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28
128 많이 늙었구나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향루, 난향의 거처.
문을 열고 들어선 강석초는 방 안의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난향은 단아한 자세로 손을 아랫배에 모으고 서 있었고, 창가에 선 진무앙은 등을 돌린 채 밖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장중한 기세.
진무앙이 몸을 돌렸다.
인피면구를 벗은 그의 조각처럼 수려한 얼굴은 무표정했다. 눈빛마저도 무심했고.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만큼은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강대했다.
그를 향한 강석초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허리를 숙여 포권하며 말했다.
“대형, 정말 오랜만에…… 이런 모습 뵙는 것 같습니다.”
진무앙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래가지 않을 테니 부담 갖지 마라.”
강석초가 허리를 확 펴며 소리쳤다.
“부담이라뇨! 저는 대형이 계속 이런 모습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희망사항은 네 수첩에나 적어둬.”
그가 말을 이었다.
“연판장은 손에 넣었느냐?”
“예.”
강석초가 품에서 두툼한 누런 봉투를 꺼내 진무앙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걸 어떤 놈이 갖고 있었지?”
“용문방주 서인광의 금고에 들어 있었습니다. 갖고 나오면서 비슷한 걸 만들어서 넣어두긴 했지만, 가짜라는 게 발각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용문방은 사마세가의 아홉 개 방계문파 중 서열 이위의 문파였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짧으면 오늘 오후, 늦어도 내일이면 연판장이 도난당했다는 걸 알아차릴 겁니다.”
“그럼 상관없다. 모든 건 오전 중으로 마무리가 될 테니.”
강석초는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형.”
그는 이런 모습일 때의 진무앙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별채에 단리영과 채경옥이 있다. 손을 써둔 터라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안정이 필요해. 적절한 장소로 옮겨라.”
“이럴 때를 대비해서 서부 대로에 마련해 둔 작은 장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다. 그녀들을 옮긴 후 그곳으로 은밀하게 사마천웅을 불러라, 암천광무존의 이름으로!”
“예, 대형.”
“그리고 무림맹 낙양 지부에 소림에서 온 일엽이 머물고 있다. 그도 함께 불러라.”
놀란 듯 강석초의 눈이 잠시 번뜩였지만, 질문은 없었다.
“가라.”
강석초가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대형.”
진무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진 대가…….”
난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단리영은 무사할 거예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무사하겠지. 하지만 사마무광과 아영의 아이들은 앞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진 대가의 책임은 아니잖아요.”
난향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모든 사태는 파천혈신륜의 마령주 때문에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사마천웅의 욕심이 근원이었다.
하지만 진무앙은 이 사태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환우십병의 셋이 낙양에 모인 것은 나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뭔가 나와 관련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추측에 불과한 가설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싶은 것은 난향이 아직 이 사태가 환우지약과 관련이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난향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진 대가, 궁금한 게 있어요.”
“대답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물어봐라.”
“혈왕이 왜 이런 일을 꾸민 거죠? 그가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단리영과 채경옥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진무앙의 대답은 단호하고 간단명료했다.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의문은 가슴에 묻어둬라.”
난향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 밤 진무앙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꿈에서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보는 걸 원치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건, 이럴 때의 진무앙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질문은 대답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이냐?”
“섭혼술에 이지를 장악당한 사마무룡을 만났을 때 무엇을 보셨기에 석초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거예요?”
“별거 아니었다. 그는 사마무광과 사마휘에 이은 창천사마세가의 후계 서열 삼위야. 그런 그의 이지를 섭혼술로 장악해서 얻으려 할 건 하나뿐이지.”
“그 하나가… 창천사마세가인가요?”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휘는 세가의 권력엔 관심이 전혀 없다. 그러니 만약 아직 온전치 못한 사마무광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사마천웅은 어쩔 수 없이 사마무룡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런 사마무룡의 정신을 장악한다면 사마세가를 집어삼킬 수 있게 되는 거고.”
난향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하지만 일의 진행이 너무 급작스러워요. 혈왕이 창천사마세가를 집어삼키려 했다면 오래전부터 작업을 해왔어야 하는데, 저도 석초도 그런 기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당연하다. 이건 혈왕도 등 떠밀리듯 급작스럽게 결정한 일이었을 테니까.”
“예?”
난향은 궁금한 기색이었지만 진무앙은 입을 열지 않았다.
더는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환우지약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마무광이 연공실에 갇힌 후 사마세가의 요인과 방계 문파의 가신들 사이엔 반역의 기운이 움텄으리라.
파천혈신륜의 마령주에 대한 정보를 얻은 혈왕은 사마세가의 내부 사정을 알아차리자마자 반역의 무리와 손을 잡고 사마무룡의 정신을 제압했을 것이고.
혈왕은 사마무광 때문에 벌어진 사마천웅과 가신들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그건 혈왕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단리영과 채경옥을 손에 넣으려고 마음먹은 이상 낭인혈막과 사마천웅은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사이였다.
세상에 영원히 지켜지는 비밀은 없다.
사마세가의 자체 정보력도 만만찮지만, 그보다 세가의 뒤에는 풍령부운전을 움직이는 무림맹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언제가 되었든 사마천웅이 혈왕의 모략을 알게 될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뒤야 당연히 두 세력의 전쟁일 것이고.
