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05
105 이거나 처먹어라!
남부 대로 중심가.
진무앙은 무영경의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섭가장의 담을 느긋하게 넘었다.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섭가장이 무림세가였다면 그도 조금은 긴장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사해집마부와 금의위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해도 근본이 상가인 가문이 그를 긴장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담을 넘은 그는 곧 자신이 심각하게 오판을 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응? 이 집 분위기 왜 이래?’
그는 담장 근처의 바위 그림자에 스며 들어갔다.
섭가장은 하남성의 중북부 상권을 장악한 대상가답게 눈에 들어오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과 마차로 북적이고 있었다.
특별할 게 없는 일상적인 모습.
하지만 그들을 훑는 진무앙의 눈에는 이채가 떠올라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하인과 하녀, 일꾼으로 변용한 최소 열 명 이상의 은신 전문가들이 섞여 있다. 여기서 보이는 게 이 정도면 상가 전체엔 수십 명 이상일 테고, 외부에 나가 있는 자들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많을지 감도 안 오네. 적어도 이삼백은 넘을 것 같은데… 염병, 섭가장이 그새 용담호혈이 되어 있었어.’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들의 변용은 비마잠혈 소속의 정보 무인들만이 익힐 수 있는 비마은잠술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해가 안 되는데? 구자경이 익힌 혈루지의 성취로 추정할 때 그녀의 비마잠혈 내 지위는 대주 정도일 거야……. 그럼 서열 일백위 근처를 오락가락할 텐데, 그녀가 이런 대규모의 정보 무인을 지휘한다고?’
비마잠혈은 혈주, 두 명의 부혈주, 십이령주, 일백이십 명의 대주, 일천이백 명의 마은(魔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최하 직급의 마은라도 언제든 자신이 머무는 지역의 사해집마부 휘하 문파에 전원 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아 일천사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들의 활동 영역이 중원은 물론이고 변방도 포괄하는 걸 생각하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인원이었다.
그런 그들 중 적어도 두 개의 대(隊) 이상의 전력이 섭가장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
그 정도면 하남성과 접경 지역을 맞대고 있는 인근 성의 비마잠혈 소속 정보 무인은 대부분 동원되었다고 봐야 했다.
사해집마부가 낙양에 얼마나 막대한 전력을 쏟아붓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숫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자경이 이번 일의 지휘권자일 리는 없어. 그녀의 직급으로는 이렇게 많은 정보 무인들을 부릴 권한이 없으니까. 적어도 영주 급 이상의 고위직 요인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을 거다. 누굴까?’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천하무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끊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
그러니 비마잠혈은 물론이고 사해집마부의 내부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끙끙거리며 생각을 한다고 답이 뚝딱 나올 리가 있겠나.
‘대체 혈마단주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들 부자를 잡겠다고 집마부에서 이만한 전력을 투입한 거야?’
진무앙은 목일석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혈마단주와 그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혈마단주는 그에게 연락해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도피시켜 달라는 요청을 해왔을 뿐, 자신이 쫓기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조심해야지. 아차 하면 낙양 생활 바로 쫑나겠어. 일단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게 급선무야. 그러려면 구자경부터 찾아봐야겠지.’
생각에 잠긴 그의 눈이 장원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운룡이가 저번에 말해주었는데……. 그녀의 거처가 내원 어디라고 했더라… 이 시간이면 그곳에 머문다고 했으니까 거기에 있을 거야.’
장원은 광대했지만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없었다.
섭광운 실종 사건 때 한 번 와본 적도 있었고, 수향루를 찾은 섭운룡에게 이곳의 내부 구조에 대해 들은 것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신암행과 암향무영의 은실술에 무영삼절 중 하나인 이매부운을 펼쳤다.
이매부운은 최소한의 내공으로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움직일 수 있는 공능을 갖고 있었다.
이동 속도는 유성탄영보다 많이 느리지만 대신 내력 소모가 적어 장거리에 특화된 경신법이었다.
한 가닥 그림자가 되어 정원을 가로지른 그는 여러 채의 전각을 지났다.
담장을 넘어 내원으로 접어들자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띌 정도로 확 줄었다.
건물들의 그림자를 밟으며 달리던 그의 눈에 검은 기와를 얹은 이층 전각이 들어왔다.
‘저곳이다!’
그는 지붕에 올라가자마자 와룡천망을 펼쳤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막이 그물처럼 넓게 퍼지며 전각 내부를 이 잡듯 훑었다.
잠시 후 그는 기와 한 장을 천천히 그리고 소리 없이 들어올렸다.
기와가 치워진 자리에 구멍이 드러났다.
하지만 진무앙에게는 이것도 충분히 넓었다.
은잠사형과 유사비은을 펼친 그의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해지는가 싶더니 지붕의 구멍 안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대들보 위에 내려선 진무앙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구자경, 서른 전후의 여인, 그리고 상인으로 보이는 오십대의 남자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그저 간간이 찻잔만 들었다 놨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누군가 밖에서 엿들으려 해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진무앙은 건물 안에 있었고, 그들의 입술이 쉴 새 없이 달싹이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무앙은 싱긋 웃었다.
전통적인 무림의 상식대로라면 전음입밀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도청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진무앙에게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불문의 혜광심어처럼 생각을 상대방의 마음에 직접 전달하는 수법을 제외하고, 그는 모든 전음을 도청할 수 있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 도둑놈의 무공만큼 쓸모있는 것도 찾기 어렵다니까.’
