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88
188 사념으로 만들어진 인형
무한을 벗어난 흑의복면인은 접경 지역의 이름 없는 야산으로 접어들었다.
인시 말(새벽 5시경)의 야산은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몇 개의 낮은 봉우리와 계곡을 지난 복면인은 커다란 바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바위 표면을 어루만지자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바위가 옆으로 밀려났다.
그그그극-
바위가 밀려난 자리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동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의 안쪽은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이어져 이었다.
복면인이 계단에 발을 딛자 바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동굴의 입구를 가렸다.
그그그극-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은 십여 장 넘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러 개의 야명주가 빛을 밝혀주는 석실이 나타나며 끝이 났다.
석실은 높이 일 장, 폭 삼 장 정도였다.
중앙엔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은은한 백색빛을 발하는 수정 구슬이 놓인 작은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제단 앞에는 한 명의 회의인이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체구가 크지 않은 회의인은 두터운 회색의 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같은 색의 천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석실에 들어선 흑의복면인은 회의인 뒤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천호 송평이 사자를 뵙습니다.”
“지금은 네가 나를 찾아올 때가 아닌데, 무슨 일이냐?”
낮게 깔린 회의인의 목소리는 복장만큼이나 울림이 미묘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송평의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밤사이 무림맹에 은신해 있던 이붕이 발각되어 참살당하고, 흑무대 이백오십이 전멸했습니다.”
놀란 듯 회의인이 미끄러지듯 뒤로 돌아앉으며 말을 받았다.
“황당한 소리로군. 함녕으로 철수한 무림맹의 주력이나 무한에 잔류한 수뇌부가 움직였다는 보고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같은 날 모두 죽임을 당할 수가 있단 말이냐?”
“이붕의 죽음과 흑무대의 궤멸은 속하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입니다.”
송평은 장강 이북의 마을에서 일어난 전투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그는 발각될 것이 염려되어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보았다.
보고가 끝나자 회의인이 중얼거렸다.
“흑무대가 한 곳에 모였다면 이붕이 집합 지시를 내렸다는 말인데… 그는 이미 죽은 상황이라…….”
그가 송평에게 물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파악했느냐?”
“그게… 불확실합니다.”
“똑똑히 보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 명이 움직이는 건 보았으나 그와 함께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어서…….”
송평은 말끝을 흐렸다.
“그 한 명이 누구냐?”
“전대고수인 복마신군의 제자로 진무앙이라는 청년입니다.”
“진무앙?”
“예.”
송평이 말을 이었다.
“이붕의 죽음에 그자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흑무대를 전멸시키는 전투에 그가 개입한 건 확실합니다.”
“그 외 다른 자들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혼자서 벌인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불가능합니다. 무림맹주라도 단신으로 흑무대를 전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흠… 이세빙에게서는 아무런 전언도 없었느냐?”
“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로군. 네 말대로라면 대규모 작전인데, 풍령부운전주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이냐?”
“속하도 그 점이 정말 이상합니다. 그래서 사자께 보고 후 즉시 이 전주를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녀가 우리를 배반했을 가능성은?”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적다고 판단됩니다. 그녀는 친동생인 이세광과 그의 가족을 목숨처럼 아낍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이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이세빙이 배반을 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처럼 신속하고 과감한 작전을 주관했단 말인가……. 그럴 만한 자는 총군사 독고운진뿐인데, 그가 직접 개입한 걸까…….”
중얼거리던 회의인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그의 외침에 대경실색한 송평이 번개처럼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돌려 버렸던 것이다.
우두둑-
즉사한 송평이 혀를 길게 빼물며 쓰러졌다.
털썩-
회의인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총군사… 독고운진…….”
책상다리를 하고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독고운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떤 놈이 이렇게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너를 보니 배후가 ‘그 새끼’라는 걸 알겠다.”
“무슨 소리냐!”
회의인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주제를 모르는군. ‘그 새끼’의 사념으로 만들어진 인형 따위가 감히 내게 질문을 해?”
회의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 모자를 뒤로 넘겨 벗었다.
회의인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묘령의 여인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눈동자는 흰자위가 전혀 없는 칠흑처럼 검은색이었다.
그녀는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검은 눈동자로 독고운진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독고운진, 정체를 밝혀라. 너는 누구냐?”
독고운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귀한 정보를 거저먹으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 네가 대머리가 되면 ‘그 새끼’도 아껴주지 않을 거다.”
“그렇게 나를 자극하지 않아도 어차피 넌 죽어. 그동안 군사부에 처박혀 있어서 손을 쓰기 힘들었는데,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손가락을 마주하며 기묘한 수인을 맺혔다.
그러자 그녀의 발밑에서 별이 여러 개 겹친 듯한 붉은 도형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녀 주변에 불길이 이글거리는 십여 자루의 장창이 생성되었다.
독고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염창이라… 이쪽 세계는 마력이 없어서 그쪽 세계의 법술을 쓰지 못할 텐데… 그런데도 사용이 가능하다 이거지…….”
그의 말에 여인의 검은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아는 게 적지 않구나, 독고운진.”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알면 놀랄 거다, 후후후.”
독고운진이 낮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여인의 검은 눈동자에 잔혹한 살기가 어렸다.
“실컷 웃어라. 네놈을 시체로 만든 후에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모조리 뽑아내 줄 테니.”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발동어를 외쳤다.
“진, 화염창!”
