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74
174 점수를 못 따
지주현은 장강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진무앙은 객잔에서 늘어지게 자고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은 후 나루터로 나갔다.
뭐하러?
배 타러.
지주현에서 무한까지는 천 리 길이다.
그리고 그곳까지 가장 빠르고 편안하게 가는 방법은 배를 타는 것이었으니까.
나루터의 규모는 항구 도시 정도는 아니어도 상당히 커서 십여 척의 배가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었다.
난세가 끝나가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루터는 상선을 비롯한 온갖 배들로 복작거렸다.
당연히 빈자리가 있는 배를 잡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무한까지 직행하는 배는 없어서 진무앙은 행로의 중간쯤에 있는 구강까지 가는 걸 잡아탔다.
포양호를 낀 구강은 사시사철 유람객이 끊이지 않는 번화한 도시다.
덕분에 지주현에 비할 바 없이 큰 항구가 있었고, 무한까지의 배편도 항상 넘쳐났다.
배에 오른 그는 휘적휘적 선미의 난간 아래 구석진 곳을 찾아갔다.
손님이 꽤 많았지만 누울 곳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리를 잡은 그는 죽립으로 얼굴을 덮고는 벌렁 누웠다.
강의 수면은 잔잔했고, 가을 햇볕은 따스했으며, 강바람은 선선했다.
그야말로 잠자기 딱 좋은 날씨 아닌가.
그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 듯했다.
“팔자 좋은 친구구만.”
누군가 옆에 앉는 인기척과 함께 말이 들려왔다.
진무앙은 대꾸하지 않았다.
왜냐고?
남자 목소리니까. 그것도 중년의 남자.
기척으로 보아 중년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은은하게 코를 파고드는 냄새와 느껴지는 몸짓으로 보아 그의 일행은 여자였다.
그 여자가 말을 걸었다면 몰라도 그가 남자한테 반응을 보일 리가 있겠나.
하지만 중년인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또 귀를 파고들었다.
“거, 사람이 옆에 앉으면 눈인사라도 하는 게 강호의 예가 아닌가.”
장난기가 잔뜩 묻어나는 말투였다.
짜증이 난 진무앙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말 시키지 마쇼. 나, 무례한 놈입니다.”
이 정도면 뻘쭘해서라도 말을 걸지 않을 텐데 중년인은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자칭 무례하다는 사람치고 정말 무례한 사람은 보지 못했네. 자네는 예의가 있는 사람일 것 같군.”
진무앙의 대꾸는 없었다.
대신 반대편으로 홱 돌아누워 말하기 싫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의 경험상 이런 유형은 말을 받아주면 한도 끝도 없이 달라붙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출렁이며 배가 출발했다.
“나는 무한에 가는 길인데, 자네는 어디까지 가는가?”
‘질긴 인간이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자네도 무한까지 가는가 보구만.”
‘꿈보다 해몽을 더 잘하는 인간이네.’
“장강은 너무 넓어서 언제 봐도 가슴이 탁 트이는군. 이 광경을 보고 호연지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 인간, 언제까지 혼자 떠들 생각인 거야?’
“이번에도 대답이 없는 것 보니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 보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속 편하게 한 대 쥐어박아서 입을 막아버릴까?’
진무앙이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였다.
“숙부님, 그만하세요.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분한테 계속 말을 거는 건 실례예요.”
죽립 아래, 진무앙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자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말 중에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하다’는 것이 있다.
방금 그의 귀를 파고든 목소리가 바로 그랬던 것이다.
진무앙은 아득한 세월 동안 수만 명의 여자와 인연을 맺었던 남자다.
그런 삶을 살면 목소리만으로도 상대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소리의 흐름이 곱고, 기운이 충만하면서도 맑다. 나이는 스물둘에서 셋 사이, 심지가 곧은 편이고, 머리가 좋다. 예의가 바르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정이 깊은 성격.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에 강강약약(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의 성품일 가능성이 구 할 이상이다.’
진무앙은 죽립을 잡는 척하면서 손가락을 뻗어 재빨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남녀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첫인상이다.
여기서부터 어긋나면 나중에 복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목소리에 어둡고 눌린 기색이 없다는 건 사랑받으면서 컸다는 걸 뜻하고,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미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무앙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죽립을 벗었다.
‘자라며 사랑과 관심을 부족하게 받은 적이 없던 여자야. 목소리에 담긴 기운이 단단하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다는 건 남에게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고. 이런 여자에게는 거칠고 세게 나가면 점수를 못 따.’
죽립을 벗은 진무앙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일남일녀를 볼 수 있었다.
사십대 중후반에 염소수염을 한 평범한 외모의 중년인과 눈 아래를 면사로 가린 여인이었다.
여인은 면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렸지만 희고 깨끗한 피부와 그린 듯 선이 아름다운 눈썹, 크고 호수처럼 맑은 두 눈만으로도 대단한 미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무앙이 두 사람에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중하게 말했다.
“먼길을 가는 중이라 피곤해서 대협의 말씀에 제대로 대꾸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드러난 진무앙의 얼굴을 본 중년인과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뿐만 아니라 주변 여기저기에서도 숨죽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헉! 저런 미남이…….”
“하아… 송옥이 울고 가겠네.”
“우와… 저 얼굴로 하루만 살아도 소원이 없겠다…….”
중년인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자네는 그냥 죽립을 다시 쓰는 게 낫겠네.”
