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47
147 진짜 소박한 남자
여명이 밝아오는 시각.
봉마진을 벗어난 진무앙의 앞에 환상처럼 유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겉옷은 어디 갔어? 싸우면서 잃은 거야? 마두가 그렇게 강한 놈이었어?”
“하나씩 물어. 그렇게 질문을 쏟아부으면 정신 사나워.”
“말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그런데 장포는 어쨌어?”
“아까 네가 한 질문에 답이 있어.”
“싸우다 찢어졌다고?”
“응.”
유코에게 냉사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을 하면 칼부터 날아올 게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와 인연이 얽힌 시기가 달라서 냉사하와 유코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였다.
“킁킁킁.”
갑자기 유코가 진무앙의 가슴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냄새? 뭔 냄새?”
“왜 드잡이질을 한 당신 몸에서 피냄새가 아니라 여자 냄새가 나는 거 같지?”
움찔한 진무앙이 슬그머니 상체를 뒤로 젖히며 짜증을 냈다.
“여자 냄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헛소리는. 목숨을 걸고 희대의 대마두를 없애느라 개고생하고 돌아온 남자한테 그게 할 말이냐?”
“아닌데… 이거 분명 여자 냄새인 거 같은데…….”
“네 코가 어디 고장이 났나 보다. 돌아가면 소금물로 콧속부터 씻어.”
아무 말이나 막 던진 진무앙은 경공을 펼쳤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다.
소림사 방장실.
이곳엔 진무앙과 일우 선사, 일엽 대사, 그리고 주신언과 석채은까지 모여 있었다.
진무앙이 모은 건 아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는데도 다른 네 사람이 모두 모여 있는 상태였다.
일우 선사는 지객당 담당자인 자현으로부터 석채은과 주신언이 진무앙의 행방을 걱정하며 날을 새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방장실로 불렀는데, 그때 진무앙이 도착한 것이다.
일우 선사가 맑고 깊은 눈으로 진무앙을 보며 물었다.
“아미타불, 진 시주,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순리대로 다 해결되었습니다. 앞으로 그곳에 대해 신경쓸 일은 없을 겁니다.”
“아미타불… 선재… 선…….”
선재 소리를 연발하던 일우 선사가 진무앙이 째려보는 걸 느끼고는 말끝을 흐렸다.
진무앙이 일우 선사에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방장 스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세이경청하겠습니다.”
일우 선사의 말에 주신언과 석채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방금 일우 선사가 한 말은 소림 방장이 무림의 말학후배에게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었다.
상궤를 벗어날 정도로 공손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당분간 외부 활동은 자제하고 전력을 다해 제자들의 무공 증진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일우 선사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외부 활동 자제라니, 산문을… 닫으란 말씀이십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그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대경실색했다.
산문을 닫으란 말은 봉문하라는 뜻이었다.
작은 문파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말이 ‘봉문’이었다.
그런데 천하 무림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소림사가 봉문을 한다면 무림에 던지는 충격파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봉문이 아니라 그에 준하는 조치라도 마찬가지의 여파를 미칠 터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나.
일우 선사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언제가 될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천하에 대겁난이 일어날 겁니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소림사도 위험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대겁난… 이라고요?”
“예.”
“구체적으로 어떤…….”
“저도 지금은 감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혼돈시대에 버금가거나 그보다 더할 수도 있다는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허어… 대혼돈시대…….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일우 선사와 일엽 대사가 연신 불호를 외웠다.
하지만 주신언과 석채은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무리 신비로운 구석이 많은 진무앙이긴 하지만, 그의 한마디에 소림의 방장씩이나 되는 거물이 의심 하나 없이 그 말을 믿는 기색이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우 선사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대겁난의 주체가 누구인지 짐작가시는 자라도 있는지요?”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어렴풋이 감만 잡은 상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누가 어떤 방법으로 겁난을 일으킬지는 모릅니다.”
“흐음… 진 시주께서는 당분간이라 하셨는데, 봉문 기간이 얼마나 될는지요?”
진무앙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길면 길수록 좋습니다.”
딴짓하지 말고 산문 안에서 무공 수련에나 매진하고 있으라는 강력한 뜻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구파일방의 수뇌부 중에 방장 스님과 뜻이 맞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서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게 좋을 겁니다.”
“흠…….”
“의문을 품는 자들이 많겠지만, 어차피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산문을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림맹이 천하의 질서를 주도하는 상황이라 구파가 외부 활동을 끊어도 무림에 힘의 공백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완전 봉문이 아니라서 큰 일이 있을 때는 힘을 쓸 수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진 시주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지요.”
기절초풍할 지경으로 놀란 주신언이 비명처럼 일우 선사를 불렀다.
“장문 사백!”
일우 선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미타불, 주 사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닐세.”
“하지만 봉문에 준하는 조치라니요. 그건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지…….”
그의 말을 일엽 대사의 노한 일갈이 끊었다.
“이놈! 귀가 먹었느냐! 장문 사형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일 년 열두 달 감정변화가 거의 없는 사부가 백미까지 치켜세우며 노성을 지르자 팍 주눅이 든 주신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진무앙이 일어났다.