십여 자루의 화염창이 긴 불의 꼬리를 끌며 독고운진에게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독고운진은 싱긋 웃었다.
“인형아, 너는 저쪽 세계에서 넘어온 놈이라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을 모르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전면에 창연한 푸른빛의 강기막이 철벽처럼 일어났다.
콰콰콰콰콰쾅-
화염창과 강기막이 무서운 기세로 충돌하며 석실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여인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열 자루의 화염창이 바다에 던진 조약돌처럼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즉시 다른 수법으로 공격을 전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찰나지간 공간을 뛰어넘듯 거리를 좁힌 독고운진이 통통한 손으로 어느새 그녀의 목을 꽉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그와 똑바로 마주친 여인의 검은 눈동자가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격렬하게 떨렸다.
독고운진이 펼친 건 경공이 아니었다. 그는 말 그대로 공간을 건너뛰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독고운진… 너… 다른 세계에서 온 놈이냐?”
여인의 목소리는 어느 틈에 확연한 남자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독고운진이 피식 웃었다.
“주제도 모르더니 상황파악도 못하네. 지금 한가하게 질문하고 있을 때냐? 보내기 전에 한마디 충고하지. 이쪽 세계에서 뭘 할 생각인지 몰라도 눈치가 그렇게 굼벵이처럼 느려서는 목표달성은커녕 살아남기도 쉽지 않을 거다.”
여인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에 만났을 때 오늘의 빚을 갚아주지.”
“그러든지.”
독고운진이 담담하게 말을 받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목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여인의 몸은 마치 촛농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독고운진의 손이 텅 비며 여인이 입었던 회의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독고운진은 낑낑거리며 힘들게 책상다리를 풀고 바닥에 내려섰다.
회의를 들어올리자 아래에 맑은 물 한 줌이 고여 있는 게 보였다.
“사념 인형을 부리는 걸 보면 ‘그 새끼’가 아직 넘어오지 못한 건 확실한 것 같고…….”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제단 위의 수정 구슬을 잡았다.
“사념 인형을 부리는 놈은 분명 ‘그 새끼’의 추종자일 텐데… 희한하네. 하는 짓은 영락없이 희대의 대마두인데, 어떻게 신성력이 깃든 성물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그는 수정 구슬을 보자마자 그것의 용도를 알아차린 상태였다.
“이 신성구 덕분에 마인당 놈들이 역병에 감염되지 않은 것이었군. 아무튼 다행이다. 이거라면 역병을 소멸시킬 수 있겠어.”
수정 구슬을 챙긴 독고운진은 다시 낑낑거리며 책상다리를 했다.
뚱뚱한 구름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그의 신형이 번개처럼 동굴을 날아나갔다.
* * *
제국의 황도, 대장원 밀집 지역.
인근에서 가장 거대한 장원의 지하 밀실에서 갑자기 거친 비명과 밭은기침이 터져 나왔다.
“커억, 쿨럭쿨럭…….”
선지처럼 뭉친 피를 한 덩이나 토해낸 서른 전후의 여인이 쇠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커커컥… 컥컥… 쿨럭…….”
비명을 토하며 발버둥을 치던 여인의 움직임이 잦아든 것은 반각이나 지난 후였다.
피와 식은땀에 푹 젖은 그녀는 바닥에 큰대자로 누웠다.
그때 허공이 일렁이며 마치 문이 열리듯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면사로 얼굴을 가린 백의궁장여인이 미끄러지듯 걸어나왔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를 일곱 개의 칠채 옥잠으로 고정한 그녀에게선 형용하기 어려운 위엄과 우아함이 느껴졌다.
여인은 힘겹게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면사여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삼랑, 네 심령이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해 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신녀님, 무한으로 보냈던 제 사념체 중 하나가 강제 소멸되고 신성구를 탈취당했습니다.”
“강제 소멸? 천하에 그런 능력자가 있을 리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보았느냐?”
“예. 무림맹 총군사 독고운진이었습니다.”
면사여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아……! 그가 백 년 내 무림 제일의 신기묘산이라 칭송받는다는 걸 알지만 사념체까지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자라는 건 믿기 어렵구나.”
“제가 사념체를 통해 그와 몇 마디 대화를 했는데… 아무래도 그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자인 듯 느껴졌습니다.”
삼랑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면사여인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삼랑이 조심스럽게 면사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신녀님, 독고운진이 신성구를 손에 넣었으니 무한의 역병은 곧 진정될 것입니다. 그럼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는데, 어찌해야 할지…….”
면사여인은 생각한 것이 있는 듯 망설이는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역병이 진정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를 모두 죽이면 되지 않겠느냐.”
“예? 하지만 황명으로 무림맹에 한 달의 여유를 준 게 며칠 되지 않았는데……. 황상께서 명을 지키지 않은 이유를 무한주둔군에 추궁할 것입니다.”
“황상은 군에 추궁을 하고 싶겠지만, 그 대상이 세상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사안을 종결짓게 될 것이다.”
“예?”
“삼랑, 무한에 너의 사념체가 하나 더 남았지?”
“예.”
“이런 상황에 대비해 사념체에 심어둔 것이 있지 않느냐.”
“괴인결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즉시 사념체에 명해 무한주둔군에 괴인결을 풀도록 하여라.”
삼랑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신녀님.”
허공의 일각이 갈라지며 다시 문이 나타났다.
면사여인이 그곳으로 사라지자 삼랑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