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26
126 당신 정말 많이 화났네.
야명주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지하 석실.
일남일녀가 중앙에 있는 향로를 사이에 두고 가부좌를 튼 채 운기행공 중이었다.
향로에 꽂힌 굵은 향에서 회백색의 연기가 몽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창문 하나 없는 장소인데도 바람이 분 것처럼 회백색의 연기가 확 흐트러졌다.
일남일녀 중 검은 경장을 입고 허리에 길고 짧은 다섯 자루의 칼을 찬 여인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굴곡이 완연한 몸매에, 피부가 희고 고양이처럼 눈끝이 위로 올라간 굉장한 미인이었다.
“귀유.”
머리에 죽관을 쓰고 팔괘가 그려진 도포를 입은 중년의 도인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받았다.
“백묘, 침입자가 있다.”
혈검백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자가 아닌 것 같아. 결계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뚫렸어.”
귀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좀 쉬려고 했더니 그걸 훼방 놓는 놈이 있네. 그런데 중원에 막주님이 알려준 결계를 뚫을 수 있는 자가 있었나…….”
혈검백묘가 일어나려 하는 기색을 보이자 귀유가 손을 들어 말렸다.
“애들이 지키고 있는데 너까지 나설 필요가 있겠냐?”
그가 옆에 놓아두었던, 두 개의 팔각형 패를 들어 하나를 혈검백묘에게 주며 말을 이었다.
“결계는 뚫렸지만, 이곳까지 오려면 내가 깔아놓은 암수와 네 부하 일백 명으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해. 막주님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그걸 다 뚫고 이곳까지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팔각패 표면에는 크기가 다른 다섯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었다.
동심원은 바깥쪽이 가장 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작아졌다.
팔각패를 받은 혈검백묘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
“귀유, 혹시 모르니 여자들을 데리고 이동할 준비를 해둬.”
“그럴 필요가 있겠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은신하기 적당한 장소를 바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혹시 모른다고 말했잖아.”
눈살을 찌푸리는 혈검백묘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귀유는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낭인혈막을 통틀어 짜증이 난 그녀를 침묵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한 명은 물론 막주인 혈왕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석실의 문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귀유가 벽에 손을 댔다.
그르릉-
돌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그가 구멍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은 다시 닫혔다.
혼자가 된 혈검백묘는 팔각패를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과연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실력 좀 보여봐.”
* * *
절벽이 사라진 자리엔 반쯤 허물어진 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선 진무앙의 눈길은 정면 좌대를 향했다.
그곳엔 허리 아래만 남은 석상이 놓여 있었다.
그는 좌대에 손을 올렸다.
스르르릉-
좌대가 통째로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사방 일곱 자가량 되는 네모반듯한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보는 진무앙의 눈빛이 강해졌다.
구멍은 자로 재서 만든 것처럼 길이가 똑같았고, 단면 또한 돌기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말끔했다.
‘만듦새가 향산의 지하 미로와는 격이 다르다. 설마 만겁수라환의 각성이 이단계를 넘어섰단 말인가?’
칠마병 중 회백색을 특징으로 하는 마병은 만겁수라환뿐이었다.
그리고 환우십병의 각성 이단계는 환우지약의 조각들이 모두 모였을 때나 가능했다.
구멍으로 들어가는 그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상황을 보면 아직 만겁수라환의 본체를 찾지는 못한 모양이네. 하지만 각성이 이단계를 넘어섰으니 조만간 본체가 반응할 텐데… 설마 그 본체도 낙양에 있다는 거냐?’
파천혈신륜의 경우처럼 누군가 마령주를 암송하면 환우십병의 일단계 각성이 시작된다.
그리고 세 조각의 환우지약이 모두 모여 하나가 되면 이단계 각성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마지막 삼단계 각성은 본체와 환우지약이 하나가 되었을 때 시작된다.
그것이 마무리되면 ‘일체화’로 넘어가고.
‘누가 만겁수라환의 환우지약을 다 모은 거지?’
의문을 품자마자 답은 바로 나왔다.
소소가 본 사람들 중엔 혈검백묘와 귀유가 있었다.
그들과 환우지약, 그리고 이곳의 결계를 연결하면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환우지약을 다 모은 놈이 혈왕, 너냐?’
구멍의 아래쪽은 무저갱처럼 깊었다.
어디에도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진무앙은 망설임 없이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스르르르릉-
즉시 좌대가 움직이며 구멍이 닫혔다.
위가 완전히 막힌 것이다.
먹물 같은 어둠과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진무앙에게 어둠과 정적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움직임은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런 그가 한 지점을 통과할 때 아무것도 없는 듯하던 허공에 푸르스름한 빛이 화악 일어났다.
빛의 중앙을 통과하는 진무앙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빛은 독을 품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에 달라붙으며 계속 빛을 뿌렸다.
마치 개똥벌레처럼 그는 어둠 속에서도 몸을 감출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때,
스슷!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오른쪽 태양혈을 향해 푸르스름한 빛을 띤 칼끝이 날아들었다.
빠르고 정확한 검세.
진무앙은 피하지 않았다.
칼끝이 태양혈을 찔렀다.
까앙!
그런데 들린 것은 금속이 육신을 꿰뚫는 소리가 아니라 금속끼리의 충돌음이었다.
진무앙의 피부엔 작은 찰과상조차 나지 않았다.
