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31
131 언니처럼은 못살아
창천사마세가에 커다란 변고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낙양을 넘어 하남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세가의 핵심 요인과 방계 문파의 수장들 중에 갑작스러운 폐관수련이나 장기 출타로 모습을 갖춘 사람들이 속출한 것이 소문에 불을 붙였다.
더해서 세가와 방계 문파의 중요 보직에 대한 대규모 물갈이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원로 소리를 듣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라졌고, 그 자리는 중견급 인물들이 채웠다.
창천사마세가가 낙양에 끼치는 영향은 무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무림세가일 뿐만 아니라 낙양제일의 대부호였고, 낙양 지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호족이었다.
당연히 낙양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졌다. 하지만 세가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해 주지 않았다.
본가든 방계 문파든 세가에 몸담은 사람들도 하나같이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낙양엔 창천사마세가에 공식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추궁은커녕 단순 질문조차 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게 현실 아닌가.
* * *
어둠에 잠긴 수향루 난향의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장죽을 입에 물고 있던 난향의 시선이 창을 향했다.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밤고양이처럼 계속 그곳에 붙어 있을 생각이니?”
“역시 언니의 이목은 속이기 어려워.”
투덜거리는 맑은 목소리와 함께 난향의 앞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유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향이 장죽으로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유코는 사양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내 집 담을 넘는 경우는 없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들어온 거니?”
“언니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겨서.”
“네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는 짐작이 가. 그런데 넌 그 답이 나한테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언니니까.”
“나라고 무앙의 전부를 아는 건 아니야.”
잠시 난향을 바라보던 유코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그 사람… 불로불사하는 거… 맞지?”
“호오,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내가 오히려 궁금한걸?”
“전에도 그런 의심은 하고 있었어. 무앙은 몇 년이 지나도 잔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냥 그의 무공이 신화지경에 이르러서 그런 거겠지 했는데…….”
“그가 반로환동한 노고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앙이? 농담하지 마. 반로환동이 무공만 높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언니도 알잖아. 그건 우주의 이치를 깨달을 정도로 처절한 고행의 끝에서나 얻을 수 있는 거야.”
“그가 고행하거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거니?”
“언니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음… 부정하지 못하겠구나. 그래서?”
“언니도 내 칼에 여러 번 찔린 그의 옷을 보았지?”
“보지는 못했어. 얘기만 들었지.”
“아무튼 내 칼은 정확하게 그의 심장을 여러 차례 관통했어.”
이야기를 듣는 난향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런 짓을 한 여자가 너니까 참는 거야. 다른 년이었으면 벌써 시체에 벌레가 끓고 있을 거야.”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유코도 평범한 여자는 아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알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백묘와 귀유를 죽인 동굴에서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어.”
“어떤?”
“마치 금강불괴라도 되는 것처럼 공격한 놈들의 칼이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하는 모습.”
“네 칼에는 무기력하게 뚫리던 몸이 갑자기 금강불괴가 된 것 같았다는 거니?”
“응. 어떤 신공을 익혀도 그런 상반된 육신의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잖아.”
“그래서 무앙이 영생불사하는 남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응.”
장죽을 입에 문 난향의 눈가에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유코, 아쉽게도 네가 기대하는 대답을 절반밖에 해줄 수 없을 것 같네.”
유코는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난향이 말을 이었다.
“그가 늙지 않는 건 분명해. 하지만 영생불사하는지는 몰라. 그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알려면 나도 그의 곁에서 영생불사하며 확인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잖니.”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정적을 깬 건 유코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언니는 무앙이 죽지 않는 남자라고 믿는 거지?”
난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유코를 깊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유코가 말을 이었다.
“그가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해도 언니가 그를 원망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게 왜?”
“사람이 일이백 년을 더 장수하는 건 축복이겠지만 영생불사는… 저주잖아. 언니가 무앙이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주는 건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니야?”
난향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그가 불사의 존재인지 아닌지 알지 못해.”
“그럼 그에 대한 언니의 끝없는 포용과 인내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데?”
난향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코를 보며 물었다.
“유코, 그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춰 있다는 걸 아니?”
유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향은 자신의 질문이 이해하기 힘든 것임을 알아차리고 조금 바꿨다.
“그의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아니?”
유코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몰라. 하지만 그가 희대의 천재라는 건 알고 있어. 그는 오히려 멍청해 보이길 바라는 것 같지만.”
난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는 천재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남자야, 절대 기억력을 갖고 있으니까. 그는 무엇을 보든 완벽하게 기억하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응용까지도 가능해. 백 년 전에 본 것이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지. 그리고 그 능력은 사람과 물건, 일상생활과 무공을 가리지 않아.”
유코의 입이 벌어졌다.
“그게… 정말 가능해?”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어. 그건 무앙이 실제로 지닌 능력이니까.”
난향이 말을 이었다.
“영생불사보다 이 능력이 그에겐 더 저주야. 아무것도 망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가 자신과 맺었던 모든 인연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거기에 불사로 의심되는 능력까지 더해지면… 하아… 이제 내가 그의 시간이 멈춰 있다고 했던 말이 이해가 되니?”
유코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무앙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코, 그가 자신은 오늘만 사는 남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거 알지?”
“물론. 틈만 나면 정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반복하는데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는 것도 알아?”
