르며 몬스터들에게 돌진했다.
주첨기의 청강검이 그어졌다.
마치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검기는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 몬스터들의 전신을 뒤엎었다.
베룸까지 길이 뚫렸다. 이 기세를 몰아 빠르고 강인하게 말을 몰아 내달렸다.
“낄낄낄!”
수라혈마는 한 번 웃음을 흘릴 때마다 몬스터를 수백 마리씩 잠재웠다.
“감히!”
진천의 노한 눈빛은 검기를 토해내는 듯했다.
외병장군 광태랑과 부장 해버톤이 북쪽에서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에스, 조심해!”
던칸이 에스의 뒤에서 달려든 오크의 목에 일권을 적중시켰다. 오크는 그대로 나자빠졌다.
에스도 이에 화답하듯 넘어진 오크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비단 던칸과 에스뿐만이 아니었다. 법병과 외병, 모두들 서로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든든한 아군과 황제폐하가 계시니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곳곳에서 몬스터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다가 곧 병사들의 함성소리에 파묻혔다.
병사들은 몬스터들의 시체를 뛰어넘으며 진군에 진군을 거듭했다.
결국 베룸에서 몬스터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몬스터들이 한 번 장악했던 베룸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는 병사들의 화를 더욱 북돋았다.
잠시 전열을 가다듬은 후 크리트까지 되찾았다. 그래도 검은 밀림에서는 끊임없이 몬스터들이 나오고 있었다. 검은 밀림은 그야말로 몬스터들의 대량 양성소였다.
크리트까지 빠른 속도로 진격했지만 검은 밀림부터는 몬스터들의 거센 반격이 시작되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몬스터들은 끝이 없었다.
검은 밀림의 입구를 경계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었다.
주첨기는 전투의 해답을 파악했다. 그것은 몬스터들을 감싸고 있는 사기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기와 혼합된 마력이었다.
“마룡을 없애야 합니다, 스승님. 그렇지 않고서 이 전투는 끝이 없습니다.”
“낄낄, 나도 지금에야 눈치 챘다. 제자야, 이것들…… 아무래도 환영하고 비슷하지만 환영이 아니다. 실체를 가진 환영? 말이 이상하군.”
“실제가 되어 버린 환영이겠지.”
진천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아, 맞아! 실제가 되어 버린 환영이야. 그런데 왜 죽어서는 사라지지 않는 거지? 환영이라면 시체가 없어야 하는데…….”
“두려움, 공포…….”
주첨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응?”
“쌓여가는 시체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킬 것입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래서야 환영이지만 환영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이곳은 수하들과 병사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검은 밀림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주첨기가 말했다.
“좋았어. 다 없애 버리자꾸나. 낄낄낄!”
“저는 언제나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수라혈마와 진천이 한마디씩 내뱉으며 몸을 뽑아 올린 주첨기를 뒤따랐다.
“통일전쟁의 마지막 잔재를 오늘로써 끝내겠다.”
주첨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검은 밀림 안은 몬스터들로 빼곡했다. 어째서 끊임없이 나오는지 알 만 했다.
몬스터들을 해치우는 수라혈마는 혀를 길게 빼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고지가 코앞이었다. 바로 얼마 안 되는 곳에 거대한 마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고수들과 병사들에게는 위협적일지 몰라도 주첨기와 수라혈마 그리고 진천에게는 터무니없었다.
주첨기와 두 스승은 빠른 속도로 밀림을 파고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밀림 전체가 울었다. 주첨기가 낯익은 이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르메이스.”
주첨기가 뇌까렸을 때 진천이 허공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검기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부딪쳤다.
스르르르
“이거…… 매서운데요?”
아르메이스가 검기가 부딪쳤던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불행한 존재군, 너는…… 그때 사라진 채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죽을 운명은 피할 수 있었겠지.”
“제가 주첨기님 손에 죽기 전에 주첨기님이 먼저 죽을 겁니다. 제 동료가 된 마룡에 의해…… 마룡이 주첨기님께 품은 원한은 생각도 못 할 정도일 겁니다. 히히!”
아르메이스가 기분 나쁘게 히죽거렸다.
“이거 어쩐다? 아쉽게도 널 죽일 사람은 내가 아니다. 스승님?”
진천과 수라혈마가 안광을 발하며 앞으로 나섰다.
“낄낄! 바로 저놈이로구나. 맨날 슬슬 도망이나 다니면서 우리 제자를 귀찮게 했던 놈이…….”
“수라혈마, 더 기다릴 게 있겠나?”
진천과 수라혈마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둘은 동시에 아르메이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스승님.”
주첨기는 뇌까리며 유유히 밀림 속으로 사라졌다.
아르메이스는 당황한 눈치였다. 순간이동 할 겨를도 없이 양옆에서 진천과 수라혈마가 나타났다.
“낄낄!”
“네놈이 원흉이렷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라혈마와 진천은 동시에 공격했다.
아르메이스는 간신히 피하며 땅으로 내려왔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진천의 검기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쿠구구궁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애꿎은 몬스터들의 비명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르메이스는 이미 진천과 수라혈마보다도 더 높은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그거 하나 못 맞히는가, 진천?”
수라혈마가 허공을 딛고 몸을 솟구쳤다.
아르메이스는 씽긋 웃었다. 곧 그의 몸이 열 개로 나뉘었다.
“분신?”
수라혈마가 뇌까렸다.
다섯 명의 아르메이스는 수라혈마에게, 또 다른 아르메이스들은 진천에게 날아갔다. 다섯 방향에서 아르메이스의 검이 튀어나왔다.
