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43
143 바가지는 사양합니다
섬서성 서안의 장원이 밀집된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구석진 곳에 혈왕 우문뢰가 중원에 들어올 때마다 은신처로 사용하는 작은 장원이 있었다.
장원의 지하 석실.
여러 개의 야명주로 밝혀진 중앙의 포단 위에 우문백령이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일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우문뢰의 눈빛은 복잡했다.
눈을 꼭 감은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떠는 우문백령에게서는 옷과 포단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많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백령이 대체 무엇을 보고 있기에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는 건가…….’
그가 우문백령을 안고 지하로 내려온 건 일각 전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뒤틀며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만겁수라환의 환우지약을 얻은 후 가끔 이런 증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마다 천안통의 신력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들을 보았다.
그것을 잘 아는 터라 우문뢰는 그녀를 안고 급히 이 지하 석실로 내려왔다.
그의 마음에 커다란 갈등이 일어났다.
‘백령이 만겁수라환까지 얻어 일체화를 이룬다면, 낭인혈막을 천하제일의 세력으로 키워 천하삼정을 내려다보겠다는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열쇠인 백령이 저리 힘들어하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마음이 편치 않구나…….’
그는 혈왕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잔혹한 심성의 남자지만 딸인 우문백령만큼은 목숨처럼 사랑했다.
‘후우… 백령아, 미안하다. 네 고생을 알지만 환우지약을 모두 모은 지금 만겁수라환을 포기할 수가 없구나. 최대한 빨리 그것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그래야 저 아이의 고생도 끝이 날 텐데.’
속으로 탄식하던 그의 눈이 확 커졌다.
우문백령의 몸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우문뢰가 다급하게 우문백령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게 무슨……?”
우문백령은 무공을 익히고 있기는 했지만 그 수준은 갓 일류에 발을 디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운공이나 명상 중에 부공삼매의 현상이 일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부공삼매는 무공이 신화경에 이르러야 가능한 현상이니까.
가부좌를 튼 채 일 장이나 허공에 떠오른 우문백령의 몸이 쭉 펴졌다.
그리고 전신이 물에서 막 꺼낸 물고기처럼 진동했다.
그 진동이 얼마나 격렬한지 그녀의 땀에 젖은 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출렁거렸고,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펄럭였다.
진동은 일 다향이 넘게 지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멈췄다.
동시에 아래를 받쳐 주던 무엇인가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우문백령의 몸이 확 추락했다.
덥썩.
바로 밑에서 기다리던 우문뢰가 우문백령을 조심스럽게 받아 안았다.
품 안의 우문백령의 얼굴을 본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눈에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고 흰자위만 남아 있었다.
은은한 붉은빛이 어린 하얀 눈동자.
혈백안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사이하면서도 불길했다.
그때 우문백령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버지, 내려주세요. 어서 가야 해요…….”
“백령아, 이 상태로 어딜 간다는 말이냐.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다.”
우문백령은 우문뢰의 말을 무시하고 몸부림을 치며 더듬더듬 말했다.
“겁… 화금종… 가야 해요…….”
대경실색한 우문뢰의 안색이 확 변했다.
“겁화금종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그의 질문에 대한 우문백령의 대답은 점점 더 더듬거리는 한마디였다.
“겁… 화… 금… 종……. 겁… 화… 금… 종…….”
우문뢰는 이를 악물었다.
겁화금종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차치하고, 우문백령이 이런 상태인 이상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백령아,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항산…….”
항산은 산서성과 하북성에 걸쳐 있는 대산으로 서안에서 그곳까지는 삼천 리나 떨어져 있었다.
우문뢰는 경공을 펼쳤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면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가야 했다.
평생을 낭인용병으로 살아온 그에게 이건 당연한 결정이었다.
* * *
제국 수도 황성.
대전의 옥좌에 앉은 신무제는 대로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직도 어마마마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모른다니, 도 태감은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하였다는 말이냐!”
대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
오체투지하고 있던 오십대의 태감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수염 한 올 보이지 않는 흰 얼굴의 그는 동창을 책임지고 있는 제독동창 도연근이었다.
그가 목놓아 울부짖었다.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신무제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도 태감이 한 그 말, 진심이라면 짐이 그 소원을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폐… 폐하… 신은… 신은…….”
“마음에 없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어마마마께서 여행을 좋아하시긴 하지만, 세상을 잘 아는 분은 아니시다. 그런데도 천하의 동정을 모두 알고 있다는 동창이 아직 그분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태귀 비마마께옵서 변복을 하고 움직이시는 터라…….”
“도 태감!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신무제가 호통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변복을 하고 계시더라도 그분의 미모를 완전히 숨기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도 태감도 알지 않느냐!”