그러니 혈왕은 먼저 사마무룡을 앞세워 사마천웅과 사마무광을 제거하고 창천사마세가를 장악할 계획을 꾸민 것이다.
진무앙이 고개를 돌려 난향을 보며 말했다.
“혼자 있고 싶구나.”
난향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이곳은 그녀의 방이었지만 진무앙이 뚜렷한 선을 그은 이상 더 머무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진무앙으로부터 왔다.
무공과 재산은 물론이고 인생 전부가.
그가 수향루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향의 모든 것은 그의 것이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단지 그가 품기를 원치 않았을 뿐.
* * *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는 시각.
서부대로 안쪽에 있는 작은 장원으로 굳은 얼굴을 한 사마천웅이 들어섰다.
그는 호위조차 물리고 혼자 왔다.
정면의 전각으로 향하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전각의 앞에 그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일엽 대사 아니시오?”
일엽 대사가 그를 향해 반장을 했다.
“아미타불, 가주께서도 부름을 받으셨습니까?”
“그럼 대사께서도?”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일엽 대사의 얼굴은 흥분으로 인한 홍조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대사, 정녕 그분이시오?”
“빈승도 아직 그분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전각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끼이익-
촛불 하나 없는 전각의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사마천웅과 일엽 대사에게 어둠은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허실생동의 경지에 이른 초절정고수였으니까.
두 사람의 눈에 상좌에 있는 의자와 그곳에 앉아 있는 흑의인이 들어왔다.
사람이 아니라 백옥으로 깎은 조각상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청년.
그리고 그의 무릎에 놓인 넉 자 길이의 고풍스러운 장도.
암월도와 그를 한눈에 알아본 일엽 대사의 긴 백미가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흔들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사마천웅도 일엽 대사와 비슷하게 청년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존재만으로도 천지를 침묵시키는 저 웅장한 기세와 무한의 아름다움을.
진무앙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둠이, 그리고 하늘과 땅이 좌우로 갈라지며 물러났다.
그런 착시를 불러일으킬 만큼 그의 기도는 거대했다.
“오랜만이군. 둘 다 많이 늙었구나.”
사마천웅과 일엽 대사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무존을 뵙습니다.”
“아미타불, 일엽이 조사야를 뵙습니다.”
“과하다.”
진무앙이 손을 저었다.
사마천웅과 일엽의 몸이 둥실 허공에 떠오르더니 무릎이 저절로 펴졌다.
그들은 자세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저항은 불가능했다.
일엽은 환희에 찬 얼굴이 되었고, 사마천웅은 울적해졌다.
“아미타불, 조사야께서 이처럼 강건하시니 천하의 홍복입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옆에서 사마천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십 년을 노력했는데…… 작은 반항도 통하지 않는군요…….”
진무앙이 피식 웃었다.
“훗, 너는 어릴 때도 호승심이 강하더니 백발이 된 지금도 여전하구나.”
사마천웅이 말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신발이 닳도록 찾아다녀도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낙양엔 대체 언제 오신 겁니까? 그리고 오셨으면 본가로 오시지,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한 장원에 계시는 겁니까?”
“온 지는 몇 달 되었다. 얼마 전에는 네 녀석 목을 부러뜨려 버릴까 잠시 고민도 했었지.”
사마천웅의 눈이 커졌다.
“제 목을 말입니까? 제가 무존께 죄를 지은 게 있습니까?”
“나한테는 없다. 네가 죄를 지은 사람은 둘째 며느리야.”
사마천웅은 뜨끔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둘째라면… 영아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와 어떤 관계라도 있으신 겁니까?”
“나는 아영의 대부다.”
여기서 단리영의 전 애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
아연실색한 사마천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럼…….”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맞다. 연공실에서 아영과 무광의 마기를 제거한 후 ‘그것’을 갖고 나간 사람이 나였다.”
“아…….”
“아영과 무광이가 아니었으면 그날 나는 네놈의 목을 꺾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라.”
안색이 창백해진 사마천웅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암천광무존이라는 별호에 암(暗)과 광(狂) 자가 들어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진무앙의 시선이 일엽을 향했다.
“일엽아.”
“예, 조사야.”
“개벽대전 직후에 백 년 동안 소림무승들의 강호 행도를 자제하라고 지시했었다. 아직 오십 년이 남았다. 그런데도 내 지시를 어기고 하산한 이유가 무엇이냐?”
“얼마 전 주신언이 방장 사형께 소림의 무공을 쓰는 자가 살계를 크게 어겼다는 서신을 보내 왔습니다. 그것을 보신 방장 사형께서 제게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일우가?”
“예, 조사야.”
진무앙이 혀를 찼다.
“잔머리 굴리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녀석의 뜻은 알았다. 너는 바로 돌아가거라. 일우에게는 내가 조만간 소림에 한 번 들르겠다고 전하고.”
일엽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미타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언제 오신다고 전할까요?”
진무앙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갈 때가 되면 어련히 내가 알아서 갈 거다. 너는 가서 전하기만 해. 나는 아직 천웅이와 할 얘기가 남았다.”
진무앙이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일엽 대사가 반장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난 후 사마천웅이 진무앙에게 물었다.
“무존,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이것에 대해서다.”
대답과 함께 진무앙이 그에게 두루마리를 던졌다.
두루마리를 받아 읽어 내려가는 사마천웅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연판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