수라혈마가 손을 한 번 휘둘렀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아르메이스들을 주위로 날려 버렸다.
수라혈마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진천 역시 한 번의 칼질로 아르메이스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하하하! 이거 너무 재미있습니다.”
아르메이스는 몬스터들 틈에 끼어 있었다.
“가랏!”
아르메이스가 외쳤다.
가고일과 오우거 떼가 수라혈마와 진천을 향해 돌진했다.
수라혈마가 눈을 부라렸다.
“잘도 도망 다니는구나!”
외침과 함께 토해낸 권기가 몬스터들을 전멸시켰다. 하늘 높이 솟아 있던 나무들이 쓰러지고 지면이 쩍쩍 갈라졌다.
스슥!
진천이 아르메이스 뒤에 나타났다. 그는 무표정으로 아르메이스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뎅강!
손쉽게 아르메이스의 목이 잘렸다.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겠지?”
수라혈마가 진천 옆에 착지하며 뇌까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밀림 속에서 또 다른 아르메이스 열 명이 걸어 나왔다.
수라혈마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서남북 곳곳에서 아르메이스들이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그 수가 50을 넘었다.
수라혈마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진천, 이놈이 우리랑 장난하자는 것 같은데? 이들 중에 한 놈은 진짜다.”
“고민할 게 무엇 있겠나.”
“맞아! 전부 다 베어 버리면 그만이지. 낄낄낄!”
실제가 된 환영, 딱 그 꼴이었다.
그러나 수라혈마는 잡생각 하나 없이 주위로 달려드는 아르메이스를 하나씩 해치워나갔다. 진천도 그에게 뒤질세라 검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수많은 아르메이스들의 칼끝에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끼아아악!]입을 쩍 벌린 악령들이 아르메이스들의 칼끝에서 튀어나왔다. 악령들은 수라혈마와 진천을 에워쌌다. 놈들이 가진 손톱은 날카로운 검 같았다.
“이……!”
슬슬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수라혈마는 내력을 터트려 주위의 악령들을 소멸시켰지만 멀리 있는 아르메이스들이 계속 악령들을 보내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밀림 속에서 아르메이스들이 추가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계속 악령을 뿜어내고, 또다시 그들이 추가되어 사방이 온통 악령 천지였다.
수라혈마는 진천 뒤로 자리를 이동했다.
“진천, 이것들을 다 어떻게 하지? 그리고 어떤 놈이 진짜인 것이냐?”
수라혈마는 악령들을 소멸시키며 말했다.
멀리서 계속 악령들을 내보내고 있는 아르메이스들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이것들을 무시하자.”
진천이 악령을 지칭해서 말했다.
“좋아!”
수라혈마와 진천은 악령들을 뚫고 각자 양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하하하!”
아르메이스들이 웃었다.
악령들이 울어대는 소리와 아르메이스들이 웃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홀려 버릴 것만 같다.
제자 주첨기와 마룡의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갑자기 지면이 심하게 흔들렸다.
수라혈마는 무지막지하게 주먹을 휘두르면서 아르메이스들을 없애나갔다.
진천도 검기를 분사했다.
“진천! 이것들이 계속 나오는데?”
수라혈마는 악령들의 손톱에 의해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그것은 진천도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수라혈마. 네 방식대로 하다간 이것들이 온 천지를 메울 것이다.”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
진천은 아르메이스들을 없애가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수라혈마, 가자!”
“어딜?”
“이것들 모두 환영이다.”
“모두? 그럼 진짜는 어디 있는 거냐? 이 비열한 놈아, 빨리 나오지 못하겠느냐?”
수라혈마는 흉포하게 주먹을 휘둘러댔다.
주먹을 맞고 소멸하는 아르메이스들은 그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하하하!”
아르메이스의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듣기도 싫었다. 죽이면 다시 밀림에서 그만큼의 아르메이스가 나왔다. 주변은 아르메이스의 시체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 어딘가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것들이 계속 나올 수는 없는 거니까.”
진천이 외쳤다.
한참을 아르메이스들 사이에서 전전하던 둘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라혈마와 진천의 눈빛이 부딪쳤다. 둘은 원수를 보듯 노려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천의 눈에서 푸른빛이 발광했고 수라혈마의 눈에서는 시뻘건 빛이 폭발했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진천이 몇 자나 치솟아 오른 검을 수라혈마를 향해 내찔렀다. 수라혈마도 그를 향해 일권을 뻗었다.
검과 권!
청(靑)과 적(赤)!
그것들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검과 권 사이의 공간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악!”
갑자기 주변의 아르메이스들이 저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크푸, 크푸!”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마룡의 섬뜩한 눈동자. 그것이 옆으로 획 돌아갔다.
“역시 그렇군.”
주첨기는 마룡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룡이 입을 닫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주첨기도 마룡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강검을 치켜들었다.
5미터가 넘는 검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탓!
주첨기는 짧게 지면을 박찼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손짓 하나로 가볍게 날려 버리고선 마룡의 근처에 도달했다.
마룡이 주첨기를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주첨기가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이 마룡의 입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브레스!
다른 드래곤들을 먹어치우고 강해진 터라 화염조차 온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주첨기는 청강검을 수직으로 그어 내렸다. 검기가 브레스를 중간까지 파고들다가 사그라졌다.
주첨기는 급히 위로 뛰어올랐다.
