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24
124 뭘 물어?
식사가 끝나갈 무렵.
무심코 창밖의 거리를 내다본 진무앙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곳엔 주신언이 걷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앙을 놀라게 한 건 그가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백미 노승이었다.
그들이 걷는 방향은 창천사마세가가 있는 곳이었다.
‘주신언이 왜 사마세가엘 가지? 일찍 나오길 잘했다. 조금만 늦게 나왔어도 마주칠 뻔했어. 그런데 저 땡중… 일엽이가 딱 늙으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외모인데? 설마…….’
진무앙이 창밖에서 시선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자 소소가 물었다.
“숙부님, 뭘 봤는데 그런 얼굴이세요?”
“내 얼굴이 왜?”
“엄청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계세요.”
“그랬냐?”
진무앙은 혀를 차며 암월도의 도갑을 움켜잡았다.
‘빌어먹을 놈의 낙양……. 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이렇게 아는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냐고! 만약 저놈이 정말 일엽이라면… 한눈에 암월을 알아볼 거다.’
암월도에 상체를 기울인 그가 말했다.
“암월아, 너 잠시 모습을 바꿔야겠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잔뜩 궁금해진 소소가 숨을 죽이고 암월을 보았을 때,
암월도가 흐물흐물 해지더니 손잡이부터 도갑까지 색과 문양이 바뀌었다.
넉 자 길이는 여전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환도의 모습이었다.
소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숙부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별거 아니다. 환술의 일종일 뿐이야.”
식사를 마친 진무앙과 소소는 수향루로 돌아왔다.
난향의 거처.
늘 그렇듯이 입에 물고 있던 장죽을 내리며 난향이 물었다.
“내 예상보다 일찍 왔네? 조사는 끝났어?”
“사마세가에서 조사할 건 다 했어.”
“성과는 있었어?”
“채경옥이 납치범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성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녀가 범인이 아니야?”
“응.”
“그럼 누가 범인인데?”
진무앙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어린 묘한 기색을 읽은 난향이 미간을 찌푸렸다.
“범인이… 당신이 아는 놈이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누군데?”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야.”
“집단? 어디?”
“낭인혈막.”
난향의 눈이 커졌다.
“혈왕이 움직였다는 말이야? 그가 중원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진무앙이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이 중원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소소가 초지력으로 본 건 걔 측근 둘이니까.”
“누구를 본 거야?”
“혈검백묘와 귀유.”
난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이라면, 혈왕이 가장 아끼는 십위 중 둘이잖아?”
“응. 내 생각엔 혈왕이 중원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도 그들이 벌인 짓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거야.”
진무앙의 말에 난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충성심이 강한 그들이 혈왕의 허락 없이 중원에 들어왔을 리는 없지.”
그녀가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청해를 중심으로 변황에서만 활동하는 걔들이 왜 힘들게 여기까지 들어와서 단리영을 납치한 거야?”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어.”
“정말?”
“응.”
난향은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연이어 물었다.
“채경옥은? 당신은 걔가 정주에 가지 않았을 거라고 단언했었잖아.”
“그녀도 납치당한 것 같아.”
“혈검백묘와 귀유한테?”
“응.”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단리영도 그렇지만, 혈검백묘와 귀유가 뭣 때문에 채경옥을 납치해? 사마천웅이 알게 되면 낭인혈막과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낭인혈막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그녀들에게 있단 말이야?”
진무앙은 입맛을 다셨다.
난향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만 난향에게 그가 알아낸 것을 말할 수도 없었다.
환우지약을 빼고서는 어떻게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해 대략적인 윤곽을 잡은 상태였고, 그 전모는 이랬다.
진무앙을 이수에 처박고(?) 점토판을 얻은 채경옥은 그것을 백화곡주에게 보냈을 것이다. 그녀는 백화곡의 제자니까.
점토판을 손에 넣은 백화곡주는 고대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리라.
그러다가 어떤 식으로든 신분을 속인 귀유와 연결이 되었을 것이고.
천하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는 잊힌 고대 언어에 굉장히 해박한 자였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귀유는 점토판이 마령주라는 것과 이미 환우마령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귀유는 혈왕에게 보고했을 것이고, 혈왕은 혈검백묘를 보냈으리라.
귀유는 귀문둔갑과 좌도방문의 술수, 사기에 능했지만 무공은 일류 정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혈검백묘는 절정에 이른 고수였고.
두 사람은 백화곡주가 점토판을 얻은 과정을 역추적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채경옥과 단리영의 존재를 어렵지 않게 알아냈겠지.
그들은 전문가니까.
그리고 그들은 지체 없이 그녀들을 납치했으리라.
이 추론에서 한 가지 비는 건, 사마무룡이 어떤 역할을 했고, 왜 그들과 손을 잡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무앙은 그에 대해서도 하나의 가설을 세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가설이 진실일 가능성이 십 할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난향이 그의 짧은 상념을 깼다.
“그런데 그들이 단리영과 채경옥을 어떻게 납치한 거야? 혈검백묘가 절정고수라고 해도 사마세가에 들어가서 그녀들을 둘러업고 나가는 건 불가능해.”
진무앙이 사마세가 내부를 무인지경처럼 뒤지고 다닌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그건 진무앙이니까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사마세가에 들어가지 않았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밖으로 나왔을 때 납치했다는 거야? 하지만 그랬으면 한 명이라도 그걸 본 목격자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닐까?”
