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79
179 이게 다 숙부님 때문이에요
무림맹에 도착한 첫날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진무앙은 약왕부의 손님들이 머무는 객관의 객실 하나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곽운정은 의녀들이 함께 숙식하는 의향관에서 생활하도록 조치되었다.
두 건물 사이의 거리는 오십여 장밖에 되지 않았지만, 진무앙은 곽운정이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향관은 절대금남의 구역이어서 그는 그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창가에 서서 어둠에 잠긴 의향관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짜증이 떠올라 있었다.
‘염병,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도 아닌데, 왜 접근금지라는 거야.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데, 아직도 남녀 숙소를 이렇게 떨어뜨려 놓는 거냐고.’
저녁 식사 때부터 곽운정의 얼굴을 보지 못한 터라 짜증이 났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정파의 대원로인 복마신군의 제자가 여자가 보고 싶다고 월담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참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지금 그를 찾아왔다.
진무앙이 천천히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왔냐? 생각보다 늦었다.”
“죄송해요, 숙부님. 오래 기다리셨어요?”
몇 달 만에 듣는 독고홍련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마치 오래전에 도착한 사람처럼 방의 중앙에 자연스러운 자세로 서 있었다.
진무앙과 마주한 그녀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홍련이 숙부님을 뵈어요.”
“그런 예의는 귀찮다. 운진이 자식이 올 줄 알았더니, 왜 너냐?”
“아버님은 역병에 대한 일을 진두지휘하시느라 군사부에서 온종일 꼼짝달싹도 못 하세요. 그래서 숙부님을 마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라 하셨어요.”
“흥! 그 돼지 자식이 퍽이나 미안해하겠다.”
“진심이셨는데요?”
“네 눈에나 그렇게 보이겠지.”
“어쩜 두 분은 서로를 그렇게 믿지 못하세요?”
“그 자식이 내 뒤통수를 친 게 한두 번이었어야지.”
“뒤통수를 친 경우는 숙부님이 아버님보다 훨씬 더 많다고 들었는데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딸이라고 아비 편드는 거냐?”
여기서 대답을 하면 구박만 더 당한다는 걸 잘 아는 독고홍련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앉아.”
진무앙은 의자에 앉으며 독고홍련에게 자리를 권했다.
독고홍련은 사양하지 않았다.
진무앙은 그녀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역병, 독이냐 질병이냐?”
“병이에요. 최초 발병자는 동굴 박쥐를 먹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뒤로 엄청난 속도로 퍼지며 감염자가 늘어났고요.”
“박쥐가 옮긴 병이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사람들이라… 무림맹은 다르게 보고 있다는 거냐?”
“예. 우리는 이 병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거라는 의심을 하고 있죠. 일부 증거도 찾아냈고요.”
독고홍련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미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무한의 사정은 최악이에요. 관부에서는 외부와 왕래하는 육로를 막아 무한을 봉쇄시켰어요. 소문이 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고요. 물론 그 조치엔 무림맹도 협조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진무앙은 구화산을 다녀오는 동안 무한의 역병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하오밀문주인 유가흔마저도 몰랐던 걸 보면 관부의 정보 통제는 굉장히 철저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면 자연히 알게 되었겠지만.
“물길은 트였던데? 식량 보급 때문이냐?”
“예. 그곳까지 막으면 무한 사람들은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아사할 테니까요.”
“성수곡 사람들을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다. 맹의 고위급에서 정보가 샜을 가능성이 있어. 알고 있지?”
“물론이에요. 풍령부운전에서 조사에 착수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런데도 아직 찾아내지 못한 거냐?”
“보통 신중한 놈들이 아니에요. 시간이 더 필요해요.”
진무앙은 인상을 찌푸렸다.
전대 풍령부운전주인 독고홍련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간단하게 생각할 놈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흠… 이 역병, 어떤 놈이 퍼트린 거냐?”
독고홍련은 마치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아버님은 역병이 황궁에서 일으킨 게 아닌가 의심하고 계세요.”
진무앙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황궁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황제가 떠오르지만, 그곳엔 황제만 사는 게 아니다.
즉, 의심 대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진다는 말이다.
진무앙은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음… 황제가 아니라 황궁? 왜 그렇게 두루뭉술해?”
“그 동네도 요즘 암중에 흐르는 기류가 미묘해요. 그래서 신무제가 직접 이번 사안을 지휘하는지는 불확실해요.”
“그곳에서 권력투쟁이라도 벌어지고 있다는 거냐?”