마룡의 눈동자가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예전에 주첨기가 잘라냈던 붉은 빛깔의 뿔은 다시 자라나 있었다. 뿔에서 수십 갈래의 기운들이 뻗어 나와 주첨기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하나하나 주첨기의 검기만큼이나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들.
주첨기는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미처 튕겨 내지 못한 마룡의 기운들이 호신강기에 부딪쳤다.
주첨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펄럭
마룡이 한 번 날갯짓을 하여 주첨기에게 날아왔다. 주첨기의 몸집에 비하자면 마룡은 태산과도 같았다.
마룡은 주첨기를 움켜쥘 요량으로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주변에 몰려드는 몬스터들은 둘의 격돌에 애꿎은 희생양만 될 뿐이었다.
“감히 어딜?”
주첨기는 청강검을 마룡의 발 중앙에 찔러 넣었다.
마룡이 한 번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꼬리를 휘둘렀다. 검을 빼려 했지만 빠지지 않는다.
주첨기는 한 손으로 꼬리에 달린 수백 개의 비늘 중 하나를 움켜잡았다.
힘 대결!
과거에 대결할 때와 같다. 마룡은 여전히 힘에서 주첨기보다 우월했다.
결국 마룡의 꼬리가 주첨기를 휘감았다.
“크아악!”
마룡의 기운이 주첨기의 호신강기까지 깨트렸다. 주첨기는 마룡의 꼬리에 압박당했다.
마룡이 꼬리를 위아래로 움직여 주첨기를 연신 땅바닥에 처박았다.
“크푸, 크푸!”
콧바람을 뿜어내는 횟수만큼 땅에 처박힌 주첨기. 그는 한 번의 힘을 모아 간신히 마룡의 꼬리를 떨쳐냈다.
주첨기는 하늘 높이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옆에서 날아온 발 하나가 또다시 그를 튕겨 냈다.
주첨기는 늪으로 추락했다.
“쿨럭!”
진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나온 주첨기는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는 소매로 피를 스윽 닦으면서 마룡의 뿔을 노려보았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저 뿔을 베어 버린 후로 마룡의 힘은 현격히 약해졌다.
마룡이 다시 주첨기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냈다. 주첨기가 옆으로 이동하면 브레스도 옆으로 뿜어졌고, 위로 솟구쳐도 또다시 따라왔다.
주첨기는 브레스를 피해가며 마룡의 얼굴 가까이에 도달했다. 흉측스러운 눈동자 세 개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주첨기는 검기를 눈동자 쪽으로 난사하려고 막 자세를 잡았다. 그때 마룡의 뿔에서 나온 검은 기운들이 비조처럼 빠른 속도로 그를 압박했다.
주첨기는 그것들을 하나씩 비껴 쳐냈다. 그러나 그는 미처 옆에서 날아온 발을 막아내지 못하고 또다시 튕겨났다.
‘한낱 마물에게 내가 질쏘냐?’
주첨기의 눈에서 악기가 뻗쳤다. 옆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에게 간단히 검기를 날린 후 지면을 박찼다.
타핫!
마룡이 입을 쩌억 벌렸다. 이번에는 브레스가 아니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검은 기운!
일대는 순식간에 검은 기운으로 가득 찼다.
주첨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쾅!
지면이 파이면서 흙더미가 튀었다. 주첨기는 자신의 내력을 몸 밖으로 배출하기 시작했다. 마룡의 마력이 그의 내력이 퍼지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크아아압!”
주첨기는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의 내력이 마룡의 마력을 조금씩 밀어냈다. 그러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헉!”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갑자기 뿜어져 나온 브레스가 주첨기의 전신을 뒤덮었다. 주첨기는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몸을 감쌌다.
열기, 독기, 냉기!
모든 것이 복합된 브레스는 점점 주첨기를 고통으로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진기까지 끌어올려서 만든 호신강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첨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청강검을 바라보았다. 점점 소진되고 있는 내력을 청강검에 집중했다.
쩌저적!
호신강기가 깨지기 일보직전 주첨기는 청강검을 앞으로 던졌다.
이기어검!
청강검은 브레스를 뚫으며 세차게 날아갔다. 주첨기가 목숨을 담보로 한 공격이었다. 최후가 될지 최선이 될지는 곧 결판날 것이다.
주첨기는 마룡의 브레스에 견디다 못해 비명을 터트렸다.
“끄에에엑!”
그러나 주첨기의 비명은 갑자기 터져 나온 마룡의 비명 소리에 파묻혔다.
마룡의 입천장에 청강검이 깊게 박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 구사일생으로 브레스에서 벗어난 주첨기는 몸부림치는 마룡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자신만 한 거대한 뿔이 눈앞에 보인다. 뿔에서 날카로운 기운들이 뻗쳐 나왔다.
주첨기는 조금 전의 호신강기와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인해 더 이상 그것들을 튕겨낼 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슈슈슛
기운들이 주첨기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주첨기는 이가 바스러지도록 악다물었다.
“끄압!”
주첨기는 끌어안은 뿔을 위로 잡아당겼다.
“크아아아!”
마룡이 몸부림치면서 검은 기운들을 주첨기에게 날렸다. 주첨기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귀에서도 피가 흘렀다.
마룡의 뿔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마룡은 주첨기를 떨쳐내 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주첨기는 뿔은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압!”
주첨기는 엄청난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팍!
뿔이 뽑혔다. 주첨기는 뿔을 껴안은 채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마룡을 올려다보았다.
마룡이 쓰러진 주첨기를 향해 입을 벌렸다. 주첨기는 마룡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룡의 브레스가 나오기도 전에 청강검이 놈의 목을 뚫고 나와 주첨기에게 돌아왔다.