도연근이 이마를 바닥에 대며 말을 받았다.
“폐하, 소인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태귀비 마마께옵서는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을 잘 아는 분처럼 움직이고 계시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마마마가 그런 기법을 대체 언제 어디서 배우셨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도연근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사실을 말해도 신무제가 믿지 않으니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기는 했다.
“폐하,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태귀비 마마로 의심되는 분이 하남성 북부의 복양현 부근에서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있사옵니다. 당두와 번역들이 그곳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남성? 그분이 왜 그곳을 가신단 말이냐?”
말을 하던 신무제가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도 태감은 나가보라.”
“예, 폐하.”
도연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뒷걸음질로 대전을 나갔다.
신무제가 나직하게 누군가를 불렀다.
“문상, 게 있는가?”
“예, 폐하.”
청수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색 유삼을 입은 중년인이 나타나 신무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방금 도 태감이 하는 말을 들었나?”
“예.”
“무련의 운중비각에서도 태귀비 마마의 행방을 찾지 못했는가?”
문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폐하.”
신무제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어마마마께서 동창은 물론이고, 운중비각의 눈까지 피해 움직이실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중얼거리던 그가 문상에게 말했다.
“낙양의 영원 공주 주변을 감시하라. 도 태감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하남성에 연고가 없는 그분이 그곳에 갈 이유는 공주를 만나는 것뿐이니.”
“존명.”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한 문상이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신무제의 다음 말은 들려오지 않고 대신 그를 짓누를 정도로 막강한 기세가 대전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신무제를 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꿀꺽.
신무제는 가공할 신광을 뿌리며 대전의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 기운은… 겁화금종인가…….”
그가 문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문상, 즉시 무상을 부르도록 하라.”
“존명.”
얼마 후, 부름을 받고 비밀통로를 통해 황궁의 대전으로 들어갔던 무상은 몇 배는 빠른 속도로 그곳을 떠났다.
그의 목적지는 항산이었다.
* * *
석양이 진 직후 소림사의 산문 앞에 눈 아래를 면사로 가린 여인과 죽립을 쓴 장신의 남자, 그리고 중년의 무인이 도착했다.
태실산을 내려온 진무앙 일행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일행은 어렵지 않게 경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건 순전히 일엽 대사의 속가제자인 주신언 덕분이었다.
손님을 맞는 지객당의 금일 당직인 자현은 그의 사제뻘이었고, 친분이 두터웠다.
참고로, 간혹 소림사에서 여인을 경내로 들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진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생거짓말이다.
고래로 어떤 종교든 돈을 가장 많이 쾌척하는 후원자의 태반은 여자였다.
그러니 여신도의 출입을 금지하는 종파는 볼 것도 없이 초고속으로 망한다.
소림사라고 예외겠나.
지객당의 접객실로 일행을 안내한 자현이 주신언에게 물었다.
“주 사형, 그런데 무슨 일로 올라오신 겁니까?”
주신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볼일이 있어 올라온 게 아니다.”
“예? 그럼?”
“본사에 볼일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진무앙 소협이다.”
자현이 진무앙을 돌아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묻기 전에 진무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엽 대사에게 진무앙이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자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일엽 사숙님께 말입니까?”
“예.”
“진 소협의 도착을 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무슨 일로 그분을 찾으시는지요?”
“대사께 내가 왔다고 하면 말씀이 있으실 겁니다.”
자현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만 이야기하시면 사숙께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소림의 법도와 규율은 대단히 엄했다.
아무리 주신언과 함께 온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방문 목적도 모른 채 소림의 장로이자 방장의 사제인 일엽에게 고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신언이 끼어들었다.
“사제, 이 친구는 원래 굉장히 까탈스러운 성격이라 더 말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네. 그러니 사부님께는 나와 함께 가세. 내가 말씀드리겠네.”
자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형,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주신언이 자현과 함께 접객실을 나섰다.
진무앙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으으으으… 시원하다.”
석채은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여러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서 그렇게 태평하게 하품이 나와요?”
진무앙이 심드렁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바가지는 사양합니다.”
“바… 바가지라니요!”
“지금 바가지 긁었잖아요.”
“내가 언제요!”
“지금요.”
“이 남자가 정말!”
“펄쩍 뛰는 거 보니까 바가지 맞구만, 뭘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그럽니까.”
“우길 걸 우겨요. 내가 왜 당신을 바가지 긁느냔 말이에요!”
“석 목주 마음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내가 그 이유를 어떻게 압니까?”
석채은의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아으아으…….”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접객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엔 일엽 대사와 오 척 단구의 비쩍 마른 노승이 서 있었다.
그들의 뒤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고 있는 주신언과 자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