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86
186 이제 썰 시간이군
해가 진 약왕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거처에 도착한 곽운정의 얼굴이 환해졌다.
숙소 앞의 섬돌에 앉아 있던 진무앙이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늘 쓰던 죽립을 벗은 진무앙의 조각처럼 수려한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자체 발광하듯 빛이 났다.
“진 소협, 오늘 꼭 해야 한다던 일은 잘되었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와 함께 가지 못했잖아요.”
“곽 소저가 걱정해 준 덕분에 아주 잘 풀렸습니다.”
곽운정은 진무앙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옆구리 상처는 어때요?”
어제 흑무대 살수의 검에 관통당한 상처를 말하는 거였다.
진무앙은 거침없이 장포를 열어 옆구리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다 나았습니다.”
그의 말처럼 상처는 흐릿한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곽운정이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복마금갑공이라는 무공은 정말 신공이군요. 그런 중상을 하루 만에 이 만큼이나 호전시킬 수 있다니…….”
“그래서 늘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 소협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뭘요?”
“오늘 마인당 살수들이 우리를 노리지 않을 거라는 걸요. 아침에 소협이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했잖아요.”
“무슨 정보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어제 스무 명이나 죽었는데 오늘 또 우리를 공격하는 건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거라 판판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다들 맹으로 돌아오면서 진 소협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였는데요?”
“소협은 돗자리 펴고 점을 봐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예? 하하하하하.”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진무앙이 곽운정에게 작은 호리병을 불쑥 내밀었다.
“뭐예요?”
“약왕부 창고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약주랍니다. 의원 한 분이 피로를 푸는 데는 이만하게 없다고 하면서 주기에 받아왔어요. 독하지도 않다니까 염려하지 말고 마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많이 마시지는 말고요.”
곽운정은 사양하지 않고 호리병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진 소협 말처럼 독하지 않은 술이네요. 약향도 적당하고… 맛있어요.”
“그래요? 줘봐요.”
호리병을 건네받은 진무앙도 서슴없이 두 모금을 마셨다.
꿀꺽꿀꺽.
그 모습을 본 곽운정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설마 진무앙이 자신이 마신 걸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진무앙은 곽운정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곽 소저, 일이 힘들었나 봐요.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든 거 같아요.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을 너무 많이 봐서…….”
진무앙이 활짝 편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약주로는 부족한 거 같은데… 내가 안마해 줄까요?”
뺨이 더욱 붉어진 곽운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거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왜요?”
“제 마음을 받으면 너무 무거워서 곽 소저는 걷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 말에 곽운정은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붉게 물들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바람직한 진행이네.’
진무앙은 위험한 상황에 처한 남녀의 친밀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였다.
연구나 실험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득한 세월 속에 쌓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진실이니까.
당연히 그는 지금 곽운정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미친 듯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오늘만 사는, 아니, 가끔은 이 순간만 사는 남자니까.
진무앙은 호리병을 다시 곽운정에게 건넸다.
곽운정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건네주었고.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정적은 따스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금방 끝이 났다.
진무앙이 호리병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벌써 비었네. 좀 더 큰 걸 달라고 할 걸.”
“지금이 적당한 거 같아요. 저는 벌써 취기가 올라오는 느낌인걸요.”
“술이 약하군요.”
“호호호, 원래 잘 못 마셔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은 좀 빨리 취하는 느낌이네요.”
“그래요?”
다시 두 사람이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곽운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초저녁이었지만 하늘엔 벌써 많은 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곽운정이 불쑥 진무앙을 불렀다.
“진 소협.”
“예.”
“무한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전에 소협이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무림맹을 구경하러 온 거 같지 않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숙부님이 진 소협을 보고 강호 초행이 아닌 것 같다고 했었죠.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저도 의견이 비슷하거든요. 소협의 무공과 일처리 방식은 아무리 봐도 강호 초출 같지가 않아요.”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거짓말을 꼭 나쁘다고 욕할 수만은 없잖아요. 누구나 남에게 말하기 힘든 비밀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어쩔 수 없이 말을 꾸며댈 수밖에 없죠. 전 진 소협이 그런 입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진무앙은 물끄러미 곽운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름답고 능력 있는데, 현명하기까지 한 멋진 여자였다.
그도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곽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곽운정은 맑은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제가 강호에 나온 건 오래되었습니다.”
‘아주 오래되긴 했지.’
말을 잇는 진무앙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부님은 개벽대전 이후 암천광무존이 사라진 무림을 정복하려는 세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새 돌아가는 꼴 보면 그런 놈이 있을 것 같기는 해.’
“무림… 정복이요? 삼정이 굳건한 지금 그게 가능해요?”
곽운정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마도 그 세력은 가능하다고 믿는 거겠죠.”