“마, 마지막이다.”
주첨기는 뿔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청강검을 움켜잡았다. 마지막 남은 내력까지 모두 끌어 모아 도약했다.
주첨기는 정신을 잃기 일보직전이었다. 날아든 기세 그대로 마룡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분명 마룡에게는 치명타였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마룡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주첨기는 마룡이 머리를 흔드는 대로 몸이 흐느적거렸다.
‘힘이 필요해.’
“제자야!”
스승님의 목소리!
주첨기는 눈이 번뜩 뜨였다. 갑자기 솟구친 수라혈마와 진천이 대각선 방향으로 마룡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고 일권을 뻗었다.
“크에에에엑!”
마룡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곧 마룡의 고개가 꺾였다.
마룡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추락했다.
주첨기는 눈이 감겼다.
“제자야, 눈을 감으면 안 된다.”
진천이 외쳤다. 마룡의 기운이 주첨기의 몸을 수십 번 관통하여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진천이 내력을 불어넣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부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수라혈마!”
수라혈마는 마룡의 목을 계속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마룡은 꿈틀거리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주군께서 위독하시다!”
진천이 눈물을 흘렸다.
“뭣이?”
제자의 생기가 꺼져가고 있었다.
죽음!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수라혈마의 분노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수라혈마는 차가운 눈물을 흘리며 죽은 마룡의 심장을 노려보았다. 마룡은 비록 죽었지만 그 심장에서는 아직도 추측할 수 없는 기운들이 몰려 있었다.
수라혈마는 내력을 집중시킨 양손을 마룡의 심장에 깊게 쑤셔 넣었다. 마룡의 몸이 꿈틀거렸다. 살아서 꿈틀거린 게 아니다.
마룡의 심장이 수라혈마의 양손에 딸려 나왔다. 수라혈마는 마룡의 심장을 끄집어내 품에 껴안았다. 그러곤 주첨기 앞으로 다가갔다.
마룡의 드래곤하트!
만년이 흘러도 다시없을 최고의 내단이었다.
“제자야, 이거면 되겠느냐?”
수라혈마는 눈물을 삼키며 드래곤하트를 주첨기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제자야…….”
“주군…….”
수라혈마와 진천은 주첨기의 손을 잡고 드래곤하트 위에 올려놓았다. 마룡의 드래곤하트에서 일렁거리던 붉은 기운이 주첨기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손에서 혈관으로!
혈관에서 단전으로!
단전에서 다시 온몸으로!
다시 뜨인 주첨기의 눈에는 통일대륙의 창공이 가득 맺혀 있었다.
“통일대륙…… 진정한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선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어찌 제가 벌써 죽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저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스승님…….”
주첨기는 비로소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외전 그들의 이야기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 버린 베룸과 크리트에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인 게 천만다행이지. 몬스터 시체들이 모두 남아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던 몬스터들, 그것들의 시체가 지상을 가득 채우고 어떤 곳은 산처럼 높이 쌓인 곳도 있었다.
그런데 마룡이 죽으면서 몬스터 시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악취를 풍기던 검은 피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황도에서 온 목수들과 함께 집들을 고치고 있었다.
“어이, 거기 연장 좀 던져 주게.”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목수가 아래쪽을 향해 외쳤다.
병사는 많은 연장들 중 무엇을 달라는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엇 말이오?”
“연장 하면 다 망치라고 알아듣던데 자네는 그걸 못 알아듣나?”
“망치는 수많은 연장 중 하나일 뿐이지 않소.”
병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망치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누군가 먼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건……?”
병사가 망치를 집어든 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주겠네.”
인자한 목소리.
병사는 바로 넙죽 엎드렸다.
“청검왕 전하!”
“나는 신경 쓰지 말게. 나 역시 자네들을 도우러 온 거니까. 이래서야 방해만 되지 않겠나? 자자,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빨리 도시를 복구하세. 어이, 지붕 위에 있는 장인! 내가 지금 이걸 보내겠네.”
“예, 예?”
목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진천의 손에서 망치가 떠났다. 마치 허공을 기어가듯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목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느릿하게 날아온 망치를 그는 안전하게 잡을 수 있었다.
“자자, 또 내가 무얼 도와주면 좋겠나?”
“어찌 제가 감히……!”
“어서 말해 보게.”
진천은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주위의 병사들과 목수들은 감격에 젖었다. 귀하신 분이 평민들과 어울려 복구작업에 참여하시다니! 역시 듣던 대로 마음이 대해와 같은 청검왕 전하시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전하?”
청검왕 전하가 저렇게 나오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목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말만 하게나. 내 금세 장인의 말에 따르겠네.”
“저쪽에 보이는 통나무들로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맡겨만 두게.”
진천은 미소 지으며 통나무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통나무 다섯 개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진천이 손으로 원을 그리며 통나무를 주위로 비껴냈다.
파파팍!
통나무는 기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날아가 깊숙이 박혔다.
“와아―!”
“대단하십니다, 전하!”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병사와 목수들은 감탄을 뿜어냈다.
진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복구작업을 하는 데 있어 그는 병사나 목수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그가 직접 모범을 보이니 병사들은 힘든 줄도 몰랐다. 슬슬 콧노래가 나왔고, 어느 순간 모두들 노래에 맞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진천의 눈에 한 청년이 들어왔다.
“제이너스…….”
진천이 중얼거렸다. 그는 망치질을 하고 있는 제이너스의 뒤로 다가갔다.
“제이너스.”
