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37
137 적당히 싸지르고 다니란 말이야!
마야가 뇌정신궁이 막고 있는, 그들이 ‘저주 마굴’이라 부르는 동굴에서 나온 건 이틀 전이었다.
저주 마굴은 아득히 오래전 소뢰음사의 잔당들이 도주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는 동굴이었다.
마굴이 열리며 거대한 진동과 마기가 뇌정신궁을 뒤덮었고, 그것을 알아차린 타라와 아르다반이 달려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타라와 마주쳤고, 다짜고짜 공격을 시작한 마야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계속된 싸움은 벌써 삼천 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싸움의 격렬함을 말해주듯, 코와 입에서 가느다란 피가 흐르는 타라의 얼굴에는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마야에게서는 지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타라가 열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한 시진 전 그녀의 위급함을 본 아르다반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싸움은 이미 승부가 갈렸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합공하고도 그들은 마야를 궁지로 몰아넣지 못했다.
마야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혈뢰강기를 전신에 두른 마야가 타라에게 말했다.
“루드리야 일족의 후인들, 여기서 당신들의 생을 마감시켜 줄 생각이었는데, 아쉽지만 시간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그녀의 시선이 힐끗 동쪽 하늘을 훑었다.
강렬했던 기운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운과 연결된 감응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육백 년 전 지하로 들어간 소뢰음사의 제자들은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일족이 되었다.
여제자의 수가 한정된 터라 불가피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세속의 규범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마인들이 아닌가.
그러면서 신체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눈이 퇴화되며 마신안으로 진화(?)했고, 일족끼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존재를 저절로 느끼는 감응력이 생겨났다.
그 감응력 덕분에 지금 마야는 동쪽으로 멀어져 가고 있는 마히샤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루드리야 일족의 후인들, 너희의 목숨을 거두는 건 훗날로 잠시 미루도록 하겠다. 그때까지 목을 씻고 나를 기다려라.”
맑고 가녀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실린 마기와 공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부서진 기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걸음에 수십 장을 가로지르는 놀라운 경공을 펼치며 그녀는 뇌정신궁의 결계를 무인지경으로 뚫고 사라졌다.
소맷자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는 타라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아르다반, 나는 저 소뢰음사의 마녀를 추적할게요.”
놀란 아르다반이 그녀를 말렸다.
“궁주님, 그 몸으로요? 안 됩니다. 일단 몸부터 추스르시고…….”
타라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아르다반, 본 궁의 존재 목적은 루드라 님을 섬기는 것과 소뢰음사의 출현을 막는 것이에요. 마녀를 잡지 못한다면 제가 어떻게 루드라 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겠어요.”
“궁주님, 마녀는 너무 강합니다. 혼자 쫓으시다가 그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직감한 아르다반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타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중원엔 루드라 님이 계세요. 그분이라면 마녀가 탈출했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아!”
안색이 환해진 아르다반이 탄성을 토하며 말했다.
“궁주님, 그럼 먼저 루드라 님을 찾고 나서 마녀를 추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녀의 탈출을 막지 못한 벌도 받아야 하니까요.”
그의 속내를 읽은 타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아르다반은 루드라에게 고자질을 해서 그의 힘으로 마녀를 잡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루드라는 잘못한 사람에게 벌 같은 걸 내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귀찮은 걸 질색하는 그는 꼭 벌을 줘야만 하는 상황이면 차라리 목을 베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쁜 생각은 아니군요. 어차피 마녀도 동쪽으로 갔으니까요.”
“궁주님, 운이 좋으면 중원에서 루드라 님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타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초가을 무렵에 낙양의 백마사에서 기다리면 당신을 만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타라의 눈이 커졌다.
“그런 이야기… 내게 한 적이 없잖아요?”
“루드라 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왜죠?”
“그런 말을 하면 궁주님이 궁을 내팽개치고 중원으로 달려가실 거라고.”
“하아…….”
타라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르다반이 말했다.
“루드라 님이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그곳에서 그분을 뵌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중원에 걸음을 하지 않고 변방만을 떠도셨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그분을 백마사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중원에 계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요?”
“예.”
타라가 깊어진 눈으로 아르다반을 보며 말했다.
“아르다반, 빨리 중원행을 준비해 줘요.”
아르다반이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궁주님.”
* * *
현재, 낙양. 수향루 후원.
진무앙은 눈만 내놓은 타라와 함께 소혜와 소소가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귀찮은 녀석들이지.”
“호호호호호.”
타라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소소의 나이였을 때도 귀찮으셨어요?”
“아니.”
“왜요?”
“너는 내 여자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저 꼬맹이하고 같을 수가 있었겠냐.”
루드리야 일족의 제사장은 일대부터 타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를 이어 진무앙을 섬겼다(?).
그래서 제사장은 핏줄이 아니라 일족의 여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재질이 출중한 여인에게로 이어져 내려왔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죠?”
진무앙이 타라를 돌아보았다.
천에 가려져서 다른 부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타라의 눈은 밝고 환했다.
한눈에도 그녀가 무척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본래 그녀는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이렇게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뭐가 그리 좋아서 웃고 있는 거냐?”
“루드라 님이 이 낭랑과 함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좋다고? 헐… 화내야 하는 거 아니냐? 너를 안지도 못하게 했잖아.”
