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36
136 신의 말씀
수개월 전, 북천축 카일라스 산.
드드드드- 드드드드-
우우우우우우우-
기이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산 전체가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의 뒤편 계곡에 자리잡은 뇌정신궁도 지진의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뇌정신궁은 중원과는 확연히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밖과는 달리 결계 안에 자리한 이곳은 봄날처럼 따스했고, 희귀한 꽃과 나무들이 무성했다.
궁전 깊은 곳에는 루드라 신을 모신 신전이 있었다.
신단 앞에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던 타라가 일어섰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순백의 제복 위로 눈부신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찰랑였다.
“아르다반.”
“예, 궁주님.”
타라 외에 아무도 없던 신전 안에 거구의 아르다반이 바람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타라가 그에게 물었다.
“며칠째 산이 크게 울고 있는데, 궁에 피해는 없나요?”
“없습니다. 곳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궁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은 루드라 님이 펼쳐 놓으신 결계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대화를 나누며 타라와 아르다반은 신전을 나섰다.
긴 궁전의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나온 타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대 궁주님에게서 뇌정신홀을 물려받은 후로 요즘처럼 마음이 불안했던 적이 없어요.”
그녀는, 표면에 하늘을 가로지르는 푸른 번개가 생동감 넘치게 양각된 홀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이 뇌정신궁주의 신물인 뇌정신홀이었다.
불안하다는 타라와 달리 아르다반이 태평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불안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곳은 루드라 님이 보살피고 계시는 신성한 땅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아… 왜 이리 마음이 뒤숭숭한지…….”
한숨을 내쉬던 타라가 아르다반에게 물었다.
“아르다반, 낙양으로 언제 떠날 예정이죠?”
“지금 제자들이 장사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 중입니다. 각지에 흩어져 사는 제자들 중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이 있어서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도 한 달 정도 뒤에는 출발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타라가 물었다.
“그분의 소식이 들어온 게 있나요?”
“청해를 떠나 중원으로 향하신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타라의 눈이 커졌다.
“중원으로요? 오랫동안 걸음을 하지 않으셨던 곳인데, 그곳엔 왜 가신 거죠?”
“위대하신 루드라 님의 생각을 하찮은 제가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아르다반, 그분에 대해 들어오는 소식이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궁주님.”
두 사람은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같은 시각, 카일라스 산의 수천 장 아래 지하.
벽과 천장에 박혀 있는 빛이 나는 돌들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곳.
이곳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너비는 일천 장이 넘을 듯했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오십여 장에 달했다.
그리고 사방의 벽에는 크고 작은 동굴 수백 개가 벌집처럼 나 있었다.
지금 이곳의 상황은 지상과 완전히 달랐다.
드드드드드-
쩌저저저저적!
후두둑… 쿵쿵… 후두두둑… 콰콰쾅!
대지 전체가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졌고, 천장에서는 돌덩이와 조각들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그런데 갈라진 대지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시신들이 있었다.
전신이 으스러진 모습으로 피를 폭포수처럼 흘리는 참혹한 시체들.
그들 사이, 공동의 중앙에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두 여자가 마주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뱀처럼 가슴과 사타구니를 휘감아 가린 그녀들의 생김새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훤칠한 키, 눈이 내린 하얀 머리카락,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을 띤 피부, 보석을 박아 넣은 듯 검은자 없이 하얗게 빛나는 눈동자.
여인들 중 길게 갈라진 복부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오른쪽의 여인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마히샤! 제발 정신 차려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란 말이에요! 흑흑흑.”
“마야, 내가 미친 걸로 보이냐? 나의 정신은 전보다 더 맑고 명료해.”
“마히샤, 이런 짓을 벌이고도 당신이 제정신이라고요? 주변을 둘러봐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이지 않나요? 일족을 모두 죽이고, 신전까지 파괴했어요. 이게 정말 당신이 원한 결과인가요?”
“마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지상으로 향한 통로나 열어. 네게는 정말 손을 쓰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가 끝까지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너도 먼저 죽어간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될 거야.”
마야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럴 수 없어요. 신탁은 우리 일족이 지상으로 나가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건 당신도 아는 것처럼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신의 말씀이잖아요. 마히샤, 우리는 밖으로 나가려는 당신을 제지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 일족의 신은 육백 년 전 루드라의 손에 죽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빛도 없는 이곳에서 그렇게 긴 세월을 살지 않았을 거야. 마야, 이미 죽은 신의 신탁을 따를 이유가 있어?”
마야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마히샤… 어떻게 그런 불경한 말을…….”
“마지막으로 말할게. 통로를 열어.”
“죽어도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마히샤를 막을 거예요.”
마히샤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상에 나가기 전에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를 내 손으로 끝장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네.”
말과 함께 마히샤의 손바닥 장심에서 눈부신 황금빛을 발하는 높이 한 자가량의 금종이 쑤욱 솟아올랐다.
마히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너의 자발적인 협조를 바랐어. 겁화금종을 써서 너의 입을 열게 하면 넌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거부한다면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마야,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겁화금종을 보는 마야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와 마히샤는 빛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색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보는 세상은 회색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지하 생활이 일족의 신체 감각을 그런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그들 일족은 이것을 ‘마신안’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피가 배어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며 목에 걸고 있던 핏빛의 옥패를 꼭 움켜쥐었다.