“전하!”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
대륙통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황제폐하는 제이너스의 왕국을 점령했다. 그 후로 제이너스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바른 눈을 가졌던 제이너스를 생각하면 진천은 가슴이 쓰렸다.
그런데 이렇게 도시의 복구 작업장에서 만난 것이다.
“법병에 지원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제이너스가 웃으며 말했다.
왕국을 점령한 신명대국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제이너스의 얼굴엔 그런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제이너스의 미소.
진천의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게 젖었다. 그는 제이너스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왕국을 점령당하고 나서 곧장 대국의 황도로 와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
“예, 대학시절에 같이 공부했던 케이라는 친구입니다.”
“제이너스…… 대국이 원망스럽지 않더냐?”
진천이 물었다.
“대세와 천운은 대국에 있었으니 원망스럽지는 않습니다, 전하. 심려치 마십시오.”
만약 자신이 제이너스의 입장이었다면?
진천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인생이 공수래공수거라지만 과연 자신도 제이너스처럼 웃을 수 있을까?
진천은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이너스.”
“예, 전하.”
“지금도 검사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느냐?”
“그러기에 법병에 지원한 것입니다.”
제이너스가 공손하게 답했다.
진천은 그의 손을 끌어 꼭 쥐었다.
제이너스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전하?”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아닙니다, 전하.”
“대국은 너의 왕국을 점령했다, 제이너스. 너는 그것이 대세와 천운이라면서 웃고 있지만 만약 나였다면 너처럼 웃지는 못할 듯싶구나. 네게 배운 것이 있다. 네가 지금도 검사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고 하니 내가 도와줘도 되겠느냐?”
진천은 그러고 싶었다.
“황제폐하께서 계시기에 너를 제자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도와주고는 싶구나, 제이너스.”
“저, 전하……!”
제이너스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문득 대국의 지하본성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진정 힘을 기르고 싶어서 몇 날 며칠을 본성 계단에 엎드려 있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 주신 분이 바로 청검왕 전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복구 작업이 끝나고 나와 함께 황성으로 가자꾸나. 내 너를 가르치고 싶다.”
제이너스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눈물이 핑 돌아 곧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전하…… 감사합니다.”
제이너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리아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사모하는 황제폐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
칙칙
그녀는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향수를 몸에 뿌렸다.
실리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 방에서 나왔다. 집무실로 향했다.
“폐하.”
“무슨 일이냐, 실리아.”
“밤이 깊었습니다. 집무를 마치시고 이만 잠자리에 드셔야 합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럼 저와 함께 화원을 거닐지 않으시겠습니까?”
실리아는 용기를 내서 말해 보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실리아는 낙담한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애꿎은 향수병만 노려보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을 자고 싶어도 황제폐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 그분만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화끈거린다.
실리아는 혼자라도 화원을 거닐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운 좋게 황제폐하께서 화원으로 나오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리아는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엘리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엘리나를 스쳐 지나갔다.
“실리아.”
엘리나가 몸을 돌려 실리아를 불렀다.
“왜 그러시죠?”
실리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어요?”
퉁명거리긴 엘리나도 마찬가지였다.
“대책이라뇨?”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뭘요?”
“언제까지 주첨기님께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하면서 살 거냐고 묻는 거예요, 지금.”
“엘리나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엘리나와 실리아는 주첨기를 사이에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주첨기는 둘에게 무신경했다.
“이러는 게 어때요? 우리 당분간 동맹을 맺어요.”
엘리나가 말했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전쟁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겠네요. 그런데 동맹이라니요?”
“둘이 힘을 합치면 주첨기님께 조금이라도 관심을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아니면 주첨기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취향을 원하시는지도 말이에요.”
실리아는 귀가 솔깃해졌다.
그녀는 근처 벤치에 앉아 엘리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엘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옆에 앉았다.
“그럴…… 까요?”
자신감이 없어진 실리아에게는 엘리나의 제안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래요. 우리 둘이서 힘을 합치면 조금이라도 관심을 못 얻겠어요?”
“좋아요.”
“자, 그럼 동맹의 결의를 다져요.”
엘리나가 실리아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실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그럼 어떻게 힘을 합치죠?”
실리아가 물었다.
“우선 주첨기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음식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해요.”
“음식이요?”
“예, 음식만큼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도 없거든요.”
“좋은 생각이에요.”
이튿날 아침 엘리나와 실리아는 새벽부터 일어나 주방에 모였다. 평소 황제가 즐겨 먹는다는 음식 열 가지를 수소문하여 알아냈다.
엘리나와 실리아는 음식 열 가지를 만들어 집무실을 찾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들인가?”
주첨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냉담한 반응이었다.
“우리 둘이서 주첨기님을 위해 음식을 장만했어요.”
“예, 폐하. 저와 엘리나가 했습니다.”
“실리아, 엘리나와 실리아겠죠?”
“아닙니다. 분명 실리아와 엘리나입니다.”
실리아와 엘리나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분명 동맹의 눈빛은 아니었다.
“애써 만들어온 것이니 먹어는 보겠다.”
주첨기는 당황하여 말했다.
그가 아침식사를 끝낼 무렵 실리아와 엘리나는 다시 집무실을 찾아와 그릇들을 회수해갔다. 두 여인은 가장 많이 없어진 음식을 알 수 있었다.
“이 요리가 주첨기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이에요.”
둘은 어느새 다시 동맹관계로 돌아와 있었다. 각기 준비한 노트에 주첨기가 먹은 음식들의 이름과 양을 세밀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다음 단계는 뭐죠?”