“…진담이라고? 그 헛소리가?”
“그는 자신의 운명을 덮고 있는 저주와 매 순간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어. 저주에 맞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그렇게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남자야. 너와 내가 흙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 세상에 홀로 남아서…….”
난향이 씁쓸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걸 아는 내가 그를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니…….”
유코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난향이 말을 할 때마다 가혹한 수련으로 얻은 평정심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출렁거렸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그녀는 도리질하며 말했다.
“언니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어. 대체 왜 그는 쉴 새 없이 난봉질을 해서 그 많은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거야? 그냥 언니 옆에 머물면서 언니만 바라보며 살면 천하의 여자들이 얼마나 평화롭겠어?”
유코의 말에 난향이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호호, 재미있는 말이로구나. 그가 해바라기처럼 일편단심인 남자였으면 너와 인연을 맺지도 못했을 텐데?”
“그와의 인연은… 내 인생의 전부야. 부인하지 않아. 나는 그에게 무공을 배웠고,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도 알았고, 홀로 서는 법도 배웠으니까.”
유코의 어조가 조금씩 높아졌다.
“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잘 안 돼.”
“무앙이 쉽지 않은 남자이긴 하지…….”
“그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평초처럼 떠돌다가도 언제나 언니에게 돌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언니에게만. 그건 그가 다른 누구보다 언니에게 더 마음을 주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잖아. 그런데 왜 그는 언니 곁에 계속 머물지 않는 거야?”
유코를 보는 난향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철없는 여동생을 보는 것처럼.
그녀가 말했다.
“내가 무앙의 속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어.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건 있어.”
“내게 말해줄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는 말, 들어본 적 있니?”
“물론이야.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한 여자가 있겠어?”
“그가 수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건, 필사적인 발버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 한 사람에 대한 마음만을 끌어안고 영원처럼 긴 세월을 살아야 하는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말이야…….”
“필사적인 발버둥이…….”
“그래. 하지만 내 생각이 맞더라도 그가 누군가를 사랑한 마음과 추억을 잊는 건 불가능해.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고통스러울 뿐이지.”
“그가 가진 절대 기억력 때문에?”
유코의 질문에 난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나는… 그가 자신의 앞에 놓인 아득한 세월을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절대적인 고독을 느끼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어.”
난향은 다시 장죽을 입에 물었다.
유코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기만 하다가 불쑥 말했다.
“나는 언니처럼은 못살아.”
난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기대는 꿈에도 한 적이 없어. 너는 내가 아니니까.”
“맞아. 나는 언니가 아니야.”
“어떻게 하려고?”
“그는 나를 떠날 때 다시는 중원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어. 그걸 어기면 자신을 죽여도 좋다고.”
난향이 한숨을 포옥 하고 내쉬었다.
“그래서 네가 낙양에 왔구나. 그런데 너는 그의 약속을 믿은 거니?”
“물론 믿지 않았지. 언니가 나라면 믿었겠어?”
“당연히 안 믿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남잔데. 이제 어떻게 할 거니?”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별수 없이 내가 죽을 때까지 옆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잖아.”
“그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해?”
“내게는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일곱 번이나 남아 있어.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인정했어.”
“불사호심공은 거짓말이야. 일곱 번 아니라 칠십 번을 시도해도 너는 그를 죽일 수 없어.”
“언니, 설마 내가 그걸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난향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수명을 다하는 날까지 일곱 번째 공격을 아껴두려고?”
“응.”
“그가 그런 너를 그냥 내버려 둘지도 의문이지만… 그게 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니? 그는 네가 옆에 있다고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이거나 멈추는 남자가 아니야.”
“상관없어.”
난향이 불쑥 물었다.
“그는 네 사문을 멸절시킨 남자라는 걸 잊은 거니?”
유코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힘차게 대답했다.
“복수가 가능한 남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수십 년 동안 그의 곁을 떠나 있었어. 더는 과거에 매여서 내 감정을 부인하며 살고 싶지 않아.”
유코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다시 그를 만나고 알았어.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살아 있다는 걸 느껴. 언니, 나는 그의 옆에서 머물고 싶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옆에서 죽고 싶어…….”
난향이 탄식하며 말을 받았다.
“네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랄게.”
난향이 연이어 물었다.
“그런데 나도 네게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무앙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 누구한테 들었니?”
“관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놈한테서.”
“관원?”
“응. 잡아서 정체를 확인한 건 아닌데, 음습한 느낌이 꼭 황궁의 동창에서 온 놈 같았어.”
“동창이라… 걔들이 계속 밟히네.”
“계속?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요즘 무앙 근처에 얼씬거리는 애들 중에 그쪽으로 의심되는 놈들이 있거든.”
“잡아서 포를 떠버릴까?”
“아직은 일러. 혹시 보더라도 그냥 놔둬. 그들이 무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알았어.”
“지금 섣부르게 풀을 건드리면 뱀이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도망갈 거야.”
“내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 나는 무앙의 곁에 있을 테니까.”
“알았어. 그나저나 무앙은 누가 따라다니는 걸 굉장히 귀찮아하는데,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겠어. 호호호호.”
“언니 말처럼 무앙이 귀찮아하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마주보며 웃던 유코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두 여자 간의 짧지 않은 대화가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