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97
197 이번 생에 속죄하는 거지
늦가을의 햇살이 내리쬐는 수향루 후원.
강석초가 소소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밀전병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너 주라고 주방의 장 숙수가 챙겨주더라.”
전병을 받아 든 소소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작은 숙부님.”
부루퉁하게 입술이 튀어나온 강석초가 물었다.
“소소야, 너 혹시 백부라고 호칭을 변경할 생각은 없냐?”
소소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작은 숙부님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고요.”
“뭔 소리냐?”
아이는 전병을 한 입 베어 물며 대답했다.
“제가 작은 숙부님을 백부님이라고 부르면 진 숙부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잖아요. 그때는 작은 숙부님의 뱃살을 뜯거나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꽉 조이는, 그런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소소의 말에 흥분한 강석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흥! 소소야, 잘 들어. 내가 말이야. 알고 보면 엄청 센 남자거든! 언제까지 그 인간한테 당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착각하는 거야. 이번에 그 인간이 돌아오면 네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말겠어!”
소소가 또 해맑게 웃으며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응원하고 싶지만 결과가 눈앞에 아른거려 그러기가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강 작은 숙부님.”
“아으으으으…….”
강석초는 신음과 함께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소소야, 그처럼 예의 바르게 면전에서 사람 물 먹이는 거 누구한테 배운 거냐?”
대답은 다른 사람이 했다.
“누구긴 누구야, 너하고 무앙이지.”
언제 왔는지 난향이 강석초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소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배꼽인사를 했다.
“루주님, 오셨어요.”
난향은 담담한 눈으로 아이를 보며 옆에 앉았다.
강석초가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는 무슨 바람이 불어 온 거야?”
“널 보러 왔겠니?”
“그럼?”
“소소 보러 왔다.”
“저를요?”
난향이 차분한 목소리로 소소에게 물었다.
“아직도 왜 자진해서 그자를 쫓아간 건지 말할 생각이 없니?”
소소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루주님.”
난향은 장죽을 입에 물었다.
강석초가 소소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널 구하느라고 이 낭랑이 정말 개고생했다. 너도 그걸 모르지 않잖아. 그러니 이제는 무슨 사정인지 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소소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작은 숙부님.”
“어휴, 누구 닮아서 이렇게 쇠고집이냐…….”
난향이 강석초의 말을 끊으며 소소에게 물었다.
“무앙에게도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냐?”
“…….”
소소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아이의 얼굴엔 갈등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나는 네게 있었던 일을 그 사람에게 말할 거야. 숨길 수도, 숨겨서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니 너도 그가 돌아오기 전에 마음을 정해야 할 거야.”
난향은 소소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소소야, 너도 그의 성격이 어떤지 알지? 그는 자기 사람을 상하게 하는 놈은 자신과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남자란다.”
소소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진 숙부님 사람… 인가요?”
담담하던 난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영리한 아이가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었구나. 나는 그가 네 또래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어깨에 목말을 태우는 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강석초도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 인간… 우리 아홉 남매한테도 그래 준 적이 없었어……. 그렇게 매달렸었는데도…….”
소소의 눈에 물기가 방울방울 차올랐다.
난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아이에게 말했다.
“그 사람의 속내를 이해하기 어렵긴 하다만, 그에게 너는 굉장히 특별한 아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난향은 장죽을 입에 물고 돌아섰다.
걸어가는 그녀의 머리 위로 원을 이룬 연초 연기가 하나둘씩 떠올랐다.
강석초는 뻘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소가 흐르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훔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왜 우냐? 이 낭랑이 울 만한 소리를 한 거 같지는 않은데.”
“그냥요… 저절로 눈물이 나서…….”
그때 별채의 문이 열리며 이십대 후반의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소소를 찾은 장원에 강석초와 함께 있던 청년이었다.
강석초가 그를 보며 물었다.
“운상아, 어디 가냐?”
청년 호운상은 등에 봇짐을 메고 있었는데, 영락없이 먼길 떠나는 사람의 차림새였다.
강석초와 소소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되물었다.
“보면 몰라?”
그 대답에 강석초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너,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야. 누나하고 형, 각오하고 있으라구.”
강석초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운상아, 참아. 그러면 안 돼.”
호운상이 핏대를 바짝 세우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그가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큰누나하고 넷째 형, 그렇게 살면 안 돼. 저 아이가 아니었으면 대형이 여기 머물고 있다는 거, 나한테 끝까지 말 안 했을 거 아니냐고!”
말문이 막힌 강석초가 어버버거렸다.
“운상아… 그게… 알고 보면… 사정이 복잡…….”
“복잡할 게 뭐 있냐고! 대형이 여기 왔으면 즉각 나한테 연락을 해야 하잖아. 나도 그렇고, 다들 죽기 전에 대형 얼굴 한 번 보는 걸 소원 삼고 꾸역꾸역 살고 있다는 거 잘 알면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더는 안 되겠는지 강석초도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나하고 내가 그걸 몰라서 그랬겠냐, 이 자식아! 우리 남매 모두 모여들면 대형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우리가 귀찮다고 생각되면 그 인간은 백번은 야반도주를 하고도 남을 사람이야. 누나하고 난 매일 아침 그 인간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신경이 곤두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살았는지 네가 알아?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왜 너희한테 연락을 안 했겠냐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목에 동맥이 불거질 정도로 흥분한 그의 기세는 멧돼지처럼 거칠었다.