실리아가 물었다.
“다음은 의복이에요. 주첨기님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단계지요. 저는 내일 시녀복을 입을 거예요.”
“그럼 전 짧은 치마를 입겠어요.”
“그건 반칙 아녜요? 당연히 짧은 치마를 좋아하지 않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시녀복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더 많다는 걸 모르세요?”
“제가 짧은 치마를 입겠어요.”
엘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요. 제가 짧은 치마를 입을 테니 엘리나는 계획대로 시녀복을 입으세요.”
“뭐예요? 언제는 시녀복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더 많다면서요. 그러니까 제가 시녀복을 실리아에게 양보할게요.”
“좋아요.”
실리아가 흔쾌히 대답했다.
“예?”
“엘리나가 짧은 치마를 입으세요. 전 시녀복을 더 짧게 수선해서 짧은 시녀복을 입을 거예요.”
“뭐예욧!”
엘리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또다시 동맹의 결의가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수라혈마는 이왕 황성까지 왔으니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북주로 가겠다며 황성에 눌러앉았다. 그가 한 번 고집을 부리니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창틈으로 화창한 햇살이 들어왔다. 햇빛이 수라혈마의 얼굴에 비쳤다.
수라혈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수라혈마는 화분 속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기설령들을 깨웠다.
[끼…….] [끼끼…….]아기설령들이 화분 밖으로 나오며 눈을 비볐다.
따뜻한 햇살!
아기설령들이 무척 좋아하는 날씨다.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마치 밖으로 나가자는 듯 수라혈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래, 그래. 이 귀여운 것들…….”
수라혈마는 아기설령을 품에 안았다. 그러곤 문밖으로 빼곰히 고개를 내밀었다. 설령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설령은 아기설령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고 수라혈마를 더 따르는 게 못마땅한지 그가 아기설령들을 안을 때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시끄럽게 울어대곤 했다.
‘우끼!’하며 우는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수라혈마로서는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낄낄, 다행히 없군.”
수라혈마는 몸을 날렸다. 역시 황성 뒤편으로 펼쳐진 초원도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 놀고 무럭무럭 자라거라. 낄낄낄!”
[끼…….] [끼끼끼…….]아기설령들이 토끼처럼 초원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장면이었으나 정작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다.
“스읍!”
수라혈마는 입술 사이로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았다.
꿀꺽!
아기설령들의 뛰노는 모습들을 보니 자꾸만 침이 흘렀다.
수라혈마는 그중에 한 녀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른 아기설령들과 달리 성장이 빨라 벌써 잎을 피우고 있었다.
‘딱 안성맞춤인걸?’
수라혈마의 눈동자가 번질거렸다. 그는 아기설령들을 향해 손짓했다.
[끼, 끼끼끼…….]아기설령들이 뛰어와 그의 품에 안겼다.
수라혈마는 성장이 가장 잘된 한 아기설령을 잡고 다른 아기설령들은 바닥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암, 이때가 가장 먹음직스러울 때지. 드디어 나도 영물을 섭취하게 되는구나.’
수라혈마는 입을 쩌억 벌렸다.
[끼끼끼…….]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설령은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수라혈마는 입을 닫고 잠시 아기설령을 바라보았다. 조막만 한 게 꼭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예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수라혈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끼?]아기설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좌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암, 그렇고말고!’
수라혈마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입을 크게 벌렸다.
매우 크다. 아기설령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수라혈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럴 수가……!’
도저히 아기설령을 먹을 수가 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몇 번이고 시도해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기설령.
수라혈마는 아기설령을 품에 끌어안았다.
“본좌가 미안하다.”
[끼끼!]아기설령이 답답해하며 발버둥쳤다. 수라혈마는 곧 아기설령을 놓아 주었다.
아기설령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수라혈마는 더 이상 아기설령들을 먹으려는 것을 포기했다. 그간 너무 정이 들어 버렸다.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그는 새삼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낄낄낄!”
수라혈마는 실없이 웃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마침 초원의 화원에 혜공이 보였다. 예전에 주첨기가 준 마법의 약을 먹고 나서부터 피부가 몰라보게 좋아진 혜공은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햇볕이 혜공을 중심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아니, 혜공 주위로 반짝거렸다.
‘이놈의 눈이 갈수록 이상해지는군.’
수라혈마는 눈을 비볐다.
혜공은 화원의 작은 꽃에 코를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꽃향기가 좋다.
혜공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분명 수라혈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퍽!
수라혈마는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쳤다. 아직도 혜공의 주위가 반짝거린다.
퍽!
다시 머리를 쳤다.
퍽! 퍽! 퍽!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인가!’
수라혈마는 아픈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혜공이 고개를 들었다.
수라혈마는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본좌가 왜……?’
“에잇, 모르겠다.”
수라혈마는 혜공 앞으로 몸을 날렸다.
꽃향기를 맡고 있던 혜공이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뭐, 뭡니까요, 전하?”
수라혈마는 혜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혜공은 당연히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어서 내 손을 잡아라, 낄낄!”
“제가 왜요?”
혜공은 혼자의 힘으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수라혈마는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혜공은 슬슬 수라혈마의 시선을 피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수라혈마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괜히 먼 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쪽 길로 향했다.
“잠깐!”
수라혈마가 급히 외쳤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요, 전하?”
“험험!”
수라혈마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혜공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 수라혈마가 크게 외쳤다.
“늙은 마누라, 나와 함께 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초원을 거닐어 보지 않겠나?”
“예에에에에엣?”
