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01
201 또 튀려고?
수향루 후원 별채 앞.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을 쓰고 있던 소소의 작은 몸이 죽립을 쓴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졌다.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은 매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아이의 얼굴은 꽃이 피어나듯 순식간에 환해졌다.
소소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숙부님!”
죽립을 벗어 든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맹아,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기에 사람이 접근하는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하냐.”
“숙부님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를?”
“예. 언제쯤 오실까…….”
“기다린 거냐?”
“예.”
“그래…….”
진무앙은 어색하게 말을 받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크고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
가슴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아득한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다니고,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다.
그걸 모르지 않음에도 그는 사람들의 바람에 관심을 기울였던 적이 없었다.
관심은커녕 작은 흥미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소소의 말이 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소소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게…….”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그때 뒤늦게 나타난 강석초가 대신 대답했다.
“일이 있긴 있었지. 그런데 그건 나중에 이 낭랑한테 들어. 소소한테 먼저 들을 이야기는 아니니까. 우선 씻고 좀 쉬어. 저녁에 이 낭랑이 부를 거야.”
진무앙이 미간을 찡그리며 강석초를 돌아보았다.
강석초의 어조에서 미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가 물었다.
“평범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맞아. 평범한 일이 아니었어.”
강석초의 대답을 들은 진무앙은 바로 왔던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강석초가 그에게 물었다.
“난향한테 가려고?”
“응.”
“저녁에 부를 거라니까.”
“기다리다 목 빠지느니 지금 가서 듣는 게 낫다.”
“어휴, 그럼 씻고나 가든지.”
“먼지도 붙지 않는 몸인데 씻으나 안 씻으나 무슨 차이겠냐.”
진무앙이 소소와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꼬맹아, 루주한테 다녀오마. 못다 한 이야기는 그때 하자.”
“다녀오세요, 숙부님.”
소소는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진무앙은 휘적휘적 난향의 거처로 멀어져 갔다.
그의 넓은 등을 보며 강석초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머리하고는…….”
소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강 소숙, 진 숙부님이 루주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한테 화를 많이 내시겠죠?”
강석초는 입맛을 다셨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겠지만… 너한테는 잘 모르겠다…….”
소소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강석초가 짐짓 밝은 어조로 말했다.
“소소야, 무앙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는 인간이라 미리부터 걱정하는 건 아무 소용없어. 그러니까 닥쳤을 때 생각하자.”
“예…….”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별채에 들어갔다.
* * *
난향의 거처.
“왔어?”
“응. 왔어.”
진무앙은 탁자 위에 암월도를 내려놓았다.
턱.
그리고 난향의 맞은편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난향이 입에 물고 있던 장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소한테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네.”
“석초가 운은 떼더라.”
“운만?”
“응. 자세한 건 네가 말해줄 거라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난향은 진무앙에게 선선히 소소의 납치사건에 대해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각 동안 계속된 이야기가 끝이 났다.
난향의 눈가에 긴장된 기색이 떠올랐다.
진무앙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들어올 때와 완전히 다르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팔짱을 낀 그의 눈빛은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난향은 속으로 침을 삼켰다.
그녀는 세상에서 진무앙이라는 남자를 가장 잘 아는 여자였다.
당연히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인지도 금방 알아차렸다.
진무앙이 낮게 중얼거렸다.
“동창의 첩형이 납치를 실행하고, 권왕 석문의의 무공을 익힌 놈은 너한테 두들겨 맞은 그를 구해 사라졌다 이거지…….”
“맞아.”
“놈들에 대한 추적은?”
“석초가 그 일 이후 상관무외의 행방을 추적했는데 아직 찾지 못했어. 황도에는 가지 않은 것 같고, 동창에서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나라의 녹을 먹는 놈이 행방불명이라… 그것도 동창의 첩형씩이나 되는 놈이…….”
동창은 황제 직속의 무소불위 권력 기관이다.
그리고 첩형은 동창 내에서 수뇌인 제독동창 외에는 윗사람이 없는 고위직이다.
그런 자의 행방을 내부인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진무앙이 난향에게 물었다.
“네가 말한 섭가장의 상황을 보면, 소소가 제 발로 상관무외를 따라간 것 같은데?”
난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소는 아직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지만, 정황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소소를 찾았을 때 납치 전에는 없던 물건을 갖고 있지 않았어?”
진무앙의 질문에 난향의 눈빛이 강해졌다.
“못 보던 자수정 팔찌를 차고 있기는 했는데… 당신은 소소가 그 기이한 능력으로 팔찌에서 뭔가를 보고 제 발로 상관무외를 따라갔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이에게 확인해 봐야겠지.”
진무앙이 난향을 똑바로 보며 그녀를 불렀다.
“난향.”
그 한 마디에는 항거할 수 없는 막강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난향은 물 흐르듯 일어나 진무앙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예, 진 대가.”