“예. 겉으로 확 드러난 건 아니지만 물밑에서는 아주 치열하죠.”
“신무제라는 놈, 능력이 꽤나 뛰어난 놈이라 국정을 장악했다고 하던데?”
“그가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정국을 완전하게 장악한 건 아니에요.”
“반대 세력이 있는 거냐?”
“예. 외척과 환관들이죠. 그들은 동창과 금의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요. 겉으로는 신무제에게 충성하는 것 같지만 그걸 믿을 수는 없죠. 본래 웃으면서 등에 칼을 꽂는 게 체질화된 자들이잖아요.”
독고홍련은 진무앙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황궁이 개판이 된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이게 다 숙부님 때문이에요.”
“뜬금없이 나는 왜 끌어들여? 내가 뭘 했다고?”
“개벽대전 직전 천무제가 돌연사한 후, 어린 현덕제를 대신해 황후가 십 년을 수렴청정했던 거 기억하시죠?”
진무앙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있었냐? 그 자식 잡아 죽인 후에 바로 변방으로 떴는데,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하아… 숙부님한테 제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군요. 아무튼 수렴청정 기간 동안 외척의 힘은 엄청나게 커졌어요. 수틀리면 황족이든 고관대작이든 가리지 않고 목을 날려 버리던 공포스러운 천무제가 죽었으니 그들은 무서울 게 없었죠.”
“뭐, 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경우는 발에 챌 만큼 흔하긴 하지.”
“수렴청정 십 년 후 황후는 권력을 현덕제에게 넘겼어요. 하지만 정상적인 국정 운영은 불가능했죠. 그는 엄청나게 심약한 데다 괴질을 앓고 있어서 황좌에 반 시진도 앉아 있지 못할 정도였거든요. 그리고 이것도 다 숙부님 때문이에요.”
이번에는 진무앙도 투덜거리지 못했다.
독고홍련의 말처럼 현덕제의 괴질은 그로 인해 생긴 게 맞기 때문이다.
그가 천무제를 죽일 때 당시 열한 살이던 현덕제는 근처에서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았다.
덤으로 두 사람의 충돌로 인해 생긴 어마어마한 기파를 몸으로 맞았고.
현덕제를 평생 괴롭힌 괴질은 그때 생겼다.
그리고 그가 사십을 갓 넘긴 나이로 저승 문턱을 밟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병약한 현덕제를 대신해 환관들이 득세했어요. 외척과 환관들의 천하였죠. 현덕제 사후 즉위한 신무제도 뒤틀릴 대로 뒤틀린 권력 구도를 아직 황제 중심으로 완전히 되돌려 놓지는 못한 상태예요.”
“그럼 외척과 환관들이 호시탐탐 신무제에게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겠군.”
“맞아요. 그래서 이번 사안의 주동을 어느 세력이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신무제, 외척, 환관. 이들 모두에게 동기가 있거든요.”
“황제는 무림맹을 약화시키겠다는 목적?”
“예. 지금의 무림맹은 그 영향력이 무림에 국한되지 않는 천하제일세예요. 백성들은 무림맹이 있는 무한을 제국의 황도와 대등하게 생각해요. 그런 무림맹이 무한을 지키지 못한다면, 천하에 대한 영향력의 축소를 피할 수 없어요. 반대로 그만큼 황권은 강화될 거고요.”
“외척과 환관은?”
“역병은 무림맹만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황제의 권위도 일정 정도 추락시켜요.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황제의 지배력은 당연히 약화될 거고요.”
“그렇긴 하지.”
눈빛이 깊어진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역병을 무한에 묶어두느냐 마느냐를 보면 범인이 황제인지, 아니면 외척과 환관인지 알 수 있겠군.”
독고홍련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숙부님이세요. 범인이 황제라면 역병이 무한 너머로 퍼지는 건, 원치 않을 거예요. 대신 무한의 백성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겠죠. 하지만 무림맹의 총타가 초토화된다면 이곳 백성들이 전멸된다 해도 그는 만족하며 마무리 지을 거예요. 피해가 무한이라는 한 도시에 국한된다면 뒷수습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진무앙이 독고홍련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외척과 환관이라면 역병을 무한 밖으로 넓게 퍼트리고 싶겠지. 신무제와 무림맹이 동시에 망가지고, 천하가 도탄에 빠진다면 그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생길 테니까.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지는 전혀 관심이 없을 테고.”