혜공의 얼굴이 그만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주첨기의 가슴어림이 실룩거렸다.
불쑥!
설령이 의복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설령은 한 번에 뛰어올라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설령?”
뒤에서 주첨기가 불렀다.
설령은 그에게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주첨기의 방에서 나온 설령은 곧장 수라혈마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외성으로 향했다.
“어멋, 설령이야!”
외성의 시녀들이 설령을 보고 수군거렸다.
“정말 귀엽다.”
“그렇지?”
설령은 고개를 홱 돌리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수라혈마의 방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수라혈마는 물론 아기설령들도 없었다.
[우끼!]설령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설령은 불안해져서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불 속도 보고 장롱도 열어서 확인했다.
[우끼! 우끼!]무척 화가 나 보였다.
설령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화난 모습도 귀엽다, 얘!”
“그런데 왜 화가 났을까?”
“아직 그것도 몰라?”
“수라왕 전하가 설령의 아기들을 데리고 계시잖아. 그것 때문일걸?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아이를 낳았는데 정작 엄마를 따르지 않고 웬 못생긴 노인……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정작 엄마를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따르면 그 엄마의 기분이 어쩌겠어?”
“화가 나겠지. 아, 그렇구나!”
시녀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설령, 수라왕 전하는 지금 언덕 위 초원에 계셔. 엥? 그새 어디로 갔지?”
“호호호, 나간 지가 언젠데?”
“진짜 빠르다.”
시녀들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계속 웃음을 흘렸다.
한편 설령은 초원에서 수라혈마와 아기설령들을 찾고 있었다.
[우끼이이이이!]설령은 길게 울면서 숲 곳곳을 뛰어다녔다. 그때 수풀 한쪽이 흔들거렸다.
설령은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수풀을 뚫고 바닥에 착지한 설령은 앞을 바라보았다.
아기설령이 아니다.
[그그…….]설령이 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자신과 같은 영물의 일종 같지만 몸통이 굵고 얼굴이 못생겼다. 거기다 자신의 머리 위로는 예쁜 꽃이 피었는데 눈앞의 거무튀튀한 것의 머리엔 잡초가 자라 있었다.
설령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고개를 돌렸다.
[그그그!]그런데 뒤에서 자꾸 거무튀튀한 것이 소리를 낸다. 설령은 얼굴을 찡그리며 걸음속도를 빨리했다. 이에 지지 않고 거무튀튀한 것도 바짝 속도를 높였다.
[우끼!]참다못한 설령은 거무튀튀한 것을 향해 손을 저었다.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거무튀튀한 것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끼! 우끼!]설령은 제자리서 방방 뛰다가 수풀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렸다.
황성으로 돌아온 설령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무튀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설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그그.]그런데 멀리서 또 거무튀튀한 것의 모습이 보였다. 설령의 온몸이 시뻘게졌다.
설령은 씩씩거리며 거무튀튀한 것에게 다가갔다.
[우끼.] [그그.] [우끼! 우끼! 우끼!] [그…….]거무튀튀한 것이 설령을 껴안으려고 양팔을 뻗었다.
설령은 놀라서 위로 뛰어올랐다.
“설령, 거기서 뭐 해?”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만소자가 설령을 발견하고 물었다.
설령은 그의 어깨 위에 착지하여 거무튀튀한 것을 가리키며 거세게 울어댔다.
[그그그.]거무튀튀한 것은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어도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오로지 설령만 바라보았다.
“혹시 만드라고라 아냐? 만드라고라 맞는데?”
만소자는 일전에 약초서적에서 만드라고라를 본 적이 있었다. 약초서적에 그려져 있던 만드라고라와 설령이 가리키고 있는 거무튀튀한 것이 일치했다.
“좋겠네, 설령. 친구가 생겨서.”
만소자가 부러운 듯 말했다.
설령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설령은 지그시 만소자를 응시했다. 도움을 청하는 눈빛이었지만 만소자는 그것을 오해했다.
“정말 좋겠다, 설령. 나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만소자는 설령을 잡아 만드라고라 앞에 내려놓았다.
[그!]만드라고라가 설령을 덥석 끌어안았다. 설령은 기겁하며 만드라고라를 밀쳐냈다.
설령은 만소자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주첨기가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끈질기게 만드라고라가 쫓아왔다. 설령은 처음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설령은 주첨기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첨기가 설령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설령?”
주첨기는 방 안으로 들어온 만드라고라를 발견했다.
[그그그!]만드라고라가 설령을 가리키며 울음소리를 냈다.
주첨기는 피식 웃었다.
“설령, 친구가 생겨서 데리고 온 거냐?”
[우끼!]설령은 두 손을 내저었다.
“친구가 아니라고?”
설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첨기는 미소 지으며 설령을 만드라고라 앞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설령도 짝을 만났구나.”
순간 설령의 작은 몸이 휘청거렸다.
에스와 던칸은 부푼 가슴을 안고 황성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에스는 고개를 높이 들었고 던칸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황성의 복도를 걸었다.
그때 갑자기 설령이 나타나 던칸의 어깨로 뛰어올랐다.
“설령!”
던칸이 반가워서 부르짖었다. 왠지 모르지만 설령이 평상시와 달랐다.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너도 나를 만나서 반가운 모양이구나, 설령.”
던칸이 말했다.
“곰탱아, 저거 만드라고라 아냐?”