타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화 같은 거, 조금도 나지 않아요. 저는 정말 좋기만 한 걸요.”
“네가 이렇게 속없는 여자인 줄은 몰랐구나.”
“호호호호호.”
낮게 웃은 타라가 말을 이었다.
“설마, 모르시는 거 아니죠?”
“뭘?”
“이 낭랑과 함께 계실 때 루드라 님은 꽉 차 보인다는 것을요.”
진무앙은 눈을 껌벅였다.
“언제는 내가 비어 있기라도 했다는 거냐?”
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항상 그런 모습이셨어요”
진무앙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타라를 구박했다.
“중원에 오니까 헛소리가 하고 싶은 거지?”
“헛소리 아니고 정말인데…….”
진무앙은 대꾸하지 않았다.
타라는 뇌정신궁 안에서만 살아서 세상 물정은 잘 모르지만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통찰력이 있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녀가 보았다는 그의 모습은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던 것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소소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숙부님.”
“왜?”
“강 작은 숙부님하고 서역 상인 아저씨는 그냥 두실 거예요?”
진무앙이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응? 걔들이 뭘 어쨌기에?”
소소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별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숙부님 방에서 싸우고 있는데, 모르셨어요?”
놀란 진무앙이 벌떡 일어났다.
“내 방에서 싸운다고?”
“예.”
“이것들이 미쳤나! 자기들 방 놔두고 왜 내 방에서 쌈질을 해!”
버럭 소리를 지른 진무앙이 별채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는 연백지나 사마휘에게 쫓기는 경우처럼 생사가(?) 달린 일이 아니면 수향루 내에서 무공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달렸다, 평범한 사람처럼.
와다다다다다-
금방 방문 앞에 도착한 진무앙이 벌컥 문을 열었을 때였다.
콰콰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부서진 나뭇조각과 천장에서 쏟아진 뿌연 먼지로 뒤덮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진무앙은 어이가 없어 입만 떡 벌렸다.
강석초와 아르다반은 손을 맞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박살이 난 탁자가 파편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고.
두 사람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목과 드러난 팔뚝엔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들은 탁자를 부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채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 개자식들이!”
진무앙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기절초풍할 듯 놀란 강석초와 아르다반이 손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진무앙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내가 싸우지 말랬지!”
강석초가 입을 뿌루퉁하게 내밀며 마주 소리쳤다.
“우리가 언제 싸웠어? 싸우면 사지를 꺾어놓겠다고 해서 팔씨름을 한 거잖아.”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앙, 이건 저 떡대가 내 버르장머리 고칠 거라는 둥 헛소리를 해서 시작된 거야. 그러니까 내가 먼저 하자고 한 게 아니라구.”
“먼저 시작한 게 누구든, 힘자랑할 거면 너희 방에서 하지, 왜 내 방에서 하냔 말이야!”
진무앙의 눈치를 슬슬 보며 아르다반이 말했다.
“루드라 님, 저 땅딸보가 여기서 하자고 한 겁니다.”
진무앙의 시선이 강석초를 향했다.
그것을 슬쩍 피한 강석초가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서 해? 내 방을 부술 수는 없잖아.”
진무앙이 암월도를 도갑째 들어올렸다.
“이 넓은 수향루에서 팔씨름할 장소가 없어서 여기서 했을까. 네 시커먼 속이 훤하게 보인다, 새끼야!”
진무앙이 암월도를 몽둥이처럼 휘둘러 강석초의 머리를 후려쳤다.
부앙부앙부앙-
질색한 강석초가 정신없이 피하다가 침대 기둥에 부딪쳐 바닥에 넘어졌다.
이 기회를 놓칠 진무앙이 아니다.
퍽퍽퍽!
진무앙은 암월도로 강석초의 둥글둥글한 몸뚱이를 북치듯 두들기며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내 속 뒤집어놓으려고 작정한 거 맞지!”
강석초는 머리를 싸안고 바닥을 뒹궁뒹굴 구르며 악을 썼다.
“악악악! 인간아! 그러게 좀 적당히 싸지르고 다니란 말이야! 오만 데 여자를 만들며 다니더니 천축의 여사제까지 난향이 있는 곳을 찾아오면 어쩌냐고! 내가 그 꼴을 보고 열이 안 받게 됐냔 말이야!”
뚝!
진무앙이 암월도를 멈췄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바닥에 누운 강석초를 툭툭 걷어찼다.
“일어나, 새끼야.”
“더 안 때릴 거지?”
“안 때려.”
“일어났는데 때리면 인간도 아니야.”
“안 일어나면 다시 팬다.”
벌떡.
강석초가 일어났다.
진무앙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둘 다 꺼져.”
진무앙의 심사가 뒤틀렸다는 것을 직감한 강석초와 아르다반은 얌전히 방을 나갔다.
진무앙은 창가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으음, 요새 내 정신력이 너무 약해진 것 같아. 인간들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려서야… 이건 문제가 있어. 아무래도 좀 더 수양해서 철벽 정신을 회복해야…….”
구시렁거리던 진무앙의 눈이 반짝였다.
창밖 너머, 일로객잔 이층 난간에 묶여 있는 흰 손수건이 들어왔다.
석채은이 만나자는 신호였다.
“마녀를 찾은 건가?”
진무앙은 즉시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