진무앙은 싱긋 웃으며 선선히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죽립을 썼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꾹 눌러쓰지 않아서 조각과도 같은 코와 입술, 턱선이 그대로 보였다.
“그런데 자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내 질녀 때문이 아닌가.”
진무앙은 중년인을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눈치 빠른 인간이네…….’
중년인은 족집게처럼 그의 속마음을 짚어냈다.
하지만 그는 진무앙, 의심을 받는다고 눈썹 하나 까딱할 남자가 아니다.
진무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막 일어나는 걸 대협도 보셨잖습니까? 질녀 되시는 분은 면사를 써서 지금도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누워 있을 때는 목소리만 들었을 뿐입니다. 대협이 제 저의를 의심하신다면 어찌할 방도는 없지만 너무 억울합니다.”
“말이 청산유수로구만. 그러니까 더 의심스럽네.”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여인이 끼어들었다.
“숙부님, 저 소협의 말이 옳으니 이제 그만하세요. 심심하셔서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건 저도 잘 알지만, 처음 만난 분을 상대로 이러는 건 지나쳐요.”
진무앙의 귀가 쫑긋했다.
‘응? 지금, 저놈이 심심해서 장난치고 있는 거였어?’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중년인을 분석했다면 그가 지금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았으리라.
하지만 진무앙은 여자에게 하는 것처럼 남자를 분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필요를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언제든 팔다리를 꺾어서 이야기를 들으면 되는데, 귀찮게 왜 그런데 심력을 소모하겠는가.
“흠흠…….”
중년인이 헛기침을 했다.
진무앙은 느릿하게 그의 눈가에 번지는 미소를 보았다.
염소수염과 어우러진 그 미소는 중년인의 인상을 장난꾸러기처럼 만들었다.
“자네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생각은 당연히… 있었네. 그러면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어쨌든 질녀가 그만하라니 그만해야겠네. 계속하면 이 아이가 화를 낼 테니.”
진무앙은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고마울 따름입니다, 대협.”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진무앙이라고 합니다. 사문을 떠나 강호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진 소협이었군. 나는 곽석철, 이 아이는 내 질녀로 곽운정이라고 하네.”
곽석철은 그들의 이름을 듣고도 진무앙이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자 혀를 차며 말했다.
“우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가?”
“없습니다.”
“자네 정말 강호초행이로군.”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하하.”
‘십오 년 전에 잠깐 한 번 들른 걸 제외하면 거의 오십 년 가까이 중원에 들어온 적이 없으니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야…….’
“우리는 구화산에 다녀오는 길인데 자네도 그런가?”
“아닙니다. 저도 구화산의 보물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사부님께서는 신외지물에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하셔서 가지 않았습니다.”
“허, 훌륭한 분을 사부로 모셨군. 어떤 분이신가?”
“죄송합니다. 당신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말라고 사부님께서 엄명을 내리신 터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곽석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흥, 은거고인이라 이거지? 왕년에 은거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누가 있다고!”
곽운정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을 흘겼다.
“숙부님! 그렇게 계속 장난치실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내 그만하마.”
곽석철이 웃으며 입을 닫았다.
곽운정이 진무앙에게 물었다.
“진 소협, 숙부님은 장난이 좀 심할 뿐 악의가 있는 분은 아니세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해주시면 고맙겠어요.”
진무앙은 황급히 두 손을 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두 분은 강호에서 유명한 분들인 것 같은데, 오히려 저 같은 강호초행의 말학후진에게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주시니 고맙기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진 소협은 어딜 가시는 길이었어요?”
“강호에 나왔는데 천하제일세라 불리는 무림맹을 보지 않으면 너무 아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한에 가는 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곽석철과 곽운정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곽석철이 중얼거렸다.
“무한이라… 아직 소문이 나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무림맹이 통제하고 있는 건가…….”
“소문이라니요?”
곽운정이 곽석철의 소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눈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듣는 귀가 많으니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곽운정이 진무앙에게 말했다.
“단순히 무림맹을 구경하기 위해 무한에 가는 길이라면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예? 왜요?”
진무앙의 이 질문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곽운정이 왜 무한에 가지 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도 아직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아니라서 뭐라고 말을 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지금 무한의 상황이 한가롭게 유람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건 분명해요.”
진무앙은 유가흔이 아쉬워졌다.
하오밀문의 문주인 그녀가 옆에 있었다면 이런 아리송한 대화를 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가 말을 받았다.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습니다. 하지만 무한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발길을 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곽석철이 그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무한엔 역병이 돌고 있다는 말이 있네. 걸리기만 하면 며칠 못 가 죽어 자빠진다더군. 역병은 범인과 무인을 가리지 않고 전염되는 중이라 하네. 가면 자네도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크네. 그래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건가?”
진무앙의 눈이 번뜩였다.
‘역병? 독고운진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에 그런 게 돌고 있다고?’
그가 소리를 낮춰서, 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가야겠습니다. 사부님은 제게 무공을 가르치시면서 늘 의기천추 제세구민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위험에 빠졌다면 마땅히 가서 구해야 하는 것이 협객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곽석철은 진무앙을 보며 이런 철모르는 놈을 봤나 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무한에 가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지만, 진무앙은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곽운정 또한 걱정스럽다는 눈빛이었고.
난세가 종식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강호초행(?)의 진무앙이 헤쳐 나갈 정도로 만만찮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