“석초에게 놈들의 추적에 신중을 기하라고 전해라. 이번 일에 개입한 놈들의 정체가 심상찮다.”
“걱정되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권왕 석문의.”
“소첩이 상대한 자가 그의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십초 안에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놈이 문제가 아니다.”
“그럼……?”
“권왕 석문의는 십만마교 출신이었다. 그의 무공이 무림에 재등장했다면 배후에 십만마교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진무앙의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옆에서 벼락이 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큼 담대한 난향의 안색이 확 변했다.
“진 대가… 십만마교… 라 하신 거예요……?”
“그렇다. 석문의 때문에 나와 그들 사이엔 악연이 좀 있다.”
십만마교.
그것은 마도 무림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라 주장하지만, 강호상에 한 번도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는, 그래서 전설과 신화라 불리는 마도총본산의 이름이었다.
“그곳이 정말 존재하는 곳이었단 말씀이세요?”
“존재한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죄송해요. 소첩이 어리석어 대가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네가 어리석은 게 아니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말만으로 십만마교의 실체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곳은 이 세계의 경계를 신기루처럼 떠도는 곳이니까.”
“…….”
“십만마교는 천산마교와 함께 마계에서 뻗어 나온 양대마맥 중 하나다. 그들은 실과 바늘처럼 서로에게 반응하며 움직이지. 그러니 십만에서 사람이 나왔다면 천산도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난향의 눈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가득찼다.
그녀는 진무앙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십만마교는 이름이라도 들어봤지만, 천산마교는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 두 이름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거기에 더해 마계라니…….
말을 하는 사람이 진무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당장 장죽을 휘둘렀을 것이다.
“아직 석문의의 무공을 익힌 자가 십만마교에서 나왔다는 게 확인되지 않은 이상 네가 깊게 알 필요는 없다. 알아봤자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도 아니고. 만약 네가 정말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 말해주마.”
진면목을 드러낸 진무앙의 말에 토를 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향은 가슴에 의문이 산처럼 쌓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녀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만약 대가께서 언급한 그자들이 소소의 납치와 연관되어 있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난향은 진무앙의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소리 없이 미소 짓는 그의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흰 이가 드러났다.
그가 말했다.
“모두 죽인다.”
한순간, 공포스러운 살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진 대가…….”
난향은 감히 그의 미소를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바닥에 이마를 댔다.
“내가 흥분했군. 미안하다, 난향. 일어나거라.”
그의 말과 함께 살기가 천천히 스러졌다.
“가겠다.”
진무앙이 일어섰다.
따라 일어서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깜박이며 진무앙에게 말했다.
“참, 진 대가, 몇 달 뒤에 아이들이 이곳으로 올 거예요.”
진무앙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이들? 누구를 말하는 거냐?”
“소소를 찾을 때 운상이의 도움을 받았어요.”
“허걱!”
진무앙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막강한 기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섯째가 여기 왔었다고?”
난향의 분위기와 말투도 단숨에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그래. 당신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면서 떠났어.”
진무앙은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럼 여기 아홉이 다 모일 거라는 말이야?”
“싫어?”
“아니… 뭐… 싫다는 게 아니고…….”
“또 튀려고?”
“으으으…….”
“무앙, 이번에도 튈 거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그건 또 왜?”
“애들이 전부 자기 시체를 밟고 가라고 할 테니까.”
진무앙은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흐느적거리며 방을 나가는 그의 발걸음엔 힘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후원 별채 진무앙의 방.
진무앙과 소소는 침상 위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소소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꼬맹아.”
“예, 숙부님.”
“루주에게 네가 납치되었던 사건을 들었다.”
그의 말에 소소의 안색이 흐려졌다.
“왼쪽 소매 걷어봐라.”
아이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거부하지 않고 소매를 걷었다.
고풍스러운 양식의 자수정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거, 납치범이 준 거 맞지?”
“예.”
“그것에서 본 것 때문에 네가 놈들을 따라간 거고?”
“…예.”
“무얼 본 거냐?”
순순히 대답하던 소소의 입술이 조가비처럼 꼭 다물렸다.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소의 입을 보며 진무앙이 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거냐, 아니면 말을 할 수 없는 거냐?”
“…죄송해요, 진 숙부님.”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또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널 돕지 못할 수도 있어.”
소소의 눈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아이의 양 뺨이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을 보는 진무앙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소소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꼬맹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이야기해라. 내 귀는 항상 열려 있으니까.”
“예, 숙부님.”
“가봐.”
소소가 배꼽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진무앙은 팔베개를 하고 벌러덩 누우며 중얼거렸다.
“개새끼에 환우십병, 거기에 이제는 마계와 십만, 천산마교까지……. 이 정도면 진짜 지랄이 풍년이로구나, 풍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