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14
114 내 봄은 언제 오려나
동굴 밖으로 나온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어야 했다, 물론 진무앙은 예외였지만.
그들의 눈앞엔 시산혈해가 펼쳐져 있었다.
냇물처럼 흐르는 피와 곳곳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시신들…….
백여 구가 넘는 시신들 속에 서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복면을 쓴 강석초뿐이었다.
공터를 쓰윽 훑어본 진무앙이 강석초에게 물었다.
“적당히 하지.”
“장인어른이 위험한데 손에 사정을 두라고?”
“그놈의 장인… 그런데 왜 절반밖에 안 보여?”
“나머지는 도망쳤어.”
“사마천극은?”
“말귀를 잘 알아듣더라고. 내가 떠나라고 하니까 바로 갔어. 풍령부운전 애들 중에 사마천극과 같이 가지 않고 꾸역꾸역 남아 있던 몇 명은 황천길을 걷게 해줬고.”
강석초의 말대로였다.
시신의 대부분은 일월단심맹과 사해집마부의 무인들이었다.
사마천극이 단호하게 철수를 결정한 건 진무앙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는, 무림맹에서 보낸 것이 분명한 절세고수가 개입했으니 굳이 남아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건 그의 착각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착각 덕분에 사마세가와 풍령부운전의 무인들은 목숨을 구한 셈이 되었다.
진무앙의 등에 업힌 채 정신을 잃고 있는 곽보명을 본 강석초의 눈이 커졌다.
“그가 곽보명이야?”
“응.”
“상태가…….”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명줄 끊어지기 전에 부자간의 마지막 상봉이나 시켜주려고.”
강석초의 행동이 꽁지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다급해졌다.
“그럼 빨리 가야지 뭐하고 있는 거야!”
“재촉 안 해도 어차피 가려던 참이었어, 자식아.”
석채은과 석진방, 모길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쌓인 시신 중에는 사해집마부의 천지인 삼단 중 천마단주와 인마단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개개인이 오괴에 뒤지지 않는 절정고수였다.
그러니 오괴가 한데 모여 싸워도 이런 결과를 낼 수는 없었다.
잘해야 양패구사나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오괴의 눈에는 강석초가 괴물처럼 보였다, 그를 막 대하는 진무앙도.
진무앙이 신형을 날리며 말했다.
“갑시다. 늦으면 효림이가 싸늘하게 식은 부친의 시신만을 보게 될 겁니다.”
사방은 환했다.
어느새 아침이 밝은 것이다.
* * *
그날 오후, 수향루 별채의 정원.
강석초는 진소혜의 손을 잡고 함께 바위에 앉아 있었다.
“소혜야, 돌아가신 분 때문에 기운을 잃으면 안 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버님도 네가 이렇게 슬픔에 젖어 있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야.”
“아는데…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냐. 그리고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있어. 힘들 때는 언제든 내게 기대도 돼.”
“고마워요.”
진소혜가 말을 이었다.
“강 소숙, 진 숙부님이 과연 소숙의 옆에 머물게 해달라는 제 바람을 들어주실까요?”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무슨 수를 쓰든 허락하게 만들 거야.”
“하아… 저는 진 숙부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실까 봐 불안해요.”
“그건 진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니까.”
“정말요?”
강석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이야. 그 인간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편견이 없어, 선입견도 없고. 내가 널 좋아하니까 신경을 쓰는 거지, 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관심도 없을 거야.”
“아아…….”
강석초는 진소혜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진무앙의 거처를 올려다보았다.
‘누나가 밑밥을 잘 깔아줘야 할 텐데…….’
난향은 방금 전 별채로 들어갔다.
* * *
침상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던 진무앙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향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침상 옆의 의자에 앉자 진무앙도 일어나 앉았다.
“의뢰도 마무리 지었는데 왜 왔어?”
“당신이 남은 의뢰 대금을 받으러 오지 않아서 왔지.”
곽 씨 부자를 구해달라는 목일석의 의뢰는 백 냥이었고, 선불로 오십 냥을 받았으니 오십 냥이 남아 있었다.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안 받아.”
“왜?”
“의뢰의 절반을 완수하지 못했으니까 대금도 절반만 받는 게 맞아.”
“곽보명을 구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야?”
“응.”
“그게 당신 탓이야? 오괴 중 둘이나 붙어 있었어. 그 상황에 곽보명이 죽임을 당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어?”
“방심했었으니까 내 탓이 맞아. 천지인 삼단이 그렇게 빨리 투입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내 방심이 곽보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난 절반만 성공할 수밖에 없었으니 대금도 반만 받아야지.”
“당신 이렇게 경우가 바른 남자였어?”
진무앙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응.”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난향이 말했다.
“나중에 돈 없다고 이번에 못 받은 거 달라고 딴소리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쳇, 치사하다, 치사해. 내가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거 달라고 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
난향이 그녀답지 않게 진무앙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화제를 바꿨다.
“무앙, 소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전에 말한 대로 천축 상인에게 딸려서 보낼 거야?”
“난향은? 다른 생각이라도 갖고 있어?”
“그 아이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진무앙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웬일이래? 그러면 수향루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잖아. 사해집마부는 절대 걔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애 혼자 서역으로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아. 여장을 시키면 크게 위험할 것 같지도 않고, 석초도 옆에 있을 거고…….”
“솔직히 말해. 석초 자식이 소혜를 천축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한 거지?”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난향은 움찔했다.
진무앙이 혀를 찼다.
