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03
203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
막 정오가 지났을 즈음, 수향루 별채.
우다다다다다-
구르듯이 복도를 뛴 강석초가 진무앙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앙!”
사냥당한 호랑이 가죽처럼 침상에 큰대자로 엎드려 뒹굴거리던 진무앙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석초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꼬리에 불붙은 새끼돼지처럼 굴러다니냐?”
단숨에 침상까지 달려가 걸음을 멈춘 강석초가 말을 받았다.
“인간아, 너 솔직하게 말해봐! 낙양으로 오는 동안 금설화하고 만리장성 쌓았지? 그렇지?”
진무앙이 눈썹을 찡그리며 귀를 후볐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돼지 허파에서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냐? 내가 걔하고 왜 자? 걔가 적산이 손녀라고 내가 했던 말 잊었냐?”
“그런데 왜 걔가 여길 찾아오냐고!”
놀란 진무앙이 용수철이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설화가 루에 왔다고?”
“그래, 소민인가 하는 여종하고 같이. 지금 별채로 오고 있는 중이야.”
“헉! 난향은?”
“이 낭랑도 당연히 보고를 받았지.”
“으으으…….”
진무앙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강석초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걔하고 안 잔 거 맞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 새끼야!”
버럭 소리를 지른 진무앙이 난향의 거처를 보며 중얼거렸다.
“난향이 오해하면 큰일인데, 걔하고는 정말 안 잤는데…….”
진무앙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자 강석초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거짓말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진무앙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남자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가 물었다.
“그럼 걔가 여긴 왜 온 거야?”
“난들 알겠냐.”
“걔한테 본 얼굴 보여줬어?”
“당연하지. 루 밖에서는 인피면구 벗어도 돼. 그건 처음 호위무사 계약할 때 난향도 뭐라 하지 않기로 했다고.”
“그럼 걔도 다른 여자들처럼 너한테 홀려서 온 건가?”
“내가 여우냐? 그리고 설화의 남성관은 좀 특이해서 걔는 생긴 건 안 보는 것 같더라.”
강석초의 눈이 커졌다.
“응? 그럼 네 얼굴이 안 통했단 말이야?”
“그래, 새끼야.”
“우와… 세상에 그런 여자도 있었구나…….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해…….”
“하, 듣다 보니 어이가 없네. 너 지금 내 앞에서 나이 먹었다고 자랑하는 거냐?”
“…….”
강석초가 대꾸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열려 있는 문밖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먼저 들어온 건 소소였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진무앙에게 말했다.
“숙부님, 손님 오셨어요.”
그런 소소의 뒤로 면사를 쓴 금설화와 소민의 모습이 보였다.
“진 소협! 저 왔어요!”
소민은 반가운 표정으로 진무앙에게 손을 흔들었고, 금설화는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진 소협, 동행할 때는 사정이 있어서 신분을 밝히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만금산장주 금 자에 진운이라는 이름을 쓰시는 분의 딸, 금설화예요.”
진무앙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금설화의 태도는 헤어질 때와는 딴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경우,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사마천웅한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 어디까지 들은 거지? 그 자식이 나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전부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의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겼다.
방으로 들어온 금설화가 갑자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소협, 도와주세요.”
진무앙은 인상을 찡그렸고, 강석초와 소소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와 금설화를 번갈아 보았다.
방 안의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금 소저, 일어나요.”
진무앙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지만 금설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어요.”
“나는 금 소저가 일어나서 이야기해도 잘 듣습니다.”
그래도 금설화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진무앙이 혀를 차며 말했다.
“고집 센 아가씨네. 여기 내 방인데, 손님이 주인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금설화가 말을 받기 전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앙의 말이 맞아요. 그리고 그런 행동은 저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그는 애걸한다고 부탁을 들어주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니까.”
말을 한 사람은 난향이었다.
소리도 없이 문앞에 나타난 그녀를 본 진무앙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난향, 절대 오해하지 마. 금 소저가 여기 온 거, 난향이 생각하는 그런 일 때문이 아니야.”
난향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뭘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그게…….”
진무앙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으로 들어온 난향은 의자에 앉았다.
“당신의 여자관계가 동서고금에 유래가 없는 개막장이어도 금 대인의 후손에게까지 마수(?)를 뻗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 식은땀 닦고 앉아.”
안도의 한숨을 쥔 진무앙이 의자에 앉았다.
금설화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일어나 난향에게 허리를 숙였다.
“만금산장의 금설화라고 합니다, 이 루주님.”
“날 아는 모양이군요.”
“오기 전에 사마세가에서 루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어요.”
“앉아요. 일단 어떤 사정인지부터 들어야 할 것 같네요. 돕고 안 돕고는 그다음에 결정할 문제고요.”
고민하던 금설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듣고만 있던 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리며 난향에게 딴지를 걸었다.
“난향, 나는 쟤가 끌어안고 있는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아.”
“왜?”
“저 집안과의 인연은 적산이가 죽으면서 끝났어. 너도 알잖아.”
“당신이 끝났다고 하면 아무리 깊은 인연이라도 썩은 실처럼 그냥 끊어지는 거야?”
“새삼스럽긴. 당연한 거 아냐?”
“과연 그럴까? 나는 당신이 결론부터 내리지 말고 일단 금 소저의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해.”
“나, 돌아온 지 하루밖에 안 됐어. 오자마자 어제저녁 근무에 투입되었고. 쟤가 하는 일을 맡으면 또 얼마나 객지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그래도 괜찮아?”
난향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신… 떠돌아다니기 싫다는 거야?”
진무앙은 움찔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 뭐… 싫다기보다 그동안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니까 나도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거지.”
“당신은 쉬나 안 쉬나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많이 섭하지. 알고 보면 나도 연약한 남…….”