“납치당했다고 하니까 너는 폭력적인 상황을 상상하는 모양인데, 그러지 마. 그거 편견이야.”
“그럼?”
“그녀들은 제 발로 걸어서 납치범들에게 갔어.”
난향이 눈을 깜박거렸다. 진무앙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물었다.
“그게 말이 돼?”
“말이 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예전에 내가 마호라는 약물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 기억해?”
“응. 첫 번째 의뢰 때 유정명에게 사용했던…….”
말을 하던 난향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물었다.
“설마 이번 사건에 마호가 사용되었다는 거야?”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채경옥과 단리영의 침실을 조사할 때 얼굴에 바르는 분에 마호가 포함된 걸 확인했어. 시일이 경과되어서 약효는 거의 다 날아갔지만, 재료가 조금 남아 있더라구.”
난향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당신에게 마호를 알려준 용병 동료가 누군가 했더니, 혈검백묘였던 거야?”
진무앙은 대답 없이 딴청을 피웠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난향이 말을 이었다.
“당신, 저번에 나한테 마호에 대해 말할 때 그걸 흡입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없고, 누군가 지시를 내려야 그대로 따른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럼 채경옥과 단리영에게 사마세가를 나가라고 한 사람이 그녀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맞아.”
“내부에 납치범들의 조력자가 있었다는 말이네. 누군지 알아냈어?”
“물론.”
“누구야?”
진무앙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마무룡.”
난향은 멍해졌다.
“그게 무슨… 이번 사건을 의뢰한 게 그야. 그런데 그가 납치범의 조력자라니. 그게 말이 돼?”
“말이 돼. 그는 자신이 이 사건의 내부 조력자 역할을 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하아… 갈수록 태산이네. 그도 마호를 흡입한 거야?”
“아니. 그는 독과 미혼 약물에 대한 내성이 강해. 마호가 통할 몸이 아니라구.”
“그럼?”
“그는 약물이 아니라 귀유의 섭혼술에 이지가 제압당했어.”
난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당신도 알고 있는 것처럼 거대 문파의 핵심 요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섭혼술과 독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훈련을 받잖아. 마호가 통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섭혼술에 당해?”
“그래서 나도 그가 어떻게 섭혼술에 제압당한 건지 궁금해하는 중이야.”
이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는 사마무룡이 왜 섭혼술에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정상적인 섭혼술이었다면 사마무룡은 당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내가 추측한 것처럼 ‘그것’이 개입했다면 그는 저항도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난향은 진무앙의 해준 이야기들로 이 사건의 얼개를 꿰맞출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 구멍이 뻥 나 있긴 했지만.
그녀가 물었다.
“그녀들은 살아 있는 거 같아?”
“응.”
“확신해?”
“응.”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그냥이라…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뭘?”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 있잖아.”
“없어. 넘겨짚지 마.”
“흥. 당신이 그녀들의 생존을 확신하는 건, 혈검백묘와 귀유가 그녀들을 죽일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잖아.”
“그런 거 없다니까.”
“정말 감만으로 확신하는 거라는 거야?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지금 내 감을 무시하는 거야?”
난향이 진무앙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진무앙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고개를 돌리면 얼마나 피곤해질지 뻔했으니까.
“일이 마무리되면 말해줄 거야?”
“말할 것이 있으면.”
난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무앙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그녀로서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당신이 알아낸 것들, 사마천웅이나 사마무광에게 말해줄 생각이야?”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이 알게 되면 사마무룡을 잡을 거고, 여기저기 들쑤실 거야. 그러면 그녀들이 위험해. 게다가 이 사건을 낭인혈막이 일으켰다는 걸 사마천웅이 알게 되면 후폭풍이 너무 커져.”
“그래서? 혼자 해결하겠다고?”
“응. 그녀들을 사마세가에 데려다주고 끝낼 거야.”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짐작 가는 곳이 있어.”
“그게 어딘데?”
진무앙은 난향에게 족자와 산수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산수화에 그려진 장소 어딘가에 그녀들이 잡혀 있다는 거야?”
“응.”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을 이었다.
“멀지 않은 곳일 거야. 마호의 효과는 아무리 길어도 열두 시진을 넘기지 못하니까.”
“그림 속 장소는 그녀들이 열두 시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네.”
“맞아.”
난향이 옆에 있던 지필묵을 진무앙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려주겠어? 혹시 내가 아는 곳일 지도 모르잖아.”
진무앙이 망설임 없이 붓을 들었다.
산수화는 선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그려졌다.
그는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이 있는 남자였으니까.
그가 완성된 그림을 가리키며 난향에게 물었다.
“여기 본 적 있어?”
난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열두 시진 이내에 갈 수 있는 장소라면 내가 모르기 어려운데…….”
난향은 진무앙이 수향루에 오기 전에는 틈만 나면 인근의 풍광 좋은 곳을 여행하곤 했다.
그런 만큼 낙양 인근의 지리에 해박했다.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이 아닐 수도 있어. 상상이 가미된 그림이면 네가 모르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야.”
“그렇긴 한데… 뭔가 좀 찜찜해.”
눈살을 찌푸리고 그림을 보던 난향이 고개를 들며 그를 불렀다.
“무앙.”
“왜?”
“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혈검백묘와 귀유를 만나게 될 텐데, 그들을 어떻게 할 거야? 그들은 당신의 동료였잖아.”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새삼스럽긴. 내가 어떻게 할지 잘 알면서 뭘 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