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64
164 절대 그 사실을 잊지 마
두 번째 마수가 모습을 드러낸 건 진무앙 일행이 일백여 장을 더 전진했을 때였다.
첫 번째에 버금가는 공터, 뒤쪽의 동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마수.
사람들은 멍한 얼굴로 마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가루라?”
“불새?”
“불사조?”
붉게 타오르는 불을 전신에 두른 거대한 마수는 천축의 신화에 나오는 신수 가루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문에 대답하듯 진무앙이 말했다.
“저건 가루라와는 상관없는 놈이야. 소화룡(小火龍)이라는 마수일 뿐.”
유코와 유가흔은 진무앙의 말투가 식인 괴마를 보았을 때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목소리에 이전보다 더 많은 짜증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코가 물었다.
“무앙, 식인 괴마보다 위험한 마수야?”
“마수마다 장단이 있어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워.”
“그런데 왜 당신이 아까보다 더 짜증이 난 것처럼 느껴지지?”
“훗, 예민하기는.”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화룡은 식인 괴마와는 기질과 속성이 완전히 다른 놈이야.”
“어떻게?”
“오늘은 혼자였지만 원래 식인 괴마는 자신과 같은 놈들과 무리를 지어 다녀. 하지만 저놈은…….”
진무앙의 시선이 소화룡을 향했다.
소화룡은 홍옥처럼 빛나는 붉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눈길에서 오만함과 비웃음이 느껴졌다.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저놈은 늘 혼자 다녀. 하지만 아주 드물게 다른 놈들과 무리를 이룰 때가 있어. 그때는 상대하기가 꽤 귀찮아. 지금은 혼자라서 덜 귀찮지만.”
“그게 기질의 차이야?”
“응.”
“그럼 속성이 다르다는 건 무슨 말이야?”
“저 자식을 포함한 다섯 놈은 이 세계에서 말하는 오행과 비슷한 속성을 갖고 있어. 그래서 오행마라고 부르는데, 그중에서도 저놈은 불의 속성을 가졌어.”
“저 마수가 불이라면… 물, 나무, 쇠, 흙의 속성을 가진 마수가 있다는 말이야?”
“맞아. 혼자 나선 걸 보면 다른 놈들과 함께 여기로 넘어온 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뭐, 다 같이 넘어왔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진무앙은 암월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놈이 몸에 두른 불길이 날아올 수도 있어, 입에서 뿜을 수도 있고. 그때는 무조건 피해. 불이 몸에 닿으면 그게 옷이든 살이든 번지기 전에 그 부위를 잘라내고. 그 불은 대상이 재가 될 때까지 꺼지지 않아. 끌 방법도 없어. 절단하는 것 외엔 피할 길이 없다고.”
그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진무앙과 소화룡의 싸움은 일각 동안 계속되었다.
소화룡이 뿜어내는 화염은 쇠를 촛농처럼 녹일 정도로 강력했고, 몸뚱이는 암월도강이 뚫지 못할 정도로 단단했다.
그렇지만 소화룡이 진무앙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걸렸을 뿐, 싸움은 진무앙의 승리로 끝이 났다.
사방이 검게 불탄 공터의 한복판에서 진무앙은 소화룡의 미간에서 뽑아낸 생마석을 들고 서 있었다.
식인 괴마처럼 소화룡은 생마석만을 남긴 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유가흔이 그에게 다가서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 괜찮은 거야?”
“당연히 괜찮지. 나, 진무앙이야. 흐흐흐.”
진무앙은 낮게 웃으며 생마석을 품에 넣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의 겉모습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군데군데 불에 타 넝마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몸은 단 한 곳도 그을린 구석이 없었다.
사람들은 우물에 들어서기 전 진무앙이 했던 말의 의미를 완전히 깨달은 상태였다.
그는 말했었다.
마수들은 무서운 존재지만 회색 안개 지대의 괴물들보다는 상대하기 수월할 거라고.
그의 말이 옳았다.
마수들은 천외천의 능력이 있었지만 개체수가 하나뿐이어서 진무앙 혼자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걸 피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편하게 구경만 했던 건 아니었다.
식인 괴마 때는 암기처럼 날아오는 돌조각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다.
소화룡 때는 불이 붙은 옷이나 신체 일부를 잘라내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 피칠갑을 한 거지꼴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신들의 진정한 시련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진무앙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백여 장 앞, 환한 빛에 휩싸인 동굴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유코가 그에게 물었다.
“무앙, 왜 그래?”
진무앙은 손가락으로 유코의 입술을 눌렀다.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잠시 후.
진무앙이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욕을 했다.
“빌어먹을, 어쩐지 너무 쉽다 했다…….”
그가 유코와 유가흔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내가 오행마라고 부르는 다섯 마리의 마수가 몰려다닐 때가 있다고 했던 거 기억해?”
“응.”
“물론.”
“저 앞에 나머지 네 마리가 모여 있는 거 같다.”
“뭐?”
“정말?”
두 여자는 물론이고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소화룡과 같은 마수 넷이 모여 있다니.
이런 악몽이 따로 없었다.
진무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넷이면 내가 둘을 없앨 때까지 너희가 하나씩 맡아야 해.”
유코와 유가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들은 초절정고수였지만, 식인 괴마와 소화룡 정도의 능력을 가진 마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했다.