“맞구만. 쯧. 이번 의뢰를 시작할 때 석초한테 개입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었지? 난향이 경고했는데도 제멋대로 행동한 거, 혼이라도 냈어?”
“…….”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석초를 끌어들였으면 당장 장죽 들고 쫓아와서 난리를 쳤을 거면서, 난향이 그렇게 싸고도니까 그놈 성격이 저 지경이 된 거야.”
“걔 성격이 어디가 어떻다고 그래! 착하고 귀엽기만 한 애를.”
“흥, 퍽이나!”
진무앙이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석초에 대한 일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터라 난향은 평소처럼 그를 타박하지 못했다.
간만에 난향의 입을 다물게 만든 진무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녀를 더 몰아붙일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러면 당장은 재미있겠지만 끝은 절대로 그렇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난향은 밀면 밀리는 그런 쉬운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소혜를 어떻게 할지는 좀 생각해 볼게.”
난향의 표정이 밝아졌다.
“긍정적인 쪽으로 결론을 내줘.”
진무앙은 화제를 바꾸었다.
“석진방하고 모길상은 입막음했어?”
“물론이지. 그들은 당신과 석초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야. 삼정이 얽힌 일이라 떠들어봤자 쓸데없는 풍파만 거세게 일어날 거라는 것 정도는 아는 자들이야.”
“석채은은?”
난향은 그린 듯 고운 눈매를 찌푸렸다.
“걔가 문제야… 당신에 대한 호기심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까지 올라갔어.”
진무앙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귀찮음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향이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매듭은 묶은 사람이 푸는 게 제일 쉬워. 이번 일에 걔를 끌어들인 사람이 당신이니까 처리도 당신이 알아서 해.”
“뭐… 그래야… 겠지…….”
내키지 않는 기색이 완연한 말투.
난향이 일어서며 말했다.
“갈게.”
“응.”
난향이 돌아가자 진무앙은 다시 벌렁 누웠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벌컥 하고 문이 열리며 결의에 찬 표정의 강석초가 진소혜의 손목을 잡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무앙이 인상을 와락 쓰며 투덜거렸다.
“인간들아! 날 좀 쉬게 내버려 두기라도 하면 몸에 종기라도 나냐?”
그러거나 말거나 강석초는 난향이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더니 진무앙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진소혜는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고.
강석초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진무앙이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 석초야,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소혜는 왜 무릎을 꿇는 거고?”
그제야 강석초가 입을 열었다.
“무앙, 소혜를 천축으로 보내지 마.”
진무앙은 혀를 찼다.
“헐, 난 또…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냐?”
“너한테는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내게는 인생이 걸린 중대사야.”
강석초의 대꾸에 진무앙은 손으로 팔을 북북 긁었다.
“아우… 이 자식이. 너 때문에 닭살 돋았잖아!”
“난 소혜를 천축으로 절대 못 보내. 그러니까 너도 그 계획 포기해.”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훗, 내가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나하고 한판 뜨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강석초의 둥그런 턱살이 바르르 떨렸다.
두세 번 숨 쉴 동안 진무앙을 노려보던 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나도 소혜하고 함께 천축으로 갈 거야.”
“난향하고 얘기는 된 거냐? 네가 천축으로 간다고 하면 그녀가 ‘오냐. 네 맘대로 해’ 그럴 거 같냐?”
“이 낭랑도 소혜에 대한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야.”
“쯧, 열부(烈夫) 났네. 열부 났어.”
진무앙이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는 진소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진소혜가 고개도 들지 못하며 대답을 했다.
“예, 숙부님.”
“너, 석초의 마음을 받아준 거냐?”
“…예.”
“진심이냐?”
“예.”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새 진도를 참 빠르게도 뺐네.”
진소혜는 고개를 들어 진무앙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기쁨과 감동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정원에서 강석초가 해주었던 말 그대로였다.
진무앙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 문이 빼꼼 열리며 소소가 쏙하고 머리를 내밀었다.
진무앙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꼬맹아, 거기서 엿듣지 말고 들어와.”
소소가 방으로 들어왔다.
“다 들었냐?”
소소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숙부님.”
아이가 진무앙의 눈치를 보며 진소혜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진소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숙부님, 강 작은 숙부님하고 언니를 이곳에 살게 해주시면 안 돼요?”
“그러고 싶냐?”
“예. 모두 착한 분들이잖아요. 천축은 엄청나게 멀리 있는 나라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사람도 환경도 모두 낯설 텐데… 두 분이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귀양 가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혀를 찬 진무앙이 강석초에게 눈길을 돌렸다.
“석초야.”
“응.”
“쟤하고 죽을 끓이든 밥을 짓든 네 맘대로 해도 되는데, 쟤 일에 나를 끌어들이지는 마. 그럴 자신 있냐?”
안색이 환해진 강석초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소혜는 내가 지켜. 절대로 너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 거야.”
“그래? 지금 한 말 잊지 마라. 이제 셋 다 내 방에서 나가. 난 저녁 먹을 때까지 잘 거다.”
진무앙은 다시 큰대자로 벌렁 누웠다.
강석초와 진소혜, 소소는 환하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말 많은 녀석들이니 누구 방이든 들어가서 신나게 수다를 떨겠지.
혼자 남은 진무앙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석초한테도 진짜 봄날이 왔구나. 내 봄은 언제 오려나.”
그러던 그가 눈을 껌벅였다.
“그런데… 저 자식, 낙양에 애인이 여럿 있다고 난향이 말했었던 거 같은데, 괜찮으려나? 지 인생인데 알아서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