에스는 설령을 뒤쫓아 온 만드라고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그그!]만드라고라가 던칸의 어깨 위에 앉은 설령을 가리켰고, 설령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곰탱아, 설령하고 만드라고라와 친구인가 봐. 친구끼리 놀라고 하고 우리는 빨리 가야지. 황제폐하께서 기다리시겠다.”
“그래, 설령. 미안하지만 다음에 보자.”
던칸이 설령을 잡아 만드라고라 앞에 내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던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설령은 화들짝 놀라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만드라고라가 뒤따랐다.
“정말 친해 보이네. 왠지 섭섭해.”
던칸이 중얼거렸다.
“자, 가자.”
황제의 집무실 앞에 멈춰 선 둘은 호흡을 크게 한 번 고른 후 법병에게 말했다.
“에스와 던칸이 왔다고 폐하께 말씀드려 주세요.”
“잠깐 기다려라.”
법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폐하께서 들라 하셨다.”
“예!”
에스가 활기차게 답했다.
그런데 막상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에스는 던칸을 돌아보았다. 던칸은 이미 바짝 얼어붙어 뻣뻣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에스, 던칸, 이리 와라.”
주첨기가 손짓했다.
“예, 폐하.”
에스와 던칸은 고개를 숙인 채 주첨기 앞으로 다가갔다.
“짐은 그동안 너희들에게 맞는 스승을 찾느라 고심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마땅한 스승을 찾았다.”
“정말요?”
에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봐라, 속언장검(速言長劍)과 패력화(敗力花)를 들라 하라.”
주첨기가 밖에 대고 외쳤다.
에스와 던칸은 과연 어떤 사람이 스승이 될지 무척 기대되었다. 이름부터가 심상치가 않았다.
속언장검과 패력화?
에스와 던칸은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잠시 후 속언장검과 패력화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속언장검은 작은 키에 매우 왜소한 몸집을 지닌 사내였고, 패력화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던칸보다도 큰 몸집을 갖고 있었다. 마치 남녀가 바뀐 듯했다.
속언장검과 패력화의 눈에서 안광이 흘러넘쳤다.
“폐하, 신 속언장검은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저 소녀가 신의 제자가 될 아이입니까? 매우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직접 제자를 골라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속언장검은 숨 한 번 내쉬지 않고 매우 빠른 속도로 말했다. 이 안에서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주첨기밖에 없었다. 에스에게는 단지 말뜻만 전해졌다.
“폐하, 잘 키우겠습니다.”
남성보다 굵은 목소리가 패력화에게서 흘러나왔다.
던칸은 속으로 움찔 했다.
“에스, 던칸, 바로 이 두 검사가 네 스승이 될 사람들이다. 스승을 부모처럼 섬겨야 할 것이다.”
“예, 폐하.”
에스와 던칸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 후 둘은 각기 스승을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이야, 이름이 무엇이더냐? 잠깐, 내가 맞혀 보겠다. 아니다, 아니야. 그냥 네가 말해 보아라. 이름이 무엇이냐?”
“예?”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에스.”
에스는 간신히 알아들었다.
“에스라고 해요.”
“에스, 에스…… 이름이 별로 좋지 않구나. 내 이름은 진속이라고 한다. 참 진(眞)에 빠를 속(速)을 써서 진속이라고 하지. 하지만 모두들 나를 속언장검이라고 부른다. 속언장검, 빠를 속에 말씀 언, 길 장에 칼 검…… 이를테면 말을 빨리하는 장검이라고나 할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무명이기도 하단다.”
“자, 잠깐만요.”
에스는 당황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말을 빨리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자신도 한 수다 한다고 자부하지만 이 검사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말을 못 알아듣겠어요.”
“뭐라? 감히 스승님께 벌써부터 말대답을 하는 것이냐? 아이야, 자고로 스승은 부모와 같이 섬겨야 한다. 스승님이 말하면 무조건 예예, 하고 대답해지 말대꾸를 해서는 안 된다. 예전에 나 역시 내 스승님께 말대꾸를 했다가 혼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다.”
“예?”
“말대꾸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예? 라니. 스승님 앞에서는 예, 라고 해야 한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 무명이 무엇인지 기억은 하겠느냐? 설마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다시 말해 주겠다. 내 이름은 참 진에 빠를 속을 써서 진속이라 하고, 무명은 빠를 속에 말씀 언, 길 장에 칼 검을 써서 속언장검이라고 한다. 앞으로 네가 공경해야 할 이름이다. 어디 한 번 이 스승님의 이름과 무명을 일러 보아라.”
속언장검은 긴 말을 순식간에 했다.
이번에도 에스는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렸다.
그녀가 대답을 못하자 속언장검은 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스승님…… 죄송한데요. 말씀 좀 조금만 천천히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스승님을 처음 보고 한다는 소리가 말씀 좀 조금만 천천히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라니. 앞으로 너를 가르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하구나. 하지만 내 첫 번째 제자이니만큼 성심성의껏 가르치겠다.”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에스로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편 던칸은 연무장에 오긴 했지만 패력화에게서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패력화는 던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던칸은 고개를 숙이고 스승님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이윽고 패력화가 입을 열었다.
“절 아홉 번.”
그녀는 무거운 음성을 흘렸다.
던칸은 패력화에게 아홉 번 절한 후 일어섰다.
“이름.”
“던칸입니다.”
“넌 내 제자가 되었다.”
“예…….”
“내겐 신조가 있다.”
패력화는 짧고 굵게 말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스승님?”
“자고로 제자는 주먹으로 가르치는 법이다. 우선 한 대 맞고 시작하자.”
퍽!
패력화의 주먹이 던칸의 복부에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