“맞아요. 아버님도 숙부님과 같은 생각이세요.”
진무앙의 고개가 천천히 모로 꼬였다.
“홍련아.”
“예, 숙부님.”
“그런데 너와 운진이 그 자식은 한 가지 가능성을 빠뜨린 거 같다.”
독고홍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지요?”
“내가 천무제 목을 따봐서 아는데, 그 자식 완전 미친놈이었거든. 신무제가 그 핏줄을 이었으면 놈도 제정신을 가진 놈은 아닐 거야.”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게 저희가 빠뜨린 한 가지 가능성과 상관이 있나요?”
“있지. 신무제가 천무제와 비슷한 성격이라면, 역병으로 무한이 아니라 세상 사람 전부가 죽어 넘어져도 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다.”
안색이 굳어진 독고홍련이 물었다.
“그래서 신무제가 얻는 게 무엇이죠? 백성이 모두 죽는다면 제국도 망할 텐데요.”
진무앙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홍련아, 이래서 네가 미친년이 아닌 거야.”
“예?”
“너처럼 뒤를 생각할 줄 알면 그게 미친놈이겠냐? 진짜 미친놈은 원하는 것 하나만 생각해. 그걸 얻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얻고 난 다음엔 어떻게 될지…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천무제가 그랬거든.”
“아… 숙부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가슴으로는 납득이 되지가 않아요.”
“뭐, 당연한 거다. 너는 그런 놈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진무앙은 허리를 세우며 팔짱을 꼈다.
그의 눈빛이 강해졌다.
“홍련아, 네가 이곳 사정이나 설명하려고 날 찾았을 리는 없고. 용건이 뭐냐?”
안색이 진지해진 독고홍련이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숙부님, ‘마인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죠? 그들의 정체를 밝혀주세요. 몰살시켜 주시면 더 감사할 거고요.”
뜬금없는 부탁이었지만 진무앙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곽석철에게 ‘마인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누군가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누군가는 독고홍련이 아니라 독고운진이었지만.
진무앙은 냉큼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귀찮아. 여기 너희 영역이잖아. 직접 해.”
“숙부님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부인할 수 없어서 진무앙은 혀를 차기만 했다.
독고홍련이 말을 이었다.
“무공이 고강한 사람은 본맹에도 있어요. 하지만 숙부님처럼 그 어떤 역병에도 감염이 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게다가 지금 본맹에는 그 일에 투입할 만한 여력이 없어요.”
“왜? 무림맹의 무사들을 전부 외부로 뺀 거냐?”
“예. 본맹의 핵심인 내단 칠각과 외단 오행기 중 장강을 관리하는 흑수기를 제외한 전 인원이 함녕으로 빠져나갔어요.”
함녕은 무한에서 서남쪽으로 백오십 리가량 떨어져 있는 도시다.
“맹엔 어떤 놈들이 남은 거냐?”
“맹주를 비롯한 수뇌부와 아버님이 이끄는 군사부, 그리고 운영에 필요한 최소 인원과 약양부 사람들뿐이에요.”
“철수는 운진이 자식의 생각이었냐?”
“예. 아버님이 주장하시고 맹주님이 받아들이셨어요. 숙부님도 들었겠지만, 역병은 일반 백성과 무인을 가리지 않아요. 여기서 체면과 명분에 얽매여 버틴다면 본맹의 정예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요.”
독고홍련이 말을 이었다.
“곽 씨 숙질과 함께 숙부님이 맹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하늘이 본맹을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가웠어요. 제가 낙양으로 직접 가서 모시고 오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녀가 쐐기를 박았다.
“이번 사태의 근원엔 숙부님도 일부 책임이 있어요. 결자해지라는 말도 있잖아요.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죠.”
입맛을 다신 진무앙이 말문을 열었다.
“좋아. 그 부탁 받아들이지.”
독고홍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단, 조건이 있다.”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곽석철은 내게 조카인 곽운정의 안전을 부탁했어. 그러니 그녀와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해 줘.”
“들어주기 어려운 건 아니네요. 하지만 그녀의 무공은 갓 일류에 접어든 정도라 숙부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텐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알았어요. 언제 아버님을 만나러 오실 건가요?”
“일 끝나면.”
“그렇게 전해 드릴게요.”
“응.”
촛불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독고홍련의 모습이 사라졌다.
떠난 것이다.
진무앙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운진이 그 자식도 정신이 없는가 보군. 정말 중요한 걸 알아차리지 못한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