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05
205 다녀올게
다음 날 아침.
“으음…….”
진무앙은 품을 파고드는 난향의 부드럽고 탄력 넘치는 기척에 눈을 떴다.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눈처럼 흰 목선과 가녀린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시도 때도 없이 장죽만 휘두르지 않으면 천하를 탈탈 털어도 난향에 비길 만한 여자는 없는데…….”
말을 하던 진무앙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어느새 눈을 뜬 난향이 그의 가슴을 인정사정없이 꼬집은 것이다.
그녀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말했다.
“맞을 짓을 하니까 휘두르지.”
진무앙은 즉각 그녀의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당신은 늘 할 말이 없으면 입을 맞추지.”
“헉! 알고 있었어?”
“당신은 읽기 쉬운 남자니까.”
“정말?”
“농담이겠어?”
“아아… 난 신비를 둘둘 휘감은 남자여야 하는데…….”
“신비? 여자들 마음 아프게 하는 데 아니면 쓸 데도 없는 그런 건 빨리 내다 버려.”
“누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누구긴 누구야, 당신이지.”
“눈 뜨자마자 구박이냐?”
진무앙이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아아… 지난밤 운우지정이 한낱 어느 가을밤의 꿈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의 과장된 표정과 말에 난향이 곱게 눈을 흘겼다.
“자꾸 흰소리할 거야?”
“쩝…….”
“당신, 암혼 꺼내지 마.”
“…….”
“제발 내가 하는 말을 잔소리로 듣지 좀 마. 그걸 자꾸 꺼내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 잘 알면서…….”
진무앙은 말없이 난향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도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자신도 걱정하는 부분이었으니까.
그의 또 다른 모습인 암혼은 혼돈지력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소환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상상을 불허하는 힘을 발휘하는 존재인 만큼 암혼 소환에는 커다란 대가가 따랐다.
그 대가는 암혼이 소환될 때마다 진무앙의 마음이 암혼의 것에 조금씩 잠식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긴 세월 동안 가능한 암혼을 소환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그의 성정은 보통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특히 생명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서 말이다.
난향이 물었다.
“무한에서 암혼의 몇 단계를 개방한 거야?”
거짓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계.”
“독고운진이 되돌린 거야?”
“응.”
“그 사람도 고생했겠네.”
“웬일이냐? 네가 그놈을 다 인정하고.”
“그 몸으로 당신에게 입맞춤하려고 달려들다가 두들겨 맞는 게 상상이 돼서. 얼마나 끔찍했을까…….”
“내가 더 끔찍했거든!”
난향이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무앙,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암혼을 꺼내는 걸 그렇게 꺼리는 당신이 그것을 소환했다는 건, 해결할 방법이 그것뿐이었다는 말이잖아.”
“뭐…….”
“그게 어떤 일이든, 안 할 수는 없어?”
“…좀 복잡해. 그래서 나도 아직은 사건의 전체 윤곽을 잡지 못했다.”
“암혼을 소환하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일인 거지?”
“암혼 없이는 힘들 거야.”
“그 일을 하다가 삼단계를 개방할 가능성도 있어?”
“몰라.”
“부정을 하지 않는 걸 보니까 가능성이 있나 보네…….”
“여러 개의 사건이 꽤 어지럽게 꼬여 있어서…….”
“내가 옆에 없을 때는 절대로 삼단계 개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나 없이 그러면 다시는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잖아.”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약속할게.”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뭘 하든 네가 모른 척해줬으면 좋겠다. 너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무앙, 그건 날 위하는 게 아니야.”
“쳇,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진무앙은 혀를 차며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향이 세상사에 깊이 개입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녀는 그냥 원하는 대로 평범하게 살았으면 했다.
대혼돈 시대, 유래가 없는 난세였던 만큼 그것을 헤쳐나오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수없이 부서졌었다.
이제는 평범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옆에 있으면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아무리 멀리하려고 해도 풍파란 놈은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와서,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태풍처럼 그를 몰아치고 있었다.
‘풍파무쌍…….’
난향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풍파에 휘말리는 걸 보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가 그녀를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기를 반복했지만, 또 그 횟수만큼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도 반복되었다.
진무앙이 일어나 앉았다.
이불을 끌어안으며 난향이 물었다.
“가려고?”
“응. 금설화와 소민이 올 시간이야.”
“배웅 안 할 거야.”
“기대도 안 했다.”
진무앙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일어났다.
“다녀올게.”
“응.”
진무앙이 방을 나갔다.
난향은 이불을 전신에 두르고 일어나 천천히 창 쪽으로 걸어갔다.
별채로 향한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진무앙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을 보는 난향의 눈에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 * *
정오가 다 되어갈 무렵 면사로 얼굴을 가린 두 여자가 동부대로에 있는 만금산장 낙양 분점의 문을 나섰다.
금설화와 소민이었다.
소민이 갸우뚱하며 금설화에게 물었다.
“아가씨, 우리 위치가 노출될 게 뻔한데 왜 진 소협은 분점에서 돈을 찾으라고 했을까요?”
“글쎄… 그분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니…….”
소민은 더욱 궁금하다는 눈으로 연이어 물었다.