그는 까마득한 예전에 혼자서 훌쩍 삼도천을 건너 가버린 친구를 떠올리며 공령청음대법을 펼쳤다.
[구 대주, 이곳 토박이인 자네를 믿고 수색의 전권을 맡겼거늘, 아직도 그들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먼저 들려온 건 굵은 사내의 목소리.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숙이는 구자경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죄송합니다, 부혈주님. 하지만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곧 발견될 것입니다.]대화를 들은 진무앙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부혈주라고? 이번 의뢰, 장난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인원이 동원된 모양이야…….’
부혈주는 역용을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진무앙의 기억에 없는 자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십만대산의 사해집마부 총본산에 들렀던 게 오십 년도 더 전이었으니…….
‘음, 더 조심해야겠다. 들키면 진짜 피곤해지겠어.’
그때 구자경의 옆에 있던 여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부혈주님, 곽효림은 괴질을 앓고 있어 특별한 약재로 지은 약을 매일 복용해야 합니다. 시기적으로 지금은 본산에서 챙긴 약이 떨어질 때입니다. 그는 분명 아들의 약을 지을 방법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삼령주의 의견이 일리가 있군.] [곽효림의 괴질에 쓰이는 약재는 희귀하거나 잘 쓰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찾는 자는 어떤 식으로든 그와 관련이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고개를 끄덕인 부혈주가 구자경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구 대주.] [예, 부혈주님.] [내가 몇 가지 약재의 목록을 알려줄 테니 낙양의 약방과 의원, 약재시장에서 그것들을 구입하려 하는 자를 추적하게. 그는 곽보명 본인이거나 그에게 부탁을 받은 자일 게 틀림없으니.] [알겠습니다.] [나가보게.] [예.]구자경이 나간 후 삼령주가 부혈주에게 말했다.
[부혈주님, 구 대주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그녀는 환우지약 건도 실패했고, 이번 일에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녀가 낙양에서 쓰임새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능력에 비해 권한이 과도하게 큽니다.]부혈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삼령주의 말을 끊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논할 때가 아니다. 구 대주는 하남성의 자금 흐름을 꿰고 있는 섭가장의 안주인이고, 창천사마세가 내부의 고급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네가 정 구 대주를 쳐내고 싶다면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세작부터 먼저 구해야 할 것이야.]구자경은 창천사마세가의 방계문파 서열 일위인 천성검문의 직계다.
삼령주는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혈주님.] [곽 가와 그의 아들을 잡을 때까지 그녀를 흔들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두 사람에게서 더 들을 게 없다는 걸 깨달은 진무앙은 한 가닥 연기처럼 지붕 위로 올라왔다.
멀리 청석로를 걷고 있는 구자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진무앙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부혈주와 삼령주를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헛똑똑이들.’
그는 섭가장을 처음 들렀을 때 구자경과의 만남을 난향에게 이야기하면서 자신 본 것 전부를 말하지는 않았다.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그만 아는 것으로 남겨두었다.
굳이 말을 해서 그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그가 구자경의 손에서 본 것은 혈루지의 흔적만이 아니었다.
‘구자경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집마부에 망조가 들었네. 나는 그따위 썩은 동태 눈깔을 가진 너희가 부혈주니 령주니 하는 자리에 오른 게 더 신기하다.’
진무앙은 은신을 유지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구자경은 외원으로 나와 상인 몇 명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내용은 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아서, 섭가장의 안주인으로 거래 상대방을 챙기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진무앙은 그녀와 대화를 나눈 자들이 비마잠혈의 정보 무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고.
다시 내원으로 돌아온 구자경은 후미진 곳에 있는 작은 전각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사천왕상이 서 있는 걸 보면 전각은 불당인 듯했다.
불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넘어 유령처럼 전각의 처마 그늘로 스며들던 진무앙의 안색이 변했다.
‘이 기운… 설마, 그 거대 돼지 자식도 여기에 와 있는 거야?’
그답지 않게 표정이 굳은 그는 불당의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걷어내고 안으로 침입했다.
불당에는 정면에 커다란 황금 불상이 자리했고, 그 앞의 포단에 무릎을 꿇고 앉은 두 명의 여인이 있을 뿐이었다.
한 명은 구자경이었고, 다른 여인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자의궁장 여인이었다.
옥을 깎은 듯 반듯하고 깨끗한 이마와 흑백이 또렷하고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보아 나이가 많지 않은 듯한 여인.
그녀를 본 진무앙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고 그가 알아보지 못할 여인이 아니었다.
‘으으음… 홍련?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구자경은 전음으로 여인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한 후 불당을 나갔다.
진무앙은 그녀를 쫓아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벽면의 높은 좌대에 떡하니 앉아 있는 황금 불상을 잔뜩 노려보았다.
거대한 황금 불상은 일반적인 형태와 많이 달랐다.
걸치고 있는 것도 가사가 아닌 장삼에 가까웠고, 생김새도 석가모니불보다 포대화상을 더 닮은 엄청나게 뚱뚱한 불상이었다.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강석초를 옆으로 서너 배쯤 더 키운 듯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불상을 본 진무앙은 입맛을 다셨다.
‘돼지 자식, 이제는 가짜 불상 노릇도 하는군.’
아까 구자경의 기색으로 보아 그녀는 불상의 정체를 알아차리지는 못한 듯했다.
그때 불상의 반개했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게 보였다.
불상과 눈이 마주친 진무앙이 오른손을 들더니 그대로 감자를 먹였다.
[이거나 처먹어라, 돼지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