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89
189 암혼 초현
무한에서 황도로 가는 길목의 평원을 수천 개의 막사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한 주둔군의 진영이었다.
여명이 밝아오는 시각.
진영 중앙의 가장 커다란 막사에서 한 가닥 검은 그림자가 유령처럼 빠져나왔다.
그는 죽립을 삐딱하게 눌러쓴 진무앙이었다.
번개처럼 진영을 가로지르는 그의 얼굴은 휘파람이라도 불 것처럼 가벼웠다.
그는 흑무대를 궤멸시킨 후 즉시 무한 주둔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군영을 돌아다니며 백인장 이상 간부들의 혈을 짚었다.
‘주둔군 쪽은 백인장 이상의 머리 역할을 할 놈들은 죄다 반년 정도 거동 못하게 만들었으니 당분간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거고…….’
죽일 필요는 느끼지 못해서 반 년 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없도록 경락만 뒤틀어놓았다.
군의 간부라고 해봤자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무한으로 드나드는 길목만 막았을 뿐, 백성들에게 직접적인 해악을 끼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피와 죽음을 사랑하는 진무앙이라 해도 그런 자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이지는 않는다.
‘운진이 놈이 역병을 처리할 방법만 손에 넣으면 양쪽 다 순탄하게 해결이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지.’
진무앙이 군영을 떠난 직후.
갑옷을 입은 병사 한 명이 중앙 막사로 다가갔다.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가 날카로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멈춰라.”
경계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막사로 걸어오는 병사는 낯이 익은 십인장이었다.
뭔가 더 질문을 하려던 경계병의 안색이 확 변했다.
십인장의 피부가 검은 먼지처럼 부서지는 게 보였던 것이다.
“저… 저…….”
십인장의 전신은 눈 깜박할 사이에 검은 먼지로 화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철컥 텅텅.
몸을 잃은 갑옷과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검은 먼지 가닥 중 하나가 경계병의 코를 통해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경계병의 눈이 온통 검은빛으로 물들며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와 마기가 흘러나왔다.
“끄으으으으으…….”
그의 입술 사이로 신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괴기한 소리가 주둔군 진영 전체를 뒤덮는 데는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쐐애애애액-
한 가닥 번개가 되어 치달리던 진무앙의 앞에 무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매부운의 경공으로 가볍게 성벽 위로 날아오르던 진무앙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무림맹이 있는 지역의 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폭죽처럼 터지는 성스러운 빛의 향연을 보았기 때문이다.
빛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퍼지며 무한 전역에 부슬비처럼 내렸다.
성벽을 밟으며 걸음을 멈춘 진무앙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신성구? 흑무대가 감염되지 않았던 건 저것 덕분이었군. 돼지 자식이 모처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움직여 줬으니 대왕만두라도 왕창 사다 줄까.”
그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빛의 비를 맞는 느낌은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와 진무앙의 등을 때렸다.
그 기운은 그를 지나 무서운 속도로 무한을 뒤덮어갔다.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찼던 도시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둠침침해졌다.
물론 그런 하늘의 변화는 진무앙이 아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응? 이 기분 나쁜 기운은… 설마…….’
진무앙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내려다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때 무림맹 쪽에서 두 사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엄청나게 몸집이 거대한 인영과 그의 오분지 일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날씬한 그림자.
한걸음에 수십 장을 건너뛰며 지붕을 밟고 달려오는 그들은 독고운진 부녀였다.
일다경이 지나기도 전 여전히 책상다리를 한 독고운진과 독고홍련이 진무앙의 옆으로 날아내렸다.
진무앙이 독고운진에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돼지야, 사건이 대충 마무리된 줄 알았더니 아직 시작도 안 했던 건가 봐.”
“이 마기, 자연적으로 생성된 게 아니다. 무앙, 뭔지 알겠냐?”
“괴인결. 너는?”
“나도 네 생각과 같다.”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진무앙이 욕을 했다.
“염병…….”
“신성구가 있던 석실에서 사념으로 움직이는 인형을 보았어. 아무래도 그 사념 인형이 한 놈 더 있었던 모양이야.”
독고운진이 진무앙에게 물었다.
“이 정도 마기가 단시간 내에 형성되려면 수만 명이 운집해 있는 곳에서 괴인결을 터트렸다는 말인데, 저 방향에 그럴 만한 곳은 주둔군의 진영뿐이야. 너 거기서 작업했지?”
“응. 홍련이 준 정보를 토대로 백인장 이상 간부들의 경락을 망가뜨렸다. 반년 정도 고생하고 일어날 수 있는 정도로.”
“그곳에서 뭐 느낀 거 없었냐?”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못 느꼈다. 내가 떠난 뒤에 작업이 시작된 것 같아.”
“내가 만났던 사념 인형은 법술을 사용하긴 했지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는데… 괴인결까지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그 ‘개새끼’의 종노릇하는 놈의 역량이 만만찮다는 뜻 아니겠냐.”
안색이 그답지 않게 어두워진 독고운진이 말을 받았다.
“무앙, 주둔군 수가 오만이야. 그들이 전부 마기에 감염되어 괴인화 되었다면 감당하기 쉽지 않다. 너도 알잖아. 괴인화 되면 범인도 일류고수 수준의 힘과 속도를 갖게 되고, 단단해진 몸뚱이는 신병이기가 아니면 흠집도 내지 못해.”