공격했던 자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결과에 크게 놀란 듯 검끝이 멈칫했다.
그것으로 그의 운명은 결정이 되었다.
허공에 떠 있어 아무런 지지대도 없는 진무앙의 몸이 번개처럼 칼의 아랫부분을 파고들며 우측 벽을 무지막지한 기세로 강타했다.
전마보와 어우러진 야차회륜박의 몸통 공격 수법 붕산벽이었다.
쾅!
푸확!
벽이 움푹 패며 붉은 핏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일 장을 더 내려왔을 때 위에서 그의 정수리를 노린 칼끝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도 진무앙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날아드는 검날을 손으로 잡았다.
덥석-
검날이 내리꽂히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하고 구부러지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지이이잉-
다음 순간,
챙강!
검날의 중동이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진무앙은 올려다보지도 않고 부러진 검날을 잡아 위로 던졌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
쐐애액-
퍽!
머리 위 어둠의 일부가 걷히며 눈을 부릅뜬 남자가 진무앙의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부러진 칼날에 인중을 관통당한 그는 즉사한 상태였으니까.
곧 발아래에서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털썩!
공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총 열 번.
십여 장을 날아내린 진무앙이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그의 주위엔 열 구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은 사방 오 장가량 되는 공터였고, 정면엔 높이와 폭이 일 장가량 되는 동굴이 뚫려 있었다.
진무앙은 걸음을 옮기려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바닥엔 은은한 녹색빛을 띤 철질려가 박혀 있었다.
‘귀유의 짓이로군.’
성격이 음침한 귀유는 독과 함정을 이용해 적을 쓰러뜨리는 걸 좋아했다.
귀찮아진 진무앙은 이매부운을 펼쳤다.
그의 신형이 둥실 떠올라 지면과 다섯 치 간격을 두고 앞으로 날아갔다.
‘귀유 그놈, 아직도 함정 설치 순서에 집착하려나. 독질려 다음 순서가 뭐였더라… 참수독망이었던 거 같은데…….’
공터를 한걸음에 뛰어넘은 그는 동굴의 입구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그는 입구에 처져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과 부딪쳤다.
무색무향의 독이 발려진 그물은 특별한 처리를 한 천잠사로 만들어져서 쇠도 끊어버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것이 귀유가 자랑하는 참수독망이었다.
하지만,
투투투툭-
진무앙과 충돌한 참수독망은 허무할 정도로 힘없이 가닥가닥 끊어졌다.
거미줄을 치우듯 귀찮은 표정으로 천수독망을 걷어낸 그는 지면을 밟았다.
바닥에 철질려는 없었다.
대신 다른 것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면을 본 진무앙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스물다섯 명의 흑의인이 그를 향해 칼을 들어올렸다.
* * *
팔각패가 미미하게 진동하며 표면의 동심원 다섯 개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의 색이 검게 물들어갔다.
혈검백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녀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문이 열린 지 일다향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첫 번째 관문을 돌파했다는 건가? 누군지 몰라도 실력이 없는 놈은 아닌가 보네. 과연 오관을 다 뚫고 올 수 있으려나.”
그녀는 일말의 기대가 어린 얼굴로 팔각패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덜덜덜…….
세 자루의 칼날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세차게 떨렸다.
칼을 쥔 사내들의 눈동자는 더 심하게 떨리고 있어서 마치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일 장 앞, 핏물에 흠뻑 젖은 진무앙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똑… 똑…….
머리카락 끝과 장포 자락에 매달려 있던 핏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마다 사내들은 경기를 일으키듯 전신을 떨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예닐곱을 셀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물다섯이던 사내들 중 살아 숨을 쉬고 있는 건 그들 다섯 명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스무 명의 동료가 머리가 부서지고, 가슴에 구멍이 난 처참한 시신이 되어 피 구덩이에 누웠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학살극이라 그들은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 악마…….”
피에 젖은 진무앙의 입술 사이로 흰 선이 그어졌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달콤하게 들리는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전마보.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자신을 악마라 불렀던 사내의 코앞에서 솟아나듯 나타났다.
한 손은 칼을 쥔 사내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머리를 움켜쥔 진무앙이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쾅!
벽에 짓이겨진 사내의 머리가 비명도 없이 진흙처럼 으스러졌다.
네 사내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 느렸다.
찰나지간에 그들과의 거리를 좁힌 진무앙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환상혈조다.
서걱! 서걱!
반보도 채 내딛지 못한 두 사내의 목 위에서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떼구루루- 털썩!
푸화학!
남은 두 사내가 악을 쓰며 칼을 휘둘렀다.
“악귀 같은 놈아!”
“죽어! 죽어!”
이미 공포에 영혼까지 잠식당한 그들의 칼질은 초식의 기본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마구잡이 휘두름이었다.
두 자루의 칼이 진무앙의 양팔을 베었다.
까까깡!
이제는 귀에 익숙해진 금속음이 울릴 때 그의 두 손이 사내들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나가며 그들의 머리를 잡은 채로 바닥에 처박았다.
콰쾅!
사내들의 머리가 바닥을 뚫고 파묻혔다. 그 주변으로 시뻘건 핏물이 울컥거리며 번져 나갔다.
철벅철벅-
웅덩이처럼 고인 핏물을 밟으며 진무앙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신들 사이를 걸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유코의 중얼거림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무앙… 당신 정말 많이 화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