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9
019 곡은설
호위무사는 방을 절반으로 나눈 옥주렴의 앞에 서 있었다.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호위무사와 눈이 마주친 진무앙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호위무사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정돈된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명문에서 제대로, 그것도 오랫동안 가르침받지 않으면 갖기 어려운 기세와 분위기였다.
진무앙이 시선을 옥주렴으로 돌렸을 때 호위무사가 입을 열었다.
“진 호위십니까?”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호위무사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루주님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난 대려화 님의 호위무사인 위명신입니다.”
격식을 갖춘 그의 말투는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어딜 봐도 호위무사처럼 보이지 않아서 문제지.
“진무앙입니다.”
진무앙도 마주 포권했다.
그때 옥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촤라라라락-
진무앙은 눈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옥주렴을 걷고 나온 여인은 그 정도로 미인이었다.
대려화는 태양의 꽃이라고도 알려져 있을 만큼 화려한 꽃이었다.
그런 이름이 붙어 있을 만큼 대려화의 미모는 화려했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는 미모보다 더 자극적이었고.
“내가 대려화예요, 진 호위님.”
“진무앙입니다.”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대려화가 찻주전자를 들어 진무앙의 잔에 차를 따랐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위명신의 말이 빈말이 아닌 듯 차는 따듯했다.
대려화가 말했다.
“진 호위님이 송옥루 살인사건에서 유 공자의 누명을 벗겨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진무앙이 손을 들어 계속 이어지려는 대려화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대 소저, 난 입에 발린 말을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딱딱한 분위기도 별로고. 의뢰나 들어봅시다.”
대려화와 위명신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난향에게서 진무앙이 제멋대로인 사람이니 그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언질을 미리 받았다.
그래도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향칠화는 언제든지 호위무사를 자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향칠화에게 진무앙처럼 하고 싶은 말 맘대로 하는 호위무사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당황할 수밖에.
대려화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하지요. 의뢰하기 전에 제 본명부터 알려 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래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내 이름은 곡은설이에요.”
“대 소저라고 불러야 합니까? 곡 소저라고 해야 합니까?”
“곡은설이라는 이름은 루주님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대려화라는 이름을 계속 써달라는 말이다.
곡은설이 말을 이었다.
“혹시 진 호위는 곡씨무가를 아시나요?”
무림맹 낙양 분타주라는 거물의 이름도 모르는 진무앙이 일개 무가를 알 리 만무했다.
당연히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곡은설은 조금 실망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곡씨무가의 후손이에요.”
곡은설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백여 년 동안 낙양에서 작은 무가를 운영하던 곡 씨 집안은 그녀의 부친인 곡만동의 대에 이르러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곡만동이 사망하기 이 년 전 떠돌이 낭인무사와의 실전 비무에서 패배한 것이었다.
일개 낭인에게 패한 곡만동의 명성은 낙양 무림계에서 수직 하락했고, 제자들도 모두 떠났다.
낙양 무인들의 비웃음과 멸시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곡만동은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여의치 않자 진중효라는 자에게서 거액의 금전을 빌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빌린 금전으로도 가문의 부흥을 이루지는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무에서 입었던 내상이 재발해 사망했다.
그 일로 모친은 병까지 얻었다.
그게 삼 년 전이었다.
사남이녀의 장녀였던 곡은설은 모친과 동생들을 돌보고 빚을 갚기 위해 제 발로 수향루를 찾아와 기녀가 되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녀는 삼 년이 지나며 수향칠화의 일원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자연스럽게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고, 마침내 얼마 전 빚도 전부 갚았다.
문제는 그녀가 진중효를 만나 마지막 남은 빚을 모두 갚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생겼다.
진중효가 그녀의 선친이 빌린 돈이 더 있다면서 거액의 차용증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 차용증에는 선친 곡씨무가의 것이 분명한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곡은설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문을 닫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무앙이 툭 던지듯 물었다.
“진중효라는 자는 차용증을 없애기 위한 조건도 같이 내밀었죠?”
곡은설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걸……?”
“악덕 토채귀들이 즐겨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니까요. 그놈이 내민 조건이 뭔지 들어봅시다.”
“그는 자신이 지목하는 사람과 내가 혼인을 하면 차용증을 없애주겠다고 했어요.”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는 거요?”
“예.”
진무앙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건 좀 재미있군… 요. 그래, 그 다른 사람이 누굽니까?”
대답은 곡은설이 아니라 위명신이 했다.
“…양 씨에 일 자 청 자 이름을 가지신 분이요.”
극존칭이다.
진무앙이 위명신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분? 위 호위와 관계가 깊은 것처럼 들리는데, 어떤 관곕니까?”
위명신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가 말을 하려 할 때 곡은설이 끼어들었다.
“양일청… 은 위 호위의 사부예요.”
그녀는 위명신과 달리 양일청을 언급할 때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무앙이 말했다.