“하아…….”
무림은 하나의 나라처럼 일정한 영토 경계를 가진 세계가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어디에도 없을 수 있는 곳이 무림이었다.
이렇게 무림이라는, 경계가 없는 세상을 나라를 정복하듯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정복과 가장 가까운 행위는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들을 무너뜨리거나 흡수하는 것이었다.
즉, 당세 무림을 정복하려면 천하삼정을 무너뜨리거나 흡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난 백 년간 축적된 삼정의 힘은 무림 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곽운정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저는 무한에 퍼진 역병도 그 세력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여기 온 거고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곽운정은 그의 말을 믿었다.
지금까지 그는 마인당 살수들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
그러니 믿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과가 있었나요?”
“예. 그래서 반 시진 후에 나가봐야 합니다.”
“이 밤에요? 너무 위험해요.”
“그래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밤 제 계획이 성공한다면 마인당 살수들은 더 이상 무한 내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겁니다. 모두 죽을 테니까요.”
“아…….”
곽운정은 걱정과 감동이 뒤섞인 탄성을 토했다.
진무앙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래서 곽 소저와 이 술을 함께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담긴 여운에서 무언가를 느낀 곽운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돌아오기 힘든 길인가요……?”
“호기롭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쉬운 길은 아닙니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이 일은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고요.”
“하아…….”
곽운정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무앙이 가지런한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곽 소저,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저, 죽으러 가는 거 아닙니다. 힘든 길이지만 나는 이곳으로 돌아오는 걸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곽운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곽 소저가 나 때문에 우는 건 정말 보고 싶지 않거든요.”
독고운진이 들었다면 전신에 돋은 왕소름을 긁어대느라 바빴을 말이었다.
하지만 면전에서 그 말을 들은 곽운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같은 말이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당사자와 제삼자의 차이는 이렇게 큰 것이다.
“진 소협…….”
진무앙은 조심스럽게 곽운정의 허리를 안아 품으로 당겼다.
곽운정은 거부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진무앙의 입술이 곽운정의 도톰한 입술을 덮었다.
긴 침묵 속에 주변 공기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입술을 뗀 진무앙이 격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곽운정에게 말했다.
“후우, 곽 소저, 미안합니다. 마지막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는데…….”
곽운정이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진 소협이 먼저 행동하지 않았으면 내가 했을 거예요.”
“예?”
진무앙은 당황했다.
아름답고 능력 있는데다 현명하기까지 한데, 거기에 이렇게 대담하고 솔직한 여자였던 거야?
말을 잇는 곽운정의 맑은 두 눈엔 강렬한 열기가 이글거렸다.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 소협이 좋았어요. 언제 이 마음을 전해야 하나 시기를 고민하던 중이었고요.”
진무앙이 그녀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맞춤을 했다.
쪽!
이번은 가볍고 빠른 입맞춤이었다.
“나만 고민한 게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하하하.”
곽운정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돌아와요. 내 곁으로요.”
진무앙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 소저의 명인데 따르지 않을 수 없죠. 알았습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곽운정을 품에 안았다.
곽운정은 자신이 마음을 열었다는 걸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진무앙은 그녀를 안고 침상으로 가고 싶어서 목이 타는 듯했다.
곽운정도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답지 않게 그는 참았다.
그가 갑자기 도덕군자가 되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뿐.
흑무대가 모이는 장소에 가려면 반 시진(한 시간) 후에는 출발해야 했다.
그리고 곽운정을 안기에 그 시간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사랑스럽고 매혹적인 여인은 침상에서도 최고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니까.
곽운정과의 관계가 이렇게 급진전 될 줄 알았으면 그는 흑무대와의 약속(?)을 내일로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도로 담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나.
두 사람은 그렇게 안은 채 조곤조곤 대화를 나눴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고, 반 시진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다.
진무앙이 일어섰다.
따라 일어서는 곽운정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다녀올게.”
“응…….”
두 사람의 말투는 반 시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먼저 들어가. 뒷모습 보여주기 싫다. 우두커니 서서 울 게 뻔한데, 그렇게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진무앙의 말에 곽운정은 와락 달려들어 그에게 깊은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된 진무앙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전음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홍련아.] [예, 숙부님.] [몰래 훔쳐보는 거 나쁜 버릇이다.] [훔쳐본 게 아니라 숙부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기다린 거거든요.] [혀가 길어. 그러니 네가 아직까지도 혼자인 거야.] [몰아붙일 기회는 절대 안 놓치시는군요.]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사실이니까.] [아버님께서 전하라 하셨어요. 당신은 준비되셨다고.] [나도 출발하려던 참이다.] [그렇게 전해 드릴게요.]전음이 끊기며 독고홍련의 기척도 사라졌다.
진무앙은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썰 시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