따라 일어선 일우 선사가 그윽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진 시주의 뜻과 달리 소림과의 인연은 아직 다하지 않은 듯합니다.”
진무앙은 입맛을 다실 뿐 말을 하지는 않았다.
봉마곡을 다녀온 후 그도 느끼고 있는 걸 일우 선사가 콕 집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예상한 대겁난의 시대가 온다면 소림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방장 스님의 희망사항이겠죠.”
그 말을 남기고 진무앙은 석채은, 주신언과 함께 소림사를 떠났다.
숭산을 내려온 진무앙 일행은 해가 질 무렵 낙양에 도착했다.
진무앙은 바로 수향루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대로 헤어지는 건 너무 아쉽다는 주신언의 고집 덕분에(?) 일로객잔을 찾았다.
이층 창가에 앉은 그들의 식탁에 술과 안주가 나왔다.
소림사에서 술은 냄새도 맡지 못하고 음식이라고는 풀떼기만 먹은 터라 다들 허겁지겁 술과 안주를 비웠다.
어느 정도 배가 찼을 때 주신언이 진무앙에게 물었다.
“진 호위, 이제 이야기 좀 해주면 안 되겠나?”
창밖으로 수향루를 보고 있던 진무앙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되물었다.
“뭘 말입니까?”
“오면서 계속 물어봤는데도 그렇게 시치미 뗄 건가?”
“대겁난 말입니까?”
“그것하고 방장 사백과 어떤 관계인지 정말 궁금하네.”
“방장 스님과는 초면이고, 대겁난은 천하제일 소림사에 간 기분에 소설 한번 써본 거라니까요.”
그의 심드렁한 대답에 주신언은 물론이고 석채은까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이해를 하든 믿어주든 할 게 아니겠는가.
소설 같은 이야기를 소림 방장이 철썩같이 믿었다니 삼척동자도 코웃음을 칠 소리였다.
주신언이 울적한 기색으로 말했다.
“상부에 보고는 해야겠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 평생 이렇게 난감한 경우는 처음일세.”
“들은 대로 보고하면 됩니다. 질책받을 일도 없을 거고, 뒷일은 독고 총군사가 알아서 할 겁니다.”
말투가 묘했다.
주신언과 석채은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석채은이 물었다.
“진 호위, 당신… 독고운진 총군사와 서로 아는 사이예요?”
“내가 그런 거물을 알고 지낼 리가 없잖습니까?”
“말투를 들으면 전혀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요?”
주신언이 끼어들었다.
“총군사님이 알아서 할 거라는 그 말, 믿어도 되는가?”
“예. 내 말대로 되지 않으면 그때는 내게 말하세요. 사후봉사 차원에서 총군사와 독대를 한번 하죠.”
“그렇게까지 말하니 믿어보겠네.”
주신언이 일어나며 말을 이었네.
“이번 건은 사안의 성격상 내가 직접 무한의 무림맹 총타에 가서 보고를 해야 할 것 같네. 돌아와서 보세.”
“아직도 날 모릅니까? 돌아와도 될 수 있으면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남자에 대한 자네의 인식을 내가 반드시 바꾸어 놓고야 말겠네.”
“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꽤 많았지만 성공한 놈은 한 명도 없었죠.”
주신언이 떠났다.
“석 목주는 안 갑니까? 사부가 도착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가야죠. 가기 전에 질문 하나만 하고요.”
“그냥 가는 걸 적극 추천하겠습니다.”
“대단한 질문 아니니까 그렇게 미리 초칠 필요 없어요.”
“질문이라는 게 뭡니까?”
“당신, 왜 사람들에게 존대를 그렇게 많이 해요?”
진짜 뜬금없을 정도로 하찮은(?) 질문이라 진무앙이 눈을 껌벅였다.
“그게 질문입니까?”
“예. 당신의 능력이라면 천하에 존대를 할 사람이 몇 없을 것 같은데, 나와 주 대협 같은 사람에게도 말을 놓지 않잖아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과 하대를 당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요.”
“질문 진짜 허접하네요.”
“인정해요. 하지만 정말 궁금하고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내가 남에게 존경받고 숭앙받는 시절을 보낸 적이 없을 것 같아요?”
“있었어요?”
“아주 긴 세월을 그렇게 보낸 적도 있습니다.”
진무앙의 허풍(?)이야 하루이틀 된 것도 아니라서 석채은은 한 귀로 흘리며 물었다.
“그런데요?”
“그래 봤자 남는 건 세상에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인간은 한 명도 없구나, 하는 쓸데없는 자각뿐이었죠.”
“예?”
“아, 하나 더 있습니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 하나 없는 못난 놈이라는 자각도 더해지더군요.”
“예?”
진무앙은 ‘그걸 대답이라고 하는 거야’라는 듯한 표정의 석채은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매일 구박을 당하더라도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로 족하지 않겠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너무 억울하지만 진무앙은 진짜 소박한(?)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