“아가씨는 진 소협의 정체가 뭔지 아시는 거죠?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금설화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안 돼.”
“칫, 섭섭해요. 저만 쏙 빼놓고…….”
소민의 입술이 댓 발 나왔다.
수향루의 별채에서 금설화가 진무앙과 대화를 나눌 때 소민은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복도에 머물렀다.
덕분에 진무앙의 정체를 비롯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은 듣지 못했다.
금설화는 삐친 소민을 다독이며 분점 맞은편의 작은 다루로 갔다.
입구 앞의 노상엔 진무앙과 소소, 그리고 타라, 아르다반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낮의 다루인데도 진무앙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독한 화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잔에 술을 따르는 역할은 타라가 맡았고.
의자에 앉은 금설화가 진무앙에게 전표 하나를 내밀었다.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높다는 만금산장이 발행한 은자 일천 냥짜리 전표였다.
진무앙은 지체 없이 그것을 받아 킁킁 냄새를 맡으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거액의 전표 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군. 변방의 국가 간 국지전 때 외에는 이 정도의 대금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금설화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 소협, 굳이 의뢰 대금을 요구하시는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나는 전문 용병낭인입니다. 내 사전에 무보수 의뢰 수행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두 사람의 호칭은 평범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둘이 있는 밀실도 아니고 거리에서 자신의 진정한 신분이 드러나는 ‘무존’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걸 진무앙이 허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의 대답에 금설화는 곤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의 정체를 아는 그녀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은자 일천 냥은 평범한 사람은 구경하기도 힘든 거액이었다. 하지만, 그건 진무앙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금설화의 할아버지 금적산은 그녀가 네 살 때 죽었다.
천재인 그녀는 당시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가 죽기 전 부친인 금진운과 자신에게 했던 마지막 유언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만금산장의 모든 것은 무존의 것이다. 우리 금가는 그분의 재산을 관리하는 종일 뿐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그분이나 암천풍운패를 소지한 사람이 왔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재산을 늘리는 일에 절대 소홀해서는 안 된다.”
금적산은 유언에서 ‘종’이라는 단어를 썼다.
즉, 진무앙은 만금산장과 금씨 가문이 모셔야 할 주인인 것이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눈곱만치도 없는 진무앙은 전표를 아르다반에게 건넸다.
“덩치야, 이거 잘 보관해. 어디 흘리면 죽을 줄 알아.”
아르다반이 헤벌쭉 웃으면서 전표를 받았다.
“예, 진 호위님”
진무앙은 이번 섬서행에 소소를 데려가기로 결정한 후 타라와 아르다반도 동행하기로 했다.
그가 늘 붙어 있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때는 아이를 경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민이 진무앙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 소협, 이렇게 전표를 찾으면 산장에서 우리의 위치를 곧 알게 될 거잖아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그러라고 한 거야.”
“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그 자식들이 잘 찾아올 거 아니냐. 그래야 내가 놈들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될 거고.”
“……예?”
소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도 진무앙의 무공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만금산장과 화산파의 연합 세력이었다.
그런 강대한 적을 일부러 불러들이겠다니.
소민은 진무앙이 혹시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금설화와 타라, 아르다반은 물론이고 소소조차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탁자에 올려놓았던 죽립을 쥐고 일어서던 진무앙이 미간을 찌푸렸다.
면사가 달린 죽립을 쓴 젊은 여자가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죽립 여인이 그에게 말했다.
“진 호위, 오랜만이군요.”
그녀는 하오밀문 낙양 목주인 석채은이었다.
“바쁩니다.”
심드렁하게 대꾸한 진무앙은 죽립을 눌러 쓰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누가 봐도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 홀대에 굴한다면 석채은이 아니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그녀가 말했다.
“구화산과 무한에 다녀왔다면서요? 들리는 이야기가 아주 파란만장하던데요.”
“어떤 놈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다 구랍니다.”
“그래요?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아서 진짜인 줄 알았는데, 아쉽네요.”
“나는 석 목주에게 할 얘기 없는데, 이제 각자 갈 길 가죠.”
“어쩌죠? 난 아직 진 호위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았거든요.”
“속이 풀릴 때까지 벽 보고 얘기하는 걸 추천합니다.”
“예전에 그 방법을 써봤는데 속이 풀리기는커녕 더 쌓이기만 해서 이제는 안 해요.”
석채은이 영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별수 없이 진무앙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마주 섰다.
“용건이 뭡니까?”
“이번 길, 나도 진 호위와 동행하게 해줘요.”
석채은이 서너 걸음 떨어져 있는 금설화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산장의 의뢰를 받았다면서요?”
말하는 투로 보아 벌써 금설화의 신분이 그녀의 귀에 들어간 듯했다.
진무앙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싫습니다.”
단호한 거부.
하지만 석채은은 이미 그런 답변을 예상하였던 듯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석채은이 진무앙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속삭였다.
“산장에서 반출된 자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진무앙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별로요.”
석채은이 실망한 듯 안색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관심을 보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해도 거절하니 어쩔 수 없군요. 포기하는 수밖에.”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석채은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아쉽네요. 그 돈은 검후와 모종의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진무앙의 안색이 확 굳었다.