“사부라… 그런 사정 때문에 위 호위가 나서지 못하니 내게 의뢰를 한 거로군요.”
진무앙의 말에 곡은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란 말이오?”
“예.”
진무앙은 차로 목을 축인 후 말했다.
“그럼 이제 의뢰 내용이 뭔지 들어봅시다. 단, 차용증을 없애 달라거나 진중효나 양일청을 죽여달라는 의뢰라면 얘기하지 마십시오. 난 이제 그런 일은 하지 않으니까.”
그의 말이 많이 거슬린 듯 위명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부님에 대한 살인청부라니! 진 호위, 말을 삼가시오.”
진무앙은 피식 웃었다.
강호초출에게서나 볼법한 순수한(?) 반응 아닌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위 호위의 말은 그런 의뢰가 아니라는 의미로 알아듣죠.”
곡은설이 가라앉은 눈으로 위명신을 한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위 호위는 사부가 얽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서려고 했어요. 내가 그걸 극구 말렸지요.”
“왜죠?”
“위 호위의 부모님과 형, 그리고 두 명의 동생이 비룡무관의 식솔로 일을 하고 있어요. 위 호위가 나서면 가족들이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커요. 내 일 때문에 위 호위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어요.”
곡은설과 위명신을 보는 진무앙의 눈빛이 묘해졌다.
일개 호위무사의 개인 사정을 이렇게까지 깊이 헤아려 주는 건 분명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는 난향이 대려화의 호위무사가 문제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자신을 대려화에게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난향, 월하노인도 아닌 나한테 이 두 사람을 지켜달라고 하는 거야?’
곡은설이 절실한 눈으로 진무앙을 보며 말했다.
“선친께서는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진중효에게 다른 빚을 졌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 게 있었다면 숨길 분이 아니세요. 숨긴 채 돌아가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걸 모르실 분도 아니셨고요.”
“차용증이 위조된 것이라는 말이군요.”
“예. 진 호위, 그것이 가짜라는 걸 밝혀주세요. 루주님은 유 공자의 누명을 단 하루 만에 밝혀낸 당신의 능력이라면 이 의뢰가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찾은 것이고요.”
진무앙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곡은설과 위명신을 보았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선남선녀였다.
그의 눈길을 받은 곡은설이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기녀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직업이다.
곡은설처럼 이 직종의 정상에 오른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다.
그래야 손님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니까.
그녀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 호위의 생각이 맞아요.”
진무앙이 싱긋 웃었다.
“그럼 역시 두 사람은 연인관계라는 거죠?”
곡은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그녀의 대답에 위명신의 안색이 굳었다.
진무앙이 그에게 말했다.
“내 입은 무거우니까 비밀이 새어나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접어둬도 됩니다.”
위명신이 말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진 호위.”
잠시 그들을 보던 진무앙이 불쑥 말했다.
“나, 비싼 사람이라는 거 알죠?”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곡은설이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의뢰를 수락하는 건가요?”
“수락하죠. 대금은… 착수금 오십 냥, 실패했을 때는 더 받지 않을 거고, 대신 성공하면 보수는 돈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따로 받겠습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곡은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일게요.”
“거래 성립.”
말을 하며 진무앙은 활짝 편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곡은설이 눈을 깜박였다.
진무앙이 말했다.
“착수금. 줘야 일을 하죠.”
“아!”
곡은설은 궁장의 넓은 소맷자락에서 전낭을 꺼냈다. 그리고 오십 냥을 집어 진무앙에게 건넸다.
진무앙은 싱긋 웃으며 돈을 챙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대 소저, 몇 가지만 묻죠.”
“얼마든지요. 내가 아는 건 모두 이야기해 줄게요.”
“다른 건 위 호위에게 듣는 게 나을 것 같고… 그 위조되었다는 차용증에 찍힌 가문의 인장에 대한 것만 말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대 소저가 봤을 때 그 인장이 가문의 것과 얼마나 비슷했습니까?”
“육안으로는 진위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똑같았어요.”
“그 인장, 쉽게 위조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것은 여러 문양이 겹치고 또 그 속에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미세한 그림이 숨어 있어요. 그러니 위조하기도 힘들뿐더러 설령 위조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 눈까지 속일 수 없어요.”
“대 소저의 눈을 속일 정도로 완벽하게 위조되었다는 말이네요.”
“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 인장이 위조된 게 맞다면 전문가가 개입했다는 건데…….”
진무앙이 연이어 물었다.
“낙양에서 그걸 위조할 만한 재주가 있는 자가 있는지 들은 게 있습니까?”
기루는 시중의 정보가 모여드는 곳이다.
곡은설은 고개를 저었다.
“차용증을 본 후 저도 나름대로 알아보았지만 그만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찾아내지 못했어요. 아니, 있기는 했는데…….”
진무앙의 눈이 깊어졌다.
“그자가 누굽니까?”
“유득삼이라는 자예요.”
곡은설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를 의심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에요. 이미 죽은 지 오 년이나 된 사람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