난향이 그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금설화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봐요. 저 사람이 듣지 않으면 나라도 들을 테니.”
난향과 눈이 마주친 금설화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그녀는 난향과 진무앙의 대화를 들으며 심한 충격을 받았다.
고금팔대고수의 일인이자 살아 있는 신화라고 불리는 암천광무존을 쥐락펴락하는 여자가 있다니.
코앞에서 직접 보고 들었는데도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신비로운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겠다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였다.
금설화는 살짝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감사합니다, 루주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오 년 전 고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산장의 업무에서 거의 손을 떼셨어요. 십 년 전 어머니를 잃으시고 오 년 만에 고모까지 떠나자 세상사에 흥미를 잃으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대신해서 산장의 모든 업무를 처리해 왔어요. 이 년 전 아버님이 복귀하시기 전까지요.”
방에 있는 모든 사람, 난향과 강석초, 소소는 물론이고, 어느새 슬쩍 들어온 타라와 아르다반, 진소혜까지 그녀의 입을 주시했다.
“아버님이 복귀하신 후 일에 파묻혀 사셨어요. 얼마나 바쁘게 생활하시는지 열흘에 한 번 뵙기도 어려웠죠.”
난향이 물었다.
“소저는 완전히 산장의 일에서 손을 뗀 건가요?”
“아니요. 저는 산장의 재정관리를 맡았어요. 제가 수에 밝다는 건 아버님도 인정하시거든요. 그런데 한 달 전쯤 저는 아버님에게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어떤 문제였죠?”
“아버님은 누군가에게 정신을 제압당해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계셨어요. 아버님이 ‘사자’라는 자에게 지시를 받는 장면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어요.”
난향은 물론이고 진무앙까지 안색이 변했다.
진무앙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진운의 정신이 제압당하다니. 금가에 대를 이어 전해지는 항마력은 내가 적산에게 전한 수법이다. 일반 강호의 정신금제술로는 절대로 그걸 깨뜨리지 못한다.”
금설화의 눈매가 정신없이 떨렸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반존대를 하던 진무앙이 반말을 했다.
게다가 그 말의 내용은 자신이 암천광무존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설화는 벌떡 일어나 다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금적산의 손녀, 미천한 금설화가… 위대하신 무존 조사야를 뵙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사지가 펴졌고, 강제로 의자에 앉혀졌다.
“난 그런 예의를 좋아하지 않아. 하던 말이나 계속해라.”
“그 장면을 본 후 저는 산장 전체를 은밀하게 조사했어요. 그리고 세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냈어요.”
“그게 뭐냐?”
“아버님이 수족으로 부리는 측근 중 오 할 이상이 이미 외부인으로 채워졌다는 것과 산장의 재산 중 삼 할 가까운 삼천만 냥이 은밀하게 외부로 반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움직임을 주도하는 게 화산파라는 것이었어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제국의 일 년 예산이 은자 사천에서 오천만 냥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제국 예산의 절반이 넘는 막대한 돈을 산장 외부로 빼돌린 것이다.
길게 숨을 내쉰 금설화가 말을 이었다.
“저는 그것들을 파악한 후 자력으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적은 이미 아버님과 산장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제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너무 좁았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외부로 눈을 돌려야만 했어요.”
“그러다 나를 찾아냈다는 거냐?”
“예… 저는 몇 달 전 사마세가에서 발생한 우환을 조사하다가 무존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사마 백부님께 무존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애원하기 위해 낙양으로 온 거예요.”
금설화가 간절한 눈으로 진무앙을 보며 애원했다.
“무존, 제발 아버님을 구해주세요.”
말없이 팔짱을 끼는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난향이 그에게 물었다.
“금 소저의 손을 잡을지 말지 갈등하는 거야?”
진무앙이 말을 받았다.
“갈등까지야…….”
“그래? 당신의 대답은 뭐야?”
기대에 부푼 금설화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진무앙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안 잡아.”
금설화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난향이 물었다.
“왜?”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 일들이 많은데 끊어진 인연까지 다시 이으면서 일 더미에 파묻히고 싶지 않다.”
“이기적인 인간.”
“새삼스럽지도 않은 욕이네.”
“그런데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응? 뭔 소리야?”
눈을 껌벅거리며 묻는 진무앙의 질문에 난향은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금진운의 정신을 장악할 능력을 가진 적이 왜 금 소저는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궁금하지 않아? 그녀의 정신도 장악하면 일이 굉장히 수월했을 게 뻔한데 말이야.”
“너무 어려서…….”
대답하던 진무앙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가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고 했던 것을 난향이 지적하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난향, 그건 말 하지 마.”
“흐흐흥!”
난향이 기묘한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금 소저는 그 물건의 가치를 모르는 것 같은데 모른 척 넘어가는 건 반칙이야.”
난향이 금설화에게 물었다.
“금 소저, 검은 진주처럼 생긴 물건이 포함된 장신구를 갖고 있죠?”
눈이 커진 금설화가 되물었다.
“루주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제게 물려주신 건데…….””
“호호호, 보여줄래요?”
금설화는 목에 걸고 있던 금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 중앙엔 손톱만 한 크기의 검은 구슬이 달려 있었다.
그걸 본 강석초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흑암주잖아!”
난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건 무앙이 금 대인에게 준 거야. 너도 알잖아. 흑암주의 항마력은 어떤 정신금제도 깨뜨리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걸. 그래서 금 소저가 적에게 정신을 장악당하지 않은 거야.”
그녀가 진무앙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앙, 이제 갈등할 필요 없지?”
진무앙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흑암주의 주인은 그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 요구를 할 수 있다.
그 규칙을 만든 건 바로 그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