하지만 호운상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흥!”
코웃음을 친 호운상이 말을 이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천잠사와 교룡의 힘줄로 밧줄을 엮어서 대형의 다리를 꽁꽁 묶어놓으면 돼.”
“말 같은 소리를 해, 이 자식아. 그 인간을 잘 알면서 그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따위 밧줄, 그 인간은 눈 깜박할 사이에 가루로 만들 거다.”
“그게 안 통하면 우리가 대형의 사지를 하나씩 붙들고 늘어지면 되지. 막내는 등에 찰떡처럼 붙어 있고. 설마 대형이 우리 모두를 가루로 만들기야 하겠어?”
“장난하냐?”
호운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형은 내 말이 장난 같아?”
“어휴… 이 귓구멍에 말뚝 처박은 자식이…….”
“흥!”
코웃음과 함께 호운상이 소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졌다.
“꼬마야, 너한테는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어른 둘이 핏대를 세우며 하는 말싸움이었다.
끼어들어 말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 있던 소소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 저한테요?”
“응, 너. 네가 납치당한 건 불행한 일이긴 해. 하지만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 인간들은 지금까지도 나한테 대형이 여기 머물고 있었다는 걸 말하지 않았을 거야. 고맙다.”
맞장구치기 참 애매한 감사인사였다.
“아… 아… 예… 에에…….”
강석초가 한탄했다.
“누나가 너한테 연락하라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넷째 형, 후회할 걸 후회해. 그랬으면 제 시간에 소소를 찾지 못했을 거야.”
호운상의 말이 맞았다.
그는 소소의 인피면구를 제작해 달라고 의뢰했던 상관무외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소를 찾는 작업이 그처럼 빠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운상이 걸음을 떼며 강석초에게 말했다.
“형, 갈게. 너무 기다리지는 마. 전부 찾아서 데리고 올 거라 몇 달 걸릴 거야.”
“누나한테 인사는 하고 가.”
호운상이 강석초를 째려보며 말을 받았다.
“속보여. 형이 이렇게 길길이 뛰는데 누나가 퍽이나 나를 보내주겠다.”
“…….”
찔끔한 강석초가 말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호운상이 떠났다.
강석초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시 소소의 옆에 공처럼 쭈그리고 앉았다.
“큰일났다. 저 자식… 진짜 전부 데리고 올 모양이야…….”
소소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작은 숙부님, 형제가 여러 분이세요?”
“응. 좀 많다. 모두 아홉이야.”
“와! 그분들이 전부 여기로 오시는 거예요?”
“응.”
“전부 모이는 게 싫으세요?”
“싫기는… 모이면 즐겁고 재미있긴 하지…….”
“형제분들이 모이면 진 숙부님이 떠나실까 봐 걱정되는 거예요?”
“응.”
말을 잇는 강석초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 인간은 식구가 생기는 걸 어마어마하게 싫어해. 누군가 자신을 따르면 기를 쓰고 도망을 가고…….”
소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걸까요?”
강석초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앙은 기를 쓰며 자신은 절대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그 인간은 정이 너무 많아. 책임감도 너무 강하고… 그래서 애당초 그런 게 생길 수 있는 인간관계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해…….”
“아……!”
탄성을 토하며 소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강석초의 말이 너무 잘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석초와 소소는 물끄러미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소가 물었다.
“진 숙부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요?”
“글쎄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
“그게 뭔데요?”
“어떤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을 거라는 거.”
“아…….”
“그 인간 눈에 띄었다면, 그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극악무도한 악녀였을 거다. 무앙을 만난 걸로 이번 생에 속죄하는 거지.”
눈이 동그래진 소소가 물었다.
“그럼 루주님도 전생에 악녀였던 거예요?”
급당황한 강석초가 난향의 거처를 힐끔거리며 소소의 귀에 속삭였다.
“이 낭랑은 예외야!”
수향루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호북성과 하남성을 잇는 관도.
길을 가던 금설화가 손가락으로 귀를 어루만졌다.
옆에서 귀를 후비며 터덕터벅 걷던 진무앙이 그녀에게 물었다.
“금 소저도 귀가 간지러워요?”
“소협도 그래요?”
진무앙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예. 아무래도 누가 우리를 쌍으로 욕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럴 리가 있어요. 귀 가려울 때는 꼭 내 욕을 하는 놈이 있다는 건 진리거든요.”
“저는 진 소협과 함께 욕먹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잖아요.”
“금 소저가 뭘 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저를 욕하고도 남을 인간이 있어요.”
금설화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있다니까요. 석초라든지… 석초라든지… 석초라든지! 분명 그 자식일 거야.”
멀리 작은 마을이 보였다.
낙양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에 진무앙은 하남 땅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