진무앙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튀려고? 무림맹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너희가 떠난 뒤에도 아직 살아 있는 수십만의 무한 백성이 이 도시에 남아 있어. 그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몰살당할 거다. 만약 괴인결이 제 위력을 발휘한다면 그들도 감염되어 괴인화 될 거고.”
독고홍련이 두 남자에게 물었다.
“저들을 다시 보통 사람으로 회복시킬 방법은 없는 건가요?”
진무앙이 고개를 저었다.
“없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벌써 사용했지. 일단 감염돼서 괴인화 된 자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식인과 살육, 파괴를 반복해.”
“아…….”
독고운진이 진무앙에게 말했다.
“저들을 상대하기 어려운 건 너도 매한가지야. 네가 죽을 리는 없지만, 모두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 없으니 전투는 부지하세월처럼 길어질 거다. 그러면 얼마 가지 않아서 사람들은 네가 불멸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진무앙은 덤덤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간땡이 조막만 한 새끼. 그럴 일 없으니까 신경 꺼.”
“응? 뭘 어쩌려고?”
눈이 커진 독고운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마… 너…….”
“내가 오만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없다고 한 건 너야, 새끼야. 나 진무앙, 포기를 모르는 남자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그때 여명이 밝아오는 평원 저편이 개미 떼처럼 밀려오는 말과 사람의 그림자로 새카맣게 뒤덮이는 게 보였다.
그들 위로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마기가 해일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진무앙이 투덜거렸다.
“지랄이 풍년이네. 말까지 괴인화 된 모양이야.”
독고운진이 물었다.
“무앙, 정말 암혼을 불러낼 거냐? 여기엔 난향도 없는데?”
“너 있잖아, 새끼야.”
“너도 알잖아. 네가 암혼을 이단계 이상 개방하면 나는 널 원래대로 되돌리지 못해. 난향만 되돌릴 수 있다고.”
“일단계로 충분해. 오만 정도를 써는데 이단계까지 개방할 일 없다.”
“정말이지?”
“하… 너까지 날 못 믿는 거냐?”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널 어떻게 믿냐.”
진무앙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암혼으로 거짓말은 안 해, 새끼야!”
두 남자가 투닥거리는 사이 무한 주둔군 오만은 이제 완전히 형체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쿠쿠쿠쿠쿠쿠쿠-
우우우우우우우-
수만 명이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치달리는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고, 그 뒤를 기괴한 울림이 뒤따랐다.
오백 장… 사백 장… 삼백 장…….
그들의 전진과 함께 거대한 마기가 광풍처럼 밀려왔다.
진무앙이 혀를 차며 말했다.
“다투다 날 새겠다. 뒤는 네놈이 맡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무앙의 신형이 구름처럼 날아올라 달려오는 오만 주둔군의 앞을 막아섰다.
독고운진이 독고홍련의 손을 잡아채고 미친 듯이 까마득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독고홍련이 물었다.
“아버님, 왜 이러세요?”
“너, 저 자식이 암혼을 개방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지?”
“언제 볼 기회가 있었나요? 늘 아버님과 이 낭랑만 저분 옆에 있었죠.”
“하여튼 저럴 때 무앙 근처에 있다가는 날벼락 맞는다. 암혼을 개방하면 저 자식은 난향과 나 외에는 아무도 못 알아봐.”
“예?”
“암혼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한다. 그러니 저놈 근처에 있으면 무조건 죽어. 최소한 십 리는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해.”
“숙부님이 저도 못 알아보신다고요?”
“응.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너를 죽일 거다.”
독고홍련은 낙담한 얼굴이 되었다.
“아… 그럴 수가…….”
“평소에도 널 이뻐했던 놈이 아닌데 못 알아본다고 아쉬워할 게 뭐 있냐.”
“그래도요.”
십여 리를 날아간 독고운진은 성벽 너머가 보이는 야산의 봉우리 정상에서 멈췄다.
거리가 멀었지만 허실생동의 경지에 이른 부녀의 안력은 진무앙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 진무앙이 암월도의 손잡이를 잡는 것이 보였다.
독고운진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홍련아, 잘 봐둬라, 암혼이 어떤 존재인지를.”
진무앙은 암월도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암월, 준비됐냐? 됐다고? 그럼 나와, 임마!”
말과 함께 그는 암월도를 꺼내 무서운 기세로 땅에 내리꽂았다.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암월도에서 가공할 기세로 일어난 검은 화염이 진무앙의 전신을 휘감으며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콰우우우우우우-
하늘과 땅을 잇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다음 순간, 검은 불길과 소용돌이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천지가 숨을 죽인 듯한 정적과 고요가 평원에 내렸다.
그리고 칠흑처럼 검은 피풍을 전신에 두른 ‘그’가 눈을 떴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눈처럼 흰 피부, 짙은 눈썹 아래 자리한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 신이 빚은 듯 아름다운 이목구비…….
‘그’의 겉모습은 진무앙과 같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움과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그만이 존재하는 듯 광오한 기세가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우우우우우우우우-
해일처럼 밀려오는 오만 군마를 보며 ‘그’는 지면에 꽂혀 있는 암월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저벅.
사방에 오직 그의 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오만이 밀려오며 내는 소리가 그의 발걸음에 짓눌리며 사그라졌다.
그는 느릿하게 암월도를 들어올렸다.
“이 세계는 나의 것이다. 그것을 어지럽히는 자, 모두 죽으리라!”
천지를 전율케 하는 일갈과 함께 ‘그’가 암월도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무림사에 유래가 드문, 일대 오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