절세의 신병인 암월도를 가진 진무앙조차 마수 하나를 쓰러뜨리는데 일각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남궁경 등이 더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기대는 터럭만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버거울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진무앙이 풀썩 웃으며 두 여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누가 너희에게 무공을 가르쳤지?”
“당신.”
“당신.”
“좋아. 절대 그 사실을 잊지 마. 너희가 불멸낭인 진무앙의 여자란 걸.”
유코와 유가흔의 얼굴에 결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수십 년 동안 그녀들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진무앙에 대한 원망은 어느새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극한의 위기상황에서는 감정의 변화가 미칠 듯이 빨라진다.
진무앙은 속으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은 진짜 진리라니까.’
그가 남궁경 등에게 말했다.
“내 말 들었지?”
“예. 진 대가.”
“예. 진 대협.”
“너희가 할 일은 이곳에서 저 애들을 지키며 유코와 가흔이 신경쓸 일을 만들지 않는 거다.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남아라. 특히 아경, 너.”
“예, 진 대가.”
“죽지 마라. 만약 죽으면 내가 지옥에 쫓아가서라도 네 목을 꺾어버릴 거다.”
남궁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염려 마십시오. 진 대가의 손에 죽기 싫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겠습니다.”
“좋아. 가자.”
진무앙은 성큼성큼 걸었다.
백 장은 먼 거리가 아니다.
일행은 곧 동굴의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앞선 두 개의 공동보다 서너 배는 더 커서 거대한 광장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세 번째 공동에 들어섰다.
그곳엔 네 마리의 마수가 느긋한 자세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무앙을 제외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마수들의 형상은 식인 괴마와 소화룡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특이했다.
사람들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광장의 중앙을 둘러싸고 있는 세 마리의 마수였다.
중앙 왼쪽엔 반투명한 푸른빛의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뱀의 얼굴은 사람과 비슷했다.
그리고 오른쪽의 마수는 전신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 뒤쪽의 마수는 거대한 나무처럼 생겼는데, 팔과 다리가 달린 형상은 괴기스러웠다.
셋은 식인 괴마만큼이나 덩치가 거대했다.
그런데 그들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네 번째 마수는 형상이 셋과 많이 달랐다.
그것은 키가 육 척도 되지 않았고, 알몸을 드러낸 피부는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게다가 그것은 놀랍게도 여인의 몸이었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하지만 사람들은 여인이 마수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여인의 매끄러운 피부는 진짜 거울처럼 사물이 비치고 있었다.
맑으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주는 피부.
그 덕분에 사람들은 그녀의 육체가 살이 아니라 금속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엇보다도 이목구비가 붙어 있어야 할 여인의 얼굴은 계란처럼 둥글고 평평했다.
눈, 코, 귀, 입.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엉덩이에는 풍성한 꼬리까지 달려 있었다.
유코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저것들이 흙, 물, 나무, 쇠의 마수들이야?”
진무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토곽, 인면수사, 목령인, 금미호라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지. 우두머리는 금미호야.”
말을 잇는 그의 눈길은 금미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금미호와 토곽을 맡는다. 저들이 오행마 중 가장 강한 첫째와 둘째니까. 유코는 인면수사를, 가흔은 목령인을 맡아.”
“알았어.”
“응.”
“인면수사는 독을 품은 물을 사용하고, 목령인은 나뭇가지들을 채찍과 창처럼 사용해.”
그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겁먹을 것 없어. 너희 실력이면 저놈들을 이기지는 못해도 시간을 끄는 건 가능하니까. 두 가지만 명심해. 첫째, 무리하게 승부를 보려고 욕심내지 마. 다 헛짓이니까. 저것들은 생마석을 뽑아내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죽일 수 없어. 둘째, 저놈들과 직접적인 피부 접촉은 절대 안 돼. 그럼 괴물로 변하는 거 알지?”
두 여자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앙이 광장의 중앙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네 마리의 마수는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금미호의 오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춘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천천히 팔을 들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감자를 먹였다.
퍽!
“이것들이 누구 앞에서 거들먹거려! 이거나 처먹어라, 저 세상 새끼들아!”
무면의 금미호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은 없었지만 분면 마수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요염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호호호호호, 정말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하는 말을 들으니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놈인 듯한데, 그럼 차라리 자살하는 게 편히 죽는 거라는 것도 모르느냐?”
진무앙의 눈이 번뜩였다.
“말을 해? 생각보다 등급이 높은 놈이었군. 아니, 년이라고 해야 하나?”
피식 웃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네가 여기서 재미를 느낀다니까 다행이긴 하네.”
“뭐가 다행이라는 것이냐?”
“뭐긴 뭐겠냐.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재미라도 느낄 수 있는 게 어디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로구나. 식인 괴마와 소화룡을 죽인 건 의외지만, 고작 그들 따위를 없앴다고 우리까지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훗, 그놈들이나 네놈들이나, 내 눈에는 도진개진이야.”
“호호호호호호호!”
금미호가 고개를 젖히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웃음소리가 딱 멈췄다.
그리고 금미호의 요염하고 잔인한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토곽, 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금미호의 오른쪽에 서 있던 바위 괴물 토곽이 거대한 동체를 움직였다.
쿵. 쿵. 쿵. 쿵.
토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광장 바닥이 푹푹 팼다.
진무앙이 흰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꼭 주제 파악 못하는 것들이 육갑을 떨어요.”
그렇게 무저불회곡 마지막 싸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