마히샤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라크타비자 님이 우리 일족에게 주었다는 마신패네. 호호호호호. 마야, 순진하구나. 일개 전설 속의 신물에 불과한 그것으로 이 겁화금종에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니?”
마야의 표정은 방금 전과 달리 편안했다.
그녀가 말했다.
“마히샤… 아니, 마지막으로 언니라고 부를게. 이미 겁화금종의 끔찍한 마력은 충분히 보았어. 내가 그걸 가진 언니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마히샤는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잘 알면 비켜야 하는 거 아닐까?”
“막을 수는 없지만, 언니를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
마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마히샤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마신패에서 찬연한 붉은 빛이 흘러나오며 거대한 지하 공동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동시에,
드드드드드드드드-
두 여자의 발밑에서 엄청난 진동이 일어났다.
마히샤가 흠칫하며 고개를 숙여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
대지와 천장이 한꺼번에 뒤틀리며 갈라졌다.
눈에서 강렬한 백색의 신광을 뿌리며 마히샤가 물었다.
“마야,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마야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언니, 이제 우리의 고향은 영원히 사라질 거야. 우리 일족을 멸망시킨 언니가 세상에 나가는 걸 나는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천장에서 집채만 한 돌덩이들이 떨어지고, 땅이 꿀렁거리며 솟아올랐다.
지하 공동은 무서운 속도로 좁아졌고, 그런 만큼 빈 공간도 빠르게 사라져 갔다.
이대로라면 가운데 낀 채 목숨을 잃을 거라는 게 분명한 상황.
“죽일 년!”
욕설하며 마야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마히샤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을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다가 뚝 멈췄다.
데엥-
무시무시한 힘이 담긴 종소리가 울린 것도 그때였다.
꿀렁거리는 대지에 몸을 맡긴 채 마히샤를 멍하니 바라보던 마야의 칠공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아흑…….”
비명과 함께 그녀는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수십여 장을 뒤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마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삐죽하게 튀어나온 바위를 잡으며 상체를 세웠다.
마신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허공에 반듯하게 떠 있는 마히샤와 그녀의 복부에 자리 잡은 겁화금종이었다.
이상하게도 마히샤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더 기이한 것은 꿀렁거리며 치솟던 대지와 쏟아지던 돌덩이들의 움직임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한 것이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마야가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나려 할 때였다.
마히샤의 앞 허공에 길이가 일 장에 달하는 수직의 선 하나가 생겨나더니 빠르게 좌우로 벌어졌다.
그리고 검은 문으로 형태가 변하더니 무서운 힘으로 마히샤와 겁화금종을 빨아들였다.
마히샤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것은 씻은 듯이 모습을 감췄다.
드드드드드드-
우르르쾅쾅쾅!
멈췄던 시간이 흐르며 다시 천장이 무너지고 땅이 올라왔다.
마야는 솟아오르는 대지에 힘없이 등을 기댔다.
“아아…….”
그녀로서는 허망하게 탄식을 토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종말을 맞이하려는 순간, 마신패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붉은빛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왔다.
마야의 하얀 눈에 빛이 일어났다.
붉은 빛기둥의 궤적에 들어간 모든 것이 부서지며 길이 생겨났다.
꿀렁거리던 대지도 쏟아지던 거석들도 먼지처럼 스러졌다. 그렇게 직진한 붉은빛의 기둥이 남쪽 벽에 닿았다.
우우우우우우웅-
기이한 울음소리와 함께 벽이 좌우로 열리며 커다란 동굴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빛도 붉었다.
마야는 본능적으로 동굴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누르며 그녀는 동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휘이익-
그녀가 동굴 안으로 사라지자 절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드드드드드드드-
콰콰콰콰쾅!
지하 공동은 그렇게 사라졌다.
* * *
한 달 후.
뇌정신궁.
우르르르르-
쿠쿠쿠쿠쿵!
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멀쩡했던 궁은 절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무너진 궁의 잔해를 밟으며 가공할 기세로 날아오르는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시퍼런 뇌전을 전신에 두른 타라와 다섯 자의 신월도에서 도강을 뿜어내는 아르다반, 그리고 붉은 강기에 휩싸여 있는 여인이었다.
타라가 손을 흔들 때마다 무시무시한 뇌성과 함께 시퍼런 뇌전이 하늘을 가르며 상대에게 날아갔다.
우르르르-
뇌정신궁주에게만 비전되는 경천뇌벽장이었다.
옆에서 아르다반의 도강이 타라의 뇌전에 힘을 보탰다.
금방이라도 붉은 강기를 깨뜨리고 상대를 쓰러뜨릴 것 같은 광경.
하지만 상황은 두 사람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콰콰콰콰콰쾅!
상대의 붉은 강기와 부딪친 뇌전과 도강은 엄청난 굉음과 함께 속절없이 흩어져갈 뿐이었다.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는 건 붉은 강기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지상에 발을 디딘 세 사람은 손을 멈추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타라가 붉은 강기의 여인에게 말했다.
“소뢰음사의 마녀. 탈출은 포기해. 당신은 내 시체를 밟기 전엔 성산을 벗어날 수 없어.”
“포기하려 했다면 그곳에서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붉은 강기 속, 하얀 머리카락으로 가슴과 하체를 가린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무너지는 지하 공동에 파묻혀 죽었어야 할 마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