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57
157 손에 자비를…
진무앙의 중얼거림을 들은 남궁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진 대가, 저 빛기둥이 혼돈성흔이라는 것입니까?”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의 진무앙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성흔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놀라십니까?”
“지옥의 문을 여는 힘이다, 그 개새끼가 날 불러들였던…….”
무심코 대답을 하던 진무앙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남궁경이 멍해졌다.
유코와 유가흔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었지만, 진무앙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맥락도 없이 지옥의 문을 여는 힘에다, 개새끼라니.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해도 그걸 무슨 수로 알아듣는단 말인가.
진무앙의 눈빛이 강해지며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동시에 못이 하나 빠진 한량처럼 헐렁하던 지금까지의 분위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강철처럼 단단하고 잘 벼린 칼날 같은 예리한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는 유코와 유가흔은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유가흔이 그에게 물었다.
“저것… 당신을 진지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거야?”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내려가라.”
“응?”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유코와 유가흔이 물었다.
“우리도?”
“예외는 없어. 너희도 돌아가.”
유코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당신, 저 안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가흔은 몰라도 나는 안 가. 아니, 못 가. 당신이 죽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내려가.”
유가흔도 끼어들었다.
“나도 못 가. 평생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포기했던, 당신이 쓰러지는 모습을 드디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려가겠어.”
진무앙은 유코와 유가흔을 번갈아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코, 가흔. 나는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다.”
“흥, 우리도 농담 아냐.”
남궁경과 황보평을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에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들은 진무앙과 두 여자를 최소한 친구나 연인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게 아니라, 원수지간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다.
두 여자는 진무앙의 죽음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때 당설이 진무앙에게 표독한 표정으로 악을 쓰듯 소리쳤다.
“당신, 혼자서 보물을 독차지하려는 거지!”
그걸 들은 황보평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당설이 받은 심적 타격이 상당히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리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진무앙의 무심한 눈길이 당설을 향했다.
아랫배까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당설이 떨리는 손을 꼭 말아쥐며 진무앙을 마주 노려보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여자였다.
사천의 패자라 할 수 있는 사천당가주의 딸이었고, 용모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머리도 똑똑했다.
거기에 무공에 대한 자질도 뛰어났다.
그런 그녀가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속으로 귀싸대기를 얻어맞고 볼썽사납게 객잔 바닥을 여러 차례 뒹굴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자신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을 본 적조차 없는 그녀로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마음엔 진무앙을 향한 증오심이 무럭무럭 자라났고, 그것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서라도 제정신을 유지했어야 했다.
진무앙은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 헤아려 주는,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성격과는 하늘과 땅처럼 거리가 먼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삼 장가량 떨어져 있는 당설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쑤와아앙-
당설이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진무앙에게 날아갔다.
허공에 뜬 채 사색이 되어 발버둥 치는 그녀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어린아이라도 그녀가 자의로 진무앙에게 몸을 날린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상황.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란 황보평이 진무앙과 당설의 사이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대협, 손에 자비를…….”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남궁경에 의해 간단하게 차단당했다.
그의 앞을 막아선 남궁경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황보 아우, 진 대가의 행사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네.”
“하지만…….”
그 순간, 진무앙은 당설의 목을 와락 틀어쥐었다.
“커컥… 꺄악!”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진무앙을 보는 당설의 입술 사이로 답답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진무앙이 그녀에게 말했다.
“당설, 네 아비 당조동과의 인연 때문에 봐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 한번 주제넘은 소리를 한다면 목을 꺾어주마. 잊지 마라.”
말을 마친 그가 인정사정없이 당설을 황보평의 앞에 패대기쳤다.
콰당탕!
“아악!”
황보평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바닥을 구른 당설을 안았다. 그리고 진무앙에게 말했다.
“대협, 손에 사정을 두셔서 감사합니다.”
조카가 당했는데도 그는 오히려 진무앙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진무앙은 삼 장이 떨어져 있는 당설을 허공섭물로 장난처럼 끌어당긴 절세고수였다.
분노는 눈곱만치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당설을 살려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당설이 잘못하기도 했지만 진무앙은 황보세가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고수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절세고수와 척을 지는 건 가문을 멸문으로 이끌 수 있는 행위였다.
진무앙은 황보평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가하게 굴기에는 빛기둥의 변화가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빛이 시작된 회색의 안개로 시선을 돌린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런…….”
그를 따라 안개로 시선을 돌렸던 사람들의 입에서 놀란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앗!”
“이게 어찌 된?”
“헉!”
어느새 십왕봉에서 치솟던 빛기둥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늪처럼 일렁이는 진한 회색 안개의 중심에서 빛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위치가 변한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도 변해 있었다.
“저곳으로 가야 한다!”
“저기다!”
“놔, 이 새끼야!”
“잡지 마!”
“뒤처지지 마라!”
“내가 먼저야!”
십왕봉의 여기저기서 공력이 실린 거친 일갈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안개 지대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무앙이 중얼거렸다.
“죽적(대나무 피리) 소리에 끌려서 죽을 줄 모르고 달려가는 쥐떼 같군.”
횃불과 야명주, 화섭자의 무리가 온갖 소리와 함께 해일처럼 밀려드는 것을 보며 남궁경이 진무앙에게 말했다.
“진 대가, 하산하기엔 늦은 것 같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진무앙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올라왔던 길은 달려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무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길이 막힌 것이다.
“진 대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 생각엔 아무래도 저 숲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있다가는 아이들이 사람들의 무리에 밀려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 모릅니다.”
일행이 서 있는 곳은 안개 지대의 입구였다.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올라온 좁은 외길 하나뿐이었다.
그들의 뒤는 밑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무질서하게 달려오는 저 많은 사람의 물결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진무앙 일행과 남궁경, 황보평이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무공이 약한 남궁진 등은 위험에 빠질지도 몰랐다.
통제되지 않는 혼란스런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진무앙이 황보평에게 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 위험해도 이곳에 있겠나, 아니면 우리와 함께 저곳으로 들어가겠나?”
황보평이 용봉회의 젊은이들을 돌아보았다.
황보문을 비롯한 남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평이 진무앙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함께 가겠습니다.”
“보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버리는 게 좋다. 저 안으로 들어가서 후회하면 그때는 늦는다.”
“우리의 선택입니다. 결과도 책임질 것이고 대협을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진무앙은 더 이상 황보평에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들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지금 황보평 일행은 잠시 후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선택의 결과가 어떤 것일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무앙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해둘 게 있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너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억해라. 살고 싶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된다는 걸.”
그의 시선이 유코와 유가흔을 향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 너희가 고집부리지 말고 하산했으면 좋겠다.”
유코가 눈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당신 옆에 있으면 죽지 않을 거라며? 그럼 된 거 아냐?”
유가흔도 거들었다.
“당신이 죽는 것도 봐야겠고,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진지하게 만들었는지도 알고 싶어.”
“너도 직업병이 있었네. 석 목주의 호기심이 왜 그렇게 강한가 궁금했는데, 스승한테 물려받은 거였어.”
“칭찬이지, 무앙?”
진무앙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칭찬이겠냐?”
그사이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거리는 불과 십여 장.
진무앙이 말했다.
“따라와. 들어간다.”
그가 숲의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딛자 나머지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 뒤로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먼저 들어가는 놈들이 있다!”
“저놈들 누구야?”
“안 돼!”
“서둘러!”
휘휘휘휙-
앞다투어 도착한 사람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 중에는 운신이 형편없는 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놀라운 경공을 사용하는 자도 드물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는 하수와 기연을 확신하는 고수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회색의 안개 지대 내부.
진무앙 일행은 둘레가 한아름을 넘고 높이는 십여 장이나 되는 고목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은 곧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방금 전까지 뒤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숲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본 유코가 진무앙에게 말했다.
“분명히 따라 들어왔을 텐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이것도 진세의 영향이겠지?”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건 단순한 진이 아니야. 지형지물을 이용한 진세와 혼돈성흔의 힘을 빌린 결계가 얽혀 만들어진 거다.”
유코의 눈이 반짝였다.
진무앙의 입에서 또 혼돈성흔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진무앙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함부로 움직이지도 마라. 내 뒤만 따라와.”
진무앙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안개가 그를 반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길이 났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것을 본 진무앙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설마 혼돈성흔이 나를 기억한다는 건가……. 내 생각이 맞다면 여기에 그 개새끼의 손길이 닿았다는 말인데…….’
그가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을 때 뒷줄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황보문의 뒤를 따라 걷던 용봉회의 청년 후기지수 중 한 명인 제갈성이 고개를 돌렸다.
푸른 보석처럼 빛나는 날개를 가진 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그의 어깨에 내려앉고 있었다.
나비의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날갯짓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강렬한 소유욕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디를 걷고 있는지 잊고 나비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그의 손이 나비의 날개에 닿은 바로 그때,
슈와악!
무시무시한 살기가 일어나며 칠흑처럼 검은 한 줄기의 도기가 벼락처럼 제갈성을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양단했다.
놀란 듯 나비가 세찬 날갯짓을 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은 제갈성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엄청난 피분수가 솟아났다.
“헉!”
“악!”
“아악!”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린 용봉회의 남녀들이 비명과 신음을 토하며 진무앙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무앙은 천천히 암월도를 거두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그가 암월도를 뽑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